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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1〉 16세기, 일본이 ‘동방의 로마’였던 시절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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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슈 지역 다이묘들이 파견한 4인의 소년사절단, 로마까지 유럽 순방 후 8년 만에 귀국
⊙ 나가사키 등에 신학교 설립되고 전성기 신자가 30여만 명에 이를 정도로 기독교 흥성
⊙ 오토모 요시시게, 마쓰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등 규슈 지역 다이묘들, 포르투갈 등과의 무역 확대 노려 기독교 적극 수용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를 알현하는 덴쇼견구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 ‘덴쇼’는 당시 일본의 연호이다.
  일본과 유럽의 만남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전파이다. 지금은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1% 정도로 알려져 있는 기독교도 소수국(少數國) 일본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놀라울 정도로 기독교 전도가 활발했던 나라가 일본이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의 초기 기독교 전래사와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소개한다.
 
  1582년 2월 예수회 신부 발리냐노의 인솔하에 일본인 소년 4명이 나가사키항(港)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의 카락선(船)에 몸을 싣는다. 이토 만쇼, 치지와 미구엘, 나카우라 쥴리앙, 하라 마르티노 4명의 소년은 로마의 교황과 스페인·포르투갈왕을 알현하고 일본 선교를 위한 정신적·경제적 지원을 요망하는 사절단으로서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발리냐노 신부의 발안(發案)과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등 규슈(九州) 지역의 유력 기리시탄(‘크리스천’의 일본식 표현) 다이묘(大名·영주)의 후원으로 파견되는 유럽 방문 사절단이었다.
 
 
  8년 만의 귀국
 
  이들은 인도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두르는 2년 반의 여정 끝에 1584년 8월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 본격적인 유럽에서의 활동에 나선다. 그해 11월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필리페 2세를 알현한 후 지중해 동쪽 로마로의 여정을 계속한다.
 
  이듬해 3월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토스카나 대공국(大公國)의 군주이자 메디치가(家)의 후예인 프란체스코 1세를 알현한다. 그해 3월 말 이들은 꿈에 그리던 로마에 입성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일본 땅에서의 복음(福音) 전파를 축원(祝願)한다. 교황의 옥음(玉音)은 소년들에게 신(神)의 목소리나 다름없었다.
 
  공교롭게도 소년사절단을 접견한 지 3주 후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선종(善終)한다. 후임으로 식스투스 5세가 새로이 교황에 선출되자, 마침 로마에 머물던 소년사절단도 새 교황의 대관식에 초청되어 참석하는 영광을 누린다. 지구상 가장 동쪽 끝에서 꼬박 3년이나 걸려 천신만고 끝에 로마를 방문한 소년들이 겪은 일들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기록상으로 이들이 유럽을 최초로 방문한 일본인은 아니다. 일본을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로부터 일본 땅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사쓰마(薩摩·지금의 가고시마) 출신의 베르나르도(일본명 불명)라는 청년이 1552년 사비에르를 따라 인도의 고아로 이주한 뒤, 1553년 리스본에 도착하여 예수회 수도사로서 현지에 정착했다. 그가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일본 땅을 밟은 지 꼭 10년 만에 일본인이 그 길을 반대로 거슬러 유럽 땅을 밟았으니 꽤나 빠른 속도로 양방향의 교류가 이루어진 셈이다.
 
  베르나르도는 유럽에서 생을 마쳤지만, 소년사절단은 1590년 왔던 길을 거슬러 일본으로 돌아왔다. 나가사키를 떠날 때 13~14세였던 소년들이 다시 일본 땅을 밟았을 때에는 20세를 훌쩍 넘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이로써 소년사절단은 유럽과 일본을 왕복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낀 후 다시 고국의 땅을 밟는 이들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로마’ 나가사키
 
