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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24〉 원효인가 의상인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 준 교훈

글 : 유광수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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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 vs. 당나라에서 유학한 의상
⊙ 광덕은 성욕을 자제하고 득도, 노힐부득은 여자의 유혹에 다 응해주고도 득도
⊙ 득도의 길이 다른 것일 뿐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아니었음

유광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현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해골 물’을 마시고 도를 깨쳤다고 전해지는 원효대사.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마셨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유학준비생 원효가 마시고 대사로 거듭났다는, 해골 물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만히 있다가 돌 맞은 것처럼 억울한 사람이 생각난다.
 
  배움에 목말랐던 신라 승려 원효와 의상이 선진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唐)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가던 길에 날이 저물었다. 비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 무너진 동굴에 들어가 노숙을 했다. 한밤중에 목이 말랐는데 주변을 더듬어 보니 물이 있어 마셨다. 그야말로 감로수(甘露水)처럼 달콤했다.
 
  날이 밝아서 보니 자신들이 잔 곳은 동굴이 아니라 무너진 무덤 속 썩어 문드러진 시체 옆이었으며 감로수는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충격과 놀람, 역겨움에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한참 토악질을 하던 원효가 번개처럼 깨달았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찌 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게 마셨고 오늘은 구토를 한단 말인가? 달라진 것은 해골 물이 아니라 내 마음일 뿐이니, 모든 것이 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술수로구나[一切唯心造].’
 
  깨우친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같은 불후의 저작을 집필했다.
 
  전해지는 승전(僧傳)에 따라, 해골 물이 아니라 시체 썩은 물이었다고도 하고, 무덤인 것을 확인하고 나자 다음날 귀신이 출몰했다고도 하는 등, 조금씩 내용이 다르지만 물을 마시고 원효가 깨달았고 유학 대신 돌아와 포교에 힘쓴 고승(高僧)이 되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의 불편함은 원효의 깨달음이 마뜩잖아서도 아니고, 이야기에 조작의 냄새가 농후하다는 것도 아니며, 해골 물을 마시고 감염되지 않은 것이 도무지 현대의학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어깃장 같은 것도 아니다. 같이 유학 가던 젊은 승려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같이 해골 물을 마셔놓고 한 명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한 명은 아무것도 몰랐단 말처럼 들린다. 한 명은 진각(眞覺)을 이뤄 유학이니 당나라니 하는 것의 부질없음을 깨달았는데 다른 한 명은 미련하게 당나라로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명민하고 활달한 원효와 대조적으로 갑갑하고 답답해 보이는 의상(義湘)의 처지가 무척이나 졸렬해 보인다.
 
  의상도 대단한 고승이다.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고 한국 불교에 끼친 영향은 원효보다 심대하다면 더 심대했지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을 아무리 늘어놔 봐야 구질구질한 변명이나 어설픈 하소연으로 들린다. 해골 물 이야기의 강력한 이미지로 인해, 의상은 이미 쫀쫀한 인간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한마디 입도 뻥끗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억울하게 된 의상을 위해 어느 정도의 변명이 필요한 듯하다.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제대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상과 원효 이야기를 살펴봐야 하는데, 일단은 조금 돌아서 〈광덕·엄장〉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섹스리스 광덕과 인간적인 엄장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은 친구였다. 둘이 각각 도(道)를 닦았는데 먼저 득도(得道)하면 서로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어느 날 저녁 하늘에서 엄장에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먼저 서방정토로 가네. 자네도 서둘러 오게.”
 
  약속대로 친구 광덕이 득도하여 서방으로 가면서 알려준 것이다. 이에 엄장이 광덕의 집으로 가보니 정말 광덕이 죽어 있었다. 혼자 살던 엄장과 달리 광덕은 처가 있었는데, 엄장은 광덕의 처와 함께 시신을 거둬 무덤을 만들어 주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같이 지내는 것이 어떻소?”
 
  광덕의 처가 좋다며 그러자고 했다.
 
  엄장이 밤이 되자 자연스럽게 광덕의 처를 가까이하려 했다. 그러자 광덕의 처가 벌떡 일어나 꾸짖었다.
 
  “당신은 절대로 득도하지 못하겠군요.”
 
  그러고는 정말이지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남편은 저와 십여 년을 함께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침상에 눕지 않았고 몸을 더럽히지도 않았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단정하고 바르게 앉아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을 불렀습니다. 정성이 이랬으니 어떻게 득도하지 않겠습니까?”
 
