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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다른 실미도 반란의 진실
생존자들의 증언 實錄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
1971년 8월23일 8시간의 實況

우종창    woojc@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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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日成 목 따는 부대 창설―훈련―작전 출동―갈등―반란―저지―자폭의 全과정
● 31명 중 7명이 훈련 도중 사망. 24명이 반란, 기간병 18명을 죽이고 1명은 피살. 23명이 서울 진입, 自爆 등으로 18명 즉사, 1명은 중상 뒤 사망, 4명은 처형되다
● 단도 던지기, 암살, 폭파술 등 인간무기로 만들어진 북파 공작원들의 生과 死
●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없었다. 영화가 대한민국을 범죄집단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 번 돈의 가치는 얼마인가


● 소대장들의 증언-『공작원 사살 명령 없었다』
● 죄수 아닌 민간인도 있었다
● 훈련 중 탈영자는 때려죽여
● 부상 반란병의 사망 직전 최후 진술 입수


禹 鍾 昌 月刊朝鮮 부장대우〈woojc@chosun.com〉
趙 胡 英 취재지원〈sf205@hanmail.net〉
에필로그
중앙정보부 간부들 앞에서 총검술 훈련의 시범을 보이고 있는 실미도 부대원.
  실미도는 서울 상암동 축구경기장과 비슷한 크기의 섬이다. 지도상에도 仁川 앞바다 舞依島(무의도) 바로 곁에 조그만 점으로 표시돼 있다. 면적은 2km2. 암반으로 이뤄진 돌 섬이어서 굴 캐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만 있는 無人島였다.
 
  영화 「실미도」의 인기를 타고 졸지에 관광지로 부상한 실미도에 지난 1월11일 오전 11시경, 初老의 남자 6명이 祭需(제수)를 차려 들고 찾아갔다. 淸州에 거주하는 金邦一(김방일·59)·金亮求(김양구·58), 大田에 사는 金正鉉(김정현·56)·成映均(성영균·56), 서울의 金城鎭(김성진·60), 大邱의 金利泰(김이태·60)씨. 이들은 「실미도 전우회」 회원들이었다.
 
  金亮求·金城鎭·金利泰씨는 1968년 4월4일, 실미도에 1진으로 상륙한 空軍 첩보부대 요원들로서, 북한에 침투해 金日成 숙소를 습격할 특수 공작원 31명을 훈련시킨 교관들이며, 金邦一씨는 공작원들의 막사에서 함께 잠을 잔 소대장이었다. 成映均씨는 실미도 부대 통신병 출신이다.
 
  金正鉉씨는 훈련받은 특수 공작원들이 1971년 8월23일, 내무반에서 자고 있던 기간병들을 쏘아 죽이고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난동사건을 벌였을 때 바위 틈 속에 깊숙이 숨는 바람에 살았다.
 
  이 난동 사건에서 金씨 등 6명의 기간병은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나 金淳雄(김순웅) 교육대장 등 모두 18명의 기간장병이 희생되었다. 실미도를 찾은 6명 중에서 金正鉉씨 외의 5명은 난동사건이 벌어지기 전, 실미도를 떠나 禍를 면했다.
 
  「軍 관리 特殊犯 무장난동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실미도 사건은 지난 33년 동안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때문에 실미도 출신들은 세상을 힘들게 살아왔다고 했다. 이들의 실미도 방문도 난동사건 후 33년 만의 일이었다.
 
  옛 연병장에 제사상을 차린 이들은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대 막사를 향해 절을 하며, 난동사건 때 사망한 전우들의 명복을 빌었다. 영화 「실미도」에서 배우 허준호가 열연한 조중사 役의 실제 모델인 金利泰씨는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리고 있으라. 우리들이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金씨는 『옛날에는 눈물도 많이 나오더니 이제 나이가 드니까 눈물도 말라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영화 「실미도」에 대해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이고, 사실은 사실이다. 영화가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실미도 부대에 관심을 갖게 한 데 민족하자』고 말했다.
 
  부대 터를 둘러본 이들은 오후 2시쯤 실미도를 떠났다. 舞依島 선착장에서 육지로 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한 회원은 이렇게 절규했다.
 
  『살아서는 다시 이곳을 오지 않겠다』
 
 
  [실미도 부대 창설 秘話]
 
 
 
 金炯旭 中情 부장 주재의 3軍 총장 회의
 
   실미도 부대의 임무는 「오소리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金新朝(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 31명이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입안되기 시작했다.
 
  『朴正熙의 목을 따러 왔수다』라는 金新朝의 말이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알려지면서 金日成의 목도 따야 한다는 보복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었다.
 
  청와대 습격 사건 다음날, 북한은 원산 앞바다에서 작전 중이던 美 해군 소속 정보수집 초계함 푸에블로號를 납치했다. 이 무렵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각 軍 참모총장을 긴급 소집했다.
 
  金炯旭 부장 주재 회의에는 金桂元(김계원) 육군 참모총장, 金榮寬(김영관) 해군 참모총장, 張志良(장지량) 공군 참모총장, 姜起千(강기천) 해병대 사령관이 참석했고 中情에서 李哲熙(이철희) 국장이 배석했다.
 
  李哲熙 국장은 6·25 전쟁 중 육군 HID(北派공작원) 부대장을 지낸 對北 工作 전문가다. 그는 육군 첩보부대장과 육군 방첩부대장을 거쳐 1966년 육군 장군 신분으로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장이 되었고, 이때는 국제정보국장이었다. 그는 張玲子씨 남편이다.
 
  회의의 현안은 金新朝가 소속된 부대의 위치 파악이었다. 보복을 하려면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中情과 軍은 북한 124부대에 대한 정보가 全無했다. 金炯旭 부장은 張志良 공군 참모총장에게 북한 전역에 대한 항공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中情 부장과 각 軍 총장, 검찰과 경찰의 공안기관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 주재의 안보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회의가 끝나고 金炯旭 부장을 위시한 참석자들이 회의장을 떠나고 있는데 朴正熙 대통령이 張志良 공군 참모총장을 별도로 불렀다.
 
  朴대통령은 공군 총장에게 金新朝 부대의 위치를 물었다. 張志良 장군은 『모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했다. 朴대통령이 張장군과 둘이서 얘기하고 있는 자리에 회의장을 빠져 나갔던 金炯旭 부장이 끼어들었다. 朴대통령은 똑같은 질문을 金부장에게 던졌다. 金부장 역시 모른다고 대답했다.
 
  張志良 장군은 朴대통령에게 『일주일만 시간을 주면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대답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SR-71에서 북한 항공 촬영
 
   올해 79세인 張志良 장군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우리 空軍은 북한 지역을 항공 촬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일본 東京에 있는 美 5공군사령관에게 이를 부탁했습니다. 푸에블로號 납치사건 때 美 공군의 지원 요청이 있자, 나는 空軍 3개 편대를 현장에 출동시켰습니다. 납치를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공군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5공군사령관에게 협조를 요청했던 겁니다. 다음날, 협조가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美 공군의 高空 정찰기 SR-71이 서해안 진남포 쪽에서 침투해 동해 원산으로 빠져 나오는 방법으로 이 일대를 두 차례에 걸쳐 정밀 촬영하였습니다.
 
  이 항공사진을 美 공군에서 건네받아 정밀 분석한 결과, 金新朝 부대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납치된 푸에블로號도 항공사진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통해 부수적으로 金日成 숙소의 위치, 규모, 경비병 배치 현황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항공사진 내용을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中情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空軍에서 해냈다며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金炯旭 부장이 朴대통령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청와대 보고 얼마 후에 金炯旭 부장 주재로 육ㆍ해ㆍ공군 참모총장 회의가 다시 소집되었습니다. 1968년 3월 말경입니다.
 
  이 자리에서 보복의 일환으로 金新朝 부대에 특공대 투입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논의가 계속되면서 金日成 숙소에 대한 공격이 추가되었습니다. 보복이 결정되자 다음 문제는 어느 부대를 보낼 거냐는 것이었죠. 陸軍은 산악을 타고 陸路로 침투해야 하므로 안전하게 목표물까지 접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고 海軍은 잠수함을 한 척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高空에서 낙하산을 타고 침투하는 것이 목표물에 근접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공군에게 작전 임무가 부여된 것입니다. 작전에 드는 예산과 北에 보낼 공작원 선발은 中情에서 맡고, 이들에 대한 고공 침투 훈련은 空軍 특수부대가 맡기로 하였습니다.
 
