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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년 1월호

崔元碩과 동아

한국인의 突貫정신이 리비아 大水路 공사 성공시켜

글 : 崔元碩 전 동아그룹 회장  
정리 : 白承俱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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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수로 공사, 100억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
⊙ 대천 방조제 공사에 어선 11척 동원해 물막이 공사 완공
⊙ 국토개발의 核心인 동진강 간척공사·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

崔元碩
⊙ 1943년 대전 출생
⊙ 이화여대사대부고 미국 조지타운大ㆍ한양大 졸업
⊙ 동아건설ㆍ대한통운 사장, 대전MBC 대표이사 회장, 동아생명 회장, 공영토건 관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장, 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 대한건설협회장,
    동아그룹 회장 역임. 현 동아방송예술대학 이사장.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 대형 트럭이 송수관을 매립지 현장으로 옮기고 있다.
  동아그룹은 1970년대 ‘중동 붐’을 이끌었고, 1980년대 리비아 대수로(大水路) 공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대한민국 건설사(史)에 큰 획을 그은 ‘대작(大作)’이었다. 그룹 모체였던 동아건설은 공사 비용(1·2단계) 10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를 성공리에 완성했다.
 
  대수로 공사의 본질은 콘크리트 관(管)을 만들고 이를 운반해 매설하는 작업이었다. 동아그룹은 대수로 공사의 3대 요소인 관생산(동아콘크리트), 관운송(대한통운), 관매설(동아건설)을 담당했던 3개 회사를 갖고 있었다.
 
 
  “동아그룹은 대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업”
 
동아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1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전화통신공사를 수주했다. 1977년 사우디를 방문해 당시 칼리드 국왕과 악수하고 있는 34세의 최원석 회장.

  1982년 5월, 리비아 대수로청(GMRA) 부위원장 누리 시누시(Nuri Senussi)를 포함한 4명의 대표단은 한국을 방문해 동아건설, 동아콘크리트 및 대한통운을 면밀히 시찰한 후 이렇게 말했다.
 
  “옷감부터 단추까지 다 있고 재단까지 하는 양복점에 온 것 같다. 동아그룹은 대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업 같다.”
 
  1983년 11월 6일, 나는 트리폴리의 알 카빌호텔에서 리비아 대수로청 망구시(Mangoush) 장관과 정식계약을 체결했다. 이날 계약식에는 김성배 건설부장관이 참석했다. 단일 토목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를 동아건설이 수주할 당시의 환호와 충격은 지금도 내 가슴속 깊숙이 남아 있다. 대수로 공사는 그해 세계 10대 뉴스로 뽑혔다. 이로 인해 ‘동아건설’은 전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총 5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공사 목적은 리비아 동남부와 서남부 내륙 지하에 매장돼 있는 35조t의 풍부한 수자원(나일강의 200년 유수량)을 취수(取水)한 후, 대형 송수관을 통해 리비아 북부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물이 부족한 지역에 농업용수, 생활용수, 공업용수를 공급함으로써 한반도 면적의 약 6배에 달하는 122만㎢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겠다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나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건설한국(建設韓國)의 명예가 걸려 있는 국가적인 공사’로 생각하고 공사에 임했다. 대수로 1단계 공사는 총연장 1874㎞의 송수관을 통해 하루 200만t의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1983년 11월 착공해 7년7개월 만인 1991년 8월에 끝났다.
 
  1단계 공사를 성공리에 마친 동아그룹은 2단계 공사도 수주했다. 2단계 공사는 1990년 6월 착공돼 74개월 만인 1996년 8월에 완공됐다. 리비아 서남부 자발하수나 취수장에서 지중해연안 트리폴리를 잇는 길이 1670㎞의 대역사였다.
 
  통수식(通水式)은 1996년 9월 1일에 열렸다. 세계 30여 개국의 국가원수급 지도자들과 한국의 추경석 건교부장관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통수식에서 리비아의 카다피 지도자는 “이 공사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사막을 옥토로 바꾸려는 리비아의 오랜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동아그룹은 리비아의 녹색혁명을 앞당겨준 기업이며 ‘체어맨 초이(최원석)’는 리비아 역사의 일원이다”고 했다.
 
 
  동아가 세운 각종 기록들
 
  대수로 1·2단계 공사 대금은 총 98억9000만 달러였다. 공사 규모만큼 소요 비용도 당시로서는 최대였다. 브리태니커(Britannica) 사전은 대수로 공사를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the greatest civil engineering project in the world)’라고 소개했다.
 
