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읽는 시집⑦] 정보암 시인의 《오늘은 어제의 내일》

서사시로 되살린 현대사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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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총성은 멈췄어도 그 울림은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 속에서 이어졌다. 경남 김해에서 활동하는 정보암 시인이 펴낸 서사 시집 오늘은 어제의 내일(작가마을)은 바로 그 울림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한국 현대시단에서 서사시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자유시의 다양한 실험과 해체가 문단을 지배하는 동안,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 시의 전통은 희미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치하와 해방공간의 이념 갈등, 분단을 토대로 한 이번 시집은 하나의 문학사적 사건이다. 정보암 시인은 허구가 아닌 실제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생생한 리얼리티를 갖춘 서사시의 형식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시집에 소환된 인물은 소설가 김원일·김원우 형제의 부친과, 김해 진영 지역의 교육 선구자로 알려진 한얼학교 설립자 강성갑 목사라고 한다. 시인의 가족이 아니다. 두 소설가의 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월북했고, 강성갑 목사는 보도연맹 검속으로 총살당했다. 시인은 이 비극적 인물들의 삶을 복원하면서 여전히 아물지 않은 경남 김해 진영(進永)의 상흔을 증언한다. 소설가의 부친과 강 목사의 체험공간이 모두 같은 지역인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의 빛바랜 일지첩은

첫장부터 눈동자를 적셨다

 

어릴 적 서울내기 생각난다

내 첫사랑 민수

난생처음 달콤한 아픔을 준 아이

사변 때 총맞아 죽었단 말도 있고

가족을 팽개치고 월북이라니

한때는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연좌제가 목을 졸 때마다

억하심정 풍선처럼 부풀었지만

어쩌겠는가 숙명인 것을

 

전쟁 나던 해

너덜너덜한 유품 한 권으로

속초에서 이복동생 손 잡고

꿈처럼 시공 건너뛰어

늦은 귀가를 했다

-‘늦은 귀가일부

 

시집의 공간적 배경인 경남 진영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진영(陣營)’이라는 한자어처럼, 좌우로 나뉜 진영 싸움의 현장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념의 이름으로 죽어 나간 땅이다.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현장이다.

 

시인은 그 지명의 이중성을 표제작 오늘은 어제의 내일에서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진영(陣營)으로 나뉜 마을이 / 위대한 영웅 대동으로 공글려 / 영원히 전진하는 진영(進永)으로 / 완성된다는 행복한 결말이라는 구절은 상처를 봉합하려는 시인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 시집의 가치는 문학적 성취에만 있지 않다. 현대사의 비극을 지역 단위의 구체적 사건과 인물로 복원해낸 사료적 가치 또한 크다. 교과서적 역사 서술이 놓치는 개인의 고통과 연좌제의 질곡을, 시라는 형식이 포착해낸 것이다.

 

사람은 죽어 별이 된다고 한다

 

삶이란 본디 힘드니 생존이 곧 업적

밤하늘 별 되어 어둠 밝힐만한 것

별이 수많은 이유도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란다

 

지간에 진영서 떠오른 별 않았다

지주 진영소작 진영

우익 진영좌익 진영

진영이란 단어 붙은 것만으로

수많은 사람 죽어 나갔다

 

금병산 보석 같은 별

열 폭 병풍 빛의 향연

밤늦도록 눈망울 반짝이며

전설의 탄생 밤하늘 수놓는다.

 

진영(陣營)으로 나뉜 마을이

위대한 영웅 대동으로 공글려

영원히 전진하는 진영(進永)으로

완성된다는 행복한 결말

 

진영에 힘들고 의로운 삶 많고

진영의 오늘

어제의 내일로 산 영웅 많아

별이 그 수만큼 반짝인다는 전설

나는 진실로 믿는다

 

저렇게 불발하는 별들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믿어진다

선달바위 너머 영롱한 녹색 별

치어다보면 믿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 전문

 

아버지는 사회주의자

보도연맹 검속 피해 서울 가

북조선 혁명군 되었다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

빨갱이 지적질 주눅 들며

남한 진영에서 살았다

 

의도한 바 아니지만

결과만 보면 아내는 자본주의

아이들은 두 사상의 침전물

 

남한에 사는 큰딸

아버지 한사코 이격했고

이복동생 함께 나타난

아버지의 낡은 일지

접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역사는 지금도 숨쉬고

발밑에서 꿈틀거리며

혈육 아무리 멀리 밀쳐도

거부할 수 없다는 것

세월의 격랑 속

무엇이 중한지는 오직 역사만 알뿐

수천 년, 수백 년은 관용하면서

수십 년, 수년은 엄격함이여

선택적 감각의 변화무쌍이여.