  청와대를 습격한 金新朝 부대원이 31명이었기 때문에 우리 측에서도 31명을 보내기로 했지요. 침투 날짜는 훈련 상황을 지켜본 뒤 中情에서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서둘러서도 안 되지만 오래 끌어서도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습니다』
 
 
 
 
작전 이름은 「오소리」

 
   작전의 암호명 「오소리」는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가 급습하는 오소리의 공격 방식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소리 작전」은 中情과 空軍의 고위 관계자 일부만 아는 기밀 사항이었다.
 
  1968년 3월 무렵, 空軍은 백령도·대청도·교동도·우도·말도 등 西海의 여러 섬에 對北 정보 수집과 對南 침투에 대비한 파견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각 파견대는 서울 오류동에 위치한 「20특무戰隊」(일명 2325부대)의 지휘를 받았다. 이 부대는 空軍의 對北 정보수집 사령부이자 對北 침투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였다.
 
  20특무戰隊는 훈련 장소로 실미도를 택했다. 실미도는 인천에서 뱃길로 16km나 떨어져 있는 외진 장소이고, 舞依島에 가려져 지도상에도 잘 나타나지 않으며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無人島였기 때문이다.
 
  1968년 4월3일, 「오소리 작전」을 수행할 공작원들을 가르칠 空軍 교관 요원 18명이 야음을 틈타 실미도로 이동했다. 교육대장 金淳雄(김순웅·영화에서 안성기 扮) 상사를 비롯, 손영섭 중사, 金利泰·金城鎭·金亮求·도예수·朴용우·송석주 하사, 임창순·김의일·김동배 병장 등이었다.
 
  金城鎭씨는 『파견대에 근무하는 줄 알았지, 도착한 섬의 이름이 무엇인지, 부대 임무가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실미도에 도착한 선발대는 부대를 위장하기 위해 계급과 이름을 모두 바꾸었다. 최고 상급자인 金淳雄 상사는 대위, 金利泰ㆍ朴용우 하사 등은 소위, 사병들은 하사 계급장을 달았다. 金利泰씨는 김빈 소위로 행세했다.
 
  金利泰씨는 국민大 법학과 출신이다. 170cm가 안 되는 작은 키에 깡마른 체격인 그는 태권도 유단자이며 권투를 비롯한 각종 운동 특기자였다. 그는 스물한 살 때인 1965년 空軍 하사관으로 입대, 낙하산 강하 훈련과 정보 교육을 받고 특수전 교관이 되었다. 실미도에 배치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선발대의 임무는 無人島와 다름없는 실미도(당시 한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中情에서 퇴거시킴)에 연병장과 막사 등 교육시설을 짓는 것이었다. 실미도 도착 전후 사정을 金利泰씨는 이렇게 표현했다.
 
 
 
 소주잔에 해골 가루 넣어 마셔
 
   <가장 급한 것은 食水 문제였다. 하루 종일 헤매도 물줄기를 찾지 못하다가 부대가 주둔할 언덕 밑, 바위를 들추니 습기가 있었다. 콤포지션 폭약으로 바윗덩어리를 날리고 150cm 정도 팠더니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갈을 깔고 클로로칼키로 소독한 후 지붕을 씌워 우물을 만들었다.
 
  다음은 연병장을 만드는 일이다. 야전 삽과 곡괭이로 산을 수직으로 끊어 냈다. 손이 터지도록 흙을 파고 등에 져 날랐다. 나중에는 美製 곡괭이의 양쪽 날이 다 닳아서 자루구멍 부분만 남을 정도가 되었다. 대원들은 힘차게 일을 했다. 한 번뿐인 청춘을 조국에 바쳐 보자는 일념으로 곡괭이질을 계속했다. 사격장, 유격장 등이 완성되어 본격적인 특공부대의 기틀이 잡혀 갔다>
 
  교육장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어느 날, 교육대장이 全대원을 소집했다. 교육대장은 『金日成의 목을 딸 정도의 특수 공작원을 양성하려면 교관부터 강심장이 되어야 한다』면서 소주잔에 해골 가루를 넣고 그 위에 소주를 부은 다음 한 잔씩 마시게 했다. 金城鎭씨 말이다.
 
  『한 잔씩 마시고 난 다음, 교육대장이 우리들을 보고 「너희들은 인간의 뼈를 갈아 마신 인간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이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니까 훈련생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말고 惡鬼처럼 가르치라는 주문이었죠』
 
   金淳雄 교육대장은 당시 서른네 살로 부대원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계급도 가장 높았다. 그는 캘로(KLO)부대 출신으로 여러 차례 北에 침투했다고 한다. 1971년 훈련생 난동사건 때 교육대장인 그는 제일 먼저 죽음을 당했다. 이북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아들(서울 모대학 박사)에 따르면 고향은 충북 중원이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는 제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170cm 가량의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습니다. 엄한 분이셨고, 가끔 집에 들렀습니다』고 말했다.
 
  실미도 부대의 空軍 편제상 명칭은 「2325부대 209파견대」다. 그러나 209파견대란 명칭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19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 부대」 혹은 작전명을 따 「오소리」라 불렀다. 209파견대 대장은 소령인데 仁川에 거주했고, 실미도에서의 최고 상급자는 교육대장 金淳雄 상사였다.
 
  金淳雄 교육대장은 부대 마크를 X자 형태의 뼈 위에 해골 바가지를 올린 것으로 정했다. 부대 마크는 교육대장의 작품이다. 그는 부대원들을 「38유격대」라 불렀다. 부대원들은 부대 마크가 부착된 검은색 베레모에, 오른쪽 어깨 부분에 「38유격대」라는 견장이 붙은 군복을 입었다.
 
 
 
 
  선발대 도착 20일 후, 훈련병들이 순차적으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中情에서 선발한 훈련병들은 거의가 전과자였다고 한다. 뺑소니 차 운전사, 가짜 중, 소매치기, 암표 장수, 식당 요리사, 곡마단 감독, 편물기계 수리공, 포장마차 주인, 권투선수, 아마추어 가수, 돌팔이 점쟁이, 미군부대 담치기, 술만 마시면 칼 들고 파출소에 쳐들어 가는 사람 등이었다.
 
 
 
 
『124軍 부대를 능가하라』

 
   갓 도착한 훈련생들은 교관이나 조교의 지시에 『개소리 말라』는 식으로 대꾸했다고 한다. 제일 나이 어린 훈련생이 스물서너 살로 사병 출신의 기간병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서른 살이 넘은 사람도 있었다. 거의가 깡마른 체격이며 눈에 毒氣를 품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金城鎭씨는 회고했다.
 
  31명의 훈련생이 모두 소집된 뒤 부대 창설식이 열렸다. 金淳雄 교육대장은 기간병, 훈련생 모두에게 『124군 부대를 능가하라』고 요구했다. 교관들은 훈련생들에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면 과거 죄가 사면되고 보상이 따르지만 단 한 발짝이라도 自意로 이 섬을 벗어날 때는 배신자로 간주하여 죽이겠다』고 공언했다.
 
  훈련생들에게는 계급도, 명찰도 없는 군복이 지급되었다. 개인 화기는 소련제 AK-47과 22구경의 TT권총, 북한제 PPS 기관단총과 다발총 등이었다.
 
  기간병들은 첫 훈련인 제식훈련에서 훈련생의 기를 꺾었다. 소대장 겸 교관인 金利泰 하사는 美軍 야전침대에서 지지목으로 사용되는 네모로 각진 몽둥이를 들고 훈련장에 나타났다. 그는 제식훈련에서 발이 틀리는 훈련병이 있으면 들고 있는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가 터지고 피가 솟구치는 광경에 훈련생들은 긴장했다.
 
  金利泰 하사는 훈련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본격적으로 훈련이 개시되었다. 목표는 단 하나, 124군부대를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혹독하다는 표현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바로 여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듣는 것은 오직 총쏘고 뛰는 것뿐이다. 화약냄새, 땀냄새, 악 쓰는 소리, 매질하는 소리…. 여기가 바로 지옥이 아니겠는가.
 
