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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감독을 만나다

하길종

한국형 ‘뉴 시네마 운동’의 기수

글 :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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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UCLA 영화대학원에서 공부, ‘아메리칸 뉴 시네마’ 영향 받아
⊙ <바보들의 행진>으로 유신시절 젊은이들의 좌절 그려
⊙ ‘시대와의 불화’속에서 영화 7편 남기고 요절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나는 영화 미디어가 지향해야 할 길은 현실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추악한 행위를 진실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고 믿는 편이다. 즉, 작가의식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투시하는 안목과 현실의 내면을 투시할 수 있는 시혼(詩魂)이 깃든 보는 자로서의 냉철함이, 하나의 순수한 의미에서 창작의 목적인 테마를 선명하게 대동하고 코스모폴리탄적 질서를 이루는 데 성공했을 경우 나는 그것을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영화의 본질은 리얼리즘에로의 접근, 즉 안톤 체호프의 말대로 “있는 그대로의 삶”,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만 되는 삶”이 시적 양상의 종국이듯, 영화는 그 시적 양상에서 시 정신으로 영화적 질서를 주입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하길종, 1975, <공주사대 학보> ‘한국 영화의 현실과 전망’ 중에서
 
  1979년 2월 28일, <바보들의 행진> (1975)의 후속작인 <병태와 영자>가 스카라극장에서 관객몰이에 성공하고 있을 때, 술에 만취한 하길종 감독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직접 쓴 글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생애는 어느 영화작가들보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한 이상주의자의 몸부림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가 남긴 작품은 고작 7편에 지나지 않지만, 그가 온몸을 던져 추구했던 영화정신은 아직도 많은 영화인들의 가슴 속에 강렬하게 남아 한국영화계에 ‘하길종’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영화와 대중이 원하는 영화 사이에서 늘 방황했다. 첫 영화로 시인 김지하와 함께 구상한 동학(東學)농민전쟁 이야기 <태인전쟁>이 무산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학혁명이라는 반(反)정부적 주제를 초(超)현실적인 기법으로 다룬 이 작품을 1970년대의 엄혹한 정치상황 속에서 제작하고자 나서는 회사는 없었다. 또 그가 열망했던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은 상업적 성공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영화산업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이 늘 그에게는 갈등이었다. 외국영화 쿼터를 따내기 위한 우수영화제도로 인해 질 낮은 한국영화가 양산되던 19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초현실적 작품을 꿈꿨던 그는 세대를 앞서 가는 ‘이단아’였다.
 
  그가 추구했던 영화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사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는 1941년 부산 초량에서 태어났다. 부친 하치현(작고)씨와 모친 이명선(작고)씨 사이의 5남4녀 중 일곱째였다. 모친은 1948년 지병으로, 부친은 1950년 전쟁 통에 사망해 그는 열 살에 양친을 다 잃었다.
 
 
  샌프란시스코 예술아카데미에 입학
 
   그가 가진 태생적 외로움과 경계 없는 삶의 태도는 어쩌면 이런 일종의 ‘고아의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초량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올라와 비교적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은 늘 최우등에 속하는 수재로 꼽혔다. 입시를 앞두고 그는 학교를 아예 다니지 않으며 3개월간 냉방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해 1959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그 뒤 그는 기행에 가까운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즐긴다. 그때의 멤버가 김지하, 주섭일, 김송현, 김승옥, 곽광수, 정현종 등이다. 이들과의 교분은 유학생활과 귀국 이후의 활동까지 이어져 그의 세대의식과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힘이 돼 주었다.
 
  대학 2학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4·19혁명이 터졌다. 그는 열정적으로 데모대에 합류했고, 그 당시의 강렬한 경험은 이후에 그가 쓴 에세이에 반복적으로 회고된다. 기성세대를 거부하고 특별한 이해관계 없이 정의감만으로 사회를 위해 몸을 던진 경험은 그 이후에 영화감독으로서의 활동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민주주의를 이끌어 냈다는 그의 자부심은 1961년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다. 극심한 심적 혼란을 겪은 그는 바로 떠돌이생활에 들어간다. 그 생활에 대해 그는 “4·19와 5·16을 한꺼번에 캠퍼스에서 겪은 세대의 유일한 꿈은 자기정리를 위한 떠남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은 도둑맞은 여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계속되었다. 1962년 초 서울로 돌아온 그는 여행기간 중 틈틈이 써 놓았던 시들을 묶어 자비로 출판하는데, 이 책이 바로 <태를 위한 과거분사>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당대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슈르’ 혹은 ‘쉬르’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던 초현실주의 시편들의 모음이었다. 그의 시작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초현실주의는 이후 그의 영화창작 활동 전반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자원이 된다. 친동생이며 영화동지였기도 한 하명종 감독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경복궁 앞에 있는 프랑스문화원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프랑스영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 시절이 그가 영화에 매료된 계기가 된 것으로 가족들은 알고 있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불법시위 경력에 걸려 쉽게 일자리를 얻지 못하다가 1964년 유창한 불어와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에어프랑스에 입사해 한국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몇 개월 동안 그는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림에 입사해 잠시 잡일을 거들었던 것으로 지인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에어프랑스 직원 신분으로 미국에 간 그는 얼마 후 회사일을 정리하고는 샌프란시스코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어느 날>(1965)이라는 단편영화를 찍었다.
 
