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령의 첫 인터뷰 - 나와 부모님、내 언니를 말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빨면서, 두 분의 기막힌 인연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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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공무원 월급으로는 유학 못 보낸다」고 해서 포기했다』

『동생이 아들을 낳아서 우리 집안의 소원을 해결했다』

金演光 月刊朝鮮 편집장〈yeonkwang@chosun.com〉
권 주리애 자유기고가·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지난 8월29일 서울 광진구에 있는 어린이회관 3층 이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朴槿姈(박근령·51) 이사장이 문을 열어 주면서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朴이사장은 그녀의 상징처럼 된 색이 들어 있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다. 안경을 끼지 않은 얼굴을 보게 되다니 뜻밖이었다. 그녀는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사진에서 보던 것과 달리 부드러웠다. 소녀 같은 인상이다.
 
  사진기자가 카메라 가방을 열고 사진 찍을 준비를 하자 『사진 찍을 때는 안경을 쓸게요』라며 테가 큰 안경을 썼다.
 
  그녀는 안경을 벗었을 때와 많이 달라 보였다. 안경은 그녀를 좀 거센 분위기의 중년 여성으로 변화시켰다.
 
  ―왜 선글라스를 꼭 쓰시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갑상선에 걸렸어요. 그때 갑상선 항진증으로 눈이 좀 튀어나와 지금도 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시력이 많이 저하되었구요. 렌즈 위쪽의 색이 진하고 아래쪽의 색이 연한 선글라스를 쓰면 눈이 아주 편합니다』
 
  ―눈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한의원에서 권해 준 대로 약초를 끓인 물에 눈을 씻었더니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런데 근래엔 바빠서 그것조차 하기가 힘드네요』
 
  朴이사장은 최근 「性醜行(성추행) 사건」에 휘말렸다. 주로 중학생들이 참가했던 육영재단의 여름 「국토순례 대행진」의 인솔 책임자 黃모(43·고교 교사)씨가 참가 여학생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지난 8월28일 구속됐기 때문이다.
 
  <서울 동부경찰서는 8월28일 육영재단이 주최하는 국토순례단에 참가한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강제 추행)로 前 총대장 황모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황씨는 7월23일부터 13박14일 일정으로 열린 육영재단 국토순례 도중 여학생 6명을 강제로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황씨가 경찰 조사에서 성추행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강력 부인하고 있으나 정황상 다른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국토순례단 대학생 조대장 10여 명은 「국토순례 도중 황씨가 고의로 단원들의 엉덩이를 만지고 속옷 끈을 당겼다」는 글을 재단 홈페이지에 올렸으며, 도보순례가 끝나는 8월5일 대책회의에 나선 학부모들과 박근령 이사장 사이에 멱살잡이가 벌어지는 등 큰 소동을 빚기도 했다>(연합통신)
 
  오마이뉴스는 지난 8월5일 어린이회관을 찾은 학부모들과 朴이사장 사이에 벌어진 「큰 소동」을 이렇게 보도했다.
 
  <대책회의를 하던 학부모와 박근령 이사장 사이에 주먹질이 오가는 등 충돌이 벌어졌다. 국토순례단 총대장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학부모와 학생 등 50여 명은 8월5일 어린이회관 과학관 3층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러던 중 박근령 이사장이 오전 10시30분경 대책회의 장소에 갑자기 나타나 학부모들에게 『당신네들 딸이 임신이라도 한 것이냐』며 거칠게 항의했다.
 
  이 말을 들은 학생 어머니들이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가 마이크를 뺏고 『네가 사람이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응대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피해 학생 어머니와 朴이사장 사이에 주먹이 오갔다.
 
  박근령 이사장은 『어머니들이 언론에 먼저 이야기하는 바람에 황대장은 학교에서도 쫓겨나게 생겼다. 힘든 여학생들 가방을 고쳐 메주는 과정에서 몸이 닿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걸 성희롱이라고 하면 성희롱 아닌 게 무엇이냐』고 따졌다>
 
  오마이뉴스는 육영재단을 둘러싼 박근혜 - 박근령 자매의 갈등도 소개했다.
 
  <육영재단은 1969년 당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씨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1974년 육씨가 숨진 뒤 박근혜 現 한나라당 대표가 맡아 왔다.
 