  일과 시간표를 보자. 오전 6시에 기상해서 점호, 6km 산악구보, 아침식사, 조회, PT체조, 오전 일과, 점심식사, 오후 일과, 저녁식사, 휴식, 점호, 취침,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교육과목은 지도 읽기, 각종 화기학, 습격매복, 장애물 돌파, 유격훈련, 총검술, 호신술, 폭파, 의무, 체력단련, 수영훈련, 생환법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습격매복, 호신술, 사격, 산악구보가 가장 중요한 과목이다. 호신술 중 칼 던지기 같은 과목은 7~10m 지점에 사람을 그려놓고 눈·코·입 등 맞추고 싶은 부분에 칼을 던져 꽂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모두 사람 죽이는 기술만 가르치고 배우는 셈이다.
 
  훈련이 혹심할수록 부상도 많았다. 부러지고 찢어지고 삐고…. 의무실 붕대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하루에 수백 발씩 총을 쏘아대니 안전사고 또한 비일비재했다. 사격장에서는 카빈 총알이 어깨를 뚫고 지나가고, 장애물 돌파장에서는 기관총알이 옆구리를 뚫는다.
 
  체력향상을 위해 각 내무반·식당·화장실 앞에는 철봉대가 세워져 있다. 들어갈 때 턱걸이, 나올 때도 턱걸이를 해야 된다. 매주 토요일은 턱걸이를 비롯한 각종 체력 테스트가 있다. 지난 週에 20개를 했으면 이번 週에는 25개를 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못한 횟수만큼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야 된다. 비록 강제성을 띠기는 했지만 훈련생들의 체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매일 아침 조회시에는 훈시가 있다. 훈시 맨 마지막은 항상 이렇게 끝난다.
 
  『체포되면 자폭하라』>
 
 
 
 탈출기도자 2명을 타살
 
   훈련은 기간병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기간병들은 훈련생들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교관들로부터 혹독한 기합을 받았다. 기간병들은 훈련생과 같이 뛰며 같이 교육받고 같은 음식을 나눠 먹었다. 소대장들은 훈련생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같은 내무반에서 잠을 잤다. 金利泰씨는 『거의 매일 바닷물에 들어가다 보니 검은색 머리칼이 노랗게 변했다』고 말했다.
 
  배급은 풍족했다. 먹는 것은 모두 고기고, 입는 것은 항상 새것이었으며, 담배는 최고급인 「파고다」가 지급됐다. 봉급은 쓸 데가 없어 보관할 장소를 못 찾아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金亮求씨의 말이다.
 
  『영화 「실미도」에는 줄타기 하다가 떨어진 훈련생이 퇴소하는 대신에 식당 근무를 자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저 같은 소대장도 그 훈련생에게서 배식을 받았습니다. 기간병이나 훈련생이나 똑같이 먹었습니다』
 
  교관들은 일과 시간 중의 훈련은 혹독하게 시켰지만 일과 후엔 훈련생들이 내무반에서 눕든지 자든지 격식에 구애받지 않도록 했다.
 
  목표는 金新朝 부대에 대한 공격에서 金日成 숙소 공격으로 변경되었다. 美 공군의 高空 정찰기 SR-71에서 찍은 항공사진을 통해 金日成 숙소와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교육이 끝난 후 밤마다 모형을 보며 침투법을 가르쳤다.
 
  훈련생이 범죄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사고 위험성에 대비, 실미도 부대는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시간마다 서울 오류동 본부와 교신했다. 당시 교신은 모르스 부호였다.
 
  훈련생의 탈출에 대비한 감시는 철저했다. 교육 시간에는 기간병이 1대 1로 따라붙고, 취침시엔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든 기간병이 훈련생 막사 출입구를 지켰다. 야간에 용무가 있는 훈련생은 경계병 앞에 와서 소속과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친 뒤 경계병의 허락 아래 행동했다. 경계병은 10분에 한 번씩 자고 있는 훈련생의 머리 수를 세었다. 산꼭대기에는 캘리버 50 기관총이 언제든지 불 뿜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훈련 중 3명의 훈련생이 목숨을 잃었다. 1명은 해상 침투 훈련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舞依島에서 야간에 독도법 훈련을 실시할 때 탈출을 시도한 2명은 체포된 후, 부대 창설식 때의 약속에 따라 훈련병 들 손에 맞아 죽었다.
 
 
 
 대형 열기구 타고 高空 침투
 
  훈련 시작 7개월 후,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훈련생 개인 火器로 소련제 칼라슈니코프 소총이 지급되었다. 金日成 숙소 폭파를 위한 장비는 콤포지션, TNT, 수류탄 등이었다. 비상시 肉彈공격과 自爆에 대비, 훈련생들의 몸에 감을 도폭선도 준비되었다. 본부와 연락할 통신 장비는 없었다.
 
  훈련생들은 교관들과 함께 실미도를 출발, 西海 해상에서 해군 함정으로 옮겨 탔다. 해군 함정은 북한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이들을 내려 놓았다. 훈련생들은 해변에 설치된 전진기지에 대기하며 최종 명령을 기다렸다.
 
  中情과 空軍에서 고안한 침투 방법은 대형 열기구였다. 헬기도 변변찮은 1968년 시절에서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믐날 밤, 열기구를 탄 공작팀이 金日成 숙소 상공으로 날아가 낙하산으로 하강한 후 金日成의 목을 딴다는 작전 시나리오가 수립되었다. 열기구는 북한 레이더에 잡히지 않을 뿐 아니라 중무장한 28명의 대규모 공격조를 한꺼번에 안전하고 정확하게 목표지점에 보낼 수 있었다.
 
  작전이 끝나면 산악지대로 탈출해 휴전선 부근의 약속 지점에 모이기로 했다. 완전 무장 차림으로 12km를 한 시간에 주파하는 구보훈련을 한 것도, 밤마다 독도법을 익힌 것도 탈출을 위한 수단이었다.
 
  작전 예정 시각 하루 전, 교관들과 훈련생들은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살아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밤이었다. 金利泰 소대장은 6·25 전쟁 때 유격대원들이 부른 노래를 불렀다. 그 다음날, 작전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교관과 훈련생들은 해변의 기지에서 계속 대기했다. 金利泰씨의 말이다.
 
  『며칠 후, 본부에서 작전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명령을 내릴 최고 당국자가 경질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상륙 한 달 후, 전원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만약 그때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면 金新朝 사건 때 받은 피해의 10배 정도는 갚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훈련생 한 명이 사단 한 군데를 제압할 수 있는 1當萬의 실력이었으니까요』
 
 
 
 金斗萬 당시 공군총장-『사살 명령 없었다』
 
  최고 당국자의 경질은 중앙정보부장이 金炯旭씨에서 李厚洛씨로 교체됨을 의미한다. 金炯旭 부장이 경질된 것은 1969년 10월이었다. 「오소리 작전」의 산파역 중 한 명인 張志良 공군 참모총장도 이보다 1년 전인 1968년 7월에 예편하고, 1969년 駐에티오피아 대사로 발령받았다. 張장군은 1973년까지 에티오피아 대사로 근무했다.
 
  극소수의 관계자들에 의해 극비리에 설립된 실미도 부대는 창설 관계자들이 사라지면서 후원 세력을 잃게 되었다. 실미도에 대한 中情의 지원은 전과 달랐다. 변화의 첫 조짐은 담배에서 나타났다. 최고급인 「파고다」 지급이 중단되고 「화랑」 담배로 완전 교체되었다. 국은 쇠고기국에서 돼지고기국, 콩나물국을 거쳐 짠 무국으로 바뀌었다.
 
  내무반의 기름 공급도 끊어졌다. 기간병과 훈련생들은 실미도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었고, 나무가 동이 나자 나무 뿌리를 캐어 말린 후 연료로 사용했다. 기간병들에게 지급되던 생명수당과 벽·오지 근무수당, 특근수당도 끊겼다.
 
  실미도 부대 통신병 출신 成映均씨는 『부식이 없어 수류탄을 터뜨려 숭어를 잡아 먹었다』고 말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70년 8·15 경축사에서 『北이 무력적화를 포기하면 남북장벽을 없앨 획기적 방안을 제시하겠다』는 對北 유화정책을 발표했다. 실미도 부대의 존재 가치는 더욱 더 절하되었다.
 
