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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도의 역사 읽기 〈11〉 직접민주주의는 부드럽게 표현된 전체주의(全體主義)

글 : 유광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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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민주주의’는 직업적 좌파운동가들이 주도 … 직접민주주의는 그들과 한 몸이 되어 영구집권하겠다는 속셈
⊙ ‘국민’은 정치체제의 ‘정통성’의 원천 … ‘국민’이 정치적 대중집회에 실재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주장하는 건 국민주권론 왜곡
⊙ ‘주권자 민주주의’ 주장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에 대한 위협

유광호
1958년생. 서울대 역사교육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 연세대 강사, 이승만연구원 연구원 역임. 현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 연구위원, 한국자유회의 실행간사
지난 3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문재인 정권은 ‘촛불혁명정권’을 자처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북한이 9월 30일 6차 핵실험을 했다. 이에 대응하여 소집된 국가안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전략적 실수를 자행했다”고 말했다. 이날의 문 대통령 발언 수위는 이제껏 중 가장 강경한 것이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어처구니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어이없었다. 우리는 보통 어이없으면 실소를 짓게 된다. 김정은이 세습 집권한 후 벌써 네 번째고, 수소탄 실험을 했다는데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이라고 남의 일을 평하듯 하는 표현이나 “대화의 길로 나와야”나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노력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등의 한가한 듯한 소리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을 바라면서 논외로 하자. 그렇더라도 “전략적 실수”라는 얘기는 또 무슨 뜻일까?
 
  전략·전술적 차원을 따지는 경우의 전략적 차원을 가리키는 것일까? 좌익의 혁명전략전술론에서 항상 쓰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럴 때 ‘전략적’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전략적 차원과 전술적 차원을 구분하여 북한의 행위를 분석하고 대응한다는 차원이라면, 즉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을 문 대통령이 언급했던 레드라인으로 본다면 이번 6차 핵실험이 그 레드라인을 넘은, 즉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해당한다는 뜻인가? 그러나 청와대는 정작 아직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고 보도됐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쓰는 ‘전략적’이라는 말의 뜻으로 썼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 경우 영리하지 못하게 목적에 부합하지 않은 행위를 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대화의 길로 나와서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가야 되는 것이 북한의 전략적 이익인데 이번에 ‘실수’를 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어처구니없이”.
 
  김정은이 김정일처럼 노련하지도 못하고 영리하지 못해서 그랬으니 실소나 한 번 날려 주면서 용서하자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문 정부가 바라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한미동맹을 해체하지 않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북한 정권이 살아남을 길은 아닐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실수?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체제’는 미군이 철수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다. 그것을 위해서 북한은 핵게임을 해 왔다. 핵으로 미국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완비한 상태에서 미국과 담판을 지어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후, 한반도에서 남한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도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것이 김정은 정권의 핵전략이 추구하는 목표다.
 
  결국 핵은 북한의 세습정권에게 있어서 남한 적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절대무기’인 것이다. 그 점에서 북한 정권은 소름 끼칠 정도로 목적 합리적이다. 이런 변하지 않는 사실을 문 정부는 정말 모른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다. 일찍이 권부 요직에 근무하면서 북한의 전략에 관한 정보를 접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처구니없는”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어이없다’는 말이다. 즉 ‘일이 너무 엄청나거나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다’는 뜻이다. 이런 말이 냉정한 전략·전술 구분 차원의 분석에서 사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이해해 주려 해도 “어처구니없는”이란 수식 표현에는 분노가 담겨 있지 않은 것 같다.
 
  너무 기가 막혀서 분노할 수도 없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망나니 짓을 나무라는 힐난의 뜻을 담고 있는가? 오히려 그 말은 상대를 어느 정도 포용하는 경우에 쓰는 것이 보통 언어감각이다. 한자어를 쓰지 않고 순우리말을 골라서 엄중한 상황에서 사용하면 그 단어의 원 뜻에 비해 그 뜻이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동반자 같은 관계에 있는 경우 왜 그런 엉터리 짓을 해서 일을 그르치느냐고 책망 내지 실망할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대화와 타협
 
  그렇다면 문 정부와 그 지지세력에게는 북한이 동반자라도 된다는 것인가? 어쩌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합의서가 있다. 그것이 함께 일궈 나가야 할 중간 목표일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들은 유효하고 감격스러운 성과이며 남겨진 과업일 것이다. 그것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자칭 이른바 ‘민주정부’의 정체성(正體性)의 한 면을 표현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것들에 북한 정권의 전략과의 접점이 있다.
 
