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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허화평 前 대통령 정무수석 (上)

“10·26과 12·12는 블랙홀이었다”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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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5공(共) 정권의 설계자’로 불리는 허화평이 10·26과 12·12를 고백했다. 격동기의 굵직한 현대사를 몇 차례 언급하긴 했으나 이처럼 통째로 ‘까놓은’ 적은 없었다. 《월간조선》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인연에서 시작해 5공 출범 비화까지 흥미진진한 체험담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글의 성격상 그의 일방적 주장이 상당히 포함돼 있음을 밝힌다.

⊙ 박 대통령, ‘파격 인사’로 40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것이 5공의 주춧돌
⊙ 군(軍) 인맥을 따지면, 서종철-노재현-박희동-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끈끈한 인간관계
⊙ 10·26은 김재규·정승화·김계원에 의한 전형적인 ‘궁정(宮廷) 쿠데타’
⊙ 정승화 참모총장은 김재규의 ‘인질’처럼 행동해
⊙ 12·12 병력충돌은 장태완 장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자구책

許和平
⊙ 現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 74세. 육군사관학교(17기) 졸업. 9사단 대대장 및 작전참모,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 준장 예편.
⊙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정무수석, 미국 헤리티지(Heritage) 재단 수석연구원, 14·15대 국회의원 역임.
⊙ 저서: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이념은 날개가 아니다》, 《지도력의 위기》 외 다수.
  내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간 것은 1979년 3월이다. 몇 달 뒤 10·26과 12·12, 이듬해 5·18을 거치며 나는 파란 많은 한국 현대사의 영욕(榮辱)을 모두 경험했다. 이후 대통령 정무수석으로 제5공화국의 기틀을 닦았으나 16년이 지난 뒤 ‘5·18특별법’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한때 권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당대 군인의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나는 부득이 ‘죄인(罪人)’이 되었다. 바로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그 재판을 현대사의 대표적인 ‘정치 재판’이라 생각한다.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8은 ‘내란목적살인’으로 역사는 뒤집혔다.
 
  5공 주역들은 훈장, 연금을 몰수당했고 온갖 수모와 시련을 견뎌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또 반대편에 섰던 정승화(鄭昇和), 장태완(張泰玩) 장군도 떠났다.
 
  나는 생각한다. 비록 ‘정치 재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역사적 평가마저 재판의 결과와 같다고는 믿지 않는다. 적어도 훗날 제대로 된 역사적 기술이 이뤄지리라 확신한다.
 
  1970년대와 80년대 국가를 지키고자 했던 군인세력과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정치세력 간의 일대 충돌이 있었다. 뒤돌아보면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일지 모른다. 이 시점에서 나는 승자와 패자의 개념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당시 역사를 재조명하고 싶다. 이미 단죄를 받은 나는 원한도 미련도 없다. 다만, 역사적 화해의 실마리를 찾고 싶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10·26과 12·12, 그리고 5·18에 대해 말을 아껴왔다. 그러고 보니, 5공 사람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탈권(奪權)을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내가 체험하고 느꼈던 현대사를 모른 척 눈감을 수는 없다. 지금은 말할 때라고 느낀다.
 
  옛말에 ‘당대(當代) 역사는 30년이 지난 후에 서술하라’는 말이 있다. 벌써 햇수로 33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에게 10·26과 12·12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이다.
 
 
  全統과 朴統의 오랜 인연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장군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전 장군은 대장으로 예편, 11대 대통령이 되었다.
  10·26과 12·12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년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마흔여덟 나이에 국군보안사령관이 된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또 전 대통령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질기고 오래된 인연에 주목해야 한다.
 
  박 대통령과 육사 2기 동기인 이규동(李圭東)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을 할 때의 일이다. 육사는 6·25전쟁으로 잠시 문을 닫았다가 1951년 4년제 정규 사관학교로 경남 진해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들어온 생도가 육사 11기다.
 
  전두환 생도는 축구부 부장으로 활약했고, 육해공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꾸려가는 책임자가 이규동 참모장이었다. 이 참모장은 생도들의 운동을 지켜보다가 축구부장인 전두환 생도를 눈여겨봤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이규동의 사위가 됐다.
 
  전두환 생도가 임관한 뒤 장인의 호출을 받고 서울 영등포에 있던 ‘6관구 사령부’를 찾았다. 그때 사령관이 박정희 장군이었다. 이규동 장군이 사위를 박 장군에게 인사시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전두환 중위를 보자 박 장군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 전속부관을 하게.”
 
  뜻밖의 얘기여서 전 중위는 “저는 전속부관 할 체질이 못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 인연이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뒤 육사 생도들이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당시 생도들의 시가행진은 군사혁명에 힘을 실어주는 분수령이 됐다. 젊은 예비장교들의 지지는 무능과 부패에 지친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때 전두환 대위는 후배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
 
  그 인연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민원 비서관이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얼마 뒤 육군고등군사반(OAC) 입교 명령이 떨어졌다. 보통 대위 이상 장교는 전남 광주에 있는 OAC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짐을 꾸린 뒤 박정희 의장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네, 전역(轉役)부터 하게나.”
 
  “네? 각하,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역해서 공화당에 들어가 정치를 하게.”
 
