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읽는 시집 ⑭] 유현민의 두 번째 시집 《빛이 머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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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민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빛이 머무는 자리》(문화의힘, 2025)를 펴냈다. 첫 시집 《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번 작업은 한층 절제된 언어와 깊어진 사유로 그의 시 세계를 확장한다.

 

충남 당진 출신인 그는 1995년 《흙빛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2년 한용운 신인문학상, 2024년 《시현실》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 활동의 궤도에 올라섰다. 한국시인협회·충남시인협회에서 활동하며 지역성과 서정성을 함께 끌어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시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직관의 언어'다. 바람·햇살·들꽃·고요·하늘 같은 자연의 기초 어휘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여기에 빛과 그림자, 밤과 침묵, 시간과 기억 같은 추상적 개념이 겹쳐지며 시적 공간을 이룬다. 이 어휘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과 사유를 매개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조명제 시인·문학평론가(《월간시인》 편집인)는 이를 두고 "빛이 머물고 빛과 그림자가 번갈으는 흐름 속에서 바람과 구름의 자유를 말하고, 그리움과 고요의 꽃을 품어 안는다"고 짚었다.

 

고요로 지어진 좁은 골방

낡은 창호에 스미는 햇살은

천년의 먼지를 품고 내려앉는다

 

책장은 마른숲

활자는 새벽이슬처럼 빛나

선비의 손끝에서

우주의 맥박을 흘려보낸다

 

밖은 세속의 물결로 출렁이나

골방은 작은 항아리

그 안에서 고독은 와인처럼 발효되어

진리의 향기를 내뿜는다

 

침묵은 바위보다 무겁고

빛보다 가벼워

등불의 그림자를 흔들어

내면의 별자리를 만든다

 

좁은 방 안에서

 

더 넓은 하늘을 열어젖히는 선비

 

그의 골방은 바깥보다 더 큰 우주였다

-‘당신의 우주전문

 

대표작 ‘당신의 우주’는 그 정수를 보여준다. 좁은 골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오히려 ‘더 넓은 하늘’을 여는 통로로 전환된다. 활자와 책장, 등불과 그림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우주의 맥박’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으로 변모한다. 고독은 “와인처럼 발효”되고, 침묵은 “바위보다 무겁고 빛보다 가벼운” 역설적 존재로 형상화된다. 전통적 선비의 이미지와 현대적 내면 의식이 겹쳐지며, 고요 속에서 확장되는 정신의 우주를 그려낸다. 다산 정약용을 연상시키는 독서와 사유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것도 이 때문이

 

노을은 바다의 어깨에 내려앉아

붉은 물빛으로 번져

세상을 적신다

 

자갈이 저무는 하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바다는 그 속삭임 따라

파도의 옷자락을 끌어당긴다

 

멀어지는 빛을

다시 품는 반복의 순간

하루의 끝이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난다

 

시간의 흐름 속에

노을은 더욱 깊은 색으로 내려앉고

흘러가는 것들의 따뜻한 숨이 머문다

 

잠시 머문 자리에서

머물다 가는 빛의 이름으로

소중한 이름 하나 불러본다

- ‘빛이 머무는 자리’ 전문

 

표제작 ‘빛이 머무는 자리’는 시인의 시적 감각과 특질, 사유의 넓이와 깊이를 온전히 드러낸 작품이다. ‘시인의 인생과 사색이 영롱한 언어의 질감 속에서 완결되고, 사랑과 진실이 시간 속에서 승화하는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남과 같다’고 조명제 문학평론가는 평가한다. ‘빛이 머물고 빛과 그림자가 번갈으는 흐름 속에서 바람과 구름의 자유를 말하고, 그리움과 고요의 꽃을 품어 안는다’는 것이다.

 

 

 

바람 끝에선 이름 없는 섬이 되더라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무심한

늘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던 바위 하나

 

저녁이면 주방 창가에 매달린 햇살

언제나 엄마 손등을 닮아 있었다

물때에 젖은 굽은 손

젖은 그릇을 닦으며

무언의 기도를 바치던 숨결이 아직도 서늘하다

 

너무 조용해서, 너무 익숙해서

사랑이 꼭 고장난 시계처럼

말없이 똑딱거리기만 하던

그 공간이 미워서

도망쳤지

 

낯선 도시의 불빛은

너무 환해서 울고 싶어졌다

엄마의 잔소리가 그립고

아버지의 무뚝뚝한 한숨마저

이불처럼 덮고 싶던 밤이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그리움을 씹는 일이라는걸

잊고 살다가

텃밭에 심긴 고추 하나 붉게 물들 때면

그 손길, 그 목소리가

속삭이듯 돌아온다

 

사랑은 때로 멍 자국 같아

아물지 않은 데를 건드린 듯

그립다

-‘저녁등불 아래서전문

 

‘저녁등불 아래서’는 보다 구체적인 삶의 감정을 다룬다. 도시로 떠난 자식의 시선에서 부모를 회상하는 이 시는, 과장 없이 담담한 언어로 그리움을 끌어낸다. “사랑이 꼭 고장 난 시계처럼 / 말없이 똑딱거리기만 하던 / 그 공간이 미워서 / 도망쳤지”라는 구절은 익숙함이 만들어내는 답답함과 떠남의 욕망을 동시에 그린다. 도시의 불빛 속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결국 부모의 목소리다. 시는 “사랑은 때로 멍 자국 같다”는 문장으로,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을 압축한다. 감정의 과잉 없이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다.

 

입춘의 치맛자락을 겨울이 붙든다

눈송이가 한 올, 두 올

속눈썹 끝에 걸려

차디찬 속삭임을 흘린다

 

하늘은 하얗게 길을 깔고

세상은 새하얀 숨결 속에 묻힌다

아직 오지 못한 봄이

문득, 내 마음 끝에 걸린다

 

문틈 새로 스미는 바람에

한 줌의 온기를 부쳐 보낸다

옷깃을 여미는 아이의 손끝

몸을 웅크린 길고양이의 떨림

길모퉁이에서 기다리는 낡은 그림자

 

눈이 녹아 한 방울, 두 방울

새 움 틔울 때까지

따뜻한 속삭임을 모아

가장 먼저 피어날 꽃을 품는다

-‘눈의 방울, 봄을 맺다전문

 

‘눈의 방울, 봄을 맺다’는 계절의 경계에서 포착한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꽃샘추위라는 일상적 경험을 “입춘의 치맛자락을 겨울이 붙든다”는 이미지로 치환하면서, 시는 계절을 하나의 긴장 관계로 풀어낸다. 속눈썹 끝에 걸린 눈송이, 아이의 손끝, 길고양이의 떨림 같은 장면들은 차갑고 단아한 정서를 형성한다. 동시에 “아직 오지 못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시 전반을 관통한다.


유현민의 시는 거창한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사물과 자연의 이미지 속에서 감정을 길어 올린다. 그의 언어는 어렵지 않지만, 단순하지도 않다. 직관적으로 읽히면서도, 그 이면에는 시간과 기억, 존재에 대한 성찰이 겹겹이 쌓여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고요’의 미학이다. 그의 시에서 고요는 공백이 아니라, 의미가 농축되는 자리다.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언어이며, 빛과 그림자는 감정의 결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충남 서산 일대의 자연 환경—넓은 하늘과 바람, 적막한 풍경—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빛이 머무는 자리》는 제목 그대로 ‘빛이 머무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시집이다. 그 빛은 찬란하게 번쩍이기보다, 오래 머물며 스며드는 종류에 가깝다. 독자는 그 느린 빛 속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비춰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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