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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1〉 지도자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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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원, 위화도 회군 때 가족 피신시키며 “최영은 일에 밝지 못한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
⊙ 공자, “예(禮)란 미심쩍고 의심스러운 것[嫌疑]을 결단하며 같은 것과 다른 것[同異]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是非]을 밝히는 것”
⊙ 조조, “청렴한 선비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기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제나라 환공이 어찌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겠는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일’을 기준으로 천하의 인재를 구했던 조조.
  그동안 ‘지인지감(知人之鑑)’에 초점을 맞춰 중국과 우리 역사 속의 인물들을 불러내 리더의 사람 보는 눈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연장선에서 리더가 일을 처리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춰보려 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중용(中庸)》 제31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오직 천하 제일의 빼어난 임금만이 능히 귀 밝고 눈 밝고 사리에 밝고 사람에 밝아[聰明睿知·총명예지] 족히 ‘제대로 된 다스림[臨·임]’이 있게 된다.”
 
  즉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있어야만 빼어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중에 지(知)는 바로 ‘지인지감(知人之鑑)’ 연재를 통해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었다. 이제 예(睿), 즉 사리에 밝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리(事理)에 밝다’는 것은 풀면 일이 되어가는 이치에 밝다는 것이다. 즉 일을 (할 줄) 아는 사람[知事者]이다. 리더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지인(知人) 못지않게 지사(知事)에도 능해야 한다.
 
 
  위화도 회군 당시의 이방원
 
  《태조실록》에는 고려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을 당시 개경과 인근에 머물고 있던 이성계 가족들의 다급한 상황이 실려 있다.
 
  〈애초에 신의왕후(神懿王后-한씨)는 (경기도)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의 전장(田莊)에 있고, 강비(康妃)는 포천의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는데, 전하(殿下-태종 이방원)가 전리정랑(典理正郞-이조정랑)이 되어 서울(-개경)에 있으면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사제(私第)에 들어가지 않고서 곧 말을 달려 포천에 이르니 일을 주간하는 노복(奴僕)들은 이미 다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전하가 왕후(王后)와 강비(康妃)를 모시고 동북면(-함경도)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전하께서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가지고 봉양했다. 경신공주(慶愼公主), 경선공주(慶善公主), 무안군(撫安君-이방번), 소도군(昭悼君-이방석)이 모두 나이가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전하께서 자기가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전하가 또한 말을 이끌기도 했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양식이 모자라서 길가의 민가(民家)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철원관(鐵原關)을 지나다가 관리들이 잡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밤을 이용하여 몰래 가면서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 유숙했다. (강원도)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 가까운 마을의 장정(壯丁) 100여 명을 모아 항오(行伍)를 나누어 변고를 대비(待備)하면서 말했다.
 
  “최영은 일에 밝지 못한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7일 동안을 머물다가 일이 안정된 것을 듣고 돌아왔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려 정벌에 나간 여러 장수의 처자(妻子)를 가두고자 했으나 조금 후에 일이 급박하여 과연 시행하지 못했다.〉
 
  이방원의 말은 적중했다. 만약에 최영이 회군 소식을 보고받고 즉각 한씨와 강씨 등을 붙잡아 인질로 삼았다면 이성계의 회군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반면 그에 앞서 즉각 친어머니와 계모 및 가족을 이끌고 피신시킨 이방원의 이 행동은 일을 아는[知事]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조치다. 그 이방원은 최영을 일에 밝지 못한 사람[不曉事之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이방원의 나이 불과 22세 때였다.
 
 
  ‘문리(文理)’란 ‘글의 이치’가 아니다
 
공자.
  다시 《중용》 제31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직 천하 제일의 빼어난 임금만이 능히 애씀의 이치를 샅샅이 살피고 꿰뚫어 보아[文理密察·문리밀찰] 족히 ‘분별력’이 있게 된다.”
 
