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집권 7년 동안 박정희 측과 불필요한 갈등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 하나도 없었다. 5공이 박정희의 산업화를 마무리 지었기에 지금의 박근혜가 존재한다. 측근들이 5공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국민 가슴 속에 살아나야 측근들도 존재 이유가 있다
⊙ 사회갈등이 1980년 4월 뜻밖에도 강원도 사북에서 시작
⊙ 박근혜 찾아가 ‘새마음봉사단’(옛 구국여성봉사단)을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 DJ,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22일부터 투쟁하겠다”고 최후통첩
⊙ 만약 북한이 남한을 집어삼킨다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5·18의 숨은 영웅이 나올지 모를 일
⊙ 5·18은 한국사회에서 전투적인 반미(反美)·종북(從北)·좌파(左派)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돼
許和平
⊙ 現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 74세. 육군사관학교(17기) 졸업. 9사단 대대장 및 작전참모,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 준장 예편.
⊙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정무수석, 미국 헤리티지(Heritage) 재단 수석연구원, 14·15대 국회의원 역임.
⊙ 저서: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이념은 날개가 아니다》, 《지도력의 위기》 외 다수.
⊙ 사회갈등이 1980년 4월 뜻밖에도 강원도 사북에서 시작
⊙ 박근혜 찾아가 ‘새마음봉사단’(옛 구국여성봉사단)을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 DJ,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22일부터 투쟁하겠다”고 최후통첩
⊙ 만약 북한이 남한을 집어삼킨다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5·18의 숨은 영웅이 나올지 모를 일
⊙ 5·18은 한국사회에서 전투적인 반미(反美)·종북(從北)·좌파(左派)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돼
許和平
⊙ 現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 74세. 육군사관학교(17기) 졸업. 9사단 대대장 및 작전참모,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 준장 예편.
⊙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정무수석, 미국 헤리티지(Heritage) 재단 수석연구원, 14·15대 국회의원 역임.
⊙ 저서: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이념은 날개가 아니다》, 《지도력의 위기》 외 다수.
사실, 어떠한 역사도 그냥 비켜가는 법이 없다. 당면한 역사를 놓치지 않은 지도자는 성공했고 번영했다. 역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1980년 ‘서울의 봄’과 5·17 조치, 그리고 ‘광주 5·18’은 우리에게 어떤 역사의 숨결로 남아 있을까. 역사의 숨결을 놓치지 않은 자는 결단과 선택을 통해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자는 역사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것은 역사가 비켜가지 않기 때문에 전개되는 필연적 현상이었다.
나는 군인으로 일생을 살아가려 했지만 역사는 내 운명을 바꿔놓았다. 상황의 소산이었다. 그 상황에 이르면 선택을 해야 하고 때론 맞서야 한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공과(功過)를 모두 책임져야 했다. 그 책임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의 이야기는 다시 1980년대 초로 돌아간다. 그 뜨겁고 낯선, 그리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시간 속으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80년 1월 18일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이미 법제처에 헌법 연구반을 구성,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처음 공개하면서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하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최 대통령은 10·26으로 불거진 박정희(朴正熙) 시해사건을 매듭짓고, 유신체제를 대체할 정치일정을 결정하는 데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2·12로 인해 권부(權府) 내에서 블랙홀 현상이 일어났다면, 1980년 5월 김대중(金大中)을 중심으로 한 재야의 ‘최후통첩’이 두 번째 블랙홀을 낳았다. 그 ‘최후통첩’이 무엇인지는 다시 언급하겠다.
1980년 4월 21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뜻밖에도 강원도 사북에서 일이 터졌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는 당시 국내 최대 민영탄광이었다. 계엄사령부의 집회불허를 거부하고 광부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하고 160여 명의 광부들이 다치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저임(低賃)과 막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원인이었지만 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북사태의 불길이 다른 노동현장으로 번지지 않을지 초조하게 예의주시했다. 게다가 북한에서 사북사태를 두고 대남 선전선동이 요란했다. 마치 사북 현장을 카메라로 생중계하듯 생생히 전하며 연일 혼란을 부추겼다.