  “네?… 각하, 저는 정치를 모릅니다. 정치를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저와 안 맞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가려고 하는데 자네는 왜 안 가려 하나.”
 
  “정치는 어렵고 육군 대위인데 돈도 없고… 조건도 안 맞고… 여러 형편상 제게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도와줄 테니 해보게.”
 
  박 의장이 자꾸 권유하자, 전 대위는 변명이 궁해졌다.
 
  “그럼, 가족하고 의논해 보겠습니다.”
 
  박 의장이 버럭 화를 냈다.
 
  “자네는 자네 문제를 가족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나?”
 
  혼이 나 쫓겨나다시피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정치 입문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고 한다. 다음 날, 출근했더니 의장 비서실장이 그를 불렀다. 완전히 기가 죽어 의장실에 들어섰다.
 
  “저는 아무래도 군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뜻밖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알았네.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군대생활 잘 하게나.”
 
  이것이 박 대통령과의 두 번째 인연이었다.
 
 
  전두환, 청와대로
 
  민정 이양 직후인 1963년, 소령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육군대학 졸업 직후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다. 박 대통령과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때마침 그 자리에 김재춘(金在春·육사 5기)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김 부장에게 “전 소령을 데려가 일 좀 시키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로 가게 됐으나 중정과의 인연은 1년 남짓이었다.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 뒤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쳐 수경사 30경비대대장 발령이 났다. 30경비대대는 청와대 내곽(內廓)을 경계하는 부대였다. 전임자는 육사 11기 동기였던 손영길 중령. 손 중령은 박 대통령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전속부관을 한 인물이다. 그 후임 자리에 전두환 중령을 앉힌 것이다.
 
  전두환 30대대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81mm 박격포를 청와대 뒤쪽 북악산을 향해 배치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포신이 청와대를 향한다는 점이었다. 전 중령 생각은 이러했다.
 
  만약 북악산 일대에 간첩이 나타나면 먼저 박격포로 조명탄을 쏘아 주위를 대낮처럼 밝혀야 작전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통 보병대대는 3개 소총중대와 1개 화기중대로 편성하는데, 당시 30경비대대는 박격포를 창고에 처박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전두환 대대장은 수경사령관이었던 최우근(崔宇根·육사 3기) 장군을 찾아가 박격포를 설치하겠다고 보고했다. 최 사령관은 신중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에게 큰 결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 대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종규(朴鐘圭) 청와대 경호실장을 찾아갔다.
 
  “박 대통령이 포병 출신이시니 이해하실 겁니다. 81mm포를 배치해 비상시 조명탄을 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박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부터 전 대대장은 매일 30경비대대에 비상을 걸어 박격포 발사훈련을 시켰다. 부대원들로서는 죽을 노릇이었다고 한다.
 
  “상황이 발생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조명탄부터 쏴라.”
 
  이것이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도 지켜야 할 전두환 대대장의 수칙이었다.
 
  얼마 뒤, 그러니까 1968년 1월 김신조가 무장공비를 이끌고 침투했다. 당시 전군에 비상이 걸렸고 일주일 동안 수도권 일대를 수색했지만 공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군 당국은 무장공비들이 퇴각한 것으로 판단, 비상을 해제했다. 수경사령관도 예정했던 해외 출장을 떠났다.
 
  1월 21일 전두환 대대장도 모처럼 일찍 귀가했지만, 이내 매일 영내(營內) 대기하며 고생한 부대원들이 생각나 술과 안주를 챙겨 다시 부대로 갔다고 한다. 대대장실로 부하들을 불러 술잔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자하문(紫霞門) 초소 부근에서 벌어진 종로 경찰서장인 최규식 경무관과 김신조 공비 간의 총격전이었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81mm포 사수들이 훈련받은 대로 조명탄부터 쏘았다. 북악산 하늘이 훤하게 밝아졌다. 그 조명탄 중 불량탄 하나가 김신조 앞에 떨어졌다. 포탄을 본 공비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날 30경비대대는 현장에서 5명을 사살했고 31일까지 군경합동 수색을 펴 28명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생포했다.
 
  만약 박격포를 쏘지 않았다면, 불량탄이 김신조 앞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무장공비들에 의해 청와대가 쉽게 뚫렸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사건 직후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직접 전 대대장에게 감사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전화는 없었다고 한다.
 
  ‘1·21 사태’가 잊힐 무렵 박 대통령이 30경비대대를 깜짝 방문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녘, 전 대대장과 부대원들이 웃통을 벗고 연병장을 뛰고 있는 모습을 본 박 대통령은 “자네들 목욕시설 한번 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둘러본 뒤 “형편없구먼”이라면서 “목욕시설과 경비대대 건물을 내가 손봐줄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1975년 10월 14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 환영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하는 박정희 대통령. 뒤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건설부장관이 보인다. 숙명적인 적대관계를 유지했던 이들 두 사람이 함께 찍힌 드문 사진이다. 대통령 왼쪽에 박상범 경호관이 보이고 안경 낀 김재규 뒤로는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경호관이 보인다.
 