  동아그룹이 대수로 1·2단계 공사를 하면서 세운 기록 또한 경이적이었다. 1995년 당시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사리르 공장 3000여 명, 브레가 공장 3000여 명, 관로 현장 5000여 명, 기타 현장 2000여 명 등 총 1만3000여 명이었다. 1996년 8월까지 한국인 연인원 1254만명과 외국인 근로자 연인원 1346만명이 동원됐고 140여 종의 주요 건설장비 1150만 대가 투입됐다.
 
  이때까지 투입된 콘크리트는 2340만t으로 분당 신도시 2개를 건설할 수 있는 양이었다. 사용된 흙은 3억7000만㎥로 여의도 전체를 높이 125m로 덮을 수 있다. 또 경부고속도로의 8배가 넘는 총 연장 3544㎞ 길이의 대형관을 만드는 데 들어간 강선(P/S wire)의 길이는 543만㎞로, 지구를 135바퀴 도는 것과 같았다. 관을 운반하기 위해 동아건설이 별도로 건설한 관운송 도로(haul road)의 길이는 3500㎞로, 당시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총 연장보다 길었다. 관을 운송한 거리는 1단계 공사가 1억1000만km였고, 2단계 공사가 4억2000만㎞로 1·2단계 관 운송거리를 합하면 지구에서 달까지 700번이나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동아건설이 현장에 보유하고 있는 각종 차량은 약 6000대였는데 트레일러, 포크리프트, 트랙터, 크레인, 크러셔, 불도저 같은 중량차량이었다. 공사차량을 정비하는 아즈다비아(Ajdavia)공장은 13만㎡의 부지에 35만 종(種)의 부품을 가진 초대형 정비공장이었다.
 
  관 하나의 무게는 75t이었고, 직경은 4m, 길이는 7.5m였다. 이를 실어 나르는 27.5m 길이의 트레일러는 독일회사에 특별히 주문·제작했다. 동아건설은 925대의 트레일러를 갖고 있었다. 1개 수송단(輸送團)은 60대의 트레일러로 구성됐는데 수송단이 움직일 때 뒤따르는 모래바람은 10여㎞에 달했다. 그 모습은 마치 대형 함대가 이동하는 것과 같았다.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최대 장관 중의 하나였다.
 
 
  UN 제재 조치에도 神話 창조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함께한 최 회장(왼쪽).

  공사 과정에서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1992년 4월 발효된 유엔(UN)의 대(對)리비아 제재조치로 인력과 공사 자재 및 장비를 수송하는 데 힘들었다. 리비아로 들어가는 항공기의 이·착륙과 선박의 입·출항이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력과 기자재 공급은 인접국 튀니지(Tunisia)나 이집트(Egypt)를 거처 육로(陸路)로 리비아에 들어가야 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2단계 공사 당시 리비아 정부는 당초 완공 예정보다 2년을 앞당겨 줄 것을 요구했다. 리비아의 카다피(Qadafi) 국가지도자는 1995년 8월 나에게 “내년(1996년) 9월 1일 혁명기념일(革命紀念日)까지 사하라사막의 지하수가 트리폴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대수로 2단계 공사 현장은 섭씨 50도가 넘는 곳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직경 4m, 길이 7.5m, 무게 75t에 이르는 거대한 송수관을 매설한다는 일은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동아인(東亞人)의 잠재력은 ‘기한 내에는 해내고야 마는’ 한국인의 돌관(突貫) 정신이었다. 리비아 내(內) 항만과 공항이 봉쇄된 최악조건에서 공기단축의 성공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아건설은 리비아 대수로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뤄 가며 세계 건설시장에서 우리의 토목기술을 한 단계 높였고, PCCP 파이프 설계에 관한 국제특허(國際特許)도 획득했다.
 
  1996년 9월 대수로 2단계의 트리폴리 통수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면서 약 100억 달러 상당의 대수로 3·4단계 공사도 동아가 맡기로 합의했다.
 