  하 감독은 보다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위해 1965년 UCLA 영화대학원에 입학했다. 미국 영화사에 있어서 1960~1970년은 소위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절정기에 해당하며, 그 주역들을 배출한 곳이 UCLA와 USC 등이 신설한 영화과였다. 그 한복판에 있었던 그는 마치 4·19 혁명의 경험을 되새기듯 열정과 해방의 시기를 보냈다. 입학 다음 해에는 같은 유학생이었던 불문학자 전채린씨(고 전혜린씨의 동생)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1968년 그는 평점 3.70의 우수한 성적으로 코스를 마치고 이듬해 MA(Master of Arts)를 취득했다. 졸업논문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의 시적 경향에 대한 연구>였다.
 
  졸업 전 해인 1967년에 찍은 <나의 환자>는 UCLA 학생 작품 중 우수작으로 뽑혀 USC 영화과와 함께한 교류작품전에 출품됐다. 그 자리에서 그는 조지 루카스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LA서 민주화운동 중 강제 소환당해
 
  졸업 후 그는 중편 실험영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바로 MGM이 전 미 영화과 학생 중 4명만 선발해 지원한 장학사업 ‘메이어 그랜트’의 수혜작이었던 <병사의 제전>(1969)이었다. 이 영화는 현재 사운드는 멸실된 채 이미지만 남아 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실험적 이미지로 가득 찬 이 영화는 하길종의 초기영화 성향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1970년 그는 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 동생 하명종 감독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귀국은 정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LA에서 《한국유학생신문》을 발행하며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반정부운동을 하는 유학생들은 ‘병역기피’ 등을 이유로 강제소환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이후로 가장 역할을 하던 큰형은 당시 경제기획원 통계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사표 혹은 동생의 귀국 중 택일을 종용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 때문에 큰형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귀국보따리를 쌌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육군훈련소로 끌려가 몇 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받고 귀가했다. 귀국 당시 그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유현목 감독과의 인연으로 인해 한국영화계에서도 이미 꽤 알려진 유명인사였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정식 영화학위를 딴 드문 경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계는 기대 반 시기심 반으로, 돌아온 그의 행보를 주시했다.
 
  한국에서 펼쳐진 그의 영화인생은 미국에서처럼 순탄치 않았다. 1970년대는 사전·사후 이중검열제도로 한국영화계의 암흑기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TV 등 대중매체의 보급으로 한국영화는 젊은 층에게 외면받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초현실적 작품을 꿈꾸던 그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감독과 평론가의 일을 병행했다. 1975년부터는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로 부임해 세 가지 일을 함께 해냈는데, 그가 가장 혼신의 힘을 쏟았던 일은 감독으로서 영화 만들기였다.
 
 
  〈화분〉으로 혹독한 신고식
 
〈화분〉(1972년).
  이제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자. 비록 7편밖에 없지만, 확실하게 경계가 나뉘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시기와 관계없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미국에서 만든 극영화 <병사의 제전>(1969)에서 귀국 후 첫 작품인 <화분>(1972)과 <수절>(1973) 등의 작품이다. 이런 영화들은 그가 유학 시절 품었던 낭만과 영화적 정열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극히 순수한 영화적 세계가 드러난 작품들이다.
 