  월남을 거쳐 다시 청와대로
 
  전두환은 이후 서종철(徐鐘喆·육사 1기) 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으로 근무하다 1970년 주(駐)월남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때 박 대통령이 전두환 대령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다. 전 대령이 내게 그 편지를 보여준 일이 있다. 세로로 쓴 편지에는 전 대령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은 그를 스스럼없이 아꼈다.
 
  월남에서 돌아온 전 대령은 1971년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됐고 그곳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러고 얼마 뒤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령을 받았다. 차지철(車智澈)이 경호실장을 할 무렵이었다. 작전차장보는 경호실장 밑에서 경호임무 작전을 지휘하는 실질적 책임자로 대통령과 가족을 보호하는 자리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 가족과 남다른 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1978년 전두환 소장은 1사단장으로 갔다. 당시 나는 9사단 작전참모를 할 때였는데, 전방에서 북한 땅굴이 발견돼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돼 있었다. 사단마다 땅굴 찾기에 혈안이었고 9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임 1사단장은 땅굴을 찾지 못했지만, 전두환 소장이 부임하자마자 땅굴이 발견됐다.
 
  사실 ‘땅굴’은 박정희 정권에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한미관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자주국방, 핵개발, 인권문제를 두고 박정희 정권은 수세(守勢) 위치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땅굴이 발견된 것이다. 박 대통령으로선 전두환 사단장이 미덥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대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취임

 
전두환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질기고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984년 6월 2일 전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국립묘지를 찾아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1978년 12월 총선에서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득표율은 야당인 신민당에 못 미쳤다. 그러자 반(反)유신 세력이 서서히 공세를 높였고 경제적으로도 오일쇼크 이후 외채 부담이 가중됐다. 유가폭등에다 부가세 도입으로 중소상인들의 불만이 커져 갔다.
 
  이 와중에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金載圭·육사 2기) 중앙정보부장, 진종채(陳鍾埰·육사 8기) 보안사령관 등 권력기관은 심각한 갈등상태에 놓여 있었다. 진종채 장군이 이끄는 보안사는 완전히 김재규의 중정에 눌려 제 기능을 발휘 못 하고 있었고, 차지철은 박 대통령을 끼고 김재규와 다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종채 장군이 2군사령관으로 나가면서,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전두환 소장이 후임 보안사령관이 된 것이다. 통상 사단장과 군단장을 마친 고참들이 가는 자리에 새파란 40대 소장이 들어온 것이다.
 
  이 인사에는 당시 노재현(盧載鉉·육사 3기) 국방장관의 노력이 보태졌다고 한다. 노재현 장관과 전두환 장군은 이미 이런저런 인연이 두터운 사이다. 그러니까 1969년 서종철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을 할 무렵 전두환 대령은 총장실 수석부관이었다. 참모차장이 바로 노 장관. 총장실과 차장실이 붙어 있어 매일 만나는 사이였다. 당시 군 인맥으로 따지자면, 서종철-노재현-박희동(朴熙東·육사 3기)-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끈끈하게 이어졌다고 할까.
 
  여기서 잠깐. 박정희 대통령의 군 인사 스타일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혁명 후 정치인의 군 인사개입을 철저히 차단했고 심지어 미국의 입김도 막았다. 군 통수권자(대통령)의 고유 인사권한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총장이나 주요 지휘관, 보안사령관 자리는 누가 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건의하면, 될 인사도 안 됐다.
 
  그러나 노재현 장관이 ‘전례를 깨고’ 보안사령관 자리에 전두환 장군을 천거했고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0·26 반년쯤 앞두고 보안사 근무 시작
 
  노재현 장관은 나아가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박희동 3군사령관을 천거했다. 노 장관과 박 사령관은 포병과 보병으로 병과는 다르지만 같은 육사 3기에다 소위 ‘절친’이었다.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과 박 대통령은 포병 출신이다.
 
  노 장관은 박 대통령에게 “육사 2기인 이세호(李世鎬) 총장 후임에 육사 3기가 가는 게 맞다”고 설득했다. 내심 박희동 사령관을 민 것이다.
 
  그러자 김재규 중정부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김 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각하. 육사 2기 후임에 3기가 가는 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미 3기 출신인 노재현 장관이 참모총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세대교체가 필요합니다.”
 
  김재규는 내심 정승화를 밀고 있었지만 그를 꼭 집어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총장 자리가 육사 5기로 넘어갔다. 4기는 1948년 여수·순천 반란 사건 후 숙군의 영향으로 힘을 못 쓰는 상황이었다.
 
  육사 5기인 정승화 장군은 당시 1군사령관이었다. 경북 금릉(김천) 출신의 정승화는 육사 교장 시절, 생도였던 박지만(朴志晩)을 통해 청와대와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 대통령 고향(구미)과 가까웠고, 능력 면에서도 ‘작전통’으로 인정받던 사람이었다. 어쨌든 정승화 장군이 총장이 된 배경에는 김재규 부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9년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 된 뒤 나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나는 육군 중위 때, 그러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소령이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그분은 나를 좋아했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우리는 군대를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직접 그분 밑에서 복무한 적은 없었다. 육사 14기 이종구(李鍾九), 16기 장세동(張世東), 내 동기인 17기 안현태(安賢泰)·김진영(金振永) 장군은 전두환 장군 밑에서 근무한 일이 있으나 나는 그런 인연이 없었다.
 
