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동이>에 비친 숙종의 진실

숙종은 카리스마의 군주였다

  • 글 : 이한우 朝鮮日報 문화부 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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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로 태어난 숙종은 체계적인 제왕학 배워
⊙ 영조가 숙빈 최씨 사망후 궁정동에 묘당 세워
⊙ 역사드라마는 드라마도 있어야 하지만 역사도 있어야
숙종과 최숙빈을 소재로 한 드라마 <동이>.
방송드라마 <동이>가 인기를 끌면서 조선시대 숙종과 장희빈 그리고 영조의 친모인 숙빈 최씨가 재조명을 받고 있다. <동이>가 바로 숙빈 최씨다. 그동안 이 시절을 극화한 사극들이 장희빈의 영욕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숙종도 여자나 좋아하는 그렇고 그런 임금으로 그려졌다. 더구나 숙빈 최씨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드라마 <동이>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러브스토리를 기본골격으로 하고 장희빈이 오히려 조연에 가깝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극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동이>는 등장 인물 몇몇만 제외한다면 실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의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사극의 기본사항마저 외면한 채 퓨전식 멜로드라마로 전락하면서 남성 시청자는 물론이고 여성 시청자들마저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무수리’ 출신으로 전해지는 숙빈 최씨에 초점을 맞춘 것 자체는 대박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런 출신의 인물이 어떻게 대궐에 들어가고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정쟁의 한복판에서 권력투쟁에 승리해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했는지를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면 그보다 극적인 사건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려지는 드라마 <동이>에서의 숙종은 실상과도 너무나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엄숙하기까지 했던 숙종이 어떻게 미천한 신분의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현실감 있는 상상력으로 복원해 냈다면 극적 사실성뿐만 아니라 흥행에서도 훨씬 큰 성공을 거두지 않았겠는가라는 아쉬움이 든다. 즉 나긋나긋한 숙종은 실상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의 설정으로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같다. 실록이 전하는 숙종은 ‘희로폭발(喜怒暴發)’의 성품을 갖고 있었다. 호오(好惡)가 분명했다. 임금으로서의 위엄을 한번도 잃은 적이 없었다. 이런 성품의 임금이 어떻게 숙빈 최씨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며 드라마를 만들었더라면 <동이>의 재미와 실감은 훨씬 높아지지 않았을까? 이제 <동이>의 실제 무대였던 숙종의 시대로 들어가 보자.
 
 
  날 때부터 임금이었던 숙종
 
  현종2년(1661년) 8월 15일(이하 음력) 경덕궁(훗날의 경희궁) 회상전에서 우렁찬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자(元子)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명종의 원자로 났던 순회세자가 1563년 13살에 죽으면서 조선왕실의 적통(嫡統)은 끊어진다. 결국 조정에서는 중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 중종과 후궁 안씨 사이에서 난 덕흥군의 셋째 아들을 왕위에 옹립한다. 그가 선조다. 선조와 첫 번째 정비(正妃) 의인왕후 박씨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 대신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 임해군과 광해군, 인빈 김씨 사이에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의창군 등의 아들이 있었다. 나이로는 임해군이 가장 많았지만 성질이 난폭해 선조는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신성군도 일찍 사망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왕위는 광해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문제는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한 후 선조가 계비(繼妃)를 들인 데 있었다. 인목왕후 김씨와의 사이에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유일한 적자(嫡子)였다. 그러나 선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창대군은 3살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북인세력과 결탁한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은 광해군6년(1614년) 10살도 되지 않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것을 빌미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1623년 서인세력의 지원을 받아 거사를 일으킨다. 인조반정이다.
 
  인조에게는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는 원로 공신들과 인조의 결탁으로 의문사를 당했다. 왕위에 올라야 할 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왕위를 잇게 된다. 그가 효종이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다. 그가 현종(1641~1674)이다. 그러나 현종이 태어날 당시는 소현세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현종은 그저 대군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이었다.
 
  숙종은 달랐다. 숙종이 태어난 해는 아버지가 임금으로 있을 때였다. 원손(元孫)도 아닌 원자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조정 신하들이 “100년 동안에 없던 큰 경사”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원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왕위에 순탄하게 오른다는 보장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어쩌면 현종도 이 점을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조선에서 원자로 태어나서 왕위에 순탄하게 오른 경우가 거의 없다. 원자로 나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은 특이하게도 연산군이다. 그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다. 이어 인종이 있었으나 재위기간은 8개월 정도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정변이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의 경우도 양녕대군이 폐세자됨으로써 왕위에 올랐고 성종도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자신의 친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한명회 등에 의해 임금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다행히 숙종은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신하들에 의한 체계적인 제왕학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다소 병약한 체질이었지만 당당하고 명민했던 숙종은 학문연마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아버지 현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14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그 어떤 임금보다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 것도 날 때부터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강한 자의식과 과감한 결단력, 그리고 뛰어난 학재(學才)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즉위 초 송시열에게 손 내밀어
 
서인의 거두 송시열.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21일 아버지 현종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밖에 안되었고 자신은 아직 왕위에도 오르지 않은 14살 세자는 송시열을 원상(院相)으로 삼기로 했다.
 
