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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감독을 만나다

류승완(下)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다”

글 :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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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다.”
 
  류승완(37)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인 <짝패>(2006)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2008년의 <다찌와마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실패 후 <부당거래>(2010)로 재기하며 그는 한층 성숙한 영화세계와 인생관을 갖게 됐다. 그는 이제 자신있게 “1등 하지 말고 2등으로 오래가자 주의”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촬영 현장을 전쟁터같이 만들어 놓는 충무로의 ‘액션키드(action kid)’가 이제 성숙한 ‘액션의 마에스트로(maestro)’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10년간 장편 7편과 단편 8편 모두 15편으로 결코 많지 않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의 영화세계는 분명히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하나같이 독특한 영화제목처럼 그의 영화는 액션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지만, 결코 승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승부의 허망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매력적인 ‘버디무비’(buddy movie·짝패 영화)로 완성해 놓았다.
 
  또 그의 영화 속에서는 피가 낭자하고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지만, 그는 주인공 누구도 영웅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배우와 카메라 워크로 떠들썩한 영화를 만들어 내며 관객들이 한시도 눈을 못 떼게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가슴속엔 ‘인생의 허망함’만 맴돌게 만들어 놓는다.
 
  그래도 관객들은 ‘류승완의 영화’에 여전히 매료돼 있다. 그의 영화 전면에 그가 던져 놓은 메시지를 곱씹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을 투영하며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삶의 구원에 대한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류 감독의 진화를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이번에는 그의 영화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동생인 영화배우 류승범(30)씨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과 그의 영화작업 전반에 걸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예쁜 배우를 쓰지 않는 이유
 
  ―영화에 남녀 불문하고 예쁜 배우가 나오지 않는데요. 배우를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요.
 
  “주연배우에 한해서 하자면,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는 투자가 되는 배우여야 해요. 두 번째는 이미지고요.”
 
  ―투자가 된다는 건, 투자자가 좋아하는 배우를 의미하나요.
 
  “투자자의 성향을 떠나서 그 배우가 대중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가질 수 있는 스타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지는 제가 그리려고 하는 세계의 옷을 입고 섰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인간성을 보죠. 감독들끼리 그 얘기 많이 하거든요. 그 배우 어땠어? 이런 거. 아무리 연기를 잘하고 이미지가 좋고 투자가 잘되고 대중이 좋아해도 어쨌건 감독들은 자기 인생에 꽤 많은 시간을 한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부대끼잖아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싸워서 될 일이 있고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본인의 베스트 캐스팅을 꼽는다면요.
 
  “저는 지금까지 그런 측면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어요. 실패의 가능성이 있을 때는 전단계에서 뭔가 꼭 사고가 났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음 순위로 됐던 배우와 작업했던 게 더 좋아서 결과적으로는 좋았어요. 이혜영 선배 같은 경우는 <피도 눈물도 없이>(2002)가 자기의 영화가 아니었나 봐요. 그래서 시사회 하고 나서 약간 쇼크를 받았더군요. 제 입장에서 보자면 좋았거든요. 모든 배우들이 굉장히 헌신적으로 해 줬어요.
 
  한창 잘나가던 전도연씨가 액션스쿨에서 샤워도 못하면서 하루 4시간 동안 땀 흘려 가면서 뭐가 잘 안되면 스턴트맨들하고 기합까지 받아 가면서 영화를 찍기도 했어요. 부상을 입어 가면서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고. 정재영씨 같은 배우도 당시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컷 할 때까지 자기 다친 거 티 안 내다가 샷을 완전히 끝내고 나서 아프다고 하고. 류승범만 해도 <아라한장풍대작전>(이하 <아라한>, 2004) 할 때 지금 생각하면 태릉선수촌의 선수처럼 검술연습 하고 그랬거든요.
 
<짝패>.
  <올드 보이>로 완전히 세계적인 스타가 된 최민식씨를 그냥 <주먹이 운다>(2005)에서 진짜 주먹질하고 치고받게 하는데, 군소리 한마디 없이 찍고. <짝패>에서 이범수씨, <다찌마와 리>(2008) 임원희씨는 말할 것도 없고요. <부당거래>(2010)의 황정민씨와 유해진씨까지 누가 베스트라고 하기에는 각각이 저한테 줬던 좋은 기억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에 찍은 영화가 기억에 가까이 있으니까 그 차이는 있겠죠. 멀리 떨어진 영화일수록 기억이 가물가물하니까. 그런 식의 비교는 힘들 것 같아요.”
 
