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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09년 7월호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선사시대부터 사람 거주한 상서로운 땅

裵振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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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묻힌 서초구 내곡동 헌릉.
  198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강남구가 分區(분구)된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 필자의 집에 놀러왔던 이모가 물었다. 그때 필자와 이모 모두 강남에 살고 있었다.
 
  “강남구가 분구된다는데, 새로 생기는 구의 이름이 뭐가 될 것 같니?”
 
  “글쎄요. 반포구가 되지 않을까요? 강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지역 가운데 하나고, 발음하기도 괜찮고.”
 
  얼마 후 신설된 구의 이름은 瑞草區(서초구)로 결정됐다. 당시 서울시지명위원회에서는 서초구·반포구·양재구 등을 놓고 논의 끝에 서초구로 결정했다고 한다.
 
  오늘날 서초구의 중심을 이루는 서초동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과천군 동면 서초리, 日帝(일제)강점기 때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였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서울지명사전>에 의하면, ‘서초’라는 지명은 옛날에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다 하여 ‘서리풀이’, 霜草里(상초리)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리풀’이라는 이름은 오늘날 서리풀공원 등에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서울지명사전>은, ‘서초’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다른 說(설)도 소개하고 있다. 이곳 물은 우면산 여러 골짜기 물이 이리저리 서리어 흐르고 서래마을 물을 받아 다시 동작동 물과 합류, 한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물이 서리어 흐르는 벌판’이라 하여 ‘서릿벌’이라고 한 것이 변하여 ‘서리퍼리’,‘서리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한자로는 ‘蟠浦(반포)’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이 변해서 ‘盤浦(반포)’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 일대를 서릿마을, 혹은 서래마을, 서애마을이라고 했다. 프랑스인들이 집중 거주해 ‘리틀 프랑스’로 널리 알려진 팔레스호텔 뒤편 서래마을이 그곳이다.
 
  後者(후자)의 설명대로라면, 오늘날 서초동과 반포동이라는 洞名(동명)은 같은 말에서 파생된 셈이다.
 
 
  원지동 고인돌
 
  행정구역상 서초구가 생겨난 것은 1988년, 이 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이었다. 서초구는 1968년 영동 제1차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신흥도시다. 반포동과 서초동 일대의 아파트촌과 강남대로 일대의 오피스빌딩들이 신흥도시 서초구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것이 서초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서초의 역사는 멀리 先史(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원지동 원터마을 일대에서 발견된 선돌(立石·입석)과 고인돌군(支石墓群·지석묘군)이 그 증거다. 이 고인돌 유적에서는 신석기 시대 말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곡물 수확용으로 사용했던 반달형 돌칼도 발견됐다.
 
  李亨求(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서울 원지동 지석묘 조사연구서>, 서울대박물관의 <한국지석묘종합조사연구> 등에 의하면, 이 고인돌들은 바둑판 형태의 南方式(남방식) 고인돌로, 인근 한강 유역의 고인돌들이 탁자 형태의 北方式(북방식) 고인돌인 것과 대조된다고 한다. 원지동 고인돌은 아득한 선사시대에도 한강이 북방문화와 남방문화 간의 경계선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인 셈이다.
 
  1984년 이형구 교수의 조사에서는 원터마을 일대 4개소에서 11기의 고인돌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2002년 한양대 박물관과 서초구의 ‘원지동 고인돌 유적 정밀 지표 조사’에서는 7기만이 존재가 확인됐다. 하지만 ‘서울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巨石(거석)문화 유적’으로 알려졌던 이 고인돌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서초구청 관계자들도 확인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밖에 1958~59년 서초구 양재동에서 6기, 우면동에서 1기의 고인돌이, 1947년에는 지금의 강남구 개포동에서 4기의 고인돌이 발견됐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인근 강남구 역삼동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유적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런 유적들은 선사시대부터 지금의 서초구와 그 인근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우면산 대성사
 
  475년 백제 문주왕이 고구려의 南進(남진)에 밀려 공주로 遷都(천도)하기 전까지 백제의 首都(수도)는 오늘날 풍납토성 혹은 하남시 인근으로 比定(비정)되는 하남위례성이었다. 이 시기 오늘날 서초구 지역은 도성 배후의 농업지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초구 우면산에 있는 大聖寺(대성사)는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백제 침류왕 때인 384년 東晋(동진)을 거쳐 백제로 들어온 마라난타가 이듬해인 385년 2월 漢山(한산)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대성사에서 펴낸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 우면산 대성사 사적진언>에 의하면, 백제에 들어온 후 水土病(수토병)으로 고생하던 마라난타는 우면산 기슭에 大聖草堂(대성초당)을 세웠는데, 우면산에서 나는 생명수(약수)를 마시고 병을 고쳤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신라의 元曉(원효)·義湘(의상), 고려시대의 普照國師 知訥(보조국사 지눌), 太古王師 普愚(태고왕사 보우), 조선시대의 無學(무학)·普雨(보우) 등이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한다. 오늘날의 대성사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인 龍城(용성) 스님이 1910년 다시 건립한 것이다.
 
