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는 영화·방송·문학 등에서 ‘표현의 자유’ 확대된 ‘解禁의 시대’
⊙ 愚民化 위해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 활용했다?
⊙ 영화계가 생존 위해 에로영화 제작했던 것은 韓·美·日 모두 마찬가지
⊙ ‘3S 정책’ 주장 바탕에는 ‘대중문화와 스포츠를 즐기는 대중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인식 깔려 있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愚民化 위해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 활용했다?
⊙ 영화계가 생존 위해 에로영화 제작했던 것은 韓·美·日 모두 마찬가지
⊙ ‘3S 정책’ 주장 바탕에는 ‘대중문화와 스포츠를 즐기는 대중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인식 깔려 있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 첫 경기에서 시구를 하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프로야구 출범은 흔히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진=조선DB
1980년대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실시했다는 이른바 ‘3S 정책’이 새삼 또 화제에 올랐다. 지난 5월 미얀마 쿠데타 군부(軍部)가 미얀마 대중에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와 모바일 게임 등의 접속을 허용한 방침 때문이다. 이 외에 미얀마 젊은이들이 즐겨 이용하는 데이트 매칭 애플리케이션 틴더 등 인터넷검열위원회 지시를 철저히 따르기로 한 1200여 개 인터넷 사이트와 모바일 서비스 접속도 일괄 허용키로 했다. 다만 군부의 만행을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SNS) 등의 접속은 계속 차단될 전망이다.
이 같은 미얀마 쿠데타 군부의 방침이 알려지자 국내 언론은 물론 이런저런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자연스럽게 한 가지 설명이 더 붙어 상황이 소개됐다. 이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과도 같은 방침이라는 설명이다. 대중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려 가볍고 자극적인 오락거리들만 제공하는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영화·스포츠·섹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미얀마 쿠데타 상황이 워낙 화제를 모으고 있어 눈에 띌 뿐이지, 사실 ‘3S 정책’은 여전히 언론보도 어디서나 등장하고 있다. 올해 1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7개월 동안 ‘3S 정책’을 거론한 언론 기사는 포털사이트 네이버 제휴 매체 기준만으로도 32건에 이른다. 근래까지 대략 일주일에 한 번꼴로 어느 매체에선가 이를 거론하고 있다는 얘기다. 방송도 만만치 않다. 당장 지난 2월 23일 방송된 KBS1 TV 〈역사저널 그날〉 302회에서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시절로 돌아가 ‘3S 정책’을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다. 앞서 소개한 미얀마 군부 방침부터 스포츠 정책, 문화예술 발전 흐름, 예비교원들에 대한 성인지 교육, 심지어 교권(敎權)을 유지하려는 종교계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도 ‘3S 정책’은 빠지지 않고 예시로서 등장한다.
그럼 ‘3S 정책’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일단 ‘두산백과’의 설명부터 살펴보자.
〈3S, 즉 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s), 섹스(sex)에 의한 우민(愚民)정책. 대중을 이와 같은 3S로 유도함으로써 우민화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말한다. 식민지 정책에 있어서 순치(馴致) 정책의 한 전형이다.〉
한편, 대중적으로 좀 더 널리 이용되는 ‘위키백과’에서는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대한민국에서는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거쳐 집권한 제5공화국 정부가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돌려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나 정치·사회적 이슈 제기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여러 우민화 정책을 묶어 이르는 표현이다.〉
韓日월드컵, 평창동계올림픽도 愚民化?
확실히 좀 신기한 개념이다. 대중문화와 스포츠 분야 육성 정책은 어느 정권에서나 등장해왔고, 성적(性的) 개방 풍조도 사실상 그 이후가 훨씬 격렬했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우민화하려던 대중문화와 스포츠 육성 정책 및 검열 완화 흐름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에만 존재했다고 한다. 결국 유사한 정책적 흐름이더라도 그를 바라보는 해석 차원에서 차이가 생긴다는 얘기이다. 그럼 먼저 전두환 정권 당시 어떤 정책 흐름을 두고 ‘3S’라 묶었는지부터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저런 언론보도 등을 통해 제시된 1980년대 ‘3S 정책’ 구성 내용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스포츠’ 분야 정책으로는, 좀 놀랍지만,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유치가 ‘3S’에 들어간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농구대잔치, 한국배구슈퍼리그 등의 출범도 이에 포함된다.
한편, ‘스크린’과 ‘섹스’는 사실상 겹치는 부분이 많다. 먼저 성(性) 묘사 수위 관련 검열을 약화시켜 1980년대 내내 에로영화가 범람했던 게 ‘3S’였다고 한다. 또 VCR 보급으로 불법 포르노 비디오테이프가 대거 유통된 것도 ‘3S’로 취급된다. 이 중 ‘섹스’에 국한되는 정책으로는 1982년 야간통행금지를 해제시켜 각종 유흥업소들이 늘어난 점을 꼽고, ‘스크린’에만 해당되는 정책으로는 1980년 컬러TV 방송 시작을 꼽는다.
‘3S 정책’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 실체는 이처럼 아리송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점이 많다.
