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삶과 다르지 않다. 시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시가 있다. 1987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윤제림 시인이 40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 신작 시집 《스물다섯살을 반성함》(창비)을 펴냈다.
간결하고 평이한 일상의 언어. 그 언어 안에 다양한 사람의 풍경, 이른바 ‘사랑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집을 펼치면 힘이 없다. 좋은 의미에서. 의미를 짜내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다. 언어유희도 없다. 그 대신 무언가가 스멀스멀 밀려온다. 감동의 밀물이다. 해질녘 버스 안에서 읽다 보면 어느새 집 앞 정류장에 닿아 있을지 모른다. 쉽게 쓴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공이 높다랗다는 것은, 읽고 나서야 알게 된다.
구름도, 뱀도, 흑룡강에서 온 저녁상도
시인은 멀리서 온 것들을 가까이 본다. ‘영랑호에서’는 폐사지에서 자고 온 ‘외국 구름’이 속초고등학교 상공에서 뒷걸음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폐사지(廢寺址)에서 자고 온
외국 구름이
속초고등학교 상공에서 느릿느릿
뒷걸음을 하고 있다
누가 붙잡는 모양이다
서둘러 새벽길을 나선 진나라 구름은
초나라에 닿았을까?
구름은
교우관계 남녀관계가
복잡하다
-‘영랑호에서’ 전문
진나라와 초나라, 폐사지와 속초고등학교. 고금과 동서가 아무렇지 않게 섞인다. 구름의 "교우관계 남녀관계가 복잡하다"는 마지막 행에서 실소가 터지면서도 가슴 어딘가가 찡해진다.
흑룡강에서 온 식당 종업원을 그린 ‘먼 데서 온 저녁상’은 이 시집에서 가장 넓은 시다. 시인은 종업원이 차려준 저녁상 앞에서 ‘먼 데 말씨’를 듣고, 그가 두고 온 고향과 ‘지난 세기, 거기서 고생하던 사람들의 개다리소반’을 생각한다.
식당 종업원들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
푸성귀 일색, 온통 초록의 밥상이지만
하도 맛있게들 먹어서
시킨 것 물리고
나도 그 상에
끼여 앉고 싶다
상추쌈 한입 아주 커다랗게 욱여넣던 여자가
내 상을 차린다
국과 밥과 찬 사이에
먼 데 말씨도 내려놓는다
이 사람이 떠나온 곳을 짚어본다
이 사람이 두고 온 고향
밥상과
지난 세기, 거기서 고생하던 사람들의
개다리소반 같은 것을
생각한다
저녁이 참 먼 데서 왔다
누가 보냈을까
내 저녁상을 차려주러
흑룡강에서
사람이
왔다
-‘먼 데서 온 저녁상’ 전문
마지막 연이 한 줄씩 내려앉는다. 숨이 느려진다. ‘흑룡강에서 / 사람이 / 왔다’. 세계를 품되 소리 지르지 않는다.
오십 년 걸린 이해, 그리고 죽음조차 삶의 일부
친구의 정년퇴임 문집에 부친 시 ‘오래 걸릴 것이다’는 이태백의 한 구절,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카락이 저녁엔 흰 눈이 된다’를 이해하는 데 오십 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세월이 휘리릭 흘러갔다는 얘기다.
‘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
이태백씨의 시 한줄 이해하는데
오십년 걸렸다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
저녁이 되니 흰눈!
석조관옆우체국 벤치에서 잠깐 졸다 깼는데
《구운몽》의 시간이 흘러갔다
아희야, 술통 지고 따라 오너라
저 건너 버드나무 그늘로 가자
미당 선생한테 시제(詩題) 하나 받아서
붓과 먹과 종이 넉넉히 준비해 오거라
오래 걸릴 것이다
-‘오래 걸릴 것이다 – 친구 J교수의 정년퇴임 문집에’ 전문
《구운몽》 에서의 시간은 꿈속에서는 길게 펼쳐지지만, 현실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다. 미당에게 시제를 받는다는 설정은 현실을 넘어 신선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門)과 같다. 현실의 시간은 빠르게 늙어가는 시간이지만, 예술의 시간은 구운몽의 시간처럼 길게 펼쳐진다. 그러나 그 ‘오래 걸림’조차 결국은 한순간처럼 압축될 운명이다. 마지막 행 ‘오래 걸릴 것이다’는 이러한 이중성을 품으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오래된 진리를 환기한다.