  보급 문제에서 시작된 불만은 섹스 문제로 옮겨갔다. 강압적이고 혹독한 훈련만으로 본능까지 억제할 수는 없었다.
 
  1970년 8월, 金斗萬 공군사관학교 교장이 공군 참모총장에 부임했다. 부임 후 그는 空士 2기생 김계엽 중령을 2325부대장에 임명했다. 얼마 후 2325부대장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실미도 부대의 문제점을 보고했다.
 
  金斗萬(77) 장군의 증언이다.
 
  『나는 총장이 되기 전엔 실미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전임 총장에게서도 업무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2325부대장이 실미도에 대한 보고를 처음 했습니다. 中情과 空軍이 극비리에 진행하는 사업인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외딴 섬에 갇혀 2년간 생활하다 보니 근무환경이 좋지 않고 시설도 낡았고, 급식 사정도 형편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선 지시를 내리고 시설국장과 군수참모를 실미도 현지에 내려보냈습니다.
 
  그 6개월 후, 실미도 훈련생들의 舞依島 주민 강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을 丁來赫 국방장관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실미도 처리 문제를 정식 제기했습니다. 국방장관에게 「사업 성격상 空軍이 맡을 사안이 아니므로 실미도를 직접 관리하는 中情에서 가져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훈련생들을 공군 하사로 채용하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모두가 전과자여서 불가능했고, 범법자들이기 때문에 사회에 내보내는 것도 곤란했습니다.
 
  난동사건이 나기 한 달 전, 그러니까 1971년 7월경 다시 한 번 국방장관과 실미도 처리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지금부터 空軍은 손을 떼겠다는 내 주장에 장관은 「조만간 해결하겠다. 10월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기다리다가 난동사건이 터진 겁니다』
 
  ―영화 「실미도」를 보면 中情에서 훈련생들을 사살해 실미도 부대의 흔적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돼 있습니다.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없습니다』
 
  ―총장 시절에 실미도에 대한 보고는 자주 받았습니까.
 
  『李哲熙 中情 국장이 실미도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는 보고를 정보부대장에게서 받았습니다. 관리도 李哲熙 국장 소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고,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총장 재임 중 실미도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시설국장과 군수참모를 내려보낸 적은 있어도 나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給食 형편 없어져
 
   「실미도 전우회」 회장 金邦一씨는 1990년에 제대할 때까지 26년간 공군에서 근무했다. 그는 실미도 부대 창설 3개월 후, 이 부대에 배치되었다. 청주에서 기계설비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그를 지난 1월6일 그의 사무실에 만났다. 인터뷰 중에도 그의 휴대전화 벨소리는 쉬지 않고 울려 댔다. 온갖 매스컴에서 그를 찾고 있었다.
 
  ―훈련생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선발은 중앙정보부에서 했고, 우리는 훈련을 맡아서 생활을 같이 한 거예요』
 
  ―모두 강력범들이었나요.
 
  『범죄자도 있었지만, 민간인도 있었어요. 다 어렵게 살았던 밑바닥 인생이 공통점이었죠』
 
  ―훈련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요.
 
  『폭파훈련, 유격훈련, 無聲(무성)무기 사용법, 독도법 등 영화에서 보여 주지 않은 훈련들도 많았어요』
 
  ―처음에는 보급이 잘되다가 나중에 형편없어졌다면서요.
 
  『처음 3개월은 쇠고기에 갈비에 잘 나왔죠. 1969년, 침투대기를 했다가 돌아온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보급이 형편없었어요. 보리쌀에 단무지 반찬뿐이니 기간병들도 배가 고프다고 난리였어요. 한창 먹을 젊은이들이 못 먹으니까 훈련 强度도 풀어지고요.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섬에 우리들을 놓아두고 있으면 돈이 나오니까 중간에 누가 다 착복한 거지요. 우리들에게 시킬 일도 없고 하니까 우리의 단물을 누군가가 계속 빼먹으려고 내버려 둔 것이라고 생각해요』
 
  ―보급이 계속 좋았거나 생활이 괜찮았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까요.
 
  『없었을 거라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들이 불안감 대신에 희망은 가질 수 있었겠지요. 언젠가는 작전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그런 기대감이죠. 그런데 갑자기 보급이 나빠지니까 「金日成 숙소 폭파 작전은 물건너 갔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죠. 또 하나는 3년 동안 여자를 대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밖에 안 줬어요. 그 젊은 혈기들이 어떻게 됐겠어요』
 
 
 
 『시간이 많으면 잡생각도 많아져』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이 되어서 비극이 일어난 것이네요.
 
  『그렇다고 봐야죠. 특수부대는 만들어 놓고,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으니 생활이 형편없어졌고, 욕구 분출을 할 수도 없었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전이 실현될지 안 될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어서 불만이 쌓여만 가다가 결국 그런 식으로 터지게 된 거죠. 사람이 움직이고 훈련받고 할 때는 정신이 없다가도 보급이 나빠지고 훈련도 느슨해지고 하다 보니까 시간이 많아지고 점점 잡생각이 많아지게 된 거죠』
 
  ―기간병들은 정부와 훈련생들 사이에 낀 입장이 되는 거잖아요. 중간에서 애환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정부의 태도 또한 저희들은 불만이었어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우리도 불안했죠. 애들(훈련생)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힘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럴수록 그들하고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지요. 훈련도 별로 없고 하니까 대화를 많이 했고요. 그들이 청와대로 간다, 어쩐다 했던 이유는 중앙정보부가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으니까 뭔가 높은 사람들한테 자기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요』
 
  ―훈련생들이 불만을 얘기한 적은 있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그런 것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절대로 아니니까요. 얘기 자체를 끄집어 낼 수 없었으니까요』
 
  ―난동사건 당시 실미도에 없었는데 훈련생이 기간병을 쏘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기분이 어땠나요.
 
  『서로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죠. 사건 발생 후 섬에 들어가니까 내 책상 위에 메모지가 있더라고요.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라고요. 거기에 그들의 마음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에서처럼 기간병들에게 훈련생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소대장들은 몰랐고, 그런 지시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죽은 기간병들은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당한 거네요.
 
  『그렇죠. 대부분 자다가 죽었어요』
 
 
 
 기간병을 폭행한 훈련병 즉결 처분
 
   서울 영등포고교 생활지도부장 梁東洙(양동수ㆍ54)씨는 1970년 2월2일 空軍에 입대해 정보 교육을 받고 같은 해 9월, 실미도에 태권도 교관으로 배치되었다. 정식 계급은 상병이지만 그는 하사 계급장을 달았다. 그는 일과 시간에는 교육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일과 후엔 휴게실(PX)에 근무했다.
 
  그가 배치된 지 5개월쯤 지나, 실미도 부대 창설 후 처음으로 하극상 사건이 발생했다. 나무를 베러 인근 舞依島에 간 훈련생이 동행한 기간병을 폭행한 것이었다. 범인은 경기도 미군 기지촌에서 주먹질을 하던 깡패 출신이었다. 이 깡패는 훈련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병장에서 즉결처분되고 시체는 휘발유를 끼얹어 불태웠다.
 
  훈련생이 기간병을 폭행했다는 것은 불만이 있다는 표시였다. 훈련생들의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 갔다. 梁東洙씨의 말이다.
 
  『부대에서 「흰둥이」라 부르는 똥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극상 사건이 나기 얼마 전, 이 개가 한밤중에 느닷없이 산꼭대기로 올라가 울었습니다. 그 소리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미신 같지만 개가 울면 반드시 사고가 생겼습니다. 난동사건이 나기 보름 전쯤, 이 개가 또 울었습니다. 예감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기간병들에게 「훈련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안 울던 개도 운다. 조심하자」는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군대에서의 사고는 총과 관련이 많습니다. 휴게실 근무 책임자인 저는 내무반보다 휴게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개인 화기를 휴게실에 두고 생활했는데 개 울음 소리를 듣고는 총을 내무반에 갖다 놓았습니다』
 
  ―훈련생 난동사건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훈련은 고되고, 부식은 형편없었습니다. 군복이나 신발 보급은 괜찮았지만 한창 먹을 나이에 배는 고프고, 추우니까 불만이 생겼겠지요. 내무반에서 땔 연료가 없어 막판에는 나무 뿌리까지 캤습니다. 난동사건이 났을 때 실미도엔 나무라곤 한 그루도 없었습니다.
 
