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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 6월호

[金守漢] 전두환 노태우 학병을 내 휘하에서 훈련시켜

‘대구 10·1 사건’의 현장에서 몽둥이로 사람 때려죽이는 모습 봐
육군 3사단에 찾아가 종군을 간청하며 滅共이란 혈서 써
좌익에 경도됐던 친구, 6·25 직후 우익의 손에 모두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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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守漢 전 국회의장
⊙ 1928년 출생. 경북중 3년 중퇴. 대구중, 영남대 법학과 졸업.
⊙ 민주당 정책위의장, 신민당 대변인, 7·8·9·10·12·15대 국회의원, 국회의장 역임.
    現 한나라당 상임고문회의 의장, 한일친선협회 중앙회 회장.
  좌우이념을 두고 갈등이 극심하던 1946년. ‘대구 10·1 사건’의 현장에서 무시무시한 이념의 혼란을 경험했다. 좌우갈등과 정치세력 간의 권력투쟁, 찬·반탁문제로 혼란에 휩싸인 사회가 내 눈을 뜨게 만들었다.
 
  광복 후 대구에는 좌경인사들이 많았다. 젊어서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으면 바른 청년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10·1 사건이 터졌다. 대낮 경찰서 앞에서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광경을 지켜봤다. 누가 행인을 가리키며 “저놈이 형사!”라고 외치면 그만이었다. 행인이 형사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군중은 설움에 북받친 듯 저항했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약탈한 물건을 실은 트럭이 “이번에는 쌀이요” 하면 바가지를 들고 아낙들이 쌀을 퍼 담았다. 말그대로 아노미였다. 대구의과대학병원(現 경북대 의대 병원)은 좌익들이 치료를 받았고, 동산병원은 경찰이나 군인 같은 우익들이 차지했다. 병원을 잘못 갔다가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어쩔 수 없었다. 법이 없었다. 의지할 곳은 미군정(美軍政)뿐이었지만, 뒤에서 껌이나 씹고 사진을 찍어대는 게 전부였다. 인민재판으로 사람들을 때려죽여도 수수방관했다. 나는 저것이 말로만 듣던 러시아혁명이구나 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경북 영천에는 조선인민공화국 깃발이 사흘이나 휘날리지 않았던가. 구미나 왜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던 경북 칠곡의 왜관경찰서장이 군중에게 맞아 죽는 일도 일어났다.
 
  좌우이념 갈등으로 혼란이 빚어졌을 당시, 적지 않은 학생들 사이에서 김일성대학을 선망하고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성 국가인양 착각하는 풍조가 일었다. 남한에는 친일파(親日派) 고등계 형사들이 미군정(美軍政)에 의지했다거나, 지주(地主)들이 살기 위해 한민당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부(富)가 불의(不義)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혼란과 무정부, 혁명의 어지러움을 생생히 경험하며 나는 좌익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집요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거절했다. 좌익의 이념에 경도됐던 친구들은 6·25 직후 우익의 손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일보> <삼천리> <개벽> 읽으며 피가 끓던 시절
 
김수한 전 의장이 보관 중인 태극기. 모교인 대구대(현 영남대)교수와 학우들이 ‘살아돌아오라’는 격문을 태극기에 적었다.

  어린 시절, 나는 작가가 꿈이었다. 왜관보통학교 시절,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 朝日新聞)>이 주최한 아동문예 모집에서 ‘우리 집’이란 글이 뽑힐 정도로 문학적 소질이 있었다. 나중 정계에서 7년8개월 동안 ‘최장수 대변인’으로 활약할 때 “결국 작가는 못 되고 ‘테러문학’(논평·성명을 의미-편집자 주)만 했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작가의 꿈은 아무래도 독서에서 나왔다. 우리 집에는 늘 성경책이 있었고 교회 주일학교에도 열심이었다. 아버지는 보성전문학교를 나온 인텔리셨는데 그때 이미 <조선일보>를 구독하셨다. 칠곡에서 <조선일보>를 읽던 구독자가 10명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또 아버지가 보던 <삼천리>나 <개벽>에 실린, 검열(檢閱)로 문장이 훼손되고 잘린, 그래서 온통 접속어뿐이던 잡지가 기억난다. 일찌감치 민족이 무엇인지 알았고 젊음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런 영향이 작가보다는 정치인의 꿈을 키우는 밑거름이 됐다.
 
