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링컨은 미합중국을 통일하고 노예를 해방했을 뿐 아니라, 경제·교육·안보 대통령이기도
⊙ 내전 이후 국민 통합 이룩해 미국을 도약시킨 링컨의 리더십
⊙ 성실·정직함으로 ‘레일 스플리터’ ‘정직한 에이브’ 별명
⊙ 평저선 타고 남부에 갔다가 노예 매매 현장 목격하고 충격 받아
⊙ 일리노이주 주도 스프링필드의 정치 명문 에드워즈家 인척 메리 토드와 결혼
⊙ 연방하원의원 시절 미-멕시코 전쟁 비판… ‘용기 있는 정치인’으로 기억돼
⊙ 노예제 갈등 속에서 온건한 노예제 해방론 취해… ‘워싱턴DC 노예 해방’ 제안
韓佑成
1956년생.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나이트 펠로(Knight Fellow) / 《미주한국일보》 기자, (사)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 (사)김영옥평화센터 이사장, 육군 정책발전자문위원, 공군 정책발전자문위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역임. 現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 저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 내전 이후 국민 통합 이룩해 미국을 도약시킨 링컨의 리더십
⊙ 성실·정직함으로 ‘레일 스플리터’ ‘정직한 에이브’ 별명
⊙ 평저선 타고 남부에 갔다가 노예 매매 현장 목격하고 충격 받아
⊙ 일리노이주 주도 스프링필드의 정치 명문 에드워즈家 인척 메리 토드와 결혼
⊙ 연방하원의원 시절 미-멕시코 전쟁 비판… ‘용기 있는 정치인’으로 기억돼
⊙ 노예제 갈등 속에서 온건한 노예제 해방론 취해… ‘워싱턴DC 노예 해방’ 제안
韓佑成
1956년생.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나이트 펠로(Knight Fellow) / 《미주한국일보》 기자, (사)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 (사)김영옥평화센터 이사장, 육군 정책발전자문위원, 공군 정책발전자문위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역임. 現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 저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 에이브러햄 링컨 사진=퍼블릭 도메인
“링컨의 이름은 앞으로 수천 년이 흘러도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와 너무 가까운 시대에 살기 때문에 그의 위대성을 제대로 모른다. (중략) 그의 우월성은 그의 독특한 도덕적 힘과 위대한 인품에서 스스로 빛난다. 그는 많은 고난과 경험을 통해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가 사랑임을 체득했다. (중략) 그도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범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동기인 홍익인간에 진실했다. 그는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받아들이면서 위대해지려 했던 인간이었다. (중략) 링컨은 미국보다 위대했으며, 모든 대통령을 다 합친 것보다 위대했다. 왜? 그가 자신을 사랑했듯 원수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자신 속에서 세상을 보려 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자신을 보려 했던 세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담백해서 위대했고, 자비로워서 고귀했다. 링컨은 진리와 정의, 박애와 자유의 표상이다. 사랑은 그의 삶의 토대였다. 그 때문에 그는 불멸하며 (하략)”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년)에 대한 톨스토이의 평가다. 이 발언은 그가 역시 러시아 작가인 스타켈베르그 백작과 가진 대담에서 한 것이다. 스타켈베르그는 링컨 탄생 100주년을 맞아 톨스토이의 글을 받으러 갔으나 쇠약해진 톨스토이는 글 대신 말을 남겼고, 스타켈베르그가 그의 발언을 1909년 2월 7일 자 《뉴욕 월드(New Work World)》에 기고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세월은 톨스토이의 평가를 뒷받침한다. 금년 7월 4일로 건국 250주년을 맞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는 여전히 링컨으로 꼽힌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링컨이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합중국의 통일을 회복한 ‘통일 대통령’이며, 노예 해방으로 390만 노예와 그 자손들에게도 자유를 안겨 준 ‘인권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전쟁 와중에도 자영(自營)농지법 제정, 대륙횡단철도 건설, 달러화 채택, 신기술 지원 등 미국이 경제적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한 ‘경제 대통령’, 취임 당시 2만 명도 안 되던 미국 육·해군을 100만 대군으로 키운 ‘안보 대통령’, 공립 고등교육 기반을 구축한 ‘교육 대통령’이기도 했다.
링컨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이라곤 1년도 받지 못한 흙수저였으나, 의지와 성실만으로 워싱턴 기득권을 헤치고 대통령이 된 후 국난을 극복하고 세계사의 흐름까지 바꾼 인물이다. 그는 사랑과 공감력에 입각한 경이로운 리더십의 소유자였으며 천부적 정치가이자 비상한 전략가였다. 링컨의 리더십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통일을 회복하는 과정, 이것과 긴밀히 연계된 노예 해방을 통해 가장 빛났다.
남북전쟁은 건국 이래 오늘날까지 미국이 당면했던 최대의 국가적 위기였다. 내부적으로는 국가가 둘로 쪼개진 채 전쟁까지 벌어지고, 외부적으로는 영국·프랑스·스페인이 개입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이었다. 링컨 정부를 지지한 열강은 러시아·독일 정도였다. 남북전쟁은 대규모 국제전은 아니었으나 외세가 깊이 개입했다는 점에서는 한국전쟁과도 유사하다. 미국은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면서 열강의 남부 승인을 막고 종전(終戰) 후 열강이 그 대가(代價)를 치르게 했다.
한반도 통일과 관련해 미국을 보는 것도 의미 있다. 한국에서는 한반도 통일 모델로 독일·베트남·예멘이 거론된다. 그러나 독일은 전쟁 없이 통일을 이뤘고, 베트남은 전쟁을 거친 통일 후 반대파를 숙청 또는 추방했으며, 예멘 통일은 지금껏 내란으로 이어지는 데서 보듯 불완전하다. 4년 동안 민간인 사망자를 제외한 군인 전사자만 70만 명 안팎에 달하는 동족상잔(同族相殘) 전쟁까지 치렀으면서도 종전 후 반대파 숙청 없이 국민을 통합해 세계 최강국으로 발전한 미국이야말로 중요한 모델이다.
