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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6〉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폭침사건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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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8년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오에서 일본인들과 관헌 충돌, 일본인 40여명 사망
⊙ 1610년, 포르투갈 무역선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아리마 하루노부 수군의 공격 받고 나흘 간 격전 끝에 自沈
⊙ 포르투갈, 신흥 네덜란드·영국이 진출해 오는데도 기존 해양제국으로서의 자존심 앞세우며 정세판단 그르쳐 몰락 자초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1610년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고 自沈한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이 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은 對日무역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16세기 말 오다 노부나가의 계승자로 덴카비토(天下人·전국시대 투쟁을 거쳐 일본을 통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교역의 이익은 취하되 기독교 포교(布敎)는 억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무역·종교 분리’ 기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집권 후에도 이어졌다. 3대 쇼군인 이에미쓰(家光)의 시대에 이르러 막부(幕府)의 대외통교(對外通交) 독점과 강력한 기독교 탄압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쇄국(鎖國)정책’으로 귀결된다.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들은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독자적으로 통교에 나서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외부 접근이 용이한 규슈 일대의 다이묘들은 중앙의 눈을 피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역을 추진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누가 권력을 잡든 이러한 현상은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히데요시는 곧바로 규슈를 평정한 후, 대명(對明) 감합(勘合)무역 붕괴 이후 방임 상태에 놓여 있던 다이묘 교역 통제에 나선다. 그는 왜구 밀무역을 금압(禁壓)하고, 다이묘들의 허가 없는 대외 통교를 제한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붉은 인장(印章)이 찍혀 있는 허가서를 ‘주인장’(朱印狀)이라 하며, 주인장 발급에 의해 공인된 무역을 ‘주인선(船)무역’이라 한다.
 
 
  東南亞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 형성
 
도쿠가와 막부 시절 공인 무역선이던 朱印船. 일본인들은 동남아까지 진출, 주인선 무역을 했다.
  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장악한 이에야스는 주인선 제도를 공식적으로 제도화하였다. 천령(天領·막부 직할령)으로 편입된 나가사키를 주인선의 출·도착항으로 지정하는 한편, 나가사키 부교(奉行·막부의 지방 통치 행정기관)를 두어 수출입 품목·가격·유통 전반을 관리하고자 하였다. 이에야스는 당시 동아시아 통치자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교역 확대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실질적 대권을 거머쥔 이듬해인 1601년부터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일대의 왕국과 스페인령(領) 마닐라 등지에 사절을 파견해 국교를 수립하고 교역 관계를 맺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남중국해 이원(以遠)의 동남아 지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일본 상인(또는 왜구)들이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무역은 사무역(또는 밀무역)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종사자들의 지위도 불안하였다.
 
  1604년 주인선 제도로 동남아 지역 도항(渡航)이 공인되자, 일본인들의 남방 진출이 크게 증가한다. 1604년부터 1635년 사이에 총 355통의 주인장이 막료(幕僚)·다이묘·호상(豪商) 등에게 발급되어 매해 평균 10척 이상의 주인선이 남중국해 일대를 왕래했으며, 1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일본인이 동남아(東南亞) 각지의 교역 중심지에 체류하면서 일본인 집단거류가 형성될 정도로 남방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주인선 무역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일본인들의 동남아 직접 진출은 중계무역을 독점하던 포르투갈의 지위에 영향을 미쳤고, 무엇보다 최대 교역품인 중국산 생사(生絲·염색되지 않은 비단실)의 공급을 둘러싼 환경이 변하면서 포르투갈의 일본 내 입지 자체가 흔들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의 생사 수요가 워낙 큰 탓에 최대 공급자인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교역조건 교섭 시 주도권을 쥐고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이러한 우월적 지위는 명(明)의 대(對)일본 해금(海禁)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어 명의 중앙 통치력 쇠퇴로 해금 정책이 이완되자 상황이 일변한다. 중국 상인들이 직접 일본에 생사를 반입하는 밀무역이 성행하고, 합법적으로 생사를 반출할 수 있는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과 일본의 상인이 접선하여 이루어지는 제3국 우회무역(이를 일본어로 ‘데아이·出い무역’이라고 한다)이 개시되면서 일본의 생사 수입 루트가 다변화(多邊化)된 것이다.
 
