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西人의 행동대장 조헌이 선조 19년(1586년)에 올린 ‘萬言疎’, 당시 黨爭 상황 잘 보여줘
⊙ 道學보다 王權 중시한 東人, 임금보다 朱子 우선한 西人
⊙ 송익필, 直과 禮를 앞세워 西人의 臣權 이론 정립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道學보다 王權 중시한 東人, 임금보다 朱子 우선한 西人
⊙ 송익필, 直과 禮를 앞세워 西人의 臣權 이론 정립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조헌
이건창의 《당의통략》은 공주교수(公州敎授) 조헌(趙憲)이 소(疏)를 올렸을 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700의총’의 그 조헌이다.
“공주의 교수 조헌과 생원 이귀(李貴)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었는데 자주 소를 올려 스승의 원통함을 말하고 또 노수신(盧守愼), 정유일(鄭惟一), 유전(柳㙉), 이산해(李山海), 권극례(權克禮), 김응남(金應南), 백유양(白惟讓), 노직(盧稙), 송언신(宋言愼), 이호민(李好閔), 노직(盧稷) 등을 함께 헐뜯었으나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 조헌이 소를 올리자 임금은 그 소를 모두 불사르라고 하고 조헌을 귀양 보냈다.”
때는 선조 18~19년 사이다. 선조 17년(1584년) 1월 이이(李珥)가 세상을 떠나고 그 후임으로 이조판서를 맡은 이는 동인(東人)의 이산해였다. 물론 서인(西人) 중에서는 정철(鄭澈)이 조정에 남아 있었고 대체로 서인에 가까운 노수신이 좌의정에 있었지만, 동인은 서인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선조 18년 5월에는 마침내 서인의 실세였던 대비의 동생 심의겸도 파직당했다. 1년 후인 선조 19년이 되면 조정은 거의 동인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헌의 ‘萬言疎’
왕권(王權) 강화를 도모하는 선조 입장에서는 일당천정(一黨擅政), 즉 오늘날의 용어로 하면 일당독재가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선조 19년(1586년) 선조가 한 달여 전에 구언(求言), 즉 신하들에게 좋은 말을 올려줄 것을 청했다. 이에 응해 충청도 공주의 교수(敎授)로 있던 조헌이라는 인물이 흔히 ‘만언소(萬言疏)’로 불리는 장문의 소(疏)를 올렸다. 그런데 선조는 이를 즉각 공개하고 있지 않다가 “수십 일 동안 궁내에 그냥 두고 답을 내리지 않으니” 이때 조헌은 다시 소를 올려 공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는 곧 자신이 처음에 올렸던 원래의 소에 대한 임금의 실질적인 조치를 압박한 것이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그 문제의 소 내용과 관련해 아주 짤막하게 “공주 교수 조헌이 소를 올려 이이·성혼(成渾)의 학술의 바름과 나라에 충성한 정성을 극력 진술하고, 시인(時人·현재 정권을 쥔 동인)이 나라를 그르치고 뛰어난 이를 방해하는 것을 배척하였는데 내용이 몹시 길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편찬됐으니 당연히 동인을 이은 북인(北人)의 시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조헌의 상소를 살짝 언급만 하는 데 그쳤다. 당연히 조헌은 서인이다. 지위는 정철보다 크게 낮았지만 비슷하게 서인의 행동대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훗날 서인 시각에서 다시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는 파격적으로 조헌의 만언소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그가 급진적 서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잘 해독한다면 이 문건은 조선 초 당쟁사 실상에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사실 조헌의 상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인은 옳고 동인은 그르다는 시각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주요 대목을 짚어보자.
‘심의겸은 호언 같은 충신’
서인의 보호자인 정승 박순(朴淳)에 대한 조헌의 서술이다.
“박순더러 당여(黨與)를 심었다고 하는데 그가 천거해 쓴 사람은 기개를 숭상하고 염치가 있는 동서남북의 사람이니 오늘날 시배(時輩·현직에 있는 동인)들의 형제와 친인척이 모두 현달한 자리에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서경덕의 문인인 박순은 그저 서인세력에 얹혀 있던 정승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동인의 영수로까지 떠오른 이발(李潑)과 그의 동생 이길(李洁)에 대한 언급이다.
“대체로 이발·이길이 처음에 성혼·이이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면서 자신을 굽히고 남에게 겸허했으므로 칭예(稱譽)하는 사람이 많아서 선인(善人)이란 이름을 얻었고, 성혼·이이도 함께 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심의겸이 김효원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서는 그 무리가 심의겸과 일을 같이하는 자는 박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에 이발의 무리가 몰래 김효원을 주도해 심의겸을 모함하고 박순을 내쫓으려고 힘썼는데, 정인홍(鄭仁弘)·김우옹(金宇顒)은 그들의 술책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혼과 이이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심의겸이 병통이 있기는 하나 평생의 일을 살펴보면 나라 일에 마음과 힘을 다 바치고 스스로를 봉식(封植)하지 않았으니, 외부의 의논이 비등하다 하여 호언(狐偃) 같은 충신을 가벼이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발과 김우옹·정인홍은 성혼이 심의겸을 편든다고만 의심했을 뿐 이것이 국인(國人)의 공언(公言)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발·이길·정인홍·김우옹은 동인이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정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심의겸과 김효원이 충돌할 때 이발이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이이나 성혼이 같은 파주 4인방 중 하나인 심의겸을 호언처럼 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이이가 선조 앞에서 심의겸에 대해 그저 그렇게 평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호언은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서 진 문공(晉文公)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망명해 외국에 가 있었는데, 호언이 19년 동안 수행하였다. 진 문공이 귀국해 임금이 된 뒤에는 문공을 도와 주실(周室)의 난을 평정하고 패업(覇業)을 이룩했다. 서인들이 심의겸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와 속생각을 알 수 있다.
