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시작도 빠르고, 전환도 빠르고, 변화도 빠르다.
이것이 광둥상인들의 공통점이다. 담대하고 사업수완이 뛰어난 광둥상인들은 천하를 사는 방법을 고민한다.
⊙ 전 세계 華商의 절반이 광둥성 출신. ‘장사의 달인’으로 불리는 광둥상인 제1의 상업원칙은 信義
⊙ 과감하게 기선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비결
⊙ 그들에겐 만만디 대신 속도전만 있을 뿐
⊙ “베이징 사람은 외지인을 자기의 부하로 여기고, 상하이 사람은 시골촌뜨기로 깔보지만
광둥 사람은 소비자로 대한다”
이것이 광둥상인들의 공통점이다. 담대하고 사업수완이 뛰어난 광둥상인들은 천하를 사는 방법을 고민한다.
⊙ 전 세계 華商의 절반이 광둥성 출신. ‘장사의 달인’으로 불리는 광둥상인 제1의 상업원칙은 信義
⊙ 과감하게 기선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비결
⊙ 그들에겐 만만디 대신 속도전만 있을 뿐
⊙ “베이징 사람은 외지인을 자기의 부하로 여기고, 상하이 사람은 시골촌뜨기로 깔보지만
광둥 사람은 소비자로 대한다”

- 중국 광둥성 선전 시내에서 시민들이 덩샤오핑과 선전의 전경이 그려진 간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간판 왼쪽 위에는‘당의 기본 노선을 유지하며 100년 동안 흔들리지 말자’고 적혀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7년 11월, 마오쩌둥(毛澤東)의 추종자들인 4인방이 실각하고 덩샤오핑(鄧小平)이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경제발전에 눈을 돌려 중국 각지 시찰에 나섰다. 그가 처음 방문한 곳은 중국 남부의 광둥성. 광둥을 순회하던 그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홍콩과 접해 있는 선전이라는 작은 어촌마을을 눈여겨보았다.
이듬해인 1978년, 광둥성은 중앙당에 자신들이 앞장서서 개혁개방을 추진하겠다며 외자유치, 수출확대 정책을 요청했다. 덩샤오핑은 선전을 떠올렸다. 그해 12월 18일, 역사적인 중국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덩샤오핑은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한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선포했다. 이른바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980년 5월, 선전은 중국의 ‘경제특별구역 제1호’로 지정됐다.
30년 전만 해도 인구 3만명의 작은 縣(현)에 불과했던 선전의 2007년 말 인구는 유동인구를 포함해 약 1400만명이다. 늘어난 것은 인구뿐만이 아니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선전항의 물동량은 2100만TEU로 싱가포르, 상하이, 홍콩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30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8%로, 중국 평균 성장률의 3배에 달한다.
선전시의 GDP는 특구 지정 당시 1억7600만 위안에서 2007년 말에는 6765억 위안을 기록, 28년 만에 무려 3800배나 폭증했다. 2007년에는 중국 도시들 중 최초로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했다.
개혁개방의 선두주자인 선전의 눈부신 발전은 주변 도시들을 변화시켰다. 광둥성 성도인 광저우뿐만 아니라 둥관(東莞), 후이저우(惠州), 주하이(珠海) 등 광둥성 전체의 동반 발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광둥성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 내에서도 핵심 엔진으로 통한다.
이는 통계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광둥성은 중국 전체 수출의 3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 팩시밀리와 컬러TV, 에어컨의 절반이 ‘메이드 인 광둥성’이다. 냉장고와 소형 컴퓨터의 4분의 1이 광둥성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 둥관은 전 세계 완구의 70%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완구 생산기지다. 중국 전체 면적의 2%에 불과한 광둥성의 규모에 비해 경제력은 놀라울 정도다.
광둥의 상업역사는 뿌리가 오래고 깊다. 오래 전부터 상인이 끊이지 않아 중국 최초의 상업도시를 형성할 정도로 외국과의 무역이 발달했고, 중국과 동남아, 인도, 서아시아 등과 통상을 하는 중요한 교량이 됐다. 宋(송)나라 이후부터 광저우는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드는 대외무역항이었다. 明(명)나라 때는 오늘날의 세관 격인 行(행)이 13개에 달했고, 淸(청)나라 때는 유일한 대외통상항구였다.
