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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3〉

아베의 우경화 견제하는 아키히토 천황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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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후 퀘이커교도인 미국인 가정교사에게서 ‘평화’에 대해 배워
⊙ 천황, 아베 취임 후 한 번도 사적私的 만찬 베풀지 않고, 야스쿠니신사 참배 안 해
⊙ 1991년부터 일본 침략지 찾아다니며 참배
⊙ 작년 신년 인사회에서는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
아키히토(화환에서 제일 앞줄 왼쪽) 천황 부부는 2015년 4월 9일 팔라우 남쪽 페릴류섬의 미군 전사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사진=뉴시스/AP
  아키히토(明仁) 일본 천황은 일본 평화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세 살 때 중일전쟁, 여덟 살 때 태평양전쟁을 경험하고,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던 12세 때부터 방공호 생활을 하다가 전쟁 막바지에 옮겨간 닛코(日光)에서 종전을 맞았다. 패전 이듬해 새해 첫날 13세의 소년 황태자가 ‘가키하지메(書始め: 새해 첫날 그해의 다짐을 적은 붓글씨)’로 적은 문구는 ‘평화국가건설(平和國家建設)’이었다.
 
  1989년 1월 쇼와(昭和) 천황에 이어 일본의 125대 천황에 즉위하면서 발표한 담화에서는 “일본국 헌법을 지키고(守り) 그에 따라 책무를 다할 것”임을 제일성(第一聲)으로 천명한다. 일본어의 守る(마모루)는 ‘준수하다(Obey)’와 ‘보호하다(Protect)’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거세지자 천황의 발언도 수위를 높여간다. 2009년 11월 즉위 20주년을 맞아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형언할 수 없는 고생과 희생의 바탕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안보법제 개편과 맞물려 헌법 개정 논의가 고개를 쳐들던 2013년 12월에는 팔순 생일을 맞아 “전후(戰後)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면서 평화헌법에 대한 강한 신념을 재차 피력했다.
 
  천황은 총리가 바뀌면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황궁에 불러 환영 만찬을 여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 총리만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천황의 아베 푸대접은 아베의 정책 노선에 대한 반대 의사와 사적인 영역에서 아베 총리와 교류하고 싶지 않다는 반감을 피력한 것으로 세간에서는 해석한다.
 
 
  총리와 대립각 세운 천황
 
2013년 8월 15일 도쿄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일본 총리가 아키히토 천황 부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AP
  2015년 정월 각료와의 신년 인사회에서 천황은 아베에게 “올해는 종전 7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만주사변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덕담을 건네었다. 헌법 개정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아베 총리에게 던지는 훈계였다.
 
  아키히토 천황의 경우 성장기에 특이한 경험을 한다. 13~17세까지의 청소년기에 미국인 가정교사로부터 미국식 교육을 받은 것인데,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의 평화주의 신념을 이야기할 때 이 시기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아키히토 천황의 가정교사였던 엘리자베스 바이닝(Elizabeth Vining) 부인은 필라델피아 출신의 아동문학가다. 아이가 없이 남편과 사별한 후 부인은 황태자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는 황실의 요청을 받고 1946년 도일(渡日)한다. 바이닝 부인은 황태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오 가여운 아이(Oh poor little boy)”로 표현한다. 당시 황태자는 황실전범(典範)에 따라 세 살 때부터 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동궁(東宮)에서 별도로 기거하였는데 일주일에 한 번 식사를 할 때가 유일하게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미국인 가정교사와 황태자의 만남은 처음엔 서먹했으나 곧 둘은 사제(師弟) 간을 넘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관 속에서 나고 자라 어린이의 자아 발달을 위한 책을 저술하던 이 미국인에게는 황태자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다양한 세상과 삶’이 있었다.
 
 
  ‘지미’라 불린 황태자
 
  바이닝 부인은 그룹 영어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궁내로 네 명의 또래 외국인 소년들을 불렀다. 황태자는 외국의 소년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테니스를 함께 치고 때로는 그들의 가족을 궁으로 초청해 이국의 삶의 방식을 체험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바이닝 부인은 황태자가 다니던 학습원 고등부 영어 수업에도 출강했는데 수업 첫날 학생 모두에게 영어 닉네임을 지어주면서 황태자를 ‘지미(Jimmy)’라고 불렀다. 부인이 “이 수업시간에는 당신은 ‘황태자’가 아니라 ‘지미’예요”라고 하자, 황태자는 “아니다. 나는 황태자다!(No, I’m prince!)”라고 뾰로통하게 답했다고 한다.
 
