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자.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안 보인다면, 언제까지나 깜깜한 어둠이 지속될 뿐이라면 어떨까.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도 더이상 볼수 없고 그 모습이 어떻더라 가물가물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게 바로 강영우 박사(1944~2012년)의 삶이었다. 또래들처럼 평범한 사람을 살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어느날 친구들과 축구를 하는데 축구공이 하필 눈 쪽으로 날아왔다. 망막이 박리되고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다. 불행은 한꺼번에 달려든다 했던가. 장남의 실명에 충격받은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누나마저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시각장애인의 앞날엔 안마사 혹은 점술사라는 선택지만 놓여있던 시절이었다. 맹학교를 나온 그는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연세대에 진학했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3년 8개월만에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1976년 한국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가 되었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냈다. 4성 장군에 준하는 이 자리에 한국인이 임명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스벨트 재단 고문으로 전세계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위해 일했다.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 그가 쓴 마지막 책이다. 그는 2011년 11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2012년 2월 별세했다. 췌장암 판정을 받은 후 삶을 정리하며 쓴 글이다.
쓰여진 지 14년도 더 된 책이지만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생생하다. 오랜만에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며 생각을 해봤다. 어떻게 그는 심지어 장애인에겐 허락되지도 않았던 길을 개척할 수 있었을까. 책을 읽으며 찾아낸 비결은 네가지다.
첫째, 기회를 놓치지 않는 힘이다. 장애물을 만나면 그는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찾아 나섰다.
<종교의 힘으로 시력을 회복해 보겠다는 한가닥 희망마저 잃고 말았다. 시각장애인 고아로 어린 두 동생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분이 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을 때 친절의 손길을 내밀었던 그 여성 사회사업가였다. 곧장 중앙의료원을 찾아가 사회사업반의 문을 두드렸다. 이선희 씨는 나를 위해 맹학교 첫달 원비를 직접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미국의 서울 맹학교 시절과 연세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준 미국의 양부모 맥닐부부로까지 이어진다.
미국 유학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비가 없다고 그냥 앉아만있지 않았다.
<도미 유학을 결정한 나는 미국에 있는 친지들과 지인들에게 장학금 조달을 부탁드리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편지가 닿게 된 한 기독교인의 주선으로 그는 장학금을 받게 된다.
둘째, 포기하지 않는 힘이다.
강 박사가 평소 아들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시도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해보기 전에는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아라”
연세대에 지원할 때였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지원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 교무처로 직접 찾아갔지만 원서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문득 그냥 돌아설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대 앞 버스 정거장에서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총무로 계시던 김관석 목사님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가면 좋을지 의논드리기 위해 종로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나의 사정을 가만히 듣고 계시던 목사님은 직접 원서를 가지고 가볼 테니 원서를 두고 가라고 하셨다. 후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목사님은 내 원서를 들고 학교를 직접 방문하셔서 김윤석 연대총부처장에게 부탁을 드렸다고 한다.>
미국 유학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부는 장애를 해외 유학 결격 사유로 정해놓았다. 장애인은 외국에 나가지 말란 얘기다. 이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역경을 이기고 이 자리까지 왔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법적 조항 때문에 나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당시 한미재단 유학지도부의 이유상 박사님을 찾아갔다. 이 박사님은 이번 기회에 한미재단과 연세대학이 함께 불평등한 법적 조항을 없애자고 말씀하셨다. 이 박사님은 자신이 초안을 작성해 한미재단 총재님의 서명을 받을테니 나에게는 연세대학 박대선 총장님의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이 박사님은 문교부 국제교육과 과장님에게 건의안을 제출하셨고, 민관식 문교부 장관님의 결재를 받아 결국 그 법적 조항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되었다.>
셋째, 성공 후에는 섬김과 나눔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서 멈추지 않고 한국과 전세계 장애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백악관과 유엔에서 활동하며 미국과 한국의 다리 역할을 했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굿윌 스토어’도 그의 소개로 한국에 전파된 것이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는 재산을 정리하며 로터리재단의 평화장학금으로 20만달러를 내놨다. 그의 두 아들이 각각 2만5천달러씩 5만달러를 보태 가족이 총 25만달러를 내놨다. (한 가족이 로터리재단에 한번에 기부할 수 있는 최고 한도가 25만달러였다)
넷째, 인간이 쳐놓은 장애물엔 저항했지만 인간의 힘을 넘어선 더 상위의 존재를 인정했다. 종교인들은 그걸 ‘섭리’ 혹은 ‘소명’이라고 하는 것 같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그는 고백했다.
<나의 장애는 저주가 아닌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축복이었다. 시력을 잃고 재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알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암과 싸워 이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고 싶으셨다면 아마도 난 암을 조금 더 일찍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나의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셨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나의 재산을 정리해 기부할 기회를 주셨다.>
시각장애인을 인터뷰한 적이 한 번 있다. 월스트리트에서 활동 중인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씨다. 그 역시 살다가 중도에 시각을 잃었다. 9세에 시력을 잃었고, 하버드와 MIT를 졸업한 후 애널리스트가 되었다. 그를 만난 후 한동안 그의 삶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마음 속에 울려왔다. ‘일단 해보자’, 난관을 만나면 그가 되뇐다는 말이다. 책을 덮으며 다짐해본다.
‘일단 해보자, 해보기 전엔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