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업가·방송인·치과의사부터 포커 선수에 회사 대표까지
⊙ ‘억대 연봉’ 버리고 노량진서 ‘公試 3관왕’ 이룬 박영민
⊙ 게임 책 3권 쓰고 ‘대기업 사원’ 된 조형근의 변신 이유
⊙ ‘억대 연봉’ 버리고 노량진서 ‘公試 3관왕’ 이룬 박영민
⊙ 게임 책 3권 쓰고 ‘대기업 사원’ 된 조형근의 변신 이유
- 200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 로고와 당시 경기 장면. 사진=조선DB
“야! 박영민, 일어나. 너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래?”
“저요? 저는 프로게이머가 될 겁니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영민은 잠이 덜 깬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귀를 잡고 일으켜 세우던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키득거리는 친구들 덕분에 교실은 금세 웃음바다가 됐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아직은 생소했던 199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영민은 고교 시절부터 당돌했다. 눈뜨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까지 게임을 했다. 학교 가서는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넣고 키보드와 마우스 잡는 시늉을 하며 경쟁자와 ‘가상(假想) 전투’를 벌였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매를 들고 컴퓨터를 두 대씩이나 박살 냈지만, 매번 PC방으로 줄행랑친 그는 대학생이 돼서도 게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오히려 성장을 거듭해 군소 대회의 우승 트로피를 휩쓸고 방송 경기에 나가 상금도 탔다. 그 길로 대학을 중퇴하고 20대의 대부분을 프로게이머로 활약했다. 전성기 때는 ‘억대 연봉’을 거머쥐기도 했다. 공군 게임단이 설치돼 군 복무 중에도 현역 선수로 뛰었다. 술자리에 나가면 고향 친구들은 그의 ‘통 큰 씀씀이’에 혀를 내둘렀고, 또래 팬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플레이를 찬탄했다…. 그랬던 그가 2011년 전격 은퇴를 선언하고 ‘노량진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영민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다.
2년 뒤 영민은 공시생(公試生·공무원 시험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9급 일반행정직 3관왕(국가직·지방직·서울시)’을 차지하고, 고향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 고교 행정실 직원이 됐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원조(元祖)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 프로게이머이자, 일명 ‘공명토스’(스타의 세 종족 중 하나인 ‘프로토스’를 운용하면서, 마치 제갈공명 같은 신묘한 전략을 쓴다는 칭찬의 뜻)라는 별칭을 얻었던 박영민(35)씨의 이야기다.
‘국민 게임’ ‘10만 관중’ 스타의 발자취
미국 게임 업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1998년 출시한 스타는 “인류와 외계 종족 간의 전쟁”이라는 공상과학적(空想科學的)인 세계관 아래, 플레이어들이 ‘테란’ ‘저그’ ‘프로토스’ 세 종족 중 하나를 선택·운용해 상대편과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다. 빠른 전개, 쉬운 조작법, 깔끔한 그래픽, 종족 간 밸런스 등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2009년 기준 스타 게임팩 세계 판매량의 40% 정도인 450만 장이 한국에서 팔렸다. 스타는 PC방 문화를 선도했고, 게임 전문 방송사 개국에 기여했으며, 프로게이머의 본격적인 업계 진출을 가능케 했다. IMF 금융위기 이후, 1조1400억원 이상의 경제 효과와 15만명 수준의 고용 창출을 가져왔다. PC방의 경우, 1998년 전국 100여 곳에 불과했다가 2년 뒤인 2000년 1만5000여 곳으로 대폭 늘기까지 했다. 관련 대회 및 경기 중계가 활성화되는 등 스타가 ‘게임계 강자’로 주목받자 대기업들도 게임단을 발족해 선수 영입에 나섰다.
