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祥
⊙ 1938년 충남 예산 출생.
⊙ 대전고,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비교미학 전공(문학석사),
동양철학 전공(철학박사).
⊙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서울대 박물관장, 서울대 미술관장 역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초대전(1997).
⊙ 現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위원, 독도문화 심기운동본부장, 한국벽화연구소장.
⊙ 1938년 충남 예산 출생.
⊙ 대전고,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비교미학 전공(문학석사),
동양철학 전공(철학박사).
⊙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서울대 박물관장, 서울대 미술관장 역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초대전(1997).
⊙ 現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위원, 독도문화 심기운동본부장, 한국벽화연구소장.
이 화백은 고구려벽화 전문가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국내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최 교수는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책을 국내에 번역 소개한 생물학자다.
통섭(Consilience)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 이 말은 성리학과 불교에서 이미 사용한 용어로 ‘큰 줄기를 잡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라시대 승려 元曉(원효)의 起信思想(기신사상)에도 이 말이 등장한다.
지난 3월 초 평창동 작업실 부근에서 만난 이종상 화백에게 ‘통섭’ 이야기를 꺼내니 아버지와 고교 시절 은사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시대를 앞서갔던 두 분이야말로 통섭을 삶에서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충남 예산 출신인 이 화백은 富農(부농)에 광산까지 소유하고 있던 祖父(조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李艮載(이간재)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구 회사인 ‘삼천리 전기’(후에 ‘번개표 전기’로 개칭)의 설립자였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평생 화가의 꿈을 못 버린 원예학자이자 창조적인 사업가였어요. 어린 시절 저희 집은 금계부터 칠면조, 거위 등 온갖 동물이 득실대는 동물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이 동물들을 관찰한 후 그림으로 옮기곤 했지요. 또 일본에서 들어온 국광의 단맛과 국산 홍옥의 아삭아삭한 맛을 결합해 새로운 품종의 사과를 개발하기 위해 현미경을 붙들고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같은 예산 출신인 고암 李應魯(이응노) 화백과 호형호제하던 사이로, 조부의 극심한 반대가 없었다면 화가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던 아버지 곁에서 이 화백은 현미경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고, 낙서하듯 그림을 그리곤 했다.
창조적 사업가였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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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대전고 미술부. 아랫줄 오른쪽부터 이종상 화백, 柳熙永(류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 金哲鎬(김철호) 미술 교사, 뒷줄 왼쪽부터 신부 화가 김인중, 李徹周(이철주) 전 중앙대 예술대학장. |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버지의 현미경을 렌즈만 떼기 위해 분해하다 못쓰게 만들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혼쭐나기 전에 어서 이불 속에 들어가 자는 척하라”며 피신시켜 주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그를 혼내기는커녕 어머니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가 발전하는 법이오.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냥 넘어가는 아이는 퇴보할 뿐이지. 대신 뜯어놓은 물건은 다시 맞출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오. 호기심에 뜯어놓기만 하면 파괴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다시 맞춰 놓으면 창조하는 것이니 말이오. 내가 보기에 이 아이는 화가나 과학자가 될 것 같소.”
어린 나이였던 그는 막연하게나마 ‘물건을 뜯었으면 다시 맞춰 놓아야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뜯어보게 되었고,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해 펼친 그림을 그려놓고 조립을 했다고 한다.
이종상 화백은 초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다. 이 무렵 그의 아버지는 서울 명동성당 근처에 한국 최초의 전구 회사인 ‘삼천리 전기’를 설립했다. 이북에 있는 수풍댐 발전소에서 전기를 끌어오던 시절이라 서울 사람이라도 대부분 호롱불을 켜고 살 때였다. 그는 “아버지는 사업을 해도 매우 창조적이었고, 미적 감각이 대단하셨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회사 설립 초기 아버지는 회사 마크를 한반도 지도 모양으로 했어요. 그런데 이 지도를 점점 단순화시키더니 번개 모양으로 만들었죠. 그러곤 ‘번개는 곧 전기 아닌가’라며 무릎을 치시더니 社名(사명)을 아예 번개표로 바꾸었습니다. 검은색 일색이던 성냥에 색을 집어넣은 분도 아버지셨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생활형편이 급격히 기우는 가운데 6·25가 터져 그의 가족은 피란처였던 대전에 눌러살게 됐다. 어머니는 홀로 형제를 키우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광주리 장사를 했고, 두 살 위의 형은 그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 다녔다. 고생하는 어머니와 형을 보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의대나 공대에 가기 위해 명문 대전고에 진학했다.
“1950년대 중후반 대전고는 한 해에 서울대에 200여 명씩 합격할 정도로 명문이었습니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등 서울 명문고 학생들이 피난 와 다니던 학교였죠. 이 학교에서 저는 인생을 바꿔놓은 교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문화의 시대를 예고한 고교 은사
理科(이과)반 학생이었지만 그는 1학년 때부터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입학과 동시에 미술 서클에 가입, 시간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기 때문. 하지만 같은 서클의 다른 친구들이 그렇듯 미술대 진학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미술 공부는 그냥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하는 취미였다.
이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학년 말 새로운 교장이 부임하면서부터다. 대구사범학교에서 온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아이들이 미술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지도교사가 없어서야 되겠느냐”며 미술 교사를 채용했다. 또 이과생들에게 <小學>을 익히도록 하는가 하면 문과생들에게 물리학을 공부하게 했다. “너무 일찍부터 전공만 하면 기능인이 된다”며 文·理科(문·이과) 소양을 동시에 쌓도록 한 것이다. 통섭 교육을 일찍부터 실천했던 셈이다. 이 교장이 훗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살아있는 은사로 알려진 朴寬洙(박관수) 선생이다.