  광덕 처의 말인즉, 광덕이 10년 넘게 같이 살면서 동침은커녕 밤마다 염불을 외며 도를 닦았다는 거였다. 그러려면 뭐 하러 혼인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말을 들은 엄장은 부끄러워 그 길로 그곳을 나와 원효를 찾아갔다. 원효에게서 깨끗하게 바라보는 법[淨觀法]을 배웠고 결국은 득도를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광덕·엄장〉 조에 있는 이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광덕 때문에 갑갑하다. 대체 이 작자는 왜 결혼해서 부인과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밥해 주고 빨래해 주는 식모를 구하지 말이다.
 
  아무튼 〈광덕·엄장〉의 핵심은 고고하게 정진한 광덕이 먼저 득도했고 속되고 인간적인, 어쩌면 광덕의 처를 탐내 넉살 좋게 같이 살자고 집적댄 엄장의 득도가 요원했다는 거다. 물론 엄장은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원효를 찾아가 깨우침을 얻어 성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러니 우리가 도를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덕처럼 살아야 할까, 엄장처럼 살아야 할까. 묻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답은 명확하다. 광덕처럼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대체 무슨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 이야기까지 들어보시라. 그리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삼국유사》에는 〈광덕·엄장〉과 꼭 닮은 이야기이지만 정확하게 반대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조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역시 친구였다. 역시 득도하려고 각자 암자를 짓고 도를 닦았다. 어느 날 달달박박이 지내는 암자에 스무 살가량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온몸에 난초와 사향 향기를 풍기면서 그의 암자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간청했다. 달달박박은 이대로라면 큰일 나겠다 싶어, “절은 정결한 곳이니 썩 떠나시오”라며 그녀를 내쫓았다.
 
  여인이 이번엔 노힐부득의 암자로 가서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노힐부득은 달달박박과 달랐다. 깊은 산골인 데다 날도 저문 것을 보자 그녀를 받아들여 자고 가게 했다. 노힐부득은 밤새도록 염불을 했다. 그렇게 밤을 보내려 하자 여인이 그에게 말했다.
 
  “제가 마침 해산할 기미가 있어요. 부탁이니 해산할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여인은 집요했다. 그가 넘어오지 않자 갖은 수선을 피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노힐부득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그녀의 해산을 도왔다. 그러자 이번엔 여인이 목욕을 시켜달라지 않는가. 그는 부끄러움과 난감함, 이러다가 파계(破戒)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교차했다. 어쩔 수 없이 목욕통을 준비해서 그녀를 통 안에 앉히고는 물을 데워 그녀의 몸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여인이 한술 더 떴다.
 
  “스님도 같이 목욕하시지요.”
 
  결국 그는 그녀의 말대로 한 목욕통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러저러해서 아침이 되었다.
 
  여인을 쫓아냈던 달달박박이 노힐부득의 암자를 찾아왔다. 자신에게 쫓겨난 여자에게 친구 노힐부득이 파계를 했을 것 같아서였다. 실컷 비웃어주려고 노힐부득의 암자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랄 일을 목격했다.
 
  노힐부득이 미륵부처가 되어 연화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노힐부득이 사정을 설명해 주자 달달박박이 크게 탄식했다.
 
  “내가 장애가 많아 부처님을 만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셈이 되었구나.”
 
  그러고는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노힐부득이 말했다.
 
  “통 속에 남은 물이 조금 있으니 그걸로 목욕을 하시오.”
 
  그렇게 남은 물로 목욕하자 노힐부득도 결국 득도한 아미타불이 되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산 아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체를 가르치고는 구름을 타고 서방정토로 떠났다.
 
  〈광덕·엄장〉 이야기와 구조는 꼭 같지만 거꾸로 뒤집혀 있는 인화지와 같은 느낌이다. 여기선 그렇게 엄정한 달달박박이 오히려 나중이 되고, 반대로 엄장처럼 조금 느슨하고 헐렁한 노힐부득이 먼저 득도해서 부처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아리송해진다. 누가 더 나은지, 누가 더 훌륭한지를 따지기가 난감해진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은 왜 이렇게 거꾸로 뒤집혀 상충하는 이야기를 써놓으셨는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어떤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단 말인가?
 
