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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8〉 ‘위를 범하려는 마음[犯上]’은 非禮·無禮·缺禮의 뿌리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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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때 홍국영, 정조를 보호한 공로로 승승장구하다가 참람한 행위들 저지르고 실각
⊙ 漢 文帝 때 원앙, 황실 내 문제 등에 대해 직언을 하다가 피살… 신하가 황실 권력싸움에 끼어드는 것도 犯上
⊙ “곧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直而無禮則絞]”(공자)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정조는 홍국영의 犯上을 조장했다는 점에서 결코 강명한 군주였다고 할 수 없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앞부분에 공자의 제자 유자(有子)의 말이 나온다.
 
  “그 사람됨이 효도하고 공손하면서 윗사람을 범하기[犯上]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또)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亂)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야 도리가 생겨난다. 효도와 공순은 어짊을 행하는 근본이라 할 만하다.”
 
  이 말은 효(孝)와 충(忠)이 왜 사실상 한 가지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말의 검토에 앞서 《맹자(孟子)》 등문공 장구(滕文公章句)에 나오는 유자라는 사람에 관한 짤막한 일화부터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워낙 공자(孔子)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기에 이 일화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직후 제자들의 의견 충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맹자의 말이다.
 
  “옛날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후에 제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짐을 챙겨서 장차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제자들은 (공자의 상례(喪禮)를 주관하고 있던) 자공(子貢)에게 들어가서 인사를 한 후에 서로 마주 보며 통곡을 하고 모두 목이 쉰 뒤에 겨우 각자의 길을 떠났다. 자공은 다시 돌아와서 공자의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홀로 3년을 더 보낸 후에 돌아갔다. 훗날 자하(子夏) 자장(子張) 자유(子游) 세 사람이 모여 유약(有若=有子)이 공자와 닮았다고 하여 공자를 섬기듯이 예로써 유약을 섬기기로 하고서 증자(曾子)에게도 이같이 해줄 것을 강권한다. 이에 증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 된다. (스승님의 덕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장강과 한수의 (맑은) 물로 씻어내고 가을 뙤약볕을 쬐어 말린 듯 하얗게 빛나니[晧晧乎] 그 위에 조금이라도 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보면 유자는 그 외모가 공자와 비슷했던 데다가 나름대로 공자 제자들로부터 높은 신망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증자의 반대로 공자의 학통은 공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로 내려오게 됐다. 흔히 유자는 예(禮) 문제에 밝았다고 한다. 그리고 《논어》에서도 다른 제자들과 달리 증자와 함께 자(子)를 붙였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의 제자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가 바로 이 범상(犯上)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범상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크게 이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노골적인 犯上은 곧 교만
 
  겉으로 드러나는 범상의 사례는 이미 《논어》에도 많다. 특히 팔일(八佾)편은 바로 이 범상의 사례로 시작한다. 거기서 공자는 계씨(季氏)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천자의 팔일무(八佾舞)를 자기 집 마당에서 추다니. 이런 참람한 행위를 보고서도 그냥 참고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어떤 패륜 행위인들 참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계씨란 공자의 고국 노(魯)나라 대부이자 권력 실세였던 계강자(季康子)다. 팔일(八佾)은 8줄짜리 춤으로 가로 세로 8줄이므로 모두 64명이 추는 춤이며 그것은 천자(天子)를 위한 춤[禮樂]이다. 제후(諸侯)는 6줄(36명), 대부(大夫)는 4줄(16명), 사(士)는 2줄(4명)이다. 계씨는 대부(大夫)이므로 사일무(四佾舞)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육일무(六佾舞)도 아닌, 팔일무(八佾舞)를 자기 집 뜰에서 추게 했으니 단순히 제후를 뛰어넘어 천자를 범한 것이다. 이처럼 아래가 위를 범하는 것[犯上]을 참람(僭濫)이라고도 한다.
 
  이어 공자는 “이런 참람한 행위를 보고서도 그냥 참고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무엇인들 참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라고 개탄한다. 계씨의 이런 행동에 침묵한다면 앞으로 부모나 임금을 죽이는 자도 그냥 참고 받아들일 것이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사실 범상의 문제는 이런 짓을 하는 신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임금이 강명(剛明)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간접적 척도도 된다는 점에서 중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에서는 정조(正祖)와 홍국영(洪國榮)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홍국영은 영조 48년(1772년) 2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고 이듬해 세자시강원 말단 관리가 되면서 당시 세손(世孫)으로 있던 정조와 인연을 맺게 된다. 영조도 “국영은 내 손자”라며 아꼈다. 이때는 세손을 흔들려는 각종 세력이 기승을 부렸고 홍국영은 적어도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세손 보호에 진심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세손이 1776년 즉위하자 홍국영은 3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가 석 달 만에 이조참의로 자리를 옮긴다. 둘 다 같은 정3품 당상관이지만 인사를 책임지는 요직을 맡은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다시 도승지에 오른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 29세였다. 9월에는 규장각 직제학으로, 10월에는 군무를 관장하는 찰리사로 옮겼고 11월에는 수어사도 겸직했으며 다음날에는 비변사 제조까지 겸했다. 이듬해에도 문무(文武)를 뛰어넘은 승진은 계속됐다. 당시 실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이때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해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홍국영의 비명횡사
 