이산해와 이발
또 동인의 모주(謀主)이자 노련한 정객 이산해와 이발·이길의 관계에 대한 언급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발·이길의 무리는 기필코 일시의 청류(淸流)를 잡아다가 일망타진하니 편당(偏黨)의 해가 이미 온 나라를 텅 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산해는 그의 기염(氣焰)을 두려워하여 조부(祖父)의 여풍(餘風)을 잃어버렸고, 옛날 종유(從遊)하던 바를 잊은 채 겁내고 두려워하고 시종 벼슬을 잃어버릴까만 근심하였습니다.”
이산해는 어려서는 이이·정철·송익필 등과도 가까웠다. 이산해의 조부는 이치(李穉)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숙부 이파(李坡)와 함께 진도(珍島)에 유배됐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이 점을 들어 이산해가 강직한 조부의 기풍이 없음을 비판하고 자신들을 배신한 데 대한 ‘서운함’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산해의 변신은 주희(朱熹)의 도학(道學)을 버리고 왕의 신하의 길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이산해의 무리가 이발·이길이 위세가 있어 박순과 정철을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겨 급급히 그들을 임용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발이 선조에게 올린 소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신은 일찍부터 경세(經世)에서는 이이를 인정했고 도학(道學)에서는 성혼을 추앙해 평소에 두텁게 사귀었으나, 지금은 공론이 중요하고 사사로운 감정은 가벼운 것입니다. 옛 친구도 생각해야 하지만 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이는 이발뿐만 아니라 이산해의 신조이기도 하고 유성룡(柳成龍)을 포함한 동인 전체가 공유한 코드였다고 볼 수 있다.
임금보다 주희
반면에 서인은 임금보다는 주희였다. 이 점은 조헌의 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가 이이를 높인 것도 주희 때문임을 밝힌다.
“이이의 높은 행실과 올바른 언론은 진실로 당세를 경동시킬 만한 것이었고, 평소의 말과 노래는 언제나 주자를 배우고 싶어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황해도 해주)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주자의 백록 학규와 십훈의 뜻을 미루어 넓혀서 별도의 규약을 만들고 그것으로 찾아오는 선비들을 가르치니, 많은 이들이 흥기되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바른 도리로 어린 선비들을 가르치고 예(禮)로써 풍속을 순화하는 데 편리하고, 지어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몸을 닦고 집을 바르게 다스리며 정치를 하는 데 관한 방법을 빠짐없이 포괄하였고, 강령과 절목(節目)이 조리 정연하게 짜여 있습니다. 신이 전일 한번 본 적이 있었으나 직접 한 권을 소장하여 옆에 두고 볼 수 없었고, 다만 서실의 규약과 《격몽요결》을 가지고 향족(鄕族)의 어린이들을 시험 삼아 가르쳤는데, 그로 인하여 《소학(小學)》 《가례(家禮)》로 들어가고 《근사록(近思錄)》·사서(四書)로 들어가는 데 매우 쉽고 빨랐습니다.”
마지막 문장에는 고스란히 주희의 교조체계를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이이의 역할은 이런 체계로 들어가는 입문 과정인 셈이었다. 게다가 이이가 편찬한 《성학집요》에 대한 언급을 보면 조헌이 그 책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학집요》와 《대학연의》
이이의 거의 유일한 학술서적이라 할 수 있는 《성학집요》는 홍문관 부제학이던 이이가 선조에게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쓴 성학(聖學), 즉 제왕학의 텍스트이다. 실은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모범으로 삼아 쓴 ‘조선판 대학연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이는 서문에서 “《대학연의》는 권수가 너무 많고 문장이 산만하며 사건의 경과를 기록한 글과 같고, 참다운 학문의 체계가 아니어서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모두 좋지는 않습니다” 하며 약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경전을 널리 인용하고 역사책을 두루 끌어들여서 학문의 근본과 다스림의 차례가 환하게 체계적으로 드러났으면서도 임금의 몸에 중점을 두었으니 참으로 제왕이 도에 들어가는 지침입니다”라며 극찬을 하고 있다.
솔직히 둘 다 면밀한 비교를 하면서 읽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성학집요》는 《대학연의》의 근처에도 못 가는 책이다. 특히 이이의 지적 중에 “권수가 너무 많고”에는 동의하지만 나머지 “문장이 산만하며 사건의 경과를 기록한 글과 같고 참다운 학문의 체계가 아니어서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모두 좋지는 않습니다”는 대목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문체의 수준, 사고의 깊이, 시야의 광폭에서 애당초 진덕수에 비견될 수 없다.
