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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마지막 회〉

세도정치의 문을 연 정조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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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평으로 새로운 정치 꿈꾸었지만 결국 외척 세력에 굴복
⊙ 집권 초 ‘노론 청명당’ 홍국영 등 앞세워 외척 제거
⊙ 영조의 ‘형식탕평’ 비판하며 ‘실질탕평’ 추구
⊙ 남인 채제공 중용했으나 다른 정파의 반발 초래
⊙ 노론 벽파 심환지, 정조에 맞서면서도 능력으로 정승까지 올라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정조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은 선조 8년부터 영조 31년까지만을 서술 범위로 했기에 정조 시대는 포함되지 않는다. 정조는 영조 말년 폐풍(弊風)을 이으며 왕위에 올랐다. 당쟁은 극에 이르고 있었다.
 
  영조 탕평(蕩平)이 각 당파를 섞는 절충형이었다면 정조가 시도한 탕평은 처음부터 왕권 중심 탕평이었다. 뒤에 정조가 자신은 신하들의 군사(君師)임을 선포한 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초점은 군(君)이 아니라 사(師)였다. 스승이란 곧 당론(黨論)을 생명으로 삼는 당파 정치인들의 정신적 지주인데 그것을 자기가 맡겠다고 자임한 것은 신하들의 당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776년 즉위한 정조는 조부 영조로부터 최악의 상황을 물려받았다. 자기 생부를 죽이는 데 앞장서고 자기 집권을 흔들었던 왕실 외척 세력이 권력을 한창 키운 때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당파와 외척이 결탁해 혼재하는 정치가 이뤄졌다. 따라서 정조로서는 이 외척 제거가 재위 초 최우선 과제였다.
 
 
  영조, “홍국영은 내 손자”
 
  홍국영(洪國榮·1748~1781년)의 6대조는 선조와 인목대비 김씨 사이에서 난 영창대군의 동복누나 정명공주와 결혼한 영안위(永安尉) 홍주원이다. 6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는 홍봉한·홍인한도 홍주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두 사람은 홍국영의 10촌 할아버지뻘 된다. 이미 이때는 홍씨 가문이 한양의 대표적인 문벌의 하나로 성장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유대감이 있었을 수도 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등에 따르면 홍국영은 젊은 시절 호방하면서도 해괴한 인물이었다. 홍씨는 그를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홍국영은 주색잡기로 청년기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작심을 하고 과거 공부를 시작해 25세 때인 1772년(영조 48년) 문과에 급제한다. 그만큼 머리가 좋았다는 뜻이다.
 

  이듬해인 영조 49년 4월 5일 영조가 직접 숭정전 동월대에 나와 행한 소시(召試)에서 예문관원 홍국영은 훗날 동지이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정민시와 함께 우수자로 선발됐다. 이를 계기로 영조의 눈에 든 홍국영은 사관과 함께 왕세손을 보좌하는 춘방 사서를 겸직하게 되면서 정조와 인연을 맺게 된다.
 
  혜경궁 홍씨에 따르면 아버지 홍봉한은 당시 홍국영을 좋게 보았고,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영안위 할아버지 자손 중에 저런 요망한 인간이 날 줄 어이 알았으랴”며 “집안을 망칠 위인”이라고까지 극언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홍인한의 진단이 정확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쨌거나 당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홍봉한은 이복동생인 홍인한에게 홍국영의 보직을 도와줄 것을 권유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홍국영을 후원하려 했다.
 
  그러나 풍산 홍씨 집안의 후원보다는 영조의 총애가 더 컸다. 홍국영은 과거 급제 후 줄곧 사관으로 영조의 곁에 있었고 영조는 공개적으로 “국영은 내 손자”라며 좋아했다. 마침 홍국영이 영조와 왕세손을 동시에 가까이에서 모실 때는 두 사람을 이간질하려는 세력의 공작이 극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정순왕후 김씨 세력, 정후겸(鄭厚謙) 세력, 홍인한 세력 등이 그들이었다.
 
 
  골수 노론 홍국영
 
  홍국영은 정순왕후 김씨 집안과도 친척 관계였다. 정순왕후 김씨와 8촌인 김면주의 어머니가 홍국영의 당고모(5촌)였다. 홍국영은 과거 시험을 위해 한양에 왔을 때 김면주의 집에서 머물 정도로 홍씨 집안보다는 경주 김씨 집안과 더 가까웠다.
 
  그러나 젊은 야심가 홍국영은 적어도 홍씨나 김씨 쪽에 줄을 서지 않았다. 자신의 본분인 세손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세손을 지켜준 두 인물이 바로 세손강서원의 홍국영과 정민시(鄭民始·1745~1800년)였다. 정후겸 세력이나 홍인한 세력 등은 심지어 세손이 홍국영·정민시 등과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강서원에 자기 사람들을 심기까지 했다. 세손으로서는 뭐 하나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 홍국영·정민시는 헌신적으로 세손을 지켜냈다.
 
  의기투합(意氣投合). 정조 즉위 초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는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내외척을 멀리하려 한 정조와 노론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라 특정 정파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홍국영의 기질이 딱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패기에 찬 홍국영은 적어도 이때만은 진심으로 정조를 보필했다.
 
