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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05년 9월호

「한 권으로 끝내는 논술만점 가이드」① 글을 잘 쓰려면
연습이 완벽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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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서울大 교수(도시계획 전공)
서울大 사회학과 졸업. 미국 캘리포니아大 도시계획학 박사. 서울大 환경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同 대학원장, 조선일보 비상임논설위원, 한국미래학회 회장 등 역임. 「한국공간구조론」 등 전문저술을 비롯해 서양화가 장욱진의 전기 등 저술. 장욱진 전기는 「20대에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으로 선정됨.

[진행·정리]
李相欣 월간조선 기자〈hanal@chosun.com〉
李相姬 월간조선 조사요원〈gwiwon27@chosun.com〉
  필요는 발명을 낳고, 열등감은 자기향상의 분발로 이어짐이 삶의 발전 방식이다. 여기 이 글을 적기로 작심한 것은 내가 「타고난」 글쟁이여서가 아니다. 주위에는 「타고났다」 싶은 문재(文才)들이 많지만, 거기에 기죽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보여 주는 좋은 글 수준을 나에 대한 채찍으로 삼아 오래 고심하고 각고해 왔다고 감히 자부하기 때문에 몇 자 적는 것이다.
 
  글 내용에 대한 칭찬은 읽었던 사람이 잘 봐준 덕분이라 알고 있고, 다만 의사전달이 비교적 조리정연하다는 평가를 주위에서 들은 바 있기에 그 경위를 후배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다. 글을 제대로 적어야 할 필요성은 예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시대가 바야흐로 지식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후배들이 더 많이 지식산업에 종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지식산업은 말과 글로 먹고사는 직업이다. 문학지망생의 감성 훈련이던 시절과는 달리, 글쓰기는 이제 살아가는 데 생명줄이 되었다. 최근 신문보도는 기업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의 국어 실력이 영어보다 더 나빴다 한다. 이런 경보음이 대학 문턱 앞뒤에 있는 후배들에게 글쓰기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내 글쓰기는 열등감이 출발점이었다. 내가 대학이라는 지식산업체에 몸담고부터 글쓰기 자체가 내 직업이 되었다. 틀에 박힌 학술논문 쓰기에 더해 도시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 전문 내용을 알기 쉽게 말해 줄 수 있는 이른바 「학술형 수필(academic essay)」도 즐겨 쓰고 싶었다. 그래서 벤치마킹한다고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니, 나는 아니다 싶었다. 신문·잡지 등의 지면에 등장하는 선필(善筆) 또는 미문(美文), 다시 말해 좋은 글을 만날 때마다 열등감만 쌓여 갔다.
 
  열등감이나 부끄러움은 고통스럽기는 해도 사람이 클 수 있는 자양분이다. 그래서 열심히 좋은 글을 가려 읽으려 했다. 심지어 좋은 글의 필자를 직접 만나 한 수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시도 속에 내가 제일 먼저 깨달은 사실은 교수 초년에 적은 글에서 영어의 버터 냄새가 진동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중ㆍ고교 시절에 국문법 교실이 있었지만, 어머니 혀로부터 우리 말을 직접 배운 바라 문법공부는 건성이고 뒷전이었다. 이 연장으로 슬슬, 술술 말하듯이 적으면 그게 글이 된다는 식의 자기 고집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대신, 사전을 뒤적이며 영어를 익히는 사이에 영문법은 어지간히 꿰뚫었다. 이게 불씨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적은 글이, 지금 되돌아보니 영어문장을 우리말로 옮긴 식이 태반이었다. 영어문장 하나에는 주어가 하나임을 맹신한 나머지, 이를테면 「우리 학교는 건물이 아름답다」고 말함이 자연스러운, 우리말의 이중(二重) 주어 용례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학교 건물이 아름답다」하면 될 것을 일제 문화의 잔재인, 「의」란 조사(助詞) 사용에 지칠 줄 모르는 일본어법을 답습해서 「학교의 건물은 아름답다」는 식으로 우리말을 거추장스럽게 만들지 않았던가.
 
 
  「큰 말」, 가치 강요하는 표현 피하라
 
  우리 글을 우리 글답게 적어 보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글쓰기 요령의 양대 산맥 가운데 하나라면, 또 하나는 글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의 탐색일 것이다. 메시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이라도 나는 꼭 나만의 시각을 제시하려고 애쓴다. 정답이 뻔히 보이는 식의, 남과 맞장구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한다. 시각의 제시 방식도 「세상은 어쩌구 저쩌구」 식의 거창한 「큰 말(big words)」 사이에 나와 남의 개인적 일화도 곁들여 큰 말들이 피부에 닿게 읽히도록 유념한다.
 
  메시지는 대소 세상사의 시비(是非), 장단(長短)을 따져 본 뒤 읽는 사람에게 올바른 판단을 도울 수 있는 방향으로 필자의 뜻이 반영된다면 그걸 좋은 글이라 하겠다. 내 분야 세상사를 비교적 균형감 있게 설명해서 상대방의 사태파악에 도움되는 글을 적으려 하기 때문에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식의 가치 강요적 단언(斷言)은 삼간다. 참고로 사태의 인과를 따져 보는 설명식 글이 요즘 한창 세간의 관심이 되고 있는 대입(大入) 논술시험에서 기대하는 바이지 싶다.
 
  글쓰기, 더 구체적으로 논술시험에 대한 대비는 신문만 한 교재가 없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신문 지면에는 세상의 문제가 노출되어 있고, 그 해법에 대한 세인들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 무엇이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는지는 사설(社說)에서 다루고 있는 세상사를 살피는 것이 능률적이고, 그 해법은 기고자의 이름이 적힌 칼럼을 읽으면 효과적이다. 문제 적시에 이어 단도직입적으로 해법 내지 입장을 제시하는 사설에 견준다면, 칼럼은 문제 적시에서 대안 제시 내지 해법에 이르는 논리적 설명이 훨씬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음독(音讀) 또는 순독(脣讀)으로 교정
 
  보통사람이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힘주어 말하기 시작하면 길어지게 마련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듣고 읽는 사람에게 요령부득이기에 꼭 알맞다.
 
  나도 번번이 글이 예상 분량보다 길어진다. 다행히 이 병폐를 선용하는 방도를 터득했다. 예상 분량보다 길어지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다가 얼마 만에 하고 싶은 말을 어지간히 했다 싶으면 그때부터 가지를 치면서 줄거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가다듬는다. 자연히 분량도 알맞게 줄어든다. 그 결과, 내용이 한결 알차면서 요령 있는 글이 태어나곤 했다.
 
  이 과정에서 글을 소리내어 읽는 음독(音讀)이 글자와 내용을 바로잡는 교정에 효과적임은 빼어난 선배 글쟁이들의 작업을 엿보면서 내가 익힌 바다. 주변 사정 때문에 음독이 불가능하면 입술로 읽어 보는 순독(脣讀)이 차선책이다.
 
  음독이든 순독이든 나는 글 고치기를 길고 짧은 글 할 것 없이 적어도 스무 번 넘게 거듭한다.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항상 어려운 도전이고, 그럼에도 노력하는 만큼 좋은 글을 쓸 수 있음을 후배들에게 말해 주려 함이다. 영국 속담이 출처라 하지만, 오히려 만고의 진리라고 말함이 옳겠다. 「연습이 완벽을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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