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錫俊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 1952년 경북 의성 출생.
⊙ 서울대 공대 졸업. 美 캘리포니아대 LA대학원 정치학 박사.
⊙ 경북대 부교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이화여대 정보과학대학원장,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 한국행정학회장, 제17대 국회의원 역임.
⊙ 저서: <한국산업화국가론> <거버넌스의 이해>(共著) <거버넌스의 정치학>(共著) 등.
[프랑스의 소피아 앙티폴리스]⊙ 1952년 경북 의성 출생.
⊙ 서울대 공대 졸업. 美 캘리포니아대 LA대학원 정치학 박사.
⊙ 경북대 부교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이화여대 정보과학대학원장,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 한국행정학회장, 제17대 국회의원 역임.
⊙ 저서: <한국산업화국가론> <거버넌스의 이해>(共著) <거버넌스의 정치학>(共著) 등.
한 인간의 오랜 꿈이 만들어낸 첨단과학도시
프랑스 남부의 유명 휴양지 코트다쥐르(일명 프렌치 리비에라)의 중심지인 니스 인근에 있는 연구학원 도시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한 인간의 오랜 꿈의 소산이다.
국립 파리광산학교 교수이던 피에르 라피트는 1960년대 초 <르몽드>에 기고한 ‘들판의 라틴구’(라틴구는 프랑스 파리의 大學街)라는 글에서 ‘과학과 문화, 도시가 어우러진 새로운 개념의 삶과 일터’를 제창했다.

그는 후일 상원의원이 되자 1969년 소피아앙티폴리스협회를 설립해 자신의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소피아 앙티폴리스라는 이름은 라피트가 직접 지었다. ‘소피아’는 그리스어로 ‘지혜’라는 뜻이다(소피아는 라피트의 부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앙티폴리스는 이 연구단지가 들어선 지역 앙티베스와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스’의 結合語(결합어)다.
1972년 소피아 앙티폴리스 건설사업 추진기구인 SYMIVAL(발본느지구 개발시설혼합조합)이 설립됐다. SYMIVAL은 개발예정 부지의 3분의 1은 혁신기술연구시설 및 주택 지역으로 개발하고, 나머지는 그린벨트로 지정했다.
1960년대부터 니스 인근에는 IBM,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등 미국의 IT기업들과 니스대학, 각종 시험연구기관들이 입주하여 소피아 앙티폴리스가 첨단산업단지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1974년 이후 소피아 앙티폴리스에는 세계적인 특수화학 및 기능소재 회사인 스위스의 롬&하스(Rohm & Hass),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 에어 프랑스의 예약센터,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디지털 이퀴프먼츠 유럽지사 등이 입주했다. 2003년까지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1200여 개의 업체 2만4500명의 종업원을 수용하는 세계적인 첨단산업단지로 성장했다. 소피아 앙티폴리스에 입주한 회사들 가운데 148개 회사가 외국 회사고, 이 지역에서 근무하는 종업원 가운데 4000명이 고급 연구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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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코트다쥐르에 있는 연구학원도시 소피아 앙티폴리스의 전경. |
오늘날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 최고의 첨단산업단지가 됐다. 특히 사이언스 전자, 로봇, 전자통신 분야의 연구개발 활동이 활발하다. 생명 및 의료과학, 화학 등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 소규모 스핀 오프(기업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회사 내 일부 사업부문을 떼어내 分社시키는 것) 기업들도 많이 입주해 있다.
소피아 앙티폴리스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중반 단지조성이 완료되고 첨단산업 관련 기업도 유치했지만, 지역경제 파급효과가 미흡하고 단지 내 혁신적인 환경이 조성되지 못해 ‘첨단기술의 섬’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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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앙티폴리스를 만든 피에르 라피트(왼쪽). |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소피아 앙티폴리스에 입주한 기업들이 프랑스가 갖는 국가적 이미지, 리비에라 해안이라는 지역의 이미지를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는 데만 관심이 쏟고 단지 내의 다른 기업이나 지역경제와의 관계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소피아 앙티폴리스에는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INRIA(국립컴퓨터과학·제어연구소)·CNRS(국립중앙과학연구센터) 같은 유수의 연구기관에서 分社(분사)한 스핀 오프 기업들이 혁신을 주도하면서 단지 내 기업 간, 연구기관들 간에 역동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국제적인 교류도 활발해졌다. ‘소피아 앙티폴리스재단’, ‘소피아스타트 업’, 하이테크 클럽, 텔레콤밸리 등 소피아 앙티폴리스를 지원하는 각종 NGO(비정부단체) 및 NPO(비영리단체)의 역할도 컸다. 1982년 제정된 지방분산법은 지방의 道(도·데파르트망)에 힘을 실어 주어 소피아 앙티폴리스를 첨단과학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연구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한 지 20년 이상이 지나서야 기대했던 효과를 내고 있는 소피아 앙티폴리스의 경험은 첨단산업연구단지 조성사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소피아 앙티폴리스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그 발전과정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라피트 상원의원의 존재는 첨단산업단지 조성에 있어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일본 쓰쿠바 연구학원도시]
연구주체들의 비협조로 실패한 연구학원도시
쓰쿠바 연구학원도시는 도쿄 대도시권의 인구과밀을 완화시키고, 기초연구 분야의 국가과학기술 활동을 한곳에 집중시키기 위해 조성됐다. 도쿄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쓰쿠바 연구학원도시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영국의 전원도시 개념을 접목해 만들어졌다.