  그렇다면 문 정부와 그 지지세력을 단순히 유화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은 피상적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비서실의 중책을 맡고 있을 때부터 최근까지 줄곧 국가보안법 폐지, NLL 해체, 북한의 천안함 폭침 사실에 대한 의심, 연방제 주장 등등 북한이 원하는 사항들을 주장해 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면 이 정부는 북한의 일련의 도발적 행위에 대하여 정말 절망하고 있었을까? 북한의 수소탄 실험 다음 날인데도 여당 대표는 국회 대표연설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는 북한의 핵개발을 위한 자금과 시간을 제공했을 뿐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는 사회 내의 갈등상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을 중시한다. 그러나 인간생활에는 타협이 어울리지 않거나 타협을 하지 말아야 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전투 중에는 적과 타협할 수 없다. 북한 전체주의 체제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융합될 수 없는 관계임이 진실이다. 때문에 한국은 자유 우방과 손잡고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고 자유의 바람을 갖은 방식으로 북한 동포들에게 불어넣어 북한 야만정권이 고사하도록 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이 이승만·박정희 대통령과 애국파의 방법이었다.
 
 
  인민공화국 vs. 민주공화국
 
  다른 방법은 ‘남북합작’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입장은 북한이 김일성과 빨치산파의 항일무장투쟁에 기반을 두고 수립된 정당성 있는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보면 북한이 처음부터 ‘사기(詐欺)의 왕국’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북합작을 몽상하는 세력은 해방공간에서의 인민공화국 노선이 옳았다고 보는 것이다. 인공(人共)은 레닌이 공산주의의 통일전선전술로 내세운 ‘인민민주주의’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은 제국주의 미국과 한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반공주의자, 즉 반(反) 전체주의자들을 배제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합작하여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내걸고 ‘직접민주주의’의 상당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란 부드럽게 표현된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민주공화국’에서의 ‘민주’를 자유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주의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민주공화국’이라는 표현은 1948년 헌법 제정 시 ‘인민공화국’ 개념에 반대되는 것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런 사상을 가진 그룹은 그들이 ‘반민족 반민주 독재’세력이라고 규정한 이승만과 박정희의 노선을 따르는 대한민국 애국세력을 제압하여 이른바 ‘민주화’를 이룬 다음 미국을 배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이 변함없이 공작해 오고 있는 ‘남조선혁명’노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과 노무현은 평양에 가서 연방제 추구 등등에 합의를 하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이리라.
 
 
  반(反) 제국주의론 공유
 
  이런 그룹들의 지도자로 옹립된 사람이 북한정권에 대하여 강력한 투쟁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북한 및 좌파의 노선과 대한민국파의 노선 사이에 중간노선이 있을 수 없음은 이제는 증명되었다.
 
  북한과 한국 내 좌파는 적어도 반 제국주의론을 공유한다. 또 반 반공주의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볼 때는 지금까지 ‘남북공조’가 잘되고 있었던 것일 수 있다.
 
  그들은 북한이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했던 것에 대해 내심 박수를 보내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드러날 편향성을 의식해서 손을 봤기 때문에 문 대통령의 연설문들에서 적지 않은 모순들이 노정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참모들이 무식해서 전체 체계가 정연하게 잡히지 않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이들은 확정돼 있던 사드 배치를 중지시키면서 벌였던 옹색한 쇼를 비롯하여 각종 쇼를 해 왔다.
 
  미국과 공조하면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로 몰릴까 두려웠을까? 어째서 미국이 대한민국에게 제국주의인가? 압도적으로 세계 최강인 미국은 한국과 상호방위조약과 연합군 체제를 가진 동맹국으로 많은 자유 국민국가들이 양국 관계를 부러워하는 우리의 역량의 거대한 확장인 것이 진실이다. 이 진실을 거부하고 증오하는 것이 한국의 좌파와 북한이고 중국이다. 그런 중국에 너무 저자세를 취한 것이 문제였다.
 
  문 정부의 이런 여러 의심스러운 전력과 행보 아래에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정치사상적 입장이 또한 놓여 있다.
 
  대통령 탄핵 운동 때 등장했던 국민주권론은 매우 무지하고 왜곡된 것이다. 주권자의 직접민주주의를 들고 나왔는데 광장민주주의를 가리키겠다. 거기에 누가 참여하겠나? 생업에 종사하는 바쁜 국민들이 거기에 몇이나 참여할 수 있겠는가? 지난 촛불시위 때마다 드러난 것 같이 직업적 좌파운동가들과 그 조직원들이 주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직접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은 그들과 한몸이 되어 광장을 점령하면서 영구집권하겠다는 속셈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김대중도 2008년 광우병 거짓 선전선동에 따른 촛불시위를 “직접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부추긴 바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 제1조 2항에 명시된 ‘국민주권론’은 정치적 정통성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상징적 준거(準據) 기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국민’이 ‘집단적 개체’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되곤 한다. 이 틈을 타서 좌파가 국민들을 공략하고 있다.
 