  ―여성들도 보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도는 별로 없나 봐요.
 
  “<부당거래> 마지막에 클라리넷으로 음악 깐 게 여성들의 사랑을 받아 보겠다고 한 건데 클라리넷으로 안되더라고요(웃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서서히 얻고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이 세 가지의 간극이 힘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좀 찾은 것 같아요. 그리고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도.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은 많이 없어졌어요.”
 
  ―해야 할 것이란?
 
  “딱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려운데…,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까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인데, 내 영화 속에 좋은 질문을 가지고 있거나 좋은 답을 가지고 있거나,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소셜테이너’로서 사회참여를 말하는건가요.
 
  “사회참여라고 하면 범주가 너무 정해지는 것 같아요. 현실을 바라본다는 것이 더 정확한 개념 아닐까 해요. 예를 들어 <아라한>도, 그 영화를 만든 건 그런 거였거든요. 제가 어렸을 땐 동네에 도장이 많았어요. 태권도, 쿵푸…. 쿵푸도 영춘권, 당랑권, 소림권이 있고. 그 수많은 도장들과 고수들은 다 어디 간 거지라는 연민에서 시작됐어요. <짝패>(2006)도 제가 보증금 몇 백만 원이 없어서 이삿짐을 밖에다 놓고 거기서 가족들이랑 하룻밤 지냈던 기억에서 시작된 거예요. 있는 사람들이 왜 부동산과 집에 집착해서 없는 사람들을 거리로 내모냐고요. 실제로 부동산 재개발지역에서 아직도 폭력사건이 발생하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분노, 이런 것들이 영향을 줬어요. 제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머리로만 만든 건 <피도 눈물도 없이> 정도였던 것 같아요. 거기엔 투견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취재도 별로 없었고, 제 취향으로만 만든 영화라. 그렇게 보면 <부당거래>만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제가 나이를 먹고 경험치를 쌓으면서 숙성도가 달라지는 건 있겠죠. 그것을 단순히 현실을 투영한 사회참여로 가둬 두기에는 설명이 안되는 거지요.”
 
 
  이 영화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다
 
  ―그럼 액션영화에도 나름 철학이 있을 것 같네요.
 
  “네. 액션영화에 한해서는 저는 세 가지 테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구원과 희생과 복수의 테마예요.”
 
  ―영화에서 액션이 중요하다고 얘기한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기본적으로 활동사진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거여서 연출 짤 때 블로킹(blocking·연기지도) 짜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카메라나 인물의 움직임들, 그것이 리듬이라는 표현이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부당거래>에서 가장 정적인 장면 두 개가 검사하고 스폰서가 횟집에서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이에요. 여기서도 둘이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지요. 뭔가 먹든지, 뭘 보면서 하든지. 그리고 검사와 용의자가 취조실에 있는 장면은, 그들은 가만있는데 카메라가 움직이죠. 저는 움직임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즉, 제가 액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폭력보다는 동작지도의 개념이에요. 저는 분노나 환희 등과 같은 감정의 움직임도 액션으로 보고 있어요.”
 
  ―<아라한> 찍고 큰 영화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그런 건 계속 바뀌는 것 같아요. 하나 끝내고 나면 징글징글하니까 보기가 싫거든요. 그 얘기도 시간이 흘러서 조금 엄밀하게 정리를 해 보자면, 큰 규모의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아주 많은 양의 CG(computer graphic)를 요구하는 판타지 장르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어요.”
 
  ―감독들은 늘 이번 영화가 마지막 영화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는데, 류감독도 마찬가지인가요.
 
  “저도 그런 공포가 있죠.”
 
  ―그런 조바심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장애가 되진 않나요.
 
  “예전에는 제가 현장에서 그렇게 난리친 이유가 이 기회가 나한테 다시 안 올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어요. 지금도 그 공포가 있지만, 어쨌든 운이 좋아서 10년 넘게 영화를 만들었단 말이에요. 제 마음 같아서는 임권택 감독님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같이 나이 들어서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그것조차 제 욕심이잖아요. 그리고 추해질 수도 있고. 보는 사람은 저게 뭐야 하는데 스스로 ‘좋지 않니?’ 이러면 추하잖아요. 이제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해 보면서 거기 얽매이진 않아요.”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만큼 생활이 안정됐기 때문인가요.
 