  정조는 즉위 나흘째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한다. 정3품 당상관으로의 승진이라는 의미보다는 왕명을 공식적으로 출납하는 자리에 올랐다는 의미가 더 컸다. 게다가 홍국영은 단순한 왕명 출납 이상의 직무를 수행했다. 왕명 생산, 즉 정조의 1인 싱크탱크이자 책사로서 정국의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점은 홍국영이 이념적으로는 골수 노론이었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홍국영은 노론계 중에서 청명당 계열 정파의 지도자인 김종수·정이환과 합세하여 노·소론 탕평당 계열(친영조파)인 홍인한·정후겸·윤양후·홍계능 세력을 사도세자에 불경하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제거했다”.(박광용 교수)
 
 
  정조의 스승 김종수
 
김종수
  김치인과 친척으로 노론 중도파인 김종수(金鍾秀·1728~1799년)는 아주 늦은 41세 때인 영조 44년(1768년)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시강원 필선으로 임명되면서 왕세손과 인연을 맺었다. 이때 그는 일관되게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던 홍문(洪門)과 김문(金門)의 외척 정치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해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또 그는 왕세손의 스승으로서 정조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심어주었다. 특히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학의 핵심을 가르치며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군사론(君師論)을 정조의 머릿속 깊이 심어준 주인공이다. 정조에게서 드러나게 되는 보수혁명가로서의 면모는 대부분 김종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종수는 영조 48년(1772년) 청명(淸名)의 존중과 공론(公論)의 회복을 위하여 청명류(淸名流)라는 정치결사를 조직했다가 발각돼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방면되었고 마침 영조가 사망하자 행장을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
 
  정조 즉위 초 대사헌·형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다며 물러나 있겠다고 청원했다가 문책을 받기도 했다. 정국이 불안정한 정권 초기에 정조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곧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거치면서 수어사를 겸하기도 했다. 병권을 책임졌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이 아들의 반역에 연루돼 강화도에 귀양 가 있었는데 정조 10년(1786년) 은언군이 강화도를 정조의 밀명을 받고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신하들이 정순왕대비의 명을 받들어 은언군을 처벌하려 하자 분노한 정조는 훈련원·어영청·내금위·총융청의 4대장과 좌우 포도대장 모두를 파면시키고 당시 규장각 직제학으로 수어사를 겸직하고 있던 김종수로 하여금 4대장과 좌우 포도대장을 모두 겸직게 하여 국방과 수도 방어의 총책임을 맡기는 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이 같은 결정의 무모함과는 별도로 당시 김종수가 받고 있던 총애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런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김종수는 곧 우의정을 거쳐 정조 17년(1793년) 좌의정에 오른다. 노회한 정객이었던 김종수는 윤시동·채제공과 함께 정조가 가장 신뢰했던 역대 3정승 중 한 명이다. 이처럼 정조 즉위 초의 정치를 이해하는 핵심축은 정조·홍국영·김종수 3인이다.
 
 
 
홍국영의 자멸

 
  권력을 맛본 30대 초반의 홍국영은 어느새 ‘1등공신’에서 권간(權奸)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정조 2년 홍국영은 정조에게 소생이 아직 없다는 점에 착안해 13세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정조와 처남 매부 사이가 된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일관되게 추진해온 국혼(國婚)을 놓치지 않겠다는 원칙을 나름대로 관철한 것이다.
 
  그런데 누이 원빈 홍씨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홍국영은 다음을 도모하기 위해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常溪君) 이담을 죽은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豐君)에 봉했다. 그를 정조의 후계자로 삼아 장차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마침내 정조는 홍국영에 대한 마지막 미련마저 거두었다. 이후 연말까지 홍국영 세력에 대한 숙청 작업이 철저하게 진행됐다. 겨우 목숨을 구한 홍국영은 도성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았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모든 관직을 빼앗은 홍국영을 정조는 이틀 후 인정전으로 불러 작별인사를 한다. 할 말이 많았지만 모든 것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홍국영은 “자신은 정민시와 형제 같은 정을 갖고 있으니 그를 끝까지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강원도 강릉 해안가에 거처를 마련한 홍국영은 술로 날을 보내다가 1781년(정조 5년) 4월 사망했다. 33세였다.
 
 
  정조, 외척에 대한 생각이 바뀌다
 
홍봉한
  정조 8년 8월 3일 정조는 마침내 또 하나의 외척 경주 김씨 김구주(金龜柱·1740~1786년)의 위리안치(圍籬安置)를 풀고 육지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라고 명한다. 이는 어릴 때 자기를 지켜준 왕대비 김씨에 대한 보은이었다. 당연히 신하들은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부당한 조치라 비판했다. 그러나 이때 김구주는 거처를 나주로 옮기게 됐고 2년 후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왜 정조는 하필이면 이때, 즉 정조 8년 8월 3일 김구주에 대한 처벌을 완화했을까? 실은 같은 날 정조는 외할아버지 홍봉한에 대한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한다. 뒤에 보게 되겠지만 정조는 연이은 반란과 역모를 겪으면서 자신의 집권 초 전략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성찰하게 된다.
 