  원상이란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주요 정무를 3정승과 공신들이 함께 처결하는 제도로 조선에서는 세조 말기에 처음 생겨 성종의 경우처럼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국왕이 친정(親政)을 펼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운용되던 제도였다. 이미 현종이 승하한 다음날인 8월 19일 영의정 허적,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 등 3상(相)이 원상을 맡기로 했는데 이틀후 원상인 허적 등이 송시열도 원상에 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세자가 기꺼이 승낙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 서울 도성밖에 머물고 있던 송시열은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범죄(犯罪)를 한 것이 지극히 중하여 한양 가까운 곳에서 대죄(待罪)한 지가 이미 한 달이 되었습니다. 선침(仙寢·현종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무죄(無罪)로 자처하면서 임금 계신 곳에 드나들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가운데 원상을 비롯한 신하들의 즉위 요청은 이어졌고 마침내 8월 22일 대비전의 강청(强請)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세자는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음날 즉위식을 마친 숙종(물론 이 존호는 사후에 붙여진 것이다)은 곧장 사람을 보내어 송시열을 당장 한양으로 들어오도록 명했으나 송시열은 수원으로 내려가 버렸다. 어린 숙종의 호의(好意)에 대한 두 번째 거부였다.
 
  숙종이 내민 세 번째 손길은 능지(陵誌), 즉 현종의 묘지문을 지어 올리라는 명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상소문을 올려 간곡하게 거절했다. 9월 17일 숙종은 정치화를 중추부 영사로 임명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중추부 판사라는 관직을 제수했다. 숙종의 네 번째 손길이었다.
 
 
  숙종과 이단하의 논쟁
 
  이런 가운데 9월 25일 경상도 진주 유생 곽세건이라는 사람이 올린 상소는 조정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았다. 1차 예송논쟁(기해논쟁) 때 효종이 서자라는 말을 주창한 것이 송시열인데 이에 동조한 김수흥은 유배를 갔거늘 송시열이 무사하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문제의 예송논쟁이다.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예송논쟁을 무기로 끊임없이 왕실을 무력화하려 했다. 임금이 죽거나 하면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 3년상은 불가하고 1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예송논쟁의 핵심이다. 임금에 대한 서인의 핵심적인 압박수단이 바로 1년상론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정에는 서인과 남인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말년의 아버지 현종의 노선을 따라 어린 임금은 이미 서인을 멀리하고 남인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남인은 전통적으로 친왕(親王)노선이었다.
 
  11월 1일 서인쪽의 대제학 이단하가 대행대왕(현종)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렸다.
 
  실은 숙종이 송시열의 핵심 제자인 이단하로 하여금 능지 못지않게 중요한 행장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은 대단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행위였다. ‘너는 과연 스승 송시열의 행적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보겠다는 숙종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과 이단하의 논쟁은 불과 몇 개월 전 현종과 영의정 김수흥의 논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단하가 지은 행장을 꼼꼼하게 읽어 본 숙종은 먼저 얼핏 보기에 ‘사소한’ 문제부터 시비를 걸었다. 현종이 복제를 바로잡은 후에 복제문제에 책임이 있는 대신과 예관을 처벌하였는데 이단하의 글은 ‘대신과 예관을 처벌한 후 국가의 전례(典禮)가 바로잡혔다’고 거꾸로 서술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단하는 곧바로 이 부분을 바로잡아 다시 행장을 올렸다.
 
  이에 대한 숙종의 반응은 더욱 싸늘했다. 명을 받아 고치라고 해서 고쳤는데 오히려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는 것 아닌가? 추고란 조선시대 때 벼슬아치의 죄과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단하의 불길한 예감은 이어지는 숙종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씩 분명해져 갔다. “선왕(현종)께서는 친히 예경(禮經)의 본의(本意)를 상고하셔서 한결같이 예경에 따라 복제를 바로잡으셨다. 그런데 지금 이 행장에서 ‘특별히’ 바로잡았다고 말한 것은 마치 선왕께서 예경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정한 것처럼 되었으니, 속히 고쳐서 다시 들이라.”
 