  나는 1968년 동아건설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해외 건설시장에 대한 진출의지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은 1971년 중반이었다. 동아건설은 1972년 해외건설 진출의 첫 번째 시장인 괌(Guam)에 동아아메리카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미군 해군기지 내 해군장교 숙소와 통신시설을 만들었다. 1973년에는 말레이시아 데밍고댐 공사에 응찰했지만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자금력에 아쉽게 고배(苦杯)를 마셨다. 당시 우리가 우수한 경험과 기술력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제적 지위와 경제적 신뢰도가 낮아 수주에 실패한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수주에는 실패했으나 이 지역에서의 수주활동 경험이 중동 건설시장 진출에 큰 도움이 됐다.
 
  동아건설은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외곽도로 공사를 수주해 중동진출의 길을 열었다. 이듬해 수주한 주베일항만 공사(9160만 달러)는 해외건설의 도약대였다. 연이어 수준한 콰디마항만 공사(1만7902만 달러)와 사우디아라비아 TEP통신공사(12억7249만 달러)에서는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TEP공사가 진행되던 1978년에는 9000명의 국내인력을 사우디에 송출했고, 1980년까지 3만여 명을 송출했다. 사우디 TEP공사에 동원된 연인원은 650만명이었다. 동아건설이 개통한 전화회선은 117만6000회선이었다.
 
  동아건설은 1975년 우리나라 건설업체로는 처음으로 아랍에미리트(UAE)에 진출해 아부다비 교량공사를 따냈다. 1977년에는 아부다비 방파제축조 공사와 마프락 하수처리 공사를 수주, 중동 건설시장의 영역을 확대해 갔다.
 
  동아건설은 1945년 8월 충남 대전에서 ‘충남토건’이라는 간판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선친(先親) 최준문(崔竣文·1920∼1985) 회장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선친은 충남 부여의 임천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수리간척사업 현장에 다니면서 토목공사의 기본을 익혔다. 그 후 평안북도 신의주 철도공사 현장에서 막일과 밑바닥 일을 두루 체험한 후 논산으로 다시 내려와 본격적인 토목인(土木人)의 길을 걸었다.
 
 
  25세의 최준문 회장, 농업토목공사로 기반
 
동아그룹 창업주 고(故) 최준문 명예회장.

  선친은 8·15 해방과 함께 대전으로 터전을 옮겨 동아그룹의 근간이었던 충남토건(1949년 동아건설로 개명)을 설립했다. 6·25 전쟁이 터질 때까지 대전, 논산, 부여 등 충남 일대에서 교량, 도로 및 재해복구 공사 등 주로 농업토목 공사를 했다.
 
  동아건설을 전국 규모의 대 건설업체로 떠오르게 한 공사는 대천수리조합이 6·25전쟁 중에 발주한 대천방조제 간척공사(1952∼1958)였다. 대천 간척공사는 해방 전에 일본인 건설업체가 시공을 하다가 시작단계에서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중단한 공사였다.
 
  대천 간척공사는 충남 보령시 대천읍 앞의 해수면을 막아 방조제를 쌓고 그 안의 갯벌을 농토(1100ha)로 바꾸는 공사였다. 남북으로 연결된 방조제(3383m) 축조에는 만 4년이 소요됐고, 배수갑문을 설치하는 데는 2년이 소요됐다.
 
  방조제공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최종 물막이 공사였다. 공사가 진행될수록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 쇠말뚝을 박고 그 위에 공사용 다리를 설치했으나 만조(滿潮) 때면 쇠말뚝이 뿌리째 뽑혀 나가곤 했다. 채석장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축대를 쌓듯 차곡차곡 쌓아 나갔으나 최종 구간에서 물살이 심해 번번이 실패했다.
 
  고심 끝에 나의 아버지 최준문 회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어선을 물막이 공사에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부친은 인근 어촌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어선 11척을 구입한 후 어선에 돌을 가득 실어 미리 표시해 둔 지점에 좌초시켰다.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함이었다. 어선투입 작전은 적중했다. 8개월이라는 긴 사투 끝에 최종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대천방조제 축조공사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대천 방조제의 건설사적 의미는 기계장비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거대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배를 동원한 방조제 공사는 현대건설의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1984년 서산간척지 방조제 물막이 공사에 폐(廢)유조선을 동원한 것보다 28년 앞섰다. 대한토목학회(大韓土木學會)가 1993년 12월 토목회관 준공식 때 동아그룹 창시자 최준문 회장의 동상(銅像)을 건립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며 대토목인(大土木人)으로 인정한 데는 대천방조제 최종 물막이의 성공신화가 한몫했다.
 