  이희성(李熺性·육사 8기) 장군이 1군단장으로 있을 때 나는 9사단 작전참모였다. 그러다 이 장군이 ‘특명검열단장’으로 가면서 “향후 참모장이나 연대장으로 나가기 전에 같이 근무를 하자”고 해 특검단으로 갔다. 수도권 방위에 대한 전력태세를 연구하는 일이 내 업무과제였다.
 
  어느 날 전두환 사령관이 내게 “같이 일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1979년 3월로 기억한다. 나는 그 자리가 중요한 자리고, 과거 보안사 근무 경험도 있어서 동의했다. 거기서 내 운명과 한국현대사의 운명을 뒤바꾼 10·26과 12·12를 맞았다.
 
 
 
정승화, 김재규의 ‘인질’처럼?

 
김계원(왼쪽)과 김재규(오른쪽). 두 사람은 평소 형제처럼 친했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중태에 빠진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살린 적도 있다. 그는 김재규에 대해서 “의협심과 추진력이 있으나 수습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사진은 10·26사건 현장검증 모습.
  10·26 당시 보안사 합동수사본부가 파악한, 그리고 내가 온 몸으로 진실이라 믿는 상황은 이렇다.
 
  10·26은 전형적인 궁정(宮廷) 쿠데타다. 권력 핵심부에서 소수 사람이 담합해 절대 권력자를 무너뜨리려 한 사건이다.
 
  그런 음모는 소수가 참여할수록 좋다. 청와대 1인자인 비서실장(김계원)과 정보최고책임자(김재규), 육군 최고지휘자(정승화)를 포함한 3인방이 배짱만 같고, 뜻만 같으면 쿠데타가 가능하다.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세 사람은 특별한 인간관계를 쌓았고 고향도 비슷했다. 모두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란 공통점도 있었다.
 
  역사는 김재규만 처벌했지만 정승화와 김계원에 대한 나의 의심은 3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 승패의 개념을 떠나 실체적 진실을 찾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먼저 정승화 당시 육참총장에 대한 의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갈 수 없는 공범 혐의자다. 김재규는 주범이었고, 또한 정승화의 배후인물이었다.
 
  정승화 총장은 그날 궁정동의 정보부장 집무실 내 식당에서 김정섭 중정 차장보와 식사를 하다가 총성을 들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총성이었다. 모두 40여 발이 울렸다. 곧이어 정승화는 맨발의 김재규와 함께 김재규의 경호원이 모는 승용차를 타고 육군본부 벙커로 향했다.
 
  당시 정승화는 육군 최고 지휘관으로 대통령 유고(有故) 시 계엄사령관이자 군최고책임자였다. 그런 그가 시해현장 확인도 없이 이탈했고, 자신의 차량을 버리고 김재규 차를 타고, 김재규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했다. 김재규가 체포될 때까지. 자기 행적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정승화는 김재규의 ‘인질’처럼 육본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도 정승화는 나중 이렇게 말했다.
 
  “자하문 외곽 지역에서 5발 정도의 단연발 총소리를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만찬장소가 궁정동 안가가 아니라 청와대 본관인 줄 알았다.”
 
  당시 청와대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채 50m도 안 되는 안가에서 40여 발의 총성이 울렸고, 박 대통령과의 만찬 도중 김재규가 잠시 다녀갔는데도 안가가 아니라 본관에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묻고 싶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 옆에서 식사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시해 후 피가 낭자한 와이셔츠, 넥타이마저 풀어헤친 상태에서 헐레벌떡 찾아온 김재규를 따라간 행동이 과연 옳은가?
 
  최소한 “웬 피냐?”고, “현장에 가보자”고 말했어야 옳다. 일절 그런 행동 없이 현장을 벗어나 육본으로 향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차 안에서, 김재규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후 가위표를 하자 그제야 유고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육본에 도착해서도 이재전(李在田·육사 8기)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해 “이상이 없나?”고 물은 뒤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전성각(全成珏·육사 8기) 수도경비사령관이 육본 벙커에 도착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부대는 이상이 없나?”
 
  그런 뒤 수경사 병력으로 청와대를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비상상황에서도 수경사는 대통령 경호실이 통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차지철이 없다면 김계원 비서실장이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통해 수경사령관에게 지시해야 옳다. 이것은 정승화의 월권이다.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경호실이 총출동해 범인을 잡고, 대통령 시신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도 “너희, 꼼짝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셈이다.
 
 
  정승화의 월권
 
  10·26 당일 김재규와 정승화는 육본에 도착해 군 수뇌부를 불러 계엄선포와 병력동원을 준비했다. 이 역시 결정적 월권이다. 정상적이라면 육군참모총장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장관이 군 수뇌부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총장이 불렀다. 그리고 노 장관도 육본으로 오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그러면서 20사단을 육사에 배치하고, 9공수여단을 육본으로 오도록 지시를 했다. 수경사를 향해 “내 말 듣고 출동 준비하라”고 명령한 것도 정승화다. 또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부엉이 둘(2)을 발령하고, 제20, 30, 33사단은 출동준비를 시켜두라”고 명령했다. ‘부엉이 둘’은 정규전에 대비한 2급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조치다. 다시 말해 김재규가 필요한 부대 출동 준비를 지시한 것이다.
 