가장 먼저, 세상에 올림픽 등 세계적 스포츠 경기 유치를 ‘우민화 정책’이라 말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단적으로, 그럼 한일(韓日)월드컵과 평창동계올림픽, 광주유니버시아드를 유치하려던 정권들도 똑같이 우민화를 꾀한 정권이냐는 것이다.
프로스포츠 개막이 ‘3S’라는 것도 여러모로 어이없는 얘기다. 가장 인기 있었던 프로야구만 해도 그렇다. 한국은 일제(日帝)시대 영향 등으로 어찌 됐건 야구에 대한 관심도 많고 인기도 높은 나라다. 그런 차원에서 1982년의 프로야구 개막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었다.
옆 나라 일본에서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가 성립돼 프로야구가 개막된 게 1950년의 일이다. 이때는 패전(敗戰)으로부터 고작 5년 뒤, 아직 미군정(美軍政) 시절이었다. 이제 막 재건이 시작되려 할 때 출범해 아직 여가거리가 충분치 않던 일본인들 삶에 활력소를 제공해주는 역할로서 기능했다. 우민화 정책이 아니라 공적(公的) 개념 차원에서 성립시켜 국민에게 제공해주는 서비스라 보는 게 상식적이다.
에로영화
한편 1980년대 에로영화 붐은 더더욱 어이없는 얘기다. 확실히 1980년대에는 에로영화가 범람한 게 사실이다. 프랜차이즈화된 인기 에로영화만 해도 〈애마부인〉 〈빨간앵두〉 〈뽕〉 〈변강쇠〉 〈매춘〉 등 상당히 많았다. 당연히 그만큼 인기가 있었기에 2편, 3편, 4편까지 프랜차이즈화된 것일 테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해지는 부분이 생긴다. 성 묘사 수위 관련 검열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너그러워지는’ 추세였다. 1990년대, 2000년대로 갈수록 더더욱 그랬다. 정상적 민주국가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다. 그런데 왜 1980년대에 유독, 정확히는 1970년대 중반 〈영자의 전성시대〉 등 ‘호스티스 영화 붐’부터 10여 년 동안에만 그처럼 에로영화 붐이 일었느냐는 것이다. 그보다 ‘더 풀린’ 1990년대에는 오히려 극장가에서 에로영화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말이다.
실상을 살펴보면, 이런 에로영화 붐은 사실 웬만한 선진국에서도 다 한 번은 겪던 일이란 점을 알게 된다. 일종의 문화적 홍역(紅疫)이라 볼 만하다. 이유도 단순하다. TV 보급률이 올라가면서 TV와의 경쟁에서 영화가 살아남기 위해 벌인 단기적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세계 대중문화의 메카 미국만 해도 1950년대부터 TV 보급률이 올라가면서 영화산업은 ‘TV가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제공하기 위해 시네마스코프 등 와이드스크린을 개발한 뒤 〈벤허〉 〈닥터 지바고〉 등 블록버스터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성 묘사에 대한 문화적 자유가 대폭 주어지자 그 정도 블록버스터 제작을 감당할 수 없는 군소(群小) 영화사들에선 X등급 포르노영화 제작으로 살길을 찾아갔다. 그 역시 같은 맥락, ‘TV가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좇은 결과다. 그렇게 10년 정도 미국 영화시장에선 대대적인 포르노영화 붐이 일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기준 1972년 북미 영화시장 연간 통산 흥행 4위와 8위가 X등급 포르노 영화 〈녹색 문 뒤에서〉와 〈목구멍 깊숙이〉였다. 그리고 11위도 포르노까지는 아니지만 어찌 됐건 성 묘사가 파격적이었던 이탈리아·프랑스 합작영화 〈파리의 마지막 탱고〉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에로영화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위의 X등급 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던 시절이라는 얘기다.
야간통행금지 해제도 ‘3S 정책’ 일환?
일본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 영화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에서 TV 보급률이 치솟던 1960년에는 아직 일본 영화계에 제대로 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낼 자본과 기술력이 없었다는 점 정도다. 그래서 일관되게 ‘로망 포르노’ 또는 ‘핑크영화’라 불리는 소프트코어 포르노로 생존을 꾀했다. 도산 위기에 놓여 있던 니카쓰(日活)영화사를 중심으로 일련의 소프트코어 포르노 영화들이 1960~70년대 영화시장을 휩쓸었다.
미국과 일본 모두 에로영화 붐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같았다. 그렇게 에로영화들을 통해 여력이 생긴 영화산업에서 어느 시점이 되자 야심 차게 블록버스터들을 내놓으며 시장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한국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에로영화들을 산소호흡기 삼아 연명해오다 1990년대 들어 대범한 투자로 〈구미호〉 〈퇴마록〉 〈쉬리〉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을 내놓으며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됐다.
결국 ‘스크린’과 ‘섹스’가 만났다는 1980년대 에로영화 붐도 우민화니 뭐니 하는 차원에서 해석될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사멸(死滅) 위기에 놓여 있던 올드미디어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 전 숨 고르기 단계, 말 그대로 홍역을 앓는 단계에 불과했다. 정권 차원에서 성 묘사에 대한 검열을 완화시켜 에로영화 붐을 유도했다는 식 입장에 대해선, 앞서 잠시 언급했듯, 무슨 종교혁명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민주사회의 모든 종류 사회·문화적 검열 기준은 꾸준히 완화되고 개방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되거나 심지어 그 반대로 가는 게 오히려 ‘나쁜 의도가 없었던 것’이라 여기는 쪽이 더 비정상적이지 않나 싶다.
