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중국 진출, 조향장치와 ABS 브레이크 100만대분 생산
기술과 품질로 차별화 시도, 중국 자동차 기업에도 만도의 부품 공급
기술과 품질로 차별화 시도, 중국 자동차 기업에도 만도의 부품 공급
- 심상덕 총경리가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이 직접 쓴 액자를 가르키고 있다.
재중국 한인회 측은 “대한민국 모든 기업 가운데 만도기계가 중국에 가장 빨리 진출했고, 그만큼 중국을 잘 이해하는 기업”이라며 추천 이유를 밝혔다. 만도는 현재 중국에 6곳의 법인이 있다. 한인회 측은 이 가운데서 쑤저우(蘇州) 법인을 추천했다. 만도가 중국에 가장 먼저 설립한 법인이기 때문이다.
만도는 故(고) 鄭仁永(정인영)씨가 설립한 한라그룹 계열인 종합 자동차부품회사다. 자동차 부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자동차를 멈출 수 있게 하는 제동장치, 원하는 방향으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도록 하는 조향장치, 노면으로부터 자동차에 전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해 주는 완충장치다. 이들 장치는 엔진과 더불어 자동차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제품이다.
만도는 지난해 이런 부품을 현대·기아차, GM 등에 공급해 2조4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홍보실 관계자는 “지난 2000년 만도는 한라그룹에서 매각되어 계열 분리됐다가 2008년 창업자의 차남 鄭夢元(정몽원·54) 한라그룹 회장이 만도를 다시 찾아와서 제2의 도약기를 맞았다”고 했다.
쑤저우 가오신(高新)개발구에 있는 만도 쑤저우 법인을 찾았다. 이곳은 상하이 푸둥공항에서 약 200㎞ 떨어져 있다. 상하이에서 쑤저우, 우시(無錫)까지 새로 난 왕복 8차선의 고속도로를 통해 달리니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沁相德(심상덕·52) 상무(총경리)를 만나 쑤저우 법인과 공장에 관해 대략 설명을 들었다.
품질이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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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걸 상무보가 자신이 국산화한 스티어링 밸브를 설명하고 있다. |
심 상무에 따르면, 현재 만도는 중국에 생산법인 4개(쑤저우, 베이징, 톈진, 하얼빈), 영업을 담당하는 중국 영업실, 중국 내 R&D를 담당하는 북경연구소, 2개의 주행시험장이 있다. 동계차량 테스트를 위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헤이허(黑河)에 겨울 테스트장을 보유하고 있고, 하계에는 베이징 밀운지역 테스트장에서 중국만도에서 개발된 신제품을 차량에 장착하여 테스트하고 있다. 심상덕 상무의 설명이다.
“쑤저우 법인은 2002년 7월 설립, 중국법인 가운데 가장 먼저 진출했습니다. 주요 생산품은 조향장치와 브레이크 제품인 ABS를 100만 대분 생산합니다. 진출 초기에는 기아차에 납품을 시작으로, 베이징 현대와 옌청(鹽城)에 있는 기아차 전 차종에 이들 부품을 공급합니다.”
― 현대·기아차 외에 다른 공급처가 있나요.
“상하이GM, 중국 현지 완성차 회사인 체리자동차(奇瑞氣車), 장안기차, 길리기차에도 공급합니다. 최근에는 중국 기업들이 저희 제품을 점점 많이 쓰고 있어요.”
중국 공장답게 부지가 넓었다. 전체 부지는 9만1000㎡(약 2만7000평). 넓은 부지 위에 사무동, 조향 1공장과 2공장, ABS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심상덕 상무의 설명.
“쑤저우 법인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기본기술 노하우를 한국 만도연구소에서 이전받습니다. 이 기술을 베이징에 있는 연구소에서 중국 현지에 맞게 기술을 적용해서 넘어온 데이터로 저희가 제품을 생산합니다. 쑤저우 공장 내에 모든 시험설비가 갖춰져 있어 제품성능 시험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심 상무와 함께 사무실 곳곳을 구경하며 설명을 들었다. 사무실 한쪽 벽면에 같은 크기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 안에는 ‘最高의 品質’이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심상덕 상무의 얘기.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게 ‘품질’입니다. 이 글도 정 회장이 직접 썼어요. 만도는 지난 2000년 한라그룹에서 계열 분리됐습니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모기업인 한라그룹이 흔들려서 구조조정을 한 거죠. 창업주인 정인영 회장은 만도를 마지막까지 잡고 있었습니다. 先代(선대) 회장이 그만큼 만도를 놓치기 싫어한 건 만도가 한라그룹의 모태이며 기술력, 품질 경쟁력을 가진 우수한 기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인영 회장은 만도를 어쩔 수 없이 매각하고 난 후, 만도 직원들과 한라 직원들에게 ‘우리는 만도를 잊지 않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회장은 만도를 다시 인수하지 못하고 2006년 세상을 뜨셨어요.”