5공과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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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원탄좌 사북탄광 소속 광부들의 시위 현장. 1980년 4월 24일 광부 대표가 수습대책회의에서 돌아와 합의 사항을 동료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
그런 차원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내가 직접 박근혜(朴槿惠)를 찾아간 일이 있다. 신당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옛 구국여성봉사단)을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지 않는 봉사사업은 결국 돈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반유신 바람이 거센 마당에 재야 투쟁의 빌미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박근혜는 아쉬워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말도, 거부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뒤 국민운동 차원에서 새마음봉사단을 이끌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박정희 정권시절 측근들이 5공을 삐딱하게 여긴다. 속이 좁은 것이다. 5공 집권 7년 동안 박정희 측과 불필요한 갈등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 하나도 없었다. 5공이 박정희의 산업화를 마무리 지었기에 지금의 박근혜가 존재한다. 측근들이 5공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국민 가슴 속에 살아나야 측근들도 존재 이유가 있다. 5공 때 박정희에 대한 부정여론을 그냥 내버려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DJ의 최후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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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 대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그래서 시국수습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향후 정치적 혼란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불허였다. 그해 3월 DJ는 복권이 이뤄졌으나 YS의 신민당과는 거리를 두었다. DJ는 재야 민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거기에 추종하는 세력들, 학생과 반유신 투쟁자들이 모여 급진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2일 서울역 시위에 앞서 11일 전북 정읍에서 동학제가 있었다. 정읍은 동학운동의 시발지다. 여기서 DJ는 “동학란은 민주주의 혁명”이라 규정하며 “제2의 동학란이 일어나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튿날 서울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자 DJ는 동교동 사저에서 소위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뒤 16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란 명의로 언론기관과 각 대학에 선언문을 배포했다. 선언문에는 비상계엄 해제, 신현확(申鉉碻) 총리 퇴진, 정부 개헌심의위 해체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DJ는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22일부터 국민과 더불어 요구관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 최후통첩이 5·18 광주사태와 연결돼 복잡해지는데, 만약 최후통첩이 없었다면 5·17 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5·17 조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 그날 아침에도 재야 지도자들이 모여 “민주화촉진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키자”, “최규하 정부가 흐리멍덩하게 나오면 전 국민적 궐기를 결행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보안사 정보처는 재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손쓰지 않으면 정상적 국가질서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상계엄확대 조치가 나온 것이다.
“권정달의 1996년 검찰 진술은 거짓말”
권정달(權正達)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 1996년 1월 역사바로세우기 검찰조사에서 “전두환 장군의 지시를 받아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또 “허화평, 허삼수(許三守), 정도영(鄭棹永), 이학봉(李鶴捧) 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했다”고 주장하며 “허화평 비서실장실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에서 주로 만나 논의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참모들이 모여 그런 시국수습책을 세울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비상계엄과 국회해산, 국보위 설치 문제는 모두 정보처 소관사항이다. 수사를 맡은 대공처와 군 업무를 담당하는 보안처의 업무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보·대공·보안처가 서로 머리를 맞댔다고 의심할 순 있지만, 권력기관의 속성상 고유업무 외의 일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 방안이란 것도 정부 기능이 붕괴될 때를 대비해 세워둔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는 정보처와 계엄사, 청와대가 관련된 내용이다. 보안사 비서실장 옆 회의실에서 수습방안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내가 일하던 회의실이란 게 변변한 회의탁자조차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던 그곳에서 어떻게 심각한 회의를 할 수 있었겠나?
재판정에서 내가 부인하자 권정달은 그제야 진술을 번복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회의실이 아닌, 박 대통령이 시해된 궁정동 안기부 안가에서 회의를 가졌다는 것이다.
왜 권정달은 거짓 진술을 했을까. 그는 민정당 창당 주역이자 초대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은 인물이다. 계엄 도중에 보안사·계엄사·청와대의 협력을 이끌던 이가 정보처장이다. 제일 먼저 구속돼야 할 사람이지만 위증을 해 혼자 처벌을 면했다. 1996년 당시 안기부장이 육사동기인 권영해다. 같은 권씨이기도 하다. 추측건대 권영해가 정부의 지시를 받고 모종의 ‘작용’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5공 주역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중요한 것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담은 5·17 조치가 불가피했느냐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DJ가 이끄는 ‘국민연합’의 ‘5·16 선언’이 없었다면, 재야의 성급한 급진노선이 없었다면, 5·17이 없었을지 모른다.
광주 5·18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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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5·18 당시 시민과 학생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
광주 5·18은 당대 정치상황이 직접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더 근본을 캐고 들여다보면 분단과 이념, 정치사회적 갈등이 촘촘히 연결돼 있다. 그것을 떠나 본질을 얘기할 수 없다. 5·18은 결국 최규하 정부 퇴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고, 정국이 더 이상 추스를 수 없는 긴박한 상태로 가게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5공이 탄생되는 전환점이 됐다.