미국의 발전 단계는 3단계로 볼 수 있다. ▲1단계(1776~1860년): 독립과 영토 확장기. 대서양 국가로 출발한 미국은 일관성 있는 서진(西進) 정책으로 태평양 국가로까지 확장됐고, 일본 개항이 보여 주듯 동아시아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2단계(1861~1916년): 남북전쟁을 거쳐 통일을 회복하고 국민을 통합해 각종 개혁과 부국강병을 이루는 시기. 미국은 이 시기에도 일관성 있는 서진 정책으로 알래스카·하와이·필리핀까지 손에 넣어 서태평양까지 영향권에 두기 시작했다. ▲3단계(1917~현재): 1·2차대전 승리를 발판으로 세계의 패권국(覇權國)이 된 시기.
이렇게 보면 미국은 2단계를 잘 보내서 3단계에 진입했으니, 2단계야말로 미국의 존립과 흥망을 가르는 시기였다.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와 함께 시작된 2단계에 등장한 구세주 같은 지도자가 공화당 대통령 1호 링컨(16대)이었다. 이때 공화당이 현재의 공화당이고, 이때 민주당도 현재의 민주당이다. 남북전쟁이라는 고통을 경험한 미국인들은 링컨을 시작으로 2단계 마지막이자 3단계 첫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28대·민주)이 등장할 때까지 52년(1861~1913년) 중 44년 동안 공화당 정권을 택했다. 2단계는 명실상부한 공화당 전성시대였다. 당시는 공화당이 진보(進步)였으니, 이 시기는 진보파 전성시대였던 셈이다. 미국은 이 시기에 많은 혁명적 개혁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발돋움했다.
미국에서 정치적 보수(保守)는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권력 균형을 중시하면서도 지방분권을 소중히 여긴다. 이것은 미국 역사와 직결된다. 건국 당시 미국인들은 영국 왕정(王政)의 독재가 싫어 독립했으니 연방정부가 왕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때는 각 주(州)가 하나의 독립국이었다.
건국 전부터 노예는 중요한 개인 재산이었기에 건국 후에도 노예 문제는 연방헌법에 따라 주정부 소관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이 같은 헌법적 근거를 내세우며 노예제를 옹호한 보수였다. 노예에 대한 견해차가 남북전쟁으로 이어지고, 노예 폐지를 주장하는 진보파가 승리하면서 이후 반세기 미국 정치는 진보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링컨은 전쟁 중에 군(軍) 통수권을 앞세워 노예 해방 선언을 내놨고, 이후 개헌으로 노예제 폐지를 명문화했다.
80년 이상 분단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 양극화로 가중되는 한국의 내적 혼란도, 미중(美中) 패권 경쟁으로 눈앞에 닥치고 있는 외적 위기도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최고의 리더십과 역할 모형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한 때에 최대의 국난을 극복하고 미국과 인류를 새 시대로 이끈 링컨의 리더십과 내전을 치르고도 국민 통합에 성공해 패권국으로 발전한 미국의 경험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준다. 아울러 링컨 시대를 전후한 미국의 태평양 진출 역사를 살펴보면,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미국의 나아갈 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776년 13개주로 이뤄진 대서양 국가로 출발한 미국은 1801년 취임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3대)부터 서진 정책을 시작, 2년 후 프랑스에 1500만 달러를 주고 루이지애나를 매입하면서 영토가 2배로 확장됐다. 당시 루이지애나는 미국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오늘날 루이지애나주를 포함하는 중부 지역 전체였다. 미국은 이후로도 대통령의 당적(黨籍)과 상관없이 일관성 있게 서진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은 1846년 영국과 협상으로 오리건을 확보했고, 1848년 미–멕시코 전쟁 승리를 앞세워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주고 캘리포니아 등을 매입해 드디어 영토가 태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전쟁에서 이겼으니 점령하면 그만이지 매입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았으나 제임스 포크 대통령(11대)은 매입이 깨끗하고 뒤탈이 없다며 매입으로 마무리했다. 이로써 국민이 4년마다 투표로 최고 권력자를 뽑는 이상한 나라, 대서양 국가이면서 태평양 국가인 거대한 나라가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이 무렵 백인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연결되는 북미 대륙 전체를 영토로 삼는 위대한 나라를 건설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선민(選民) 사상을 갖고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것을 ‘명백한 천명(Manifest Destiny)’이라 불렀다. 이런 믿음은 보기에 따라서는 인종 차별적이고 우매한 미신(迷信)이었으나, 미국인들에게 확실한 방향성이 있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미국의 태평양 진출
매슈 페리 제독. 사진=퍼블릭 도메인1850년 취임한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13대)도 반세기 동안 이어진 서진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필모어는 취임하자마자 캘리포니아를 준주(準州) 단계 없이 직접 연방에 가입시키는 법안에 서명하고, 2년 후 매슈 페리 제독에게 함대를 끌고가 일본을 개항시키라고 명령했다.
페리는 이 과정에서 대만(타이완)에 들러 기선 연료용 탄광이 있는지 조사했다. 이때 페리는 “스페인이 쿠바를 활용해 남북미로 영향력을 확대했듯 미국도 대만을 활용할 수 있다. 대만 점령은 열강의 주요 해상 교통로 독점에 대항하는 데도 유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으나, 동아시아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한 대만 점령이 이미 이때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이다.
페리가 함대를 이끌고 미국을 떠나기 몇 달 앞서 나온 윌리엄 수어드 연방상원의원의 의회 연설도 태평양과 아시아에 대한 당시 미국의 관심을 보여 준다.