  부인이 “수업시간에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 친밀하게 부를 수 있어야 해요. 당신을 황태자로 부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하기가 어렵지 않겠어요?”라고 달랬더니 황태자가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바이닝 부인은 수업시간만큼이라도 황태자가 신분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또래들과 격의 없이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부인은 처음 황태자와 만났을 때 무슨 질문을 해도 주위의 시종들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하고 확인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Think for yourself)’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했다.
 
  일본의 천황은 ‘실수’를 하면 안 되는 존재다.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의지하는 심리상태로 이어진다. 바이닝 부인은 이러한 의타본연(依他本然)의 심리에 빠지게 되는 환경을 안타까워하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체험하도록 했다.
 
  아키히토 천황은 즉위 후 바이닝 부인과의 추억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부인과 가루이자와(輕井澤)의 별장에서 머문 기억을 떠올렸다고 한다. 부인의 요청으로 시종들을 모두 물리치고 홀로 3일 동안 별장에서 부인과 지냈는데 그때 처음으로 스스로 목욕물을 받았다. 천황이 혼자 목욕 준비를 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퀘이커교의 평화주의를 닮은 평화헌법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에게 미친 영향은 미국적 사고방식을 접할 기회가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부인이 퀘이커교도였기 때문이다. 퀘이커교는 평화(Peace), 평등(Equality), 소박(검소)함(Simplicity), 진실(Truth and Integrity)을 주요 신조로 삼는 기독교의 분파다. ‘내면의 빛’과 ‘내면의 소리’를 통해 모두의 안에 내재한 신성(神聖)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고 체험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무엇보다 스스로를 ‘친우(Friends)’로 부르고 어떠한 폭력과 무력에도 반대하는 평화주의에 대한 신념이 매우 강하다.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의 안에 신성(神性)이 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전쟁에 전투병으로 참가하는 것에 반대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장려한다.
 
  바이닝 부인이 의식적으로 퀘이커교의 교리를 황태자에게 전파하려 하지는 않았겠지만 독실한 퀘이커교도로서 그의 신념이 황태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특히 바이닝 부인이 일본에 온 1946년은 일본의 나아갈 방향과 새 헌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때다. 퀘이커교도로서 평화주의의 신념이 강한 바이닝 부인은 전쟁의 금지와 전력(戰力) 보유 포기를 선언한 일본의 평화헌법을 그가 꿈꿔온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진보이자 일본의 자랑으로 여겼다.
 
 
  자연스럽게 변화 실천해 온 아키히토 천황
 
퀘이커교도인 바이닝(오른쪽)은 아키히토(왼쪽)에게 평화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었다.
  바이닝 부인의 평화주의 신념과 평화헌법에 대한 애정이 아키히토 천황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천황이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없지만 성인이 된 아키히토는 여타 황족과 보수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황가 최초로 평민인 미치코(美智子) 황후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의 자녀들은 천황 부부의 의지에 따라 천황 부부와 같이 생활하며 부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2남 1녀 모두 평민과 결혼해 보통의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천황가가 평민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이 새로운 전통이 됐다. 이러한 아키히토 천황의 삶의 궤적에 비추어볼 때 평화헌법에 대한 바이닝 부인의 신념과 애정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바이닝 부인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의 결혼식에 귀빈으로 초대됐다.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부인이 고령으로 요양원에 입원했을 당시 매년 그의 생일날, 주미 일본대사관의 의전차량이 찾아와 카드가 꽂힌 꽃바구니를 전달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한국인은 ‘(일본)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 과거 천황의 책임 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한일 간 역사 화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천황에 대해 잠시 감정을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사실관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재 아키히토 천황이 일본 내에서 누리는 존경과 인기는 과거 인위적으로 조작된 반신적(半神的) 존재로서의 맹목적 숭배와는 맥이 다르다. 히로히토(裕仁) 전 천황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전범(戰犯)으로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제법 있다. 아키히토 천황은 최소한 전쟁의 책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다. 극렬 좌파도 천황제를 비판할지언정 아키히토 개인을 비판하진 않는다.
 