 
  동진강 간척공사와 경부고속도로 공사
 
동진강 간척공사 당시 축조한 방조제.

  동아건설은 1957년 본사를 대전에서 서울 중구 서소문동으로 이전했다. 동아건설은 1960년대 들어 동진강 간척공사, 왕십리발전소 공사,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여러 공사 중에서 동진강 간척공사는 동아건설이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동진강 간척공사는 1960년대 초 제1차 경제개발계획상(上) 동양 최대의 국토개발사업이자 다목적 토목사업이었다. 호남평야에 인접한 전북 부안군 부안면 서쪽의 동진강 하구의 바다를 총연장 12.8km의 방조제로 막아 그 내부의 개펄(3925ha·1180만평)을 농지로 만드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당시 정치권과 언론은 간척공사의 기술적인 문제를 이유로 공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강한 의지와 추진력으로 방조제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됐다.
 
  동진강 간척공사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른 국토개발사업의 상징적인 공사였다. 착공 이후 하루 동원인력은 평균 2000명이었다. 그때까지 국내의 어떤 건설현장에서도 볼 수 없던 대규모 인력 투입이었다. 6년간의 대역사 끝에 1968년 10월 방조제가 완성됐다.
 
  동아건설은 1967년 우리나라 국토개발의 획을 그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에 참여함으로써 장비·기술·경영의 현대화를 기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했다.
 
  1968년 7월, 정부는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통운을 민영화하면서 동아건설에 경영권을 맡겼다. 대한통운의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은 부친 최준문 회장은 만성 적자와 경영부실의 늪에 빠져 있던 대한통운을 살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마침내 민영화된 지 3년반이 지나면서 대한통운은 완전히 정상화됐다. 대한통운은 우리 경제의 고속성장 기반을 확충했고, 수송체계를 선도적으로 이끄는 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대한통운의 경영정상화는 아버지의 건강악화를 가져왔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몸을 돌보지 못한 선친께서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서울 서소문의 한일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병실에 직통전화를 열어 놓고 업무를 봤다. 병원 신세를 지면서 기력을 다소 회복했지만 병고(病苦)가 지병이 돼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동아그룹, 권력에 의해 해체당해
 
  대한민국 건설업계의 중심역할을 했던 동아그룹은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출범하면서 비운(悲運)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정부는 IMF 극복이라는 이름하에 ‘입맛에 맞지 않는 기업가’를 권력으로 처리한 것이다.
 
  1997년 12월 당시 동아그룹은 동아건설·대한통운·동아생명·동아증권·동아엔지니어링·공영토건 등 22개 계열사를 둔 재계서열 10위의 대기업이었다. IMF사태로 자금 유동성에 다소 위기가 있었지만, 해외 공사대금이 들어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리비아 대수로 2단계 공사가 끝날 무렵 동아건설은 리비아로부터 매년 공사대금 10억 달러를 차질 없이 받고 있었다. 1996년 9월 대수로 2단계 공사 트리폴리 통수식에서 리비아 대수로청(GMRA) 자달라 장관은 한국기자들에게 “대수로 3·4단계 공사도 동아그룹과 협력관계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두 달 후 리비아 정부는 51억 달러(4조 3000억원) 규모의 대수로 3단계 공사에 관한 낙찰의향서(Letter of Intent)를 동아건설에 발급했다.
 
  그로부터 1년반 후 동아그룹이 ‘재벌해체’의 표적이 되어 공중분해당하는 운명을 맞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김대중 정권에 의해 1998년 5월 15일 동아그룹 회장직에서 쫓겨났다. 6·25 전란(戰亂)을 딛고 성장해 온 동아그룹은 이때부터 순식간에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아그룹의 첫 번째 매각 대상은 동아증권이었다. 내가 물러난 지 두 달 만에 동아증권은 ‘세종기술투자’라는 듣지도 못한 조그만 회사에 단돈 ‘21억원’에 넘어갔다. 동아건설이 1300억원을 투입해 건설한 서원레저골프장은 1998년 11월 현찰 20억원에 팔렸다. 말도 안되는 헐값 처분이었다.
 
  동아그룹이 해체될 무렵 리비아 정부는 한국 정부에 동아그룹이 대수로 공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허사(虛事)였다. 대수로 공사를 통해 거액(巨額)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나라 경쟁업체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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