  제3라운드, 어렵사리 고쳐서 다시 들고 간 이단하의 행장에 대해 숙종은 이번에는 영의정 김수흥을 처벌한 이유를 두고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행장에 김수흥이 벌을 받게 된 이유를 ‘실대(失對)’라고 적어 놓았는데 잘못 대답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의논을 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현종이 영의정의 실수를 이유로 처벌을 할 만큼 옹졸한 인간이라는 말이냐”는 질책과 함께 김수흥을 포함한 누군가, 즉 송시열이 주도한 ‘다른 의논’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했던 현종의 본뜻을 왜 왜곡하고 있는가라는 정면 추궁이었다.
 
 
  숙종, 송시열을 겨냥하다
 
  그러나 행장에 ‘송시열’ 이름 석자를 자신의 손으로 쓰는 순간 이단하는 그 자리에서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이미 사림세계에서는 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생물학적 생명을 포기할 것인가, 사회적 생명을 포기할 것인가?
 
  일단 이단하는 애초에 행장 작성을 명 받을 때 자신이 김석주와 함께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대목은 도로 거두어 달라고 청했더니 전하께서도 그르다고 하지 않으셨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숙종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실대라고 한 것은 온당치 못하니 속히 다시 적어 올리라!”
 
  이렇게 해서 이단하가 드디어 ‘예경을 잘못 인용하였으므로 대사(大事)를 당하여 대신(大臣)의 직임을 잘못 행했다’는 뜻으로 고쳐서 올렸다. 그나마 이단하로서는 스승 ‘송시열’ 이름 석자를 행장에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으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단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는 일언가파(一言可破)의 숙종은 제4라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단하의 수정본을 읽은 숙종은 “(영의정 김수흥이) 선왕(先王)의 은혜를 망각하고 (송시열이 제기한)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말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실려 있는데 지금 이 행장에는 끝내 싣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뜻이냐?”고 따졌다. 마침내 이단하로서는 더 이상 피하려야 피할 데가 없었다.
 
  숙종은 ‘승정원 일기’를 근거로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말을 추가할 것을 명했고 이단하는 그것만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영의정 허적이 중재에 나섰다. ‘예경을 잘못 인용하였고 대사를 당하여 대신의 직임을 잘못 행하였다’는 정도의 말이면 ‘실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책임을 김수흥에게 물었으니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조정의 화합을 위해서도 좋겠다는 논리였다.
 
  허적의 오랜 설득 끝에 결국 이단하는 ‘不從禮經而從他人之議罪首相(예경을 따르지 아니하고 타인의 예론을 따랐다 하여 수상(영의정)을 죄주었다)’는 13자를 첨입하고 일단 ‘사지(死地)’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타인(他人)’이라는 대목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타인은 바로 송시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인’이라고 적은 것만으로도 이미 이단하는 스승에게 큰 죄를 지은 셈이었다. 이 일로 결국 이단하는 물론이고 영의정 김수흥, 송시열 등 서인을 이끌던 인물들은 대거 귀양길에 오른다. 서인의 몰락이었다. 남인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남인의 세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숙종6년(1680년) 4월 숙종은 하루아침에 집권세력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하는 환국(換局)을 단행한다. 20살의 군주가 전격적으로 단행한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다.
 
  서인과 달리 남인은 비교적 당파주의가 강하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권력은 나눠 가질 수 없는 것. 남인 사이에서도 서인을 대하는 태도 등과 관련해 온건파와 강경파가 분열하게 된다. 영의정 허적, 좌의정 권대운 등이 온건파로 탁남(濁南)이라 불렸고 우의정 허목, 이조판서 윤휴 등이 강경파로 청남(淸南)이라 불렸다.
 
 
  비극의 원인(遠因)
 
  이론적인 면에서는 청남이 분명했으나 경륜에서는 아무래도 허적을 중심으로 한 탁남이 조금 앞섰다. 숙종3년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윤휴는 일찌감치 탈락했고 결국 남인 내에서는 허적이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허적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숙종은 환국을 통해 남인을 무력화하고 서인을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결단을 내린다. 그것이 경신환국이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이 1남7녀 가운데 독자였고 숙종 또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의 1남3녀에서 독자였다. 1661년 8월 15일 태어난 숙종은 1667년(현종8년) 정월 세자위에 올랐고 열 살 때인 1671년 4월 김만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김만기의 딸인 인경왕후가 아들을 낳아 후계문제가 해결되고 인경왕후가 오래 살았다면 숙종대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다.
 
  숙종과 동갑이었던 인경왕후 김씨는 승문원 교리 등을 지낸 전형적인 서인 김만기(1633~1687)의 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당시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김만기의 증조 할아버지는 산림학자의 거두이자 조선 예학(禮學)의 창시자로 불리는 비운의 유학자 송익필의 수제자인 사계 김장생(1548~1631)이다. 김장생은 왜란과 호란으로 황폐해진 조선 재조(再造)의 가능성을 예학에서 찾았다.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1526~1582)의 아들인 김장생은 한때 세자의 교육을 맡는 등 관직을 갖기도 했지만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머물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 그 제자들이 서인의 주력을 형성하게 된다.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이는 아들인 김집(1574~1656)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최명길 정홍명 등으로 기호학파의 핵심인물들이었다.
 