죽음을 다룬 시들도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는 “먼저 가보고 좋으면 부를게”라는 말을 지킨 언니를 따라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야기다.
“자리 잡으면 연락할게”
먼 길 떠나는 사람들이 곧잘 던지고 가는
이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영 소식이 없으면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았거나
아주 잊어버린 까닭이라 생각하자
제법 잘 지켜지는 약속도 있다
“먼저 가보고 좋으면 부를게”
삼년 전에 저세상으로 간언니가
자꾸 부른다며, 엄마가 먼 길을 갔다
혼자 갈수 있다며
언니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며
새벽길을 갔다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좋으니까 불렀을 것이다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전문
죽음을 슬프게 쓰지 않는다. 오히려 ‘좋으니까 불렀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행이 죽음을 믿음직한 약속처럼 만들어 버린다. 독자는 비로소 눈물 앞에서 멈추는 대신, 그 죽음이 삶의 연장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을 바라보는 열린 시선이 생(生)을 마주보는 시각도 바꾼다.
손녀와 만해, 그리고 해방촌
시집의 시선은 가장 작은 곳과 가장 큰 곳을 동시에 향한다. ‘어린이날에’는 일본에서 크는 손녀 시연이를 위해 일력에 한 줄을 써넣다가, 그 옆에 끼움 표시를 하고 몇 자를 덧붙이는 이야기다.
일본에서 크는 어린 손녀를 생각하며
일력(日曆)에다 이렇게 써넣었습니다
― 시연이가 행복한 날이길
느낌표를 찍으려다 말고 손녀 이름 곁에
끼움 표시를 하고
몇자 더 적었습니다
―시연이와 그의 친구들
모두!
내 손녀가 행복하려면
내 손녀와 함께 살아갈
지구 위의
어린이가
전부 다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습니다
-‘어린이날에’ 전문
‘하마터면 잊을 뻔했습니다.’ 이 한 행에 이 시집 전체의 윤리가 담겨 있다. 끼움 표시 하나로 손녀 한 명의 행복이 지구 위 모든 어린이의 행복으로 넓어지는 그 순간이 과장 없이, 민망함 없이 이루어진다.
만해에게 바치는 산문시 ‘소의 얼굴’은 이 시집에서 가장 긴 호흡이다. 꿈에 소떼를 보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해, ‘백년 전 우리가 잃은 것은 나라 하나였는데 오늘은 열가지 백가지를 잃고’ 산다는 통탄으로 이어진다
꿈에 소떼를 보았습니다. 주인 잃은 소들입니다. 소를 잃고도 찾지 않는 사람들, 잃고도 잃은 줄도 모르는 사람들의 소. 백마리 천마리 소가 사람을 보고 알은체를 하는데 사람이 소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소를 찾는 사람이 소의 얼굴을 모릅니다. 소의 이름을 모릅니다. 사람이 워낭 소리를 내며 소걸음으로 돌아갑니다.
선생님, 백년 전 우리가 잃은 것은 나라 하나였는데 오늘은 열가지 백가지를 잃고 삽니다. 가난만 잃었으면 좋은데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잃었습니다. 갓과 두루마기만 벗어놓은 줄 알았는데 사람과 하늘을 섬기는 법까지 두고 왔습니다. 풍진 세월의 낯빛은 변함없는데 산빛 물빛은 날아가고 흘러갔습니다. 우리가 이 먼 객지로 나온 다음날 소들은 더 먼 외지로 떠나갔습니다.