한편 나머지 ‘3S’ 부분은 사실 거론하는 게 좀 이상한 수준이다. 야간통행금지 해제가 성 문란을 부추기기 위한 방침이었다느니, 하다못해 컬러TV 방송이 우민화를 노린 것이니 하는 대목 등 말이다. 불법 포르노비디오 유통을 유도했다는 대목은 아예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이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얘기다. 틈만 나면 비디오대여점들을 급습해 불법 비디오테이프를 적발하고, 압수된 비디오테이프를 산처럼 쌓아놓고 불 지르는 퍼포먼스를 벌여 그 기묘한 장면들이 때 되면 방송 뉴스 한 꼭지를 차지하곤 했다. 그런 퍼포먼스들을 통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소위 ‘삐짜’라 불리던 불법비디오 유통이 사실상 근절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그러니 당시 실제 벌어졌던 상황과는 정반대 얘기들을 하고 있는 셈이다.
포르투갈의 ‘3F 정책’
이제 저 허랑하기까지 한 ‘3S 정책’ 개념이 대체 언제 처음 거론되기 시작했는지 그 역사를 되짚어보기로 하자. 신문지상에서 ‘3S 정책’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결과로 《경향신문》 1983년 5월25일자 ‘여적’이 최초로 여겨진다. “흔히 스크린, 스포츠, 섹스의 두문자(頭文子)를 따라서 현대를 3S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어 1983년 11월 2일 국회 대정부 질문 당시 김정수 민권당 의원 질문 내용이 이런저런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김 의원은 당시 프로스포츠 상황을 지적하면서 “전형적인 3S 우민 정책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듬해 《동아일보》 1984년 5월24일자 기자칼럼 ‘홍보의 불균형’에서는 “백성들에게 최면을 거는 수단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현대국가에서는 이른바 3S 정책이 이용되고 있다”고 짚기도 했다.
그러니 대략 전두환 정권의 스포츠 및 대중문화 육성 정책이 시작되던 딱 그 시기 즈음부터 이미 우민화 목적으로서의 ‘3S 정책’ 개념이 견제 논리로서 동시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미리 마련돼 있었던 개념’이라고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로 지금의 해석도 그렇다. 한국의 ‘3S 정책’ 담론은 포르투갈 총리이자 독재자던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1932년부터 1968년까지 독재정치를 펴는 동안 시행했다는 ‘3F 정책’에서 힌트를 얻어 제시됐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3F는 풋볼(Futebol), 가톨릭 성지(파티마・Fatima), 민속음악(파두・Fado)를 가리킨다. 즉 스포츠, 종교, 문화예술을 육성하고 강조해 국민들을 우민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개념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포르투갈에서 시행했다는 ‘3F 정책’ 결과를 보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이런 걸 우민화 정책으로서 채택해 벤치마킹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 포르투갈 독재정권은 엄밀히 말해 ‘3F 정책’ 탓에 무너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두만 해도 그랬다. 그렇게 육성돼 대중적 영향력을 갖추게 된 파두가수들은 훗날 반(反)독재투쟁 선봉에 서게 됐다. 문화예술계 특유의 자유를 숭상하는 정서는 결국 이 아티스트들을 그렇게 이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영향이 1974년 ‘카네이션혁명’까지 간다. 카네이션혁명 당시 포르투갈 라디오방송에서 파두가수 주제 아폰수 노래를 틀며 대중을 독려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일관되게 교육 확대 추구
여기서부터는 대전제를 달리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생긴다. 대중을 우민화할 목적으로 시행되는 문화예술 분야 육성은 사실상 목적과는 정반대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화예술 육성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정치·사회적 ‘대중 각성(覺醒)’의 기반이 되곤 한다. 문화예술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의 가치를 일깨우고 그를 독려하는 흐름으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혹 그럼에도 ‘3F 정책’을 벤치마킹한 게 옳다고 가정(假定)한다면 논리가 더 이상해진다. 그렇게 육성된 문화예술 인력들이 반정부 시위 주역으로 나서는 모습까지 모두 지켜본 뒤에 시행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 포르투갈 독재정권은 엄밀히 ‘3F 정책’을 통해 우민화에 성공해 오래도록 유지됐던 게 아니다. 모든 우민화 정책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국민 교육 수준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키는 방침 하나뿐이다. 포르투갈도 그랬다. 문맹률(文盲率)을 낮추기 위해 초등교육만 강화했을 뿐 중·고등 교육은 의도적으로 소홀히 한 정책 흐름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그런데 한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 어느 시대건 국민 교육에 최고 가치를 두고 그 환경을 조성해온 흐름이다. 방향이 정반대다.
〈태백산맥〉도 1980년대에 나와
물론 그럼에도 한 가지 단서를 더 붙일 수는 있다. 사회·문화적 ‘표현의 자유’가 없는 문화예술 육성은 우민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 됐건 대중을 정치·사회 현안으로부터 눈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하긴 한다는 논리다. 일정 부분 수긍되는 점은 있다. 서두에 언급한 미얀마 쿠데타 군부의 방침이 딱 그런 종류다.