  영어에서 nation(국민)은 추상적이고 불가산명사이기 때문에 그 개개 국민을 가리킬 때는 citizen(국민 개인)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와 같이 국민(nation)은 현실에 존재해서 행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국민주권론이 정치체제의 정통성에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상징적 준거 기준이라는 점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서양 중세 정치사상 연구자인 칸토로위츠(Ernst Kantorowicz)에 의하면, 왕정에서 국왕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왕’(body natural)과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왕’(body politic)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국왕은 인간으로서 그의 신체는 죽음과 함께 소멸된다. 그러나 왕위의 계승과 왕조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육체적으로 죽더라도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왕은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정에서는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국왕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국왕의 정치적 상징성이 합쳐져서 왕정의 이념적 정통성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정치사상 연구자 르포르(Claude Lefort)가 지적하듯이,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물학적·상징적 국왕의 존재가 사라지고 ‘빈자리’(empty place)가 생겨나게 됐다. 이것은 왕정이 끝나면서 주권자의 자리가 공백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왕이 떠나 버린 이 빈자리를 메우게 되는 상징적 존재가 바로 ‘국민’이다. 이 국민을 정통성의 원리로 내세운 것이 근대적 의미에서 ‘국민주권론’이다.
 
 
  국민주권론과 인민주권론
 
프랑스혁명 당시 베르사유궁으로 쳐들어가는 파리 시민들. ‘인민주권’을 내세운 자코뱅의 직접민주주의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야기했다.
  근대 주권론에는 두 가지 계통이 나타났다. 프랑스혁명 당시 시에예스(Sieyes)가 주장한 ‘국민주권론’(national sovereignty)과 로베스피에르 등 자코뱅이 기치로 내세운 ‘인민주권론’(popular sovereignty)이 그것인데 양자는 상극이었다.
 
  시에예스의 ‘국민주권론’에서의 ‘국민’은 프랑스인 모두를 동등하게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자코뱅의 ‘인민주권론’에서의 ‘인민’(people)은 국민 전체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계급의 적을 배제한 집단을 의미했다. 그러면서 자코뱅은 직접민주주의를 시도했다. 그 결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졌던 것이다. ‘국민주권론’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에서, 그리고 ‘인민주권론’은 공산주의 정치질서에서 수용되었다.
 
  다시 돌아가서, 그때 ‘국민’은 국왕과 달리 눈에 보이는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으로서 정치체제의 ‘정통성’의 원천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인들과 운동가들이 국민주권론의 ‘국민’이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국민주권론이 명시된 헌법 제1조 2항을 들먹이는 자들은 ‘국민’이 마치 정치적 대중집회에 모인 실재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한다.
 
  국민주권 사상에서 말하는 추상적 실체인 ‘국민’을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 집단으로 볼 경우 그 국민은 ‘집단적 개체’로 전락하고 그 집단 속의 개인은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에 불과하게 된다. 북한 헌법 제63조에 나오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조항은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적 집단적 개체의식을 정당화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독재와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국가·국민(nation)보다 혈연적인 민족(ethnie; Volk)을 상위에 놓는 한국 사람들의 관념 때문에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에 끌리기 쉬운 성향이 우리에게 있다. 북한과 종북좌파가 이 틈을 보고 ‘우리 민족끼리’ 내지 ‘민족 공조’를 선전선동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제
 
  국왕이 떠나 버린 ‘빈자리’에 누가 국왕을 대신해 주권자의 자리에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그 하나의 방안이 ‘대의제’라고 하는 것이다. ‘대의제’라는 것은 국민 모두가 그 ‘빈자리’에 앉을 수 없기 때문에 대표를 뽑아서 국가를 통치하게 하는 제도다. 우리의 경우 전국구 대표인 대통령과 지역구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대표들로서 국민을 통치한다.
 
  여기서 놓쳐서 안 되는 점은 대의제가 국가의 영토가 너무 크고 인구가 많아서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일반 국민보다는 대표들이 더 전문성이 많아서 국정 운영의 편의를 위해서 대의제가 채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정치체제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왕을 대신하여 ‘국민’을 국가주권의 추상적·상징적 준거 기준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정치적 경쟁을 제도화시키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헌법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선진국들에서는 국민은 주권을 선거와 국민투표에서의 투표를 통해서 행사해야 한다고 명시하는 곳이 많다.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어떤 민주주의 방식도 아직 세계에서 실행되고 있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그런데 ‘촛불의 명령’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는 7월 19일 발표한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우발적인 촛불 군중, 아니 고도로 사전에 계획되고 조직화된 촛불 대중을 놓고 ‘새로운 국민’으로 호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도세력들이 불순, 불만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주권자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위에서 살핀 대로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문 정권은 ‘혁명’을 실제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 혁명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다른 체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정은의 수소탄 실험을 맞이한 지금이라도 문 대통령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으면 한다. 문 대통령은 반 제국주의 남북합작파 부하들과 지지자들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의 챔피언으로 ‘자유의 파도’가 되어 북의 반민주·반민족적 반란집단인 김가 세습왕조 정권을 물리치고 북녘의 2000만 우리 국민들 해방에 나서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역시 올바른 역사인식이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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