원주민을 제외하고 일찍이 광둥에 몰려온 사람들 대부분은 상인이었다. 그리하여 광둥성은 다른 지역보다 우수한 상업적 환경을 가진 ‘상인의 고장’이 됐다. 광둥상인은 중국에서 가장 담대하고, 수완이 뛰어난 상인집단을 형성했다.
‘돈 있는 자는 살고, 돈 없는 자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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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둥성 선전 시내 중심가의 빌딩들. (왕이 사이트 제공) |
人種的(인종적)으로 구분한다면 ‘商人種(상인종)’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인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 바로 광둥상인이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베이징 사람들은 외지인을 자기의 부하로 여기고, 상하이 사람들은 시골 촌뜨기로 깔보지만 광둥 사람들은 소비자로 대한다.”
광둥 사람들은 ‘돈 있는 자는 살고, 돈 없는 자는 죽는다(有錢者生, 無錢者死)’는 말을 당연시 여긴다. 그들은 돈이 없는 것을 萬惡(만악)의 근원으로 여긴다. 광둥상인이 갖고 있는 拜金主義(배금주의)는 중국상인 중에서도 으뜸이다. 광둥상인이 가장 숭상하는 神(신)은 財神(재신)이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돈벌이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어떤 격식에도 구애 받지 말고 돈을 벌라’는 격언에 충실한 상인집단이다. 그들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반면 돈이 된다면 하늘에 구멍을 뚫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광둥상인이 중국의 다른 지역 상인들과 가장 다른 점은 ‘속도’다. 광둥성에는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慢慢的·천천히)’가 없다. 1987년 완공된 선전세계무역센터는 건설 당시 3일에 한 층씩 올라가 ‘선전속도(深?速度)’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광둥상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좌우명이 要發財(요발재) 忙起來(망기래)다. 풀이하면 ‘돈을 벌고 싶으면 바빠져라’라는 뜻이다. 광둥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생계를 이어가고, 돈을 벌기 위해서다. 이곳에서는 조금만 멈춰 서도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광둥상인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와 ‘시간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관념이 강하다. 그들은 동분서주하며 단 한 푼이라도 이익을 남기려고 애쓰고, 다른 이들보다 사업적 기회를 한 발 먼저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려서부터 상업적 분위기가 농후한 배경에서 성장한 광둥 사람들은 사업적 영감이 풍부하고 독창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시작도 빠르고, 전환도 빠르고, 변화도 빠르다. 이것은 광둥상인들의 경영 스타일에 대한 공통된 평가이며, 그들의 성공 비결 중의 하나다.
광둥상인과 사업할 때 느리면 손해를 면하기 어렵다. 첫째, 쉽게 기회를 놓쳐 사업에 지장을 준다. 둘째, 광둥 사람과 속도가 다르면 손발을 맞추기 어려워 승리의 열매를 얻기가 어렵다. 셋째, 행동이 느리면 생각도 느려져서 광둥 사람들에게 선수를 빼앗기게 되어 그들의 뒤만 쫓아갈 뿐이다.
하지만 광둥사람들은 빠르긴 해도 맹목적이지는 않다. 광둥상인은 장사를 해도 간사스럽게 하지 않고,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게 외지인들의 일치된 평가다.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빠르면서 정확하다. 이는 시장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상업적 후각이 발달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몇몇 사람들의 본능적인 민첩함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화교상인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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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자청(李嘉成) 창장그룹 회장(왼쪽)과 차남 리처드 리 PCCW 회장. |
근대부터 현재까지 입신출세한 광둥상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국상인들 중에서도 巨富(거부)가 가장 많은 그룹이 됐다. 홍콩의 거부들 중에서 광둥 출신이 가장 많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개혁개방이 시작되기 전 대륙의 중국인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때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 같은 사업 마인드와 재능에 힘입어 광둥상인들은 중국과 세계로 진출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했다. 그 결과 광둥상인은 ‘동방의 유대인’으로 불렸다.
광둥상인은 부자가 되는 核心(핵심) 비결을 ‘먼저 선(先)’과 ‘감행할 감(敢)’ 두 글자로 표현한다. 과감하게 기선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다. 이의 대표적 인물로 광둥성 동부 한장(韓江) 출신의 리자청(李嘉城)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스물두 살에 플라스틱 사업으로 초기 자본을 축적한 다음 부동산으로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그는 전력과 항만·소매업·통신·바이오·인터넷 등의 분야에도 손을 뻗쳐 허치슨왐포아그룹과 창장(長江)홀딩스그룹을 세웠다.