 
  네덜란드·영국 세력의 진출
 
  이보다 더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입지를 좁히고 있었다. 유럽의 정세 변동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이 포르투갈의 동인도 항로 독점을 깨고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마닐라 갤리온 무역’(필리핀-멕시코를 연결하는 스페인 식민지 간 교역)이 포르투갈의 독점적 지위를 침식(侵蝕)하고 있었다. 1600년 리프데호의 표착을 계기로 일본에 정착한 윌리엄 애덤스와 얀 요스텐 등 스페인·포르투갈 세력의 대척점에 서 있던 영국·네덜란드 출신 이국인들은 최고 권력자 이에야스가 이러한 세계 정세 변화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당시 마카오에 거점을 두고 있던 포르투갈은 일본보다도 이러한 정세 판단에 어두웠다. 유일한 유럽 세력이자 주요 물자 공급처로서의 우월적 지위에서 일본을 대하던 고압적 태도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그러한 시대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와 포르투갈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Nossa Senhora da Graa)호 폭침 사건’이다.
 
  1610년 1월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선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마드레 데 데우스’(Madre de Deus)호라고도 부른다]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폭침(爆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선장인 안드레 페소아(Andr Pessoa)가 자신의 배가 기리시탄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군대의 공격을 받아 탈취당할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화약고에 불을 질러 800톤급 대형 갤리온선을 자침(自沈)시켜 버린 사건이다. 1571년 이래 40년 동안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우호적 교역관계를 맺어 온 일본과 포르투갈 간에 벌어진 이때의 격렬한 무력(武力) 충돌은 양국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마카오 폭동
 
  사건의 발단은 1608년 11월에 발생한 ‘마카오 일본인 소요사건’이었다. 그해 가을 아리마 하루노부가 파견한 주인선이 캄보디아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길에 바람을 잃고 마카오에 기항(寄港)한다. 당시 마카오에는 통킹(베트남)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조난을 당해 긴급피난한 별단의 일본인 무리(왜구로 추정)가 머물고 있었다.
 
  이듬해 봄 편서풍(偏西風)이 불기를 기다리던 와중에 사달이 벌어진다. 현지 법규를 무시하고 칼을 휴대한 채 마카오 거리를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활보하던 일본인 무리와 현지인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를 제지하던 포르투갈 관헌(官憲)이 일본인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수행원들이 살해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카피탕 모르(Capito-mor·최고 행정책임자) 안드레 페소아가 경비대를 이끌고 출동해 일본인들을 체포하려 하자 일본인들이 건물 안에 피신해 농성을 벌이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분노가 극에 달한 페소아는 건물에 불을 지른 후 도망쳐 나오는 일본인들을 모조리 사살하고, 주동자를 색출해 교수형에 처해 버린다. 일본인 사망자가 40명이 넘는 대참사였다.
 
  사실 페소아는 당초 계획대로라면 이미 마카오를 떠났을 사람이다. ‘카피탕 모르’는 포르투갈 왕실이 무역선단 대장에게 부여하는 직위로, 마카오 체재 시 최고 행정책임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는 하나, 일본과의 무역을 마치면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에 체재하는 기간은 보통 연중(年中) 수개월에 불과했다. 더구나 페소아가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607년이었다. 이미 1년 전에 돌아갔어야 할 그가 2년이 지나도록 마카오를 떠나지 못한 것은 당시 포르투갈의 천적(天敵)으로 떠오른 네덜란드의 위협 때문이었다.
 
  160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 선박들이 싱가포르 앞바다를 항행하던 포르투갈 선박 ‘산타 카타리나’(Santa Catarina)호를 공격하여 선박과 화물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포르투갈은 불법을 이유로 약탈품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네덜란드는 양국(兩國)이 교전(交戰) 상태에 있었음을 들어 거부한다.
 