광주 5·18은 학생들이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도서관에 가는 것을 공수부대 군인들이 쫓아낸 것이 시발이었다. 등교거부를 당한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가 시민들과 합류하게 되고 계엄군과 충돌,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 무렵, 광주시내에 유언비어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젖가슴을 도려냈다’거나 ‘임신부의 배를 군인들이 갈랐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죽이러 왔다’는 식이었다. 이 유언비어가 광주시민의 증오심을 극대화시킨 도화선이 됐다. 소문을 듣고 시민들이 흥분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5월 19일과 20일, 시위군중은 공수부대와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점점 늘어났고 희생자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사람들은 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느냐고 묻는다. 공수부대는 소수 간부요원으로 편성된다. 절대적으로 숫자가 적다. 적지 깊숙이 들어가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저항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 부대다. 이 부대가 광주에 파견된 것은 계엄사의 우발사태에 대비한 사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권정달은 “광주사태의 근본원인이 공수여단이란 과격한 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해 강경진압한 때문이고, 이와 같은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전두환·황영시(黃永時)·정호용(鄭鎬溶)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와 검찰이 듣고 싶어한 이야기이자, YS 정부가 듣고자 했던 주장이었다. 권정달은 철저히 5공 주역을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발언을 계속했다. 정말 광주를 진압할 생각이 있었다면 공수부대가 가면 안 된다. 보병여단이나 사단이 갔어야 했다. 오히려 공수부대 숫자가 적다 보니 초동진압에 실패, 문제가 복잡하게 됐다. 시민군은 공수부대 수를 보고 만만하게 본 것이 불행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신원 확인이 안 된 12구의 시신
5월 21일 13시경 시위대가 장갑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도청 앞으로 돌진을 시도했다. 도청 앞은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몰려오니까, 그땐 이미 자위권 발동 명령이 있었을 때다. 자위권은 위협을 받았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사용하는 것인데, 그 경우 ‘발밑으로 쏘라’는 지침이 계엄사에서 내려갔다.
그런데 위협사격을 아스팔트에서 하니 파편이 튀고 그 유탄에 사람이 맞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경찰과 예비군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고 공수부대와 시가전을 벌이게 된다.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퇴진’이나 ‘계엄해제’ 요구와 비교해 지나친 것이다. 평범한 시민의 요구는 아닐 것이다.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시민군 속에 숨어 있던 소수세력에 의해 선동된 것으로 군은 판단했다. 교도소는 5월 21일 6차례에 걸쳐 공격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제일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성공하지도 못했다. 당시 교도소에는 2700여 명이 수감돼 있었고, 그들 중 170여 명이 좌익 정치사범이었다.
교도소 습격은 보통 일이 아니다. 혁명군이 자기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습격하는 법이다. 한 번도 아니고, 집요하게 교도소 점령을 시도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무기고 탈취가 당시 44개 지역에서 일시에 일어났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장갑차를 탈취했다. 600명이 무장을 했다는데, 그 넓은 지역에서 무기고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을까? 누군가의 지휘통제를 받지 않고서는, 일거에 무기 탈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위대가 도청에 돌진한 것이 5월 21일 13시경인데, 무기고 탈취는 21일 낮부터 이뤄졌다.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탈취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18 당시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이 116명인데, 전부 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다. 그런데 총상 사망자 116명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카빈총에 의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것은 시민군 안에서 누군가가 시민을 향해 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 계엄군은 M16을 사용했다. 총상을 조사하니까, 뒤에서 맞은 시위 군중이 많았다.
무기고 탈취방법이나 교도소 습격, 총상 사망자 형태로 보면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광주시민 다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2구 시신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것도 미스터리다. 누구일까.
북한 탈북자들이 “광주 5·18을 다시 보자”고 주장한다. 그들이 왜 광주에 주목할까. 자기네들이 북한에서 들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
나는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과거 경험상, 남한의 정치사회적 격동이 있을 때마다 평양이 들썩였다. 대남 적화노선이 유지되는 한, 북한은 남한 정세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려 한다.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 10·1 폭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어록에 “1960년 4·19 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다”는 말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직후 대남파트는 전력투구해 정보를 수집했을 테고,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공작을 최대한 감행했을 것이다.
1980년 5월 북한의 대남 방송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파쇼 도당을 까부셔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 공공기관을 습격하고 좌익 수가 많은 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하거나 무기고·방산업체를 일시에 덮친 것은 모종의 ‘컨트롤 타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게다가 북한은 광주 5·18을 남한보다 더 거창하게 기념한다.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5·18 영화를 제작하고, 5·18을 북한이 이룩한 최고의 대남 공작사례로 소개한다. 또 탄도탄 제조에 쓰이는 1만t급 프레스를 ‘5·18 청년호’라고 부르고, 천리마 운동을 ‘5·18 무사고 정시 견인 초과운동’이라 칭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지만, 만약 북한이 남한을 집어삼킨다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5·18의 숨은 영웅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광주의 진실규명을 위한 요구가 결과적으로 전투적 반정부 단체를 형성시켰고, 북한과 손을 잡고서라도 군사독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좌파세력을 등장시켰다. 그 결과, 종북 좌파세력이 한국사회의 거대 흐름을 형성시켰다’는 주장에 나는 공감한다.