그런데 이 역시도 1980년대 당시 한국 상황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1980년대 한국 대중문화계 흐름은 사실상 해금(解禁)의 흐름이었다고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권 초반에는 상당히 까다롭고 어이없는 검열이 존재한 게 사실이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런저런 해금들이 이뤄지고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기 시작했다.
영화계만 해도 그랬다. 권력자들의 횡포와 비(非)윤리를 파격적 형식으로 담아낸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1983년),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우화(寓話)적 성격이 강했던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1983년), 거짓영웅과 신화를 만들어내는 매스미디어 세태를 풍자한 김유진 감독의 〈영웅연가〉(1986년) 등이 계속 쏟아져나왔다. 빈부격차(貧富格差)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그 갈등을 묘사한 영화들은 〈어둠의 자식들〉(1981년) 등 수없이 등장했다. 모두 1970년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국면이었고, 실제적으로 해금의 흐름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방송계도 마찬가지다. 개그맨 ‘배추머리’ 김병조가 국내 최초로 세태풍자 코미디를 선보인 MBC TV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1981년 시작됐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지구를 떠나거라” 등의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비록 정치권 문제까지 닿지는 못했지만, 소위 ‘가진 자’들에 대한 비판 정도는 어렵지 않게 풍자 대상으로 삼았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큰 성공을 거두자 후발주자로 등장한 게 KBS2 TV 예능 프로그램 〈유머1번지〉고, 여기서 개그맨 김형곤이 정치 포함 노골적 세태풍자로 어마어마한 신드롬을 일으킨 코너가 바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족벌(族閥)경영, 노사(勞使)문제, 심지어 당시 극도로 예민한 소재던 금강산댐 문제까지 풍자 대상으로 삼아 비판을 가했다.
덧붙이자면, 1980~9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취급을 받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한 게 1983년 9월부터다. 단행본 기준으로는 1986년 제1부 3권이 완결됐고, 1987년에 제2부 2권, 1988년 제3부 2권, 1989년 제4부 3권이 출간됐다. 1980년대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고발됐다고 많이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김영삼 정권 당시인 1994년 일어난 일이다.
결국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문화예술을 육성하면서 동시에 ‘표현의 자유’도 최소한 이전에 비해 대폭 향상시키는 흐름을 택했다는 얘기다. 우민화 방향에서 거리가 멀고, 엄밀히 ‘3S 정책’이라는 개념 자체를 성립시키기도 어려운 조건이다.
‘떼팩트’
수년 전 필자는 어느 케이블방송과 인터뷰하면서 다소 당혹스러운 경험을 한 일이 있다. 어느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이 사실은 치정(癡情) 관계였다던, 널리 알려진 ‘소문’을 놓고 그에 대한 코멘트를 해달라는 요구를 받은 일이다. 이에 해당 소문 관련으로 제대로 밝혀진 팩트가 없어 그에 대한 코멘트를 하기는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자, 담당 PD는 다소 짜증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웬만한 사람들 다 알고 있는 얘기인데, 그 정도면 정설이라고 봐도 좋은 것 아닌가요?”
횡단보도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럿이 ‘떼’로 건너면 된다. 그런 속성이 법체계에 적용되는 상황을 ‘떼법’이라 비꼬기도 하지만, 위 상황까지 가면 가히 ‘떼팩트’라고 불러도 될 법하다. 아무런 증거 없이도 그저 여러 사람이 그런 줄 알고 있다면 곧 팩트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이니 말이다.
많은 점에서 ‘3S 정책’도 마찬가지다. ‘3S를 시행하라’는 식의 문서나 방침 같은 게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고, 위에서 살펴봤듯, 전두환 정권 당시 스포츠와 대중문화 육성 방침이라는 것도 그 안에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으리라 가늠해본다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 그런데도 ‘3S 정책’이란 건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며 지금도 그렇게 거론되고 있다. 여전히 2021년 7개월 동안만도 32개 텍스트 기사가 쏟아지고 지상파 방송에도 등장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근거 따위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단지 그 이유 하나로 그건 곧 팩트처럼 취급되고 있다. ‘떼팩트’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에 의해 가려지는 부분이 있다. 1980년대의 사회·문화적 공기(空氣)에 대해서다. 지금은 ‘3S 정책’이라는 프레임 하나로 규정돼버리다시피 했지만, 실제 당시 상황은 국민 소득성장에 따른 대중의 사회·문화적 자유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해나간 흐름으로 볼 수 있다. “6·29선언은 궁극적으로 1인당 GDP 3000달러 시대가 열었다”는 말로 잘 표현된다.
한국의 1980년대는 비단 문화예술 분야와 스포츠만 육성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외에도 중·고교생 두발 자유화, 교복 폐지 등 다양한 차원에서 사회·문화적 자유를 실험하던 시기다. 1970년대 미니스커트・장발 단속 등을 포기함은 물론이다. 이런 정책적 흐름 또한 우민화를 꾀한 것이라 몰아세운다면, 진즉부터 사회·문화적 자유를 기반 삼아온 서구 선진국들은 모조리 우민화 정책 원조가 되는 것일 테다.