  “생활을 생각하면 두렵죠. 제 동생이랑 그런 얘기도 했는데, 우리가 밀려나면 또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뭘 해야 하나 하고요(웃음). 저는 진지하게 제빵사 자격증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있거든요. 빵 만드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의식주와 관련된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그건 예전부터 했어요.”
 
  ―생계를 생각한다면 빵 만드는 것보다 빵집을 하는 게 낫지 않나요(웃음).
 
  “빵집을 하게 되면 저는 빵을 만들고 싶어요. 저희 아이들도 이름 있는 빵집보다는 빵을 직접 만드는 집에 가서 항상 빵을 사요. 저는 크고 허세 부리는 걸 싫어하거든요. 한 종류만 해도 그 집 가서만 먹을 수 있는 그런 빵을 만들고 싶어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정말 진지하게 지금도 생각하고 있어요. 제한테 그런 공포가 있어요. 영화 <아마겟돈>처럼 혜성이 다가와 지구가 멸망하는데, 유엔에서 전세계 각 나라별로 몇 명씩만 안전한 벙커로 데리고 들어간다면 과연 영화감독이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먹을 걸 만들 줄 알거나 옷을 만들거나 집을 지을 수 있거나 하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저는 이 일이 그렇게 위대하다고 생각 안 하거든요. 위대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긴 하죠.”
 
 
  원래 류승범의 꿈은 DJ
 
<피도 눈물도 없이>가 상영 중인 시네큐브 극장 안에서 액션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류승완·류승범 형제.
  ―부모님의 지순한 사랑을 봐서 멜로 장르에는 관심이 없다고요?
 
  “말이 그런 거죠. 저희 부모님이 두 분 다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제가 중 1~2학년 때였죠. 다 연초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몇 개월 동안 병간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봤는데, 병간호하다가 병을 얻은 거 같아요. 제가 조금 있으면 아버지보다 더 많이 살거든요. 저희 부모님이 마흔에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젊은 나이에 사업 실패해서 재산 날리고, 아내 암 치료한다고 병원비로 남은 재산 다 날리고. 제가 볼 때는 술도 안 드시던 분인데 스트레스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개월 만에 돌아가셨는데, 제 생각에 그때 분명 아버지도 무지하게 아팠을 텐데 아내가 더 아플 테니까 자기 아픈 걸 참은 거예요.
 
  그때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이 있는데, 그 일기장 보면 평생 동안 당신이 아내한테 잘못한 것만 계속 쓰면서 기도하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지금도 그거 보면 눈물이 나와서 한 번에 완독을 못해요. 승범이는 그 이야기 하는 거 너무 싫어해요.
 
  저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같은 영화 못 봐요. 취향의 문제를 떠나서 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아서 저는 그게 호러(horror·공포)영화 보는 것 같았어요. 승범이가 <수상한 고객들> 하고 나서 태도논란으로 난리 난 적이 있었거든요. 제가 영화를 보니까 왜 그런지 알겠더라고요. 얘가 멍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어요. 제 동생이나 저나 똑같이 가난에 대한 공포가 있어서 그 영화에서 묘사한 가난 때문에 사람이 자살까지 가는 과정이 동생을 그렇게 멍하게 만든 거예요.
 
  저희 아버님이 마지막에 병원에 가시기 전에 바퀴벌레 약을 드셨거든요. 음독을 하셨어요. 몸은 아픈데 병원에 갈 수는 없고 노모와 아이 둘이 있는데 자기 살아 있는 게 오히려 짐이 되니까 차라리 죽으려고 하셨어요. 다행히 독은 다 배설돼서 빠져나가고 결국 사인은 자살이 아니라 암으로 인한 병사가 되셨는데. 그런 경험이 있는 동생한테 <수상한 고객들>은 멍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어요.”
 
  ―형제 중 누가 더 강해요?
 