한번은 리자청이 자동차 열쇠를 찾으려다 2홍콩달러짜리 동전을 차 밑으로 떨어뜨렸다. 자동차를 움직이면 동전이 하수구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몸을 구부려 동전을 줍고자 했다. 이때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대신해 동전을 주워주었다. 동전을 건네 받은 리자청은 그에게 100홍콩달러를 사례비로 주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 하자 리자청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동전을 줍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수구로 굴러 떨어져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100홍콩달러를 그에게 주면 그가 그 돈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돈은 사용되어야지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리자청은 수십년 동안 38억 홍콩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고 의료·교육·인프라·문화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향에 산터우대학(汕頭大學)을 설립해 후학 양성에도 적극 나섰다. 그는 원대한 안목과 입지전적인 성공, 그리고 수많은 기부와 조국애로 ‘超人(초인)’으로 불릴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1966년 홍콩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 부동산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자 사람들은 앞다퉈 부동산을 팔아 치웠다. 플라스틱 造花(조화)사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리자청은 플라스틱 사업을 정리하고 부동산에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던 땅, 그것도 외딴곳에 있는 황무지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그는 홍콩이 신속하게 위기에서 벗어나 정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되면 부동산이 다시 회복할 것이란 게 그의 판단이었다.
리자청의 과감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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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선전의 접경지역인 로우역에서 ‘e채널’ 이란 무인 전자 출국대를 통과해 선전시내로 들어가는 사람들. |
그는 1970년대 본토 경제가 회복되면 반드시 홍콩경제도 살아나 큰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홍콩이 원료수입과 노동력을 본토에 의존하면 원가가 크게 낮아질 뿐 아니라 중동전쟁으로 인한 불리한 요인들을 상쇄시킬 수 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다.
리자청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홍콩의 부동산 가격은 일정 기간 하락한 후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며, 그가 건축한 건물은 순식간에 모두 팔려나갔다. 부동산 투자의 성공을 바탕으로 리자청은 승승장구,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0大(대) 富豪(부호) 중 한 명이자 아시아 최고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광둥상인과 베이징상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된다. 정치적 관념이 강한 베이징상인과 달리 광둥상인은 정치나 철학에 대한 공론을 늘어놓지 않는다. 옛날부터 광둥에서는 부모가 공부에 게으름을 피우는 아이를 꾸짖을 때 “공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나중에 관료밖에 못해먹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베이징사람은 사상을 논하고, 광둥사람들은 장사를 논한다”고도 한다. 광둥상인과 거래할 때는 ‘정치’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 게 좋다.
기질 면에서도 차이가 많다. 베이징상인은 유난히 ‘콴시(關係)’를 중시하는 반면 광둥상인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속마음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또 상대방 面前(면전)에서 직접 거절하는 경우가 드물다. 때문에 비위를 맞추는 말을 긍정이라고 확신했다가는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친화력, 민첩성, 영리함이 광둥상인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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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28개국 2500여 명의 중국계 기업인과 500여 명의 국내 기업인이 참석한 제8차 세계華商(화상)대회가 2005년 10월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렸다. |
이런 측면에서 홍콩 은행업계의 거부 우이쑨(伍宜孫)은 특출한 광둥상인이다. 우이쑨은 광둥 순더(順德) 사람으로, 홍콩 융룽은행(永隆銀行) 창업자다. 그는 2차대전 당시 홍콩이 점령됐을 때도 금융업을 계속하여 신용을 지켰다. 전쟁이 끝난 후 융룽은행은 순식간에 명성을 얻어 홍콩 금융업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동종업계의 한 사람은 우이쑨의 성공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평소에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고, 의리와 약속을 중시했고, 한 번도 동료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인들은 그와 사업하는 것을 좋아하고, 동료들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업가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창업 초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창업 초기의 조건과 뒷날 이룩한 결과를 비교해 보면 으레 ‘고난’이란 글자가 보인다. 광둥상인이야말로 고난을 혁파해 나가는 데 충실한 상인집단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성실하게 사업기회를 잡고, 실질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좌절 앞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광둥상인의 특징이다.