  모두에서 언급한 아키히토 천황의 2013년 팔순 생일 기념 담화(“전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는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의 우파 역사수정주의는 현행 헌법이 점령 시절에 미국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져 일본의 고유한 가치를 담고 있지 못하므로 개정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아키히토 천황의 담화에는 이러한 역사수정주의를 부정하고 아베 총리의 개헌 논의 세몰이에 찬물을 끼얹는 엄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사이판 한국인 위령비 참배
 
  아키히토 천황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각은 어떠한가? 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2005년 6월 아키히토 천황 부부는 전후 최초로 사이판을 방문하여 한국인 위령탑에 참배했다. 당초 예정에 없던 깜짝 방문이라고 언론은 보도했으나 만약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공표하지 않았을 뿐, 천황 자신의 희망에 따라 계획된 참배였다. 당시 참배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 논조는 이러했다.
 
  “전범 재판을 부정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려는 우익 인사들의 망언이 부쩍 늘어난 현실과 맞물려 일왕의 사이판 방문이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다시 자극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M방송)
 
  “침략전쟁에 대한 진솔한 반성 없는 천황의 이번 사이판 방문을 두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국제사회에 오히려 전쟁 피해국인 것처럼 보이려는 속셈도 있지 않나 하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Y뉴스)
 
  아키히토 천황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 비추어볼 때, 사정을 아는 사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논조다. 누구보다 평화국가 일본을 지키려 하는 인물이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담아 한국인 위령비에 참배를 했는데 우리 언론은 ‘군국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전쟁 피해국처럼 보이려는 속셈’이고 ‘주변국의 존경을 받기 위한 왕다운 처신이 아쉽다’고 논평한다. 이 이상한 괴리가 한일간의 심리적 거리다.
 
 
  과거로의 순례여행
 
지난 2008년 4월 21일 일본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일본 황거(皇居)를 방문, 아키히토 천황 부부와 만났다.
  일본의 천황은 모든 세속적 권능에서 배제돼 있고 정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발언과 행동도 삼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다. 누구보다 헌법 수호 의지가 강한 천황이지만, 역사와 평화에 대한 본인의 신념은 법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밝혀왔다. 우파 정치인들의 집요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적이 없다.
 
  아키히토 천황은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완전한 일본의 과오이며, 그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자신의 천황으로서의 사명이라는 신념하에 1989년 즉위 이후 과거로의 ‘순례여행’을 시작했다. 1991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것을 시초로, 1992년에는 중국을 방문했고 2005년에는 사이판, 2006년에는 싱가포르, 태국을 방문했다. 2009년에는 하와이, 2015년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팔라우 방문은 지병과 고령을 이유로 주위가 만류했으나,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주어진 사명을 다하겠다는 천황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방문지에서 천황 부부는 “일본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라는 결의를 나타내기 위해 일본인 병사의 위령비와 함께 반드시 상대국의 위령비도 참배한다.
 
  아키히토 천황을 군국주의의 향수를 자극하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의식이 없는 인물로 그리는 언론은 한국밖에 없다. 심지어 중국 언론도 아키히토 천황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천황을 한국의 친구로 만들어야
 
  아키히토 천황의 한국 방문은 전후(戰後)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천황 자신은 한국을 방문할 의향이 있으며 필요하면 직접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하나, 양국 지도자들은 천황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정략과 이해관계에 따라 천황을 견제하거나 이용하려 할 뿐 한일 간의 역사 화해를 위한 천황의 염원과 역할에 진지한 고민이 없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이야말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 우경화를 견제하고 한일 간 역사 화해의 새 장을 열 수 있는 평화의 전령사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정확하지 못한 사실관계와 감정에 휘말려 우리의 친구를 적으로 만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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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2016-09-10) 찬성 : 69   반대 : 45
신상목은 일본의 힘이 일본놈 고대가리 일왕에서 나오는것을 조금은 아니 반갑기는 하다.
이름없는 (알려지지않은) 일본 중소기업이 노벨 물리학상릉 받는 일개미처럼 일왕밑에 끝없는 노력을 하는 일개미의 노력 을 게대가리 신상목(처음듣는 기자네)은 마음 깊이세기고, 노력 해주기 바라네. 월간조선 기자는 대체로 믿지 못하는 불랑 조센징이란다. 이제 신기자가 제대로 월간조선을 움켜지고 제대로 콘트롤 해주길 바라네!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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