1970년 쓰쿠바 연구학원도시 건설이 본격화됐지만 도쿄 소재 기업들은 이전을 기피했고, 쓰쿠바로 이전한 연구소나 기업체의 직원들도 쓰쿠바에 거주하기를 꺼렸다. 그러자 일본정부가 쓰쿠바로 이전하는 대학이나 국립연구기관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이전을 독려했다. 덕분에 1980년까지는 24개 국·공립 연구기관이 쓰쿠바로 이전했고, 9000여 명의 연구소 및 기업체 직원들이 쓰쿠바에서 근무하게 됐다.
1980년대 중반 세계무역박람회 개최와 고속도로 등 기반시설 확충에 힘입어 1998년까지 5개 대학, 36개 국립연구기관, 21개 공립연구기관, 그리고 243개의 민간회사가 쓰쿠바에 입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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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쿠바연구학원도시는 혁신과학도시로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
오늘날 쓰쿠바는 약 2만5900명의 연구인력을 포함해 18만명의 인구를 수용하는 과학기술연구 중심 신도시로 성장했으며, 2030년까지 인구 35만명을 수용하는 도시로 확장될 예정이다.
하지만 쓰쿠바는 연구기관의 집중과 연구기관 간 교류협력의 강화를 통해 혁신환경을 조성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대형 국·공립연구기관과 민간연구소들이 입주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폐쇄적이고 산업계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구기관들의 지역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크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중앙 및 지방정부, 지역 유지들은 이바라키 살롱, 쓰쿠바 講義(강의) 등의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한편, TCI라는 창업보육센터와 쓰쿠바정보센터 등을 설치 운영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쓰쿠바의 사례는 첨단산업연구단지에서 혁신활동이 증진되기 위해서는 생산기능과의 연결이 필요하며, 연구단지 내 주체들의 노력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의 제도적 지원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대만 신주과학산업단지]
연구개발과 생산활동 결합, IT산업의 요람
1980년 출범한 대만의 신주과학산업단지는 과학기술개발과 생산활동을 상호 집적·연계할 수 있는 첨단단지를 조성해 고급 기술인력과 첨단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80년대 실리콘밸리의 경기침체로 인해 해외 고급두뇌들이 신주단지로 유입되면서 형성된 신주과학산업단지는 1990년대 후반 IT분야에서 아시아 최고로 떠올랐다. 신주단지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노트북, 서버, CDT 모니터, LCD 모니터, 광학축적기억장치, 디지털 카메라 등은 신주단지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중소기업으로 출발한 에이서(Acer)컴퓨터社(사)는 세계적인 컴퓨터 업체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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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신주과학산업단지는 연구개발과 IT산업을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신주단지 내 업체 수는 1990년 121개사에서 2004년 384개사로, 종업원 수는 1990년 2만2356명에서 2004년 11만3329명으로 증가했다. 신주단지 입주업체들은 대부분 IT관련 업체로 집적회로업체가 전체의 43.3%인 168개를 차지하며, 광전자, 컴퓨터 및 주변기기, 텔레커뮤니케이션 업체가 그 뒤를 잇는다.
신주과학산업단지의 성공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컴퓨터와 정보통신 관련 분야에 特化(특화)해서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관련 업체 간 集積(집적)경제의 利點(이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둘째, 대만정부는 적극적인 공장부지 판촉활동과 입주기업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국내외 우수 인재와 기업들을 유치했다.
