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세대의 증언 (7) - 새나라자동차·워커힐 호텔·합판산업 일으킨 艾壽根의 1960년대

『나는 당신들이 싫어하는 군사독재下에서, 밀림의 원목을 자르고 전쟁터를 누비며 달러를 벌었다』

  • : 이근미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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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대통령이 워커힐 호텔에 놀러가기 편하라고 삼일고가도로를 닦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외국 관광객 유치하려고 길을 닦았다』
●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원목을 채취, 세계 최고 합판생산국의 길을 열었다.
●『베트남에서 한국경제가 일어섰다』 그곳에서 만난 鄭世永·鄭仁永·趙重勳 이야기


艾 壽 根
1926년 경기도 용인 출생. 연세大 경영학과·샌프란시스코大 경제학과 졸업. 6·25 참전용사. 美 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중앙정보부 경제개발팀 기획관리과장, 美 산호세 텔레비디오 사장, 美 코암투자회사 사장, 日 마르베니 종합상사 고문, 홍콩 코암투자회사 대표이사, 아시아 태평양연구소 고문, 한국선물주식회사 회장, 한국선물협의회 회장 역임. KBS 「경제전망대」에서 5년간 국제금융해설.
여의도 63빌딩 59층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경이롭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층빌딩과 낙엽지는 숲이 잘 어우러져 몹시 풍요로워 보인다. 艾壽根(애수근·78)씨는 『5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며 『여의도의 오늘에는 나의 땀방울도 보태졌다』며 감회에 젖었다.
 
  艾壽根씨는 『개발연대에 많은 일들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진행됐다』고 했다.
 
  무역회사 부장이었던 艾壽根씨는 1958년 무렵부터 영관장교였던 石正善(석정선)씨와 친분을 맺어 왔다. 艾씨는 1961년 7월, 중앙정보부에 몸담은 石正善씨의 요청으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경제개발팀 기획관리과장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새나라자동차 설립, 워커힐 건설 등의 일에 참여했다.
 
  해외에서는 인도네시아 원목 채취에 이어, 베트남 해외개발공사 동남아지국장을 맡아 국내 기술요원 송출 사업에 나섰다. 196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금융업에 종사했고, 그후 캘리포니아州의 실리콘밸리에 있는 텔레비디오 회사 사장을 지냈다.
 
  1989년에 귀국해 한국선물거래주식회사와 선물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건강이 나빠져 1996년에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2003년 3월에 영구 귀국했다.
 
  그는 개발연대의 문을 열었다는 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피터 드러커가 「산업혁명 후 가장 짧은 기간에 발전한 건 한국」이라고 했어요. 한국이 朴正熙 대통령 집권 18년 만에 근대화를 달성했는데, 그 18년은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다른 나라는 지식기반이 나름대로 있었지만, 日帝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은 지식 기반이 빈약했어요. 18년 동안 한편으로는 교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발전했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시작한 겁니다』
 
 
 
 GNP 80달러에서 시작한 자동차 산업
 
   민간인이었던 艾壽根씨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발탁한 石正善씨는 李承晩 정부 때 整軍(정군)운동으로 전역했다가, 5·16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일했다. 艾씨와 비슷한 시기인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했다. 1년에 한두 번 고국을 찾는데 그때마다 艾壽根씨와 만나 회포를 푼다고 한다.
 
  金鍾泌씨와 石正善씨는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石正善씨는 5·16에 참여하지 않았다. 거사에 성공하자 金鍾泌씨가 바로 石正善씨를 영입했다.
 
  5·16 이후 朴正熙 대통령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자동차 사업이었다고 한다.
 
  자동차 산업의 파급효과를 알고, 미국·일본·독일의 자동차 회사를 찾아가 기술 이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韓日회담을 할 때 우리 정부가 일본에 기술이전을 부탁하자, 일본에서 「내수용을 만들 거냐, 수출용을 만들 거냐」, 「버스를 만들 거냐, 승용차를 만들 거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우리 협상대표단이 「지프차나 스리 쿼터 같은 걸 만들어서 군대에서 쓰려고 한다」고 했어요. 괜히 승용차를 만들어서 해외에 판다고 하면 기술이전을 안 해 줄 것 같아서였죠. 일본이 기술을 이전해 줬어요. GNP 80달러밖에 안 되는 나라니 가르쳐 줘도 별 상관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국내에 참여하려는 기업이 없었다. 在日교포 박노정씨가 초창기에 참여했으나 자금부족으로 도중하차했다. 정부가 직접 한일은행의 자금을 빌려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지었다.
 