“해군은 포경(捕鯨)산업을 돕기 위해 베링 해협 인근 해역을 측량해야 한다. 군함이 날씨 관계로 북극해에 있지 못할 때는 아시아 바다를―특히 중국과 일본에 접근할 수 있는 바다를―탐사하고 해도(海圖)도 제작해야 한다. 미국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과 이민이 현재 미국 동부와 유럽 사이의 무역과 이민처럼 중요해지는 날이 언젠가 온다.”
수어드는 나중에 링컨의 국무장관으로서 남북전쟁 승리와 노예 해방을 견인하고, 링컨 사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기는 인물이다. 페리는 이듬해인 1853년 일본 개항을 성공시켰다.
면화 재배와 흑인 노예
19세기 전반 미국의 또 다른 특징은 흑인 노예가 폭증하고 이에 따른 문제도 심각해졌다는 점이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는 만행은 세계 도처에서 수천 년 동안 자행됐다. 북미 대륙 노예도 미국 건국 전부터 있었다. 원주민이 원주민을, 원주민이 백인을, 백인이 원주민을 노예로 삼았다.
처음 북미 대륙 노예는 원주민이 많았으나 다른 대륙에서 백인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으로 원주민이 격감하면서 흑인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북미 대륙 흑인 노예의 시작은 1619년 스페인에 의해 끌려온 약 20명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스페인이 멕시코로 향하던 포르투갈 노예무역선에서 빼앗아 북미로 데려온 노예들이다. 미국 정부 인구 통계에 따르면,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 해인 1790년 노예가 약 70만 명,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던 1860년 노예가 약 400만 명이었다. 노예가 이처럼 70년 만에 330만 명이나 폭증한 이유는 조면기(繰綿機) 때문이었다.
미국인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가 1793년 만든 조면기는 면화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단순한 기계였지만, 면화 생산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공정(工程)을 쉽게 했다. 조면기 덕택에 생산량이 1000배 가까이 늘었다.
세계적으로 양모 대신 면직물로 의복 혁명이 진행되고 있어 면화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면으로 만든 의류를 세계로 수출하던 영국은 필요한 면의 약 80%를 미국 남부에서 수입했다. 미국 남부 주요 산업이 담배 생산에서 면화 생산으로 바뀌면서 면화 농장의 노동력 수요가 급증했고 흑인 노예로 충당됐다. 미국의 면 생산량은 조면기 발명 때 50만 파운드에서 1860년 23억 파운드를 기록하면서 그해 미국 수출의 절반 이상을 면이 차지했다. 그사이 노예 가격도 300달러에서 2000달러 이상으로 뛰었다.
미국의 노예 제도
채찍질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흑인 노예. 이 사진은 남북전쟁 전 노예제 반대 여론을 일으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이 유예기간이 끝나자 제퍼슨 대통령 주도로 1807년 노예수입금지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노예 수입을 불법화했지만, 국내의 노예 거래는 금지하지 않았다. 노예 매매로 가족이 생이별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예 수입이 금지되자 노예 소유주는 여성 노예를 성폭행하거나 노예 사이의 성행위를 강제해 출산을 강요했다. 노예들은 피임 또는 유산(流産)으로 저항하고 태업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끔찍한 형벌을 각오해야 했다.
인류사에 노예의 역사가 깊은 만큼 노예의 저항의 역사도 깊다. 가장 적극적인 저항으로 노예 소유주가 제일 두려워한 방식은 무장 반란이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노예 무장 반란은 카리브해 프랑스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들이 일으킨 아이티 혁명(1791~1804년)으로, 이에 따라 세워진 나라가 아이티 공화국이다. 북미에서도 10명 이상의 노예가 동참한 무장 반란만 250건 이상이었다.
“북극성을 따라가면 자유가 있다”
무장 반란보다는 소극적이지만 탈출도 죽음을 각오한 저항 방식이었다. 미국사에서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란 실제로 땅밑 철도(지하철)가 아니라 노예들의 탈출로다. 건국 후부터 북부가 점차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다는 소식이 남부에도 퍼지자, 북부로 도망가 살거나 캐나다까지 가려고 남부를 탈출하는 노예들이 늘었다. 이들은 “북극성을 따라가면 자유가 있다” “북두칠성을 따라가면 자유가 있다”고 되뇌며 죽음을 각오한 탈출에 나섰다. “북두칠성을 따라가라”는 그때 노예들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의 후렴이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나선 노예들의 탈출로와 이들을 숨겨 주고 재워 주는 안가(安家)를 묶어 지하철도라 불렀다.
지하철도는 노예가 있는 지역 여기저기서 생겼지만, 지하철도라는 용어는 1830년대 중반에 생겨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이 나오는 1862년까지 계속됐다. 지하철도를 이용해 자유를 찾은 노예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탈출하는 노예를 ‘승객’,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을 ‘차장’이라 불렀다. 차장들 대부분은 먼저 자유를 찾은 노예들이었으나 백인들도 많았다.
겉으로는 국토가 2배가 되는 등 빠르게 성장했으나 속으로는 노예 제도라는 치명적 암(癌)이 퍼지고 있을 때, 변방의 농가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링컨은 아버지 토머스 링컨과 어머니 낸시 행크스 링컨 사이 2남 1녀 중 장남으로 1809년 켄터키주 시골 통나무집에서 출생했다. 가난한 농부이자 목수였던 아버지는 링컨이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아버지가 장남에게 할아버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할아버지는 버지니아주 민병대 대위로 독립전쟁 참전 용사였다. 전쟁이 끝나고 켄터키로 이주한 할아버지는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요새 근처에서 땅을 일구다 숲에서 날아온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장남(14세)은 총을 가지러 집으로 뛰고, 차남(12세)은 도움을 청하러 요새로 뛰고, 막내(8세)는 시신을 지켰다. 집에서 장총을 챙기는 장남의 눈에 숲속에서 나온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 막내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원주민이 동생까지 죽이려는지 어디론가 끌고가려는지 모르겠으나 군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느낀 장남은 침착하게 장총을 겨냥해 원주민을 사살하고 막내를 구했다. 그 막내가 링컨의 아버지다.
