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첫날밤 당신의 허리를 휘감듯이” 이명희, 정안나, 정경용, 안영숙, 정우영의 시집들

“잘 버티셨습니다만 수선비가 만만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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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명희, 정안나, 안영숙, 정우영, 정경용의 시집들.

다섯 시인의 신작들을 몰아서 읽었다. 가방 안에 두고 아껴 읽었다. 시어들이, 어느 행들이 기자의 머릿속과 실핏줄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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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나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은신처에서 내려오는 봄(작가마을)

 

정안나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은신처에서 내려오는 봄(작가마을)을 읽었다.

 

부산에 멋진 모더니즘 시인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편 모두가 즐겁거나 유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문장이, 어떤 시구가 독자의 영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약간의 기다림, 인내심도 필요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시인이 만든 행과 연의 의미망들이 충분히 그물코가 되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울란 바르트의 <평양식당>은 장황한 주석을 깨알같이 달며 가는 집이야 서두르고 서툴러도 달기만 해 테이블을 가로질러 빛을 감당하는 어항이 있어 행복의 기준으로 어항은 성장하는 법이지 멀어져 찾아갈 곳이 있어

 

부모는 가까운 곳에 있지 부모가 잘 키운 요리를 묻고 먹고 싶은 것이 단순해지면 공동의 땅이 생겨나 대동강도 아끼며 물어봐 강에 빠져도 헤엄쳐 집으로 올 수 있는 심리적 거리

 

-정안나의 시 <이복형제> 일부

 

 

<늙지 않는 죽지 않는 매뉴얼>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주노동자가 맞은 낯선 한국의 명절날 먼 땅 가족을 떠올리는 시다. 어느 구절도 슬프다는 표현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독자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마치 탐정소설처럼 단서를 찾으며 읽는 모더니즘은 독자가 의미를 추적하며 상상력을 키워준다. <가족의 탄생>도 큰 울림을 주었다.

 

고향에서 출발한 다국적인 노동자들이 모여드네 쉬지 않고 싶어 쉬는 설날은 부두 근처의 마트에 모이지 A씨는 고향의 들머리를 생각하네 아이의 첫머리는 아빠가 자르고 이름을 지어야 한다네

 

한 무리의 애완동물 코너에 자리 잡네 레고는 그의 곁에서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매뉴얼을 내밀지 유리를 치면 스트레스를 받아 아프다는 분양가 백만 원의 레고네 불빛의 자장가는 실물 크기의 선잠을 키우지 분양가 칠십구만 원 레고는 자신을 노랗게 깔아뭉개며 창을 물어뜯지 제복 입은 레고는 예민한 이름을 계속 불러

 

휘파람을 즐기는 레고

팔려가는 레고

남겨진 소리 지르는 레고

 

넘쳐나는 레고

-정안나의 시 <늙지 않는 죽지 않는 매뉴얼> 일부

 

 

김남영 문학평론가는 시인에 대해 정안나는 규정할 수 없는 사람이자 규정된 것을 해방시키는 자기 해방으로 시를 쓴다고 했다. 부산 출생의 시인 정안나는 2007시와 사상으로 등단했다.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A형 기침, 붉은 버릇, 명랑을 오래 사귄 오늘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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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용 시인의 첫 시집 꽃 필 날만 남았다(인문학사)

 

정경용 시인의 첫 시집 꽃 필 날만 남았다(인문학사)를 읽었다. 조명제 문학평론가는 그의 시를 두고 직관과 혼신의 역동적 화법이라고 표현했는데 사물에 대한 직관적 통찰과 역동적 문장, 서슴없는 문체와 탄력적인 운율을 시집 전반에서 찾을 수 있다.

 

기자는 이 시집을 얼마 읽자마자 얼마나 매력적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읽는 내내 즐거웠다. 앞으로 시집 10권은 충분히 낼 수 있을 만큼 시적 재능이 충만해 보였다.

 

동강 할미꽃바위를 지나

원추리 군락지를 지나

리을리을 길을 따라

동강줄기를 끼고 달린다

첫날밤 당신의 허리를 휘감듯이

백운산 허리를 얼싸안으며

거북이 마을의 이정표를 따라

산속으로 돌아든다

-정경용의 시 <동강> 일부

 

 

꽃밭과 마당의 경계에 사철 지지 않는 꽃송이 박혀 있다 당신과 나 사이 견고한 꽃처럼, 새로 만든 꽃밭 너머 장독대 옥상에 철창을 통째로 올려놓고 방심한 사이 발바닥이 꽃인 개는 문을 꽃으로 문질렀다 때로는 철문도 힘없이 열리기도 한다 내 문을 밀고 당신이 들어온 것처럼, 꽃 없는 꽃밭으로 뛰쳐나온 개 발자국 덜 굳은 시멘트 마당에 꽃문양을 찍었다 겅중 겅중 꽃 또는 다닥다닥 꽃 고집불통으로 피었다 (중략)