西人의 謀主 송익필에 대한 조헌의 극찬
서인의 모주(謀主) 송익필(宋翼弼)에 대한 언급도 빠트릴 수 없다. 이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士林)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중종 때의 정승 안당(安瑭) 집안을 몰락게 한 송사련의 아들 송익필에 대한 서인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송익필(宋翼弼)은 비록 사련(祀連)의 아들이지만,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제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리하여 이이·성혼도 모두 외우(畏友)로 여겨 늘 제갈량(諸葛亮)이 법정(法正)에게 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사람들의 의사를 잘 유도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자립하게 하였으므로 생원·진사에 오른 자가 적잖이 있었는데 그중에 김장생(金長生)·허우(許雨) 같은 자는 의를 행하는 행실이 경외(京外)에 저명하였고, 강찬(姜燦)·정엽(鄭曄) 같은 자도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조종의 전례(典禮)로 말하면 사람을 가르쳐 성취시킨 일이 있으면 으레 관직을 상으로 주는 법이 있고, 중국의 제도로 말하면 뛰어난 이를 쓰는 데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이이가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한 의도는 다만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과실로 돌립니다.”
송사련의 허물이란 역사에서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우선 백과사전이 전하는 신사무옥의 골격이다.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사련은 처형ㄴ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하리라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로써 사건은 벌어져 안처겸·안당·안처근(安處謹)·권전·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김필(金珌) 등 10여명이 관련돼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西人의 이론적 핵심을 세운 송익필
그런데 이 사전 설명에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빠져 있다. 송사련(1469~ 1575년)은 마침 당쟁이 시작되던 선조 8년(157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자신이 행한 짓이 그 후에 조선 당쟁을 피바람 속에 몰아넣는 방아쇠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송사련이 그 모의 자리에 낄 수 있었던 이유가 되기도 하는 그의 출생을 추적해보자. 그의 어머니가 서출(庶出)이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安敦厚)다. 안돈후가 자신의 비첩 사이에서 감정이라는 딸을 낳은 것이다. 따라서 안당은 송사련의 서(庶)외삼촌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끼었다가 이를 고변해 송씨 집안은 하루아침에 공신이 돼 지금의 삼청동 청와대 인근에 있는 안당의 집까지 차지하고 “30여 년간” 득세를 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사실 송익필은 사림에서는 용납받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이·성혼·심의겸 등이 그를 학주(學主), 즉 최고의 학식을 가진 벗으로 떠받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조헌은 이 소에서 그 문제를 “제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했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넘어가고 또 이이의 서얼허통 주장이 송익필의 출사(出仕)를 위한 것이 아님을 강변해야 했을까?
필자는 10년 전 송익필을 다룬 책도 내고 그 후에도 계속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이제 대략 그 실마리를 잡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권(臣權) 이론으로서의 주자학의 정수(精髓)를 가장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이이를 능가했다고 봐야 한다.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송익필이 당시 사림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학문적 내용을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
첫째는 그의 직(直) 사상이다. ‘탁월하게도’ 그는 《논어》 ‘자로’편에서 자기 아버지의 문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냈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우리 고을에는 몸을 곧게[直]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입증하였습니다”고 말한다.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 문하의 곧은 자[直者]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숨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으니, 곧음[直]은 그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는 송익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논어》에는 직(直)과 관련된 구절이 참으로 많지만 그중에서 송익필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 분명한 구절 하나가 또 있다. ‘옹야’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해주는 것은 곧음[直]이니 그것 없이 사는 것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요행히 죽음을 면한 데 불과할 뿐(사실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송익필의 直사상
조헌의 소에 나온 대로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는 아들 김장생을 송익필의 제자로 들여보낸다. 김장생은 송익필의 수제자로 그 후에 송익필의 예학(禮學)을 가다듬었고 훗날 예송(禮訟) 논쟁에서 서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왕실 3년상 안 해주기’ 논쟁으로 왕실을 모독해 신권을 강화하려는 조선의 주희파 ‘서인’의 든든한 정신적 자산이다. 이 밑천을 만든 사람이 바로 송익필이다.
송익필은 김장생의 장남 김은에게 직백(直伯)이라는 자(字)를 내려주면서 그 취지를 담은 글도 함께 주었는데 여기에 그가 생각하는 직(直)의 의미가 잘 설명돼 있다. 이는 고스란히 송익필의 직(直)사상이다. 이황(李滉)의 경(敬)사상, 이이의 성(誠)사상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조선 중기 ‘3대 사상’이라 하겠다.
〈백성의 삶이 곧 곧음[直]이다. 곧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만물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것이 소위 하늘과 땅 사이의 세간(世間)이다. 정정당당하게 위를 바로 하고 아래를 바로 하는 것이 바로 이치[理]이다. 혹시 곧지 못한 것은 기품과 물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물이 곧지 못하면 그것을 바로 잡아서 곧게 만들어야 한다. (중략) 곧지 못하면 도리가 드러나지 못하니 진실로 곧고자 해야 한다.(중략)
바로 잡는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구용(九容)은 그 외모를 곧게 하는 것이고 구사(九思)는 그 생각을 곧게 하는 것이다.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하는 것은 그 안을 곧게 하는 것이며 의(義)로써 외면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 밖을 곧게 하는 것이다. 물 뿌리고 청소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부터 마음을 다하고 사람의 본성을 깨우치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라도 곧음[直]이 아닌 것이 없다. (중략)
어린아이가 항상 어미를 보고 속이지 못하는 것은 시작에 곧은 것이요, 칠십이 되도록 법도를 넘지 않음은 마침에 곧은 것이다. 거대한 뿌리에서 나오는 기운이 곧지 못하면 끊어지고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곧지 못하면 굶주리니 곧음이 군자의 도리에 대해서 매우 크도다.