 
  의상과 낙산사
 
관세음보살을 만난 후 낙산사를 일으켰다는 의상 대사.
  이제 당나라에 유학 갔던 의상과 그동안 신라에서 포교를 벌여 명성을 쌓은 원효가 어떻게 엇갈리는지를 살펴보자. 그들의 이야기가 《삼국유사》 〈낙산이대성 관음・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正趣, 調信)〉 조에 전한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보니,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동해 해변의 동굴에 사신다지 않는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당나라 전역을 다니며 만나 뵈려 했는데, 얼마나 고생고생 불법을 닦았는데 이런…, 그 먼 곳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국 동해안에 계시다니…. 의상의 막막하고 허탈한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안 될 정도다. 하지만 역시 의상이었다. 다시 용기를 내서, 관음보살이 산다는 서역 보타낙가산(寶陁洛伽山)의 이름을 따서 낙산(洛山)이라 이름 붙인, 그곳의 그 동굴을 찾아갔다.
 
  그리고 성심을 다해 관음보살을 뵙기 위해 정성껏 7일 동안 재계(齋戒)를 한다.
 
  마지막 날 새벽 일찍 의상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물 위로 던졌다. 그랬더니 그 자리가 물 위에 둥둥 떴다. 의상의 신통력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보살께서 허락하신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더니만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나타나서 굴속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굴로 들어간 의상이 또다시 예를 정성껏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수정염주(水晶念珠) 한 꾸러미가 나타났다. 그가 공손히 염주를 받고 물러나자, 이번엔 동해 용이 나타나 여의주 한 알을 그에게 바쳤다. 그것까지 같이 받아서는 굴 밖으로 나왔다.
 
  의상은 지겹지도 않은지 또다시 재계를 올렸고, 그런 지 7일 만에 굴로 다시 들어가 드디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났다. 관음이 말했다.
 
  “앉은 자리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절을 짓는 것이 좋겠다.”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났고, 그래서 절을 짓고 관음상까지 만들어 봉안했다. 그러자 그 대나무가 사라졌다. 의상은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이곳에 머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절을 낙산사(洛山寺)라고 하고,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그곳에 모셔두고 떠났다.
 
  거의 암호처럼 알아듣기 힘든 기이한 상황이 이어진다. 의상의 신통력이 앉은 자리를 물에 띄우질 않나 염주와 여의주를 받질 않나,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신적 존재만 해도 천룡팔부를 만나고 동해 용왕도 만난다. 그리고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관음보살도 만나 그가 하라는 대로 절을 짓기까지 한다. 짧은 글이기에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듯하지만, 절을 짓는 것이 며칠 만에 끝날 일이 아니란 것을 감안하면, 의상의 행동과 생각이 정말 벽창호처럼 갑갑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아니 그토록 열심히 재계를 올리고 갖은 정성을 다한 후에 관음보살을 만나고도 그때는 깨닫지 못하고, 나타났던 대나무가 사라지자 ‘비로소 관음보살이 이곳에 계신 것을 알았다’니 대체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보통 사람 같으면 신기한 징조 중 하나만 체험해도 대번에 “아이고 보살님, 감사합니다!” 하고 깨달을 텐데, 이 의상은 마지막에 대나무가 사라진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믿다니 말이다. 좋게 말해 진지한 구도자의 모습이지만 막말로 하면 정말 대책 없는 갑갑함의 지존이라 하겠다.
 
 
 
관음보살을 몰라본 원효

 
의상대사가 세운 낙산사의 의상대. 사진=문화재청
  어떻든 의상이 깨달았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그가 대체 뭘 깨달았는지는 요령부득이다. 역시 의상의 이야기는 어렵다. 곧바로 이어지는 원효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쉽다. 헐렁헐렁한 것이 정말 원효답다. 그를 민중불교의 창시자로 지목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의상이 낙산에서 관음을 만나고 낙산사를 창건한 후 시간이 꽤 지났다. 원효가 그런 소리를 듣고 그도 예를 올리려고 했다. 해골 물에서는 앞섰던 원효가 이번엔 한걸음 늦은 셈이다.
 
  아무튼 그가 낙산 남쪽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논에서 흰옷 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장난꾸러기답게 원효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 벼 좀 주지 그래.”
 
  단순한 말일 수도 있지만, 원효의 전력이 있기에 문맥상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여자를 꾀는 희롱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아직 벼가 영글지 않아 드릴 수 없네요.”
 