  ‘기리시탄’이란 기독교도(Christian)를 의미하는 일본의 역사적 용어이다. 한자로는 ‘吉利支丹’ 또는 ‘切支丹’으로 표기하며 현대에는 가타가나 ‘キリシタン’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인들은 20세기 이전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기리시탄시(史)’라고 부른다. 기리시탄시는 크게 보아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1549년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에 의해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제(司祭) 추방령을 내리기까지의 초기 도입기를 제1기, 도요토미 정권과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금교령(禁敎令) 발령 이후 무자비한 박해와 탄압으로 기독교 전파가 엄격히 통제된 시기를 제2기, 메이지(明治) 정부의 등장으로 1873년 금교령이 폐지되고 기독교가 근대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수용되고 재정립되는 시기를 제3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서구 역사가들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시기가 제1기에 해당하는 초기 기독교 도입기이다. 이 시기의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이 동방 항로 개척 과정에서 진출한 그 어떤 지역보다도 기독교 전파를 위한 현지 세력과의 소통과 조력 확보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금교(禁敎)에 대비되는 의미로 ‘허교(許敎)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의 일본은 포교의 문이 열려 있었다.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한 규슈 일대는 포교의 천국이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소위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고, 선교사가 주재하던 거점 포교지는 기독교도와 예배당으로 넘쳐났다.
 
  선교사들이 일본 사역 활동을 기록하여 교황청에 보고하던 연보(年譜)에는 16세기 후반 기독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의 하나인 아리마(有馬·지금의 나가사키현)의 모습에 대해 “성(城)밖 마을 일대에는 교회와 세미나리오(초급신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교회의 존재를 알리는 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는 거리에는 세미나리오의 학생들이 오르간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다른 선교 중심지였던 아마쿠사(天草·지금의 구마모토현)의 경우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만3000명이 기독교 신자였고, 60명이 넘는 신부가 30곳이 넘는 교회를 배경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1570년대에는 정치·경제의 중심 긴키(近畿·교토와 오사카 일대) 지역까지 기독교 세력이 널리 퍼진다. 실권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비호하에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에 난반지(南蠻寺)라고 불리는 3층 건물의 대형 교회당이 건립되고 선교사들이 공공연히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일본의 로마’로 불리던 나가사키에서는 수십 개의 교회에 주일과 축일마다 신자들이 넘쳐나 사제들이 하루에 여러 곳을 방문하여 쉴 새 없이 미사를 집전해야 했다는 기록도 있다.
 
  1580년대에는 체계적 기독교 포교를 위해 아리마에 세미나리오(기초신학교)가 설립됐다. 이어 후나이(府內·지금의 오이타현)에 콜레지오(고등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신학교는 기독교 문화의 정수(精髓)라 불린다. 체계적으로 이론화된 신학 교육과 유능한 사제 양성을 위한 제도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유럽 방문 소년사절단의 단원들도 세미나리오의 학생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들 신학교에서는 유럽 문명의 기초인 자연과학 교육과 기술 교육이 시행되고, 유럽의 인쇄술로 제작된 ‘기리시탄판’(版)으로 불린 각종 일본어 번역 성서와 교육 서적이 간행되었다. 세미나리오와 콜레지오는 일본인들이 신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을 받아들이는 통로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4만~5만명 순교
 