  우선 척리(戚里)에 대한 입장이 너무 극단적이었고 그 바람에 제대로 된 측근은 양성하지 못한 채 너무나 많은 세력을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정후겸의 경우와 달리 김구주는 딱히 역모를 꾀했다고 볼 부분은 없었다. 그런데도 척리 배척이라는 원칙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강경론을 고집한 것이 자신의 정치적 어려움을 만들어냈다는 자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욱이 자신을 끝까지 지켜주려 한 외할아버지까지 사도세자 보호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배척한 것은 아무래도 너무 나간 것이었다. 이날 홍봉한에게 사후(死後)에나마 시호를 내리면서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범죄의 형적이 확실한 홍인한과는 별개로 다루겠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역적 홍인한은 평일에 그의 형에게 공손하거나 화목하지 못해서 따로 문정(門庭)을 세운 정상에 대해서 사람들 가운데 누가 모르겠는가? 그의 본래의 흉악하고 패악한 버릇은 비단 봉조하(奉朝賀·홍봉한)의 깊은 우려와 숨은 고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궁(慈宮·혜경궁 홍씨)께서도 또한 그러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기강을 어기고 순종하는 것을 범하였을 때는 의리를 가지고 결단하였으니, 그것이 봉조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리고 한마디 밝혀야 할 것이 있는데, 봉조하는 바로 자궁(慈宮)의 부(父)이고, 나의 외조부이다. 그가 나에게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성의가 부족할 이치가 있겠는가?”
 
 
 
젊은 날의 미숙

 
  특히 마지막 말이 중요하다. 이 점을 즉위 초부터 깨달았다면 정조의 시대는 훨씬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에 당시 정조는 너무 젊었고 또 피해의식이 극에 달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도 믿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는 뜻이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김구주 또한 권력남용의 비판은 받을 수 있어도 역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 점은 정조 자신도 인정한다. 자신이 원래 김구주를 미워한 이유는 그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돼 있다고 생각해서였는데 왕대비의 설명을 듣고서 오해를 풀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뭔지 실록에 상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결국 왕대비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왕대비가 세손 시절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준 것을 보더라도 거짓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일 왕대비가 세손을 위협하는 데 조금이라도 관여를 했었다면 이런 은전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조는 즉위 초 지나치게 나간 감이 없지 않다. 즉위하는 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것부터가 실은 미숙(未熟)이었다. 이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선택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해마다 일어난 반란과 반역 모의가 그것이다.
 
  외척에 대한 완화된 태도는 정조가 추진한 탕평책이 실패했음을 간접적으로 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앞서 본 대로 정조는 집권 초기 이 같은 탕평 구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우선 정조 자신이 말한 대로 “내가 등극한 이후로 새로운 역신(逆臣)이 연달아 나오게 되어 엄격히 징토(懲討)하느라 다른 데에 미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흘렀다. 물론 그 중간에 간혹 탕평 의지를 밝힌 적은 있다. 정조 6년 1월 13일 좌의정 홍낙성이 홍국영 연루설이 제기된 채제공(蔡濟恭·1720~1799년)을 벌해야 한다고 하자 오히려 채제공에게 병조판서를 시킬 의향을 갖고 있던 정조는 그 근거의 하나로 탕평론을 끌어들인다.
 
  “내가 바야흐로 탕평의 정치를 하기 위해 모든 용사(用捨·사람을 쓰고 버림)에 있어 색목(色目)을 마음속에 두지 않고 있다. 옛말에도 금은동철(金銀銅鐵)을 뒤섞어 하나의 그릇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의 조상(朝象·조정의 형세)은 각각 하나의 그릇을 만들고 있으니 당초 논할 수도 없는 것임은 물론, 뒤섞어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 말은 6년 전 자신의 탕평 다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2년 후인 정조 8년 7월 7일 정조가 이례적으로 후손들을 위한 자신의 큰 계책이라는 것을 발표하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탕평 실현이 여의치 못함을 실토하고 있다. 후손들을 위한 조언이라기보다는 신하들을 향한 애절한 호소로 읽힌다.
 
 
  정조의 호소
 
  “아! 금일의 조정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어찌하여 사건으로 만드는가? 대저 언론이 서로 과격하고 거조(擧措)가 전도되어 역순(逆順)이 순식간에 갈라져서 파란(波瀾)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는 한집안 안에서도 혹은 칼을 잡고, 취향을 달리하려는 처지인데, 너무 취모멱자(吹毛覓疵·입으로 털을 불어서 흠을 찾아낸다는 뜻)하여 이른바 더불어 화평하고 안정하는 기상과는 불행하게도 상반되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상서로움을 불러오고 복을 가져오겠는가? 이것이 내가 많은 사령(辭令)을 내려서 지금까지 거듭 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무릇 사람들이 길(吉)한 경사의 날에 그릇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 유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은 사람들과 동류가 되고, 나는 억조창생(億兆蒼生·만백성)의 임금이 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근일(近日)에 더욱 사람마다 자기 위치를 찾고 일마다 원만히 해결되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대체로 후손들에게 계책을 물려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아! 그대들 여러 신하가 만일 이 뜻을 깊이 본받는다면 과격한 논쟁을 화평(和平)으로 바꾸고 전도된 것을 안정으로 바꾸는 것은 바로 순간적인 일이 될 것이니, 무엇이 어렵겠는가? 이로부터 조정이 안정되고, 이로부터 만백성이 안정되며, 이로부터 나의 자손들이 편안하게 됨으로써 천만년토록 나라의 터전이 안정된다면, 이 어찌 여러 신하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청명당 지도자 김치인
 
김치인
  다시 2년 후인 정조 10년 10월 24일 영의정 김치인(金致仁·1716~ 1790년)이 사직 의사를 밝히자 만류하면서 정조는 명시적으로 그동안 자신이 추진해온 탕평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다.
 