  헛물을 켠 원효가 또 시적시적 낙산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다리 밑에서 어떤 여자가 서답을 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답은 생리대인데, 1회용이 없던 옛날에는 모두 다 천으로 만들어서 썼다.
 
  옛날 여인네들은 빨래를 꼭 냇가에 가서 했고, 아무리 지독한 시어머니라도 빨래터에 가는 며느리를 못 가게 드잡이질하지는 않았던 거다. 바구니 위로 가득 쌓인 빨랫감 밑에 서답을 숨겨서 가져가는 것이 여자들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여인네들의 빨래터는 금남(禁男) 구역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더펄거리는 원효가 그 빨래터를 지나시는 거였다. 모른 척하고 그냥 가야 하는데 어디 천하의 원효가 그럴 수 있나, 그가 대뜸 여인을 희롱했다.
 
  “여보시오, 거 물 좀 한 잔 주시오.”
 
  벼 베던 여인처럼 이 여인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말없이 냇물을 떠서 바치는데, 서답을 빨던 불그스름한 더러운 물을 떠서 주는 것이 아닌가. 원효는 받은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 순간이었다. 근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靑鳥] 한 마리가 소리쳤다.
 
  “그만! 이런 땡중을 보게나.[休醍醐和尙]”
 
  놀라 돌아보니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어떻든 맥 빠진 원효는 어찌어찌해서 낙산사에 도착했고 의상이 조성해 놓은 관음상 앞에 가서 예를 올렸다. 그런데 그 관음상 앞에 조금 전 본 신발 한 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신발 한 짝’의 존재 증명
 
  ‘신발 한 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다 자신의 존재 증명과 관련 있다.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Theseus)가 아버지의 신발 한 짝을 들고 찾아가서 만나는 것도 그렇고, 영웅 이아손(Iason)이 헤라 여신을 업고 강물을 건너다가 신발을, 그것도 꼭 한 짝만, 잃어버려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에 부합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달마대사가 죽어 묻었는데 먼 나라에서 달마가 여전히 살아서 신발 한 짝만 들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의 관을 열어보니 신발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지금 원효가 본 관음상 앞에 놓인 신발 한 짝은 결국 조금 전 소나무 밑에 있던 신발 한 짝과 합해져야 온전한 켤레가 되는 것으로, 관음이 곧 소나무라는 존재 증명의 증표인 것이다.
 
  그렇게 신발 한 짝을 보고서야, 비로소 원효는 자신이 희롱하고 수작했던 여인들과 소나무가 관음의 진신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자신이 외치는 민중불교의 정수, 매일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모든 것을 깨달았지만, 역시 원효는 원효다웠다. 그냥 돌아가지 않고 다시 그 신성한 굴로 들어가 관음을 보려 한다. 하지만 풍랑이 거세게 일어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미 봐 놓고, 만나 놓고, 대체 뭘 더? 군더더기야, 군더더기.’
 
  이런 의미를 알아들은 원효는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났다.
 
 
 
누가 옳은가?

 
  원효의 행동과 깨달음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도 얼핏 이해가 쉽다. 의상은 도통 뭔 소린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묻자. 원효가 훌륭한가, 의상이 훌륭한가? 섹스리스 광덕처럼 살아야 하는가, 욕망덩어리 엄장처럼 살아야 하는가? 여인을 목욕시켜 준 노힐부득이 옳은가, 물리쳐 버린 달달박박이 옳은가?
 
  답을 아시겠는가? 사실 질문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구분하고 따지고 서열을 세우려는 짓거리 자체가 애초부터 글러먹은 거였다.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진리였다.
 
  우리가 ‘원효의 해골 물’을 그리도 좋아했던 것은 우리 시각에 쉽게 포착되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입맛에 짝짝 달라붙기에 원효가 ‘더 나아 보이고’ 그래서 ‘더 옳아 보였던’ 거였다. 자신의 아집(我執) 속에서 판단해 놓고 남들에게 동의해 달라고 멋대로 우기고 강요했던 거다.
 
  고지식한 의상도 탐욕덩어리 광덕도 교활한 달달박박도 모두 다 옳았지만,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폄훼했던 것이다.
 
  해골 물을 마시고 돌아온 원효도 깨달았지만 그걸 마시고 당나라로 갔던 의상도 역시 깨달았던 것이다. 단지 원효의 길과 의상의 길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걸 두고 아둔한 우리가 왈가불가했던 거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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