  나는 1943년 경북중 3학년 때 일장기 말소 사건을 일으켰다. 친일파인 당시의 거부(巨富)가 학교에 글라이더를 기증해 운동장 구석에 격납고를 설치해 보관하고 있었다.
 
김수한 전 의장이 학도병으로 참전할 당시 찍은 사진.

  글라이더는 고정날개를 가진 비행기 모양이나 자체에 엔진·프로펠러·제트엔진 같은 추진장치가 없는 일종의 모형 비행기다. 그저 바람의 에너지나 자체의 중력을 추력(推力)으로 삼아 비행하는 수준이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학교에서는 금이야 옥이야 닦고 조이고 극성을 떨었다. 그해 12월쯤 나는 글라이더 날개에 그려진 일장기(日章旗)를 칼로 찢어 버렸다. 일종의 저항감이라고 할까? 일본인 담임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 국회의원이 되고 기적적으로 그 은사를 일본에서 다시 만났다. 그분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계셨다. “일본으로 귀국 후 처음 쓴 교사수필의 주인공이 바로 너였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대구경찰서 고등 형사계에 끌려갔다. 너무 많이 맞아 교복의 윗단추를 잠글 수 없을 정도였고 결국 퇴학을 당했다.
 
  낙향하여 경북 칠곡군 석정면 과수원에서 2년 동안 머슴처럼 일했다. 아버지가 “넌 이제 농사밖에 안되겠다”시며 “과수원 농군이나 돼라”고 하셨다.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 군정(軍政)은 일본강점기 사상관계로 퇴학된 학생을 무조건 복교(復校)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버지가 나를 경북중에 복학시키려고 했지만, 교장선생님과 다투고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그런 학교에 갈 필요 없다”시며 당시 신설된 대구중학교 3학년에 복학시켰다.
 
  학창시절, 키 166cm의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체격 덕분에 학생회장과 응원단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간덩이가 부어서인지’ 몰라도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의 체력은 훗날 ‘야당 사람은 최루탄 가스를 마시고 산다’던 박정희(朴正熙) 시절을 이겨 낼 수 있었던 밑천이 되었다.
 
 
  피로 쓴 ‘滅共’
 
학도병 위무품으로 대구지역 여학생들이 만든 천침(千針). 천사람이 바늘에 뜬 것을 갖고 있으면 총에 맞지 않는다 하여 배에 차고 다녔다.

  가세가 기울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생각을 못하고 바로 대구대(지금의 영남대)에 입학, 대학 3학년 때 6·25를 맞았다. 좌익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나를 찾아와 “내일이나 모레면 김일성 장군의 부대가 오지 않느냐”고 말해 깜짝 놀랐다. 심지어 나에게 “혁명가가 되자”, “김일성 대학에 진학하자”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좌익 성향의 학교 선생님들조차 학생 간부였던 나를 지목하며 좌익활동을 부추겼다. 그 선생님들은 나중에 월북했다.
 
  나는 그들의 요구를 다 뿌리치고 국군에 혈서(血書)로 지원했다. 전쟁이 터진 지 사흘 뒤인 6월 28일의 일이다. 그날 육군 제3사단 정훈부로 찾아가 종군(從軍)을 간청했다. 사전에 누구와 상의하지 않았다.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빠져 있는데 피 끓는 정열이 방관을 용서치 않는다. 종군해서 싸우게 해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멸공(滅共)’이란 혈서를 썼다.
 
  그날 저녁 식구들과 저녁을 먹는데 라디오에서 내가 혈서지원했다는 기사가 방송에서 나왔다. 가족과 상의조차 안했던 터였다. 부모님이 “무슨 얘기냐”며 화들짝 놀라셨다. 아버지가 “참말로 그랬나?”고 물으시더니 내 얘기를 들으시고는 “참 대견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왜 죽으려 하느냐. 큰일 난다”며 눈물로 뜯어말렸다. 라디오에서 나의 혈서지원을 듣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살기 위해 자원하지 않았다. 또 살리라 생각지도 않았다. 왜냐, 당시엔 소련제 전차를 막을 무기가 없었다. 국방경비대의 경전차 포(砲)로는 어림이 없었다.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애국심에서 그랬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말이고 젊은 혈기가 넘쳤다고 할까.
 