나가사키에 있는 26성인 순교기념비.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의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흥했다. 사진=배진영
  일본의 기리시탄시 연구자들은 기독교가 전파된 지 30년 만에 기독교 신자가 20만명에 육박했고, 막부의 본격적 탄압과 박해로 신자들이 수면 밑으로 숨어들기 전인 17세기 초반 시점에 규슈와 서(西)일본 일대에 최소 30만명 이상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일본이 포교의 천국이었다는 것은, 반대로 포교가 금지된 이후 박해를 받아 순교한 사제와 신자들의 수에 의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연구자들은 1597년 최초의 공식 박해로 기록된 소위 나가사키 ‘26성인(聖人) 순교사건’ 이후 250년간 지속된 막부의 가혹한 박해로 목숨을 잃은 유명·무명의 희생자를 모두 합하면 순교자가 4만~5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 규모의 순교자가 있는 나라는 드물다. 일본은 ‘순교자의 나라’로 유럽 각국에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에도(江戶)시대 전반에 걸친 집요한 탄압으로 많은 관련 기록이 소실되기는 하였으나, 기독교가 당시 일본 사회에 단기간 내에 깊숙이 침투했었다는 데에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인도·동남아·중국 등 여타 아시아 지역과 비교하면 일본의 기독교 수용 양상은 예외성(또는 의외성)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외적 현상은 일본인들이 특별히 기독교 교리에 감화되기 쉬운 민족성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현대 일본에서 기독교 인구의 비중이 고작 1%대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급격한 기독교 확산은 신앙의 내면적 수용이라는 종교적 측면을 넘어서는 정치경제적 동인(動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사비에르의 渡日과 초기 기독교 전래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후일 성인(聖人)이 됐다.
  일본의 기독교 전파는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사쓰마 상륙을 기점으로 한다. 당시 인도의 고아를 거점으로 선교 활동에 종사하던 사비에르는 인도 포교에 큰 절망감을 느끼고 중국으로 시야를 돌리던 차였다. 믈라카에 머무르며 중국 진출 기회를 엿보던 사비에르는 그곳에서 사쓰마 출신의 안지로와 조우한다. 안지로는 일본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하였다가 포르투갈 선교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안지로로부터 일본의 사정을 전해 들은 사비에르는 계획을 수정하여 일본으로 행선지를 돌린다.
 
  안지로를 비롯한 동료 수사(修士) 일행과 사쓰마에 도착한 사비에르는 히라도(平戶), 야마구치(山口)를 거쳐 1551년 교토로 향한다. 해당 지역의 지배자를 기독교 우호 세력으로 포섭하여 포교 활동을 우선적으로 허가받는 것이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이었다. 사비에르가 석 달간의 여행 끝에 어렵사리 도착한 교토는 응인의 난(應仁の亂) 이래의 혼란으로 수도로서의 위용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도성 곳곳에 전란의 상처가 남아 있고, 천황이나 쇼군은 흉물스런 폐허로 변한 궁성이나 거소 하나 제대로 수리할 여력이 없었다. 중앙의 천황이나 쇼군의 무력(無力)함을 파악한 사비에르는 지방 유력 다이묘를 지지 세력으로 포섭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히라도로 복귀한다.
 
  교토 방문이 완전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비에르는 교토 방문길에 사카이(堺)의 대상인들과 인연을 맺고 그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히비야 료케이(日比屋了珪),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숙식을 제공하고 도성 안의 유력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사비에르 일행을 돕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막강한 금력(金力)을 보유한 대상인이라도 신분제하에서 사회적 지위는 높지 못하였다. 무가(武家)나 불가(佛家)가 전제적(專制的) 권력을 행사하는 신분제에 대한 불만과 서양과의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내다보는 비즈니스 감각이 상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호의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상인 계층은 선교사들의 조력자로 기독교 포교의 지지 세력으로서의 잠재력이 컸다.
 
  여담이지만, 고니시 류사는 교토 최초의 기독교 신자라 불리며 긴키 일대의 초기 기독교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임진란 당시 조선 침공의 선봉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그의 차남이다.
 
 
  기리시탄 다이묘의 등장
 
3대 기독교 다이묘의 한 사람인 오토모 요시시게.
  교토에서 히라도로 일단 복귀한 사비에르는 지방 유력(有力) 다이묘의 포섭 기회를 엿본다. 그때 사비에르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 기타(北)규슈 동부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분고(豊後)의 오토모(大友) 가문이었다.
 
  분고의 오토모 일족은 15세기 후반 이래 대외(對外)무역으로 부(富)를 축적하며 규슈 패자(覇者)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분고는 고(高)품질 유황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유황은 흑색 화약 제조의 필수 재료이다.
 