  <병사의 제전>은 실험영화로 무정부주의자적 시각이 담겨 있다. 주제는 월남전의 체험을 비롯해 온갖 상처를 안고 있는 미국 젊은이들의 가치 상실과 방황을 그리고 있다. 묘지에서 전라(全裸)의 남녀가 벌이는 정사(情事)나 법정에 선 시민의 냉혹한 표정, 관을 메고 바다에 뛰어드는 충격적 장면 들은 그가 관찰한 미국사회에 대한 예리한 해부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영상들은 영화적 표현에 선행되는, 영화예술에 대한 강한 의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분> 역시 마찬가지 영상언어로 만든 작품이다. ‘푸른 집’이라고 이름 지어진 집으로 고아인 단주가 끌려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비극이 주제인데, 한 사람의 침입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기성질서와 부르주아적 사회의 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1970년에 시작한 이 작품은 김호선 감독이 조감독으로 참여해 만들었는데, 상당 부분 촬영된 상태에서 예산부족으로 촬영이 중단됐다가 이 작품의 각색과 주연배우까지 맡은 동생 하명종씨가 집 담보까지 제공해 만든 자금으로 촬영을 재개해 완성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동성애까지 포함된 이 문제작들은 대중에게 쉽게 수용될 영화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그해 청룡영화상 심사과정에서 당대의 비평가인 유한철에 의해 촉발된 <테오라마>(피에르 피올로 파졸리니 감독, 1968) 표절 논란으로 인해 하 감독은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는 이 논쟁에서 한 치도 비켜 가지 않고 맞서 엘리트 출신의 젊은 감독다운 패기를 보여줬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화분> 이후 <수절>을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 그는 오랜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몇 편의 시나리오를 썼지만 제작사로부터 거절당했고 정부 검열에서도 ‘보이콧’됐다. 이 시기에 대해 그는 자신이 쓴 글에서 “영화를 거의 포기했었다”고 술회했다.
 
 
  사극 〈수절〉로 현실 비판 시도
 
〈수절〉(1973년).
  이런 좌절을 거쳐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만든 영화가 <수절>이다. 이 영화는 한사군(韓四郡) 시대로 작품의 무대를 가져가 전쟁터에 나간 가장을 기다리는 모녀가 윤간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과 독재가 민중과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발하고자 했지만 이런 저항적 테마는 당시 한국적 영화현실에서 용납되지 않았으며, 반사회적이고 비판적이라고 해서 20분이나 잘려 나갔다. 그 결과 영화는 전작(前作)인 <화분>보다 더 산란하고 난해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초기영화 제작과정에서의 고군분투는 한국영화 시스템을 부인하고 불신했던 그로서는 당연히 겪어야 할 시행착오였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영화계는 허술했지만 강력한 관습적 시스템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장편 극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해 이득을 남겨야지 다음 영화를 제작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는 순간, 그는 싫어도 그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영화비평과 이론소개 활동은 귀국 직후부터 활발했는데, 그에겐 두려움 없이 할 말 다 할 수 있는 이 작업이 훨씬 속이 편했을 것이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만든 사람들을 모두 거침없이 ‘피고’라고 불렀는데, 이들과의 신경전은 곧잘 몸싸움으로 확대돼 그의 온 몸에 반창고가 떨어지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적어도 비평에 있어서 그는 의식과 현실의 불일치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 자신이 상업적 시스템에 편입돼 가면서 자신의 작품과 비평 사이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그는 곧 날카로운 필력을 잃게 되었다. 어쩌면 포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상업적 시스템에 편입해 만든 첫 작품인 <바보들의 행진>(1975)을 계기로 그의 작품은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바보들의 행진>으로 히트
 
〈바보들의 행진〉(1975년).
  두 번째 작품세계는 상업영화로 만들어 히트를 기록한 <바보들의 행진> <여자를 찾습니다>(1976) <속 별들의 고향> (1978) <병태와 영자>(1979) 등의 청춘물이다. 특히 <바보들의 행진>은 지금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그가 만든 영화로는 처음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홈런을 날렸다.
 
  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순탄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부터 시나리오, 제작,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검열로 영화는 만신창이가 된 채 대중 앞에 섰다. 그가 의도했던 많은 설정과 장면들이 가차 없이 잘려 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 이후 대학 캠퍼스에 몰아닥친 좌절과 패배의 기운을 과장된 밝음과 어두움으로 대비한 이 영화는 주인공 ‘병태’를 젊은이들의 대명사로 만들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영화로 한국 영화를 외면하던 20대들이 극장을 찾은 것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영화 속에서 고래잡이 꿈으로 대변되는 젊은이의 희망이 좌절되는 아픔은 그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이상과 낭만이 부서지는 고통에 대한 절규처럼 전달됐다.
 
  이 영화의 성공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런 붐을 계기로 ‘한국영화예술운동’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영상시대’라는 동인(同人)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에는 <나와 나> (1972)라는 범상치 않은 영화를 만들어낸 이원세 감독, <별들의 고향> (1974)을 성공시킨 이장호 감독, 그리고 그의 <바보들의 행진>과 같은 해 <영자의 전성시대>를 흥행시킨 김호선 감독, <화분> 표절논쟁에서부터 그를 지원한 평론가 변인식씨, 시나리오 작가이자 <묘녀> (1974)라는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낸 홍파 감독이 그들이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미국 영화 시스템을 통째로 바꾸었던 ‘아메리칸 뉴 시네마’ 운동을 한국에서 벌여 보려 했다.
 