 

어지러운 꽃송이를 헤아리다 보면 늦은 귀가시간 당신의 부르튼 발바닥이 보인다 왜 꽃송이는 계절풍에 위태로운가? 가팔막의 오르막에 위태롭고 내리막에 위태롭고 진급에 위태로운 당신,

 

한 장 남은 달력 위로 눈송이가 떨어진다 나는 꽃마중 갔다 돌아온다 큰길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어 마당을 밟는 꽃송이 (하략)

-정경용의 시 <발바닥 화석> 일부

 

 

조명제 평론가는 시인이 많은 늦깎이 시인 중 한 사람이지만 다수의 양적 팽창 가운데 소수의 빛나는 성과를 그려주고 있다고 평했다. 충북 충주 출생의 정경용 시인은 계간 시에》(2014)를 통해 등단했다. 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수상(2018), 한국산문으로 수필(2019), 동양일보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2023)됐을 만큼 문학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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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숙 시인의 첫 시집 나는 여기 있습니까(작가마을)

 

안영숙 시인의 첫 시집 나는 여기 있습니까(작가마을)을 펴냈다. 제주출생인 안 시인은 강원도 철원에서 유튜브 유연의 문학TV’를 운영하며 창작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2019문학고을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작년 사이펀신인상으로 재등단했다. 2010문장21에서 수필로 문단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안영숙 시인의 시 역시 모더니즘에 가깝다. 정훈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관조적 시각이 시인 특유의 낯설게 하기의 언어적 교감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 교감과 변용의 대상은 모두 시인이 체험하고 느낀 사실을 바통으로 이루어진다. 그 육화된 이미지들을 시인은 여러 겹의 시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내보인다.

 

나는 나를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종결되었나요

봉분이 없는 마른 죽음인가요

물음표를 들고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아 매일 공회전을 합니다

 

사람들과 대사를 볶고 뒤집고 있는 이가

안경 너머로 제 이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교차하며 걷고 있는 양 허벅지는

어디로 가는지 용건이 없었고

나 몰래 내 규격 안에서 베개를 차지한 이가

나인지

신원조회가 필요합니다

 

거울 속의 보이지 않는 나는

더욱 완고한 덫입니다

 

안과 밖 접점의 상피조직 어디에도 나는 허전합니다

 

처음부터 없었고

나중에도 없는데

중간에만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당신은 여기 있습니까?

나는 증거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나를 밀수하러 부유(浮遊)하겠습니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나는 공사 중입니다

-안영숙의 시 <나는 여기 있습니까> 전문

 

 

기다리면 올까요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이상 흘러가지 않고 돌아올까요

 

영원한 현재는

영원해져 버린 어제들을 부르지 못하나 봐요

영원하지 않은 내일엔 그 기다림마저 기다려 주지 않는가 봐요

 

그래도 나는 기다릴까요

-안영숙의 시 <기다리면 올까요> 일부

 

 

<나는 여기 있습니까>의 정확한 의미망을 알 순 없지만 견고한 자신만의 시성(詩城)이 단단함을 알 수 있다. 정훈 문학평론가는 안영숙 시인의 작품에 대해 세계와 자아의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소외를 시편들 근저에 깔면서 현대인이 겪는 부조리한 면면들을 시적 형상화로 줄곧 표현한다고 말했다. 고독과 외로움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탐문하고, 그러한 고독한 실존을 제공한 이 세계와 현실에 대한 풍자의 눈을 거두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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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창비)


정우영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창비)를 읽었다. 시인은 작은 것, 잘 잊히는 것, 쉬 멀어지는 것, 눈에 잘 띄지 않아도 그 자리에 없으면 어쩐지 허전한 것들에 눈길이 간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소종민에 따르면 정우영은 거대하고 딴딴한 편에 서 있지 않고 자잘하면서 부드러운 편에 서 있다. 외침보다는 속삭임의 편에 서 있고, 무엇을 가하는 것의 편보다는 당하는 것의 편에 서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은 모녀간일까. 길가에 놓인 운동기구를 타며 정답게 속삭이고 있다. 지나가던 내 귀가 주욱 늘어나 두 사람 주변을 서성인다.

 

이다 집에 가서 전 부쳐 먹자. 비도 설핏 다가들고. 엄마, 여기 오기 전에 저녁 드셨는데? 고기에다가 맛있게. 내가? 내가 밥을 먹었어? 근대 왜 이렇게 배가 고프냐.

-정우영의 시 <이순의 저녁> 일부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마당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듬뿍 받는 거예요.

-정우영의 시 <햇살밥> 일부

 

 

세상에 좀 부딪치셨나 봐요.

담적도 쌓였구요.

신간은 아주 너덜너덜하네요.

옆구리도 새는군요.

깊게 헐어서 때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버티셨습니다만 수선비가 만만찮겠어요.

감당하실 수 있을까요.

눈과 귀는 견적이 안 나옵니다.

무엇을 보느라 그랬을까요.