  정승화는 또 김재규에게 “병력이 출동하면 어디를 경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곁에 있던 김정섭 정보부 2차장보가 “방송국, 발전소 등에 부대를 배치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 말을 재판 과정에서 부인했다. 합수부 수사에서는 얘기했지만 ‘5·18 특별법’으로 재판을 할 때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진술이 있었고, 김정섭 차장보의 진술도 일치한다. 정승화 본인이 번복한다고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김재규를 정중하게 잘 모셔라”
 
1979년 12월 12일 밤 박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 중인 합동수사본부 측이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 전방의 군 부대가 서울로 출동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사실은 당시 국무위원들이 알 수 없었다. “다쳤는지, 병이 났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김재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신현확(申鉉碻) 당시 부총리와 김성진(金聖鎭) 문공부장관이 따로 김계원 비서실장을 불러 추궁한 뒤에야 “각하께서 운명하셨다”는 답을 들었다.
 
  김계원이 노재현 장관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 말하자, 노 장관은 정승화와 전두환을 급히 불렀다. 노 장관은 전두환 사령관에게 “정 총장의 도움을 받아서 김재규를 연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정승화가 전두환 사령관에게 뭐라고 지시했느냐가 중요하다. 정승화는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로 데려가 정중하게 잘 모셔라.”
 
  나중 정승화는 “내가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고, 그런 말(잘 모셔라)을 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내가 증인이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이 비서실장인 내게 “김재규를 정동 안가에 잘 모셔라”고 지시했다. “잘 모셔라”는 정승화의 지시를 전두환 사령관이 그대로 내게 말한 것이었다. 그 안가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관리하는 곳으로 사령관이 민간인을 주로 접견하는 장소다. 그래서 내가 에스코트해 김재규를 안가로 데려갔다.
 
  수사관이 김재규를 데리고 안가 2층으로 올라갔다. 언뜻 보니 김재규의 얼굴이 붉었고 쳐다보는 것이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잠시 후 신동기 수사관이 2층에서 내려와 하는 말이 이랬다.
 
  “비서실장님. 김재규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왜?”
 
  “말하는 것을 보니 횡설수설합니다.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뀐다는 겁니다.”
 
  김재규의 정신상태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재규 언동을 통해 그가 범인일 것이란 심증을 갖게 됐고 나는 곧바로 전두환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재규는 모셔야 될 분이 아니라, 서빙고 분실로 이동해야 될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전두환 사령관이 “바로 옮겨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서빙고 분실로 김재규를 데려간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감춰졌던 정승화와 김재규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승화는 반성은커녕 자기 사람인 장태완 장군을 수경사령관에 임명했다. 전례가 없는 비상 인사였다. 수경사령관 인사는 법적으로 경호실장의 건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 대행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다. 장태완 장군은 대전에 있는 육군본부 교육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끝낼 시점이었다. 나중 장태완은 자기 책에 “나 같은 촌놈을 출세시켜 준 정승화 총장에게 충성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수경사령관 자리는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자리지 총장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東警사령관 좌천설의 진상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1980년 1월 19일 조사를 받기 위해 호송을 받으며 걸어나오고 있다.
  12·12 사태와 관련, 정승화 쪽은 “정승화가 전두환 사령관을 강원도 ‘동해 경비사령관’으로 좌천(左遷)시키려는 것을 눈치채고, 선수를 쳐 정승화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 모든 정보를 다루는 보안사조차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비상계엄하 보안사 합수부는 정승화를 24시간 감시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언행을 꿰뚫고 있었다. 그 사실은 세월이 흘러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정에서 알게 됐다.
 
  우리 쪽 변호인이 노재현 장관에게 “전두환 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 한 사실을 알았는지”를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언젠가 골프장에서 정승화가 내게 전두환의 보직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수사 중인데…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나 ‘전두환 장군은 박 대통령의 골수 추종자이기 때문에 정승화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때 보안사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문제가 복잡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선수를 쳐, (자신을) 잡아간 것이라고 거짓 이야기를 만들었다.
 
  1979년 11월 24일 계엄선포 후 첫 ‘민관(民官) 계엄확대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는 이런 말을 했다. 김재규의 시해 결행의도와 매우 유사한 발언이었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은 애석하나 국가와 국민 전체의 불행은 아닙니다. 박 대통령 체제는 잘못됐으므로 시정돼야 합니다.”
 
  그 말에 군 장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엔 진종채 2군사령관과 백석주(白石柱·육사 8기) 육사교장, 황영시(黃永時·육사 10기) 장군이 있었다. 이분들이 “박 대통령이 서거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지금 그런 말을 할 때인가. 박정희 체제가 잘못됐다면 군 지휘관도 책임지고 물러나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민관 계엄확대회의’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정승화는 이후 언론 간부들과의 모임에서 ‘3K(金大中·金泳三·金鍾泌) 불가론’을 강력하게 주장한 일도 있었다. 계엄사령관은 국가방위에 책임만 지면 되는 자리다. 그런데도 중대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이다.
 