  육군 병기감 출신 소병기 장군이 사장, 在日교포 안석규씨가 전무로 취임하고 艾壽根씨는 정부에서 파견 나가 기획과 구매책임을 맡았다.
 
 
 
 「시발 자동차」 망한다고 자동차 산업 반대
 
  『국내에서도 안 될 거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이라는 자동차가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면 시발차가 망하게 된다고 반발이 많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얘기죠』
 
  당시 우리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였다.
 
  군사혁명정부는 1961년 8월15일까지 자동차를 만들어 내기로 결정했다.
 
  『金鍾泌씨가 상공부 관계자를 불러서 자동차를 만들라고 하면 「예, 예」 하고 대답하고 돌아가서는 아무 소식이 없어요. 신문에서는 「돈이 어디서 나와서 자동차를 만드느냐」고 야단이었어요. 어쨌든 8월15일에 자동차가 나왔어요. 일본에서 부속을 수입해서 조립만 한 거죠.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일제 부속품을 조립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라는 이름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은 가구 하나 변변히 생산하지 못할 때였다. 艾씨는 『5·16 전에 우리나라가 가진 기술은 리어카 만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택시와 버스를 만드는 정도였다』고 했다. 새나라자동차에 들어간 국산품 가운데 품질기준을 통과한 것은 한국타이어가 유일했다고 한다.
 
  급하게 만든 만큼 「새나라자동차」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국산 시트의 스프링이 전부 끊어져서, 손님들의 엉덩이를 찌른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산 자동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艾씨는 『국산 자동차를 생산했기 때문에 朴正熙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결심을 했다』며 『중화학공업도 자동차 산업이 출발했기 때문에 꿈꾸게 된 것』이라고 했다.
 
  새나라자동차는 3년 후 신진자동차 김창환 사장에게 넘어갔고, 정부는 한일은행의 빚을 다 갚았다. 신진자동차가 나중에 대우자동차가 되었고, 현재의 GM대우로 이어지고 있다.
 
 
 
 달러 벌기 위해 워커힐 호텔 건축
 
   자동차 산업과 함께 혁명정부가 초기에 벌인 사업이 워커힐 호텔 건축이다.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美 8軍 부사령관 멜로이 장군이었다.
 
  멜로이 장군은 1961년 10월 혁명정부의 실력자 金鍾泌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혁명정부가 성공하려면 경제를 안정시키고, 산업을 근대화해야 한다. 빨리 韓日국교정상화를 추진하고, 경제개발에 주력하라. 駐韓美軍이 7만5000명인데 이 사람들이 전부 휴가를 일본으로 간다. 美軍들을 비행기로 일본까지 보내줘야 하니 돈이 많이 든다. 한국에 좋은 휴양시설만 있으면 미군 장병들의 절반은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거다. 호텔을 열면 1년이면 1억 달러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의 수출품은 인삼·오징어·김·生豚(생돈), 텅스텐이었고, 수출액은 1000만 달러가 안 될 때였다.
 
  얼마 후 朴대통령이 金鍾泌씨 등과 워커힐 꼭대기에 있는 李承晩 대통령의 여름별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朴대통령이 『여기 경치가 좋은데 뭘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金鍾泌씨는 『국제 수준의 호텔을 지어서 처음 2∼3년은 美軍을 유치해 외화를 벌고, 그 다음에 국제관광대회 열어 달러를 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곧바로 워커힐 호텔을 짓기로 결정했다.
 
  우선 뛰어난 건축가들을 수소문해서 모았다. 후일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金重業씨,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엄동문씨,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을 설계한 金壽根씨, 서울大 김희춘 교수, 건축설계가 나상진·이희태씨, 홍익大 강명구 교수가 그들이다.
 
  대부분 일본·미국·독일 등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지만, 그때까지 한국에서 5층 이상 건물의 설계를 해볼 기회가 없었다. 艾壽根씨는 이들을 인솔하고 해외의 유명 리조트들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워커힐 호텔은 모두 30棟(동)으로 구성됐는데 국내 건설회사 30군데에 한 棟씩 건축을 맡겼다.
 
