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水山
1946년 강원도 인제 출생. 경희大 영문과 졸업.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사월의 끝」이 당선되어 등단. 1973년 장편 「解氷期의 아침」이 한국일보에 입선. 주요 작품으로 「부초」, 「안개 시정 거리」, 「流民」, 「밤의 찬가」, 「욕망의 거리」 등이 있다.
내 은사이신 영문학자 박용주 선생은 평생 사과를 좋아했었다. 하루에 몇 개씩의 사과를 드셨다. 그는 T·S 엘리엇 詩를 원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1946년 강원도 인제 출생. 경희大 영문과 졸업.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사월의 끝」이 당선되어 등단. 1973년 장편 「解氷期의 아침」이 한국일보에 입선. 주요 작품으로 「부초」, 「안개 시정 거리」, 「流民」, 「밤의 찬가」, 「욕망의 거리」 등이 있다.
영웅적인 행위에 무능했던 엘리엇의 어떤 주인공은 자기가 해왔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개탄하면서 「나는 일생을 커피스푼으로 되질해 왔노라」고 했다면, 자신은 「일생을 사과를 씹으며 보냈노라」고 해야겠다고. 하루에 몇 개씩만으로 계산을 해도 평생 동안 그 많은 사과를 먹어 댄 것이 겨우 자신의 半生(반생)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이라는 개탄이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문득 이 글을 떠올린다. 그나마 커피스푼으로 되질하는 일도, 사과를 먹어 대는 일도 없이 흘러간 나의 10년은 무엇이었던가. 문호 괴테는 「죽어라 그리고 이룩하라」고 했지만, 나는 죽지도 못하고 이룩하지도 못하면서 10년을 보냈다. 주위의 사람들은 늙어 갔고, 사라져 갔다. 아이들은 젊은이가 되고 그리고 새로 태어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사랑과 그 시대를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먼눈으로 보면 다른 10년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을 지난 10년이 그것을 산 우리들에게 특별한 까닭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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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삼풍백화점 붕괴. 피로에 지친 구조대원. |
나는 삼풍백화점 붕괴를 아주 옛날에 있었던 어떤 악몽으로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10년 전인 1995년의 일이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경악하게 한다. 망각의 벌레에게 파 먹힌 기억이란 이렇게 허망하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알아 왔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정치가 이상과 현실의 조화라는 원칙을 아직도 믿고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우리의 정치에서 지난 10년 동안 이상과 현실의 조화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민과 타협하려 하지 않는 정치가 어디에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얻을 수 있었으랴. 그 결과는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거나,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국민이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치에서 꿈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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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경기 연천지역 폭우로 엿가락처럼 휜 철로. |
우리는 지난 10년 야당에서 오랜 對與 투쟁을 거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갖는 감격어린 체험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격만큼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겨우 이것을 하기 위해 이 사람들은 그토록 오래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가, 물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 또한 꿈이 이루어졌다고 환호하기에는 너무나 척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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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IMF 외환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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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서울역 대합실의 노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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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박세리 LPGA 우승. |

그리고 금강산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2000년 여름, 평양에서 남북 頂上회담이 열리던 날 아침.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박물관 벽에는 몇 명이 떠메지 않고는 운반조차 어려울 거대한 인공기가 걸렸다. 누가 그 큰 깃발을 준비했고, 내걸었는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허탈감 속에서 나는 우리들의 「분단된 自畵像(자화상)」을 떠올린다.
남북관계가 체제경쟁이라는 구도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對北(대북)지원의 투명성 문제, 북한인권에 대한 함구, 北核(북핵)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를 통한 우리 내부의 갈등이었다. 「6·25는 해방전쟁」이라는 일군의 주장은 남북관계의 변화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이념문제로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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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안동 하회마을을 찾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
바닷가에 가면 거기서 살고 싶었다. 계곡에 가면 거기서 칡 넝쿨처럼 어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우리의 살림살이는 눈물겨웠다.
성장만이 우리의 것으로 알았던 황금시대의 끝은 너무나 황망했다. IMF 구제금융 시대라는 경제적 추락이 시작되고, 불황 속에서 명예퇴직의 한파가 서민가정을 뿌리째 흔들었다. 그 파고 속에서 겪어야 했던 大宇(대우)와 金宇中(김우중) 신화의 몰락도 우리 시대 아픈 좌절의 하나였다. 이어서 150만의 실업대란이 다시 청년실업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들을 내리덮었다. 이 먹구름은 아직도 걷힐 줄을 모른다. 나는 대학에서 2학기가 시작되면, 취업증명서를 낸 학생들은 강의를 듣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해 왔다. 한 강좌에 10여 명을 넘던 이런 학생들이 금년에는 겨우 2명이다. 청년실업문제는 이처럼 대학 강단에 선 선생의 마음까지 시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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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낙천·낙선운동. |