  작전명령이 떨어질 것 같지 않으니까 훈련생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섬 밖을 나가고 싶은데 기간병이 지키고 있으니 결국 기간병을 죽이고 나간 겁니다』
 
  ―훈련생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中情 사람들이 실미도에 온 적도 있습니까.
 
  『제가 근무할 때 두 번인가 세 번, 헬기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위 아래 까만 군복에 별 하나나 둘이 달린 계급장을 달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왔습니다. 中情에서 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누군지는 몰랐죠』
 
  훈련생들을 누구보다 혹독하게 교육시키고 그 바람에 그들과 더욱 친해진 金利泰씨는 작전명령은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훈련기간이 계속 연장되자 훈련생들의 장래 문제를 누구보다 걱정했다. 분위기가 험악해 金利泰씨는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베고 잤다. 그는 209파견대장을 찾아갔다. 金利泰씨 말이다.
 
  『하늘을 쳐다보고 바다를 쳐다보며 피눈물을 흘리며 고민했습니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불쌍한 애들이었습니다. 상부에서 가장 걱정한 것은 「오소리 작전」의 보안입니다. 훈련생들을 사회로 내보낼 경우에는 보안문제가 걸린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공군 하사로 임관시키면 보안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건의했죠.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두 번째로 극단적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처우개선도 안 되고, 공군 하사 임관도 안 되고, 北에 보내지도 못할 바라면 이미 7명이 사망했으니 나머지도 다 죽이자고 했지요.
 
  부대장이 「어떻게 죽여」라고 묻습디다. 훈련을 핑계로 배에 태워 근처 덕적도에 데려간 다음, 내려서 걸어갈 때 등 뒤에서 캐리버 50 기관총을 발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산 자가 있으면 현장에서 확인 사살하고, 시체는 불태우면 된다고 했지요. 부대장이 아무 소리를 안 합디다. 애들 처리 문제로 고민하다 난동사건 석 달 전에 실미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난동 소식은 오류동 본부에서 들었습니다』
 
 
  [반란의 8시간]
 
 
 
 교육대장 망치로 때려 죽여
 
  반란 사건은 1971년 8월23일 오전 5시50분경에 발생했다. 훈련생 막사의 보초는 金태수씨였다. 金씨의 근무시간은 새벽 4시부터 6시까지였다. 보초 근무가 끝나가던 오전 5시40분쯤, 金씨는 급히 화장실에 갈 일이 생겼다. 근무 시간은 20여분쯤 남아 있었지만 여름 햇살에 날이 훤하게 밝았기 때문에 그는 별일이 없을 줄 알았다.
 
  金씨는 총을 내무반에 걸어 놓고 화장실로 갔다. 전날 밤, 기간병들이 술을 먹은 사실을 알고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훈련생 중 한 명이 보초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막사를 빠져 나왔다. 金利泰씨에 따르면 그는 전직 포장마차집 주인이었다. 그는 혼자서 자고 있는 교육대장 천막 안으로 잠입했다. 그는 손에 망치를 쥐고 있었다.
 
  그는 자고 있는 金淳雄 교육대장의 眉間(미간ㆍ두 눈썹 사이)을 망치로 내리쳤다. 「실미도 전우회」 사무국장 李準暎(이준영·54)씨는 『骨髓(골수)가 터져 나온 위급한 상태에서도 교육대장은 훈련생들의 난동을 막기 위해 격투를 벌이다가 사망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는 교육대장 김순웅(안성기 扮) 상사가 훈련생 제3조 조장 강인찬(설경구 扮)에게, 국가가 훈련생을 죽이려 한다는 작전 내용을 흘려 주고 자신의 이마에 권총을 쏘아 자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맨 먼저 교육대장 막사를 공격한 것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서였다. 교육대장 막사에는 카빈 소총과 실탄 60발이 항상 비치돼 있었다. 무기를 탈취한 그는 막사에 대기 중이던 훈련생들에게 실탄을 나눠 주었다. 무장한 훈련생들은 기간병 막사에 들어가 자고 있던 기간병들에게 무차별 사격했다.
 
  화장실은 훈련생 막사 위에 있었다. 화장실에서 총소리를 들은 金태수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총소리가 들려서 밖을 보니 난동이 일어난 거예요. 훈련생들이 총을 들고 기간병 내무반에 몰려가면서 쏘더라고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죠. 나는 화장실에서 못나오고 화장실 밑으로 들어갔어요. 이틀 전에 청소를 해서 변이 무릎까지밖에 안 차서 살았죠』
 
 
 
 내 핏자국을 따라오는 훈련생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金태수씨이지만 그는 지금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자신이 보초 근무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는 바람에 난동이 일어나 애꿎은 동료들만 죽였다는 자책감이다. 이 자책감 때문에 그는 실미도 전우회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
 
  난동사건이 터졌을 때 태권도 교관 梁東洙씨는 휴게실에 있었다. 그의 말이다.
 
  『사건이 발생한 8월23일은 월요일입니다. 저는 휴게실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날 새벽 5시쯤 인천으로 나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8월22일 일요일 오전에 외출 나갔던 기간병 10명이 그날 밤 귀대길에 4홉짜리 화룡소주를 여러 병 사 왔습니다. 교육대장 金淳雄 상사가 그날만은 술을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였습니다.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기간병들끼리 술 파티가 벌어졌죠. 안 먹던 술을 먹었으니까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늦은 오전 6시 무렵에 일어났습니다.
 
  급히 휴게실로 올라가 세수를 하고 군복 상의를 입고 있는데 총소리가 들리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당시 휴게실에는 저와 제 입대 동기인 김기열·안지근씨 등 3명이 있었습니다. 안지근씨는 위가 좋지 않아서 약을 먹기 위해 자주 휴게실을 이용했습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저는 김기열씨에게 「北에서 우리 부대를 습격한 것 같다. 빨리 총 가지러 내무반으로 가자」고 외쳤습니다. 김기열씨가 제일 먼저 휴게실을 뛰쳐나갔고, 그 뒤에 제가 나갔습니다. 휴게실에서 내무반을 향해 달려가면서 뒤를 쳐다보니까 약 30m 후방에서 훈련생 1명이 쪼그려 쏴 자세로 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는 순간에 총알을 맞고 저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습니다.
 
  훈련생들의 사격 솜씨는 한 방에 급소를 맞출 수 있는 一發必殺(일발필살)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저는 목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한 10분쯤 지나서 정신이 들었는데, 얼굴은 풀에 처박혀 있고 목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렀습니다. 눈을 떠서 보니까 기간병들이 마구 도망다니고 있고, 얼마쯤 지나니까 통신대에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외부와의 연락을 끊기 위해 통신대를 폭파시킨 겁니다.
 
  정신이 드니까 확인사살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우리가 훈련생들에게 입버릇처럼 가르친 게 확인사살이었으니까요. 이 자리를 빨리 피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닷가를 향해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때 총을 든 훈련생 한 명이 제가 흘린 핏자국을 따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요행히도 그는 저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저는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고 있다가 구조되었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총알이 목 뒤에서 앞으로 관통되었습니다. 목뼈와 동맥을 건드리지 않고 목 근육만 관통하는 바람에 운 좋게 살아난 것입니다. 의사들도 기적이라 했습니다. 김기열씨는 사망했고, 안지근씨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梁東洙씨는 넥타이를 풀고 상처를 보여주었다. 총알이 들어간 자리와 나온 자리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梁씨는 『신경을 쓰거나 궂은날엔 지금도 통증이 온다』고 말했다.
 
 
 
 기간병 18명 희생되다
 
   기간병들의 막사는 A내무반, B내무반 두 개였다. 훈련생들은 1차로 A내무반 기간병들을 사살한 뒤, B내무반으로 옮겨갔다. 유격훈련 조교인 金正鉉 병장은 B내무반에서 생활했다. 기상시간보다 일찍 일어난 그는 A내무반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었다. 막사 밖에 나가니 훈련생들이 총을 쏘며 B내무반으로 몰려오는 것이었다.
 