  1982년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에 공식 취임했고, 1990년 11월 朴씨 측근인 최태민 당시 육영재단 고문이사의 비리 전횡을 둘러싸고 자매끼리 운영권 다툼을 벌여(1992년) 박근령(박서영)씨가 새 이사장에 올랐다>
 
  오마이뉴스는 기사와 함께 학부모들과의 실랑이 과정에서 쓰러지는 朴이사장의 사진, 몸싸움이 진정된 후 눈물을 흘리는 朴이사장의 사진을 함께 실었다.
 
  『딸들이 임신이라도 한 것이냐』는 朴이사장의 발언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朴이사장에 대한 네티즌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性추행 사건에 휘말려
 
  ―왜 그렇게 부적절한 발언을 했습니까.
 
  『우리 재단이 15년간 국토순례 대행진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랬으니 매번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을 것 아닙니까. 학생 100명의 인솔 책임을 맡았던 황선생님은 현직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을 맡겼구요.
 
  학부모님들이 시청각실에 모여 있다고 해서 사무국장이 나가겠다고 하는 걸 제가 갔습니다. 사실 제가 들어갈 자리도 아니었어요. 들어가자마자 욕설이 날아오고, 몸싸움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이 제 안경까지 벗겨 버렸어요』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성추행 의혹 때문에 찾아온 학부모들에게 「딸들이 임신이라도 한 것이냐」고 말한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정말 그 부분은 해명을 해야겠어요.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말이 굳어지면 어른이 돼서도 고치기 힘들다고 교정을 많이 해줬어요. 어머니는 「여자들은 배가 아프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하면 「걱정을 들었다고 하는 거다」라고 바로잡아 주셨어요. 어떤 신문에 내가 「당신네들 딸이 애라도 뱄느냐」고 말했다고 보도했는데, 너무 왜곡한 거예요』
 
  ―「임신이라도 한 것이냐」고 말한 건 사실인가요.
 
  『학부모들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고, 「사실 여부를 좀더 확인하자」고 얘기하려고 갔어요. 한 사람이 큰소리를 치고, 욕을 해서 「누가 성폭행이라도 당한 거냐, 누가 임신이라도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 입장을 듣고 얘기를 하자」고 했는데, 그것만 부각을 시켰어요. 학부모와 실랑이를 하고 몸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 얘기를 언론이 거두절미해 버린 거예요』
 
  ―그렇지만 문제를 일으킨 황모씨가 경찰에 구속됐지 않습니까.
 
  『제가 법은 잘 모르지만, 그분이 성추행한 혐의를 받은 거지, 성추행 사실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선생은) 현직 교사이고, 기독교인이고, 세 아이의 아버지인 사람이에요. 가족들이 와서 「우리 아버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고 하소연을 해요. 이 일로 (황선생이) 직장과 명예를 잃어버리면, 재판에서 무죄를 받더라도 누가 책임을 지나요.
 
  주변의 법조인들이 「현직 교사고,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는 사람을 무리하게 구속시켰다」고 해요. 제가 알려진 사람이고, 언니가 야당대표를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사건이 확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토순례는 극기훈련』
 
육영재단이 운영하는 유치원의 어린이들과 함께.
  ―학부모들은 「국토순례에 나선 초·중등생들이 샤워시설이 없는 잠자리에서 부실한 식사로 고생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어머니들이 요구하는 수준이라면 참가비를 100만원은 받아야 할걸요. 우리는 39만원을 받았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래프팅과 바나나 보트타기를 프로그램에 넣었어요. 그리고 국토순례는 청소년들을 위한 극기훈련이라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요즈음 아이들은 발에 물집이 생겼다고 앰뷸런스를 부른대요. 저도 몇 번 가봤지만 아이들이 첫 주에는 불평불만이 많고, 부모님께 항의하는 편지를 보낸대요. 하지만 끝날 때가 되면 다들 잘 왔다고 하고, 부모님 고마움도 알게 되고 그러죠』
 
  ―인터넷에 「황씨가 지난 4~5년간 같은 일로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해에도 비슷한 일로 500만원의 감봉조치를 받았다」, 「朴이사장과 황씨가 특별한 관계다」는 이야기가 떠돌던데.
 
  『그분은 우리 재단의 직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방학기간에 15일간 채용했을 뿐이에요. 그분은 재작년에 한 번 총대장을 맡으셨고, 이번에 다시 총대장을 맡으신 겁니다. 제가 혼자 산다고 별별 구구한 얘기가 다 있지만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습니다』
 
  ―육영재단 직원이 지금 120여 명쯤 되지요.
 