  “경은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이 과연 어떤 때인가? 조정은 날로 분열되어가고 인심은 안정될 기미가 없어서 우리 선대 왕께서 50년 동안 시행한 탕평의 정치를 만회할 가망이 없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조정에 노(老)성인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경을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경을 나오게 하려는 것도 이 때문으로, 때가 나올 때라서 그만둘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경이 만약 이미 물러났다고 자처한 채 구제하는 책임을 생각지 않는다면 이는 나 한 사람을 저버린 것뿐만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경의 선친의 마음으로 볼 때 자신에게 후손이 있다고 말씀하시겠는가?”
 
  노론 벽파 중에서 청명당 지도자로 분류되던 김치인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金構·1649~1704년)의 손자이자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金在魯·1682~1759년)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김구는 소론 박세채의 탕평론을 수용해 노론과 소론의 조정에 힘쓴 반면 아버지 김재로는 일찍부터 노론파의 영수로 떠올라 영조 즉위 초 소론계 인물들인 유봉휘·이광좌 등을 탄핵하고 영조에 대해 부정적이던 김일경을 사사(賜死)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영조가 추진했던 탕평에 동의했다. 이 때문에 노론 강경파로부터 한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청렴하면서도 학식이 깊어 영조 집권 전반기 노론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정조가 선친 운운한 것은 김재로를 염두에 둔 것이다. 노론이지만 외척당에 속하지 않았고 굳이 분류하자면 6촌간인 김종수와 함께 노론 청명당 중에서도 중도파였다고 할 수 있다. 노선만 놓고 보면 홍국영도 여기에 속했다.
 
  김치인은 정조 즉위 후에도 중추부 영사와 영의정을 교대로 맡아가면서 주로 당쟁 조정에 힘을 썼다. 탕평을 중시했던 가풍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노론 벽파의 시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그의 졸기에는 찬사와 비난이 함께 들어 있다.
 
  〈그는 주도면밀하고 과감한 성격이었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에 대하여 잘 알았다. 스스로 옳다고 믿기를 좋아하였고, 대체(大體)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김재로가 영종(영조의 원래 묘호) 초기에 탕평책을 극력 주장하다가 크게 사류(士類·산림)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김치인이 조정에 올라서고부터는 자못 사류들과의 사이에서 주선을 해주어,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었다”고들 말했다.〉
 
 
  時派와 僻派
 
  탕평과 외척 정치를 오가던 정조 시대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간 충돌이 그것이다. 아직 학계에서는 시파와 벽파가 정확히 어떤 당파와 관계되는지 규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각 당파에 시파와 벽파가 있었던 것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이미 시파와 벽파 분립은 정조 8년(1784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정조 입장에 동조하면 시파, 그렇지 않으면 벽파로 불렸다. 그러고 4년 후인 정조 12년 정조는 노론 김치인, 소론 이성원(李性源), 남인 채제공을 3정승에 임명했다. 정조 자신은 이를 “붕당이 생긴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며 만족해했다.
 
  이 체제는 한동안 안정돼 보였다. 그러나 정조 15년(1791년)부터 3년 동안 채제공 독상(獨相) 체제가 진행되면서 벽파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1776년 3월 영조가 죽자 채제공은 윤동섬과 함께 장례를 총지휘하는 국장도감제조로 임명됐다. 그리고 잠시 호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로 있던 4월 1일 기이한 사건이 일어난다. 즉위하던 날 정조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때문인지 이를 틈타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영조의 임오조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새 임금 정조의 총애를 얻어보려는 세력의 준동이었다. 적어도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한 정조라 하더라도 선대왕 영조의 결정을 정면으로 뒤집는 조치를 집권 한 달도 안 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不漢黨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정조가 세손으로 국왕 수업을 받고 있던 동궁 시절 조재한이 불령한 무리와 함께 임오년의 의리(사도세자는 억울하게 죽었으니 복수를 해야 한다는 주장)를 내세워 은밀하게 환관 이흥록·김수현 등과 결탁했다. 조재한은 소론 정승이었던 조현명의 후손이다. 이후 이흥록 등은 세손이 후원을 거닐거나 하면 다가와 유혹과 위협, 자기 세력의 추천 등을 일삼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정조는 이들을 꺼려 했다.
 
  영조가 죽자 조재한은 지방유생 이일화·이덕사·유한신 등을 사주하여 동시다발로 임오년의 일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외형적으로 보면 정치적 입장은 정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세력의 성격은 전혀 별개였다. 이미 정조는 자기 세력을 동원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세력의 숙청을 구상하고 있었다. 조재한식의 섣부른 행동은 자칫 자신의 구상을 망쳐놓을 수 있었다.
 
  “이는 선대왕을 모함하는 대역(大逆)이다.”
 