  김집의 동생인 김반(1580~1640)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익희, 익겸, 익훈, 익경 등은 학문과 기개 면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김익겸은 삼전도 굴복 이후에도 강화도에서 항전을 계속하다가 남문에서 분신 자결했다. 김익겸에게는 아들 만기와 만중이 있었다. 김만중은 유복자였고 훗날 장희빈에 빠져 있는 숙종을 일깨울 목적으로 <사씨남정기>라는 문학작품을 남긴 바로 그 인물이다.
 
  만중의 형 만기에게는 진구, 진규 등의 아들이 있었고 딸이 인경왕후 김씨다. 그런데 인경왕후는 숙종이 즉위할 때 왕후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딸만 둘을 낳았고 모두 어릴 때 죽었다. 게다가 정국은 현종 말기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들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권세를 누릴 입장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1680년 4월 경신환국으로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고 6개월 후인 10월 인경왕후 김씨는 천연두에 걸려 발병 8일 만에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서인 내 노론의 중핵 민씨 집안
 
  1680년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서인 세상이었다. 장례가 끝나자 이듬해 자연스럽게 계비(繼妃)선정 문제가 떠올랐다. 계비도 서인 집안에서 골라야 했다. 국혼물실(國婚勿失), 왕비나 세자비는 서인집안에서 내겠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원칙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정권유지책의 하나로 세워 놓은 철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훗날 남인계통의 장희빈 등장에 대해 그토록 서인들이 공세를 가했던 것도 이런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혼사문제였기 때문에 숙종의 어머니, 즉 현종의 부인인 명성왕후 김씨의 발언권이 클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도 서인이었다.
 
  김우명은 같은 서인 계통인 민유중과 송준길의 딸 사이에서 난 민씨를 적극 추천했다. 민씨는 1667년 4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나 생모 송씨를 일찍 여의었고 계모 조씨 슬하에서 성장했다. 1681년 숙종과의 혼인 당시 아버지 민유중은 병조판서이자 노론의 중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송준길의 외손녀였던 인현왕후 민씨는 그래서 간택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민유중에게는 딸 인현왕후 이외에 송시열의 문인인 민진후와 훗날 좌의정을 지내게 되는 민진원 등의 아들이 있었다. 특히 민진원은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며 정치적 부침(浮沈)을 거듭하게 된다.
 
  17살에 숙종의 계비가 된 인현왕후 민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러나 불행(不幸)이었다. 이미 숙종의 마음은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내쫓은 궁녀 장옥정에게 가 있었고 더욱이 민씨는 후사(後嗣)를 생산하지 못했다. 딸도 낳지 못했다. 숙종의 총애 여부를 떠나 아들 하나만 낳았어도 숙종 때의 후사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정치투쟁은 없었을 텐데…. 물론 이것은 역사의 속성을 모르는 너무나도 순진한 판단이다.
 
  장희빈, 아니 장옥정은 1659년 8월 9일생이다. 숙종보다 두 살 위다. 아버지는 중인 신분의 장형(張炯)이고 어머니는 천인(賤人) 신분의 윤씨였다. 여기서부터 이미 뭔가 심상찮다. 아버지 장형에 대해서는 역관(譯官)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이렇다 하게 전하는 정보가 없고, 어머니 윤씨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가 전해져 온다.
 
  먼저 윤씨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훗날 자의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연인관계였다. 아마도 남편 장형이 일찍 죽고 이런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으로 있다가 남편이 죽자 조사석의 집을 드나들면서 내연의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여기서 우리는 윤씨의 미모가 출중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추출해 낼 수 있다. 조사석은 형조판서를 지낸 조계원의 일곱 아들 중 넷째로 숙종14년에 좌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천하절색 장옥정,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어머니를 닮아 미모가 출중했을 것이 분명한 장옥정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대략 10살을 전후해서 궁궐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1670년 전후가 된다. 궁녀가 되는 데 조사석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궁궐에 들어간 장옥정은 처음에는 자의대비 조씨의 시종으로 일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미 세자로 있던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반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는 지나치게 미색(美色)을 갖춘 장옥정을 극도로 싫어했다. 아들의 장래를 염려한 때문이었다.
 
  1680년 허적의 서자 허견으로 인해 일어난 역모사건과 그에 연루된 복선군 3형제 사건이 터지자 서인의 선봉장이었던 병조판서 김석주는 5월 7일 숙종에게 탄핵 상소를 올렸다. 역관으로 보기 드물게 종1품 숭록대부에 오른 거부(巨富) 장현과 아들 장천익, 동생 장찬을 유배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은 장현과 장천익은 이미 유배를 가 있었고 이때의 주요 내용은 장찬도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장찬과 복선군이 친밀했기 때문이었다. 장현과 장찬은 바로 장옥정의 아버지 장형과 사촌지간이었다.
 