 
  김계원의 거짓말
 
  김계원 비서실장이 《월간조선》 2006년 2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쿠데타를 할 군 병력을 차지철이 보유하고 있었다. 전두환 장군은 차지철의 심복이었고, 차지철이 하나회다 뭐다 뒷돈을 대주었다. 김재규는 쿠데타를 할 능력이 없었다.”
 
  새빨간 거짓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전두환과 차지철의 관계를 들여다보자. 1960년대 전두환 소령과 차지철 대위가 함께 미국 특수전 훈련부대에 위탁교육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육사 13기 유관식 대위도 동행했다. 당시 전두환 소령이 한국 장교 가운데 선임이었다고 한다. 그전까지 차지철의 존재를 전두환 소령은 몰랐다.
 
  어느 날, 늪지를 횡단하는 훈련을 했다. 개인 장비와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公用火器)를 들고 밤새 행군하는데,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무거운 공용화기는 대원들이 몇 분 간격으로 교대해 짊어졌다. 차지철 대위가 공용화기를 짊어질 차례가 됐다. 키가 작은 그가 기관총을 들고 늪지를 헤쳐 걷는데, 미군 누구도 교대를 해주지 않았다. 가다가 늪에 빠져 물을 먹고 낑낑대다가 거의 도착지점에 이르러서야 미군 장교가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화가 난 차지철이 그 미군을 흠씬 두들겨 결국 징계위에 회부됐다.
 
  전두환 소령이 한국군 선임 장교로 징계위에 불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군 사병이 한국군 장교를 감독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키 작은 사람에게 무거운 공용화기를 짊어지게 하고 교대도 안 해줬다. 한국에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불상사가 생겼다.”
 
  퇴교하면 바로 본국에 송환돼 군복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전두환 소령의 설득으로 벌점을 받는 선에서 송환을 면하게 됐다. 나중 차지철 대위가 전두환 소령에게 “형님으로 모시겠다. 사실은 육사 12기 시험에서 떨어져 보병학교로 가 임관했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이후 차지철은 전두환에게 팍 고개를 숙였다. 1976년 전두환 준장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가게 됐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있었다. 박 대통령 신임을 받고 있던 전두환 장군이 경호실장 자리를 차지할까 봐 차지철은 안절부절 못하며 움츠려 있었다고 한다.
 
  또 차지철이 쿠데타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이다. 수경사는 경호실장 관할이었지만 당시 수경사령관은 육사 8기 전성각 장군이다. 그는 차지철 사람이 아니라, 박 대통령 사람이다. 차지철은 매주 토요일마다 경복궁 내 30경비단에 육군참모총장과 장성들을 불러 사열을 받도록 했다. 게다가 3성의 이재전 장군을 경호실 차장 자리에 앉혀놓고 군을 장악한 듯 과시했지만 누구도 차지철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군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반면 김재규는 당시 군내 추종세력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이가 정승화 총장이고 이건영(李建榮·육사 7기) 3군사령관이다. 김재규가 정승화를 총장 자리에 앉혔고 이건영은 1977년 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데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중요 부대를 정승화를 통해 장악하려 했다.
 
  그날 10·26 사건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사람은 다 죽게 돼 있었다. 청와대 경호원이 죽어야 김재규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얘기다. 궁정동 안가 현장, 김재규 옆 자리에 김계원이 있었다. 김재규가 총을 들었을 때, 총을 붙잡거나 저지했어야 했다. 그리고 안가 밖에는 누가 있었나? 바로 김재규 경호원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청와대 경호원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김계원은 살았다. 왜 살았을까. 박정희 사람이 아니었기에 살았다. 시해 후 김계원은 대통령 시신을 수도통합병원 분원에 안치한 뒤 김재규 경호원을 이용, 누구도 접근 못 하게 만들었다.
 
 
  ‘살기 위해’ 병력을…
 
  12·12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이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라고 정의했다. 정치적 공세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하극상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것을 말한다. 소장이 대장을 잡아가 하극상이란 얘기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정상 임무를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줬으나 본부장이 그것을 거역하고 정승화를 잡아갔으면 하극상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계급, 직책에 상관없이 연행한 케이스다.
 
  쿠데타는 사전 계획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기다렸다. 다시 말해, 권력 탈취는 없었다. 탈취의 어떤 시도도 없었고, 최 대통령이 건재하고 있었다. 계획적으로 병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장태완 장군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자 우리는 ‘살기 위해’, 임무수행 차원에서 동원한 것이다.
 
  좀 더 들여다보기 위해 1979년 12월 12일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12·12 사전 계획설’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鄭柄宙·육사 9기) 특전사령관, 김진기(金晋基) 헌병감을 연희동 한정식집으로 불러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전 본부장은 한정식집에 보안사 참모장을 대신 보내고, 자신은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러 총리 공관에 갔다. 정승화 연행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장태완 측은 이 회식 자리에 자신과 정병주·김진기 장군을 불러내 대응할 수 있는 발을 묶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합수부 허삼수(許三守·육사 17기)·우경윤 대령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했다는 것이다.
 