  『전에는 200여 명이었는데, 많이 줄었죠. 앞으로 좀더 구조조정할 계획입니다. 언니와 제가 맡아서 하니까 다들 관심이 많으셔서 그렇지, 육영재단의 한 해 사업 매출이 30억원을 조금 넘는 정도예요. 재단이 보유한 땅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구요. 대단한 이권이 있는 걸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언니나 저나 어머니가 세우신 공익재단을 이어 가겠다는 생각뿐이에요』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려 송사
 
  ―오늘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버지 朴正熙 前 대통령을 친일파로 선정 발표했는데, 어떤 느낌이 드세요.
 
  『친일파라고만 하면 고맙죠(웃음). 아버지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聞慶 소학교에서 근무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기간에 아버지가 일본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면서 팔로군과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주장하는 책이 올해 초에 나왔어요.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 쓴 책인데 몇몇 방송에서 이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어요. 친고죄가 돼서 할 수 없이 제가 출판사를 고소했어요. 그랬더니 「말」誌가 지난 6월호에 「朴正熙의 둘째 딸 박근령이 터무니없는 고소를 했다」고 공격하는 글을 실었어요. 재판에서 가려지겠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정치 일선에 나선 언니나 장남에게 맡기지 왜 직접 송사를 하셨습니까.
 
  『동생은 「그때 그 사람」이라는 영화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으니까, 제가 하나 맡은 거죠』
 
  ―영화 「그때 그 사람」 소송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법원이 영화 앞뒤에 있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하지 못하게 한 판결은 잘 아시죠. 일례로 영화에서 아버지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일본 말로 지시하는 게 나와요. 그런데 차지철 실장은 해방될 때 초등학교 저학년이어서 일본 말을 하지 못했답니다. 영화에 나오는 근거 없는 왜곡들을 법원이 바로잡아 줄 걸로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아버지의 과거를 집요하게 폄훼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버지는 1960~1970년대 당시의 한국인들과 함께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이뤄 내셨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다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대한민국의 틀을 세우셨던 同시대 사람들은 아버지를 결코 욕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버지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까.
 
  『군인 생활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실 때 등을 기대신 적이 없어요. 꼿꼿이 팔장을 끼고 앉아서 보셨어요. 그러시다가 오른쪽 왼쪽으로 몸을 천천히 흔드셨죠. 메모를 잘 하셨어요.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기르던 진돗개를 잔디밭으로 데리고 나가서 검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어요.
 
  저와 동생은 아침 잠이 많았어요. 추운 겨울날 아버지가 제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저한테 장난을 치곤 하셨어요. 아침 운동 후 식구들이 모여서 식사를 함께 했어요. 그렇게 하루 일과가 시작됐어요』
 
 
 
 검소했던 어머니
 
  ―어머니는요.
 
  『검소한 생활 모습이죠. 어느 날 불을 켜지 않은 복도를 어머니가 벽을 더듬어 오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청와대 시절 근검절약에 대해 귀가 아프도록 들었어요』
 
  ―朴이사장이 3남매 중에 공부를 제일 잘했죠.
 
  『공부는 언니가 제일 잘했죠. 서강大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니까요. 그때는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여성이 거의 없었어요. 졸업 때 수석을 해서 온 집안의 경사였죠. 어린 마음에도 그런 언니가 자랑스러웠어요』
 
  ―경기女中·女高, 서울大를 보결로 들어가신 것은 아니죠.
 
  『보결은 아니죠(웃음). 정상적으로 시험봐서 들어갔어요. 간신히 꼴찌로 붙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공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피아노 치고, 음악 듣는 걸 좋아했죠』
 
  ―고등학교 때 과외는 안 했습니까.
 
  『언니한테 과외를 할 뻔했죠. 서울大 들어가서 1~2학년 때 교양과정으로 화학과 물리 수업을 들었는데 벼락치기 공부할 때 언니의 도움을 받았죠』
 
「신당동 집」을 안내하고 있는 박근령씨. 거실의 부모님 사진 앞에서.
 
 
 『우리는 공주가 아니었어요』
 
  ―요즈음 「공주병」이라는 말이 유행인데, 朴의원이나 朴이사장은 공주처럼 산 게 아니라 사실상의 공주였죠.
 