  문리(文理)는 흔히 말하듯 글의 이치가 아니다. 어떤 일을 성공시키려고 열렬하게 애쓰는 것을 말한다. 분별 혹은 분별력은 그런 이치를 밀찰(密察)하는 데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대충대충 듬성듬성 보아서는 분별이 생겨날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하게 될 ‘사리분별(事理分別)’에 관한 소개는 대략 마쳤다.
 
  다시 사리(事理)다. 원래 공자가 말했던 예(禮)는 이 사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요즘 예 하면 떠올리는 예의범절은 송나라 때 성리학 혹은 주자학에 의해 예의 범위를 가례(家禮)에 한정 지으면서 생겨난 부정적 결과다. 그 바람에 원래 공자가 말하려 했던 예에서는 너무도 멀어져 버렸다.
 
  공자의 예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서 예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릇 예란 제 몸처럼 여겨야 할 것과 멀리해야 할 것[親疎]을 정하고 미심쩍고 의심스러운 것[嫌疑]을 결단하며 같은 것과 다른 것[同異]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是非]을 밝히는 것이다.”
 
 
  위징과 당 태종의 만남
 
직간(直諫)을 잘했던 위징.
  일은 곧 사람의 일[人事]이다. 그래서 곧바로 예는 “절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되고 남을 침범하여 모독해서도 안 되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막 대해서도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일을 아는 것이 곧 예를 아는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우리는 위징(魏徵)과 당 태종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위징은 수(隋)나라 말에 이밀(李密)의 군대에 참가했으나 곧 당고조(唐高祖)에게 귀순해 고조의 장자이자 태자인 이건성(李建成)의 태자세마(太子洗馬)로서 유력한 측근이 됐다. 이때 이미 태자의 아우 이세민(李世民)의 야심을 간파한 위징은 그를 독살해서 제거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이건성은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오히려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
 
  이세민의 측근들은 태자의 측근 100여 명의 이름을 적은 살생부를 내밀며 모두 죽일 것을 청했는데 여기에 위징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위징은 도망치지 않고 장안에 그대로 남아 자기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새로 권력을 잡은 이세민이 위징을 불렀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이 전하는 그날의 장면이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들을 이간질했는가?”
 
  이 말만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위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일찍이 이 위징의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일을 알았던 위징, 사람 볼 줄 알았던 당 태종
 
당 태종 이세민.
  이 말에 이세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안색을 바꾸고서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첨사주부(詹事主簿)라는 관직을 내렸다.
 
  이 짧은 문답은 오랫동안 중국의 역사가들이 깊은 분석을 해왔다. 특히 위징의 대답이 함축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데 집중해 왔다.
 
  위징은 이세민의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미 태자와 이세민의 싸움은 위징과 같은 신하의 손은 애당초 떠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태자와 이세민 둘 중 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태자에게 이세민을 죽이라고 했을 뿐이라는 대답이 위징의 말 속에 녹아 있다.
 
  더불어 ‘내가 당신을 죽이자고 했는데 태자가 그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자기가 죽게 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사학자 멍셴스(孟憲實)는 자신의 책 《정관(貞觀)의 치(治)》에서 “결국 이 싸움의 본질을 간파한 점에서는 이세민에 비해 위징이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이 점에서는 이세민은 위징보다 뛰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위징의 대답은 당당하면서도 그 방법을 먼저 실행에 옮긴 이세민에 대한 존경 또한 담고 있다. 물론 주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위징의 목숨을 걱정했다. 그러나 이세민 또한 뛰어난 군주였기에 위징의 말 깊은 곳에 있는 뜻을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이로써 흔히 우리가 아는 ‘간언(諫言)의 달인’ 위징이 탄생할 수 있게 됐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세민은 이미 칙서를 통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태자 편에 섰던 사람들이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위징을 품어 안는 태종의 모습을 보면서 숨어들어 갔던 태자 쪽의 인재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천하의 안정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예를 아는 사람이 바로 예(睿)를 갖춘 사람이다. 사실 일을 모르면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사람을 모르면 일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논어(論語)》의 맨 마지막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요왈(堯曰)편’에 실린 공자의 말이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不知禮] 설 수 없고,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예를 알지 못하면 한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설 수 없고 따라서 일을 제대로 성사시킬 수도 없다는 뜻이다.
 