IMF 당시 매각됐다가 다시 매입
심 상무는 1989년 한라그룹에 입사해 만도에서 직장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하지만 만도가 계열분리된 후 만도를 떠나 한라그룹 다른 계열사에서 근무하다 지난 2008년 만도에 다시 복귀했다. 이 때문인지 정인영 회장과 만도 매각을 얘기할 때,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 나왔다.
심 상무는 “2008년 정몽원 회장이 만도를 다시 찾아 왔을 때, 선대 회장 얘기를 하며 많이 울었다”며 “정 회장이 만도를 재인수한 이유도 역시 만도의 기술력과 품질이기 때문에, 정 회장이 품질을 강조한다”고 했다.
지난 2008년 3월 23일 만도를 찾아온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당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술력이 경쟁력입니다. 기술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둘 것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기술회의를 직접 주재할 겁니다.”
― 만도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입니까.
“만도는 현대자동차의 발전과 더불어 함께 커 온 회사입니다. 지금이야 현대·기아차 계열에 부품회사가 있지만 2000년까지만 해도 만도가 자동차부품 회사로는 독보적이었어요. 현대가 해외로 나가서 자동차를 파는데, 만도의 부품이 좋지 않으면 욕을 먹는 건 현대입니다. 게다가 만도가 생산하는 제품은 엔진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제동장치와 조향장치까지 공급했습니다. 현대차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저희 만도도 일조했다고 자부합니다.”
만도는 제동장치의 대표격인 ABS 장치를 가장 먼저 국산화에 성공했다. ABS 국산화 이후, 이보다 성능이 한 단계 뛰어난 제어장치(TCS·Traction Control System)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TCS는 ABS의 기능에 빙판길이나 언덕길에서 가속할 때 바퀴가 헛돌거나 미끄러지는 것을 막는 기능이 보태진 제품이다.
올해 매출액 2800억원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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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 제조 공장 내부 모습. |
사무동에 있는 대회의실에서 鄭瑞敎(정서교) 관리부장에게 쑤저우 만도법인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정 부장에 따르면, 쑤저우 만도 법인은 현재 전체 직원이 460명으로, 현재 12명인 주재원 수를 빠른시일 내에 현지화를 실현해서 줄일 계획이다. 지난해 20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는데, 세계경제 불황 여파에도 불구하고 올해 매출액을 2800억원으로 잡고 있다고 한다. 정 부장의 설명이다.
“중국 자동차 시장이 다소 불안하지만, 전동식 조향장치, ABS, ESC 등 신제품을 계속 출시하기 때문에 향후 매출액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매출액뿐만 아니라 이익도 늘어날 전망입니다. 지난해 만도가 한라에 다시 편입되면서, 불필요한 비용과 비효율적인 업무 체계를 대폭 없애고 바꿨습니다.”
― 예를 들어 어떤 비용이 줄었나요.
“쑤저우 공장의 기존 재고관리 기간이 38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라가 인수한 후 심 상무처럼 만도를 잘 알고 있는 경영진이 들어와서 불과 1년도 안돼 재고관리 기간을 15일로 줄이더니 최근엔 12일로 만들었습니다. 재고로 쌓아 두는 날짜가 보름 이상 준 건 전체 비용절감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심 상무는 “주인 없던 회사에 주인의식을 가진 경영진이 들어온 결과”라며 이렇게 말했다.
“선대 회장 계실 때부터 만도가 모든 직원에게 원하는 인간상은 ‘주인의식’이었습니다. 저희 법인은 중국인 관리직과 주재원이 모여 1년에 한 번씩 야간행군을 합니다.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함께 행군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만 알던 중국 직원들이 ‘우리’를 알아 갑니다. 주인의식은 ‘우리’라는 의식이 있어야 생기기 때문이에요.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만도가 가장 먼저 중국에 진출한 겁니다.”
― 중국에 언제부터 진출했습니까.
“쑤저우에 법인을 낸 건 2002년이지만, 실제 준비를 하고 사무소를 베이징에 낸 건 1993년 한중 수교 직후예요. 선대 회장은 중국 수교 이전부터 중국을 주목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습니다. 이 때문에 1989년 입사 직후부터 선대 회장의 통역을 맡았어요. 당시 정확히 통역을 못해서 선대 회장 뵙기 민망해 회사를 며칠 안 나온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선대 회장은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수교 후 중국과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해지자, 중국팀을 구성하여 중국 전역을 답사했어요.”
중국 시장 샅샅이 조사
심 상무의 설명에 의하면 만도 중국팀은 東北(동북), 華中(화중), 華東(화동), 내륙 등 4개 권역으로 구분하여 동북3성에서부터 서쪽의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까지, 중국의 주요 도시, 지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정인영 창업주는 중국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양쯔강 이북지역을, 정몽원 現 회장은 양쯔강 이남 지역을 집중방문했습니다. 두 회장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직원들로부터 중국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직접 챙겼다.