또 있다. 그럼 북한 등 ‘진정한 우민화’를 꾀하는 나라에선 왜 ‘3S 정책’조차 안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처럼 ‘표현의 자유’를 점진적으로 확보시키며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풀어놓기만 해도 국민은 전부 바보가 돼버린다는 논리인데, 그대로 시행했다면 그 나라 차원에서 불온한(?) 사상을 품는 이들은 아무도 없지 않았을까.
‘3S 정책’ 주장은 시대착오적
어쩌면 진정 답답한 부분은 또 다른 차원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3S 정책’ 개념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건 ‘대중문화와 스포츠를 즐기는 대중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 빠져 있으면 세상사 중요한 일들은 아무것도 모르게 되고, 말 그대로 우민이 돼버린다는 고정관념. 그야말로 연예인을 ‘딴따라’,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던 시절, 인간의 삶에서 문화예술이 차지하는 역할과 그 본질・가치들을 한껏 폄하하던 시절에나 통용되던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 자체가 어찌 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시대착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찌 됐건 이처럼 엄밀한 팩트가 아니라 일종의 프레임으로서 인식이 성립되고 굳어버린 과거사(過去事) 관련 지점 중에는, 객관적으로 잘 따져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이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기능하고 있는 건, 그 프레임 자체가 대중이 지닌 여러 고정관념, 콤플렉스, 인식의 사각(死角) 등을 의도적으로 겨냥해 설계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마 내년에도 후년에도, ‘3S 정책’은 여전히 여기저기서 버젓이 거론되고 있을 테다. 참 복잡한 난제(難題)다.⊙
이 같은 미얀마 쿠데타 군부의 방침이 알려지자 국내 언론은 물론 이런저런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자연스럽게 한 가지 설명이 더 붙어 상황이 소개됐다. 이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과도 같은 방침이라는 설명이다. 대중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려 가볍고 자극적인 오락거리들만 제공하는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영화·스포츠·섹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미얀마 쿠데타 상황이 워낙 화제를 모으고 있어 눈에 띌 뿐이지, 사실 ‘3S 정책’은 여전히 언론보도 어디서나 등장하고 있다. 올해 1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7개월 동안 ‘3S 정책’을 거론한 언론 기사는 포털사이트 네이버 제휴 매체 기준만으로도 32건에 이른다. 근래까지 대략 일주일에 한 번꼴로 어느 매체에선가 이를 거론하고 있다는 얘기다. 방송도 만만치 않다. 당장 지난 2월 23일 방송된 KBS1 TV 〈역사저널 그날〉 302회에서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시절로 돌아가 ‘3S 정책’을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다. 앞서 소개한 미얀마 군부 방침부터 스포츠 정책, 문화예술 발전 흐름, 예비교원들에 대한 성인지 교육, 심지어 교권(敎權)을 유지하려는 종교계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도 ‘3S 정책’은 빠지지 않고 예시로서 등장한다.
그럼 ‘3S 정책’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일단 ‘두산백과’의 설명부터 살펴보자.
〈3S, 즉 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s), 섹스(sex)에 의한 우민(愚民)정책. 대중을 이와 같은 3S로 유도함으로써 우민화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말한다. 식민지 정책에 있어서 순치(馴致) 정책의 한 전형이다.〉
한편, 대중적으로 좀 더 널리 이용되는 ‘위키백과’에서는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대한민국에서는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거쳐 집권한 제5공화국 정부가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돌려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나 정치·사회적 이슈 제기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여러 우민화 정책을 묶어 이르는 표현이다.〉
韓日월드컵, 평창동계올림픽도 愚民化?
확실히 좀 신기한 개념이다. 대중문화와 스포츠 분야 육성 정책은 어느 정권에서나 등장해왔고, 성적(性的) 개방 풍조도 사실상 그 이후가 훨씬 격렬했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우민화하려던 대중문화와 스포츠 육성 정책 및 검열 완화 흐름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에만 존재했다고 한다. 결국 유사한 정책적 흐름이더라도 그를 바라보는 해석 차원에서 차이가 생긴다는 얘기이다. 그럼 먼저 전두환 정권 당시 어떤 정책 흐름을 두고 ‘3S’라 묶었는지부터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저런 언론보도 등을 통해 제시된 1980년대 ‘3S 정책’ 구성 내용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스포츠’ 분야 정책으로는, 좀 놀랍지만,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유치가 ‘3S’에 들어간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농구대잔치, 한국배구슈퍼리그 등의 출범도 이에 포함된다.
한편, ‘스크린’과 ‘섹스’는 사실상 겹치는 부분이 많다. 먼저 성(性) 묘사 수위 관련 검열을 약화시켜 1980년대 내내 에로영화가 범람했던 게 ‘3S’였다고 한다. 또 VCR 보급으로 불법 포르노 비디오테이프가 대거 유통된 것도 ‘3S’로 취급된다. 이 중 ‘섹스’에 국한되는 정책으로는 1982년 야간통행금지를 해제시켜 각종 유흥업소들이 늘어난 점을 꼽고, ‘스크린’에만 해당되는 정책으로는 1980년 컬러TV 방송 시작을 꼽는다.
‘3S 정책’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 실체는 이처럼 아리송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점이 많다.