당시의 비극적 상황에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 있었다면, 그리고 소위 정치권력에 의한 사법부가 5공 인사를 단죄했는데, 그것이 정치적 게임이지 역사의 진실일 수 없다고 한다면, 실체적 진실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토대로 화해하고, 역사교훈으로 가져가야 한다.
5·18은 한국사회에서 전투적인 반미(反美)·종북(從北)·좌파(左派)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전부터 그런 세력이 있었지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해 5공세력이 단죄받자 그 투쟁이 정당화됐으며 결국 반우파 체제 투쟁의 고리가 됐다.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정부, 이승만(李承晩)·박정희·전두환·노태우(盧泰愚) 정권을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며 반민족·친일·친미 파쇼정권으로 몰아세웠다. 광주 5·18에 대한 YS정부의 정치적 단죄는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할까. 이것을 투쟁의 고리로 삼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군대를 광주시민을 학살한 범죄집단으로 몰아 군에 대한 거부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젊은이들에게 군에 가면 청춘을 허송세월하는 거라 생각하게 만들었고, 군 시설을 혐오시설로, 군 기지 건설과 기지 이전도 반대하게 만들었다. 반미 역시 마찬가지다. 왜 한·칠레 FTA, 한·EU FTA는 놔두고 한·미 FTA만 결사적으로 반대할까. 반미는 5·18을 경험한 386세대 정치인의 기본인식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증오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5·18은 광주시민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반우파 체제 투쟁의 영양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상태가 계속 방치되면 지역갈등, 이념갈등이 계속 심화될 것이다. 시시비비를 넘어 냉정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증오의 씨앗도 씻어내고 더 이상 광주의 그늘을 남겨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YS와 DJ의 든든한 배경은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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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1월 15일 민정당 총재에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 왼쪽부터 최규하 전 대통령, 두 사람 건너 민관식 국회의장 직무대리, 김용휴 총무처장관. |
연임보다 단임이 심플하고 임기 4년은 너무 짧고 8년은 중임의 의미가 있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다 단임 7년으로 결정했다. 박정희 정권의 18년 절대 통치가 남긴 갈등이 당시로선 너무 컸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완성하지 못한 산업화를 마무리 짓고, 정당정치를 착근하려면 7년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나는 대통령비서실 보좌관과 정무수석으로 5공에 참여했다. 5공 인사들의 의식 속에는 ‘1인 장기집권 체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대전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공화당과 신민당, 자유당과 민주당 같은 양당제가 아니라 ‘다당제’라는 정상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치구조로 가야 한다는 대원칙을 처음부터 가졌다.
1981년 1월 15일 창당한 민정당은, 내가 창당에 관여하진 않았으나, 불행히도 ‘공화당’의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민정당 창당 작업을 맡은 이들의 지식수준이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당 총재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종의 관료주의 행태 정당이었다. 정당조직은 관료적 멘털리티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정부조직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해외 정당정치나 구조를 연구한 이가 드물었다는 변명도 해본다.
민정당 창당 이후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이 창당됐다. 야당이 민정당의 관제정당일 수는 없지만 DJ나 YS 같은 거물 정치인의 발을 묶었으니 5공과 협력하는 고분고분한 사람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3김(金) 퇴진은 5공으로선 불가피한 조치였다. 구정치인 3김이 한국 정치를 3분(分)했기 때문이다. YS와 DJ는 평생 반유신 선상에서 정치투쟁을 한 인물이다. 그러니 최규하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JP는 박통 이후 반유신에 의한 시대적 희생자였다. 본인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반유신의 여러 분위기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 3월 복권된 DJ는 광주 5·18의 내란음모자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미국정부의 구명으로 82년 12월 미국으로 출국했다. YS는 80년 8월 신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미국정부는 유신시절부터 DJ와 YS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국의 좌파들은 “미국이 늘 남한우파 체제의 수호자 역할을 해왔다”고 늘상 몰아붙인다.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의 5·16 혁명 당시 미국정부가 심하게 불만을 토로했고, 박 대통령이 미국을 순방할 때도 보통 괄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정적들을 항상 미국이 보호했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미 고위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YS와 DJ 같은 야당 지도자들을 만났다. 미국은 지금이나 그때나 군사정권을 옹호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인정했을 따름이지, 군사정부를 처음부터 지지한 적은 없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DJ는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YS도 급하면 주한 미 대사를 만나 “군사정부 지지하지 말라. 민주세력을 늘 지지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곤 했다. 반유신 세력의 버팀목이 워싱턴이자 미국 언론이었다. 박정희는 그런 면에서 수세(守勢)에 있었다. 미 정부는 언제나 반유신 체제 지도자들을 백업(Back up)했고, 성원했다.