-‘선택적 역사일부

 

정보암의 시어는 단아하다. 결이 곱고, 오랜 통찰의 시간이 배어 있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가슴을 조여 오는 힘이 있다.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내어 시적 형상화시킨 노력이 돋보인다.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비슷한 시적 상상력이 연작시처럼 반복되면서 시집 전체의 긴장감이 균일하게 유지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시적 수준은 고르나, 그 고름이 오히려 극적 긴장의 변주를 억제한다. 서사시 특유의 기복과 충돌이 조금 더 살아났다면 독자를 더 깊이 끌어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월북자 집안. 빨갱이 자식

진저리나는 멸시 손가락질

조여드는 족쇄 벗어나기 위해

나는 지나칠 만큼 방패 앞세웠다

 

반공웅변대회에 더 피 토했고

글짓기에서 빨갱이를 늑대 만들어

대한민국의 철천지원수

무찔러야 할 야수로 단정지었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국보위 연좌제 그물망 안 걸리고

다행히 중학 교사 자리 하나 구해

말년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에 관한 추억 어른거리더니

기적처럼 이복동생

낡은 서책 하나 품고 나타났다

 

그리고 조각들 맞추어졌다

이대로 눈감았으면 나는

아버지 반의반도 모른 채

저승에서 의례적 인사만 나눴으리라

 

일지 속에서 그는

따뜻한 아버지였고

고민 많던 지식인

목숨까지 던진 애국투사였다

 

화려한 투쟁 경력이나 학력은

북에서도 높은 자리 가능할 텐데

평양 떠나 금강산 어귀 사신 것은

연인에 대한 애듯함도 있겠지만

혁명 정권 실망도 적지 않았으리

 

사상 따라 인민 좋아 떠났지만

정작 자신의 식솔 못 챙긴 아쉬움

사회주의 이상의 현실적 괴리

공화국에서 세습왕조 이어지는 모순

아버지는 번뇌 깊어 별 되기 충분했다

 

아버지의 혼령 하늘 가는 길

인민의 경제, 인민의 행복

퇴행시키는 일인 독재 성간물질

초신성 탄생에 넉넉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별전문

 

이 시집을 더 깊이 읽으면 몇 가지 생각해볼 지점이 보인다. 화자의 위치가 때로 모호하다. 역사적 실체에 지나치게 선과 악으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일지첩을 매개로 한 아버지와의 화해(의 과정)도 다소 추상적이다. 수십 년간 억눌렸던 원망과 수치심이 한 권의 일지 앞에서 녹아내리는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간절한 소망처럼 읽힌다.

 

남한은 북한이 만든 핵을 머리에 얹어 놓고 살아간다. 북한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북한 주민을 희생하며 핵을 만들었다. 이 핵이 남한을 겨누고 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수많은 탈북자들을 보면서 낡고 실패한 사회주의 이념을 택한 이들의 과오를 우리 역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하는 질문 앞에 선다. 그러나 문학을 역사적, 윤리적 선택의 책임까지 확장시켜선 곤란하다.

 

결국 이 시집이 선택한 길은 심판이 아니라 이해이고, 고발이 아니라 애도다

잘못된 이념의 선택으로 인해 가족이 찢기고, 살아남은 자들이 수십 년을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그 안타까움을, 시인은 분노 대신 별빛의 언어로 감싼다. 이 시집은 위로를 넘어 진정한 화해의 문학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을지 여부는 독자의 몫일지 모른다.

 

정보암 시인은 1960년 경남 산청 출생으로 1997창조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창조문학 대상(2014)을 받았다. 시향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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