가장 먼저, 세상에 올림픽 등 세계적 스포츠 경기 유치를 ‘우민화 정책’이라 말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단적으로, 그럼 한일(韓日)월드컵과 평창동계올림픽, 광주유니버시아드를 유치하려던 정권들도 똑같이 우민화를 꾀한 정권이냐는 것이다.
프로스포츠 개막이 ‘3S’라는 것도 여러모로 어이없는 얘기다. 가장 인기 있었던 프로야구만 해도 그렇다. 한국은 일제(日帝)시대 영향 등으로 어찌 됐건 야구에 대한 관심도 많고 인기도 높은 나라다. 그런 차원에서 1982년의 프로야구 개막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었다.
옆 나라 일본에서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가 성립돼 프로야구가 개막된 게 1950년의 일이다. 이때는 패전(敗戰)으로부터 고작 5년 뒤, 아직 미군정(美軍政) 시절이었다. 이제 막 재건이 시작되려 할 때 출범해 아직 여가거리가 충분치 않던 일본인들 삶에 활력소를 제공해주는 역할로서 기능했다. 우민화 정책이 아니라 공적(公的) 개념 차원에서 성립시켜 국민에게 제공해주는 서비스라 보는 게 상식적이다.
에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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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표적 에로영화 〈애마부인〉과 〈뽕〉. |
그런데 여기서 의아해지는 부분이 생긴다. 성 묘사 수위 관련 검열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너그러워지는’ 추세였다. 1990년대, 2000년대로 갈수록 더더욱 그랬다. 정상적 민주국가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다. 그런데 왜 1980년대에 유독, 정확히는 1970년대 중반 〈영자의 전성시대〉 등 ‘호스티스 영화 붐’부터 10여 년 동안에만 그처럼 에로영화 붐이 일었느냐는 것이다. 그보다 ‘더 풀린’ 1990년대에는 오히려 극장가에서 에로영화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말이다.
실상을 살펴보면, 이런 에로영화 붐은 사실 웬만한 선진국에서도 다 한 번은 겪던 일이란 점을 알게 된다. 일종의 문화적 홍역(紅疫)이라 볼 만하다. 이유도 단순하다. TV 보급률이 올라가면서 TV와의 경쟁에서 영화가 살아남기 위해 벌인 단기적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세계 대중문화의 메카 미국만 해도 1950년대부터 TV 보급률이 올라가면서 영화산업은 ‘TV가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제공하기 위해 시네마스코프 등 와이드스크린을 개발한 뒤 〈벤허〉 〈닥터 지바고〉 등 블록버스터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성 묘사에 대한 문화적 자유가 대폭 주어지자 그 정도 블록버스터 제작을 감당할 수 없는 군소(群小) 영화사들에선 X등급 포르노영화 제작으로 살길을 찾아갔다. 그 역시 같은 맥락, ‘TV가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좇은 결과다. 그렇게 10년 정도 미국 영화시장에선 대대적인 포르노영화 붐이 일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기준 1972년 북미 영화시장 연간 통산 흥행 4위와 8위가 X등급 포르노 영화 〈녹색 문 뒤에서〉와 〈목구멍 깊숙이〉였다. 그리고 11위도 포르노까지는 아니지만 어찌 됐건 성 묘사가 파격적이었던 이탈리아·프랑스 합작영화 〈파리의 마지막 탱고〉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에로영화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위의 X등급 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던 시절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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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월 5일 통금해제 후 처음 맞는 주말인 1월 9일 밤, 서울 시민들은 야경을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사진=조선DB |
미국과 일본 모두 에로영화 붐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같았다. 그렇게 에로영화들을 통해 여력이 생긴 영화산업에서 어느 시점이 되자 야심 차게 블록버스터들을 내놓으며 시장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한국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에로영화들을 산소호흡기 삼아 연명해오다 1990년대 들어 대범한 투자로 〈구미호〉 〈퇴마록〉 〈쉬리〉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을 내놓으며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됐다.
결국 ‘스크린’과 ‘섹스’가 만났다는 1980년대 에로영화 붐도 우민화니 뭐니 하는 차원에서 해석될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사멸(死滅) 위기에 놓여 있던 올드미디어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 전 숨 고르기 단계, 말 그대로 홍역을 앓는 단계에 불과했다. 정권 차원에서 성 묘사에 대한 검열을 완화시켜 에로영화 붐을 유도했다는 식 입장에 대해선, 앞서 잠시 언급했듯, 무슨 종교혁명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민주사회의 모든 종류 사회·문화적 검열 기준은 꾸준히 완화되고 개방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되거나 심지어 그 반대로 가는 게 오히려 ‘나쁜 의도가 없었던 것’이라 여기는 쪽이 더 비정상적이지 않나 싶다.
한편 나머지 ‘3S’ 부분은 사실 거론하는 게 좀 이상한 수준이다. 야간통행금지 해제가 성 문란을 부추기기 위한 방침이었다느니, 하다못해 컬러TV 방송이 우민화를 노린 것이니 하는 대목 등 말이다. 불법 포르노비디오 유통을 유도했다는 대목은 아예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이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얘기다. 틈만 나면 비디오대여점들을 급습해 불법 비디오테이프를 적발하고, 압수된 비디오테이프를 산처럼 쌓아놓고 불 지르는 퍼포먼스를 벌여 그 기묘한 장면들이 때 되면 방송 뉴스 한 꼭지를 차지하곤 했다. 그런 퍼포먼스들을 통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소위 ‘삐짜’라 불리던 불법비디오 유통이 사실상 근절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그러니 당시 실제 벌어졌던 상황과는 정반대 얘기들을 하고 있는 셈이다.