  『우리는 공주 아니었어요(웃음). 나라가 전체적으로 다 가난했고, 청와대의 우리 집 살림살이나 중산층 살림살이나 비슷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식탁에 앉으시면 「수출 몇억 달러 달성이 어렵겠다」 그런 얘기부터 하셨어요. 「국산품이 질이 나빠 속이 상한다」는 얘기도 하시고.
 
  한번은 아버지가 언니의 성심女高 교모를 살짝 벗기셨어요. 이음새가 없는 동그란 모자예요. 아버지가 「이거 국산이지」하고 물으셨는데, 언니가 「국산이 아니에요」 했어요. 아버지가 「이런 것도 못 만드냐」고 실망하시던 기억이 나요. 제가 미도파 백화점에서 국산 모자를 사다 드리면 좋아하셨어요. 무슨 물건이든 국산인지, 뒷마무리가 꼼꼼하게 됐는지 살펴보셨어요』
 
  ―어린 시절 청와대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뭡니까.
 
  『어머니가 청와대 뒷마당에 텃밭을 만드셨어요. 상추·케일 같은 채소를 길러서 아침마다 즙을 내서 아버지께 드렸어요. 저녁식사 손님이 없는 날이면 저희를 데리고 텃밭에 가서 채소가 잘 자라는지 보여 주셨어요. 농사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직원이 도와주었는데, 어머니가 「닭똥이 좋으냐」 이것저것 물어보셨어요. 여름 휴가 때 온 가족이 진해 저도 휴양지에서 지냈던 시간이 제일 기억에 남죠』
 
  ―1970년대 혼식을 장려하려고 학교에서 점심 때마다 「도시락 검사」를 했지 않습니까. 청와대에서도 혼식을 했습니까.
 
  『청와대에서 항상 보리밥을 먹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잡곡밥을 먹습니다. 어릴 때 흰 쌀밥 도시락을 싸 오는 친구가 무척 부러웠어요』
 
  朴이사장은 열 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스물다섯 성년으로 나왔다. 경기女中·女高를 나온 그녀는 1973년 서울大 음악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 서울大는 反유신 시위의 격랑에 휩싸여 있었고, 1974년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면서 「긴급조치 시대」를 맞았다. 朴대통령은 1975년 유신체제와 자신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도 했다.
 
  서울大 캠퍼스는 1975년 서울 도심에서 관악산 자락으로 옮겼고, 朴이사장은 2년간 관악 캠퍼스에서 생활했다. 朴正熙 대통령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함성 속에서 대학생활을 보낸 셈이다.
 
 
 
 維新반대 데모 속에서 대학생활
 
  ―아버지께 서울大 학생들이 데모하는 이야기를 전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일일이 내색은 안 하셨어요. 「학생들이 잘 몰라서 그런다」고 말씀을 하셨죠. 제가 당시 유행하던 송창식·윤형주·「현이와 덕이」 노래를 녹음해서 아버지께 들려드렸어요. 젊은 사람들을 좀 이해하라고.
 
  지방에 내려갈 때 추풍령이 가까워지면 아버지가 노래를 끄라고 하세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여기가 제일 난공사지역이었다. 많은 인명이 희생됐으니까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묵념이라도 하고 가자」고 하셨어요.
 
  차를 타고 가면서 아버지가 「북쪽에서부터 다리 이름을 대봐라」, 「터널 이름을 대봐라」고 하셨어요. 그때 우리가 그걸 다 외웠어요. 아버지는 다리 하나, 공장 하나를 건설할 때마다 보람을 느끼셨어요』
 
  ―대학생활은 어땠습니까.
 
  『데모가 많았다는 기억이 나요. 서울大 음대는 을지로 쪽에 있었는데 관악 캠퍼스로 옮겨 가서 2년을 다녔어요. 그때 「데모 못 하게 하려고 관악산으로 캠퍼스를 옮겼다」는 얘기가 있었잖아요. 요즈음 가보면 서울大 분들이 「학교 땅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에요. 아버지가 그때 관악산으로 옮겼으니까 다행이지 서울 도심에 서울大가 있었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휴교령이 내리면 무얼 했습니까.
 