  회식 자리 때문에 대응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장태완의 말대로 그 사람들을 빼돌릴 생각을 했다면 연희동 한정식집이 아니라, 서울 외곽이나 강남 깊숙한 요정에서 회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정식집은 시내 가까운 곳에 있었고 당시 장군들 역시 다들 바빠서 멀리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또 지휘관은 통신장비를 갖춘 지휘차량이 있고, 수행원도 있다. 군대를 무력화시키려는 계획이었다면 무전기나 통신장비부터 빼앗았을 것이다. 지휘차량과 부관, 운전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면 사전 모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정승화 연행의 불법성 시비
 
(왼쪽부터)윤성민, 노재현, 이건영, 정승화, 장태완씨 등이 1996년 6월 27일 오전 서울지법에서 열린 12·12와 5·18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출두하고 있다.
  그 자리는 헌병단 조홍(趙洪·육사 13기) 대령의 준장 진급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조 대령의 부탁으로 전두환 사령관이 참석하기로 한 것이고 12·12 이전에 약속이 돼 있었다. 정병주, 장태완 장군과 원래 친하고 전두환 장군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니까 자연히 범위를 그 정도로 해서 자리를 같이한 것이다.
 
  왜 하필 그 시각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했느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시 합수부 입장에서는 해를 넘겨 정승화 수사를 끌 수 없었다. 1980년이 되면 정치일정상 개헌과 대선을 치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해사건을 서둘러 매듭지어야 했다. 또 계엄사에서 합수부 측에 빨리 조사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수사계획상 12월을 절대 넘겨선 안 된다는 원칙에서 결정한 날이 12월 12일이었다.
 
  정승화 연행 시각이 왜 하필 그날 저녁이었느냐고 할 수도 있다. 당시 육군 최고책임자를 연행하기 위해선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과시간이 지나 공관을 찾아간 것이다.
 
  정승화 연행에 대한 전두환 사령관의 대통령 보고 시점을 그날로 정한 것은 보고상 하나의 요령이었다. 대통령 일과시간이 지난 뒤 사무실이 아닌 공관을 찾아 보고하면 순조롭게 처리될 것으로 생각했다.
 
  일각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를 연행한 것이 불법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사기관장은 대통령의 허가가 없어도 자체 판단에 의해 상대를 연행 수사할 수 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수사를 하고 말 사항이 아니었다. 거듭 말하지만, 정승화 연행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불법이 아니기에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 부분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 “고문 사실, 부인하지 않겠다”
 
  《박정희의 마지막 하루》와 《제5공화국》을 쓴 조갑제(趙甲濟) 기자는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을 인터뷰하면서 12·12 사건을 파헤쳤다. 그리고 정 장군이 녹음테이프에 구술해 둔 회고록을 정리해 《12·12 정승화는 말한다》는 책까지 냈다.
 
  그와 인터뷰하며 조 기자가 가장 분노했던 것은 12·12 당일 밤 보안사에 끌려간 현직 계엄사령관이 수사관들로부터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선비같이 강직한 정 장군은 “내가 6·25 때 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런 치욕을 당하는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문 과정을 직접 보진 않았지만 부인은 안 하겠다. 그런 사건은 고분고분하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수사관들이 조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 고통을 가해야 했을지 모른다.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관행이었고 정치 후진국의 악습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수사를 책임졌던 중요한 사람들이 그것(고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가볍게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받은 단죄는…
 
1967년 8월 15일 1군 사령관실에서 사령관이던 서종철 대장(왼쪽)과 악수를 하는 허화평 대위.
  문제가 된 것은 군사반란을 이유로 병력을 동원한 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군 통수권자의 허가 없이 임의로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12·12와 관련해 우리가 받은 단죄다.
 
  이미 12·12 이전에 정승화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최 대통령은 기다려보자는 입장만 노재현 국방장관을 통해 밝혔다. 수사를 지시할 낌새가 전혀 없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으로선 무한정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 마무리를 위해선 정승화에 대한 문제해결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 보안사 합수부 사람들은 점점 “왜 대통령의 지시가 없을까”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빨리 잡아야 하는데… 정승화의 언동이 좋지도 않고… 혹시 이분들이 겁을 먹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으로 이미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고, 자신을 단단히 보호하려 했다. 전두환 본부장은 수사 책임자로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연행 결심을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승화 연행을 사후 보고만 했어도 장태완의 수경사와 합수부 간 병력충돌은 없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랬다면 최 대통령이 섭섭하게 생각할 수는 있다. ‘그 중요한 것을 왜 나한테 말하지도 않고 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법적으론 보고를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12월 12일 그날 오후 6시 반쯤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7시쯤 정승화를 연행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최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배석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정승화를 연행하지 말라는 지시는 없었다. 그게 중요하다. 이미 그 이전에 정승화에 대한 처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이 과정에서 합수부 수사관들로부터 정승화를 연행했다는 보고가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들어갔다. 곧이어 전두환 본부장이 이 사실을 최 대통령에게 구두로 보고했다. 대통령은 “연행하지 말라. (정승화를) 원상 복귀시켜라”는 말씀이 없었다. 최 대통령은 “국방장관이 와야 한다”는 말만 거듭했다. 그래서 보안사가 총동원돼 노재현 장관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노재현 장관은 그날 밤 10시가 지나 전두환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간단히 보고했고, 나중 최 대통령하고도 통화했다. 13일 새벽 3~4시쯤 노 장관이 대통령이 머무르던 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공관에 가려면, 보안사령부 합수본부를 지나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삼청동으로 가기 위해선 여러 검문소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노 장관은 합수부에 들러 전두환 본부장을 만난 뒤 최 대통령에게 갔다. 한쪽에서는 ‘너희가 합수부에서 노 장관 강제로 연행해 겁줘서 대통령에게 데려갔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너희 함부로 움직이면 복잡해진다”
 