  한편 서초구 방배동과 사당대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관악구 남현동 538-1번지 일대에서는 1973년 백제 중·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窯址(요지)가 발견됐다. 백제시대에 토기를 생산했던 이 요지는 한강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유일의 요지다.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이 지역에 남평양을 설치했다. 경기도 구리시, 서울 광진구에서 고구려 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되는바, 지금의 서초구 일대도 남평양에 속했을 것이다.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했으나, 2년 후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이 지역을 신라에 빼앗겼다. 신라는 이 지역에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신주는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漢山州(한산주)·남한산주 등으로 이어졌는데, 지금의 서초구 지역도 여기에 속했다.
 
  고려 성종 2년(983년) 전국에 12牧(목)이 설치됐을 때 지금의 서울지역 대부분은 楊州牧(양주목)에 속했다. 서초구 지역은 양주목과 인근 광주목에 속했다. 숙종이 1104년 南京(남경)을 설치한 후 서초구 지역은 남경 관할 아래 놓였다.
 
 
  정도전, 이방원의 무덤이 이곳에
 
  서초구는 麗末鮮初(여말선초)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유적을 품고 있다. 서초구 우면동에는 고려 공민왕 때의 文臣(문신)인 李存吾(이존오)의 사당이 있다. 이존오는 辛旽(신돈)이 국정을 전횡하자 공민왕에게 이를 諫(간)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갔다가 30세의 나이로 죽었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높이 떠이셔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야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라는 시조가 바로 이존오가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지은 시조다.
 
  서초구 양재역 인근 서초동 산23-1번지에서는 조선 건국의 1등 공신인 鄭道傳(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됐다.
 
  이 묘가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선 현종 때 실학자 柳馨遠(유형원)이 펴낸 <東國與地誌(동국여지지)> 果川縣(과천현)편에 “정도전의 묘는 과천현에서 동쪽으로 18리, 양재역에서 동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다”는 구절이, <봉화정씨족보>에는 “정도전의 묘가 광주 사리현에 있고, 부인 최씨의 묘는 양재역 상초리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천현 동쪽 18리면 우면산 북쪽 자락이다. 이 일대에서 전해져 오는 민간 전승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고 한다.
 
  정도전의 후손들이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이 일대를 뒤진 끝에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를 발견했다. 1989년 한양대박물관에서 이 묘를 발굴했는데, 몸통이 없는 머리 부분 유골이 나왔다. 이는 정도전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李芳遠(이방원·태종)에게 斬首(참수)됐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이 묘에서는 조선 초기의 고급 백자도 함께 출토됐다. 이 때문에 한양대박물관 측에서는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발굴 작업이 끝난 후 이 묘는 서초교육청 공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유골은 평택시 진위면에 있는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 맞은편 은정골 야산에 假埋葬(가매장)됐다.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효령대군의 묘.

 
  王村과 방배동 木偶
 
  공교롭게 정도전을 제거한 후 조선 제3대 국왕이 된 태종 이방원이 묻힌 獻陵(헌릉)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흔히 조선 제23대 임금인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仁陵(인릉)과 합쳐 헌인릉이라고 한다. 한편 지하철 2호선 방배역 인근에는 태종의 아들인 효령대군의 묘와 그의 사당인 淸權祠(청권사)가 있다.
 
  현재 대검찰청·서울고등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등이 들어서 있는 서초동 1701번지 법원단지 일대는 효령대군의 장인인 鄭易(정역)이 살던 곳이다. 조선 태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역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해주 정씨들의 集姓村(집성촌)이 형성됐는데, 이후 이곳을 鄭谷(정곡)이라고 부르게 됐다. 지금도 법원단지 입구에는 정역의 神道碑(신도비)가 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정도전·이방원 등이 주도한 조선 건국으로 된서리를 맞은 고려 왕실의 후예들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500년 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남부터미널 뒤쪽인 서초3동 1451번지 일대의 王村(왕촌)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 왕씨 집성촌이 형성된 것은 조선 건국 후 충주에 숨어 살던 왕미 일가가 1496년 이곳으로 들어와 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18대째 이곳에 살고 있는 王泰植(왕태식·74)씨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50여 가구의 왕씨가 살았지만, 지금은 30여 가구 남아 있다”고 말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오늘날 남부터미널에서 효령로에 이르는 땅이 전부 왕씨 일가의 소유였다고 한다.
 
  지금의 우면산터널 입구 평화빌딩 인근에는 왕미의 아들 왕효곤의 묘를 비롯해 100여 기의 왕씨 일가 묘가 있었으나, 1970년대에 강남개발과 함께 전부 용인으로 移葬(이장)됐다. 왕태식씨는 “이장 당시 무덤에서 도자기·엽전 등이 나왔지만, 그때만 해도 먹고살기 바쁘던 때여서 주의해서 챙기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 일대에는 왕씨뿐 아니라 全(전)씨와 田(전)씨, 玉(옥)씨도 많이 살고 있는데, 全씨와 田씨를 합쳐 163가구에 달한다고 한다. 고려왕조가 몰락한 이후 일부 왕씨들이 조선왕조의 박해를 피해 ‘王’자와 모양이 유사한 全씨, 田씨, 玉씨 등으로 姓(성)을 바꾸었다는 설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다.
 