 
  ‘뉴 시네마운동’ 시도
 
  이 시기인 1978년에 이장호 감독이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묶이자 대타로 맡은 <속 별들의 고향>은 그의 유일한 멜로드라마이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 능력과 한국 영화 장르적 관습을 비교적 자유롭게 녹여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이 작품으로 보여줬다.
 
  이들은 1977년 영화전문잡지 《영상시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 ‘청년문화의 기수’로 등장한 이들에 대한 청년 세대의 신뢰와 동경에 힘입어 연출가 지망생 공모에 910명이나 몰리는 엄청난 화제를 이끌어냈다. 이런 공모를 통해 등장한 배우가 바로 현재까지 중견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영하씨와 고(故) 임성민씨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들이 만든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뉴 시네마운동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특히 그의 <여자를 찾습니다>는 상업주의적 타협이 극에 달한 변신작으로 그 스스로 누구보다 자신을 질책했을 법한 작품이다. 그는 이 시기에도 자신의 영화를 포함한 한국영화 전체에 끊임없는 불만족을 털어냈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 남기고 夭折
 
〈한네의 승천〉(1977년).
  당시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여자를 찾습니다> 직후에 만든 작품 <한네의 승천>(1977)이다.
 
  그의 세 번째 작품세계로 분류할 수 있는 <한네의 승천>은 인간원형의 욕망의 인과(因果)관계를 윤회사상 속에서 표현해 보려는 불교적 세계가 담긴 작품이다. 윤회를 통해 태어난 딸을 아버지가 강간하는 내용을 그린 이야기로, 가족의 붕괴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첫 작품 <화분>과 다름이 없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병사의 제전>이나 <화분>에 나타난 충격적이고 사디스틱한 영상은 나타나지 않고 극히 전통적이고 중후한 이미지로 표현이 돼 있다. 그의 영화 중 가장 미학적 야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작품이다.
 
  <한네의 승천>은 그 스스로 ‘수준작’이라고 평했던 유일한 작품인데, 그해 상반기 우수영화로 선정돼 제작사에 외화수입 쿼터를 준 요식행위의 작품이 되는 수치스런 신세로 전락했다. 젊은 관객들은 그의 정신에는 박수를 쳤지만 ‘새로운 영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늘 그를 술에 취해 살게 했다.
 
  사실 그의 영화 7편 속에는 공통적으로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등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영화전문가들의 평이다. 이런 현상은 사회에 대한 좌절감을 무의식적으로 영화에 투사해 관객의 감정을 착취하는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당대 영화감독들의 정서적 한계를 그 역시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의 마지막 영화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1979년 2월, <병태와 영자>가 개봉됐다. 이 시기에 그의 아내는 프랑스로 공부를 하러 떠나 있었다. 2월 23일, 동생 하명종씨는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다가 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그를 업고 혜화동 병원까지 뛰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닷새 만에 숨을 거뒀다.
 
  고혈압을 앓으면서도 약 먹기를 거부했던 그의 사망원인은 뇌졸중이었지만, 이 지경이 된 간접적인 원인이 답답한 한국영화의 현실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에세이에서 그는 <병태와 영자>의 시사회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자신의 작품 속 병태가 보여주는 순수한 젊음의 힘과 의지에 감동했다는 것이다. 이 글로 보면, 그에게는 자신이 수작으로 꼽은 <한네의 승천>과 다름없이 상업영화인 <병태와 영자>도 그의 정신과 가치를 보여주는 존재들이었던 것 같다.
 
  개봉 중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죽음. 이런 극적인 스토리 속에서 <병태와 영자>는 그가 만든 작품 중 흥행에 가장 크게 성공했다. 그 이후 그의 이야기는 영화사에 신화처럼 남아 떠돌고 있다.
 
  올라운드 플레이어(all-round player)로서 영화를 향해 모든 것을 불태웠던 그의 투지는 그의 작품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로 한국영화계에 남아 이젠 신화가 되어 있다.⊙
 

  인터뷰│김호선 감독
 
  “지금은 하길종적 작가정신이 꼭 필요한 시대”
 
   김호선(64) 감독은 하길종, 이장호, 이원세 감독 등과 함께 ‘영상시대’ 동인운동을 하면서 1970년대 한국영화를 짊어지고 온 대표자다. 1974년 <환녀>로 데뷔했고, 1975년 <영자의 전성시대>로 3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시골에서 상경한 여주인공이 매매춘에 빠지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1970년대 중반 ‘경제발전’이라는 모토 아래 근대화의 길로 매진하는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반영한 작품이다. 1977년에는 장미희와 콤비로 <겨울여자>를 탄생시켜 영화사에 남는 흥행을 기록했다.
 