  金씨는 『애들이 난동을 피운다. 빨리 피해라』고 소리친 뒤 내무반 뒤 암반지대로 도망가 바위틈 속에 완전히 몸을 감추었다. 바깥 상황은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얼마 후 탄약고가 폭파되는 소리가 들리고 난 다음 주위가 조용해졌다. 안지근·金태수씨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통신시설이 완전히 파괴돼 본부에 연락할 길이 없었다.
 
  金씨는 『몇 시간이 지난 후 中情의 높은 간부가 헬기를 타고 실미도에 왔을 때 구조되었다』고 말했다.
 
   제주에 사는 黃晳宗(황석종·55)씨도 B내무반 소속이었다. 그는 『피해라』라는 金正鉉 병장 고함에 눈을 떴으나 피하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그의 생존담이다.
 
  『걔네들이 명사수이니까 머리 아니면 심장을 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매트리스 밑으로 들어가서 두 팔을 머리 위에 올려 팔이 머리처럼 보이게 했죠. 등과 팔에 총알이 스쳐 갔습니다. 애들은 저보다도 내무반 밖으로 도망간 金正鉉 병장을 잡는 데 혈안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빗맞은 것 같아요. 한참 후 확인사살차 다시 내무반에 들어왔지만 한번 둘러보고는 가버렸어요』
 
  맨 마지막에 휴게실에서 빠져 나온 안지근씨는 내무반 주변에 비가 오면 물이 빠지도록 파 놓은 고랑 속에 들어가, 몸 위에 풀을 덮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바람에 살아났다.
 
  이 난동 사건으로 金淳雄 교육대장을 비롯한 기간병 1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6명은 바다로 도망치다 익사했다. 모두 18명의 기간병이 희생되었다.
 
 
 
 상륙 후 柳韓洋行 앞 거리까지
 
   실미도를 완전 장악한 훈련생들은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후 탄약고를 폭파시켰다. 이들은 인근 舞依島로 건너가 교육대장이 급성 맹장염에 걸렸다며 급히 어선을 빌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의 목표는 서울이었다.
 
  舞依島 주민 차성교씨의 말이다.
 
  『훈련병 2명이 마을로 걸어 들어오면서 이장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더라고요. 복장을 보니까 평소의 먼지 묻은 지저분한 훈련복이 아닌 거예요. A급 군복에 자동소총을 차고 주머니마다 실탄이 가득했어요. 최고급 신탄진 담배도 몇 갑씩 들고 있었고요. 완전히 생소한 복장이었어요』
 
  24t급 안강망 어선을 탈취한 이들은 仁川 송도 유원지 앞 독부리 해안에 상륙했다. 실미도를 탈출한 반란병은 모두 23명이었다. 총 31명 중 7명은 훈련 중에 죽었고, 1명은 난동 때 기간병에 의해 사살되었다.
 
  仁川 부근의 해안은 33사단 관할이었다. 사단장은 함경남도 출신의 陸士 6기생 朴定仁 소장. 朴소장은 그의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 交戰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특수범들이 갯벌 앞 해안 초소에 도착한 것은 8월23일 낮 12시20분이었다. 33사단 102연대 제2대대 605초소에서 보초 金亨云(김형운·22) 일등병이 검문하자 이들은 신분증을 보이고 욕을 하면서 초소 옆에서 몸을 씻고 조개고개를 향해 산등성이를 넘었다.
 
  보초 金일병은 수상한 자들이 신분증을 보이고 통과했음을 소대장에게 보고했다. 소대장 李元熙(이원희·22) 소위는 소대원을 비상소집하여 조개고개에 배치했다.
 
  낮 12시56분 특수범 일행은 민간인 버스를 탈취하여 조개고개에 나타났다. 최성기 하사가 버스를 정지시켰으나 불응하고 버스 안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최하사가 대퇴부 관통상을 입었다.
 
  소대장은 이들의 행위로 보아 무장 괴한이라고 판단하고 사격을 명령했다. 500여 발의 사격으로 특수범 5명이 사살되었으나 차는 그대로 통과했다. 얼마 안 가 총격으로 인한 버스 고장이 생기자 시체 5구를 버리고 다른 차로 갈아타고 질주했다>
 
  오후 1시, 인천 간석동 고개길에서 오른쪽 뒷바퀴가 펑크 나자 난동범들은 맞은 편에서 오던 경기 영5-1661호 시외버스를 강탈했다. 난동범이 탄 버스는 별 저항 없이 경기도 소사를 지나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까지 진출했다. 난동범들은 서울 대방동 로터리에서 매복 작전을 편 노량진경찰서 기동타격대와 2, 3분간 총격전을 벌인 뒤 계속 질주했다. 버스는 오후 2시23분경 유한양행 정문 5m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박고 멈췄다.
 
  버스에 타고 있던 난동범들은 버스 내부에서 터진 수류탄 폭발로 인해 거의가 현장에서 즉사하고 5명은 체포되었다. 이중 1명은 중상이었는데 병원 후송 후 사망했다. 경상을 입은 4명은 空軍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自爆이 아니라 수류탄 조작 실수』
 
  난동범들의 최후 순간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난동범들이 인질로 잡고 있던 버스 승객들을 내려보낸 후 빨치산들이 최후의 순간에 부르는 敵旗歌(적기가)를 합창하며 수류탄으로 自爆한 것으로 되어 있다. 승객들을 풀어 주고 나서 自爆하는 이 장면은 장엄한 곡조의 敵旗歌와 어울려 장중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난동사건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金斗萬 장군은 『난동범들이 탄 버스가 운전 부주의로 가로수를 들이박았고, 그 충격에 의해 한 난동범이 갖고 있던, 안전핀 뽑은 수류탄이 버스 바닥에 떨어지면서 터졌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실미도 부대 창설 멤버 金城鎭씨는 『버스 승객 중에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의 친척에게서 들은 얘기』라고 전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동범들은 버스 안에서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가지고 장난을 쳤답니다. 그런데 버스가 갑자기 가로수를 들이박으며 멈추자 수류탄을 놓쳤다는 거지요. 난동범이 갖고 있던 수류탄은 세열수류탄으로 15도 각도로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승객들은 버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겁니다』
 
  반란 사건 당시 공군 검찰부장으로서 수사를 담당했던 前 청와대 비서실장 金重權씨는 『영화 「실미도」는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말하며, 수류탄 自爆 장면을 그 하나로 꼽았다. 金重權씨 말이다.
 
  『수류탄 폭발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4명이 살았습니다. 영화에서는 버스에 타고 있던 난동범들이 갖고 있던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발 밑에 내려 놓은 후 그 위에 몸을 던져 自爆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생존자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생존자가 있는 것으로 미뤄 영화 장면처럼 죽은 것은 아닙니다』
 
 
 
 「실미도 전우회」 회원들 소설 「실미도」를 믿지 않아
 
  실미도에서 살아남은 기간병들은 보안유지 차원에서, 空軍에서 운영하는 항공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망자들의 시체도 전부 이 병원에 안치되었다. 中情과 空軍은 반란병 중에 도망자가 있을까봐 머리 수 확인에 최대한 신경 썼다. 총상을 입고 항공의료원에 입원한 梁東洙씨의 말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시체들의 이름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얼굴 형체가 남아 있는 시체는 신원 파악이 가능한데 3구의 시체가 수류탄 폭발 때 머리가 날아갔습니다. 신원 확인을 위해 머리 없는 시체들은 군화를 벗겼습니다. 군화 밑창에 작은 글씨로 이름을 써놓았기 때문입니다. 여름 날씨에 썩어 가는 시체에서 군화를 벗겼으니까 냄새가 지독했지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합니다.
 
  난동범 중 생존자 4명은 공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피고인으로, 저는 증인 자격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이들 4명은 1972년 3월경 사형되었습니다』
 
  ―소설 「실미도」의 작가 백동호씨는 『난동범 중에 3명이 살아 있고, 그중 한 명인 강인찬(설경구 扮)을 감옥에서 만나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주장하는데요.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나는 시체의 수를 일일이 확인한 사람입니다. 생존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난동범들은 범죄자였기 때문에 같이 죽고 같이 살자는 의리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실미도 전우회 회원들은 소설 「실미도」 내용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영화 「실미도」를 본 소감은….
 