광둥사람들이 태생적으로 부여 받은 능력은 민첩함과 영리함이다. 지금도 많은 광둥사람들은 홍콩 상업계의 거두 궈더성(郭得勝)을 숭배한다. 궈더성은 전 세계 華商(화상) 중 리자청 회장 다음 가는 부호로, 현재 홍콩의 최고층 건물인 국제금융센터를 소유한 부동산 재벌 선홍카이(新鴻基)그룹 창업주다.
궈더성은 1911년 광둥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조부모 손에서 자라던 그는 열 살 되던 해 베트남으로 밥벌이를 하러 갔다. 청년 시절에는 광저우와 상하이, 일본 등지를 전전하며 연명해 나갔다. 그가 일본 침략군을 피해 피신한 곳이 마카오였다. 그곳에서 몇 명의 친구들과 수입품 가게를 열었다. 홍창(鴻昌)수출입공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동남아 지역에서 ‘수입품 대왕’이란 별칭을 얻을 만큼 사업을 키웠다.
마카오는 시장이 작아 사업을 계속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궈더성은 1958년 홍콩으로 눈을 돌렸다. 홍콩에서는 처음부터 부동산시장을 노렸다. 그는 자본이 모이면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하고 건물을 계속 지어댔다. 그 바람에 홍콩에서는 ‘건물제조공장’이란 닉네임을 얻었다.
1990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한 그가 부동산 재벌로 성공한 비결은 시장에 대한 신뢰와 일에 대한 열정이었다. 네 차례에 걸친 홍콩 부동산 폭락 때도 그는 시장을 믿고 공격경영을 펼쳤다. 1967년 정치적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할 때 거액을 벌었다. 오일쇼크 당시에도 싼값에 내놓은 부동산 매물을 사들여 큰 수익을 올렸다.
펑룬화의 거북이경영법
1980년대 들어 홍콩 반환에 대한 불안감으로 홍콩탈출 러시가 일어났을 때 궈더성은 계속해서 부동산을 사들였다. 홍콩이 쇼핑객으로 넘쳐나던 시절에는 상가를 지어 분양했고, 주택매매시장이 커지면 주택상품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그는 공사현장을 둘러보는 것이 취미였다. 일주일에 일곱 번 회장이 나타나는 공사현장에서 기술자들은 편법이나 부실공사를 할 수 없었다. 결과는 우수한 품질과 이익으로 나타났다.
‘공격적인 사람은 하늘에서 움직이고, 방어적인 사람은 땅에서 움직인다’는 兵家(병가)의 말이 있다. 사업가의 전략도 이와 비슷하다. 창업이 어렵지만 守成(수성)은 더 어렵다고 말한다. 30여 년의 개혁개방 기간 중국에는 수많은 창업영웅들이 나타났지만 많은 이들이 오래 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진 점이 이를 증명한다. 기회를 잘 포착하면 창업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수성을 위해서는 훨씬 복잡하고 노련한 경영방식과 이념이 필요하다.
광둥상인에게서 발견되는 특이점은 결정적 시기에 모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창업 초기에 과감한 방법을 사용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기반이 잡히면 그들은 경영방식을 재설정해 안전한 방법을 채택하고, 확고한 기반을 다진 후 새로운 발전을 도모한다. 이런 의미에서 광둥상인들은 전원 공격·전원 수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창업을 할 때에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지만 수성을 할 때에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홍콩 시에청(協成)그룹 팡룬화(方潤華) 회장은 ‘거북이경영’으로 유명하다. 그의 경영방침은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눈앞의 기회를 놓치더라도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팡룬화는 사업을 발전시키면서도 은행대출금이 자산의 10%를 넘은 적이 거의 없었다. 안정적인 운영을 유지해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실수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팡룬화의 이런 보수적인 운영방침은 일부 업계 인사들로부터 그가 더 큰돈을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팡룬화의 생각은 달랐다.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중소기업처럼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좀더 많이 번다 해도 시장의 돈을 전부 벌 수는 없으며, 오히려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 그의 사업 철학이었다.
그는 “패하지 않을 위치에 서면 성공에 가까워진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행동하는 것이 경영비법이라고 했다. 그는 또 “다투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며 퇴로를 준비하면 사업에서 불패의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했다. 팡룬화의 거북이경영법은 기업을 발전시키는 금과옥조가 됐고, 어려운 풍파 속에서 피해를 입지 않는 비법이었다.
