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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13〉 상인(商人)의 길을 밝힌 이시다 바이간

글 : 신상목  (주)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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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다 바이간, 포목상 출신으로 45세에 은퇴한 후 학문 연마, 석문심학(石門心學)의
    개조(開祖)가 됨
⊙ “상인이 이익을 취하는 것도 천하로부터 인정된 녹봉”
⊙ “무사가 ‘충(忠)’으로 주군을 섬기듯 상인도 ‘성(誠)’으로 고객을 섬겨야 한다”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상인도를 정리한 심학을 개척한 이시다 바이간.
  17세기 후반 일본은 체제적으로는 무가(武家)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구조적으로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화폐는 주조되어 시장에 풀리는 순간 주조권자의 통제를 벗어났고 부(富)의 분배, 소비, 저축, 투자의 결정에 있어서 정치적 권위는 점점 시장에 주도권을 내주고 있었다. 화폐의 분배와 자본의 축적은 거대한 다층적 이해관계를 형성해 정치적 권위의 자의적(恣意的) 통제의 폭을 좁혔다.
 
  초기 자본주의의 양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이러한 구조 변화의 과정에서 사회적 지분을 늘려간 것은 상인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야 하는 유통 수요가 폭증한 일본에서는 여타 지역, 심지어는 유럽에 비해서도 상인 계층의 부상(浮上)이 두드러졌다.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며 사회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자 일본 사회는 모순에 봉착한다. 상인 계층이 생산과 소비를 매개(媒介)하는 주체로서 사회 기능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에 기반한 재래의 신분 관념에서는 상인들이 여전히 최하급 계층으로 간주되는 일종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에도시대의 상업
 
에도시대 시장의 모습.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상인들의 사회적 역할이 커졌다.
  (천민을 제외하면) 가장 미천한 신분인 상인이 돈을 벌고 잘사는 모습을 대하는 여타 계층의 인식은 곱지 않았다. 상인들 스스로도 사회적 요구가 있으니까 자신들이 존재하고 부를 축적하는 것인데 신분적으로 여전히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다.
 
  재래의 농본주의 (또는 생산자 중심) 관념하에서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상인들의 이윤 추구는 타인이 땀 흘려 생산한 결과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 이익을 편취(騙取)하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상업의 이윤 획득은 비천한 것으로 여겨졌고 무가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수치(羞恥)’로 규범화하였다.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눈앞의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다. 경제 호황으로 수요가 늘어날 때에는 투기와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일삼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정경유착으로 거래를 독점하고 일물일가(一物一價)가 아니라 상대를 보고 가격을 후려치는 것을 당연시했다.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낮아 어차피 명예와는 거리가 먼 처지였다. 오로지 돈만이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었다. 상업의 사회적 중요성은 점점 커지는 데 비해 상업을 바라보는 쪽도 상업에 종사하는 쪽도 상업의 정체성과 바람직한 존재 방식에 대한 가치관은 불모의 상태였다.
 
  상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사회적 좌표 부여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를 배경으로 새로운 사상의 조류가 18세기 초반부터 태동한다. 그 물꼬를 튼 것이 석문심학(石門心學)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1685~1744)이다.
 
 
  ‘상업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
 
이시다 바이간은 자택의 방 하나를 개조해 강담소를 열어 심학을 강의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1685년 교토 인근 가난한 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자식들이 그랬듯이 바이간은 유소년기에 교토의 포목점에 견습생으로 보내져 혹독한 환경 속에서 도제식 상인 수업을 받는다.
 
  10대 후반기에 일하던 포목점의 도산으로 귀향했다가 20대 초반 교토의 ‘구로야나기(黑柳)’라는 포목점에 다시 일자리를 잡아 판매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늦깎이 출발, 별 볼 일 없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근면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42세의 나이에 반토(番頭·대표)에 오른다.
 
  20년 넘게 판매업의 일선을 지키는 동안 바이간은 현장 경험을 통해 상업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품게 된다. 바이간은 성격이 대쪽 같고 학구열이 높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불교, 유교 학습서를 품에 넣고 다니며 항시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오구리료운(小栗了雲)이라는 학식 높은 재야 승려를 만나면서 그의 학식은 일취월장하고 학문도 틀이 잡힌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그는 43세에 현역에서 물러난 후 2년 뒤인 45세의 나이에 자신의 깨달음을 조용히 실천으로 옮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택의 방 하나를 개조하여 조그마한 강담소(講談所)를 개설하고 대중 강연을 시작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 오픈 강좌였다. 처음에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지만, 강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의 강연에는 유불신(儒佛神) 어느 하나에 얽매이지 않은 포용성이 있었고, 자신이 무학(無學)의 아마추어 학자였기에 겪어야만 했던 고초(苦楚)를 바탕으로 청중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설명하는 배려가 있었다. 그의 강연은 무엇보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이었다. 상인들이 직역(職役)에 긍지를 갖고 매진(邁進)할 수 있도록 지적, 도덕적 동기를 부여하는 그의 강연은 곧 소문이 났고 문하생들이 몰려들었다.
 