매년 새로운 형태의 게임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서 스타의 열기는 십수 년간 지속됐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결승전을 보러 관중 10만명이 모여들 정도였고, 유명 선수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부와 명성을 얻었다. 2008년 당시 ‘천재 테란’으로 불리던 이윤열씨는 3년 계약 조건으로 연봉 2억5000만원을 받아 ‘현역 프로게이머 연봉왕’으로 꼽히기도 했다. 외신도 한국의 ‘스타 열풍’을 조명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인터넷 게임 산업은 TV·영화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며 “세계에서 가장 인터넷이 활성화된 한국에서 스타 프로게이머들은 고액 연봉과 함께 수많은 팬을 확보한 유명인사로 각광받고 있다”고 했다. CNN은 “다른 나라에서였다면 ‘컴퓨터 괴짜’였을 이들을 한국에서 최고 소득자로 만든 것이 바로 스타크래프트”라고 했다. 2010년 일부 선수의 승부조작 사태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후속 게임들에 왕좌를 넘겨줬지만, 스타는 아직도 10대부터 50대까지 즐기는 ‘국민 게임’으로 남아 있다. 스타는 우리 문화 산업에서 게임이 ‘E(Electronic)-Sports’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원천이었다.
개인 방송 BJ부터 배우까지
업계를 떠난 전직 스타 프로게이머들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스타의 간판이자 ‘테란의 황제’로 불린 임요환씨는 게임단 코치·감독을 거쳐 현재 ‘프로 포커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영원한 맞수이자 ‘폭풍 저그’로 불린 홍진호씨도 게임단 감독을 하다 방송인으로 전향했다. 배우로 뛰고 있는 민찬기씨, 게임 회사 대표가 된 서경종씨, 게임 개발자로 일하는 이윤열씨, 미국 유학을 떠나 의류 사업가가 된 창석준씨도 있다. 서울의 명문 공대(工大)를 나온 이주영씨의 경우 최근 치전(齒專·치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 치과의사로 활동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많은 게이머가 BJ(Broadcasting Jockey·인터넷 방송 진행자)가 돼 개인 방송을 하거나 게임 유관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개인 방송은 전직 프로게이머들이 많이 종사하고 있는 업종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현역 프로게이머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은퇴 후 갖고 싶은 직업으로 게임단 코치·감독(34.8%)에 이어 BJ(30.4%)가 두 번째로 꼽혔다. 개인 방송 업체인 ‘아프리카TV’에만 은퇴한 게이머 234명(작년 12월 19일 기준)이 소속돼 있다. 작년 기준, 아프리카TV에서 동시 접속자 수가 높은 상위 20개 방송 중 전직 게이머 방송만 13개(65%)에 달할 정도였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실제 수입도 짭짤하다고 한다. 개인 방송 게이머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 그들은 기존 명경기를 분석하거나 시청자들이 원하는 구도의 경기에 도전하고, 그 대가로 ‘별풍선’이라는 현금성 사이버 머니를 실시간·무한정으로 받는다. 인기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광고·협찬도 따라붙는다. 게이머는 인기 영상을 편집해서 재송출하고 조회 수에 따라 다시 부수입을 얻는다. 일부 게이머는 “(개인 방송을 하니까) 선수 때보다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할 수 있고, 오히려 수입이 더 나아진 편도 있다”고 했다. 최대 연 5억~6억원까지 버는 전직 게이머들도 있다고 한다.
“지인들, 公試 만류하고 ‘방송하자’고 제안”
그런 점에서 볼 때, 박영민씨 경우는 이례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프로게이머 특성상 선수 생명이 짧은 만큼 20대 후반에 ‘진로 고민’을 했을 테지만, 당장 벌 수 있는 수입을 버리고 출구가 좁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프로게이머들이 20대 중반 넘어가면 생각이 많아져요. 군대 갔다 오면 다시 선수 생활하기도 힘들고, 해봤자 1~2년밖에 못 할 텐데 그때가 인생에서는 중요한 시기잖아요. 게임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지만, 코치·감독은 ‘티오’(TO·정원)도 잘 안 나던 때였어요. 마침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고, 저도 생각해보니까 경력이나 베이스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공시(公試)더라고요. 시험 성적만 보니까요…. 물론 제가 처음 공부한다고 하니까 합격할 거라고 믿는 지인들이 10명 중 1명도 안 됐어요. 다들 저보고 ‘1인 인터넷 방송하자’고, 자기가 ‘매니저를 해줄 테니까 너는 게임만 하면 된다’고 많이 제안해왔는데 모두 거절했어요. 말을 잘하는 편도 아니고, (방송으로 성공하기까지) 준비하는 시간이 아까웠어요.”