1982년 12월 23일 결국 DJ가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의 강력한 요구가 있어서 형 면제를 받았다. 그것은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훗날 다시 돌아와 야당 지도자가 됐고 이념세력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됐다. 그런 배경에는 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치인 중에는 “우리가 지지해 줬는데 DJ는 왜 우리를 섭섭하게 대했나? 친미 우호세력인 줄 알았더니 반미에 가까운 민족주의 세력이었다”고 생각하는 인사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론통폐합, 잘못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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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 시절의 허화평(좌측 두 번째). |
언론통폐합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원칙에는 동의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었다. 안 되는 것을 된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자신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군 출신의 사고에서 그런 방안이 나온 게 아니었다. 역대 정부를 봐도, 군이 언론과 원수진 일이 없었다.
다만 언론도 정화의 대상임에는 틀림없었다.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언론이 온갖 부조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리해서 건전한 언론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평범하게 받아들였다. 지나놓고 보니 복잡한 일이 벌어졌다. 군인은 언론을 모른다. 언론통폐합은 결국엔 실패한 것이다. 언론은 권력의 힘으로 정리되는 게 아니었다.
삼청교육대에 대해, 사전에 들은 바가 없었고 심각하게 생각한 바도 없었다. 으레 계엄 때가 되면 폭력배 단속으로 질서를 잡았다. 5·16계엄과 유신계엄 때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있는 모양이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 이상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 무렵, 고향에 내려갈 일이 있었다. 후배에게 ‘삼청교육대에 잡혀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엉뚱한 사람, 전혀 갈 사람이 아닌 이까지 데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교육 대상자는 각 지역 경찰과 보안부대, 안기부가 공동으로 선정했다. 윗선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지역별로 하니, 개인감정이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 숙정과 삼청교육대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불가피했다기보다 권력을 쥔 집단이 정치적 이유로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 현상들은 흔히 정치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양쪽의 입장에 따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숙정 대상자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 반대편 입장의 사람들은 정국을 안정시키고 개혁시키기 위해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연좌제를 폐지한 사연
나는 일찌감치 군복을 벗을 뻔한 사연이 있다. 보안사 대위였던 1968년 8월 동생(허화남)이 남파간첩으로 붙잡힌 것이다. 동생은 1967년 2월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8월에 북한으로 잠입했다. 그곳에서 밀봉교육을 받은 뒤 1967년 11월 경북 영일군 장자면으로 남파됐다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연좌제 탓에 나 역시 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전두환·노태우·권익현(權翊鉉)·김복동(金復東) 장군 등 군 선배들이 막아줬다. “사상적으로 문제될 게 없고 열심히 복무했다”고 변호해 주었다. 사실 연좌제는 야만적인 굴레이자, 분단이 만들어낸 민족의 비극이다. 조선시대 때는 연좌제로 3족을, 심할 때는 9족을 멸했다. 일제 때는 반일(反日)인사들을 철저히 탄압, 감시했다. 이들은 아무리 재능이 빼어나도 꽃을 못 피우고 시들어갔다.
광복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좌우익이 서로를 얽어맸다. 제주도 출신 공직자 중에 성공한 경우가 많지 않은데 제주 4·3사건 때문이다. 내가 ‘빨갱이’가 아닌데, 진급도 승진도 채용도 안 된다. 소외된 세력은 결국 반정부 감정을 갖게 된다. 긴 안목에서 보면, 반정부 세력을 연좌제가 계속 키운 셈이 된다. 그런 사회는 안정될 수 없다. 희랍이나 로마시대엔 연좌제라는 게 없었다. 내 아버지가 잘못해 자식의 재산이 빼앗긴 적이 없었다. 선진국 헌법에서는 소급 입법, 연좌제, 법에 의한 인신구금을 철저히 금지한다.
나는 연좌제 폐지를 5공화국 헌법에 규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연좌제는 야만법이자 악법이기 때문이다.
통행금지 해제와 해외여행 자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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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뉴스가 실린 《조선일보》 호외를 읽고 있는 시민들. |
통행금지 해제는 5공이 북한체제에 대한 열등감이나 콤플렉스가 없다는 상징이었다. 북한 위협을 인식하면서도 그로 인해 스스로의 발목을 묶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 어느 간첩이 자정을 넘겨서까지 돌아다니겠는가.