  정조는 금상문에 나가 이덕사와 그의 조카 이준배를 친국했다. 이준배는 이덕사의 상소를 대신 써준 죄로 잡혀왔다. 이후 10여 명이 복주(伏誅)됐다. 문제는 환관 김수현의 공초(供招)에서 채제공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김수현이 구상·이수진·이만식·조종현 및 채제공·조노진·이창임·목조환 등의 이름을 일찍이 이흥록에게서 들었다고 공술하였다. 이에 구상·이수진·이만식·조종현은 극구 변명하고 자복하지 아니하였다. 또 정조는 김수현에게 ‘남한당(南漢黨) 북한당(北漢黨) 불한당(不漢黨)’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수현은 영종(영조) 말년 분당(分黨)의 조짐이 생겨 김한구(金漢耉)와 친밀한 사람을 ‘남한당’이라 하고, 홍봉한(洪鳳漢)과 친밀한 사람을 ‘북한당’이라고 하였으며, 북한당이나 남한당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불한당’이라 하여 서로들 표방하였다고 고했다. 김수현은 송재경·김상묵·심이지를 곧 불한당의 사람이라고 공술하였는데, 정조는 채제공·송재경·김상묵·심이지의 이름을 추안(推案)에서 빼도록 명하였다. 정조는 사건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었다. 대신 한 달여가 지난 5월 11일 일단 채제공을 형조판서에서 면직시켰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정조의 배려였다. 조선 시대 때 역모에 이름이 오르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관대한 조처였다. 오히려 그것을 지적하던 사헌부·사간원 관리들이 파직당했다.
 
 
  채제공이 정승이 되기까지
 
채제공
  그러고 한 달여가 지난 6월 22일 정조는 채제공을 병조판서로 임명한다. 오히려 전면 배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채제공은 이듬해 5월 28일 경연(經筵)에서 과격한 발언을 했다가 정조로부터 오만하다는 지적을 받고 병조판서에서 쫓겨난다. 채제공은 개혁 성향의 인물이 대개 그러하듯 직선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2년 후인 정조 8년 윤 3월 21일 정조는 채제공을 공조판서로 복직시킨다. 그런데 공조참판 김문순이 채제공 밑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며 출근을 거부하고 계속 상소를 올리자 6월 5일 김문순을 파직하고 불서용(不敍用)의 명을 내렸다. 6월 9일에는 영의정 정존겸,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 등 전·현직 정승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채제공을 처벌할 것을 청했으나 정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조가 볼 때 전·현직 정승들의 상소는 ‘참소(讒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조는 채제공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상황을 살피기로 한 것이다.
 
  다시 2년이 지난 정조 10년 9월 7일 정조는 채제공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한다. 원래는 중앙사령관 격인 도총관에 임명하려 한 것인데 채제공이 조정 실력자들의 견제 때문에 극구 사양하자 일단 지방 사령관으로 명한 것이다. 그것도 사도세자의 묘소에 들렀다가 오는 도중에 길에서 우연히 만난 채제공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병조판서 이명식이 간쟁을 하자 “경은 늙었어도 발이 매우 빠르구나”라며 웃어넘겨 버렸다. 그러나 거의 모든 조정 신하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9월 10일에는 채제공의 절도사 임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 그리고 행 부사직 이성원 등을 그 자리에서 파직해버렸다. 심지어 정조는 채제공을 탄핵하는 상소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승지를 자르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채제공은 한직인 중추부 지사로 1년여 세월을 보내다가 정조 12년 마침내 우의정 제수를 받은 것이다. 어쩌면 정조는 숙종 때처럼 남인으로의 환국(換局)을 추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환국 이후 정권을 담당할 만한 인재풀이 남인에게는 없었다. 결국 절충 방안으로 채제공 한 명을 비호하다 보니 나머지 거의 모든 정파가 등을 돌리는 극한 상황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다.
 
 
  회니논쟁
 
  정조는 일단 당쟁의 큰 뿌리를 송시열과 윤증의 충돌에서 찾았다. 회니(懷尼)논쟁이란 회덕(懷德)에 살았던 송시열과 니산(尼山)에 살았던 윤증이, 송시열이 쓴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 문제로 충돌하면서 노론과 소론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것을 뜻한다. 정조는 뒤에 보게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철두철미한 송시열주의자였다. 참고로 숙종은 말년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노론 수용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소론 지지자였다. 영조의 경우 탕평을 했다고는 하지만 태생부터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과는 뜻을 합칠 수 없었다. 정조는 이어 영조 시대에 대한 진단으로 넘어간다.
 
  “신축년 임인년의 의리에 이르러서는 곧 이 충역(忠逆)이 관계되는데 인심이 각각 다르고 갈라진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여 을해년(영조 31년, 1755년) 이후로는 무릇 그 조정의 신하가 임금이 있는 연석(延席·경연)에서는 꺼리고 숨기면서도 오히려 다시 조정에서 비등(沸騰)하여 수십 년 동안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와서 구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등극한 이후로 새로운 역신이 연달아 나오게 되어 엄격히 징토(懲討)하느라 다른 데에 미칠 겨를이 없었다.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신축년 임인년의 지나간 일은 이미 선천(先天)에 속했으니 비록 색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들 무엇을 논할 것이 있느냐?’고 하는데, 이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선대왕께서 정무에 시달릴 때부터 지난겨울에 이르기까지 어찌 일찍이 노론과 소론으로 권병(權柄)을 잡게 하지 않았던가? 윤양후(尹養厚)가 온 세상을 마음대로 농락하여온 것이 그것이고 정후겸이 사특한 것에 빠진 것도 또한 그것이다. 만약 한결같이 번지도록 버려둔다면 또한 어찌 벌판을 불태우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는가?”
 