  산타 카타리나호는 중국·일본으로부터 입수한 고가(高價)의 산물을 가득 선적하고 있었고, VOC는 이때의 나포를 통해 VOC 자본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둔다. 이후 VOC의 선박들은 포르투갈 선박 나포에 혈안이 된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해상 활동이 크게 위축된다. 페소아가 마카오에서 발목이 잡힌 것도 1607~1608년 사이에 마카오 진입 해상로인 광둥 앞바다 해역에서 VOC의 함대가 진을 치고 나포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사정에 기인한다.
 
 
  페소아와 하세가와
 
  1609년 5월 페소아는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에 2년치 물량을 적재한 채 일본으로 향해 마카오를 출항한다. 이때 페소아의 배를 노리던 VOC의 함선들도 대만 앞바다에 진입하여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록상으로 페소아가 나가사키에 입항한 것이 6월 29일이고, VOC의 배가 히라도에 입항한 것이 7월 1일이니 양측의 일본 도착은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페소아가 간발의 차로 VOC의 배를 비켜간 것까지는 운이 좋았으나, 문제는 일본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나가사키 부교 하세가와 후지히로(長谷川藤廣)가 페소아 일행에게 모든 교역품의 신고·검사 및 허가 전 판매 금지 등 기존과는 다른 엄격한 통관절차를 통보해 온 것이다.
 
  하세가와는 이후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어 1606년 나가사키 부교로 부임한 그는 나가사키 일대의 다이묘를 감시하고 대외 무역을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와 함께 쇼군의 대리인으로서 나가사키 무역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쇼군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하세가와는 일방적으로 정한 가격을 포르투갈 측에 제시하고 일반에 대한 물품 판매 이전에 쇼군의 선매권(先買權)을 행사하는 등 기존의 관행을 무시한 거래를 강행하였다. 2년을 기다려 진행되는 황금알을 낳는 교역에서 막부의 간섭이 심해진 것에 대해 포르투갈과 일본 상인들 공히 불만을 품었으나 권력자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당시 페소아는 마카오 소요사건에 대한 면책(免責) 확보, 재발 방지를 위한 일본 주인선의 마카오 출입 금지, 네덜란드의 대일본 교역 불허(不許) 등 굵직한 현안을 안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세가와에게 이에야스 알현 주선을 요청하고 있었다.
 
  마카오 소요사건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어느 쪽의 책임이 더 큰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건이다. 더구나 희생된 것은 일본인들이다. 하세가와는 마카오 소요사건을 이에야스에게 진언할 경우 오히려 화를 자초할 수 있음을 들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말도록 페소아를 설득하고, 페소아의 부하인 마테오 레이탄(Mateo Leito)을 대리인 자격으로 이에야스가 머물고 있는 슨푸(駿府)로 올려 보낸다.
 
 
  네덜란드의 손을 들어 준 이에야스
 
대외 通交에 적극적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레이탄 일행이 슨푸에 도착하여 이에야스 알현을 대기하는 동안 공교롭게도 히라도의 VOC가 파견한 사절도 슨푸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것은 포르투갈이었으나, 이에야스가 먼저 알현을 허락한 것은 VOC였다. 이에야스는 VOC 사절의 방일(訪日)을 환영하고 무역관 설치를 허가하는 주인장을 흔쾌히 발급한다. 기존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던 포르투갈로서는 당황스러운 사태였다.
 
  사실 이에야스는 1603년 시점에 리프데호의 선장에게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승인하는 허가서를 이미 교부한 상태였다. 얀 요스텐과 윌리엄 애덤스의 조언을 접한 이에야스는 포르투갈의 대일 교역 독점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 스페인·네덜란드 등 여타 유럽국을 끌어들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고자 했다. VOC가 페소아의 뒤를 쫓아 일본을 방문한 것 자체가 이에야스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정보전·상황 판단 모든 면에서 VOC에 대한 포르투갈의 패배였다.
 