육사 17기 허화평 생도.
  12·12는 엄격히 말해 장태완 장군의 병력동원 사건이자 반란 사건이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그에게 병력동원을 지시한 적이 없다. 정승화 총장에 대한 충성심에 자기 독단으로 공격명령을 내렸고 온 사방으로 병력동원을 요청했다. 그와 친한 26사단 배정도 장군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특전사 일부 병력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수경사 예하 부대에 합수부와 30경비단에 대한 공격 명령을 시달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장태완 장군이 경기도 김포에 있는 포병부대에는 포격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것도 합수부와 30경비단에 포를 쏘라는 것이었다. 포는 원래 정밀 타격이 어렵다. 만약 명령에 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청와대 인근이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합수부는 병력을 동원할 때 황영시 장군이 9사단의 가용한 병력을 빼라고 명령했다. 국방장관이 없어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9사단 1개 예비연대, 30사단의 1개 연대, 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 그리고 2개 공수여단을 동원했다.
 
  무력충돌이 우려되자 노태우(盧泰愚·육사 11기)·유학성(兪學聖·육사 1기)·차규헌(車圭憲·육사 8기)·박준병(朴俊炳·육사 12기)·황영시 장군 등이 총리 공관을 찾아가 최 대통령에게 수습을 부탁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양측 병력 동원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겁이 없었다면 거짓말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전화통에 매달렸다. 가까운 연대장이나 참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단장이 그러더라도 상황이 그러니 너희 함부로 움직이면 복잡해진다”고 밤새 설득했다. 누구한테 전화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순간순간의 긴장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당시 보안사령관실에서는 유학성·황영시·차규헌·노태우·박준병 장군이 전두환 사령관과 밤을 새웠다. 30경비단에 있던 장군 대부분이 사령관실로 모였다. 마치 사령관실이 비상상황실처럼 돼 버렸다. 그분들이 달라붙어 각 부대에 전화를 걸어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노재현 장관과 유학성 장군, 이건영 3군사령관은 직접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동원을 못 하도록 설득했다.
 
  장성 중 한 분은 끝내 전화를 걸지 않았다. 내가 “전화 좀 거세요”라고 말해도 주저했다. 사태가 일단락난 뒤 “우리 부대는 아무 일이 없나?”고 하더라. 왜 그랬을까. 그도 인간이어서 겁이 난 것이라 생각한다.
 
  장태완 장군은 솔직담백한 군인이다. 정치적으로 앞뒤를 재는 사람이 아니다. 정승화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 군인다운 의리를 드러냈지만, 그런 충성심이 모든 판단을 흐리게 한 결정적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가족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가 전방을 지키던 9사단 병력 일부를 뺀 것을 두고 미8군이 불만을 토로했다. 9사단 1연대는 미8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죽기 아니면 살기인데, 가능하고 안 하고가 없었다. 일종의 블랙홀 상황이었다. 정상적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이고, 장태완 쪽이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미8군 위컴 사령관이 화를 많이 냈다. 모르몬 교도인 위컴은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다. 이후 대화가 잘 안 될 정도로 갈등이 깊었다. 12·12 이후 장성들이 용산에 있는 미군 골프장에 골프를 치러 갔는데 위컴이 못 치도록 했다. 그런 식으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10·26과 12·12를 거치며 미군 측은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사전에 어떤 협조도 하지 않았고 미군의 간섭도 없었다.
 
 
  ‘To be or not to be…’
 
  10·26 직후 한국 현대사에 블랙홀 현상이 3~4번 왔다. 블랙홀 상황에서는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빛까지 흡수해 버리고 공식도 법칙도 통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와 게임 룰은 전혀 맥을 못 춘다. 그런 위기가 1979년 몰아쳤고 우연이 역사를 지배했다.
 
  엄청난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도 군도 많은 교훈을 얻었다. 군이 정치권력에 함부로 휘둘릴 가능성은 적을 것도 같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군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기서 고전적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명령의 정당성!’ 말이다. 명령을 받았지만, 그 명령이 정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답변만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정당한 임무라고 수행했는데, 상대는 정당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현상은 정치적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임무가 정당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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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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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혁기    (2014-03-20) 찬성 : 159   반대 : 206
꽃잎이아니라꽃잎처럼이

고알것
  김인호    (2013-03-11) 찬성 : 110   반대 : 214
광주사람들이 꽃잎처럼 사라진것이 아니고 김대중과 그의 추종자들의 선동과 북의
고첩들이 지시를받고 마치 여순 반란사건 같은 목적을 위한 폭동입니다 5.18은 다시 한번더 역사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하면 60%이상은 재검증에 찬성할것입니다 광주분들은 꽃잎이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이윤성    (2012-03-17) 찬성 : 219   반대 : 208
참 뻔뻔스럽다 .자기합리화의달인답구나 네놈들덕에 광주사람들은그냥꽃잎처럼사라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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