술꾼들이 한잔 마시다가도 통행금지 전에 서둘러 헤어진다. 상인들 역시 통행금지 전 막차를 타려고 일찍 셔터를 내릴 수밖에 없고, 공장 역시 24시간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통행금지가 국민경제 생활의 절반을 묶고 있었다.
통행금지 해제는 무지하게 중요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북한에 대한 수세적 자세에서 벗어나 국민의 경제활동 폭을 정상화시켜 주었고, 의식 속에 잠재된 냉전(冷戰)사고를 벗겨내는 계기가 됐다고 자부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해외여행을 대폭 제한했다. 북한의 대남공작에 연루될 수 있다는 점과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당시 해외여행은 아무나 갈 수 없었다. 특히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은 더더욱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민주공화국에서 여행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여행 가서 북한에 포섭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포섭돼 북한에 가면 그만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당시 재무부 관계자가 “외화가 절대 부족해 안 된다”고 고집했다. 나는 이렇게 설득했다.
“돈이 없는 것은 맞다. 그런데 나가는 돈은 파악되지만, 들어오는 돈은 파악이 안 된다. 미국 가서 채소장사 하고 세탁일 하며 자리 잡아 고국에 있는 형제와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열심히 돈 벌어 고향에 송금한다. 국가나 개인이 돈이 없어 유학 가기 어려운 시절, 해외동포들이 맨주먹으로 고생해 성공하는 것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나?”
당시 해외이민을 갈 때 자기 재산을 못 가져가게 막았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할 수 있다면, 돈을 많이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이민 가도 동포끼리 도와주는 제도가 잘 마련돼 있었지만, 우리는 맨주먹으로 이민 가니 신용대출을 받기가 불가능했다. 뼈 빠지게 10년, 20년 고생해야 됐었다. 국내 재산을 가져갈 수 있다면 10년 고생할 것, 5년만 하면 된다. 그렇게 고생해 성공하면 다시 고국으로 돌려주니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닌가. 정부가 보조금을 주진 못하더라도 자기 재산 가지고 가서 정착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지 않은가.
지금 생각하면 촌스런 생각이지만, 당시는 달러 문제만 얘기하면 벌벌 떨 때였다. 그렇게 해서 규제를 풀고 여행자유화를 했더니 미국이 이민을 쿼터로 묶어버렸다. 마음대로 나가도 좋다고 하니 문을 좁혀버린 것이다. 어쨌든 달러·북한·간첩만 생각했다면 통행금지와 여행자유화를 해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3가지 조치가 5공 정부의 ‘열린 마음’을 상징한다.
대통령 결재까지 받은 금융실명제 도입을 반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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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거액어음 사기 사건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두 부부가 1982년 7월 7일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한국경제의 산업화 초기, 경제개발을 주로 차관(借款)에 의존했다. 차관은 자고 나면 이자가 불어났다. 그나마 불리한 나라 사정에 돈을 빌려쓰는 입장이니 조건이 나쁜 외채라도 빌려야 했다.
실명제를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교과서적 방책이다.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은 실명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돈을 숨기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선진국도 아니고 완벽한 시장경제 구조도 아닌데다, 정치권력의 영향이 큰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실명제를 도입하면 중소영세업자들만 죽게 된다. 왜 그런가?
당시 일반은행의 큰돈은 대기업이 썼다. 담보가 없는 중소업자들은 돈을 못 빌렸다. 은행 문턱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사채에 의존하고 심지어 형님 돈과 삼촌, 이모 돈까지 빌려서 구멍가게를 차렸다. 사채나 친인척, 친구와의 금전거래는 신고하지 않는다. 돈을 신고하면 반드시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법대로 세금 내면 아무 장사도 못한다. 영세업자들이 비싼 사채를 얻어 공장을 돌리는데 그 돈을 실명화하면, 돈 얻어다 쓰기가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사채는 없어지지 않고 사채이자만 더 높아지고 더 음성화될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중소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 실명제를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교과서적 아이디어로서 실명제는 틀린 게 아니지만 당시 정치사회 상황을 간과한 것이다.
또 다른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막으려면 실명제가 필요했다. 또 지하경제를 노출시키면, 세원을 확보할 수 있고 선진국형 경제운영도 가능했다. 그런데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모순을 방치해 놓고, 기업모순부터 해결하라고 요구해선 되겠는가?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정치적 모순을 우선 해결하면서 기업의 모순을 고쳐가야 한다.