  『「한국에서 처음 짓는 국제적 대형 호텔이니 엉터리로 짓지 말라, 잘 지으면 제2, 제3의 호텔을 지을 때 특별히 배려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건설회사 사장들이 직접 나와서 감독을 했어요. 현대 鄭周永 회장, 삼환 崔鍾煥 회장을 비롯해 여러 회사 대표들이 매일 나왔습니다. 건설회사에서도 이윤을 안 남기고 실비로 지었어요. 그때 타일과 대형 유리 등 모든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해 왔어요』
 
 
 
 워커힐 개관 행사에 루이 암스트롱 초청
 
  10개월 만에 호텔 공사를 끝냈으니 대단한 「속도」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가고, 사흘에 한 번씩 공중목욕탕에 가서 씻으면서 견뎠죠. 겨울에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데도 집에 안 가고 현장에서 천막을 치고 잤습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신이 나서 했어요. 私心 없이 그냥 모두들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공사현장에서 실무를 본 사람들이 모두 군인들이었어요. 공군·육군·특전대·공병장교 등이 와서 일했죠. 심지어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던 군인들이 나와서 낮에 도로를 닦았어요』
 
  艾씨는 당시 누군가에게서 『루이 암스트롱을 초청하면 기자가 자동적으로 수백 명이나 따라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한미군과 美 대사관 쪽에 루이 암스트롱 訪韓을 집요하게 요청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자가용 비행기에 기자들을 몰고 와서 세계에 워커힐 호텔을 알려줬다. 최초로 「라스베이거스 미인 쇼」를 초청했다.
 
  워커힐 호텔을 완공한 뒤 외국인만 싣고 다니는 택시 300대를 운행했다. 1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워커힐 호텔을 개관한 지 3년 만에 공사비를 다 벌어들였다. 艾壽根씨는 『어떤 이가 「朴대통령이 워커힐 호텔에 드나들려고 청계고가도로를 만들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책에다 썼던데, 외화를 벌기 위해서 만든 도로입니다. 왜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艾壽根씨는 『예산도 없고 기술도 기술자도 없는데 자동차 공장과 워커힐 호텔을 만들었다』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다』고 했다.
 
 
 
 『4大의혹 사건은 反JP 세력의 합작품』
 
   새나라자동차 설립과 워커힐 호텔 건설을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자, 야당의 반대가 거셌다.
 
  金泳三·金大中·柳珍山씨 등 야당 인사들과 尹潽善씨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무슨 자동차냐』, 『달러도 한 푼 없는데 무슨 워커힐 호텔이냐』고 공격했다. 공화당 안에서도 저돌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중앙정보부에 대해 견제가 많았고, 金鍾泌씨를 반대하는 「反金세력」이 형성됐다.
 
  새나라자동차, 워커힐 호텔과 함께 증권, 슬롯머신을 묶은 「4大의혹」 사건이 터졌다. 金鍾泌씨는 외유에 나서고, 石正善씨는 구속되었다. 구속 이유는 자동차 산업과 워커힐 호텔 조성 사업을 통해 빼돌린 돈이 공화당 창당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艾壽根씨는 『뒤로 빼돌릴 돈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돈을 빼내려야 빼낼 도리가 없었어요. 그럴 생각들도 안 했고요. 내가 구매과장으로 일했지만 어디서 일전 한 푼 받은 게 없었어요. 石국장이 감옥에 있을 때 제 아내가 그 댁에 쌀 한 말하고 공책 다섯 권을 갖다 줬어요. 우리도 뭐가 있어야 많이 갖다 주죠. 나도 조사를 받았지만, 뭐 하나 착복한 게 없으니 집어넣을 수가 없었어요』
 
  한 달이 조금 지나서 石正善씨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艾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4大의혹 사건은 여당 안의 金鍾泌씨 라이벌과 야당이 합작으로 만든 사건입니다. 요즘도 가끔 4大의혹 사건 얘기가 나오는데 정치적으로 이용한 겁니다』
 
  워커힐 호텔 공사를 기획하고 지휘한 金鍾泌씨와 石正善씨는 1963년 3월에 열린 워커힐 완공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한 달 남짓 만에 풀려 나온 石正善씨는 중앙정보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실업문제, 베트남 진출로 풀어
 
   당시 최고의 사회 문제는 실업이었다.
 