  신축년은 경종 원년(1721년)이고 임인년은 경종 2년(1722년)으로 당시 경종과 연잉군을 둘러싼 소론과 노론의 격렬한 정치투쟁이 있었다. 여기서 정조는 그 스스로 노론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당시 공론이 일치되지 않았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을해년’은 당시 영조가 그해 2월 ‘나주 괘서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소론과 관련된 역모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소론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한 소위 ‘을해처분’이 있던 해이다.
 
 
  정조, 영조의 ‘형식탕평’ 비판
 
  그리고 뒷부분에서 척리들의 준동을 당쟁의 맥락에서 보려 했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노론 외척당 중에서 탕평파였고 정후겸을 중심으로 한 정우량·정휘량 등은 소론 외척당 중에서 탕평파였다. 그 이유에 대해 정조는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보다 사태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대저 탕평 한 가지 일은 선대왕께서 깊이 고심하여왔던 사안인데 어찌 일찍이 지난 때의 규모와 비슷한 점이라도 있겠는가? 특히 당시에 받들어 돕던 신하들이 실로 성의(聖意)를 우러러 체득하지 못하고 오직 미봉책으로만 일을 삼아서 심지어 사람 하나를 추천하는 것에도 저쪽과 이쪽을 참작하여 조정(調停)하는 계획을 삼아왔다. 때문에 행하여 온 지 오래지 않아서 차츰 더욱 폐단이 생기고 족히 척리와 권간(權奸)이 정치를 혼란시키고 사람을 구속시키는 바탕으로 삼아왔다. 아! 탕평이란 곧 편당(偏黨)을 버리고 상대와 나를 잊는 이름인데, 세상에서 전하는바 ‘탕평의 당이 옛날 당보다 심하다’는 말이 불행하게도 가까웠다. 혹은 선대왕의 성지(聖志)가 성대하여 오랠수록 더욱 굳건히 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흐르는 폐해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
 
  실은 영조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실질탕평이 아니라 형식탕평으로 흘러 결국 영조의 탕평은 친왕(親王) 세력을 중심으로 한 나눠 먹기식 잡탕 인사 정책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 충역(忠逆)이 이미 나누어지고 시비(是非)가 크게 정하여진 뒤에는 이른바 노론도 나의 신자(臣子)이고 소론도 나의 신자이다. 위에서 본다면 균등한 한 집안의 사람이고 다 같은 한 동포이다. 착한 사람은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벌을 주는 것에 어찌 사랑하고 미워하는 구별이 있겠는가? 그 정황을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당파가 다른 사람들은 자못 진(秦)나라와 월(越)나라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나라가 능히 나라답게 되겠는가? 옛날 제갈량(諸葛亮)은 오히려 말하기를, ‘궁중(宮中·왕실)과 부중(府中·조정)이 함께 일체(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한 하늘 아래, 한 나라 안에서 함께 한 사람을 높이며 같이 한 임금을 섬기는 경우이다. 이제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고 의리가 더욱 굳어졌으니, 어찌 털끝만큼의 앙금이라도 그사이에 낄 수 있겠는가?”
 
  처방 또한 정확했다. 문제는 이를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였다. 여기서 정조는 늘 한계를 드러냈다.
 
 
  심환지의 등장
 
심환지
  심환지(沈煥之·1730년 영조 6년~1802년 순조 2년)는 명종비였던 인순왕후 심씨의 아버지 심강의 후손으로 그 이후 심환지의 조상 중에서 크게 현달한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 심태현은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아버지 심진은 이렇다 할 벼슬을 지내지 못했다.
 
  심환지는 영조 47년(1771년) 문과에 급제해 같은 해 사간원 정언이 됐고 주로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준엄한 언론을 펴 여러 차례 유배를 갔다 왔다. 이때부터 그는 타협을 모르는 강고한 품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순왕대비의 오빠 김구주와 가깝게 지냈다. 나이는 심환지가 열 살 위였다.
 
  김구주와 가깝다는 것은 정조에게는 정적(政敵)에 가까웠다. 정조 즉위 초 심환지가 바른 행실과 탄탄한 학문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심환지는 오히려 김구주와 손을 잡고 정조가 총애하던 권신 홍국영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정조 4년 3월 7일 정조는 홍문관 교리로 있던 심환지가 당파적 입장에서 다른 당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는 등 세도(世道)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그다지 큰 죄가 아니었는데도 4년 후인 정조 8년(1784년) 9월 18일 이조판서 김종수의 천거에 의해 종부시 정으로 관직에 겨우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김구주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심환지는 관직에 복귀하자마자 올린 상소 하나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이 상소 때문에 병조판서 서호수가 사직의 뜻을 밝힌 것이다. 두 달여가 지난 11월 25일에는 영의정 서명선이 사직의 뜻을 밝힌다. 역시 심환지가 과거사를 들먹이며 자기의 집안을 비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정조가 서명선을 위로하는 대목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기회를 틈타서 자기 원한을 풀려는 것은 유독 심환지 한 사람만이 아니다. 또 하는 말이 이의필(李義弼), 윤득부(尹得孚)의 무리와 조금 차이가 있으므로, 우선 용서하고 불문(不問)에 부친 것이지, 심환지를 아끼는 것은 아니다.”
 