셋째, ‘과학산업단지’라는 이름처럼 연구개발과 생산활동이 효과적으로 결합됐다. 연구중심 대학인 국립 지아오퉁대와 국립 칭화대가 인근에 입지해 단지 내 기업들에 우수인력과 첨단기술을 제공했다. 또 단지조성과 함께 공업기술연구원(ITRI), 국가고성능컴퓨터센터, 방사광가속기연구센터, 국가우주계획실, 정밀기기발전센터, 웨이퍼설계제조센터, 나노기기실험실과 같은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어 활발한 産·學·硏(산·학·연)협력 연구를 수행해 왔다.
특히 ITRI는 대만 IT업체들의 기술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해 왔다. 신주과학산업단지 기업의 절반 이상이 ITRI와 공동개발 프로젝트, 기술이전 등의 관계를 맺어 왔다. ITRI는 대만 IT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스핀 오프 업체들도 다수 탄생시켰다.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신주단지는 대내외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01년 전세계적인 IT산업 불황은 IT라는 단일 산업분야에 특화된 신주단지에 커다란 시련을 안겨주었다. 중국 중관춘의 성장, 한국 IT기업들의 약진, 유럽 IT기업들의 도전, 중국과의 무역확대와 중국으로의 산업시설 이전 등도 신주단지에는 새로운 도전이다.
내부적으로는 포화상태에 이른 신주단지의 공간부족과 환경오염이 문제가 되고 있다. 중앙정부의 하부조직인 단지관리국(SIPA)의 통제를 받는 신주단지가 지역사회와 고립되어 지역민들과 갈등을 빚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인도의 방갈로르]
기업가 정신이 낳은 소프트웨어 산업의 요람
인도의 방갈로르에는 이 도시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중심지가 되기 이전에 이미 많은 公共(공공)연구개발 기관과 산업체들이 있었다. 방갈로르에 있던 인도과학원(IISc)과 인도경영대학(IIM)이나 첸나이인도공과대학원, 뭄바이인도공과대학원 등 우수한 교육기관들은 이러한 연구개발 기관이나 산업체에 인재들을 공급해 왔다.
방갈로르의 제1세대 기업가들은 기업체나 공공연구소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발견하면 과감하게 자신의 기업을 설립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방갈로르에서는 소프트웨어산업이 勃興(발흥)하기 시작했고, 이는 머지않아 수출산업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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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방갈로르 기술단지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소프트웨어산업을 정부가 적절하게 지원하면서 발전했다. |
1980년대 중반부터 소프트웨어산업이 수출산업으로 떠오르자 인도정부는 州(주)정부와 협력해 소프트웨어 파크(STP)를 설립하고 이들을 지원했다. 인도정부는 1990년 방갈로르·푸네·부바네스와르 등 세 곳에 소프트웨어 파크를 설립했다. 이듬해까지 약 60개의 기업들이 소프트웨어 파크에 수출단위조직을 입주시켰다. 이와 함께 인도정부는 여러 정책들을 자유화하는 한편,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절차들을 간소화했다. 소프트웨어 파크 정책은 1980년대 후반 이래 소프트웨어 수출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방갈로르가 속한 카르나타가주 정부는 소프트웨어 관련 인력의 수요증가에 따라 기술교육을 민영화했다.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 산업이 요구하는 컴퓨터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민간기술학원들이 대거 설립됐다.
인도 소프트웨어 산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이다.
첫째, 풍부한 고급 기술인력이 큰 역할을 했다. 매년 영어에 능숙하고 數理(수리)능력이 뛰어난 수십만 명의 과학기술 인력이 배출되고 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진입하고 있다.
둘째, 방갈로르를 중심으로 훌륭한 대학과 연구소, 연구소 내 기업조직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규모 첨단기업들이 생겨났다.
셋째, 인도인들의 글로벌 네트워크, 즉 在外(재외) 인도인들을 매개로 한 마케팅 및 기업 간 전략적 제휴, 벤처캐피털 자금 공급 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인도인들은 인도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수출 대리인 역할과 함께, 미국의 벤처자본이 인도로 흘러가게 하는데 있어 중간자 혹은 직접 투자자 역할을 하고 있다.
넷째, 소프트웨어 산업의 가능성을 깨달은 인도정부가 소프트웨어 파크 설립 등 소프트웨어 산업 진흥정책을 추진한 것이 주효했다.
방갈로르는 혁신클러스터 조성과 관련해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는 촉매역할에 그치는 것이 혁신클러스터 조성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인도정부는 스스로 소프트웨어 개발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시장원리를 존중하면서 금융혜택, 고속통신망 제공 등 간접적인 지원에 그쳤다. 특히 해외기업들의 투자촉진을 위해 원스톱 창구까지 만들었다. 이는 인도의 기존 행정시스템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일이었다.
방갈로르를 둘러싼 기존의 여건에 이런 노력들이 더해지면서 인도는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