심상덕 상무의 얘기다.
“초기 중국 출장 시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너무 변수가 많아서 고생한 적도 많았습니다. 출장 중 가방을 분실해서 여인숙 같은 여관에 묵으면서 출장을 다니기도 했어요. 31박 32일이라는 긴 출장을 끝내고 홍콩을 경유하여 귀국할 때, 비용이 부족해서 버스를 갈아타고 겨우겨우 도착한 기억이 납니다. 홍콩에 있던 한국식당에서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먹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더군요.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고 아무런 감정이 안 드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 겁니다.”
― 얼마나 중국을 돌아다녔습니까.
“몇 년 동안 돌아다녔죠. 당시 중국의 재래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현지 업체를 포함한 여러 완성차 업체를 방문하고 자동차 부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죠. 쑤저우에 생산법인을 세운 건 훨씬 뒤의 일이지만, 이때 축적한 정보와 중국에 대한 시장조사가 현재 만도가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현대자동차가 1990년대 중반 중국에 진출할 때 만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현대차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어요.”
―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중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33개 국가가 모여 있는 합중국이라고 보면 됩니다. 딱 부러지게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저희 경험으로는 ‘끈기’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단시간에 이해하고 단시간에 파악해서 성공할 수는 없어요. 어렵더라도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참아 가며 달성해야 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과실을 주는 게 중국이라고 생각해요.”
만도는 중국에서 2013년까지 8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부품 국산화
사무동을 나와 ABS 공장과 스티어링(조향장치) 생산공장을 둘러봤다. 사무동과 공장 중간에 조성한 중국식 정자와 연못에서 직원들이 쉬고 있었다. 동행한 金容傑(김용걸·49) 상무보는 수많은 핵심부품을 국산화한 만도의 대표 엔지니어 가운데 한 명이다. 만도 입사 후 일본에서 근무했고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설립할 때 공장 설립을 주도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ABS 공장을 방문했다. 현재는 100만 대 분량을 생산하지만, 200만 대 분량까지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 공장이 꽤 넓었다. ABS 공장은 청결이 생명이라, 공장이 깨끗했다. 생산라인에 들어가려는 직원들은 하얀 방진복으로 갈아 입고 클린룸을 거쳐야 한다. 자동차 생산공장이라기보다는 의약품 생산공장처럼 보였다. 김 상무보는 “자동화가 되어 있어 가공기계 5대를 직원 한 명이 담당한다”고 했다.
공장 입구에는 커다란 품질현황표에 녹색칩이 붙어 있었다. 이른바 그린칩으로, 이 공장에서 출하한 제품 가운데 고객들의 불만이 접수되지 않으면 붙인다. 만약 하나라도 불만이 접수되면 어떤 공정에 문제가 있는지 조사해서 그 공정에 빨간칩을 붙인다.고객들의 불만이 해소되야 빨간 칩을 뗄 수 있다.
쑤저우 공장은 생산, 품질관리를 동시에 모니터링하는 컴퓨터 통합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곳의 품질 데이터는 10년 정도 보존하며, 생산되는 모든 제품에는 시리얼 번호가 부여돼 개별관리한다. 이 덕분에 제품 번호만 알면 컴퓨터를 통해 그 제품의 성능, 생산일, 생산라인, 책임자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김 상무보와 스티어링 생산공장을 둘러보는 중, 그가 작은 밸브 하나를 가져왔다. ‘스티어링 로터리 밸브’라고 했다.
“제가 차장일 때 이 밸브를 국산화했습니다. 이 밸브가 스티어링 기어의 핵심이에요.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이 밸브를 전량 수입했어요. 그래서 저희 회사에서 저와 몇 명의 엔지니어를 일본 J社(사)에 보냈습니다. 일본에서는 당연히 기술을 안 가르쳐 주고 단순 견학만 시켰죠. 만도 직원 몇 명이 1주일 동안 연수를 가서 기계, 공장설비를 보고 온 후 1년 만에 전부 역설계를 했습니다. 그런 후에 저희 연수 책임자였던 J사 과장에게 설계를 보여줬어요. 이분이 우리 설계도를 보더니 ‘우리가 독일에서 배워서 5년 만에 성공한 걸 한 번 보고 1년 만에 성공하다니’ 하면서 깜짝 놀라더군요.”
― 밸브 하나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설계한 밸브를 제조하려면 설비를 갖춰야 하는데, 일본의 모든 기계, 설비 회사에 연락을 해도 구할 수가 없더군요. 결국 우리가 생산용 기계, 설비까지 다 만들었습니다. 그런 끈기가 오늘의 우리 기술의 원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