  복선군 형제는 앞서 살펴본 대로 종친 중에서 남인 세력의 핵심인물들이었다. 반면 명성왕후 김씨는 서인세력이었다. 명성왕후는 장옥정도 남인의 영향권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성왕후는 직접 장옥정을 사저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3년 후인 1683년 12월 5일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숙종은 3년상이 끝난 1686년초 장옥정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이때도 조사석과 자의대비 조씨의 역할이 컸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숙종은 장옥정에게 파격적으로 숙원(淑媛)이라는 종4품의 첩지까지 하사했다.
 
  당시 세상은 경술환국으로 서인천하(西人天下)였다. 그런데도 숙종은 남인과 연결된 숙원 장씨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서인세력의 공포는 더욱 커 갔다. 서인쪽의 인현왕후 민씨가 있긴 했지만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688년 정월 숙원 장씨에게 태기(胎氣)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부터 그해 10월 28일 장씨가 출산을 할 때까지 서인세력들이 느꼈을 공포감을 추체험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그날 장씨는 보란 듯이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았다. 그리고 이듬해(1689년) 1월 숙종은 서인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숙원 장씨를 정1품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숙종은 나이 30을 눈앞에 둔 29세였다.
 
 
  기사환국
 
  숙종15년(1689년) 1월 숙종은 장옥정 사이에서 난 아들의 원자 책봉을 추진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원로 대우를 받고 있던 송시열이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서인들의 경우 상소는 유생들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직급을 높여 가며 올리는 게 관행이었다. 송시열이 직접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했다는 뜻이다. 이대로 둘 경우 장차 남인의 임금이 나올 판이었기 때문이다. 국혼(國婚)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다음 임금의 당파를 잡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송시열의 상소는 숙종의 분노만 부추겼다. 애당초 서인 중에서 온건파인 소론과 남인을 섞은 연합정권을 구상했던 숙종은 송시열의 상소를 계기로 다시 남인정권을 추진하게 된다. 그것이 2월 전격적으로 단행된 기사환국이다. 10년 전 환국 때 물러났던 권대운이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영의정에 올랐고 요직도 모두 남인이 차지한다.
 
  그 바람에 한순간에 인현왕후 민씨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로 전락한다. 인현왕후는 서인 민유중의 딸로 1681년(숙종7년) 숙종의 계비로 들어온 후 유감스럽게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게다가 민유중은 살아 있을 때 서인 중에서도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다. 더욱이 숙종은 권력의지에 관한 한 비정(非情)이었다. 서인세력에 대한 숙청이 거의 마무리돼 가던 4월 21일 대사헌 목창명을 비롯한 3사의 관리들이 송시열의 국문을 청하자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단지 송시열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궁위(宮?) 사이에도 변괴가 있으니, 대간들이 다 논한 다음에 말하겠다.”
 
  궁위란 인현왕후 민씨를 지칭하는 말이다. 즉 신하들이 송시열 문제를 제기하자 중궁의 문제도 함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송시열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개진이 모두 끝나자 숙종은 신하들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던진다.
 
  “말세(末世)로 올수록 인심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경들에게 발본색원(拔本塞源)할 뜻이 있으니, 나도 할 말이 있다. 궁위에게는 관저(關雎·주나라 문왕의 부인 태사의 덕스러움을 노래한 시가의 제목)의 덕풍(德風)은 없고 투기(妬忌)의 습관이 있어서 병인년(숙종12년) 희빈(禧嬪)이 처음 숙원이 될 때부터 나에게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현종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內殿)은 선묘(宣廟·선조)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액정(掖庭·후궁 자리)에 있게 되면 경신년에 실각한 사람들에게 붙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인(婦人)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 선후의 말을 가탁(假托)하여 엄청난 일을 꾸밀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투기가 통하지 않게 되자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말을 만들었는데 삼척동자인들 어찌 이 말을 믿겠는가? 간교한 정상이 폐부(肺腑)를 들여다보듯 환하다. 이런 사람은 고금(古今)에 다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
 
 
  인현왕후 민씨의 ‘퇴출’
 
서오릉에 있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明陵). 왼쪽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능이다.
  졸렬(拙劣) 치졸(稚拙) 용렬(庸劣) 그 자체였다. 성종이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윤씨를 폐비시키려 할 때처럼 유치했다. 숙종은 뭐든지 마음대로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성품이었다. 이후 그게 문제가 되면 그때가서 간단하게 자기 입장을 바꿔 버렸다. 숙종 때의 잦은 환국은 흔히 말하듯이 여자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같은 숙종의 성격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이틀 후인 4월 23일은 마침 인현왕후 민씨의 생일이었다. 원래는 신하들이 내전에 하례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숙종은 하례 금지를 명한다. 그리고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우의정 김덕원 등 3정승과 6조판서와 당상관들이 대거 빈청에 모여 하례 금지는 예법에 맞지 않는 조처라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숙종의 답이다.
 