  “제 동생이 훨씬 강하죠. 제 동생은 기본적으로 안에 강한 게 있어요. 저는 <장군의 아들>을 보면 김두한이 원래 센 놈이 아니라 싸우면서 다음 상대가 세지니까 자기도 모르게 종로의 최고가 돼 있는 거를 봤어요. 저는 그런 케이스고, 승범이는 기본적으로 자기 안에 강력한 영혼이 있는 애고.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저는 자유가 없어요. 저는 유치원에서 장터놀이할 때부터 장난감을 안 사고 반찬거리를 샀어요. 우리나라 장남 콤플렉스라는 거 있잖아요. 어려서부터 ‘우리 집안의 기둥’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장남들의 특징을 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영화에 동생이 많이 나와서 비판받기도 하는데, 실제 류승범을 키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건지?
 
  “처음에 <죽거나 나쁘거나> 할 때는 주변에 한국말 하고 사지 멀쩡한 친구들 다 출연했으니까요(웃음).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승범이는 배우 할 생각도 없었고. 걔는 원래 꿈이 DJ예요. 얘가 배우가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게 <다찌마와 리> 인터넷판(2000)을 만들고 나서였어요. ‘어 얘가 연기 좀 하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기 공부는 전혀 안 했죠. 학교 공부도 안 했는데요, 뭐. 그런데 얘가 사실 <복수는 나의 것>(2002)에 단역으로 출연하고,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이런 영화 하면서 이미 제가 키우고 자시고 할 선을 넘어버린 거죠. 결정적으로 SBS 드라마 <화려한 시절>(2001)을 하면서 대중적 인지도가 올라가 스타가 됐고, 2000년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는 업계에서는 스타였지만 대중적인 건 별로 없었거든요. 예전에는 류승범이 류승완 동생이었는데 류승완이 류승범 형인 시대가 온 거죠, 이미. 그때 이미 그랬어요. 그래서 ‘키워 주겠다’ 이건 어불성설이에요. 저는 그 질문을 하시는 분들한테 반문을 해요. ‘자, 그렇다면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배역으로 다른 배우 누가 떠오르시던가요?’ 그건 정말 가감 없이 그게 사실이에요.”
 
 
 
“승범이와 내가 양아치같이 살기는 했지만…”

 
  ―형제가 같이 작업하면 팀워크는?
 
  “불편해요. 힘들어요. 매번 즐거운 게 아니라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오는데. 배우랑 감독이 진짜 작업하고 나서 사이가 안 좋다면 안 보면 되잖아요. 그런데 가족관계니까 끊을 수도 없잖아요.”
 
  ―잘 싸워요?
 
  “많이 싸우죠.”
 
  ―치고받고요?
 
  “절대 안 그러죠. 저, 비폭력주의자예요. 그런데 원칙이 있어요. 저는 현장에서 승범이한테 이름을 안 부르거든요. 배역명을 부르고. 승범이는 저한테 형이라고 안 해요. 그 원칙은 승범이가 세운 거예요. 승범이가 현장에서 지금은 좀 덜한데 모니터 옆에 잘 없어요. 다른 배우들은 감독하고 옆에 같이 있고 그런데. 언제 한번은 서운해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현장에 수십 명의 스태프가 있는데 감독이 형이고 주연배우가 동생으로 딱 붙어 있으면 나머지 사람들 전부 소외시키는 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런 시선 별로 의식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와는 다르군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류승범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걔는 사춘기도 자주 겪고요, 이제는 저보다 훨씬 형 같아요. 사고의 깊이가, 걔야말로 몸으로 세상을 터득한 애죠. 군대 안 간 것도 고등학교 중퇴해서 학력이 안돼서 그랬어요. 그리고 걔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에요. 저는 뭔가 재느라고 못하는 게 있는데, 스스로 경험해서 이게 뜨거운지 차가운지, 더러운지 깨끗한지 알아내야 하니까 훨씬 더 탄탄하죠. 그래서 저는 이 친구에 대해서 거는 기대가 커요. 이제 겨우 서른이 넘었잖아요.”
 
  ―큰 배우가 될 것 같아요?
 
  “큰 배우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될 것 같아요. 저나 승범이는 이제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겠다,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 이런 게 없어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게 저희한테는 제일 중요해요. 영화가 저희를 불행하게 하면 당연히 떠나죠. 왜 내 삶을 불행하게 하는 걸 붙잡고 있어요?”
 
  ―감독으로서 동생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저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얘가 겪는 혼란이나 이런 것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감독으로서 보면 굉장히 긍정적인 혼란 상태인 것 같아요. 가족 입장에선 자기 가족이 고민하고 있는 거 싫잖아요, 힘든 거 싫잖아요. 그런데 감독 입장에서 보면 그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개런티는 잘 주세요?
 