  김 감독은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하 감독과 인연을 맺고는 그의 첫 작품 <화분>의 조연출을 맡았다. 이후 동지적 관계를 이어 왔으며, 하 감독이 쓰러진 그날까지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지인이다. 대표작으로 <영자의 전성시대>와 <겨울여자> 외에 <수렁에서 건진 내 딸2> <서울무지개> <애니깽> 등이 있다. 함경북도 북청 출생으로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애니깽> 이후 10년 만에 한·중·일 합작 영화 <붉은 댕기> 촬영을 준비 중인 그를 12월 7일 오후 만났다.
 
 
  “하길종은 저항적 영화인”
 
  ―1970년대 ‘영상시대’ 동인운동이 한국영화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사실 1960~70년대 한국영화계는 신파, 멜로 아니면 액션 이런 것들이 주류였어요. 당시는 영화수입쿼터를 따기 위해 만드는 한국영화들이 대부분이어서 새로움이 없었죠.
 
  그러다가 하길종 감독과 이장호 감독, 제가 만나면서 ‘이대로는 한국영화가 안 된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게 된 거죠. 그 운동을 통해서 한국영화의 뉴 시네마가 정착하게 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면서 20~30대가 한국영화를 보게 된 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뉴 시네마운동의 가장 큰 수확은 관객 연령대의 확산인가요.
 
  “그랬죠. 과거 스크린쿼터만 따기 위한 그런 영화들이 결국은 퇴색하기 시작하면서 외화만 보던 젊은층이 국산영화를 보기 시작한 거죠. 그래도 표현의 한계로 인해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2, 3중의 검열을 통해야 하니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우회적으로 표현하게 되었고, 깊이 있게 감성을 다룰 수 있어서 오히려 나중에는 더 효과적인 것도 있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소재의 제한이었죠. 아무 소재나 다룰 수가 없으니까.”
 
  ―하 감독에 대한 기억은 생생한가요.
 
  “그럼요. 하길종 하면 저항적 영화인이에요. 하 감독이 미국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는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생각, 행동, 하다못해 술 먹는 버릇까지가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어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하길종 감독만의 캐릭터가 있었어요.
 
  하 감독은 ‘한국영화 이래선 안 된다. 우리가 변화를 시키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뭐가 필요하나. 정부와 싸워야 된다’는 절대적인 주장으로 잠자던 사람들을 일깨워 주는 데 영향을 미쳤어요. 영화계와 대학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죠.”
 
  ―하 감독이 지금 젊은 감독이라면 더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오. 난 좀 생각이 달라요. 하 감독은 자기랑 안 맞는 세상에 상당히 민감했어요. 오히려 지금 그가 살아 있다면 ‘재미없다. 나 영화 안 해’ 그럴걸요. 저항은 닫힌 사회에서 더 빛이 나죠. 세계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그런 저항정신은 걸림돌이 있을 때 그걸 깨부수자고 하는 데 상당히 의미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오히려 하 감독은 그때 더 행복했다고 보죠. 물론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것은 그 몇 배를 산 사람보다 더 빛이 난 사람이에요.”
 
  ―요즘 영화계는 창작의 자유가 개방돼 있는데, 역량을 발휘하기 쉽지 않을까요.
 
  “1970년대에는 제작사가 14개밖에 없기 때문에 감독으로 뽑히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제작과 배급, 극장이 모두 한 회사에 집중된 시스템이라 말 잘 듣는 신인감독들한테 기회가 돌아가는 게 현실이에요. 그러다 보니 요즘 감독들이 그때보다 고민을 덜하는 것 같더라고요. 오히려 소재도 자유롭고 검열도 심의란 제도로 바뀌고 거의 노컷으로 나오니까, 제한된 게 없으니까 쉽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게 제 생각이에요. 또 작품들 보면 거의 비슷비슷해요. 어떤 지나칠 정도의 자극이 없으면 안 된다는 공식으로 일관되잖아요. 그렇게 신인감독들한테 한두 편 뽑아 먹고 나서 버리는 거지요.
 
  그래서 서서히 독립영화들이 세계적으로 나가서 평가를 받는 것에 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적은 예산이지만 그런 것들을 장려해서 이끌어 주면, 그들이 앞으로 한국영화를 이끌어 갈 것이란 거죠. 그걸 관객이 알아봐 주면 좋겠어요.”
 
  ―하 감독의 평소 생활은 어땠나요.
 
  “하 감독 부인 전채린씨가 지방대 교수로 가 있어서 주말부부로 지냈거든요. 그래서 주중에는 저희 집이 하 감독의 쉼터였어요. 제가 충무로 한 맨션에 살았는데, 5일간은 술로 시간 보내고 거의 저희 집에 와 있었어요. 통금시간이 임박해 밤 12시에 문 두드리는 사람 보면 하 감독이에요. 다른 영화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하룻밤에 술 박스가 몇 개씩 밖으로 나갈 정도였어요.”
 