  레이탄이 슨푸에서 VOC에게 허를 찔리고 있을 때, 나가사키에서는 페소아와 마카오 상인들이 생사 가격을 후려치는 하세가와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 이들은 카피탕 모르가 왕실의 대리인으로서 직접 이에야스를 만나 마카오 소요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아울러 하세가와가 사익(私益)을 편취하려 비행(非行)을 저지르고 있음을 고(告)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 사정에 정통한 예수회 사제들이 황급히 나서 페소아의 슨푸 방문을 단념시켰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하세가와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을 모함하려는 포르투갈인들의 모의(謀議)에 격노한다. 비록 포르투갈의 이권을 강압적으로 제한하고는 있으나, 하세가와는 나가사키 부교로서 포르투갈과의 교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나름의 지원을 하고 있던 차였다. 페소아 일행에 배신감을 느낀 하세가와는 마카오 소요사건으로 복수의 칼을 갈던 하루노부를 끌어들여 페소아 일행에 대한 복수를 꾸민다.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의 최후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를 공격한 아리마 하루노부.
  하세가와와 공모한 하루노부는 이에야스에게 마카오 소요사건을 보고하고 보복 조치 허가를 청원한다. 예전 같으면 포르투갈과의 교역 단절을 염려하여 허가가 내려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닐라 갤리온, VOC, 주인선이라는 대체 공급 루트를 확보한지라 포르투갈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야스의 허가를 얻어 낸 하루노부와 하세가와는 페소아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1610년 1월 3일 나가사키의 예수회 사교관(司敎館)에 페소아의 출석을 명한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페소아는 사교관에 나타나는 대신 배의 출항(出航)을 서두른다. 하루노부는 30척의 함선에 분승한 12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배를 포위, 항복을 촉구한다.
 
  예수회가 중재에 나서 평화적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페소아의 신병(身柄)을 둘러싼 이견으로 교섭은 결렬된다. 그날 밤 아리마 수군(水軍)의 공격으로 시작된 무력 충돌은 꼬박 나흘간 계속되었다. 전투 내내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는 바람의 부족으로 항구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아리마 수군의 파상공격을 견뎌야 했다. 페소아를 비롯한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분전(奮戰)했으나, 불과 50명의 인원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아리마 수군을 당할 수 없었다. 나흘째 되던 1월 6일, 중과부적(衆寡不敵)을 견디지 못하고 배를 빼앗길 지경에 처한 페소아는 선원을 탈출시킨 뒤 화약고에 불을 질러 배를 자폭시킴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포르투갈의 오판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사건 이후 1년 만에 포르투갈의 사절이 일본을 찾아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양측 모두 교역 상대로서 서로를 필요로 하였기에 마카오-나가사키 무역이 재개되기는 하였으나, 이후 양국 간 무역은 다시는 이전의 규모와 중요성을 되찾지 못하였다. 이러한 관계 쇠퇴는 일본보다는 포르투갈에 더 뼈아픈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부상(浮上)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제해권이 위협받는 전략적 환경 변화를 맞아, 포르투갈에는 가장 중요한 전통적 교역 상대의 하나인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굳건히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긴요한 상황이었다. 기존의 우월적 지위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관점의 대일 접근이 필요하였으나, 한 세기 동안 해양제국으로 군림한 포르투갈의 자존심은 정확한 정세 판단을 방해하였다.
 
  반면, 포르투갈의 대항마로 떠오른 네덜란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신(不信)의 앙금이 남은 일·포 관계의 틈을 파고들었다. 네덜란드의 대일 접근은 포르투갈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국가(또는 왕실)가 아니라 수익 창출이 최우선 목표인 상업조직으로서 동인도회사가 취한 실용적 접근은 일본과의 교역 관계 수립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유럽과의 교역을 원하되 기독교를 배척하고자 하는 막부의 의향에 이보다 더 잘 들어맞는 교역 파트너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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