독립전쟁 직후 미국이 직면한 발등의 불 하나가 원주민 문제였다. 원주민에게 백인은 자꾸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터전을 위협하는 적이었고, 백인에게 원주민은 독립전쟁 때 영국의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으며 연합전선을 폈기 때문에 미국의 독립과 발전을 막는 적이었다.
둘의 갈등은 전과는 차원이 달라져 있었다. 링컨 할아버지의 죽음은 당시 미국 개척자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천사 같은 나의 어머니’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할머니는 혼자 어렵게 다섯 자녀를 키워야 했다.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버지는 평생 문맹(文盲)이었다. 아버지는 농사도 짓고 목수 일도 했으나 그나마 조금씩 모은 땅을 토지 소유권 분쟁으로 날리고 나중에는 시력까지 나빠졌다.
이 때문에 링컨은 어려서부터 농사나 막일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아버지는 어린 링컨을 일손이 필요한 집에 보내 품삯을 벌어 오게도 했다. 링컨은 항상 엄하고 일만 많이 시키던 아버지로부터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아버지가 교육에 관심이 없고 가난한 개척자 자녀들을 위한 교육 환경도 열악해 링컨이나 두 살 위인 누나나 학교에 다닌 기간은 1년도 안 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반대였다. 본인도 무학(無學)이었으나 문맹은 아니었던 어머니는 링컨이 다섯 살 때부터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어머니는 매일 성경을 펴놓고 가족들이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도록 했는데 링컨도 일곱 살 때부터는 자기 차례가 되면 큰소리로 읽었다. 틈만 나면 책을 읽는 링컨을 보고 아버지는 게으르다고 야단쳤지만, 어머니는 독서를 권장했다.
링컨이 극심한 가난과 힘든 노동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은 것도 어머니 덕택이었다. 어머니는 소년 링컨에게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었다. 링컨은 훗날 “오늘날 나의 모습도,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습도, 모두 천사 같은 나의 어머니로부터 왔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에 대해서는 평생 깊은 애정과 그리움을 간직했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느끼게 해 준 새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우유병(牛乳病)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유병은 백사초에 중독된 소나 양의 젖·유제품·고기를 먹어 걸리는 치명적 질환이다. 백사초에 트레메톨이라는 독성 유기화합물이 있기 때문인데, 동부 출신 개척자들은 처음에는 이 풀에 대해 잘 몰라 많은 사람이 우유병으로 죽었다.
아홉 살 소년 링컨은 아버지를 도와 어머니의 관을 짰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불과 두 살 위인 누나 새러가 어머니처럼 링컨을 챙겼다. 막내가 태어나자마자 숨졌기 때문인지 두 남매는 유달리 가까웠다.
어머니가 사망한 이듬해 아버지는 새러 부시와 재혼했다. 그녀에게는 3년 전 사별한 첫 남편과 사이에 1남 2녀가 있었는데 자신의 친자식과 새 남편의 자식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녀는 특히 링컨을 끔찍이 아껴 자신은 무학이었지만 링컨의 친모가 그랬듯 링컨의 독서를 못마땅해 하는 남편을 가로막고 독서를 권장했다. 링컨은 새어머니가 가져온 《이솝 이야기》 《천로역정》 《로빈슨 크루소》와 성경을 외우다시피 했다. 독서광 링컨의 책 사랑은 셰익스피어, 에드거 앨런 포 등으로 확대돼 미국에서 유일한 시인(詩人) 대통령 탄생으로 이어진다.
훗날 링컨은 계모를 두고 “내가 처음으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느끼게 해 준 분”이라 감사했다. 계모는 링컨을 두고 “천 년에 한 번 나올 아들”이라고 극찬했다. 링컨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막내아들 이름은 아버지를 따라 지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의 생계를 돌봤다.
두 어머니의 사랑과 애정이야말로 링컨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러나 친모는 34세에 병사했고, 그렇게 링컨을 아꼈던 누나도 20세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링컨이 가족을 떠나 살면서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앤 러틀리지도 22세에 장티푸스로 죽었다. 링컨 입장에서는 9살 때 친어머니가, 18살 때 누나가, 26살 때 첫사랑이 영원히 떠났다.
링컨도 세 번째 죽음까지는 감당하기 어려워 자살을 생각했던 듯, 친구들은 링컨 주변에서 흉기로 쓸 만한 물건을 모두 치웠다. 남북전쟁 때 링컨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 우뚝 서 장병들을 격려해, 미국 역사상 실전(實戰)이 벌어지는 전쟁터에 선 유일한 현직 대통령으로 남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나든 링컨의 사생관(死生觀)이나 오랜 세월 그를 괴롭힌 우울증은 8~9년 주기로 찾아온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도 무관할 것 같지 않다.