 
  조조의 구현령(求賢令)
 
  “산은 높음을 마다 않고 바다도 깊음을 싫어하지 않는다네.
 
  주공(周公)이 진심으로 뛰어난 선비들을 환대하니 천하 인심이 기울었다 하네.”
 
  한쪽에서는 영웅, 한쪽에서는 간신이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조조(曹操)가 인재를 갈구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다.
 
  208년(건안 13년) 적벽전투에서 패배한 조조는 불타는 전쟁터를 지켜보며 “곽가(郭嘉)가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곽가는 후한 말 천하가 어지러울 때 원소(袁紹)를 처음 만났는데, 여러 면에서 요점이 부족하고 일을 꾸미기는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어서 큰일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마침내 그를 떠나 순욱(旬彧)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귀의하여 섬겼다. 사공군제주(司空軍祭酒)가 되어 조조가 모주(謀主)로 많이 의지했고, 정벌에 나설 때마다 뛰어난 계책을 자주 건의했다. 조조는 그를 두고 “오직 곽가만이 나의 뜻을 잘 안다[唯奉孝爲能知孤意]”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적벽전투 1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패배로 인해 조조는 ‘유재시거(惟才是擧)’, 즉 오직 능력만으로 인재를 뽑아 쓴다는 신념을 더욱 굳혔다. 이렇게 해서 210년 그의 유명한 구현령(求賢令)이 나왔다.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구하는 명령이라는 뜻이다.
 
  “예부터 천명을 받아 창업을 하거나 나라를 중흥시킨 군주들은 모두 현인과 군자를 찾아내어 그들과 더불어 천하를 통치했다.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가 여염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우연하게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찾아내어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천하는 아직 불안하다. 이런 시기에는 더욱 뛰어나고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기를) 춘추시대 노나라 대부 맹공작(孟公綽)은 ‘조(趙)나 위(魏)나라(같은 큰 나라)의 가신은 너끈히 감당하지만 등(滕)이나 설(薛)나라(같은 작은 나라)의 대부는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청렴한 선비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기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제나라 환공이 어찌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천하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옥과 같은 고상함으로 위수(渭水) 물가에서 낚시질을 일삼는 인물이 어찌 없겠는가? 또한 형수와 사통하거나 뇌물을 받았다는 오명을 받았지만 재능이 있으면서도 위무지(魏無知)의 추천을 받지 못한 인물이 어찌 없겠는가? 그대들은 나를 도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잘 살펴 추천하라. 오직 재능만이 기준이다. 나는 능력 있는 인물을 기용할 것이다.”(《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일을 척도로 사람을 보았던 조조
 
  맹공작에 대한 언급은 적재적소의 원칙을 밝힌 것이고 제나라 환공은 청렴하지 못했던 관중(管仲)을 써서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 것을 언급한 것이며 위수 물가에서 낚시를 하던 인물은 주나라 문왕이 찾아낸 강태공(姜太公)이고 형수와 사통한 인물이란 한나라의 진평(陳平)이다. 위무지가 진평을 추천했는데 당시 유방(劉邦)의 측근인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이 진평은 형수와 사통한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유방이 위무지를 불러 꾸짖자 위무지는 “신이 말씀드린 것은 능력이요 폐하께서 물으신 것은 행실입니다. 그의 계책이 국가에 이로운가만을 살필 따름이지 형수와 사통하거나 뇌물을 받은 것을 의심해서 무엇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 짧은 글에서 조조는 공자, 제나라 환공, 주나라 문왕, 한나라 유방의 지혜를 얻고 싶다는 간절함을 표현했던 것이다. 다만 그는 남을 의심을 하는 병폐가 있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중국의 오랜 격언을 깊이 새기지 못해 큰 성공에 이르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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