원자(爰字)와 공가고(孔嘉顧) 같은 이들이 곧음[直]으로 자(字)를 삼은 까닭은 어버이를 섬김에 곧음으로써 하고 임금을 섬김에 곧음으로써 하며 붕우를 접함에 곧음으로써 하고 처자식을 대함에 곧음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곧음으로 태어나 곧음으로 죽으니, 천지에 곧음으로 서서 고금을 관통하기를 곧음으로써 한다면 다행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송익필의 직(直)사상은 제자 김장생의 아들에게 전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김장생의 수제자 송시열(宋時烈)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송시열이 숙종으로부터 사약(賜藥)을 받던 날을 기록한 실록을 보면 ‘직(直)’ 한 글자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새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숙종 15년(1689년) 6월 3일 사약을 받은 송시열은 제자 권상하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천지가 만물을 살게 하는 소이(所以)와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소이는 ‘직(直)’뿐이다. 공맹(孔孟)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 곧을 ‘직(直)’ 자뿐이다.”
禮學을 정립하다
둘째는 예학(禮學)의 정립이다. 송익필은 주희의 가례(家禮)를 이어받아 이를 정교하게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 조선 예학의 종주가 된다. 이이조차 자신의 서모(庶母)가 아버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여부를 송익필에게 물을 정도였다. 이 또한 《논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태백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直而無禮則絞(직이무례즉교).”
곧기만 하고 예(禮)가 없으면 강퍅하다. 즉 곧음을 바탕으로 하되 예로써 잘 단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공자가 말하는 예는 가례(家禮)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희는 그것은 한사코 가례로 제한하려 했고, 공자가 생각했던 사리(事理)나 일을 잘 처리한다는 의미에서의 치사(治事)와는 멀어져갔다. 송익필도 당연히 주희의 길을 따랐다.
송익필의 예학 정립은 신하들이 예를 내세워 임금과 대립하는 길을 열었다. 훗날 서인들이 불효(不孝)를 명분으로 광해군(光海君)을 내쫓는 불충(不忠)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이런 예학 이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발에 의한 송익필 집안 몰락
조헌은 소에서 또 송익필 집안이 몰락하게 된 사건과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발·이길·백유양은 또 송익필·한필 형제가 정철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것을 미워하고, 또 자기들의 단점을 의논할까 의심하여 몰래 해당 관리를 사주하여 사조(四朝)의 양적(良籍)을 모두 없애고 불법으로 환천(還賤)시킨 다음 곤장을 안겨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70여명도 모두 안씨(安氏·안당 집안)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업을 파산(破産)하고 도망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는데, 혹은 ‘경외(京外)에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 하고 혹은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 합니다.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면 70여명 모두가 머지않아 구렁텅이의 해골이 될 것이고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면 70여명이 장차 수적(水賊)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길은 이발의 동생이고, 백유양(白惟讓)은 백인걸의 조카로 몇 년 후에 정여립(鄭汝立) 사건이 일어나자 아들이 정여립의 형 정여흥의 사위라는 이유로 연좌돼 결국 장형(杖刑)을 받고 옥사(獄死)하게 된다. 그에 앞서 이발과 이길도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서인의 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실은 송익필 집안을 환천(還賤)시킨 데 대한 보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송익필 집안은 어떻게 환천됐는가? 이발·이길·백유양이 주동이 된 동인은 송익필을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해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안당의 후손들을 움직여 송사를 일으켰다. 안당의 증손자며느리가 송씨 일가를 상대로 장례원(掌隷院)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안당 집안에서 갖고 있던 속량(贖良) 문서를 없애버려 송익필이 양인(良人)이라는 증거는 없어졌다.
도망노비 송익필
그 후 송익필은 도망노비[推奴]가 됐고, 친구와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떠돌게 된다. 전라도 전주 근처에 운장산(雲長山)이 있는데 한동안 송익필이 숨어 지내던 곳이다. 송익필의 호는 구봉(龜峯)이고 자가 운장(雲長)이다.
그의 도피를 가장 크게 도운 사람은 정철이다. 그가 전라도 운장산으로 숨어든 것도 정철과 무관치 않다. 아마 정치에도 계속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1589년의 기축옥사(己丑獄事), 즉 정여립의 난은 송익필이 기획하고 정철이 행동대장을 맡아 일어난 동인 학살극이다. 마침내 당쟁이 사생결단의 피바람으로 이어졌고 이 싸움은 300년 후에 조선이 망하고 나서야 함께 끝나게 된다. 그해 12월 16일 선조는 전교해 말했다.
“사노(私奴) 송익필·한필 형제가 조정에 대한 원망이 쌓였으니, 반드시 일을 내고야 말 것이다. 간귀(奸宄) 조헌의 진소(陳疏)가 모두 그의 사주(使嗾)였다 하니, 극히 통분할 일이다. 더욱이 노복으로서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해 숨어 그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더욱 해괴하다. 체포해 추고하라.”