자유와 풍요를 꿈꾸며 신세계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첫발을 디딘 지 150~200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가난으로 질병으로 전쟁으로 원주민과 갈등으로, 낯선 자연환경에 대한 무지로··· 죽음과 함께 사는 것이 개척자들의 삶이었다. 링컨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링컨 가문이 실패한 이민자는 아니었다. 링컨의 선조는 메이플라워호가 북미에 닻을 내리고 17년 후인 1637년 영국에서 왔다. 링컨 집안은 제퍼슨 행정부의 법무장관, 매사추세츠 주지사, 메인 주지사 등 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링컨의 친할머니는 해리슨 가문 출신이다. 해리슨 가문은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9대)과 그의 손자인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23대)을 배출한 미국의 대표적 정치 명가다. 이 때문에 해리슨 가문은 이들과 링컨까지 대통령 3명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노예 매매 현장을 목격하다
미국 버지니아에서의 노예 거래 모습. 링컨은 남부에서 노예 거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사진=퍼블릭 도메인링컨은 인디애나주로 이사한 다음에도 가난을 떨치지 못한 아버지를 돕기 위해 온갖 일을 했다. 농사는 기본이고 울타리 제작용 통나무를 자르기도 했다. 이런 일꾼은 ‘레일 스플리터(rail splitter)’로 불렸는데 이 경력은 훗날 대선 때 ‘흙수저 링컨’의 상징이 됐고, 오늘날 사전에도 나오는 링컨의 별명으로 굳어졌다.
링컨은 오하이오강이나 미시시피강을 다니는 평저선(平底船) 운항도 했다. 평저선은 바닥이 넓고 평평해 수심이 얕은 강이나 운하에서 사용되는 배다. 평저선은 시골뜨기 링컨을 넓은 세상으로 데려다줬다. 17살 때 오하이오강 평저선도 그랬지만, 19살 때 미시시피강 평저선은 더 그랬다.
아버지가 다시 일리노이주로 이사를 결정하자 아버지와 함께 통나무집을 지은 링컨이 살림살이를 실은 소달구지를 몰고 이사해 땅을 일구는 동안 21살이 됐다. 법적 성년이었다. 당시 법은 미성년자의 모든 소득이 아버지 권리였다. 링컨은 막상 성년이 됐지만 낯선 땅에 새로 이사한 가족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가족의 정착을 도우며 1년쯤 지났을 때 미시시피강 평저선을 운항하겠냐는 제안이 또 들어왔다. 이제 집을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한 링컨은 제안을 받아들었다.
미시시피강은 북미 대륙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미국을 동서로 양분하면서 멕시코만을 통해 대서양과 연결된다. 미국 농업의 젖줄이면서 교통·수송·무역의 동맥이라 남북전쟁 때 양측은 미시시피강 장악을 놓고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야채를 가득 실은 평저선을 타고 남부에 간 링컨은 생전 처음 노예 매매 현장을 목격했다. 부자(父子)가 헤어지고 모녀가 찢어지는 생이별을 보며 링컨은 생각했다.
‘노예 제도가 잘못이 아니면 세상에 잘못은 없다.’
블랙호크 전쟁 참전
평저선 운항을 마친 링컨은 가족을 떠나 일리노이주 뉴세일럼으로 향했다. 스물두 살에 빈손으로 뉴세일럼에 도착한 링컨은 잡화상 점원이 됐는데, 어느 날 손님에게 거스름돈 몇 센트를 덜 줬다는 것을 알고 몇 km를 쫓아가 손님에게 줬다. 이 일로 사람들은 그를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이브는 에이브러햄의 애칭이다. ‘정직한 에이브’는 훗날 ‘레일 스플리터’와 함께 대통령 후보 링컨의 상징이 됐다. 링컨은 돈벌이를 위해 마을 우체국장도 하고 기하학과 삼각법을 독학해 자격증을 따서 토지측량사도 했다.
이듬해인 1832년 원주민 추장 블랙호크가 전사(戰士) 1100명을 이끌고 일리노이와 미시간에서 백인들을 공격했다. 수개월간 계속된 블랙호크 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리노이주 민병대에 지원한 링컨은 중대원들에 의해 대위로 선출됐다. 링컨의 첫 선출직 공직이었다. 당시 민병대는 병사들이 장교를 선출했다.
계약된 복무 기간 30일이 지나자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지만, 링컨은 자원해서 복무를 연장했다. 옛 중대가 계약 만료로 해체돼 링컨은 다른 중대에 배속됐는데 그곳은 이미 장교가 정해져 있었다. 계급에 연연하지 않은 링컨은 흔쾌히 이등병이 됐다. 다시 30일이 지나자 링컨은 또 지원했다. 이번에도 이병이었다. 링컨은 이 복무를 끝으로 민병대를 떠났다. 이로 인해 링컨은 계급이 대위와 이병이라는 독특한 군 경력을 갖게 됐다.
링컨은 원주민과 직접 싸운 적은 없으나, 블랙호크의 위치를 파악하는 첩보중대에 있기도 했고 전사자 매장도 했다. 이로 인해 링컨은 전장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급조된 군대는 동기 부여 없이는 정예군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군사 정보가 항상 정확하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 모두는 링컨이 통수권자로서 남북전쟁을 이끌 때 요긴하게 쓰일 소중한 자산이었다.
스튜어트와의 만남
링컨의 친구 존 토드 스튜어트. 사진=퍼블릭 도메인링컨이 의원이 되자 이미 변호사였던 스튜어트가 링컨에게 변호사 자격을 따라고 권하면서 책도 빌려줬다. 바쁜 의정 활동 속에서도 링컨은 촛불을 켜고 독학해 2년 후 변호사가 됐다. 이때부터 축적된 링컨의 법률가적 시각은 훗날 노예 해방과 관련해 역사를 바꾸게 된다. 스튜어트는 3년 후 연방하원의원이 됐는데 링컨도 후에 그 길을 걷는다. 스튜어트의 영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튜어트는 링컨이 변호사가 되자 스프링필드로 옮겨 자기와 함께 로펌을 운영하자고 제안해 링컨은 이듬해 이곳으로 이사했다. 스프링필드는 2년 후 일리노이주 주도(州都)가 돼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스프링필드가 주도가 됐다는 것은 이곳이 일리노이의 정치적 심장이 됐다는 얘기였다.