  『40%는 사실에 근거했고, 60%는 허구 및 조작입니다. 특히 국가가 생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부분은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강인찬을 비롯해 훈련생 3명이 생존해 있다는 주장에 대해 金利泰씨는 『31명의 훈련생 중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두 명인데, 강인찬이란 이름은 없었습니다. 한 명은 서울역 암표장사 출신 강신옥이고, 다른 한 명은 강찬주인데 둘 다 훈련 중에 죽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 직후 丁來赫 국방장관과 金斗萬 공군 참모총장은 사표를 제출했다. 정규환 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난동 원인을 ▲공군 당국의 정보 특수기관에 대한 지휘 감독 소홀 ▲강압적 통솔 ▲특수범들의 욕구 불만 폭발 ▲복지 문제 소홀 등이라고 발표했다.
 
  국방부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空軍 정보참모부장 이주표 장군, 20특무전대 부대장 김계엽 대령, 同부대 주무 참모 이형복 중령, 同부대 인천 파견대장 한총 소령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中情 부장에서 물러난 金炯旭씨는 난동사건이 터지기 한 달 전,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李哲熙 中情 국제정보국장은 1974년 中情 차장으로 승진했다. 張志良 공군 참모총장은 난동사건 당시 駐에티오피아 대사로 근무 중이었다.
 
  1971년 8월27일, 국회 내무위와 국방위 합동 조사단에 의한 현장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며칠 전, 金利泰씨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난동사건 생존자를 만났다. 「오소리 작전」의 보안유지가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기 때문이다.
 
  軍 형무소에서 이들을 만난 金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2, 3일 후 월남으로 떠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백지로 돌리고 우리가 닦고 배운 실력을 월남전에서 마음껏 펼쳐 보자. 어느 누가 묻더라도 이제까지 겪어 온 우리들만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마라. 어떤 질문이든지 「군사보안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고만 대답하라.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다』
 
  이 호소 덕분인지 야당 의원들의 진상조사는 별 효과 없이 끝나고 4명의 생존 난동범은 군사재판 판결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와 함께 실미도는 의혹만 남긴 채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이 실미도가 세상에 첫 등장한 것은 1993년이었다. 난동사건이 일어난 지 22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1993년이란 시점을 택한 것은 살인죄 공소시효를 넘기기 위해서다.
 
  이때 실미도의 진실을, 실미도 부대원의 입장에서 밝히려 한 사람은 박영철이다. 박영철이란 이름은 1993년 「신동아」 지면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 박영철이 실미도 부대 창립 멤버이자 허준호 扮(분)의 실제 인물인 金利泰씨의 가명이다. 金利泰씨가 실미도에 관한 글을 쓰게 된 의도는 그가 기고한 기사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인용하면 이렇다.
 
  <여기 파도 험한 西海 외딴 섬, 조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푸른 하늘을 지키다가 봉오리채 사라져 간 젊은 보라매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남아 있는 그날의 전우들이 이 글을 새기노니 못다 이룬 뜻 뒤로 넘기고 부디 고이 잠드시라>
 
 
 
 『赤旗歌 가르친 적 없다. 그들을 죽이려 한 적 없다』
 
   부대 창설 때부터 난동사건 발생 때까지 실미도에 근무했던 공군 특수부대원들은 現 사무국장 李準暎씨 발의로 2000년 3월 실미도 전우회를 결성했다.
 
  영화 「실미도」 제작 소식을 들은 실미도 전우회는 康祐碩(강우석) 감독과 제작사인 한맥영화 측에 시나리오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 통보를 받지 못했다. 영화 「실미도」가 완성된 후 실미도 전우회 일부 회원은 시사회에 초대되었다. 李準暎씨는 영화 감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아무리 창작예술이라고 하지만 영화 「실미도」는 實話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관련자가 생존해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각색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훈련생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고,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실미도 영화에 「赤旗歌」가 두 번이나 등장하는데 우리는 훈련생들에게 「赤旗歌」를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北에 침투하기 때문에 「김일성 장군 노래」와 「인민군가」는 가르쳤죠. 영화를 통해 좌익 가요를 퍼뜨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30여 년 전의 南北 대치상황은 지금과는 판이한 상황입니다. 지금의 잣대로 그 시절을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국가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30여 년을 입을 다물고 살아왔습니다』
 
  李準暎 국장은 『실미도 근무 기간 중 우리 부대원들이 받지 못했던 생명 수당 등 각종 수당을 달라는 공문을 작년에 空軍 본부에 보냈으나 「시효가 5년인데 3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시효가 끝났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실미도 전우회 회장 金邦一씨에게 영화 소감을 물어보았다.
 
  ―실미도 보셨어요.
 
  『두 번 봤어요』
 
  ―실미도 사건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거부감이 들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내용이 왜곡되면 어쩌나 해서 무척 싫었죠』
 
  ―처음 본 느낌은 어떠셨어요.
 
  『떨리는 마음이었죠. 두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내용이 왜곡되었으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요. 긴장하면서 봐서 그런지 처음엔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했어요. 30~40% 정도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를 소설 「실미도」에서처럼 악마로 묘사하지 않고, 공작원들과 情을 쌓고 하는 것이 묘사돼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정말 그렇게 했으니까요. 인간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어서 한숨 놓았어요』
 
  ―영화에서 어느 부분이 다른가요.
 
  『비슷하다고 한 것은 기간병과 훈련생들 사이에 情이 쌓여 끈끈한 인간애가 있는 것과 훈련장면이에요. 나머지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픽션입니다. 우리 소대장들은 훈련생하고 같이 먹고 잤어요』
 
  ―같은 내무반에서요.
 
  『영화에서는 훈련생들만 한 내무반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9~10명씩 세 組로 나눠서 생활했고 소대장 세 명이 모두 각각의 組들과 같이 생활했어요. 먹는 것도 같이 먹고 같이 자고요. 그러니까 그들을 잘 알게 될 수밖에 없었죠』
 
  ―영화에서처럼 정말로 기간병들과 훈련생들 사이에 정이 쌓였습니까.
 
  『3년 넘게 같이 생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안 쌓일래야 안 쌓일 수가 없죠. 훈련은 훈련이고 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거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니까 가슴속으로만 느끼는 거죠. 워낙 기계들처럼 살았으니까요. 에피소드 같은 것은 따로 없었어요』
 
  영화 「실미도」에는 赤旗歌가 두 번에 걸쳐 나온다. 赤旗歌는 金日成이 무장투쟁 중 작사해서 보급한 軍歌라고 한다.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사수한다는 내용이다.이 노래는 大田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非전향 빨치산들을 통해 서서히 대학 운동권에 퍼졌고, 극좌적인 주장을 편 제헌의회 그룹(CA그룹)이 모임에서 즐겨 부르면서 널리 퍼졌다고 한다.
 
  ―「赤旗歌」라는 노래는 가르쳤나요.
 
  『아니에요. 인민군처럼 흉내를 내야 하니까 「김일성 장군」 노래는 가르쳤죠. 영화를 보면서 저 노래가 왜 들어갔는지 의아했어요. 「김일성 장군」 노래를 들려줄 수 없으니까 대신할 노래로 썼나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가사도 그렇고, 그 노래가 들어간 점에 대해서 저는 부정적입니다. 그런 노래가 들어갈 상황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애국가도 영화에서와 같이 축 처진 멜로디로 부르지 않았어요. 엄연한 애국가 멜로디가 있는데요. 그 부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강우석 감독이 나이가 어리니까 옛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넣었나 하는 생각도 했지요』
 
 
 
 대한민국을 깎아 내리고 돈을 버는 영화
 
  金淳雄 교육대장의 아들은 서울 모 대학 박사다. 그는 현재 「실미도 전우회」 명예 회원이다. 그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서른두 살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오소리」란 일을 하는 것은 알았지만 실미도란 것은 아버지 전사 후 처음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사건을 잊기 위해 아버지 사진을 모두 불태우고 저와 제 누나를 기르며 32년간 혼자 힘들게 살아오셨다.
 
  영화가 허구라는 것은 나도 안다. 이 허구를 관객들이 진실이라 믿어버리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강우석 감독한테 死者의 명예를 훼손하면 안 되니까 시나리오를 보여 달라고 내용증명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영화를 만들 때 그 사건에 관련된 유가족들을 한 번이라도 만나서 상의했더라면 나도 감독의 입장을 이해했을 것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것이 아니라 흥행을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유가족을 두 번 죽인 셈이다』
 
  기자는 강우석 감독에게 두 가지를 질문했다. 국가가 실미도 훈련생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사실에 입각한 것인지, 그리고 훈련생들이 과연 赤旗歌를 불렀는지였다.
 