 
  중용되는 심환지
 
  즉 정조는 다른 이유 때문에 심환지를 관직에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밝힌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12월 3일 규장각 제학 김종수와의 대화에서 이 점은 확인된다. 이 자리는 정조가 자신의 심복 김종수를 다그치는 자리였다. ‘너를 믿고 네가 추천하는 인사를 등용했더니 조정 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취지의 말을 하는 가운데 심환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어찌하여 경 등이 전조(銓曹·인사를 책임지는 이조)에 자리 잡은 뒤로부터 조정이 소란스럽고 의리가 도리어 어두워져, 유악주(兪岳柱)와 같은 무리가 종종 튀어나오게 되었는가? 심환지의 상소가 또 나오자, 경 등은 비록 경 등이 알 바가 아니라고 하지만, 경 등이 들어온 뒤에 이 무리가 감히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니, 어찌 경 등이 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정조 13년 10월 27일 심환지를 대사간에 제수한다. 이듬해 8월 5일에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불과 4개월도 안 된 심환지는 다시 대사간으로 복귀했다. 정조 15년 6월 8일 다시 성균관 대사성을 맡지만 이번에도 두 달 만인 8월 3일 서용보의 이조참의 제수를 취소하고 그 자리에 심환지를 임명한다. 그런데 두 달 후인 10월 3일 심환지를 이조참의에서 파직하고 서용보를 임명한다. 당연히 정조의 마음은 서용보에 가 있었다. 그러고 또 두 달이 지난 12월 12일 심환지는 이조참의에 제수된다.
 
  정조 16년(1792년) 들어 형조참판으로 승진했던 심환지는 3월 15일 역적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다는 죄로 형조판서 김문순, 형조참의 이면응 등과 함께 귀양을 갔다가 한 달 만에 방면된다.
 
  정조는 심환지의 강한 당파성, 즉 노론벽파 성향에 대해서는 늘 못마땅해했지만 그의 업무처리 능력은 높이 평가했다. 정조 16년 8월 심환지는 승지가 되어 정조를 측근에서 보좌하게 된다. 그해 9월 20일 심환지는 남인 세력을 강도 높게 비난하다가 정조의 노여움을 사 ‘불서(不敍)’의 처벌을 받았다. 관리로서 등용을 않겠다는 파직보다 높은 처벌이었다. 그러나 불과 석 달 후인 12월 25일 이조참판 이재학과 이조참의 이면응이 면직되자 그 자리에 각각 심환지와 서매수가 임명된다. 이조참판은 무엇보다 탕평과 당파 조정을 중시했던 정조가 핵심 보직으로 생각했던 자리다.
 
 
  심환지, 일관되게 남인 공격
 
  정조가 여러 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인에 대한 심환지의 성토는 그칠 줄을 몰랐다. 불구대천(不俱戴天), 함께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다는 결연함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설사 그 방향이 폭넓은 동의를 얻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주장에 일관성이 있으면 거기서 힘이 생겨난다. 심환지가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였다. 정조의 위세 앞에 하루아침에 노론에서 소론으로, 소론에서 노론으로, 벽파에서 시파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던 시류에서 심환지는 보기 드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정조 17년(1793년) 1월 27일 성균관 대사성을 맡고 있던 심환지는 남인의 차세대 지도자 이가환(李家煥)을 몰아세웠다가 정조의 노여움을 산다. 정조는 심환지를 어르고 협박하고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바람에 심환지의 관직도 상당 기간 이조참판과 대사성, 그리고 승지를 오락가락해야 했다. 특진(特進)을 좋아하던 정조의 은혜를 제대로 입어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정조 18년 3월 10일에는 능주목사로 발령을 받는다. 문책성 좌천이었다.
 

  같은 해 8월 심환지는 예문관 제학이 되어 중앙 조정으로 복귀하지만 벼슬에 나갈 뜻이 없음을 밝히자 사흘 만에 체직(遞職)됐다. 교체됐다는 뜻이다. 그러고 얼마 후 또 그동안 수도 없이 맡았던 이조참판에 제수된다.
 
  정조 19년 초 정조는 귀근(貴近), 즉 측근권간 정동준 사건으로 인해 일대 위기에 내몰렸다. 노론벽파는 말할 것도 없고 측근으로부터도 정조의 인사 스타일에 대한 깊은 의구심이 생겨났다. 2년 이상 특권을 누리며 권력을 휘둘렀던 정동준은 정조 19년 초 세상을 떠났다.
 
  상황은 심환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킨 쪽이 심환지, 움직이려 애쓴 쪽이 정조였다. 심환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이해 1월 28일 정조는 병조판서 이시수를 호조판서로 옮기고 심환지를 병조판서에 임명한다. 군권을 관장하는 병조판서에 썩 내켜하지 않는 심환지를 임명해야 할 만큼 당시 정조가 처한 상황은 곤혹스러웠다.
 
 
  정승이 된 심환지
 
  이후 규장각 제학, 대사헌, 경연 지사 등을 지낸 심환지는 10월 6일 이조판서에 오른다. 조선에서 병판에 이어 이판을 맡았다는 것은 여간한 심복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정조는 심환지를 어려워하면서 이 일을 맡겼다. 점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대부분 정조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많다.
 