  물론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정조 자신이다. 정조 2년 홍국영은 정조에게 소생이 아직 없다는 것에 착안해 13세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여보낸다. 그런데 정조 3년 5월 7일 원빈 홍씨는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다. 홍국영은 왕비의 상례에 준하여 동생의 상을 치렀다. 참람한 행위였다.
 
  “이휘지가 표문(表文)을 짓고, 황경원이 지장(誌狀)을 짓고, 송덕상이 지명(誌銘)을 짓고, 채제공이 애책(哀冊)을 짓고, 서명선이 시책(諡冊)을 지었다.”
 
  국왕의 상을 당했을 때나 동원될 만한 당대의 명유(名儒)들이 총동원된 것이다. 그리고 9월 26일 홍국영은 도승지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조는 즉각 수리했다. 실은 정조가 사직토록 명을 내린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정조의 태도가 바뀐 데 대해서는 실록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누이가 빈(嬪)이 되고서는 더욱 방자하고 무도하여 곤전(坤殿·중전 효의정후 김씨)의 허물을 지적하여 함부로 몰아세우고 협박하는 것이 그지없었으나, 임금이 참고 말하지 않았다. 그 누이가 죽고서는 원(園)을 봉(封)하고 혼궁(魂宮)을 두었고 점점 국권을 옮길 생각을 품어 앞장서 말하기를 ‘저사(儲嗣·후사)를 넓히는 일은 다시 할 수 없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역적 은언군 이인(李秵·철종의 할아버지)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그 군호(君號)를 고쳐 완풍(完豊)이라 하고 늘 내 생질이라 불렀다. 완이라는 것은 국성(國姓)의 본관인 완산(完山·전주)을 뜻하고 풍이라는 것은 스스로 제 성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킨 것이다. 가리켜 견주는 것이 매우 도리에 어그러지므로 듣는 자가 뼛골이 오싹하였으나, 큰 위세에 눌려 입을 다물고 감히 성내지 못하였다. 또 적신(賊臣) 송덕상(宋德相)을 추겨 행색이 어떠하고 도리가 어떠한 자를 임금에게 권하게 하였는데, 바로 이담이다. 그래서 역적의 모의가 날로 빨라지고 재앙의 시기가 날로 다가오니, 임금이 과단(果斷)을 결심하였으나 오히려 끝내 보전하려 하고 또 그 헤아리기 어려운 짓을 염려하여 밖에 선포하여 보이지 않고 조용히 함께 말하여 그 죄를 낱낱이 들어서 풍자(은근히 지적함)하여 떠나게 하였다.〉
 
  홍국영 문제에 관한 한 정조는 그의 범상을 묵과한 정도가 아니라 조장했다는 점에서 그는 결코 강명한 군주였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조정을 떠나 강원도 강릉 해안가에 거처를 마련한 홍국영은 술로 날을 지새우다가 1781년(정조 5년) 4월 사망했다. 33세였다. ‘부지례자(不知禮者)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앙의 안타까운 죽음
 
한나라 문제와 경제를 모셨던 원앙은 그 강직함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번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범상의 문제를 살펴볼 차례다. 충직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게 되는 범상이 그것이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 직언으로 유명했던 원앙(袁盎, 爰盎)이 그런 경우다.
 