  “개런티는 가족이면 더 챙겨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부당거래> 때만 잘 못 줬죠. 제 돈 쓰는 것도 아닌데, 그 오해들이 많죠. 그런데 저는 대본 줄 때도 소속사 통해서 전하지 직접 잘 안 줘요. 공과 사가 구분이 안되면 그건 정말 양아치죠. 저희가 또 양아치는 되지 말자 주의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양아치같이 살긴 했지만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야 하지 않니? 이런 거죠. 박찬욱 감독님한테 제가 크게 배운 게, ‘품위를 지키라’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품위라는 것이 허세를 말하는 게 아니라 도리를 하라는 거죠. 승범이나 저나 할머니한테서 배운 교육이 큰 것 같아요. 남에게 피해 주면 안된다는 것이 몸이 배어 있어요.”
 
 
  신정아 스캔들은 웬만한 창작자들도 그렇게 못 써
 
  ―아버지로 인해 영화와 가까워지게 됐다는 게 무슨 뜻인지요.
 
  “저희 아버님이 영화를 아주 좋아하셨어요. 특히 할리우드 스타를 좋아하셨는데,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스크랩해 놓고 저한테 설명해 주셨어요. 주말에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을 보면서 앤서니 킨, 리마 빈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지요. 아버지는 저에게 당시 유명한 영화평론가 정영일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해 주셨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극성으로 영화를 보여줬냐면, <벤허> 앵콜로드쇼를 보러 서울에 올라오는 거예요. 제가 온양 살 때였어요. 그리고 삼촌이 홍콩영화를 좋아하셔서 주말마다 극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삼촌은 동시상영관에서 하는 성룡(成龍·청룽) 영화나 옛날 소림사 영화들, 쇼브러더스 영화들에 매료돼 있었어요. 그래서 전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극장을 혼자 다녔어요. 초등학교 때 시험지 빈칸에 알고 있는 영화배우 영화감독 가나다 순으로 적고. 시험은 대충 풀고. 그게 아주 어려서부터 영화에 빠져 있었던 것같아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만났던 사람들 얘기인가요. 인위적이 느낌이 별로 없어요.
 
  “많이 그런 편이에요. 제가 영화 볼 때 대사를 대사처럼 치는 걸 못 견뎌해요. 시나리오도 대사가 문어체처럼 만들어진 걸 못 참고요. 그리고 또 가짜 사투리도 못 견뎌해요. <주먹이 운다>에서 원래 대본에 변희봉 선생님이 맡은 박사범 대사가 충청도 사투리였거든요. 그런데 변 선생님이 충청도분이 아니라서 차라리 변 선생님 고향말투로 하시라고 했어요. 꼭 이 배우가 했으면 좋겠는데 이 배우가 사투리라든지 뭐가 안된다면 배우에 맞춰요, 저는. 그래서 저는 영화 만들 때 캐스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액션키드’의 성격을 갖게 된 이유가 고등학교 때 구타를 많이 당해서라면서요.
 
  “그것보단 저는 어려서부터 액션영화를 워낙 좋아했어요. 성룡영화, 레이더스 시리즈, <리셀 웨폰>이나 미국형사 영화들, <형사 코작>이나 <더티 해리>같이 터프한 형사들 나와서 악당들 응징하는 영화들을 너무 좋아했으니까. 80년대를 산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공포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웬만한 영화 스펙터클을 압도하는 장면이 뉴스화면에서 나오는 걸 경험했던 사람들이라…. <아라한>에서도 보면 폭력적인 장면이 툭툭 나오잖아요. 깡패한테 구타당하는 장면, 이게 제가 볼 때 그 경험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경험주의에 입각한 류 감독 생각의 범주 속에서는 ‘신정아 사건’ 같은 시나리오는 머리에서 안 떠오를 것 같네요.
 
  “그렇죠. 치정극이잖아요. 기본적으로 저는 상상력이 뛰어나기보다는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현실을 추적하면서 다른 해석으로 뭔가 만들어 내는 게 몸에 맞는 것 같아요. 송능한 감독님은 <넘버3>(1997)나 <세기말>(1999)같이 훌륭한 영화 잘 만드시던 분인데, 영화가 현실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해서 이민가신 거 아니에요? 영화감독으로서는 그런 사건들이 재밌는 소스라 좋긴 한데, 우리가 상상력으로 채울 만한 자리를 만들어 주셔야지요(웃음). 신정아 스캔들은 웬만한 창작자들도 그렇게 못 써요. 그 커넥션과….”
 