  ―사진으로 보니 상당히 미남이던데요.
 
  “하 감독은 부끄러움 잘 타고, 이빨 잘 안 닦아 늘 껌 씹고 다니고, 목욕도 잘 안하고요. 영화 평론 많이 쓰다 보면 낮밤이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거기서 게을러지는 거죠. 주말부부가 아니었다면 마누라 잔소리라도 들었을 텐데…. 하 감독보다 한 살 연상인 아내 전채린씨는 ‘길종아, 너는 언제까지 그러고 다닐 거니’ 하고 걱정했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감독에 ‘피고’라고 불러”
 
  ―부부 사이는 어땠나요.
 
  “그들은 각자 생존이었죠. 두 사람은 미국에서 생활하던 게 몸에 젖어 있어서 네 일 내 일이 딱 나눠져 있었어요. 정서부터 서양적 생활방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전채린씨가 속 많이 상했겠지요. 우리가 본 일반적인 남편·아내 관계가 아니라 동료처럼 그렇게 살다 보니 우리 한국 정서의 가정과 달랐죠.
 
  ―하 감독의 동생 하명종 감독의 회고담을 읽어 보면 ‘형은 매일 멍투성이로 살았다’고 쓰여 있던데, 왜 그렇게 많이 맞았어요.
 
  “(웃음) 우리가 저녁만 되면 술집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데, 하 감독 같은 경우는 술 마시고 자기 분노를 터뜨리기 때문에 상대가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특히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만든 감독을, ‘피고’ 혹은 ‘저질’이라고 해서 주먹이 날아오는 거죠. 내가 없는 날은 그 다음날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났어요. 내가 있었으면 옹호해 줘서 그렇게 되진 않았지요.
 
  하 감독은 영혼이 아주 맑은 사람이었어요. 얼굴 여기저기에 반창고 붙이고 나타나면 만화 주인공 같았어요. 왜 또 싸웠냐, 그러면 ‘아, 피고!’ 그래서 그랬다고. 한때 영화계에 피고란 말이 조크처럼 유행했어요.”
 
 
  “상상할 수 없는 별종”
 
〈속 별들의 고향〉(1978년).
  ―영결식에서 아군보다 그 ‘피고’들이 와서 많이 울었다던데요.
 
  “그건 뭐, 아쉬움의 표현이었죠. 또 학생들이 많이 왔어요. 하길종이란 신드롬이 또 있었어요.”
 
  ―청춘들 사이에서 교주였군요.
 
  “네. 이를테면 정신적 지주란 거죠. 여학생들도 많았어요. 잘생겨서.”
 
  ―하 감독과 어떻게 알게 됐나요.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다녀온 유현목 감독님이 UCLA 가면 천재 한국 감독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돌아와서 한국영화를 새롭게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고 전했지요. 1970년 하 감독이 귀국하자 유 감독을 통해서 만났죠. 그 당시는 인터넷도 없고. 외국에서 좋은 작품 비디오로 가져오다가도 공항에서 뺏길 정도라 세계 영화정보 흐름을 잘 알지 못했는데 하 감독이 들어오면서 우리에겐 큰 자극이 됐어요.”
 
  ―첫 작품 <화분>에서 조연출을 했는데, 함께 일해 본 하 감독은 어땠나요.
 
  “그때 전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이었는데, 하 감독에게 배우고 싶어서 조연출을 자청했어요. 한진영화사 한갑진씨와 공동제작을 한 영화인데, 당시 감독들이 제작사로부터 영화필름을 상영시간의 두 배 정도밖에 못 받던 시절임에도, 하 감독은 휴지처럼 써댔어요. 콘티 없이 시나리오만으로 즉흥 촬영 하니까 그런 거지요. 그래서 한갑진씨가 중간에 포기하고 나갔어요. 그 다음 동생 하명종씨가 제작을 다 맡아서 1년 넘게 시간이 걸려 겨우 완성한 영화예요.
 
  하 감독은 파졸리니 스타일을 좋아했는데, <한네의 승천>을 찍을 때는 배우한테 카메라에 가래침을 뱉으라고까지 했어요. 그럼 관객한테 그러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했어요.”
 
  ―(웃음)관객 모독이네요.
 
  “우리가 상상 못한 별종이었죠.”
 