  이에 대해 강우석 감독은 이노기획을 통해 답변했다.
 
  『훈련생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에 따른 것이다. 「김일성 장군 노래」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영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赤旗歌」를 차용해서 선택했다. 훈련생들은 「赤旗歌」를 배우지 않았다』
 
  영화감독의 상상력이 대한민국을 마피아보다도 못한 의리 없는 집단으로 만든 셈이다. 대한민국은 요사이 이리저리 뜯어 먹히고 능욕되는 가운데 변호사도 구할 수 없는 지경이다. 대한민국을 깎아 내리면 돈도 벌고 인기도 얻는 세태 속에서 「영화 실미도」를 「사실 실미도」라고 믿는 이들이 많아진다.
 
  반란 사건 당시 피교육생의 총에 사망한 공군 첩보부대 소속 기간병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空軍 묘역에 안장돼 있다.●
 
 
 
 
  당시 情報官의 手記 - 부상당한 실미도 북파 공작원이 남긴 마지막 말
 
  그는『우리는 당당한 대한민국 공군』이라고 말했다
 
  ― 사살명령을 감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은 없었다 ―
 
  李 明 山 북한 전문가
 
 
  1971년 8월23일 필자는 실미도 사건현장에 있었다. 필자는 역사 속에 숨어 버린 「실미도 사건」이 영화로 제작되어 세상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보았다.
 
  영화 「실미도」는 작품으로 구성하기 위해 사실을 가감하였는지는 모르나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영화에는 대방동에 있는 유한양행 앞에서 출동한 군인들과 대치하여 버스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되자 그들과 교전을 했고, 생존자들이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버스에 불이 나서 폭발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필자가 목격한 바로는 그때 유한양행 앞에서 버스의 시내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군인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군인들과의 교전도 없었다.
 
  버스가 유한양행 앞에서 멎은 이유는 대방동 파출소 앞에서 맞은 경찰의 총탄에 우측 앞 타이어가 펑크 나서 버스가 우측으로 쏠리면서 가로수를 들이받았기 때문이었다. 버스 주변에는 인근에서 몰려든 수십 명의 민간인들이 버스를 에워싸고 있었고, 현역군인이라고는 지나가던 몇 사람이 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장교 한 사람은 무전기로 어디에다 상황을 열심히 보고하고 있었다. 버스 주변에는 버스 안에서 흘러내리는 선혈과 죽은 사람들의 파열된 내장에서 나오는 지독한 냄새로 호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은 살아 있어요』
 
  필자는 사건 당일 라디오방송을 들은 순간부터 사건 현장에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정보부대에 근무하던 필자는 사건 당일 防諜業務上으로 만나고 있던 치안본부 李모씨와 함께 유한양행 앞으로 달려가 민간버스 한 대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버스 안에는 건장한 청년 20여 명이 수류탄이 터지면서 죽어 있었는데 머리와 사지가 절단된 사람, 하체가 파열된 사람, 내장이 쏟아져 나온 사람 등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아직도 숨이 떨어지지 않은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처절한 모습을 우리는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었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육군 소령 한 사람이 권총을 꺼내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쏘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신분을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그대로 저들이 북한에서 내려온 무장 특공대로만 알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더 이상 파악할 길이 없어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한 아이가 필자에게 『한 사람은 살아 있어요』라고 했다.
 
  『어디 있느냐?』
 
  『부상을 많이 입었는데 누가 그 사람을 차에 싣고 영등포로 갔어요』
 
  치안본부 李씨와 나는 급히 영등포로 달려갔다. 영등포구청을 지나자 바로 옆에 있던 적십자병원 입구에는 6관구사령부 헌병대의 군인들이 기관단총을 하늘에 치켜세우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으며, 벌떼같이 모여든 민간인들의 접근을 제지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신분증을 제시하고 1차 경계망을 통과했다. 응급환자실 앞에는 소속을 알 수 없는 민간인들과 권총을 찬 육군 장교들이 陣을 치고 우리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때 필자는 신분증을 제시하지도 않고 『당신들은 어디서 나온 사람들이오? 관등성명을 적어서 나에게 제시하시오!』 하고 호통을 치니 아무도 필자의 신분을 묻는 사람도 없었고 눈치를 보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
 
  치안본부 李씨의 등을 치면서 『따라오시오!』했다. 환자 침상에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숨이 깔딱거리며 다 죽어가는 청년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옆에는 육군 중령 한 사람이 권총을 환자에게 대고 『소속이 어디야? 임무가 뭐야? 숨이 끊어지기 전에 말을 해!』하며 호소하고 있었다.
 
  환자는 『빨리 쏴라! 말할 수 없다』고 외쳤다.
 
  그때 필자는 『이게 뭐하는 짓이오. 잠깐 비키시오』하고 조용히 말했다. 중령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놈의 생명은 30분 이상을 지탱하지 못합니다』했다.
 
  필자가 환자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손을 꼭 쥐고 그의 눈을 진심을 다해 응시했다. 그도 나의 눈을 응시했다. 나의 소속을 물었다.
 
  『소속이 어디냐가 중요하지 않다. 이 긴박한 시간에 중요한 것은 나와 당신의 진심이다. 숨을 거두기 전에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라』
 
  환자가 긴 한숨을 쉬고 나서 『당신과는 말이 통할 것 같으니 우리의 억울함을 다 들어 주시오.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 주시오』했다.
 
  그리고 치안본부 李씨가 우리의 대화를 기록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공군』
 
  『우리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특공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공군입니다』
 
  그가 진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968년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 직후 대한민국의 모 기관과 공군이 합동으로 구상한 극비의 공작으로, 김신조 부대와 똑같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평양에 파송하고 金日成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공군의 모 특수부대는 전국의 형무소를 찾아다니며 신체 건장하고 강인한 사형수 등을 만나 그중 31명을 선발했다.
 
  저들은 어차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조국을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기회로 어떤 비밀임무에 성공하면 과거의 모든 범죄기록을 말소할 것이며, 떳떳하게 인간다운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가족과 더불어 여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재정보장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저들은 기꺼이 동의했다.
 
  저들은 인천 송도 앞 무인도인 「실미도」에 기지를 세우고 3년4개월간 지옥훈련을 받았다. 혹독하고 초인간적인 훈련을 다 감수하였다. 그러나 훈련기지의 급식이 점점 나빠지고 대원들은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양 침투 임무는 꿈 같은 얘기로 사라지고 훈련요원들의 횡포는 점점 심해졌다. 『네놈들은 인간쓰레기야, 우리 사회의 무용지물이야』하면서 저들을 학대했다고 한다.
 
  대원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주어진 임무에 성공하고 나서 떳떳하게,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던 꿈이 사라지고 허탈 속에 빠졌으며, 결국 특공대로 선발되기 이전의 난폭하고 세상만사를 다 체념한 사형수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하루는 『우리가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우리가 청와대로 쳐들어가자. 朴正熙 대통령에게 우리의 일을 알리고 그분의 입에서 직접 우리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들어보고 결판을 내자』고 합의하고 폭동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생존자와의 대화는 약 7분간 진행되었고,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북한의 무장 게릴라로만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이 한국 사람이란 사실과 그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고 나서 이 일을 누구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丁來赫 국방장관이었다.
 
  『장관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엄청난 일을!』
 
  『무엇을 알아냈습니까?』
 
  필자와 丁來赫 국방장관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단 둘이서 얘기를 했다. 약 7분간 심문을 한 사실과 생존자가 진술한 내용을 그대로 브리핑해 주었다.
 
  그 순간 국방장관의 얼굴빛이 짙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나의 소속과 이름을 메모지에 적은 다음, 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심각한 어조로 부탁을 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해 주시오』
 
  그 무렵 국군 보안사령부의 보안처장 김교련 대령이 도착했다. 丁來赫 국방장관과 몇 마디 귓속말을 한 후 그 부상자를 싣고 병원을 떠났다. 그 부상자는 영등포 적십자병원을 떠난 지 약 30분 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필자는 丁來赫 국방장관이 사표를 제출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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