정치 신인 링컨은 여기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얻게 되는데 이것도 스튜어트 덕택이었다. 당시 스프링필드 정치는 ‘에드워즈 클랜(Edwards clan)’으로 불리는 에드워즈 집안이 주무르다시피 했다. 링컨이 스프링필드로 옮겼을 때는 초대 일리노이 주지사의 아들로 주 법무장관을 지내고 주 하원의원으로 있던 니니언 에드워즈와 부인 엘리자베스 토드 에드워즈가 중심이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의 사촌 오빠이자 주 하원의원인 스튜어트도 이너서클이었다. 그는 링컨을 에드워즈 클랜으로 인도했다.
미래의 퍼스트레이디 메리 토드
링컨의 부인 메리 토드. 사진=퍼블릭 도메인메리 토드는 프랑스어도 유창하고 사교적이라 청년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링컨과 토드는 어릴 때 친모를 잃은 슬픔, 시와 문학에 대한 사랑, 정치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고, 무도회에서 만난 지 3년 만인 1842년 부부가 됐다. 결과적으로 링컨은 일리노이와 켄터키의 정치적 파워하우스 두 곳의 일원이 됐다. 평소 “나를 퍼스트 레이디로 만들어 줄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 말했던 그녀는 실제로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
링컨의 결투
링컨은 전략가였고 친화력이 뛰어났다. 링컨의 이런 면모는 대선(大選)을 거치며 여지없이 드러났고 대통령으로서는 더없이 빛났지만, 오래전부터 친분이 깊어 링컨의 결투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링컨과 토드가 아직 약혼자일 때 링컨은 ‘리베카’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자주 기고하면서 일리노이주 회계감사관 제임스 실즈의 재정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던 중 약혼녀 메리 토드도 같은 필명으로 실즈를 공격하는 글을 게재했다.
다혈질인 실즈는 리베카의 실체가 링컨이라는 것을 알고 링컨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일리노이에서는 결투가 불법이었지만 결투를 피하면 비겁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결투 관행은 양측이 먼저 시간·장소·무기 등 조건에 합의하는데, 무기는 도전받는 쪽이 선택했다. 무기는 칼을 선택했고, 양측의 중간선을 표시해 누구도 넘지 않기로 합의했다. 실즈가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명사수였고, 자기는 키가 193cm, 실즈는 175cm로 자기 팔이 더 길다는 점을 고려해 링컨이 내건 조건이었다. 결투장에 도착한 링컨은 결투에 앞서 큰 나무 아래 서서 긴 팔을 뻗어 높은 가지들을 칼로 쳤다. 중간선을 넘지 않은 채 서로 칼만 휘두르면 상대가 불리하다는 시위였다. 결투는 취소됐고 링컨은 명예를 지키며 위기를 면했다. 실즈는 나중에 연방상원의원으로 활약했는데 링컨은 그도 평생 친구로 만들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아직도 결투가 빈번했다. 독립전쟁 때 워싱턴은 전력 손실을 막기 위해 결투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의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도 결투로 죽었고, 앤드루 잭슨(7대)은 대통령이 되기 오래전 결투로 가슴에 총상을 입고 평생 고생했다. 20세기 전반 미국 해군 장교들은 전사자 대 결투 사망자 비율이 3 대 2였다.
링컨의 정치적 자살
링컨은 국민적 지지를 얻는 멕시코와의 전쟁을 비판했다가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링컨은 38세 때인 1847년 연방하원의원이 됐다. 2년 전에도 도전했다가 예비선거를 통과하지 못한 재수생이었는데, 주 하원의원 때처럼 이번에도 휘그당이었다. 링컨이 처음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이 되던 1834년 출범한 휘그당은 독립선언문을 기초(起草)한 토머스 제퍼슨과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이 1790년대 초반에 창당한 민주공화당에서 갈라져 나온 정당이 다른 정당과 합쳐 만들어진 정당이다. 휘그당은 윌리엄 해리슨을 시작으로 대통령 4명(9·10·12·13대)을 배출했다. 10·13대는 부통령으로 있다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링컨은 드디어 중앙 정계에 데뷔했으나 그해 말 정치적 자살행위를 저질렀다. 미–멕시코 전쟁을 비판하는 결의안 제안이었다. 당시 미–멕시코 전쟁은 군사적으로는 이미 오래전 결판이 났고 전쟁을 마무리하는 조약만 남겨 둔 시점이었다. 캘리포니아 등을 얻어 영토를 태평양까지 확장하려 한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처음에는 2500만 달러를 주고 이곳을 사겠다고 제안했으나 멕시코가 거부하자 전쟁을 결심했다. 포크는 “멕시코가 먼저 국경을 넘어와 미국 땅에서 미국인의 피를 흘리게 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도발했다. 링컨은 이것이 영토 확장을 위한 포크의 핑계라고 생각했다. 링컨은 미국인이 피를 흘렸다는 정확한 장소와 멕시코가 먼저 침공했다는 증거를 대통령이 하원에 제시하라는 요지의 결의안을 제안했다.
그런데 미–멕시코 전쟁은 미국인들이 열렬히 지지한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될 때 연방의회가 모병법(募兵法)을 통과시키면서 병력을 5만 명으로 제한했으나, 자원자가 수주 만에 30만이 넘을 정도였다. 링컨의 결의안은 토의도 없이 위원회에서 폐기됐고, 링컨은 전시(戰時)에 조국을 공격하는 매국노(賣國奴)라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링컨은 “아무 질문 없이 대통령 주장을 수용한다면 대통령이 원할 때는 언제나 이웃 나라를 침략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비난을 잠재울 수 없었다.