  이조판서에 올라서도 반(反)남인 성향은 굽힐 줄 몰랐다. 이조판서가 된 지 불과 열흘도 안 된 10월 14일 정조가 남인들의 정신적·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해 숙종 때의 남인 정승 허적의 신원(伸寃)을 명하자 그 명을 거두어달라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대신 이듬해 4월 18일 정조가 6조판서들에게 고인이 된 사람 중에서 청백리를 추천토록 명하자 심환지는 전 영의정 서지수, 전 좌의정 김종수, 전 집의 박치륭을 추천했다. 김종수에 대한 보답이었다.
 
  정조 22년 8월 28일 정조는 복상(卜相·새로 정승을 가려 뽑음)을 해 심환지를 우의정에 임명한다. 우의정 이병정은 원래 홍낙성·채제공·김종수 3인을 추천했고 정조가 직접 심환지를 가복(加卜)한 다음 우의정에 임명한 것이다. 이병정은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이때 심환지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중이었다. 정조는 사관을 금강산으로 보내 심환지로 하여금 서둘러 올라오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 돈유문(敦諭文)에 보면 심환지에 대한 정조의 솔직한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심환지를 어려워하면서도 중책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다.
 
  “경의 탁 트인 풍모야말로 아첨 잘하고 오그라들기만 하는 습속(習俗)을 바로잡을 수 있는 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벼슬길이 늘 통하고 막히고 하는 가운데 10년 동안이나 불우하게 지냈는데도 굳게 참으며 궁색한 생활을 견뎌내었고, 요직(要職)에 올랐을 때에도 포의(布衣·벼슬 없는 선비) 때의 옛 자세를 바꾸지 않았으니, 조정 신하들을 두루 헤아려보건대 경처럼 훌륭한 자가 누가 있겠는가. 또 내가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만 경은 경연에서 조용히 마주하면서 절대로 꾸미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경을 깊이 인정하고 먼저 내각(內閣·판서)의 직함으로 빛내준 뒤에 이어 삼사(三事·정승)의 중책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몇 차례 사양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정조가 물리는 과정이 반복된 이후 두 사람이 대면하게 되는 것은 두 달이 지난 10월 28일이다. 이후 정조는 심환지에 대한 총애를 더해간다. 12월 30일 원래는 훈척(勳戚)이 맡도록 돼 있는 호위대장을 심환지로 하여금 겸직도록 한 것이다.
 
 
  정조와 심환지의 기싸움
 
  정조 23년 3월 들어 정조는 화완옹주를 석방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승정원에서는 그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정조의 전교를 반포하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정조가 왕실 강화 차원에서 척리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고모인 화완옹주 석방도 이런 맥락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에 좌의정 이병모와 우의정 심환지는 절대 따를 수 없다며 버텼다. 특히 심환지는 과격했다. 3월 7일 자 실록이다.
 
  “의리에는 본말이 있고, 역적에는 주모자와 추종자가 있습니다. 모년(某年)의 의리는 을미년의 의리가 되었고, 을미년의 의리는 병신년의 의리가 되었는데, 을미년과 병신년의 역적들은 정치달 처(화완옹주)가 바로 그들의 근본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인겸·정항간·윤양후·홍계능과 같은 여러 역적은 모두 정치달 처를 뒤에서 은밀히 후원하는 이로 삼았습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용서하여 석방해주고 이러한 내용의 전교를 팔도에 반포하고 후세에까지도 전해지게 한다면 ‘명의록’은 장차 아무 쓸모없는 책이 될 것이고 나라는 나라꼴이 안 될 것이며 사람들은 사람꼴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인군을 믿고 섬기는 것은 오직 이 의리가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라도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따를 수 없다는 통첩이었다. 정조는 “경의 말이 지나치다”고 경고했다. 이에 심환지는 즉석에서 관을 벗고 섬돌 아래 엎드려 대죄(待罪)했다. 정조는 대로하며 심환지를 우의정에서 파직시켰다. 그러나 사흘 후 정조는 심환지를 중추부 판사로 임명한다. 죄는 용서하되 한직으로 보낸 것이다.
 
  정조는 9월 28일 심환지를 좌의정에 제수한다. 늘 부담스러워했던 심환지를 좌의정에 제수한 정조의 심정은 어쩌면 참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10월 초 심환지는 좌의정에 취임하지만 한 달도 안 된 10월 27일 정조는 심환지에게 불서용의 법을 시행하라고 명한다. 뭔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의리 문제를 더 이상 논하지 말라고 한 정조의 금령(禁令)을 어겼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뜻을 따라주기를 원했고 심환지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기(氣)싸움에서 정조는 심환지에게 밀리고 있었다. 결국 11월 5일 정조는 심환지를 다시 좌의정에 제수한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는 사직소를 내며 정조의 뜻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결국 두 사람을 자르지 못한 것을 보면 정조가 한 걸음 물러섰다는 뜻이다. 정조는 심환지의 벽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정조의 실패
 
김조순
  이처럼 정조는 탕평으로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지만 특정 당파 앞에 사실상 굴복하면서 자기 시대를 마무리했다.
 
  게다가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1765~1832년)과 사돈을 맺어 안동 김씨 외척 정치 시대를 본인 손으로 열어놓았다.
 
  이로 인해 당쟁 시대가 끝나고 외척 세도 정치 시대가 열렸다. 군주정을 척도로 보자면 당쟁보다 나쁜 것이 외척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정조는 조선 왕실을 망쳤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게다가 당쟁을 없애보려다가 오히려 외척들을 불러들였으니 그의 정치는 우매했다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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