실업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알았으나 거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우리들의 시대는 주저앉아야 할 것인가. 지난 10년간 수십조원의 돈이 위기의 농업을 위해 「투자」와 「융자」라는 이름으로 쏟아 부어졌다. 그러나 농업경쟁력은 키우지 못한 채 우리의 농가는 더 황폐해져만 갔다.
「가진 자가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는 YS 정권의 예언(?) 이래 끊임없이 부자를 괴롭혀 온 정책들을 되돌아본다. 부자들의 도덕성이 문제이지, 부자가 희망과 우상이 되지 못하는 사회,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젊은이의 열망이 부끄러움이 되는 사회라면 거기에 또한 무슨 꿈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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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서울에 32년 만의 폭설. |
허리가 휘는 私교육비, 低출산, 치솟은 이혼율, 조기 해외유학도 우리가 만들어 낸 지난 10년이다. 만연된 性매매와 함께 全 국토는 고기 굽는 냄새와 러브호텔로 뒤덮이고, 식당에서 손님들 사이를 들뛰는 아이를 나무라면 『당신은 애 안 길렀어요?』 하고 대드는 이상한 젊은 부모들을 지난 10년은 너무 많이 길러 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난 10년 가장 아팠던 도시는 대구가 아닐까. 건설 중인 지하철이 폭발한 곳도 대구였으며, 달리던 지하철이 방화에 휩싸인 곳도 대구였다. 끊임없는 사건 사고와 함께 우리의 아픈 기억에는 2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KAL기의 괌 추락사고도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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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인천국제공항 개항. |

「고난을 딛고 영광으로」 라는 말을 실현한 한국영화의 융성 그 10년은 우리 모두의 즐거움이었다. 「쉬리」를 기폭제로 터져 오른 폭죽은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좋은 감독, 좋은 배우가 넘쳐나고 한국영화의 극장점유율 60%라는 놀라운 현실은 영화인들이 쏟은, 말 그대로 땀과 눈물의 쾌거였다. 여기에 韓流(열풍)열풍이 동남아를 휩쓸며 이어졌다. 「후유노 소나타」와 「욘사마」 열풍은 알고 지내던 일본인 친구를 안내해 남이섬과 춘천을 다녀오도록 나를 내몰기도 했다.
그리고 2002 韓·日 월드컵이 있었다. 월드컵 4강 진출은 우리가 근대사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을 되찾은 일대거사로 기억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박찬호·박세리·박지성, 이들 박 트리오를 필두로 해외에서 들려오는 스포츠계에서의 성공담은 우리의 자존심으로 환치되어도 좋았다. 「그래. 우리도 해 낼 수 있어!」 라는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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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4강. |

「성공」과 「좌절」은 동전의 양면처럼 뒤섞인다. 상처가 없는 영광은 없다. 어찌 지난 10년의 성취를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궁핍과 수난과 좌절의 10년이었다고 뒤돌아보기에는 지나온 발자국에 담겨 있는 자랑스러운 성취의 기쁨은 우람하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복제성공, 삼성이 이뤄 낸 반도체 산업의 개가는 우리 민족이 마음껏 자랑스러워해도 좋은 가슴 뿌듯한 성취였다. 런던을, 뉴욕의 맨해튼을 걸으며 세계의 유수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치솟아 있는 우리 기업의 광고판을 바라볼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자긍심으로 간직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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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이라크 派兵. |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민초들 사이에 일어났던 두 가지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금 모으기」와 「촛불시위」가 그것이다. 둘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제 발로」 이루어 냈다.
세계를 놀라게 한 민족적 결집력을 보여 준 금 모으기가 우리 모두의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간 「제 발로」였다면, 촛불시위는 달랐다. 스스로가 선택하고 주장하는 정당한 의사표현을 위한 또 다른 「제 발로」였다. 자율성을 통한 지방의 혁신이나 시민사회의 再구성을 위한 가능성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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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대구 지하철 참사. |

詩人 조병화는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온다」고 노래했다. 그 詩人조차 이제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누군가는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다난한 현실뿐, 이상이나 꿈을 기르지 못한 세월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바로 10년 전인 1995년 가을, 來韓했던 영국의 석학 앤서니 기든스가 대담에서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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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욘사마 열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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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복제 개를 탄생시킨 황우석. |
『우리는 시장에 의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경제와 정의,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틀을 짜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는 우리가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귀중한 인류의 자산이라고 확신합니다』
10년 후인 지금도 이 말은 우리의 과제가 되어 절실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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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APEC 정상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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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청계천 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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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타임」誌 표지모델 박지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