처음에는 구언에 응해 가상하다고 했던 조헌이 어느새 간귀가 됐다. 게다가 우리가 살펴본 소는 송익필의 사주였던 것이다. 2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인 선조 24년(1591년) 10월 21일 사헌부에서 아뢴 내용이다. 여기서도 송익필은 계속 도망 다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력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노(私奴) 송부필(宋富弼)·송익필·송한필 등은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의 시비(是非)와 사대부의 진퇴(進退)에 관여하여 논하지 않음이 없으며, 사론(邪論)을 선동하여 일국을 교란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남을 시켜 상소함으로써 사림(士林)을 모함하는 것을 평생의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수십 년 이래 사론(士論)이 갈라지고 조정이 조용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이들이 현란시킨 소치입니다. 그 사정을 추궁하여 보니 그들이 본주인에게 죄를 짓고 온 가족이 도망 나와 권문(權門)에 의탁해 소굴로 삼은 뒤 기필코 세상을 뒤엎어서 옛 주인에게 보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지난번 간흉(奸凶·정철)이 쫓겨난 이후로는 몸을 숨길 데가 없어지자 더욱 간독(奸毒)을 부려 때로는 서울 근교에 숨고 때로는 지방에 숨어 마치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기회를 보고 틈을 노려 기필코 일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금 그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이니 유사에게 명하여 끝까지 수색 체포하여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
조헌, 의병장으로 殉國하다
한편 조헌은 계속 올린 이 소로 인해 2년 후인 1589년 함경도 길주 영동역(嶺東驛)으로 유배를 떠났으나 정여립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면서 풀려났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을 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힘을 합쳐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戰死)했다.⊙
“공주의 교수 조헌과 생원 이귀(李貴)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었는데 자주 소를 올려 스승의 원통함을 말하고 또 노수신(盧守愼), 정유일(鄭惟一), 유전(柳㙉), 이산해(李山海), 권극례(權克禮), 김응남(金應南), 백유양(白惟讓), 노직(盧稙), 송언신(宋言愼), 이호민(李好閔), 노직(盧稷) 등을 함께 헐뜯었으나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 조헌이 소를 올리자 임금은 그 소를 모두 불사르라고 하고 조헌을 귀양 보냈다.”
때는 선조 18~19년 사이다. 선조 17년(1584년) 1월 이이(李珥)가 세상을 떠나고 그 후임으로 이조판서를 맡은 이는 동인(東人)의 이산해였다. 물론 서인(西人) 중에서는 정철(鄭澈)이 조정에 남아 있었고 대체로 서인에 가까운 노수신이 좌의정에 있었지만, 동인은 서인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선조 18년 5월에는 마침내 서인의 실세였던 대비의 동생 심의겸도 파직당했다. 1년 후인 선조 19년이 되면 조정은 거의 동인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헌의 ‘萬言疎’
왕권(王權) 강화를 도모하는 선조 입장에서는 일당천정(一黨擅政), 즉 오늘날의 용어로 하면 일당독재가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선조 19년(1586년) 선조가 한 달여 전에 구언(求言), 즉 신하들에게 좋은 말을 올려줄 것을 청했다. 이에 응해 충청도 공주의 교수(敎授)로 있던 조헌이라는 인물이 흔히 ‘만언소(萬言疏)’로 불리는 장문의 소(疏)를 올렸다. 그런데 선조는 이를 즉각 공개하고 있지 않다가 “수십 일 동안 궁내에 그냥 두고 답을 내리지 않으니” 이때 조헌은 다시 소를 올려 공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는 곧 자신이 처음에 올렸던 원래의 소에 대한 임금의 실질적인 조치를 압박한 것이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그 문제의 소 내용과 관련해 아주 짤막하게 “공주 교수 조헌이 소를 올려 이이·성혼(成渾)의 학술의 바름과 나라에 충성한 정성을 극력 진술하고, 시인(時人·현재 정권을 쥔 동인)이 나라를 그르치고 뛰어난 이를 방해하는 것을 배척하였는데 내용이 몹시 길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편찬됐으니 당연히 동인을 이은 북인(北人)의 시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조헌의 상소를 살짝 언급만 하는 데 그쳤다. 당연히 조헌은 서인이다. 지위는 정철보다 크게 낮았지만 비슷하게 서인의 행동대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훗날 서인 시각에서 다시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는 파격적으로 조헌의 만언소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그가 급진적 서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잘 해독한다면 이 문건은 조선 초 당쟁사 실상에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사실 조헌의 상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인은 옳고 동인은 그르다는 시각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주요 대목을 짚어보자.
‘심의겸은 호언 같은 충신’
서인의 보호자인 정승 박순(朴淳)에 대한 조헌의 서술이다.
“박순더러 당여(黨與)를 심었다고 하는데 그가 천거해 쓴 사람은 기개를 숭상하고 염치가 있는 동서남북의 사람이니 오늘날 시배(時輩·현직에 있는 동인)들의 형제와 친인척이 모두 현달한 자리에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서경덕의 문인인 박순은 그저 서인세력에 얹혀 있던 정승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동인의 영수로까지 떠오른 이발(李潑)과 그의 동생 이길(李洁)에 대한 언급이다.