포르투갈의 ‘3F 정책’
이제 저 허랑하기까지 한 ‘3S 정책’ 개념이 대체 언제 처음 거론되기 시작했는지 그 역사를 되짚어보기로 하자. 신문지상에서 ‘3S 정책’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결과로 《경향신문》 1983년 5월25일자 ‘여적’이 최초로 여겨진다. “흔히 스크린, 스포츠, 섹스의 두문자(頭文子)를 따라서 현대를 3S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어 1983년 11월 2일 국회 대정부 질문 당시 김정수 민권당 의원 질문 내용이 이런저런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김 의원은 당시 프로스포츠 상황을 지적하면서 “전형적인 3S 우민 정책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듬해 《동아일보》 1984년 5월24일자 기자칼럼 ‘홍보의 불균형’에서는 “백성들에게 최면을 거는 수단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현대국가에서는 이른바 3S 정책이 이용되고 있다”고 짚기도 했다.
그러니 대략 전두환 정권의 스포츠 및 대중문화 육성 정책이 시작되던 딱 그 시기 즈음부터 이미 우민화 목적으로서의 ‘3S 정책’ 개념이 견제 논리로서 동시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미리 마련돼 있었던 개념’이라고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로 지금의 해석도 그렇다. 한국의 ‘3S 정책’ 담론은 포르투갈 총리이자 독재자던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1932년부터 1968년까지 독재정치를 펴는 동안 시행했다는 ‘3F 정책’에서 힌트를 얻어 제시됐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3F는 풋볼(Futebol), 가톨릭 성지(파티마・Fatima), 민속음악(파두・Fado)를 가리킨다. 즉 스포츠, 종교, 문화예술을 육성하고 강조해 국민들을 우민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개념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포르투갈에서 시행했다는 ‘3F 정책’ 결과를 보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이런 걸 우민화 정책으로서 채택해 벤치마킹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 포르투갈 독재정권은 엄밀히 말해 ‘3F 정책’ 탓에 무너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두만 해도 그랬다. 그렇게 육성돼 대중적 영향력을 갖추게 된 파두가수들은 훗날 반(反)독재투쟁 선봉에 서게 됐다. 문화예술계 특유의 자유를 숭상하는 정서는 결국 이 아티스트들을 그렇게 이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영향이 1974년 ‘카네이션혁명’까지 간다. 카네이션혁명 당시 포르투갈 라디오방송에서 파두가수 주제 아폰수 노래를 틀며 대중을 독려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일관되게 교육 확대 추구
여기서부터는 대전제를 달리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생긴다. 대중을 우민화할 목적으로 시행되는 문화예술 분야 육성은 사실상 목적과는 정반대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화예술 육성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정치·사회적 ‘대중 각성(覺醒)’의 기반이 되곤 한다. 문화예술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의 가치를 일깨우고 그를 독려하는 흐름으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혹 그럼에도 ‘3F 정책’을 벤치마킹한 게 옳다고 가정(假定)한다면 논리가 더 이상해진다. 그렇게 육성된 문화예술 인력들이 반정부 시위 주역으로 나서는 모습까지 모두 지켜본 뒤에 시행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 포르투갈 독재정권은 엄밀히 ‘3F 정책’을 통해 우민화에 성공해 오래도록 유지됐던 게 아니다. 모든 우민화 정책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국민 교육 수준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키는 방침 하나뿐이다. 포르투갈도 그랬다. 문맹률(文盲率)을 낮추기 위해 초등교육만 강화했을 뿐 중·고등 교육은 의도적으로 소홀히 한 정책 흐름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그런데 한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 어느 시대건 국민 교육에 최고 가치를 두고 그 환경을 조성해온 흐름이다. 방향이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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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세태풍자 코미디를 선보인 개그맨 김병조. 사진=조선DB |
그런데 이 역시도 1980년대 당시 한국 상황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1980년대 한국 대중문화계 흐름은 사실상 해금(解禁)의 흐름이었다고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권 초반에는 상당히 까다롭고 어이없는 검열이 존재한 게 사실이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런저런 해금들이 이뤄지고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기 시작했다.
영화계만 해도 그랬다. 권력자들의 횡포와 비(非)윤리를 파격적 형식으로 담아낸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1983년),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우화(寓話)적 성격이 강했던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1983년), 거짓영웅과 신화를 만들어내는 매스미디어 세태를 풍자한 김유진 감독의 〈영웅연가〉(1986년) 등이 계속 쏟아져나왔다. 빈부격차(貧富格差)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그 갈등을 묘사한 영화들은 〈어둠의 자식들〉(1981년) 등 수없이 등장했다. 모두 1970년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국면이었고, 실제적으로 해금의 흐름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방송계도 마찬가지다. 개그맨 ‘배추머리’ 김병조가 국내 최초로 세태풍자 코미디를 선보인 MBC TV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1981년 시작됐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지구를 떠나거라” 등의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비록 정치권 문제까지 닿지는 못했지만, 소위 ‘가진 자’들에 대한 비판 정도는 어렵지 않게 풍자 대상으로 삼았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큰 성공을 거두자 후발주자로 등장한 게 KBS2 TV 예능 프로그램 〈유머1번지〉고, 여기서 개그맨 김형곤이 정치 포함 노골적 세태풍자로 어마어마한 신드롬을 일으킨 코너가 바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족벌(族閥)경영, 노사(勞使)문제, 심지어 당시 극도로 예민한 소재던 금강산댐 문제까지 풍자 대상으로 삼아 비판을 가했다.