소들은 지금 어디들 모여 고향을 그리워할까요? 이름을 적어봅니다. 하나둘 불립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우주는 소리치면 다 들리는 곳! 백 사람 천 사람이 외치면 저 들판 끝 어디선가 우우우, 우리가 두고 온 소떼가 나타날까요? 그 옛날 저녁 강둑을 울리던 붉은 울음이 사랑과 자유의 메아리처럼 앞산 등성이를 넘어올까요? 소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만해 선생님.
-‘소의 얼굴 – 만해축전에 부쳐’ 전문
이 시에서 ‘소’는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가치와 정체성의 상징이다. 과거에는 나라를 잃었지만 잃은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나라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줍음과 부끄러움, 인간과 하늘을 섬기는 법과 같은 근본적 가치들을 잃고도 그것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소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모습은 곧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시 속 ‘소떼’ 이미지는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소떼 방북을 상기시키며, 역사 속에서 분단의 경계를 넘어가고자 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연상 속에서 시는 갈라진 남과 북이 다시 하나 되기를 바라는 염원, 그리고 서로를 잊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함께 환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시의 직접적 진술이라기보다, 독자의 역사적 경험이 덧입혀진 확장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의 마지막에서 한용운을 부르는 장면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불러오려는 정신적 호소이자, 이름을 부름으로써 존재를 회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민족적 기억과 윤리적 가치의 회복, 나아가 단절된 관계의 복원을 향한 간절한 요청으로 읽힌다.
‘백년 여관에서’에서는 나스메 소세키(1867~1916)가 요양하던 이즈의 여관에서 뱀을 만난다. 소세키는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근대화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내면을 가장 정교하게 그려낸 인물이란 점에서 어쩌면 현대 일본인의 내면의 초상과도 같다. 군국주의 군상과 다르다.
온천욕탕 미닫이를 밀고 나오는데……댓돌 위에,
내 신발 옆에
뱀!
나의 손짓발짓에 주인은 천천히 턱짓을 하고
빗자루를 든 늙은 사내가
조금 잰 걸음으로
복도 끝 모퉁이를 돌아갔다
짐작건대 저 사내는
고객 준수 사항을 우습게 아는
장기 투숙객한테
또 한번 주의를 주러 가는 것이다
―알아요, 당신…… 하지만 제발 그런 차림으로
불쑥불쑥 나오지 마세요, 그 사람 오면
일러드릴 테니
소설가 나스메 소세키가 병든 몸을 달래던 곳
이즈(伊豆)의 기쿠야(菊屋) 여관,
뱀이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백년 된 여관답게
-‘백년 여관에서’ 전문
‘백년 된 여관답게’, 이 다섯 글자로 시가 닫힌다. 뱀도 장기 투숙객이다. 백 년 묵은 것들이 자기 자리에 있다. 그것을 낯설게 볼 이유가 없다.
‘해방촌’은 이 시집에서 짧고 가장 아린 시다.
눈에 익은 별이 보이는 방향으로
창을 내고
정거장 가까운 쪽으로
문을 달았다
해방되던 해에 넘어와서
쭉
이러고 살았다
당신이 먼저 왔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촌’ 전문
‘당신이 먼저 왔어도 /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행이 담담하게 한 생애를 긍정한다. 누구의 생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안에서도 별 보이는 쪽으로 창을 내고 살았다는 것. 서럽지 않다. 다만 깊다.
윤제림의 시는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여주고, 듣게 한다. 흑룡강에서 온 저녁상, 백년 된 여관의 뱀, 손녀 이름 옆에 찍은 끼움 표시, 새벽길을 떠난 이모. 그것들이 모두 사랑의 풍경이다. 40년 가까이 그 풍경을 지켜온 시인이 이 시집에서 말한다. 죽음조차 삶의 일부라고. 좋으니까 불렀을 것이라고.
시집을 읽는 데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거듭 읽게 만든다는 점에서 시집을 닫기까지 오래 시간이 걸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