“대체로 이발·이길이 처음에 성혼·이이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면서 자신을 굽히고 남에게 겸허했으므로 칭예(稱譽)하는 사람이 많아서 선인(善人)이란 이름을 얻었고, 성혼·이이도 함께 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심의겸이 김효원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서는 그 무리가 심의겸과 일을 같이하는 자는 박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에 이발의 무리가 몰래 김효원을 주도해 심의겸을 모함하고 박순을 내쫓으려고 힘썼는데, 정인홍(鄭仁弘)·김우옹(金宇顒)은 그들의 술책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혼과 이이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심의겸이 병통이 있기는 하나 평생의 일을 살펴보면 나라 일에 마음과 힘을 다 바치고 스스로를 봉식(封植)하지 않았으니, 외부의 의논이 비등하다 하여 호언(狐偃) 같은 충신을 가벼이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발과 김우옹·정인홍은 성혼이 심의겸을 편든다고만 의심했을 뿐 이것이 국인(國人)의 공언(公言)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발·이길·정인홍·김우옹은 동인이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정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심의겸과 김효원이 충돌할 때 이발이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이이나 성혼이 같은 파주 4인방 중 하나인 심의겸을 호언처럼 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이이가 선조 앞에서 심의겸에 대해 그저 그렇게 평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호언은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서 진 문공(晉文公)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망명해 외국에 가 있었는데, 호언이 19년 동안 수행하였다. 진 문공이 귀국해 임금이 된 뒤에는 문공을 도와 주실(周室)의 난을 평정하고 패업(覇業)을 이룩했다. 서인들이 심의겸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와 속생각을 알 수 있다.
이산해와 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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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
“이발·이길의 무리는 기필코 일시의 청류(淸流)를 잡아다가 일망타진하니 편당(偏黨)의 해가 이미 온 나라를 텅 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산해는 그의 기염(氣焰)을 두려워하여 조부(祖父)의 여풍(餘風)을 잃어버렸고, 옛날 종유(從遊)하던 바를 잊은 채 겁내고 두려워하고 시종 벼슬을 잃어버릴까만 근심하였습니다.”
이산해는 어려서는 이이·정철·송익필 등과도 가까웠다. 이산해의 조부는 이치(李穉)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숙부 이파(李坡)와 함께 진도(珍島)에 유배됐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이 점을 들어 이산해가 강직한 조부의 기풍이 없음을 비판하고 자신들을 배신한 데 대한 ‘서운함’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산해의 변신은 주희(朱熹)의 도학(道學)을 버리고 왕의 신하의 길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이산해의 무리가 이발·이길이 위세가 있어 박순과 정철을 제어할 수 있다고 여겨 급급히 그들을 임용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발이 선조에게 올린 소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신은 일찍부터 경세(經世)에서는 이이를 인정했고 도학(道學)에서는 성혼을 추앙해 평소에 두텁게 사귀었으나, 지금은 공론이 중요하고 사사로운 감정은 가벼운 것입니다. 옛 친구도 생각해야 하지만 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이는 이발뿐만 아니라 이산해의 신조이기도 하고 유성룡(柳成龍)을 포함한 동인 전체가 공유한 코드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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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
“이이의 높은 행실과 올바른 언론은 진실로 당세를 경동시킬 만한 것이었고, 평소의 말과 노래는 언제나 주자를 배우고 싶어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황해도 해주)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주자의 백록 학규와 십훈의 뜻을 미루어 넓혀서 별도의 규약을 만들고 그것으로 찾아오는 선비들을 가르치니, 많은 이들이 흥기되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바른 도리로 어린 선비들을 가르치고 예(禮)로써 풍속을 순화하는 데 편리하고, 지어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몸을 닦고 집을 바르게 다스리며 정치를 하는 데 관한 방법을 빠짐없이 포괄하였고, 강령과 절목(節目)이 조리 정연하게 짜여 있습니다. 신이 전일 한번 본 적이 있었으나 직접 한 권을 소장하여 옆에 두고 볼 수 없었고, 다만 서실의 규약과 《격몽요결》을 가지고 향족(鄕族)의 어린이들을 시험 삼아 가르쳤는데, 그로 인하여 《소학(小學)》 《가례(家禮)》로 들어가고 《근사록(近思錄)》·사서(四書)로 들어가는 데 매우 쉽고 빨랐습니다.”
마지막 문장에는 고스란히 주희의 교조체계를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이이의 역할은 이런 체계로 들어가는 입문 과정인 셈이었다. 게다가 이이가 편찬한 《성학집요》에 대한 언급을 보면 조헌이 그 책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학집요》와 《대학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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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수 |
솔직히 둘 다 면밀한 비교를 하면서 읽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성학집요》는 《대학연의》의 근처에도 못 가는 책이다. 특히 이이의 지적 중에 “권수가 너무 많고”에는 동의하지만 나머지 “문장이 산만하며 사건의 경과를 기록한 글과 같고 참다운 학문의 체계가 아니어서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모두 좋지는 않습니다”는 대목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문체의 수준, 사고의 깊이, 시야의 광폭에서 애당초 진덕수에 비견될 수 없다.
西人의 謀主 송익필에 대한 조헌의 극찬
서인의 모주(謀主) 송익필(宋翼弼)에 대한 언급도 빠트릴 수 없다. 이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士林)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중종 때의 정승 안당(安瑭) 집안을 몰락게 한 송사련의 아들 송익필에 대한 서인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송익필(宋翼弼)은 비록 사련(祀連)의 아들이지만,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제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리하여 이이·성혼도 모두 외우(畏友)로 여겨 늘 제갈량(諸葛亮)이 법정(法正)에게 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사람들의 의사를 잘 유도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자립하게 하였으므로 생원·진사에 오른 자가 적잖이 있었는데 그중에 김장생(金長生)·허우(許雨) 같은 자는 의를 행하는 행실이 경외(京外)에 저명하였고, 강찬(姜燦)·정엽(鄭曄) 같은 자도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조종의 전례(典禮)로 말하면 사람을 가르쳐 성취시킨 일이 있으면 으레 관직을 상으로 주는 법이 있고, 중국의 제도로 말하면 뛰어난 이를 쓰는 데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이이가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한 의도는 다만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과실로 돌립니다.”