21세기를 대표하는 광둥상인을 예로 들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중국 가전양판시장을 장악해 중국 유통업의 신화를 새로 쓴 궈메이(國美)그룹 황광위(黃光裕) 회장이다. 미국의 <포천>지는 황광위 회장에 대해 ‘중국 본토에서 가장 출세한 청년 부호’라고 보도했다. 중국의 유력 잡지인 <난팡런우(南方人物)>는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CEO로 그를 선정한 적이 있다.
북방의 늑대, 황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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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대륙 전역에 전자제품 양판점을 갖고 있는 궈메이(國美)그룹의 황광위(黃光裕) 회장. |
황광위는 1969년 광둥성 산터우(汕頭)의 벽촌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인 1985년 중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네이멍구(內蒙古)에서 옷 행상을 시작했다. 그때 1년간 번 돈으로 베이징에 전자대리점 궈메이전기를 세웠다. 궈메이를 키워가는 그의 방식은 공격 일변도였다. 무지막지한 低價(저가)정책은 그에게 ‘북방의 늑대’ ‘가격 킬러’라는 별명을 안겼다.
그는 중간상을 없애고 제조업체와 직접 접촉해 일괄구매한 뒤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춰서 팔았다. ‘궈메이’라는 단일 브랜드로 베이징 시내 곳곳은 물론 전국 곳곳에 체인점을 세우고 소비자들을 파고들었다. 궈메이전자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0% 수입 가전제품을 취급하는 소규모 전자제품 상점에 불과했으나 1996년에는 진열제품의 90% 이상을 중국산으로 채웠다. 현재 궈메이전자는 전국 300여 개 도시에 직영점 1300여 개를 갖추고 있으며, 연매출 1000억 위안이 넘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황광위는 2000년 이후부터는 부동산에도 뛰어들었고, 2004년 궈메이전기를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하면서 중국대륙 최고의 갑부로 등장했다. 2006년에는 상하이 잉러(永樂)가전과 합병한 데 이어 2007년에는 중국 3대 가전양판점인 다중(大中)을, 2008년 2월에는 산둥성 가전기업인 싼롄(三聯)상사를 인수했다.
“속도 안에 황금이 있다”
황광위를 광둥상인의 전형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평소 직원들에게 “속도 안에 황금이 있다”고 강조했다. 스피드 경영을 강조하면서도 위험에 대비하는 ‘쥐안쓰웨이(居安思危)’ 정신을 역설했다.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무일푼에서 시작해 ‘콴시(關系)’가 지배하는 중국에서 30대 후반에 최고 갑부에 선정된 황광위의 성공 이야기는 그 자체가 神話(신화)다.
지역별 중국상인 그룹을 두고 이런 말이 있다.
“베이징 사람들은 국수를 한 그릇 먹을 때 체면에 맞는지를 먼저 생각하지만 상하이 사람들은 이 국수를 전시회에 가져다 외국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한다. 허난 사람들은 양이 많은가 적은가, 또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가를 보는 반면 광둥 사람들은 국수 한 그릇으로 열 그릇을 만들 수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는가, 천하를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이 말처럼 광둥상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업적인 기회를 탐색한다. 그들은 어떤 것으로도 다 장사를 할 수 있으며, 세상이 넓기 때문에 사업을 할 수 있는 공간도 광범위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업분야는 항상 새로운 것들이다. 홍콩의 메이리화(美麗華·MIRAMA)호텔을 운영했던 양즈윈(楊志云)은 창의력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광둥상인이다.
금은방의 사환으로 사업세계와 인연을 맺은 양즈윈은 금은방을 인수해 기반을 잡았으며, 호텔과 부동산을 경영하면서 대중의 소비심리를 꿰뚫는 방식으로 성공을 이루었다. 동종업계 인사들은 양즈윈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가장 영리한 광둥상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광둥상인들은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데도 적극적이다. 홍콩에서 창업한 리자청, 개혁개방 후 국내에서 창업한 쓰바오(絲寶)그룹의 량량성(梁亮勝), 메이쓰(美思)내의회사의 우옌펀(吳艶芬), 이룽(億龍)그룹의 저추안웨이(周傳偉), 완자러(万家樂)그룹의 창업자 장홍치앙(張鴻强) 등이 모두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