금융실명제는 나도 반대했지만 민정당의 반대도 컸다. 결국 대통령도 생각을 바꾸었다. 처음에 도입을 찬성했다가 반대가 심각하게 나오고, 특히 정치자금에 대한 실명제 도입이 어렵다는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통령이 찬성해 서명까지 한 것을 되돌린 케이스는 한국 현대사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그래 구속해야지”
건국 후 최대의 어음사기 사건인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1982년 5월 불거졌다.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였다. 이들 부부는 자금난을 겪는 건설업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 유통시키고 뒷돈을 챙겼다. 어음을 발행한 기업이 부도로 무너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사람은 당장 눈앞에 것만 응시하는 이가 있고, 이면(裏面)까지 보는 이가 있다. 또 당대만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전두환 정권은 7년 후면 끝이 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심판이 이뤄진 것을 역사가 보여주지 않았던가. 5공에서 저질러진, 최고 권력자와 관련된 부분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되고 넘어가면 반드시 재론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정치 문화다.
최고 권력자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깨끗이 처리하는 게 나중 후환을 없애는 길이다. 그 점에서 대통령 참모들이 중요하다. 모시다 때가 되면 그만이고, 책임은 대통령만 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말을 하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곤혹스럽다. 내 소신이 대통령의 생각과 충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진 경우도, 안 받아들여진 경우도 있었다. 의견은 늘 상충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철희·장영자 사건 당시엔 대통령과 충돌이나 상충은 없었다. 나중 후폭풍이 복잡해서 그렇지, 처리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다.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보고를 하니, “그래 구속해야지” 그러셨다. “처삼촌인데 고려해야지” 하는 얘기는 그때 없었다.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게 (사건처리를) 세게 밀기는 밀었다. 대통령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중 세월이 흘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안에서 불편해 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인간사회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번도 직접 표현한 적이 없었다.
5共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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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시절 허화평 의원.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으로 서울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
나는 대통령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야말로 대통령 직계가 아닌가. 내가 어디로 가든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내 의도와 관계없이 언행이란 것이 연결이 안 될 수 없다.
실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가졌다. 11대 총선이 끝난 직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왜냐면 5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안착했고 국회도 정상화되었다. 내가 남아서 특별히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육군 대령급 인재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 인재들을 데려다 쓸 수 있는 자리이다. 정권의 핵심인사가 권력자 곁에 오래 머무르면 나중에 불편해진다.
국가는 한 사람의 힘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내가 5공이 끝날 때까지 있다고 해서 5공 말엽의 모순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한패가 돼 맞장구쳤을 수도 있고, 침묵했을 수도 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5년 동안, 그리고 5공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가족들을 데려갈 생각이 없었는데 주위에서 같이 가야 한다고 성화였다.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 큰 애가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였다. 영어 알파벳조차 모르던 아이들을 미국학교에 입학시켰다. 아이들이 큰 쇼크를 받았다.
우리 가족은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민들과 접촉도 없었고 여행도 많이 다니지 않았다. 헤리티지 재단에 출근하면 내 사무실이 있고 비서가 있었다.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는 좌장 역할을 했는데 다양한 미팅에 참여하고, 보고서를 쓰고 읽었다. 원 없이 공부했다. 당시 미 의회는 이란·콘트라 사건에 대한 청문회와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사건 등으로 시끄러웠다. 자주 의회를 찾아 청문과정을 지켜보았다. 내가 흥미를 가졌던 부분은 3권 분립하에서 국가를 이루는 메커니즘이었다. 입법·사법·행정부라는 3개의 톱니바퀴가 어떻게 맞물려 초강대국을 이끄는지 지켜보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어떻게 정책을 수립하는지, 언론과 이익집단, 학계라는 거대한 외부세력에 어떤 영향을 미쳐 정책을 발굴하고 결정하는지 견자(見者)의 눈으로 익혔다.
나는 ‘3/5 타협’이라는 미국 헌법에 쇼크를 받았다. 미국의 헌법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처음 개최되면서 본격화됐다. 이 의회는 국민주권의 원리와 양원제 국회, 3권 분립을 구현하는 전문과 7개 조문으로 미국 헌법의 초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인구비례로 하원의원을 뽑는데 노예경제 체제였던 남부는 흑인에게 참정권을 주지도 않으면서 흑인까지 수를 셌다. 그래서 흑인 한 사람을 3/5로 계산해 남북 의석 수를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미국 국민과 지도자들은 이 건국의 조상들이 만든 모순된 헌법을 결코 폐기하지 않았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처럼 존중했다. 나는 미국의 3권 체제를 공부하며 민주주의의 바탕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그리고 5년 뒤 1988년 귀국했다. 마음속으로 5공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리고 누구의 도움 없이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귀국해 민정당에 입당, 출마하겠다고 하니 공천을 안 주면서 무소속 출마조차 못하게 했다. 내가 (5공과)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혼자 힘으로 의회정치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또 5년을 기다려야 했고 1992년 5월 무소속으로 고향인 포항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선거를 치르며 충격을 받았다. 5공 주역인 내가 거대한 관권선거의 벽에 부딪혔던 것이다. 선거풍토가 1950년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소속으로 국회에 들어갔으나 YS의 권고도 있고 해서 민자당(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뀌었다)에 입당했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해 ‘12·12 반란 가담 및 중요 임무 종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명예회복을 위해 1996년 4·11 총선에 다시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해 당선됐다. 사실 당선이 목표가 아니었다. “정치재판을 한 YS,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당선되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지 모르나 5공이 정당하다는 의미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선되고 기뻤다기보다 착잡한 마음이 앞섰다. 대법원 최종판결이 나면 당선되는 것으로 끝이 나니까 말이다.