송사련의 허물이란 역사에서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우선 백과사전이 전하는 신사무옥의 골격이다.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사련은 처형ㄴ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하리라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로써 사건은 벌어져 안처겸·안당·안처근(安處謹)·권전·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김필(金珌) 등 10여명이 관련돼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西人의 이론적 핵심을 세운 송익필
그런데 이 사전 설명에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빠져 있다. 송사련(1469~ 1575년)은 마침 당쟁이 시작되던 선조 8년(157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자신이 행한 짓이 그 후에 조선 당쟁을 피바람 속에 몰아넣는 방아쇠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송사련이 그 모의 자리에 낄 수 있었던 이유가 되기도 하는 그의 출생을 추적해보자. 그의 어머니가 서출(庶出)이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安敦厚)다. 안돈후가 자신의 비첩 사이에서 감정이라는 딸을 낳은 것이다. 따라서 안당은 송사련의 서(庶)외삼촌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끼었다가 이를 고변해 송씨 집안은 하루아침에 공신이 돼 지금의 삼청동 청와대 인근에 있는 안당의 집까지 차지하고 “30여 년간” 득세를 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사실 송익필은 사림에서는 용납받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이·성혼·심의겸 등이 그를 학주(學主), 즉 최고의 학식을 가진 벗으로 떠받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조헌은 이 소에서 그 문제를 “제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했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넘어가고 또 이이의 서얼허통 주장이 송익필의 출사(出仕)를 위한 것이 아님을 강변해야 했을까?
필자는 10년 전 송익필을 다룬 책도 내고 그 후에도 계속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이제 대략 그 실마리를 잡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권(臣權) 이론으로서의 주자학의 정수(精髓)를 가장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이이를 능가했다고 봐야 한다.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송익필이 당시 사림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학문적 내용을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
첫째는 그의 직(直) 사상이다. ‘탁월하게도’ 그는 《논어》 ‘자로’편에서 자기 아버지의 문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냈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우리 고을에는 몸을 곧게[直]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입증하였습니다”고 말한다.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 문하의 곧은 자[直者]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숨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으니, 곧음[直]은 그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는 송익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논어》에는 직(直)과 관련된 구절이 참으로 많지만 그중에서 송익필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 분명한 구절 하나가 또 있다. ‘옹야’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해주는 것은 곧음[直]이니 그것 없이 사는 것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요행히 죽음을 면한 데 불과할 뿐(사실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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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
송익필은 김장생의 장남 김은에게 직백(直伯)이라는 자(字)를 내려주면서 그 취지를 담은 글도 함께 주었는데 여기에 그가 생각하는 직(直)의 의미가 잘 설명돼 있다. 이는 고스란히 송익필의 직(直)사상이다. 이황(李滉)의 경(敬)사상, 이이의 성(誠)사상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조선 중기 ‘3대 사상’이라 하겠다.
〈백성의 삶이 곧 곧음[直]이다. 곧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만물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것이 소위 하늘과 땅 사이의 세간(世間)이다. 정정당당하게 위를 바로 하고 아래를 바로 하는 것이 바로 이치[理]이다. 혹시 곧지 못한 것은 기품과 물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물이 곧지 못하면 그것을 바로 잡아서 곧게 만들어야 한다. (중략) 곧지 못하면 도리가 드러나지 못하니 진실로 곧고자 해야 한다.(중략)
바로 잡는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구용(九容)은 그 외모를 곧게 하는 것이고 구사(九思)는 그 생각을 곧게 하는 것이다.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하는 것은 그 안을 곧게 하는 것이며 의(義)로써 외면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 밖을 곧게 하는 것이다. 물 뿌리고 청소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부터 마음을 다하고 사람의 본성을 깨우치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라도 곧음[直]이 아닌 것이 없다. (중략)
어린아이가 항상 어미를 보고 속이지 못하는 것은 시작에 곧은 것이요, 칠십이 되도록 법도를 넘지 않음은 마침에 곧은 것이다. 거대한 뿌리에서 나오는 기운이 곧지 못하면 끊어지고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곧지 못하면 굶주리니 곧음이 군자의 도리에 대해서 매우 크도다.
원자(爰字)와 공가고(孔嘉顧) 같은 이들이 곧음[直]으로 자(字)를 삼은 까닭은 어버이를 섬김에 곧음으로써 하고 임금을 섬김에 곧음으로써 하며 붕우를 접함에 곧음으로써 하고 처자식을 대함에 곧음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곧음으로 태어나 곧음으로 죽으니, 천지에 곧음으로 서서 고금을 관통하기를 곧음으로써 한다면 다행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송익필의 직(直)사상은 제자 김장생의 아들에게 전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김장생의 수제자 송시열(宋時烈)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송시열이 숙종으로부터 사약(賜藥)을 받던 날을 기록한 실록을 보면 ‘직(直)’ 한 글자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새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숙종 15년(1689년) 6월 3일 사약을 받은 송시열은 제자 권상하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천지가 만물을 살게 하는 소이(所以)와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소이는 ‘직(直)’뿐이다. 공맹(孔孟)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 곧을 ‘직(直)’ 자뿐이다.”