  마땅히 일할 데가 없어서 시골에 가면 사람들이 그늘에 앉아 화투나 치고 있었다. 1962년 2월 金鍾泌씨와 石正善씨, 沈興善 장군, 李範俊 장군은 고딘 디엠 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에 갔다. 당시 베트남에 미국인들이 40∼50명 정도 들어가 있을 때였다.
 
  『石正善씨는 한국전쟁 때 미군이 50만명까지 들어온 적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강원도 양구, 인제, 평창의 도로는 한국전쟁 때 미국 공병들이 다 닦은 거예요. 인해전술을 쓰는 중공군은 도로가 없어도 되지만 미국식 전쟁은 반드시 도로가 있어야 합니다. 탄약, 기자재를 들여오려면 비행장과 도로가 있어야지요. 한국전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군사특수가 일어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石正善씨는 한국에 돌아와 미국 건축회사 30군데에 「베트남에서 전쟁하려면 공사를 해야 하고, 일꾼들이 필요할 것이다. 1인당 임금을 500달러만 주면 10만 명이든 20만 명이든 보내겠다. 배관공·목수·벽돌공·정비공 다 공급할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 달 후 미국 건축회사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100명 보내 달라」, 「500명 보내 달라」, 「1000명 보내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전국에 불도저 운전사 모집 공고를 냈다. 1000명 모집에 1만 명이 오는 등 경쟁이 치열했다. 서울 종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불도저를 갖다 놓고 실기 시험을 쳤는데, 베트남에 보낼 인력이 너무 많이 필요해서 시동만 걸 줄 알면 다 합격시켰다.
 
  한국인 근로자 1명을 보낼 때마다 알선료로 100달러씩 받았다. 그때는 100달러만 해도 엄청난 돈이었다. 1만 명을 보내면 100만 달러라는 돈이 생긴다는 결론이다.
 
  그 돈으로 학교 부지를 하나 사서 「해외개발공사」를 설립했다. 해외에 가려는 사람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였다. 해외개발공사에서 베트남에 7만여 명, 서독에 간호사 6200명과 광부 수천 명을 보냈다.
 
  1965년에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으로 파병될 때 기술자들이 함께 나갔다.
 
  『현대 鄭周永 회장, 한진 趙重勳 회장 등은 베트남에 가서 회사 명의로 공사를 땄어요. 비행장 건설, 항만 건설 등 베트남에 할 일이 많았거든요. 그때 우리나라에 실업자들이 많았으니 임금을 100달러만 줘도 일할 사람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베트남에서 컸고, 우리나라 경제가 베트남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그곳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기업과 기술자들이 1970년 초부터 중동으로 가서 중동붐을 일으켰지요』
 
 
 
 정부자금으로 보르네오 자원개발에 투자
 
   艾壽根씨는 『역사를 평가할 때는 당시 상황을 알고, 功過(공과)를 함께 봐야 한다』고 했다.
 
  1964년 베트남에 살던 교포 김태성씨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편지를 보내왔다. 김태성씨는 남방목재개발회사와 신흥양행이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국가가 지원해 주면 목재개발을 해보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에서 벌채권을 따내서 원목을 국내로 보낼 테니 국내에서 합판을 생산해 수출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때는 뭐든지 내다 팔아서 외화를 벌어들여야 할 형편이었어요.
 
  김태성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내가 1964년 신흥양행 상무로 파견되었어요. 정부에서 자금을 댔으니 정부 관리가 나가서 관리를 하게 된 거죠』
 
  김태성씨가 지원을 부탁한 금액은 150만 달러였다.
 
  정부가 보증을 서고 미국 FNCB 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신흥양행에 제공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정부 자금을 해외자원개발에 투자한 최초의 사건이다.
 
  우선 보르네오 섬에 파견할 인력을 선발했다. 공병대원 출신 30명을 선발한 뒤, 한순하 대령을 제대시켜 단장으로 임명했다. 당시만 해도 군인 출신이 아니면 정글 지역에 가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었다. 1964년에 150만 달러로 중장비를 마련하여 보르네오 섬으로 갔다. 현지주민 100여 명을 고용하여 정글로 들어갔다.
 