  『아버지께서 科(과) 친구들하고 산업시설을 견학하도록 하셨어요. 포항제철·여수화학단지·동양정밀·창원공업단지·반월공단을 다녀왔어요. 처음에는 재미가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서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보니 자랑스럽더라구요. 컬러 텔레비전을 만들어서 전량 수출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우리 국민들은 전부 흑백 방송을 보고 있을 때죠. 당시 이스라엘도 좋은 과일은 다 수출하고, 국내에선 나쁜 과일을 먹었다고 해요. 견학을 갔다 오면 아버지께서 꼭 소감문을 쓰라고 하셔서 고생을 했죠』
 
  ―따라다니는 남학생은 없었습니까.
 
  『미인이 아니라서(웃음). 피아노를 전공하는 한 남학생이 「손가락도 보호해야 하고, 앞으로 외국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군대를 면제해 줄 수 없느냐」고 제게 부탁을 했어요. 아버지께 얘기를 드렸더니,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서 세계적인 음악가가 나온다. 거기서는 남녀가 다 병역의무를 한다. 손이 망가질까 걱정된다면 군악대에 가면 될 것 아니냐. 지나친 부탁이다」며 안 들어주세요. 「근영이한테 부탁해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알려져 우울한 대학생활을 보냈죠』
 
  ―서울大에 다니면서 인권과 경제성장이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 대해 고민도 했을 텐데, 아버지가 간 길을 이해하는 편입니까.
 
  『우리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장 고도로 성장한 나라잖아요.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악역을 하신 거죠. 호전적인 敵과 대치한 상황에서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자유를 유보하신 거죠. 아버지의 뜻을 지금 국민들이 다 이해하고 있지 않나요』
 
  ―대학 졸업 후 무얼 할 생각이었습니까.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면 했죠. 작곡을 하고 싶었어요. (1974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공부를 계속할 처지는 아니었지요. 동생으로서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해서 언니를 도와주게 됐죠』
 
  ―유학 가는 꿈은 왜 접었나요.
 
  『아버지가 「대통령은 공무원이다. 비싼 외화를 쓰면서 외국에 보낼 수 없다」고 하셨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걸스카우트를 했는데 필리핀에서 잼버리 행사가 있었어요. 다른 고관 집 친구들은 다 갔는데 저는 못 갔어요. 「외국에 가는 비용을 못 대준다」고 하셔서. 친구들이 외국에서 보낸 엽서를 받고, 많이 부러워했죠. 아버지·어머니가 청와대 종이 한 장도 함부로 못 쓰게 했어요』
 
  ―왜 종이를 못 쓰게 했나요.
 
  『가만히 놔두면 하얀 종이인데 빛에 비춰지면 봉황 문양이 나타나는 종이가 있었어요. 집에는 안 갖다 두시니까, 비서실장 방에 가야 있어요. 그걸 몇 장 가져다 쓰려고 호시탐탐 노렸죠. 「물 아껴라」, 「전기 아껴라」, 「물자 아껴라」는 얘기를 늘 들으면서 살았어요』
 
  ―언니인 朴의원은 어떻게 프랑스 유학을 갔습니까.
 
  『언니는 서강大 전자공학과를 1등으로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아서 유학을 갔어요. 파리로 안 가고 거기서 좀 떨어진 그레노블로 갔어요』
 
 
 
 언니를 도우려 음악공부를 접다
 
  ―대학을 졸업하고 왜 음악공부를 접었나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생활이 확 달라졌어요. 제 개인적으로 「공부를 더 하겠다」, 「내 일을 하겠다」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동생이 제일 안됐죠. 제가 「율곡 이이 선생님도 열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大학자가 됐다. 더 꿋꿋해지라」고 위로를 많이 했죠. 사춘기에 어머니를 잃어 지만이가 집안의 제일 큰 걱정이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6년 가까이 청와대에 더 있었는데, 어떤 일을 했습니까.
 
  『언니가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저도 덩달아 바빠졌어요. 언니가 입을 한복이나 옷을 미리 챙겨 놓고, 언니가 읽고 싶어하는 책들을 서점에서 사다 주었어요. 언니가 좋아하는 걸 보면 신이 나더라구요. 열심히 도와줬죠. 언니 방도 열심히 청소해 주고요. 언니 방에 가면 서예 습자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한쪽에는 행사에 입어야 할 옷, 다른 쪽에는 보던 책들이 마구 쌓여 있었죠. 그리고 영어학원에 다니고, 운전도 배우고…』
 
  ―언니를 굉장히 끔찍하게 생각하셨네요. 항간에는 두 분 사이가 껄끄러운 걸로 알려져 있는데.
 