  ―하 감독이 작가주의적인 자기 소신을 가지고 한 작품은 실패하고, 현실과 타협해서 상업주의 관점에서 만든 영화들은 성공했거든요. 갈등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심했죠. <바보들의 행진> 이후 슬럼프였어요. 그즈음 어느 날 영화사에 프러포즈를 해서 <겨울여자>라는 작품 만들게 됐다고 그랬어요. 근데 그 회사에서 다시 저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하 감독이 그 작품을 이상하게 만들 거 같으니까 제가 맡아 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하 감독이 하는 거 아니냐, 동료끼린데 하 감독 허락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했죠. 동료끼리 그런 의리는 지켜야 되니까요. 그랬더니 며칠 뒤 하 감독이 날 찾아와서 자기가 포기할 테니 하라고 하는 거예요. 자신은 다른 걸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 <겨울여자>를 만들고, 하 감독은 <속 별들의 고향>을 찍은 거지요.”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하 감독은, 현실은 녹록하지 않고 영화는 만들고 싶고, 갈등이 많았어요. 그래서 속편이라도 했던 거지요. 하지만 주변에서는 어떻게 속편을 만드냐. 그것도 남(이장호 감독)의 영화에…. 그러니 하길종답지 않다는 거였죠.
 
  나도 <영자의 전성시대> 속편 만들기를 꺼렸어요. 오히려 다양한 소재를 찾아나서야 하는 게 우리 일인데, 남의 것 속편 만들고 나서 우리들의 공격을 많이 받았어요. ‘너는 하길종 아니다, 가까이 오지마라’ 그런 선의의 충고를 많이 했죠. 그즈음부터 더 괴로워하고 폭음하기 시작했어요.”
 
 
  다른 감독과 언쟁한 후 지인과 폭음하다 쓰러져
 
〈병태와 영자〉(1979년).
  ―말년의 하 감독 모습이 궁금하네요.
 
  “<속 별들의 고향>과 <병태와 영자> 두 개의 속편을 만든 뒤, 처음에는 나도 이제 흥행감독 대열에 섰다고 잠깐 좋아했지만 다시 좌절하기 시작했죠. 괴로워하고요. 그런 갈등들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혈압이 있었는데, 코트 속에 약을 넣고 다니면서도 안 먹었어요. 자존심이 워낙 강해서 자기가 혈압 있다는 걸 친구들한테 숨기고 살았죠. 거의 밥보다 술 먹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런 데서 대미지를 입었겠지요.”
 
  ―하 감독의 마지막 날은 어떻게 된 건가요.
 
  “충무로 조그만 바에서 같이 마시자 그랬는데, 내가 그날 이상하게 몸이 안좋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들어갔어요. 그 자리에서 문여송 감독을 만났던 모양이에요. 문 감독이 ‘하 감독, 네가 글 쓴 거나 주장을 하는 거나 보면 다 우릴 피고라 하면서 죄인 취급 했는데 네가 만든 영화는 뭐냐’. 그렇게 언쟁을 한 거예요. 하길종이 너는 가짜라고요. 그 상황에서 지인 한 사람하고 폭음하다가 쓰러져 버린 거예요. 심적 부담감이 죽음으로 몰아간 게 아닌가 저는 이야기를 해요.”
 
  ―왜 자기 작품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가까운 우리한테는 얘기를 해요. 이건 실패작이다, 뭐가 잘못됐는지 얘기 해 달라, 자기가 먼저 얘기를 꺼낸다고. 근데 우리가 이야기 시작하면 그냥 가 버려요. 참다 참다가요. 본인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겠지요.”
 
  ―상처를 많이 받는 성격이었나봐요.
 
  “여리죠. 본인도 다 알아요. 그러면서부터 하 감독의 펜 끝이 무뎌지기 시작했죠. 자기 작품이 계속 만들어져 나오면서 평가를 못 받으니까 남들 잘 씹는 글들이 무뎌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자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감독 포기하고 학교 돌아가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그러나 감독이란 직업이 아편과 같아요. 한 방 맞으면 못 돌아가는 거예요.”
 
  ―하 감독은 감독으로서보다 평론가로서 더 인정을 받았던 것 같네요.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글은 날카로워요. 그걸로 남았으면 더 나았을 거예요. 여기저기서 메가폰을 아예 놓고 교수로 오라는 데도 있었거든요.”
 
  ―이미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가 아니었나요.
 
  “다른 대학에서도 프러포즈 받았어요. 하 감독은 학생들과 어울리며 ‘하길종적 영화정신’을 많이 전파했어요. 그랬으면 오히려 지금까지 훌륭한 평론가가 될 수 있었겠죠.”
 
 
  “콘티 없이 찍어”
 
  ―하 감독은 <바보들이 행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저도 시사회를 보고 박수를 쳐 줬죠. 신선했어요. 그리고 몇 번의 시사회를 젊은 친구들이랑 하면서 다들 호응도가 좋으니까 기분은 한참 좋았는데, 얼마큼 가다가 하는 말이 ‘이건 내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다’고 했어요. 자기는 좀 철학적이고 비판적인 것을 좋아하니까요.”
 