각막을 갈아 끼워야겠는데요.

맞는 게 있을까 싶습니다.

귀는 거의 삭았군요.

새것으로 바꾸는 게 나을 듯합니다.

비싸긴 해도 선명히 들릴 거예요.

늙어서는 귀가 순해야지요.

거스르면 외톨이로 거꾸러지기 쉽습니다.

 

하얀 가운의 바람이 내미는 견적서 들고 감나무는 속으로 따져봅니다. 도저히 맞출 수 없으니 폐기되는 게 낫지 않을까, 머릴 굴리는데요. 때마침 새끼발가락에서 간지러움이 움터옵니다. 희유, 땅심이 다시금 그의 한 생애를 받쳐주려 하는 거겠지요.

-정우영의 시 <늙은 감나무의 새끼발가락> 전문

 

 

시인이 40년간 시에 바쳐온 마음이 아름답다. 시인이 포착한 생명의 거처속에 특별함이 숨겨져 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엔 평범하지만 시인의 눈엔 고유하고 특별하다. 필연과 우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시선이다. 그래서 시인이 위대하다.

 

그의 시는 민중, 민족, 민주주의, 노동, 사회참여 등과 같은 인간의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민중시(1989)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후 민중 혹은 노동문학 계열의 시인으로 불렸지만 그보다 땅의 시인, 나무의 시인, 별의 시인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려 보인다. (문학평론가 소종민)

 

그의 시가 인간의 집 너무 자연의 집, 생명의 집에 깃들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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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에게 묻는 나의 안부(작가마을)

 

이명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에게 묻는 나의 안부(작가마을)를 열심히 읽었다. 그의 시를 읽으니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펴냈던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정시지만 삶이 문장으로 녹아든 서사시로 읽혔다. 그러니까 그의 시집은 헤겔식으로 표현해 시민 사회의 서사시였다. 행간 속에 단단한 사유가 느껴졌다. <청춘은 멈추었고>를 오래 읽었다.

 

청춘은 멈추었고

나는 아침저녁으로 늙고 있다.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에 앉아

생각은 겨울 들녘처럼 건조하고

자주 고장이 나는 손발과

흐린 눈동자

 

늙는다는 것은

버스정류장에 무거운 짐을 내리고

걸어가야 할 방향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

잠시 가늠이 안 되고

잠시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가야 할 집이 있으니

무거운 짐을 껴안고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일

 

청춘이 내게 무엇이었는지

그대가 나에게 묻고

오랜 시간 나는 울었다.

손가락 사이로 햇빛이 생각 없이 빠져나가듯

나는 나의 젊은 목숨을

생각 없이 하대하였으므로

해 저무는 저녁 시간,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

입을 다물고 견뎌야 한다.

 

청춘은 박살이 났고

강변역을 지나는 기차처럼

이제는 익숙해야 할 내 그림자의 자국들

늙음은 서둘러 내 풍경이 되었다.

-이명희의 시 <청춘은 멈추었고> 전문

 

 

시인은 청춘은 박살이 났다며 늙음은 서둘러 내 풍경이 되었다고 했지만 비극적이지 않다. ‘잠시 가늠이 안 되고/ 잠시 걱정이 되지만’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 ‘이상하지도 않은 시간앞에 입을 다물고 견뎌야함을 잘 안다. ‘성난 개가 내 정신을 물어뜯어도말이다. 이 시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귀에서 소리가 난다.

꿈을 꾸지도 못하고 잠이 흩어졌다.

달팽이관과 고막은 아무 이상이 없고

의사는 귓구멍을 둘러보고 건조하게 말했다.

귀 안에 소리가 나요. 안 들리나요.’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혼잣말을 하였다.

손바닥에 알약을 쥐고

무심한 병원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올라서 다른 의사를 만났다.

조용히 있으면 소리가 아주 잘 들려요.’

주사를 한 대 맞고 거리로 나와 걸었다.

얼굴 없는 소리들이

귀 안에서 바스락거려도 아무도 몰랐다.

다만 나는 그것이 조금 쓸쓸해졌다.

 

다리를 접고 의자에 앉아

윙윙대는 책을 읽고 윙윙거리는 전화를 받았다.

내 귓속말은 잠식당하고

그대의 노래가 이제 낮은 탄식이 되어도

아무도 모르는 수상한 주파수,

나는 나방처럼 걸렸다.

-이명희의 시 <귀에서 소리가 난다> 전문

 

 

이병국 문학평론가는 그의 시집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이명희 시인의 시는 삶의 불툼여성을 에테르처럼 떠도는 분위기에 한정하지 않고 그 불확정성의 불안을 반복해 환기함으로써 시간을 겪어내는 삶에의 사유를 깊이 있게 기록한다.”

삶에의 사유를 깊이 있게 기록한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어 보았다.

 

경북 경주에서 출생한 이명희 시인은 1993문학세계로 등단했다.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다. ‘마루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서늘한 생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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