  한편 방배동의 한 고분에서는 1970년대에 고려 말~조선 초의 것으로 보이는 木偶(목우) 6점이 출토됐다. 6점 가운데 5점은 인물상이었는데, 3점은 여인상, 2점은 남자상이었다.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이 목우들은 7~8cm 높이로 약간의 채색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자상 가운데 하나는 辨髮(변발)을 하고 있는데, 이는 몽골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 목우들은 고려시대 복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목우들이 발견된 고분은 그 후 개발의 물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면산에서 바라본 서초동.

 
  말죽거리
 
  말죽거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지금의 양재역 일대는 조선시대 政變(정변)과 外侵(외침)의 무대였다.
 
  명종 2년(1547년)에는 ‘양재역 壁書(벽서)의 獄(옥)’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양재역 벽에서 명종의 母后(모후)로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하면서 전횡을 일삼던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벽서가 발견된 것을 기화로 權臣(권신) 尹元衡(윤원형) 일파가 政敵(정적)인 尹任(윤임)의 잔당과 李彦迪(이언적) 등 士林(사림)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다. 이를 丁未士禍(정미사화)라고도 한다.
 
  사건의 무대가 된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오늘날 지하철 3호선 양재역이 있는 이곳은 말죽거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말죽거리’라는 지명은 한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곳 양재역에서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던 데서 비롯됐다고 하는 것이 다수설이다. 하지만 ‘이괄의 난’ 때 피란을 가던 仁祖(인조)가 이곳에서 유생 금이 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먹고 갔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과 병자호란 때 이곳에 주둔했던 淸(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부대가 말에게 죽을 쑤어 먹인 곳이라 해서 그런 지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오늘날의 蠶院洞(잠원동)에는 조선시대에 국립양잠소 격인 ‘잠실도회’가 있어 ‘蠶室里(잠실리)’라고 했다. 이 지역이 서울에 편입될 때 지금의 송파구에 이미 잠실동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고 命名(명명)하게 됐다.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오늘날의 서초구 지역은 경기도 과천군 동면과 광주군 언주면에 속했었다. 언주면이라는 이름은 언주로·언주고등학교 등에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에 속했다.
 
18代째 서초동에서 살고 있는 왕태식씨.

 
  1963년 서울시에 편입
 
  서초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이다. 이후 1973년까지 오늘날의 서초구 지역은 성동구 언주출장소와 영등포구 신동파출소에서 관할했다. 오늘날 서초구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1965년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에서 副都心(부도심)으로 개발하기로 결정되고, 1968년 영동 제1차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 서초구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서초구에서는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경부고속도로 起工(기공)이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첫 구간인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린 것은 1968년 2월 1일, 기공식이 열린 장소는 서울 영등포구 원지동(현재의 서초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인근)이었다. 이날 오후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수천 년 동안 서울 남쪽을 감싸 왔던 바위산을 切開(절개)하는 發破(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폭음과 함께 다이너마이트가 작렬하면서 암벽이 쪼개지자, 육군 220重(중)건설공병단 소속 불도저들이 무너진 바위더미를 밀어붙이며 통로개척에 나섰다. 조국 근대화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서초구는 1973년 관악구가 신설되면서 관악구와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이 됐다가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강남구에 속하게 됐다(관악구 방배동 제외. 방배동은 1980년에 강남구로 편입됐다). 그리고 1988년 서초구는 강남구에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蛇足(사족) 하나. 서초구가 강남구에서 분구될 때 구의 이름이 ‘서초구’로 결정된 경위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서초구 분구 時(시) 서울시지명위원회에 앞서 강남구지명위원회에서 신설되는 구 이름을 놓고 논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서초구·반포구·양재구 등이 거론됐다.
 
  그런데 ‘서초구’라는 지명에 대해 양재동·우면동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이들은 “일개 마을에 불과한 ‘서초’를 구 이름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은 서초구 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자기들 지역의 이름을 따서 구 이름을 짓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대구에서 한약방을 하던 全(전)모씨가 우면동에 살던 강남구 지명위원 조모씨를 찾아와 “우면동 사람이라면 ‘서초’라는 구 이름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는 “牛眠山(우면산)은 소가 졸거나 자고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우면산 앞에 있는 ‘瑞草(서초)’는 ‘소가 눈을 뜨면 사방에 좋은 풀이 널려 있으니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좋은 뜻”이라면서 “지역의 盛衰(성쇠)는 그 명칭을 따라가게 마련인데, 지명을 서초로 하면 이 지역에서 부자와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우면동 사람들은 ‘서초’라는 지명에 반대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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