  『여느 형제랑 같죠. 육영재단 일 때문에 한 번 다투기는 했죠. 다들 그것만 기억하더라구요』
 
 
 
 『근영아, 콩나물 대가리 좀 그려 봐라』
 
陸英修 여사가 만든 신당동 집 작은 화단에서.
  ―朴正熙 대통령이 「새마을 노래」를 작사·작곡했다는 건 믿겠는데, 「나의 조국」을 작사·작곡했다는 건 믿기지 않습니다. 「나의 조국」은 상당히 어려운 노래 아닌가요.
 
  『둘 다 아버지께서 직접 작사·작곡하셨어요. 아버지께서 교사를 하셨잖아요. 풍금·트럼펫·퉁소 같은 악기를 잘 다루시고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어요. 아버지는 생각날 때마다 녹음기에 음율을 녹음하셨어요. 학교에 갔다오니까 노래를 들려주시면서 「근영아, 콩나물 대가리 좀 그려 봐라」고 하세요. 그래서 제가 악보를 그렸죠.
 
  「나의 조국」은 단조음을 띠고 있어서 비장감이 있죠. 아버지는 「對南방송에서 나오는 북한 군가들은 씩씩한데 우리 군가는 영 힘이 없다」고 하셨어요. 저는 「나의 조국」을 좋아해서, 노래 부르라고 하면 꼭 이 노래를 불러요』
 
  ―朴이사장은 외부에 자신의 얼굴을 알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 걸로 압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요.
 
  『대학 다닐 때는 언론에 노출될 일이 없었어요. 가끔 청와대에서 가족들이 윷놀이하는 모습을 찍어서 공개했죠. 언니가 퍼스트레이디 하면서부터 「언니가 활동하는 거지, 내가 밖으로 부각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朴의원을 여러 차례 인터뷰했습니다. 「젊은 시절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여고시절 남쪽지역에 비가 안 오면 비 오기를 기도하는 憂國(우국) 소녀였다』고 하더군요. 朴이사장도 그랬습니까.
 
  『저는 나라 걱정을 많이 안 했어요(웃음). 언니가 남달랐죠. 언니는 아버지하고 나라 걱정하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지금와서 「왜 나는 아버지하고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하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언니가 「휴전선에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우리 집안은 어떻게 되나」, 「지만이는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만 했죠. 제가 청와대에 열 살 때 들어가서 스물다섯 살에 나왔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나이가 어려서 정신 없이 울기만 했죠. 그래도 그때는 아버지가 계셨잖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 슬픔이 가시기 전에 보따리를 싸서 신당동 집으로 나왔어요』
 
 
 
 『두 분은 좋은 친구 사이였다』
 
신당동 집 거실의 피아노에 앉아 「나의 조국」을 연주하는 박근령씨.
  ―朴이사장이 국군통합병원에 가서 朴대통령의 피 묻은 옷을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해 줄 일도 아니고, 제가 그때는 어린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언니가 피 묻은 옷을 빨라고 해서 제가 빨았고, 말려서 나중에 태웠어요. 참, 어머니의 피 묻은 옷도 제가 빨았어요.
 
  「어떻게 두 분이 똑같이 총탄에 돌아가시고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리셨을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특별한 인연이었구나」,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셨는데 돌아가신 방법까지 똑같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에 아버지가 「민족의 제단에 내 목숨을 내놓았다」고 하셨어요. 그냥 하신 말씀은 아닌 거 같아요』
 
  ―항간에는 朴대통령의 여자 문제로 陸英修 여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두 분은 부부라기보다 서로의 장점을 높이 사주는 좋은 친구 사이였어요. 어느 날 아버지가 저희들을 불러 놓고 「너희 어머니는 재산을 불리는 일이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점은 너희도 배워라」고 하셨어요』
 
  ―언니 朴槿惠 의원이 또 청와대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언니는 「대통령이 되겠다, 안 되겠다」를 초월해서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이에요. 저한테도 여러 번 그런 얘기를 했어요.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이고 욕을 먹으면서 이룩한 일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죠』
 
  ―朴의원이 유력한 大選 후보로 지목되기 때문에 경쟁 정당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과거를 더 폄훼하고, 朴이사장의 사건도 더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닐까요. 언니가 괜히 정치를 해서 일이 복잡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동생이 아니죠. 언니가 정치를 잘 하니까 야당의 대표가 되고, 국민들이 「여성 대통령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3남매가 자주 만나나요.
 