  “내 나이 30에 비로소 원자를 두었으니 이것은 종묘사직의 무한한 복이다. 그런데 중궁은 원자가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매우 노여운 기색을 드러내며 도리에 어긋난 불평의 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주가(主家·친정 민씨집안)와 더욱 친밀히 지내는 그 정적(情迹)이 주도면밀하여 뒷날의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것이다. … 무함하는 정상(情狀)이 갈수록 더욱 드러나고 있으니, 실로 종묘 사직에 죄를 짓는 사람이다. 하루인들 이런 사람이 일국의 국모(國母)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
 
  다음날에도 신하들은 중전이 실덕(失德)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며 한사코 만류했으나 결국 숙종은 중전에 대한 폐서인(廢庶人)을 관철시킨다. 이후 반대하는 신하들은 즉시 파면을 했고 상소를 올린 유생들에 대해서는 숙종 자신이 친국을 해서 배후를 조사했다. 오죽했으면 돈녕부 판사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남인의 핵심인 조사석까지 글을 올려 중궁의 폐서인 조치는 잘못이라는 글을 올렸을까. 그러나 숙종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5월 2일 민씨는 폐서인돼 흰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송시열을 사사하라!”
 
  이 무렵 숙종은 송시열을 ‘큰 우두머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최소한의 경칭도 생략해 버린 것이다. 인현왕후 민씨의 폐서인 문제가 한풀 꺾여 가던 5월 30일 전 별검 이기주와 유생 이탁이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두 사람은 이 상소가 오히려 송시열의 명을 재촉하는 화근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당시 숙종은 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상소를 읽어 본 숙종의 반응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아! 송시열의 더할 수 없는 흉악함을 모두 다 언급할 수 없으나, 우선 그 가장 중대한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효묘(孝廟·효종)를 폄하하고 낮춰 속임이 선조(先朝·현종)에 미쳤고, 국본을 동요시켰으니, 진실로 이는 역사에 죄를 짓는 큰 잘못이다.
 
  이기주 등도 사람이니, 어찌 송시열의 죄가 쌓이고 악함이 차서 천토(天討)를 면하기가 어려움을 알지 못하리오? 그런데 이에 감히 국문하기를 명한 뒤에 잇따라 상소하여 지어낸 뜻이 교묘하고 참혹하며 그 말이 위험하니, 오늘날 국가에서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무엄(無嚴)할 수 있겠는가? 임금을 잊고 당(黨)을 위해 죽는 무리를 중한 율(律)로 다스려서 악함을 징계하는 법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두(疏頭·상소의 주동자) 이기주와 이탁을 아울러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라.”
 
  4월 21일 인현왕후 민씨의 문제가 처음 거론되던 날 송시열에게는 한양으로 올라와 국문을 받으라는 명이 내려가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의 상소가 아니었어도 이미 83세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도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상소는 분명 숙종을 자극했다.
 
  6월 2일 대신과 비변사 관리들을 불러 국사를 논의하던 중 의금부 판사 민암은 엉뚱한 제안을 한다.
 
  “송시열의 지극히 흉하고 악함은 국문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세움이 인후(仁厚)하여 일찍이 대신을 국문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남인의 모사꾼인 민암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굳이 국문을 하지 않고 죽여 버리자는 뜻이었다. 이에 숙종이 권대운에게 묻자 권대운도 “성상께서 참작해서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한다. 숙종의 결정으로 국문 없이 사사(賜死)시키자는 말이었다.
 
  사실 국문과정에서 서인들이 동요하고 결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남인들은 당시 숙종의 마음이 서인에 대해 극단적으로 적대적임을 알고 이 점을 활용하려 했다.
 
  이번에도 역시 숙종은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의금부도사가 내려가다가 만나는 그곳에서 사사시키라.”
 
  이때 송시열은 제주의 바다를 건너 한양을 향해 붙잡혀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최후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국문통지를 받자마자 그것이 사형 통보임을 예감한 송시열은 유서나 마찬가지인 상소를 썼다. 짧게나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송시열은 6월 7일 전라도 정읍에 도착했다. 수많은 제자들이 함께하는 길이었다. 다음날 아침 의금부 도사 권처경이 사약을 들고 정읍을 찾았다. 사약을 마시기 전 송시열은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위주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을 위주로 해야 한다.”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이란 명나라를 받들기 위한 북벌대의로 보는 것이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이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도 볼 수 있다. 굳이 현종이 아니라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이란 서인(西人)우대 정책을 말한다. 은근히 돌려 말했지만 현종 말기나 숙종시대처럼 국왕이 서인을 탄압해 올 경우 힘을 모아 잘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서인의 태두 송시열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서인의 나아갈 방향을 이렇게 강조했다.
 