  『정글에서 원목 벌채 작업을 했습니다. 환경이 정말 열악했지요. 정글에다 천막을 쳐놓고 생활했는데, 뱀이 득실거리고 모기가 온몸을 물어뜯었습니다. 생필품은 싱가포르에서 조달했습니다. 정글에서 밥을 해먹으면서 원시인들처럼 지냈죠.
 
  원주민들에게 원조품을 지급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지급하면서 유대관계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대우를 잘해 줘서 현지에서 뽑은 일꾼들의 생산성이 높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예요. 거기서 서울과 연결하는 관리업무를 했지요』
 
  원목을 벌채한 뒤 운반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하천을 40km나 내려가야 항구가 나옵니다. 우리나라 배가 없어서 3000t급 외국선박을 빌려서 인천항과 부산항으로 보냈지요』
 
  국내 동명목재, 광명목재 등의 회사가 원목으로 합판을 만들어 미국과 일본으로 수출했다. 그전까지 일본이 최대 합판 생산국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세계 최대 합판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1970년대 말 인도네시아가 직접 합판을 생산하면서 우리나라가 더 이상 원목을 싸게 구할 수 없게 될 때까지 합판은 우리나라의 主力 수출상품이었다.
 
 
 
 베트남에서 만난 鄭世永·鄭仁永·趙重勳
 
   艾壽根씨는 1964년에 1년간 보르네오에서 일한 뒤 1965년에 베트남으로 진출했다. 베트남에서는 해외개발공사 동남아지국장을 맡아 국내 기술요원 송출 사업을 도왔다.
 
  『1965년 3월9일에 베트남에 갔어요. 현대·대림·한진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었지요. 鄭周永 회장의 동생인 鄭仁永씨와 鄭世永씨가 태국 도로공사를 하다가 베트남에 왔는데 얼굴이 새카맣더군요. 기업체 사장이지만 얼마나 검소한지 몰라요. 1달러짜리 토스트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곤 했지요. 거기서 호강한 사람 없어요.
 
  아침마다 한국 사람들끼리 만나면 인사가 「공사 따셨소. 돈 좀 벌었소」였어요. 송금하려면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가야 했는데, 趙重勳씨와 함께 많이 다녔어요. 趙重勳씨는 자신이 대한항공 사장이면서도 절대 1등석을 안 탔어요.
 
  鄭仁永씨와 몇 번 외국에 같이 다녔는데 이 양반이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다녔어요. 넥타이에 늘 때가 끼어 있어서 내가 놀렸더니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느냐」며 웃더군요. 기업체 사장들하고 다녔지만, 그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밥 한 그릇 못 얻어 먹었어요. 뒷골목에서 우동 한 그릇을 사 주곤 했죠. 훌륭한 분들입니다』
 
  대사관 직원들과 파월 군인들이 우리 기업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그때 우리 외교관들이 참 훌륭했어요. 駐越대사관 외교관들이 낮에는 나라 일 하고 밤에는 한국 기업들이 공사를 많이 따도록 돕기 위해 뛰어다녔어요. 한국 부대 부대장들은 물건이 세 트럭 필요하면 미군들에게 여섯 트럭 받아서 세 트럭은 우리 기업들에게 그냥 나눠 줬어요. 공사를 원활하게 하라고. 그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艾壽根씨는 『그때를 돌아보면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싫어하는 군사독재下에서 벽돌 하나 쌓은 사람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일만 하다가 해외에 나갔으니 떳떳합니다. 오랜만에 고국에 왔는데 요즘 마음이 혼란합니다』
 
  艾씨는 『盧武鉉 대통령이 朴正熙 대통령처럼 준비 없이 출발한 건 비슷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첫째, 朴대통령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실력 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어요. 계획없이 시작한 만큼 일 잘하는 사람 찾는 일에 비중을 많이 두었지요. 盧정권은 코드가 맞는 사람만 찾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들은 「잘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똘똘 뭉쳤어요. 지금은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이라는 구호를 국민들이 공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艾壽根씨는 이런 당부를 했다.
 
  『지금 온 국민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념 다툼과 정쟁을 중단하고, 다시 한 번 뭉쳐야 합니다. 5·16 당시에 비하면 얼마나 여건이 좋아졌습니까.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 국민이 일어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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