  『다른 집과 같아요. 대소사에 모이죠. 우리 집안 이야기는 온 국민이 다 알게 되니까, 조용히 만나지요. 올케인 徐변호사의 성격이 명랑하고 밝아요. 우리 집안 분위기는 좀 조용하고 어두운데 올케가 들어오고 나서 많이 환해졌어요』
 
 
 
 동생이 집안 숙원사업 해결
 
  ―9월15일경 지만씨가 아들을 본다는데.
 
  『집안의 숙원사업이 해결된 거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지난 9월6일, 朴이사장의 안내로 朴正熙 대통령 一家가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서울 신당동 자택을 구경했다. 아담한 1층 양옥으로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
 
  『이 화단은 어머니께서 어린이날에 저희들에게 만들어 주신 겁니다. 채송화·맨드라미·봉숭아 등을 심었지요』
 
  신당동 집은 방 4개, 부엌과 거실로 이뤄져 있었다. 원래 있던 집에 자꾸 공간을 이어 덧대서 전체적인 조화는 없었다.
 
  ―신당동 집에서는 언제까지 사셨나요.
 
  『신당동 집은 아버지·어머니가 처음 장만한 집입니다. 여기서 지만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군사혁명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구요. 신당동에서 살다가 5·16 이후 우리 가족은 장충공원 옆에 있는 국회의장 공관으로 이사를 갔어요. 한적하게 따로 떨어져 있어서 다니기가 힘들었어요. 1963년 12월 대통령 취임식을 하고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거실에 작은 사진들이 가득 진열돼 있었다. 朴대통령의 젊었을 적 사진, 지만씨의 어릴 때 모습, 朴槿惠 대표가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 朴이사장 사진, 가족사진 등이 있었다.
 
  그중 지만씨의 청년시절 사진을 가리키며, 朴이사장이 말했다.
 
  『서향희 변호사가 이 사진을 보더니 「이 때 만났을 걸 그랬다. 너무 멋있다」고 그러데요(웃음)』
 
 
 
 『일부종사하고 싶었는데…』
 
  예전에 부엌이었던 곳이 거실로 꾸며져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일행이 향을 피웠다. 거실 한쪽 구석에 피아노가 보였다.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자, 朴이사장은 저번에 얘기했던 대로 「나의 조국」을 치면서 노래를 했다.
 
  거실 벽에는 朴正熙 소장이 5·16 쿠데타 이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사후 승인을 요청하는 자필 편지가 보였다. 朴이사장은 아버지에게 들은 5·16 당일 밤의 이야기를 전해 줬다.
 
  『트럭을 뒤로 후진시켜 놓고 한강 다리 초소 군인들의 동향을 살폈다고 합니다. 실패하면 도망하기 좋게 하려구요. 선발대가 실패하자 아버지가 직접 앞장 서서 진두지휘해 한강 다리를 건넜다고 해요. 남동생이 1958년생이니까 두 살 때 혁명을 일으킨 거죠.
 
  선발대가 한강 다리를 건너는 데 실패했다는 전화를 받고 아버지는 지만이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해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 목숨을 걸고 한강을 건너셨구나」 생각을 했죠』
 
  ―혼자 사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1982년에 「풍산금속」家의 사람과 결혼했었지요. 그 당시 저와 언니, 남동생이 청와대에서 나와서 여러 가지로 자리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어요.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이 미국지사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 열 일을 제쳐 놓고 따라가야 했었는데… 그때 제가 몸이 안 좋았어요. 一夫從事(일부종사)하고 싶었죠. 남편을 따라간다고 해놓고 금방 가지 못한 게 이렇게 되었어요』
 
  ―시댁과는 연락을 하십니까.
 
  『시아버지께서는 타계하셨고, 시어머니와는 가끔 전화를 합니다』
 
  ―재혼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재혼할 생각은 없어요. 아이들이 예뻐서 딸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죠. 결혼하지 않고 사는 모든 여자 분들의 소망이 그럴 것 같은데요. 조카가 곧 태어나니까 위안으로 삼아야지요.
 
  ―박지만씨는 건강이 어떻습니까.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결혼하니까 아무래도 생활이 규칙적이 되죠. 담배를 끊었다니 참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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