  ―초기에는 특정 감독에 대한 오마주를 영화 속에 많이 담는 편이셨지요?
 
  “많았죠. 하지만 이젠 없어졌어요. 예전에는 <짝패> 같은 경우 제가 좋아하는 모든 영화를 흉내내고 싶고 증명하고 싶고 그런 거였는데, <다찌마와 리>는 완전히 일종의 콜라주 같은 영화고, 끝내고 나니까 이제는 원본을 만드는 것에 대한 갈증이 생겼어요. 그 전에는 그런 것들이 별로 없었는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사실 제 삶에 어떤 부분이 투영된 걸 툭해 버린 거고, <주먹이 운다>에서 승범이 파트의 생활상이 사실 저희 삶의 모습들을 담아낸 거고요. 승범이가 사는 집이 저희가 살던 집 구조랑 똑같아요. 제가 그렇게 세트를 그려서 이렇게 해 달라고 했어요. 지금은 제 길을 찾고 있어요. 여전히 제가 존경하는 영화들에 대한 존경심은 있지만 모창하는 데 질린 거예요. 그냥 내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다 그런 거죠.”
 
영화 제작 현장의 류승완 감독.
 
 
문화권력이 세야 선진국

 
  ―한국 영화 산업이 어려운데 일시적인 현상일까요.
 
  “저는 지금 성장통을 겪고 약간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아요. 지난 10년이 한국 영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1998년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라고나 할까요. 2000년대 주축이 된 감독이 일제히 등장하고, 데뷔작에 실패했던 감독들이 성공적인 차기작을 내놓고. 그때 데뷔했던 감독들이 계속 양질의 차기작들을 만들어 냈어요. 여기에 초를 친 게 돈이 몰리면서 주식 시장에 혼선을 일으키고, 그 거품이 빠지면서 온 건데….
 
  그런데 한국영화 시장은 한계가 분명히 있어요. 미래를 예측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제 생각에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영화사를 보면 사이클 굴곡이 있어서, 지금 일본영화와 홍콩영화 시장이 거의 몰락한 상태를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지금 태국영화 시장이 거의 죽는 줄 알았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어요. 중국영화 시장이 저렇게 커지는 게 경제 개방과 정치적 변혁과 맞물려서 그런 거지요.
 
  저는 한국영화가 시장의 차원에서, 문화적 차원에서 전기를 맞으려면 통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남한의 인구는 줄고 있고, 통일이 되면 어쨌건 유럽과 정서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중국과도 가까워질 테니까 일본의 경우도 통일된 한국을 단순히 한류 스타들 몇몇을 계속 키워 내는 시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볼 것 같거든요. 세계 정치에서 온전한 통일국가로서 자리매김을 했을 때 갖는 위치들이 분명히 달라질 것 같아요.
 
  ―이 상황에서는 영화계가 점프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통일과 같은 극적인 정치·사회적 변화가 따라야 한다는 거죠?
 
  “외부에서 뭔가 나와야죠.”
 
  ―류 감독은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한 감독인데….
 
  “저는 그냥 운이 좋게 그 시대에 휘말린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도 부산국제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훈련된 시간들이 함께 폭발해 준 것 같거든요. 지금 세대를 보면 서로 다른 동세대 감독들에 대한 관심도 없고 그래요. 그게 약간 일본영화 분위기랑 비슷하거든요. 그런데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게 되면 예술가들이 거기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겠죠. 그런 게 있지 않으면, 산업적으로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전체 산업 규모가 자이리톨 껌의 매출도 안된대요. 소위 껌값도 안되는 시장인 거예요. 그렇게 보면 매년 기적이 발생하고 있는 거지요.”
 
  ―그 안에서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탄생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죠. 어쨌건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혼란이나 부패나 스캔들이 있긴 하지만 야만의 시대는 통과했잖아요. 어쩌면 조금씩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는 보거든요. 시민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정치만 계속 뒷걸음질치는 것 같아요. 좀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 가지고 투표하고 앞으로 갈 사람을 뽑는 데 같이 해 주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준익 감독님 표현이 맞는 게, 후진국은 정치·경제권력이 세고 선진국일수록 문화권력이 세다고 하던데요.”
 