YS에 하고픈 말
YS는 1992년 민자당 후보로 대통령이 됐다. 3당 통합은 민주투쟁과 산업화투쟁 세력 간 통합이었다. 정말 하느님이 계셨다면, 하느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YS는 한때의 적에게 도움을 받아 대통령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민자당을 진정한 자기의 당으로, 민주정당으로 만들었다면 지금의 한국정치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1979년 10·26 이후 상황을 긴 역사적 안목에서 제대로 정리했다면 한국사회는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됐을 것이다.
비록 그가 나를 구속시켰지만, 언젠가 만난다면 “정치적 재판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재조명해 국민이 화합하고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YS가 무슨 권한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5·18을 내란으로 규정해 역사를 뒤엉키게 만든 과오를 인정하라는 의미다.
정치가 아름다운 것은 각자 입장에서 국가와 민족 앞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은 나름 이유가 있다. “계엄을 해제하라”, “최규하 정권, 물러가라”는 주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입장 차이 때문에 서로 충돌한다. 다만 대전제가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 고민하며 싸운다는 것이다. 그 위에는 대한민국이 있고 국민이 있고 그 너머에 북한 동포가 있다.
2012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노선이나 이념갈등의 뿌리는 10·26에서 촉발된 광주 5·18과 직결된 것이다. 1980년의 현대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취재후기] ―공수부대가 강경진압한 것은 사실 아닌가요. “뭘 기준으로 강경진압이라고 하나요?” ―피해자가 있고 증언이 있잖아요. “과잉데모는 과잉진압과 같이 갑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충돌이 돼 당기고 미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과잉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권정달(전 보안사 정보처장)이 이런 말을 했어요. “‘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적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지침이 실행됐다”고요. “저한테 질문하면서 권정달씨 기록 말고 다른 공부는 안 했나요? ―(다른 자료도) 봤습니다. “봤겠죠. 그러니까 권정달은 광주사태를 모릅니다. 진압을 어떻게 해라, 출동하라 말라는 것은 자기 업무가 아닙니다.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강경진압과 관련한 일련의 결과가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군인은 언제나 국민 편에 섰습니다. 건국 당시 좌우투쟁부터 한국전쟁까지 군인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다. 10·26 이후 군이 국민 편에 안 섰다고 하지만… 군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수행에 매진했습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설사 발포명령이 떨어져도… 군인들은 그렇게 안 합니다. 전두환의 군대가 아니라, 정호용의 군대가 아니라, 국민의 군대였으니까요. ‘경상도 군대가 전라도 사람 죽이러 왔다’고 유언비어가 퍼졌지만 호남·광주 출신 군인도 많았습니다. 국민의 군대가 이유없이 국민을 발로 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허화평씨와 기자와의 대화는 녹록지 않았다. 증언을 듣기 위해 많은 질문을 준비해야 했다. 지적이고 섬세해 보이는 그였지만 때론 화가 나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탁자를 손으로 탕, 탕 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군인이었다. 기자에게 “당신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세뇌를 받았다. 질문 자료가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잘못 재단한 역사적 기록을 사실로 믿어버려선 곤란하다. 기자는 모든 일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며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충고까지 했다. 허화평씨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리고 5공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에게 5공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를 8차례 만나 20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다. 그는 지금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역사를 공부한다. 스스로 사상가라고 말할 정도로 치열한 논리를 닦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10·26에서 시작돼 5·18로 이어진 현대사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감정의 아픈 응어리에서 벗어나, 5·18내란·반란수괴·불법진퇴·상관살해라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결과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서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실, 광주의 상흔과 아픔은 아직도 한국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제반현상을 칭칭 동여매고 있다. “2012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노선이나 이념갈등의 뿌리는 10·26에서 촉발된 광주 5·18과 직결돼 있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