 
  ‘상인의 도(道)’
 
이시다 바이간이 지은 《도비문답》. 에도시대 ‘상인들의 바이블’이 됐다.
  바이간의 사상은 바이간과 한 유학자의 대담을 기록한 《도비문답(都鄙門答)》이라는 책에 요체가 정리되어 있다. 구(舊)제도권 사상을 상징하는 유학자와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는 바이간 사이에 가시 돋친 설전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처럼 펼쳐지는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학자 : 상인들은 탐욕스럽고 사사로운 욕망〔私慾〕으로 행동한다. 그런 자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고양이에게서 생선을 뺏는 것과 같다. (바이간이 강담소를 개설한 것을 두고) 그들에게 배움을 권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이간 : 상인의 도(道)를 모르는 사람은 사사로운 욕심으로 행동하고 결국은 타인과 자신을 모두 망치게 된다. 그러나 상인의 도를 알게 되면 사욕으로부터 벗어나 인(仁)의 마음을 얻게 되고 상인도(商人道)에 걸맞은 행동을 하여 번성하게 된다. 그것이 배움의 덕(德)이다.
 
  유학자 : 그렇다면 파는 상품에서 이익을 취하지 말고 원가에 팔도록 가르치면 어떤가?
 
  바이간 : 상인의 이윤은 무사의 녹봉과 같은 것이다. 상인이 이익을 취하지 않고 물건을 파는 것은 무사가 녹봉 없이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건을 만드는 직인에게 공임을 지급한다. 그것은 직인에 대한 녹봉이다. 농민들은 공납하고 남은 생산물을 소유한다. 이는 무사가 녹봉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인이 이익을 취하는 것도 천하로부터 인정된 녹봉이다.
 
  유학자 : 상인이 매매를 통해 이윤을 취하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상인들이 남을 속이고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사실 아닌가.
 
  바이간 : 그 말은 맞다. 세상에는 상인인 척하는 도둑이 있다. 생산자에게는 가격을 후려치고 소비자에게는 바가지를 씌우며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무리가 있다. 이것은 도둑질과 매한가지이나,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가르침이 없으니 그것을 수치라 생각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무도(無道)함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배움의 힘(力)이다.
 
  《도비문답》에 담긴 바이간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상인들이 이윤을 취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멸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음을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상인들도 이익 수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상인의 도가 있어야 함을 설파한다. 무사들에게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따라야 할 무사의 도가 있듯이 상인들에게도 스스로의 존중을 위해 따라야 할 상인의 도가 있다는 것이다.
 
 
  ‘후지산처럼 돈이 쌓여도 부끄럽지 않다’
 
이시다 바이간의 강담소. 이후 전국 34개 번에 180개소에 이르는 심학을 강의하는 강담소가 생겼다.
  그가 제시하는 상인도(商人道-일본어로는 ‘아킨도’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상인도는 현대에 와서 바이간의 사상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유행한 말이며 실제 에도시대에 상인도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아니다)를 가장 함축적으로 대변하는 문구가 “真の商人は先も立ち, 我も立つことを思うなり”이다.
 
  진정한 상인은 손님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도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무사가 ‘충(忠)’으로 주군을 섬기듯 상인도 ‘성(誠)’으로 고객을 섬겨야 하며, 자신의 이익을 줄일수록 손님의 이익이 늘어나므로 상인은 스스로 ‘검약’해야 하며 ‘제업즉수행(諸業卽修行)’, 즉 일은 곧 인격 수양이므로 나태를 경계하고 ‘근면’하게 맡은 바 소임에 정진함으로써 ‘신용(信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바이간이 주장하는 상인의 도였다. 그는 상인들에게 이러한 도에 입각하여 정직하게 번 돈은 ‘후지산만큼 돈이 쌓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며 상인들이 긍지를 갖고 생업에 종사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이 우주의 원리로서 ‘이(理)’와 ‘기(氣)’라는 거대 담론에 치중하였다면, 일본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인간의 원리로서 ‘심(心)’과 ‘성(性)’이 생활 철학으로 중시되었다. 심은 인간의 근본으로서 모든 사유, 인식의 출발점이며, 성은 개개에 나타나는 심의 발현이다.
 
  바이간은 상인의 심은 본시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근본이며, 그 근본을 실현하기 위해 평소 성실, 검약, 근면의 생활태도를 견지하여 신용을 쌓음으로써 각자의 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심을 중심에 놓은 그의 사상은 문하생들에 의해 석문심학으로 체계화되고 다듬어져 교토, 오사카, 에도 등지에 그의 사상을 가르치는 강담소가 퍼져나갔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쉬운 화법으로 정리된 그의 사상은 일본 사회에 큰 울림을 전했다.
 
  상인들은 물론 정치 개혁에 관심이 있는 막부나 번의 관료들도 심학 강의를 청취하였다. 바이간의 《도비문답》은 상인들의 바이블처럼 여겨져 에도시대에만 10회에 걸쳐 재판(再版)이 출간되었고 가장 많을 때에는 전국 34개 번에 180개소의 심학 강담소가 설치될 정도로 바이간의 사상은 대중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일본식 장인정신 문화의 토대
 
  꼭 바이간의 영향만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에도시대의 유명 상가(商家)들은 무가(武家)를 본떠 상가의 가훈(家訓)을 지어 종업원과 자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하는 문화가 있었다. 신용을 중시하고, 가업(家業)을 소중히 하며 고객 만족을 위해 정직과 친절을 실천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교훈들이다.
 
  현대 일본 경영학에서는 이를 시대를 앞서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실천적 사례로 보기도 한다. 비단 상인뿐 아니라 공(工)에 종사하는 직인(職人)들 사이에도 기술이 곧 마음이므로 기술 연마에 정진하는 것이 기술자의 본분이라는 ‘기시심야(技是心也)’ 또는 ‘심기일체(心技一體)’ 등 마음(心)을 중시하는 독특한 일본식 장인(匠人)정신 문화가 형성되는 등 성실, 검약, 근면의 삼덕(三德)과 신용 본위의 삶을 강조하는 석문심학은 일본 사회 전반의 인생관, 직업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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