  이튿날 제3사단에서 연락이 온 게 “선무(宣撫)활동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학우들에게 참전을 독려하는 웅변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경북대 사범대학 학생회장이던 유재봉(劉在鳳·경희대 명예교수)과 경북대 의대생 3~4명과 함께 선무단을 만들었다. ‘백만 학도여, 나가 싸우자’, ‘펜을 총으로 바꿔 쥐고 통일역군이 되자’며 궐기를 호소했다.
 
  그 사이 좌익에 관여했던 경북중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모두 ‘보도연맹’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반공단체다. 1949년 말 가입자 수가 30만명에 달했고 서울에만 거의 2만명이었다.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6·25가 터지고 대구의 친구들은 수면 아래로 잠복해 일종의 ‘김일성 영입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인민군이 온다. 우리가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이었다. 당시는 남로당 인사들도 공공연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거쳐 대전으로 남하하면서 보도연맹 출신들이 우익 인사의 정보를 인민군에 제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우익 인사들이 모조리 처형되는 일이 전쟁 중 벌어졌다. 그 소문 때문인지, 인민군이 경북 김천쯤 내려오자 이번에는 우익 경찰이 무차별 검속(檢束)과 즉결처분으로 보도연맹 인사들을 죽였다. 나는 친구의 여동생에게 직접 그 무시무시한 상황을 듣게 됐다. 친구 여동생이 “오빠가 김천 형무소에 잡혀 있으니 구명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당시 대구키네마 극장 (지금의 동성로 한일극장 자리) 옆에 ‘대구 SIS’라는 정보공작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재판 없이 좌익인사들을 연행하여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풍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혼란스럽기는 우리 군도 마찬가지였다. 몰려드는 피란민과 인민군의 공세로 국군은 오합지졸이었다. 경북도청 앞마당에 가면 대위나 소령 계급장을 단 패잔병이 득실댔다. 카빈총을 메고서 밥을 얻어먹으러 급식소로 몰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군대도 뿔뿔이 흩어져 조직이 해체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패잔병이 되면 소속 없는 건달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입대하다
 
학도병들은 단기훈련만 받고 참전해 대부분 전사했다. 1950년대 당시 학도병의 행진모습.

  그러던 중 7월 11일 입대가 허용됐다. 대구대 이규원(李圭元) 학장, 이재철(李在哲) 교수 등 많은 스승과 학우들이 성대한 장행회(壯行會-장대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을 격려하는 행사)를 베풀어 주었다. 나는 수놓아 만든 비둘기 마크의 ‘학병’이라는 표지를 가슴에 달고 어깨에 태극기를 두른 채 군에 들어갔다.
 
  이튿날 대구농림학교에 가니 120여 명이 모였는데 그 후 또 100여 명이 들어와 동부초등학교에서 합숙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이라는 게 변변치 않았다. 무기가 없어 M1 소총 앞에 5명이 붙어서 ‘구경’할 정도였다. 어떻게 총알을 장전해야 하는지, 총 쏘는 자세는 어떻게 하면 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전황은 더욱 악화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구시내에는 인민군에 패해 부대를 잃어버린 군인들로 엉망이었다. 육군본부가 내려와 대구중앙초등학교에 캠프를 차렸다. 전세(戰勢)가 급전직하로 나빠졌고 대전, 김천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낙동강이 최후의 보루가 됐다. 팔공산 쪽에서 박격포탄이 대구시내로 막 날아왔다. 대구가 밀리면 전쟁은 끝나는 상황이었다. 부산이 남아 있긴 했지만, 낙동강 전선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생명선이었다.
 
  입대 후 1일주일쯤 지나, 비상이 걸려 전원 집합했는데 대위 한 사람이 나와 “포항 인근의 안강·기계 쪽의 전황이 급해 결사대 50명이 필요하다”며 “지원자는 나오라”고 했다.
 
  서로 뒤질세라 결사적으로 뛰어가서 줄을 섰는데 나는 인원이 차서 끼지 못했다. 동작이 빠른 중학생들이 주로 앞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그 길로 전선에 투입됐는데 거의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전이 펼쳐지고 다시 재(再)반격하기까지 학도병들은 기꺼이 조국을 위해 산화했다.
 