포크 대통령은 1848년 2월 과달루페 히달고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했다.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주고 캘리포니아 등을 매입하는 형식이었다. 국외적으로는 국제법에 따른 계약이라는 요건을 갖추고 국내적으로 링컨 같은 비판자들을 달래는 방편이었다.
이 일로 링컨은 정치 생명이 끝난 것 같았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이 일은 링컨이 원칙을 벗어나면 대통령도 겁내지 않는 정의롭고 용감한 정치인이라는 기억을 남겼고, 몇 년 후 창당되는 공화당은 이 기억을 되살린다.
영토 확장으로 노예제 갈등 심화
링컨은 훗날 “연방하원의원 시절 윌모트 단서 조항이 붙은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횟수가 40회 이상”이라고 회고했다. ‘윌모트 단서 조항’은 19세기 중반 미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면서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미국 사학자들은 이 단서 조항을 ‘남북전쟁의 방아쇠’라 부르기도 한다.
미국 건국 당시 원래 13개주의 총 면적은 한반도의 5배를 약간 넘는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얻은 땅은 이것의 1.9배 이상이다. 1845~48년 미국 영토는 또 폭발적으로 늘었다. 1845년 텍사스를 병합했고, 1846년 영국과 협정으로 오리건을 추가했으며, 1848년 미–멕시코 전쟁 승리를 앞세워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 등을 매입했다. 셋을 합치면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얻은 영토의 약 1.5배였다. 미국이 3년 동안에 한반도의 14배가 넘는 광활한 땅을 새 영토로 얻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미국의 폭발적 영토 확장과 같은 시기에 노예 인구도 폭증했다. 그때까지 미국 정치권은 노예 문제를 가급적 비켜 갔으나 영토 확장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노예 문제를 비등점(沸騰點)으로 몰고 갔다.
1846년 4월 미–멕시코 전쟁이 시작되자 조만간 멕시코로부터 획득할 드넓은 땅에 노예를 인정하느냐 여부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 문제만이 아니었다. 북부의 가난한 백인들은 노동시장에서 값싼 노동력인 흑인과 경쟁하기 싫어했다. 링컨의 아버지가 켄터키를 떠난 이유였다. 남부의 대토지 소유주들은 당연히 새 영토에서도 노예가 인정되기를 바랐다. 각자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제적 문제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새 영토에 들어설 주들의 경계선에 따라 연방의회 의석 수가 달라지고 이와 연계된 대통령 선거인단 수도 달라진다. 따라서 새 영토에서 노예 허용 여부는 권력으로 직결되는 정치적 문제이기도 했다.
이렇게 복합적이고 중대한 미국의 병(病)은 그동안 잠복기 상태에서 안으로 곪다가 새 영토가 가시화되면서 밖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의 방아쇠 ‘윌모트 단서 조항’
데이비드 윌모트. 사진=퍼블릭 도메인그러자 북부의 데이비드 윌모트 연방하원의원(민주)이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멕시코로부터 획득하는 땅 어느 곳에도 노예나 강제노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단서 조항을 달았다. 이후 ‘윌모트 단서 조항’으로 불리게 되는 유명한 조항이다.
하원은 단서 조항이 붙은 예산안을 통과시켜 상원에 넘겼고, 상원은 회기 마지막 날인 월요일 늦게 법안 심의에 들어갔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단서 조항을 삭제한 수정안을 통과시켜 하원에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자 북부의 존 데이비스 상원의원(휘그)이 연설에 나섰다. 데이비스는 폐회 직전까지 시간을 끌어 단서 조항이 있는 채로 예산안이 통과되거나 예산안 자체가 폐기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원 시계가 상원 시계보다 8분 빨라 상원 표결 전에 하원이 폐회했다. 예산안은 자동 폐기됐다.
이후 링컨이 들어간 30대 연방의회에서도 여러 법안에 이 단서 조항이 달렸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윌모트 단서 조항’이 붙은 법안에 찬성한 횟수가 40회 이상이라는 링컨의 발언은 이 얘기였다.
‘윌모트 단서 조항’은 법제화되지 못했지만 이후 미국 정치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의원들이 소속 정당에 따라 표결했지만, 그 후로는 노예제에 대한 입장에 따라 표결했다. 북부 의원 대부분은 노예제 당장 폐지 또는 노예제 확산 금지를 주장했고, 남부 의원 대부분은 노예제를 지지했다.
‘노예 없는 자유의 땅’
토머스 제퍼슨. 사진=퍼블릭 도메인프리소일의 사상적 원조는 토머스 제퍼슨이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제퍼슨이 꿈꾼 나라는 중앙정부가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백인 자영농들이 자기 땅을 일구며 자유롭게 사는 민주공화국이었다. 독립 직후 미국에는 이미 노예가 70만 명이나 있었고 워싱턴도 제퍼슨도 노예 소유주였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언젠가 노예가 없어져야 한다고 믿은 제퍼슨은 “현재 노예가 있는 주에서는 노예를 일단 인정해도 앞으로 새 영토에는 노예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대륙회의는 영국이 미국 독립을 인정한 파리 조약을 1784년 비준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법적 뒤처리까지 마무리했다. 그해 제퍼슨은 ‘1800년 이후 미국이 획득하는 새 영토에는 노예가 없어야 한다’는 요지의 법안을 제안했으나 대륙회의에서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됐다. 이후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거대한 새 영토를 미국에 추가했지만, 이곳에서 노예를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1787년 대륙회의는 ‘서북지방법’을 제정했는데, 3년 전의 제퍼슨 법안을 수정한 것이었다. 제퍼슨이 주 프랑스 대사로 나가 미국에 없을 때 이뤄진 수정 과정에서 법의 적용 지역이 오하이오강 북쪽으로 정해졌다. 소년 링컨이 가족을 위해 평저선을 탔던 오하이오강이 북부와 남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됐다. 이 법에 따라 나중에 오하이오·인디애나·일리노이·미시간·위스콘신이 되는 지역에서는 노예가 금지됐다. ‘노예가 없는 자유의 땅’ 프리소일의 원형이었다.