덧붙이자면, 1980~9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취급을 받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한 게 1983년 9월부터다. 단행본 기준으로는 1986년 제1부 3권이 완결됐고, 1987년에 제2부 2권, 1988년 제3부 2권, 1989년 제4부 3권이 출간됐다. 1980년대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고발됐다고 많이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김영삼 정권 당시인 1994년 일어난 일이다.
결국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문화예술을 육성하면서 동시에 ‘표현의 자유’도 최소한 이전에 비해 대폭 향상시키는 흐름을 택했다는 얘기다. 우민화 방향에서 거리가 멀고, 엄밀히 ‘3S 정책’이라는 개념 자체를 성립시키기도 어려운 조건이다.
‘떼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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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장발 단속 모습. 이런 풍경이 사라진 것도 1980년대였다. 사진=조선DB |
“웬만한 사람들 다 알고 있는 얘기인데, 그 정도면 정설이라고 봐도 좋은 것 아닌가요?”
횡단보도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럿이 ‘떼’로 건너면 된다. 그런 속성이 법체계에 적용되는 상황을 ‘떼법’이라 비꼬기도 하지만, 위 상황까지 가면 가히 ‘떼팩트’라고 불러도 될 법하다. 아무런 증거 없이도 그저 여러 사람이 그런 줄 알고 있다면 곧 팩트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이니 말이다.
많은 점에서 ‘3S 정책’도 마찬가지다. ‘3S를 시행하라’는 식의 문서나 방침 같은 게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고, 위에서 살펴봤듯, 전두환 정권 당시 스포츠와 대중문화 육성 방침이라는 것도 그 안에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으리라 가늠해본다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 그런데도 ‘3S 정책’이란 건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며 지금도 그렇게 거론되고 있다. 여전히 2021년 7개월 동안만도 32개 텍스트 기사가 쏟아지고 지상파 방송에도 등장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근거 따위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단지 그 이유 하나로 그건 곧 팩트처럼 취급되고 있다. ‘떼팩트’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에 의해 가려지는 부분이 있다. 1980년대의 사회·문화적 공기(空氣)에 대해서다. 지금은 ‘3S 정책’이라는 프레임 하나로 규정돼버리다시피 했지만, 실제 당시 상황은 국민 소득성장에 따른 대중의 사회·문화적 자유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해나간 흐름으로 볼 수 있다. “6·29선언은 궁극적으로 1인당 GDP 3000달러 시대가 열었다”는 말로 잘 표현된다.
한국의 1980년대는 비단 문화예술 분야와 스포츠만 육성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외에도 중·고교생 두발 자유화, 교복 폐지 등 다양한 차원에서 사회·문화적 자유를 실험하던 시기다. 1970년대 미니스커트・장발 단속 등을 포기함은 물론이다. 이런 정책적 흐름 또한 우민화를 꾀한 것이라 몰아세운다면, 진즉부터 사회·문화적 자유를 기반 삼아온 서구 선진국들은 모조리 우민화 정책 원조가 되는 것일 테다.
또 있다. 그럼 북한 등 ‘진정한 우민화’를 꾀하는 나라에선 왜 ‘3S 정책’조차 안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처럼 ‘표현의 자유’를 점진적으로 확보시키며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풀어놓기만 해도 국민은 전부 바보가 돼버린다는 논리인데, 그대로 시행했다면 그 나라 차원에서 불온한(?) 사상을 품는 이들은 아무도 없지 않았을까.
‘3S 정책’ 주장은 시대착오적
어쩌면 진정 답답한 부분은 또 다른 차원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3S 정책’ 개념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건 ‘대중문화와 스포츠를 즐기는 대중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 빠져 있으면 세상사 중요한 일들은 아무것도 모르게 되고, 말 그대로 우민이 돼버린다는 고정관념. 그야말로 연예인을 ‘딴따라’,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던 시절, 인간의 삶에서 문화예술이 차지하는 역할과 그 본질・가치들을 한껏 폄하하던 시절에나 통용되던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 자체가 어찌 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시대착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찌 됐건 이처럼 엄밀한 팩트가 아니라 일종의 프레임으로서 인식이 성립되고 굳어버린 과거사(過去事) 관련 지점 중에는, 객관적으로 잘 따져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이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기능하고 있는 건, 그 프레임 자체가 대중이 지닌 여러 고정관념, 콤플렉스, 인식의 사각(死角) 등을 의도적으로 겨냥해 설계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마 내년에도 후년에도, ‘3S 정책’은 여전히 여기저기서 버젓이 거론되고 있을 테다. 참 복잡한 난제(難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