  7월 28일에도 또 비상이 걸렸다. 본부인 대구농림학교에 집합하니 장교가 학도병 20명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친구인 이상발(李祥撥·전사)과 선무단 활동을 같이한 유재봉 그리고 나도 끼였다. 나머지 200여 명은 모두 장교가 인솔해서 전선으로 나갔다. 그들 역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학도병들은 군복에 농구화라고 부르는 훈련화를 신고 학생모자를 썼는데 모자에는 흰 띠를 둘렀고, 가슴에는 비둘기 문양의 학병 휘장을 달았다. 이 휘장은 대구시내 여중생들이 밤을 새워 자수(刺繡)로 만든 정성이 깃든 것이었다.
 
 
  바주카포 훈련조교가 되다
 
  그렇게 남은 우리 20명은 그 이튿날부터 바주카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바주카포는 6·25전쟁에 동원된 획기적인 무기다. 미 24사단이 한반도에 처음 투입될 때 들여온 바주카포는 구경 3.5인치(88.9㎜)의 대전차 로켓포다. 로켓 포탄을 발사할 때 나오는 후폭풍이 로켓포의 뒤로 빠져나가면서 그 반동력으로 포탄이 날아가는 원리다.
 
  6·25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대전차 무기는 2.36인치 로켓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군이 공격 전면에 배치했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군이 바주카포를 들고 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바주카포가 발사하는 대전차 포탄은 27.9㎝의 강철판을 뚫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대전차 방어가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바주카포를 쏘면서 비로소 인민군 전차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인민군이 서울에서 낙동강까지 내려올 때 제대로 된 저항은 바주카포 세례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바주카포로 낙동강에서 결전을 하려 했다.
 
  그런데 왜 학도병에게 바주카포 훈련을 시켰을까. 당시만 해도 신형 무기였던 바주카포를 다루기가 까다로워, 아무래도 출신이 각양각색인 군인보다 중등교육 과정을 익힌 학도병에게 가르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닷새간 바주카포의 포탄장전·분해법 등을 배운 후 정일권(丁一權) 참모총장과 고급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실탄 사격을 했다.
 
  이튿날 나와 유재봉, 현인수(玄仁洙) 등 3명만 남기고 모두 전선으로 나갔다. 이상발 등 바주카포 훈련을 받은 17명의 동료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가 불과 며칠 만에 거의 전사했다.
 
  내가 왜 남게 됐는지는 나중에 알게 됐다. 누군가 남아서 바주카포 훈련을 시켜야 했는데, 그 훈련조교로 우리들을 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훈련조교가 된 것이 내가 살아난 이유다. 누구한테 부탁하거나 안 가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보기에 먼저 간 영령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할 뿐이다.
 
  학도병 산하에 3개 중대가 있었는데 내가 2중대장을 했었다. 1979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이 됐을 무렵, 나를 초청해 처음 만났다. 그때가 10대 국회의원 시절로 기억된다. 전두환 사령관이 내게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의원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얘기는 이랬다. 대구공고에 다니던 전두환과 경북고에 재학 중이던 노태우(盧泰愚) 두 친구는 나이를 올려 학병으로 지원했다. 그것도 내 휘하의 2중대 대원이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되돌아보면 한때나마 두 명의 대통령을 부하로 거느렸던 셈이다. 두 사람은 나중 포병학교가 있던 경북고녀(現 경북여고)로 가서 훈련을 받았고 이어 육사(陸士)에 지원, 11기생이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장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사회진출의 꿈이 컸기 때문이다. 그해 9월이 되고 며칠 뒤 이등중사 계급을 받았다. 이후 이종찬 대령(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역임)이 중앙훈련소장으로 재임할 당시 그의 휘하에서 기간요원으로 근무했고, 21사단과 8사단 등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복무했다. 경북 칠곡 가산전투 때는 연락병 노릇도 했지만, 최일선에 나가 백병전(白兵戰)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정식 군번을 받고 부사관으로 소임을 다한 뒤 상사로 제대했다.
 
  나는 해방 후 이념적 대립과 갈등으로 극도로 혼란한 세상에 고뇌하고,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동암(東庵) 서상일(徐相日) 선생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6·25의 생생한 경험이 내 정치역정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정리=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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