남북 분열의 씨앗이 뿌려지다
3년 후 연방의회는 이 법을 모델로 ‘서남지방법’을 제정했다. 적용 지역은 오하이오강 남쪽이었다. 이 법에 따라 나중에 켄터키·테네시·앨라배마·미시시피가 되는 지역에서는 노예가 허용됐다.
두 법에 따라 새 영토에서는 오하이오강이 속박과 자유를 가르는 경계선이 됐다. 이 때문에 자유를 찾아 오하이오강을 건너는 노예들은 이 강을 요단강으로 불렀다. 이 강 너머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노예들이 갈망하던 ‘젖과 꿀’은 자유였다. 지역에 따라 노예 허용 여부를 결정했으니 남북전쟁의 씨앗은 이때 이미 뿌려진 셈이었다.
미–멕시코 전쟁으로 얻을 새 영토에 노예 허용 여부를 놓고 대립이 격화되자 노예제 반대자들은 프리소일당을 창당하면서 1787년 서북지방법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들은 “새 영토에서는 노예를 허용하지 말고 대농장이 없이 소작농들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 제퍼슨의 건국 이념”이라며 제퍼슨을 들고나왔다. 노예제 지지자들도 “제퍼슨은 항상 제왕적 연방정부를 경계했다. 연방헌법에 따라 노예제는 연방정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제퍼슨을 들고나왔다.
노예제 반대에도 온건파와 급진파가 있었다. 온건파는 연방헌법에 따라 현재 노예가 있는 곳에서는 노예를 인정해도 새 영토로 노예제를 확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들은 민주당에도 휘그당에도 있었다. 급진파는 당장 전국적으로 노예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소정당인 자유당원들이 대표적이었다. 정당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노예 노동력과 경쟁하기 어려운 백인 노동자와 소작농도 노예제 확산을 반대했다. 이 같은 여러 집단이 합친 정당이 프리소일당이었다.
정계 개편이 시작되던 1848년은 12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마땅한 대선 후보가 없던 휘그당은 ‘전쟁영웅의 마법’을 기대하며 미–멕시코 전쟁의 영웅 재커리 테일러를 영입해 후보로 내세웠다. 그때까지 미국 대통령 11명 가운데 4명이 전쟁영웅이었고, 2명은 전쟁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장군 출신이었다. 이것은 독립전쟁 때 민병대 대령으로 후방 지원을 맡았던 제퍼슨을 빼고 하는 얘기다.
테일러는 남부 출신 노예 소유주로 그때까지 투표 한 번 해 본 적 없는 정치 문외한이었으나, 일단 휘그당이 대선 후보로 선택하자 링컨도 지원 유세에 나섰다. 당시는 대통령 후보의 직접 유세가 금기(禁忌)였다. 링컨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으나 매사추세츠주 유세에서 즉석 연설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이름도 모르던 연방하원의원이 연설을 마치자 청중은 그의 지역구가 속한 “일리노이!”와 “링컨!”을 세 번씩 연호했다.
링컨의 다음 행선지는 보스턴이었다. 여기서 링컨은 말로만 듣던 윌리엄 수어드 전 뉴욕 주지사를 처음 봤다. 수어드는 그날의 독보적 스타였다. 다른 연사와 달리 그는 오직 노예 문제에 초점을 맞춰 “모든 노예가 해방되는 날이 반드시 온다”며 열변을 토했다.
이날 링컨과 수어드는 유세 연단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다. 그 순간 둘은 몰랐으나, 이날의 만남은 장차 마음을 나누는 벗이자 정치적 동지로서 미국과 세계를 바꾸는 실로 ‘위대한 만남’이었다.
‘행동하는 지성’ 수어드의 충고
윌리엄 수어드. 사진=퍼블릭 도메인링컨처럼 이상주의자면서 실용주의자였던 수어드는 처음에는 노예 소유주인 테일러가 못마땅했으나 그가 휘그당 대통령 후보가 되자 그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연방상원의원 출마를 준비했다. 수어드는 그해 상원의원에 당선돼 많은 업적을 남긴다.
수어드는 링컨보다 훨씬 급진적인 노예 해방론자로 노예 해방뿐 아니라 흑인 투표권까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로 혁명적 사고였다. 그가 노예들의 비밀 탈출로인 지하철도 차장이라는 사실이 입증하듯 그는 그 시대 미국의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둘이 밤새 이야기할 때 수어드가 링컨에게 충고했다.
“노예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천성적으로 겸손한 링컨은 언제나 타인의 조언을 신중히 들은 후 취사선택을 분명히 했다. 스튜어트가 변호사 자격증을 따라고 했을 때도, 수어드가 노예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링컨, 워싱턴DC 노예 폐지안 입안
이듬해 링컨은 워싱턴DC 노예 폐지안을 입안했다. 노예제는 주정부 관할이라 연방정부는 발언권이 없었으나, 워싱턴은 연방 직할이었다. 법안 요지는 워싱턴 주민투표를 전제로 연방정부가 노예 소유주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노예 소유주는 노예를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법안은 제안조차 되지 못했으나 당시 링컨이 선호하던 노예 해방 방식을 보여 준다. 온건파 노예 해방론자들이 주장하던 방식이었다.
이때만 해도 링컨은 온건파 노예 해방론자였으며 해방 노예들이 미국 밖에서 따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제퍼슨을 포함해 많은 백인이 그렇게 믿었다. 라이베리아는 그런 미국인들의 주도로 1847년 건국된 아프리카 최초 공화국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