교사들 사이에 ‘호랑이 교장’으로 불렸던 박 교장은 미술반에 들러 이런 훈시를 하곤 했다.
“지금은 전쟁과 식량난으로 먹고살 걱정을 하지만 제군들이 사회에 진출할 즈음에는 취미가 직업이 되는 문화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문화의 시대가 오면 미술하는 너희들이 총칼 들고 나라 지키는 군인보다 애국할 기회가 온다. 자기 전공이나 취미로도 얼마든지 조국에 충성할 수 있으니 미대 진학을 고려해 보라.”
의대보다는 공대 건축과가 그림 그릴 기회가 많아 그쪽으로 진로를 굳혀가고 있던 그는 흔들렸다. 아들이 화가가 되길 바라던 아버지의 遺言(유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그는 의대를 지망하고 있던 친구와 함께 3학년 말에 진로를 전격 수정했다. 당시 그와 함께 서울대 미술대에 진학한 그 친구가 바로 세계 유명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고 있는 在佛(재불) 화가 金寅中(김인중) 신부다.
서울대 재학 중 그는 최연소 國展(국전) 특선, 최연소 국전 추천 작가 등 많은 기록을 갈아치웠다. 졸업 후에는 ‘철학이 빈약하면 미술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해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이 화백은 “역사적으로 전해오는 畵論書(화론서)들은 대부분 書畵家(서화가)들이 쓴 것인데, 이를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한학자들이 해독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림 기법과 작가의 고뇌가 들어가 있는 화론서를 화가들이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은 효용주의 교육 철학이 낳은 병폐”라고 말했다.
“요즘 화가들은 그림만 그릴 뿐 인문학이나 과학에 대한 소양을 쌓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통섭이 안 돼 난초는 잘 그리는데 대나무는 잘 못 그린다든가, 수묵에는 강한데 채색에는 약하죠. 미술이 기능화되고, 분업화되고 있는 겁니다. 동서양을 떠나 위대한 화가들은 사상(철학)과 재료(과학)와 기술(기법)을 두루 섭렵한 뮤러리스트(muralist)들이었어요. 해부학자이자 천문학자였고, 화공학자이자 연금술사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죠.”
문화와 과학이 화학 반응해야
산수화를 비롯해 초상화와 사군자 등에 능했던 玄洞子(현동자) 安堅(안견)이나 書畵(서화)는 물론 經學(경학)과 金石學(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도 뮤러리스트였다. 이 두 거장은 대전이 자랑하는 조선시대 화가다.
대전은 유난히 많은 화가들을 배출했다. 李馬銅(이마동), 朴魯壽(박노수), 張旭鎭(장욱진) 등도 이 고장 출신이다. 이들의 뒤를 잇고 있는 화가가 이종상 화백을 포함해 閔庚甲(민경갑) 전 원광대 교수, 김인중 재불 화가, 柳熙永(류희영) 서울미술관장, 李澈周(이철주) 전 중앙대 예술대학장 등이다. 이들 네 사람은 모두 대전고 동문이며, 이 중 이 화백과 민경갑, 류희영 등 세 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 市道(시도)에서, 그것도 한 고등학교에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이렇듯 많이 배출한 곳은 없다고 한다.
이 화백은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충청도 사람의 기질이라 대전은 문화예술인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지역”이라며 “이런 토착적인 저력 위에 각 곳의 지방색이 접변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의 환경을 구비하고 있는 곳 역시 대전”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전이 문화도시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이종상 화백은 최근 3년 사이 대전에서 가진 자신의 전시회 경험을 들어 그 까닭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이 화백은 2007년 4월 대전시립미술관과 대전 TJB 방송이 공동주관한 ‘한국현대미술의 거장 이종상’ 초대 개인전을 시립미술관 全館(전관)에서 열었고, 지난해 말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찾아가는 미술관 사업 일환으로 카이스트와 공동주관한 ‘과학정신과 한국현대미술’展(전)에 초대작가로 참여했다.
“대전을 과학도시라고 하는데, 오랜만에 가서 보니 분위기가 참 묘하더군요. 과학 단지와 그 외의 도심이 동거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과학 단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전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문화활동은 서울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전의 과학과 문화가 통섭하지 못해 서로 겉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카이스트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놀랍게도 대전 지역 작가가 눈에 띄지 않았다. ‘지역 작가가 없는데 어떻게 이게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시도한 전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대작가 대표로 인사말을 하는 자리에서 “대전이 과학도시,문화도시로 발전하려면 이 지역의 토착적인 문화와 첨단과학이 섞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화백은 전시회가 아닌 강연 때문에 카이스트를 여러 번 방문했다. 그때마다 이 학교는 외부인들만 드나드는 ‘사랑방’ 같은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는 유물이 되어 가고 있는 엑스포공원을 보았다. ‘저곳에서 끊임없이 음악회가 열리고 미술 전람회가 열리면 엑스포는 계속될 것이고, 대전의 문화가 살아 움직일 텐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유물화된 공간은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전은 恒心(항심)의 중심지입니다. 항심은 은근과 끈기의 충청도 사람을 뜻하죠. 문화의 생명이 지속성이라는 점에서 대전은 문화와 과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충청도의 기질을 살려 과학과 문화가 발전적으로 화학 반응하는 도시로 키워 나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