禮學을 정립하다
둘째는 예학(禮學)의 정립이다. 송익필은 주희의 가례(家禮)를 이어받아 이를 정교하게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 조선 예학의 종주가 된다. 이이조차 자신의 서모(庶母)가 아버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여부를 송익필에게 물을 정도였다. 이 또한 《논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태백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直而無禮則絞(직이무례즉교).”
곧기만 하고 예(禮)가 없으면 강퍅하다. 즉 곧음을 바탕으로 하되 예로써 잘 단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공자가 말하는 예는 가례(家禮)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희는 그것은 한사코 가례로 제한하려 했고, 공자가 생각했던 사리(事理)나 일을 잘 처리한다는 의미에서의 치사(治事)와는 멀어져갔다. 송익필도 당연히 주희의 길을 따랐다.
송익필의 예학 정립은 신하들이 예를 내세워 임금과 대립하는 길을 열었다. 훗날 서인들이 불효(不孝)를 명분으로 광해군(光海君)을 내쫓는 불충(不忠)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이런 예학 이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발에 의한 송익필 집안 몰락
조헌은 소에서 또 송익필 집안이 몰락하게 된 사건과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발·이길·백유양은 또 송익필·한필 형제가 정철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것을 미워하고, 또 자기들의 단점을 의논할까 의심하여 몰래 해당 관리를 사주하여 사조(四朝)의 양적(良籍)을 모두 없애고 불법으로 환천(還賤)시킨 다음 곤장을 안겨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70여명도 모두 안씨(安氏·안당 집안)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업을 파산(破産)하고 도망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는데, 혹은 ‘경외(京外)에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 하고 혹은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 합니다.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면 70여명 모두가 머지않아 구렁텅이의 해골이 될 것이고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면 70여명이 장차 수적(水賊)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길은 이발의 동생이고, 백유양(白惟讓)은 백인걸의 조카로 몇 년 후에 정여립(鄭汝立) 사건이 일어나자 아들이 정여립의 형 정여흥의 사위라는 이유로 연좌돼 결국 장형(杖刑)을 받고 옥사(獄死)하게 된다. 그에 앞서 이발과 이길도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서인의 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실은 송익필 집안을 환천(還賤)시킨 데 대한 보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송익필 집안은 어떻게 환천됐는가? 이발·이길·백유양이 주동이 된 동인은 송익필을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해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안당의 후손들을 움직여 송사를 일으켰다. 안당의 증손자며느리가 송씨 일가를 상대로 장례원(掌隷院)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안당 집안에서 갖고 있던 속량(贖良) 문서를 없애버려 송익필이 양인(良人)이라는 증거는 없어졌다.
도망노비 송익필
그 후 송익필은 도망노비[推奴]가 됐고, 친구와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떠돌게 된다. 전라도 전주 근처에 운장산(雲長山)이 있는데 한동안 송익필이 숨어 지내던 곳이다. 송익필의 호는 구봉(龜峯)이고 자가 운장(雲長)이다.
그의 도피를 가장 크게 도운 사람은 정철이다. 그가 전라도 운장산으로 숨어든 것도 정철과 무관치 않다. 아마 정치에도 계속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1589년의 기축옥사(己丑獄事), 즉 정여립의 난은 송익필이 기획하고 정철이 행동대장을 맡아 일어난 동인 학살극이다. 마침내 당쟁이 사생결단의 피바람으로 이어졌고 이 싸움은 300년 후에 조선이 망하고 나서야 함께 끝나게 된다. 그해 12월 16일 선조는 전교해 말했다.
“사노(私奴) 송익필·한필 형제가 조정에 대한 원망이 쌓였으니, 반드시 일을 내고야 말 것이다. 간귀(奸宄) 조헌의 진소(陳疏)가 모두 그의 사주(使嗾)였다 하니, 극히 통분할 일이다. 더욱이 노복으로서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해 숨어 그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더욱 해괴하다. 체포해 추고하라.”
처음에는 구언에 응해 가상하다고 했던 조헌이 어느새 간귀가 됐다. 게다가 우리가 살펴본 소는 송익필의 사주였던 것이다. 2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인 선조 24년(1591년) 10월 21일 사헌부에서 아뢴 내용이다. 여기서도 송익필은 계속 도망 다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력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노(私奴) 송부필(宋富弼)·송익필·송한필 등은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의 시비(是非)와 사대부의 진퇴(進退)에 관여하여 논하지 않음이 없으며, 사론(邪論)을 선동하여 일국을 교란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남을 시켜 상소함으로써 사림(士林)을 모함하는 것을 평생의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수십 년 이래 사론(士論)이 갈라지고 조정이 조용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이들이 현란시킨 소치입니다. 그 사정을 추궁하여 보니 그들이 본주인에게 죄를 짓고 온 가족이 도망 나와 권문(權門)에 의탁해 소굴로 삼은 뒤 기필코 세상을 뒤엎어서 옛 주인에게 보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지난번 간흉(奸凶·정철)이 쫓겨난 이후로는 몸을 숨길 데가 없어지자 더욱 간독(奸毒)을 부려 때로는 서울 근교에 숨고 때로는 지방에 숨어 마치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기회를 보고 틈을 노려 기필코 일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금 그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이니 유사에게 명하여 끝까지 수색 체포하여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
조헌, 의병장으로 殉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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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 칠백의총 경내에 있는 중봉 조헌 선생 일군순의비(一軍殉義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