  문제가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할 때 두황후(竇皇后)와 신부인(愼夫人)도 따라갔다. 그들은 궁중에 있을 때에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한번은 자리를 준비하면서 낭서장(郎署長)이 나란히 자리를 만들자 앙이 신부인의 자리를 끌어당겨 뒤로 밀쳐놓았다. 신부인이 화를 내며 기꺼이 앉으려 하지 않았다. 문제도 화를 내며 일어났다. 원앙은 이에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신이 듣건대 높고 낮음[尊卑]에 차례가 있으면 위와 아래가 화목해진다고 했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이미 후(后)를 세우셨고, 신부인은 곧 첩일 뿐인데 첩과 본부인이 어찌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폐하께서 신부인을 정녕 총애하신다면 상을 두텁게 내리십시오. 폐하께서 방금 신부인을 위해 하신 행동은 다름 아니라 신부인에게 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에 문제는 마침내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가 신부인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부인은 앙에게 금 50근을 내려주었다. 원앙의 “만일 폐하께서 신부인을 정녕 총애하신다면 상을 두텁게 내리십시오”라는 말은 정조가 새겨들었어야 할 말이다. 반고의 《한서(漢書)》는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앙은 또 자주 곧은 간언[直諫]을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조정에 머물 수 없었다. 뽑혀서 농서(隴西) 도위(都尉)가 됐다(註·좌천되어 지방으로 쫓겨 갔다는 뜻이다). 그는 사졸을 어질게 대하며 아껴주었기[仁愛] 때문에 사졸들은 모두 (그를 위해서라면) 다투어 목숨을 바쳤다.”
 
  다시 중앙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임금이 문제(文帝)에서 경제(景帝)로 바뀌었다. 경제는 자신의 아버지 때만큼 원앙을 중용하지는 않았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앙은 엉뚱한 일에 휘말리게 된다. 《한서》를 보자.
 
  〈앙은 비록 집에서 한가롭게 지냈지만 경제는 종종 사람을 보내어 국가 전략을 묻곤 했다. 양왕(梁王·경제의 동생)은 (두태후의 후원을 업고 경제에게) 억지로 구해서 후사가 되고 싶어 했는데 앙이 나아가 설득한 뒤에 그런 시도는 막혀 버렸다. 양왕은 이 때문에 앙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자객을 보내 앙을 죽이려 했다. 자객이 관중(關中)에 와서 앙에 대해 물어보니 사람들이 앙에 대해 칭송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에 그 자객은 앙을 찾아와 말했다.
 
  “신은 양왕의 돈을 받고 당신을 암살하려고 왔는데 하지만 당신은 장자(長子)인지라 차마 당신을 찌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당신을 암살하려는 자가 10여 무리가 되니 잘 대비하십시오.”
 
  앙은 마음이 편치 못했고 집안에 이상한 일들이 많이 발생해 곧바로 배생(棓生)을 찾아가 점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양왕이 보낸 자객들이 과연 안릉의 성문 밖에서 앙을 가로막더니 살해했다.〉
 
  황실의 권력 싸움에 신하가 끼어든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범상이다. 원앙의 안타까운 죽음의 배경은 바로 그 점이다. 그래서 《논어》 태백(泰伯)편에 실린 공자의 말 한마디는 울림이 크고 깊다.
 
  “곧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直而無禮則絞].”
 
 
  원앙의 강퍅함
 
한나라 문제.
  그의 강퍅함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다. 그는 평소 조조(鼂錯)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조조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됐는데 조조가 관리를 시켜 원앙이 오왕의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엮어 넣도록 하여 서인(庶人)이 된 적이 있었다. 그 후 조조의 삭번(削藩) 정책으로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경제에게 조조를 죽여 오나라에 사과하라는 건의를 해 관철시켰다.
 
  그에 앞서 문제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강후(絳侯·주발)가 승상(丞相)이 돼 조회를 마치고 성큼성큼 물러 나오는데 자신감이 넘쳤다. 문제는 예로 대하며 그를 공경했다. 앙이 말했다.
 
  “승상은 어떤 사람입니까?”
 
  상(문제)이 말했다.
 
  “사직(社稷)의 신하다.”
 
  앙이 말했다.
 
  “강후는 이른바 공신(功臣)이지 사직의 신하는 아닙니다. 사직의 신하란 군주가 살아 있을 때는 같이 살고 군주가 죽을 때는 같이 죽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여후(呂后) 시절 여러 여씨(呂氏)가 정사를 좌우하면서 제멋대로 서로 왕이 되자 유씨(劉氏)는 띠처럼 겨우 끊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강후는 태위(太尉)가 되어 병권의 핵심을 잡고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여후가 붕(崩)하자 대신들이 서로 도와 힘을 합쳐 여러 여씨를 공동으로 주살할 때 태위는 마침 병권을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마침 성공할 기회를 만난 것이니 이른바 공신이기는 해도 사직의 신하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승상은 마치 교만함이 임금의 얼굴색과 같은데 폐하께서는 겸양하시니 신하와 군주가 소로 예를 잃은 것이므로 가만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그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후 조회 때에는 상은 점점 더 위엄을 갖췄고 승상은 점점 더 두려워했다. 얼마 후에 강후는 앙을 원망하며 말했다.
 
  “내가 너의 형과 친한 사이인데 지금 너따위 애송이가 나를 비방하다니!”
 
  앙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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