  오토모 가문은 15세기 말 이래 중국 조공용 유황을 막부에 헌상하고 있었다. 16세기 초반 밀무역이 성행하자 오토모 가문으로서는 중국 동남해안 일대의 화약 생산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컸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들의 동중국해 진출과 그에 따른 뎃포(鐵砲·조총) 전래는 유황의 가치를 크게 높였고, 이는 오토모 가문에 있어 일대 전략적 환경의 변화였다.
 
  경쟁 다이묘들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오토모 가문은 대외무역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중국 왜구(倭寇)나 포르투갈 상인 등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51년 9월 사비에르는 포르투갈 상선이 분고에 입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영주인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오토모 소린(宗麟)으로도 알려짐]를 찾는다. 불과 1년 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영주의 자리에 오른 요시시게는 부국강병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사비에르에게 경의를 표하고 복종하는 모습을 보고 선교사의 이용 가치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한다.
 
  요시시게는 사비에르에게 오토모 영내에서의 포교를 허락하는 한편, 사비에르를 통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희망하였으나, 사비에르가 두 달 후인 11월 일본을 떠남에 따라 요시시게의 구상은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요시시게의 선교사관(觀)은 이후 여타 규슈 다이묘들 사이에 공유된다. 부국강병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수용(또는 이용)하고 종국에는 스스로 기독교 신자가 된 오토모 요시시게, 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3인은 규슈 3대 기리시탄 다이묘로 알려져 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냉엄한 생존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규슈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세력과의 통교를 부국강병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고, 선교사들을 그 실현을 위한 열쇠로 보았다. 이들은 종교 자체보다도 ‘남만무역’, 즉 포르투갈과의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포함하는) 교역 관계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선교사의 이용 가치에 주목하였다.
 
  가장 먼저 남만무역의 기회를 잡은 것은 히라도였다. 히라도는 일찍부터 중국의 상인과 왜구들이 드나들던 일본 무역 거점이었다. 1550년 사비에르는 포교를 불허한 사쓰마를 떠나 히라도로 거처를 옮긴다. 다국적(多國籍) 상인과 해적들이 발을 들이던 히라도에서 새로운 종교 유입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는 종가(宗家)에 해당하는 오토모 가문에 상신하여 사비에르의 포교를 허용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553년부터 1561년까지 매해 포르투갈 상선은 히라도를 방문한다. 히라도는 포르투갈과의 교역으로 흥성하였고, 이는 곧 주위의 경쟁 다이묘들을 자극하였다.
 
 
  히라도에서 나가사키로
 
나가사키에 있는 오무라성당. 일본의 국보다. 사진=배진영
  독실한 불교신자인 마쓰라는 현실적 이유로 기독교 포교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히라도 주민들의 민심도 편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불상(佛像), 묘비 훼손 등이 잇따르고 이에 대한 불교도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종교 갈등이 심화되자 마쓰라는 1558년 히라도에 주재하던 예수회 사제 가스파 빌렐라를 추방한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선교사가 주재하지 못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1561년 포목품 거래를 둘러싼 분쟁으로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인 상인 간에 살상사건이 발생한다. 미야노마에(宮ノ前) 사건으로 알려진 포르투갈-일본인 간 최초의 유혈 충돌 사건이다. 문제를 일으킨 일본인들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교구장 코스메 데 토레스 신부와 상의하여 무역 포스트를 히라도에서 옮기기로 결정한다.
 
  이때 새로운 장소 물색 임무를 맡은 루이스 데 알메이다 신부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나선 것이 나가사키 일대를 영지로 하던 오무라 스미타다이다. 오무라는 기독교 포교 허용과 선교사의 안전을 확약함으로써 포르투갈 상선의 영지 내 입항(入港)을 유치한다. 오무라는 토레스 신부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이듬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세례명 바르톨로메오)가 된다. 기리시탄 탄생의 배경에는 이처럼 물고 물리는 다이묘 간의 긴박한 생존 경쟁이 있었다. 세속적 이익을 매개로 정치 권력자의 후원을 얻자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기층민 사이에 퍼져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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