 
  숙종, 무수리 출신의 궁녀 최씨를 사랑하다
 
최숙빈의 묘인 소령원(昭寧園).
  숙종15년 기사환국 직후 숙종과 장희빈 사이의 관계가 계속 좋았다는 사실은 이듬해 9월 6일경 두 번째 왕자를 생산한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왕자는 유감스럽게도 열흘 만에 죽었다. 왕자에 대한 갈증이 여전했던 숙종에게 이 일은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숙종19년(1693년) 10월 6일 소의(昭儀) 최씨가 왕자를 생산했다. 숙종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름은 오래 살라는 염원을 담아 영수(永壽)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 아이도 두 달 만인 12월 13일 조졸(早卒)했다. 다시 한번 아들에 대한 숙종의 갈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숙종이 이제 장희빈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소의 최씨가 숙종19년 10월에 왕자를 낳았다는 것은 적어도 숙종18년 후반경부터는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앞서 본 대로 소의 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시녀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숙종의 첫 번째 장인이자 서인 중진이었던 김만기와 연결돼 있던 숙종의 유모 봉모부인과도 가까웠다. 서인에게도 실낱 같은 회생의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숙종은 이 무렵 장희빈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날 때부터 궁중에서 자란 숙종으로서는 중인 집안 장희빈의 이런저런 행동에서 실망감을 쌓아 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크게 문제가 되는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격(格)의 문제일 뿐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야사에 전하듯이 어느날 밤 숙종이 궁궐을 거닐다가 한 궁녀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서 그 방에 들어갔더니 최씨가 폐서인된 민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원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 최씨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최씨는 당시로서는 중죄를 지은 셈이었다. 그러나 순간 숙종은 일개 궁녀만도 못한 자신의 ‘부도덕했던 처사’를 후회했을지 모른다. 만일 미모의 장희빈이 인간적인 품격까지 갖췄다면 물론 숙종은 이런 후회를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미 이 무렵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시들해져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났다. 욱일승천하던 포도대장 장희재는 숙종19년 4월 3일 ‘권력남용 혐의’로 포도대장에서 쫓겨난다. 권력남용을 사실상 방조했던 숙종이 그 점을 이유로 장희재를 내쳤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숙종의 마음은 눈에 띄게 장희빈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장희빈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남인세력에게도 위험이 찾아오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환국을 도모하는 서인세력
 
  이 무렵 서인세력의 재기를 위해 가장 부지런하게 움직인 인물은 김춘택(1670~1717)이었다. 20대 초반의 열혈 청년이었던 김춘택은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로 이미 뛰어난 문재(文才)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환국과 함께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 노론 핵심 집안의 후손으로서 앞길이 막힌 데 대한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정철 윤선도 김만중 등과 같이 문학적 자질이 뛰어난 인물들의 정치는 상당히 과격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김춘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따르면 김춘택은 김석주의 사람됨을 흠모했다고 한다. 김석주가 김만기와 가까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석주의 음모와 공작정치를 멋지게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춘택은 위험할 정도로 대담했다. 먼저 궁인의 동생을 첩으로 맞아들여 궁중의 정보 입수에 나선다. 이를 위해 은화 1000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장희재의 부인과 정을 통하며 남인들의 동태에 대한 깊은 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온몸을 던졌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작은 할아버지 김만중이 유배지 남해에서 쓴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해 은밀하게 궁녀들을 통해 숙종에게 전달토록 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을 무대로 했지만 <사씨남정기>에 나오는 사씨부인은 인현왕후, 유한림은 숙종, 요첩 교씨는 희빈 장씨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실록에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숙종의 마음을 바꿔 보려는 김춘택의 집요함이 두드러지는 일화다.
 
  김춘택은 심지어 왕실의 숙안공주와 숙명공주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두 공주는 효종의 딸로 숙종에게는 고모들이었다. 그중 특히 숙안공주는 남인에 대해 뿌리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숙안공주와 익평군 홍득기 사이에서 난 아들 홍치상이 기사환국 때 남인들에 의해 사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궁정동의 유래
 
청와대 경내에 있는 칠궁. 원래 최숙빈의 사당이었으나, 후일 왕비가 아니면서 왕이나 왕자를 낳은 후궁들의 신위를 모시는 칠궁이 됐다.
  김춘택을 비롯해 신진인사들이 중심이 된 서인세력의 움직임을 남인이라고 해서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남인은 적어도 실권을 갖고 있었다. 남인쪽의 사령탑은 우의정 민암이었다. 양측의 정보전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결국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서인 간의 싸움으로 귀결된다. 숙종20년(1689년) 전격적으로 단행된 갑술환국이 그것이다. 남인들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조정에는 서인의 노론과 소론만이 남게 된다. 숙종은 소론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간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宮井洞), 궁궐과 우물이 함께 이름에 포함돼 있는 궁정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와 깊이 연결돼 있다.
 