  ―우리나라 문화권력도 센 편 아닌가요.
 
  “저는 순수한 문화권력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 문화와 정치가 결탁했을 때의 권력인 것 같아요. 이준익 감독님이나 제가 동의하는 부분은 순수한 문화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선 시민들이 예술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해요. 우리나라같이 IT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불법 다운로드 문제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화부의 파워보다 방송통신위원회의 파워가 더 세기 때문에 결국 거기서 밀린다는 거죠. 사람들이 문화를 문화로서 즐길 수 있어야 문화권력이 강해져요. 순수한 문화권력일 때 그것이 진짜 권력이겠죠.”
 
 
  영화의 숙련공이고 싶어
 
  ―문화권력은 전통에서 나오는데, 한국 영화계는 사실 전통이 단절된 집단 아닌가요.
 
  “그래요. 1960년대 감독들이 1970년대 김호선·이장호 감독한테 뒤집히고, 그 영상시대 동인들이 1980년대 등장한 배창호 감독과 중반에 등장한 박광수·장선우 감독한테 뒤집히고, 이 감독들이 1990년대 초반 프로듀서들한테 뒤집히고, 그 프로듀서들은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감독들한테 뒤집히고. 그런데 지난 10년이 특별하다는 게 뭐냐면 그 연결고리가 희미하게 이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현승·김성수·허준호 이런 감독들이 박광수 감독의 적자라는 걸 인정하고, 봉준호 감독 같은 사람들이 박종응 감독이나 선배 세대와의 교류를 인정하면서 유지가 되고 있어요.
 
  지금 10년이란 사이클이 돌아갔는데, 그 10년을 버텨 낸 감독들이 자기와 취향이나 세계관을 공유하는 감독들과 손잡고, 박찬욱 감독님은 이경미 감독님의 영화를 제작하고, 봉준호 감독과 김지운 감독의 조감독을 했던 친구가 가까운 프로듀서와 데뷔작을 만들고, 저와 작업했던 조감독은 제가 제작한 영화를 연출하고, 이런 식으로 지금 연결되면서 단절의 개념이 아니라 선후배들 간의 계승이 이뤄지는 게 큰 변화 같거든요. 선배와 후배의 단절의 개념이 아니라 긍정적인 개념의 경쟁이 있잖아요. 강우석 감독의 영화가 걸려 있는 동안 독립영화도 같이 극장에 걸려 있고,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재밌어지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액션의 마에스트로라는 꿈은 여전한가요.
 
  “장인에 대한 존경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한 거죠. 세상엔 자신의 천재성을 가지고 빛을 발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제가 천재가 아닌 걸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어요. 저는 사실 성룡영화만큼 좋아하는 게 짐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나 이런 뮤지컬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마틴 스코세지의 폭력영화만큼 버스터 키튼이나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정말 좋아해요. 폭력이란 건 그 영화가 요구하고 있는 테마의 부분이지 폭력을 향해서만 제가 가는 건 아닌 거고요. 그 해석은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죠.”
 
  ―어떤 영화감독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저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자기 전문분야에서 좋은 것을 계속 만들어 내는 숙련공이고 싶어요. 제가 가방이나 구두에 비유를 많이 하는데, 쓰기도 좋고 모양도 좋고,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나이 들어서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감독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는 <미스틱 리버>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좋아하는데, 최근의 그 <체인질링>이나 <그렌 토리노>는 미치는 줄 알았고, <인빅터스>가 약간 이상했어요. 설교를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설교를 하는 거예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렌 토리노>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건 1960~1970년대 세르조 레오네나 돈 시겔 같은 감독들과 수많은 영화를 했던 그것이 쌓였기 때문일 거예요. 히치콕, 돈 시겔처럼 평생 스튜디오에서 계속 영화를 만들던, A급 감독으로 추앙받지 못하고 약간 핍박받으면서 만들던 그런 양반들이 끝까지 살아남아서 만든 걸작들이 있잖아요. <짝패> 만들어 놓고 제가 좋아하는 대사가 있는데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라고. 충무로의 선배들이 항상 하는 얘기거든요. 그러고 싶은 거죠. 저는 1등 하지 말고 2등으로 오래가자 주의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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