  ―김 감독이 보는 하 감독의 대표작은.
 
  “나한테 꼽으라면 <바보들의 행진>이에요. 연출이 개인철학으로 흘러가면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고, 본인이 이런 샷은 이런 의미였다고 주장해도 남이 보고 느껴야 하죠. 하 감독 작품은 전체적인 내러티브 구조에서 항상 문제가 발생해요. 내러티브가 잘 안 짜여지는 게 문제죠.”
 
  ―즉흥적이기 때문인가요.
 
  “네. 내가 한 번 조연출해 줄 때, 콘티 없이 찍더라고요. 느낌대로 찍는 거예요. 미국에서 언더그라운드에서 만들 때의 그런 타입이에요. 찍어서 러시를 보면 막 화면이 쇼트(shot)가 연결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내가 콘티를 만들자고 하면, ‘김 감독이 만들어’라고 해서, 내가 만들어 줘요. 그래도 나중에 편집할 때 보면, 전체적 구조가 툭툭 튀고 안 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죠. 그런 것을 <화분> 하면서 내가 많이 지적해 줬고, 1년 이상 걸려서 그렇게 완성하고 나서, 그 이후 영화들은 조금씩 그렇게 하더라고요.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으면 실패하기 쉬워요. 결국은 시나리오로 표현 안되는 부분을 끌어내는 것이 콘티뉴어티거든요.”
 
  ―하 감독은 연출수업 기간이 따로 없었지요?
 
  “그럼요. 단순히 한국영화를 넓게 보면 대학 때 단편영화 몇 개 찍고 나와서 감독 하잖아요. 그거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조연출 과정은 프로페셔널이 되기 전의 수련 과정이잖아요. 책으로만 영화공부를 했다고 해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미국 같은 영화 선진국들도 도제(감독 밑에서 수련하는 기간)가 있어요.”
 
  ―한국영화계에 대해 하 감독이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어떤 점인가요.
 
  “소재 제한, 그 다음에 검열이죠.”
 
 
  할리우드식 제작 방식은 잘못
 
  ―평론가로서 하 감독이 한국 영화평론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세요.
 
  “기존 평론계는 영화를 제작하는 회사와 다소 야합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한국영화가 관객을 많이 불러 모아야 된다는 데 야합한 거죠.
 
  과거 평론은 관객을 더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 왔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신문기자가 평론을 쓰잖아요. 신문기자들한테 다 뺏긴 거죠. 평론가협회가 있긴 하지만 그냥 영화 소개하는 정도이지 제대로 된 영화평론은 지금 전무해요. 요즘 같은 때에 평론이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없다 보니, 방향 제시 역할은 과거보다 못해요. 거의 죽었다고 보죠. 하지만 하 감독의 평론은 달랐어요.”
 
  ―가장 잊지 못할 생전 모습은 무엇이었나요.
 
  “하길종은 언제나 고독해 보였어요. 늘 때 묻은 바바리코트에 말 장화 신었어요. 내가 보기엔 코트가 하나밖에 없는 거 같은데, 음식 흘려서 그런데도 신경 안 쓰고요. 우리가 옷 좀 사 입어라 하면 피치 못해 세탁소 갖다 준 날엔 잠바 입고 나오고. 우리가 거의 같이 생활하다시피 하니까 다 알지요. 발 좀 씻고 와라 그러면 자기가 자기 발 냄새 맡아 보고 괜찮은데, 그러면서 ‘이 양반아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그 냄새가 그 냄새지’ 그랬어요.”
 
  ―하 감독이 한국영화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이라면.
 
  “변화의 이미지예요. 그게 중요하죠. 그걸 위해 본인은 엄청난 투쟁을 했고요. 물불 안 가리고 했죠.”
 
  ―한국영화계가 기려야 할 하 감독의 정신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작가성이죠. 작가정신이 요즘 영화에는 전무(全無)하니까요. 그런 하길종적 작가정신이 필요할 때죠.”
 
  ―한국영화계에 대해 우려가 많네요.
 
  “중소 프로덕션을 많이 육성해야 해요. 제작회사, 배급사, 극장을 분리해야 프로덕션이 살아나고 다양한 영화가 나오죠.
 
  지금처럼 하면 뻔해요. 한국영화의 할리우드식 제작방식 선택은 잘못됐어요. 적은 자본, 좁은 시장이란 열악한 환경에서 할리우드식으로 하면 길거리에 제작비를 다 낭비하는 거죠. 허리띠 졸라매고 찍던 충무로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왜 판을 벌리느냐 이거죠.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좋은 영화를 위해 몸부림쳤던 하 감독의 정신이 여전히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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