  원래 최씨는 궁정동 인근 효자동에 살던 최씨 집안의 처녀로 궁녀가 되었다. 그러나 최씨가 하던 일은 궁녀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직급에 속하는 수사(水賜), 즉 궁궐에 필요한 물을 길어 나르는 무수리였다. 바로 이 궁정동의 옛 자리에 궁궐에서 주로 사용하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바로 그 자리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이 사당은 지금 청와대 경내에 있다. 이를 육상묘(毓祥廟)라 불렀는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각별했던 아들 영조는 왕이 된 후 이를 궁으로 높였다. 그때부터 육상궁(毓祥宮) 혹은 육궁(毓宮)으로 불렸다. 임금의 정실부인이 아니면서 왕이나 왕자를 낳은 다섯 후궁의 신위를 이곳에 모시면서 육궁(六宮)으로 불리다가 1929년 숙빈 엄씨의 덕안궁과 합쳐 칠궁(七宮)이 됐다.
 
  야사(野史)에는 최씨가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사람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이 전라도 태인지방의 지방관을 할 때 우연히 길에서 눈에 띄어 궁궐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실록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은 없다.
 
  그러면 과연 숙빈 최씨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흔히 희빈 장씨가 악녀(惡女)로 묘사되는 데 반해서 숙빈 최씨는 자신이 모셨던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후에도 흠모하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된 인물로 묘사된다. 의녀(義女)라는 것이다. 게다가 무수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인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노론의 시각일 뿐 실록에 나오는 최씨는 노론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던 영리한 여성이었다.
 
 
  숙빈 최씨, 무수리에서 영조의 어머니로
 
숙종과 최숙빈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
  실록에 따르면 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어 갈 무렵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궁궐을 거닐다가 한 궁녀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방을 찾았다. 무수리인 그 궁녀는 자신이 모셨던 민씨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다. 숙종은 그 궁녀를 갸륵하게 여겨 가까이했고 여기서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첫아들 영수는 일찍 죽었다. 그리고 곧바로 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실록이나 그동안의 관행적인 묘사는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서인(西人)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숙종실록’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의 시각에서 서술되었다. 또 희빈 장씨의 득세로 권력을 되찾은 남인세력을 몰아내는데 두 차례에 걸쳐 숙종에게 결정적인 밀고(密告)를 한 장본인이 바로 숙빈 최씨다. 그는 한마디로 숙종의 왕후와 빈들의 후사(後嗣)를 둘러싼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의 아들 영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드라마의 기본을 생각한다
 
  이상은 주마간산 격으로 짚어 본 숙종 전반기의 주요 사건들이다. 이런 얼개만을 갖고서도 어지간한 작가라면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극적 드라마를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장희빈, 숙빈 최씨 등과의 러브스토리를 삽입해 가면서 국왕과 신하의 피말리는 권력게임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쟁시대를 드라마화하려고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우리는 당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서인 일당독재의 시대다. 오히려 국왕의 권력이 미미했다. 아마도 유일한 예외가 숙종이었을 것이다. 임금보다는 스승을 중시하는 서인, 국왕 자리는 그냥두더라도 왕위 자리는 반드시 장악하려는 서인, 판서 이상의 고위급 인사에 한사코 남인의 진출을 방해하려는 서인, 당과 스승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왕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비판을 가하는 서인….
 
  이런 서인들이었기에 대부분의 역사자료의 붓은 서인들이 쥐고 있었다. 아마도 장희빈이 희화화되고 악녀처럼 그려진 것도 이런 사필(史筆)의 주도권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인을 악의 세력으로 그리는 것도 역사를 단순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서인은 서인대로 그런 이념과 사상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또한 자연스럽게 보여주어야 한다.
 
  역사드라마는 드라마도 있어야 하지만 역사도 있어야 한다. 이때의 역사란 역사관도 포함한다. 드라마 <동이>는 이런 점에서도 새로움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여전히 장옥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장옥정이 아니고 숙빈 최씨를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없다.
 
  게다가 역사드라마의 묘미는 빈약한 사료를 바탕으로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있다. 그러나 드라마 <동이>는 풍부한 사료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고 빈약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풍부한 사료와 풍부한 이야기가 만나는 역사드라마의 진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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