그렇게 상경한 박씨는 스마트폰을 구식 폴더폰으로 바꾸고 지인들과 연락을 끊었다. 공시의 당락을 좌우하는 영어의 경우, 기초 지식이 부족해 문답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다. 손과 팔에 문신(文身)처럼 단어와 문장을 적고 아침밥 먹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달달 외웠다. 1년 반 동안 노력해 첫 번째 시험을 봤지만 고배를 마셨고, 이후 6개월은 군산으로 다시 내려가 집중했다. 의자에 오래 앉아 연습하던 프로게이머 때 습관이 공부에도 도움이 됐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3관왕은 물론, 성적도 높게 받아 합격했다.
박씨는 “지금까지 공부를 해서 1등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합격 소식이) 더 기뻤던 것 같다”며 “공무원도 게이머도 엉덩이를 오래 붙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인 것 같다”고 했다. 일선 학교에서 교육 공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3년 전 같은 공무원 출신의 배우자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올해부터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를 다니며 못다 한 학업도 이어가고 있다. 일확천금을 벌 수 있었던 게이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후회는 안 해봤을까.
“‘노량진 虛數들’ 시간 낭비 안타까워… 背水陣 쳐야”
“전혀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일에 20대를 불태웠고, 또래보다 금전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린 건 맞지만 그때만큼은 못 벌어도 정신적 여유가 있는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사실 노량진 가서 보면 허수(虛數)가 되게 많아요. 공부보다는 술 먹기 좋아하고 PC방·당구장 다니는 사람들 보면 안타까워요. 저는 이 안정된 생활을 위해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공부했거든요. 나이는 서른이 넘어가고 이게 아니면 길은 없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보면 또 게임 산업이 이쯤에서 ‘크게 도약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프로게이머가 10~20대 때만 잠깐 걸치는 직업이 아니라 꾸준히 가는 직업이 되고, (게이머 출신들이) 다른 쪽으로도 많이 진출할 수 있게 길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선수들 유입도 더 잘될 거고, ‘선수 생활 길지 않은데 뭐 먹고살 거냐’는 부모들의 걱정도 덜어질 겁니다.”
최근 한 전직 프로게이머의 과거 사생활 문제가 불거져 파문이 일었다. 도박 등 게이머들의 일탈 문제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게임을 마약처럼 죄악시하거나, 게이머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애’로 취급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실제 한 게이머는 “몇몇 프로게이머는 은행에 가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한다”고 했고, 또 다른 게이머는 “게임은 잘하는데 컴퓨터 연결이나 윈도 설치는 못 하는 프로게이머도 있다”고 했다.
스타가 전성기를 누릴 때만 해도, 프로게이머들은 사생활이 통제되는 엄격한 합숙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루 12시간씩 새벽 늦게까지 선수들끼리 맹연습을 했다. 주말이면 비밀연애를 하는 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또래들과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일부는 경제관념이 없어 큰돈을 벌어도 낭비가 심했다.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겠지만, 현재도 게이머들의 교육과 건강 및 사회화 문제는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인 것이다.
“영양실조 걸릴 정도로 ‘스타에 미쳤던’ 날들”
그런 점에서 “프로게이머 출퇴근제를 도입하자”는 전직 프로게이머 출신 조형근(35)씨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린다. 현재 현대자동차연구원 설계팀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조씨는 과거 스타 종족 중 ‘저그’ 선수로 활약, ‘디파일러(저그의 마법 유닛으로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붉은 안개가 주특기)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중학생 때부터 오락실을 들락거렸던 그는 부산 지역의 여러 PC방 대회를 섭렵, 고교 2학년 때 ‘Sky Life배 Game TV 신인왕전’ 본선 진출에 성공해 4위로 데뷔했다.
“대학은 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설득에 고3 시절 1년 동안은 공부에 집중, 부산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수능시험이 끝나니 머릿속은 스타뿐이었다. 대학 입학식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가 과거 몸담았던 팀에 합류했다. 조씨는 “그때 자기 관리는커녕 멋모르고 밤늦게까지 게임만 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렸다”며 “부산에 내려가 입원해서 건강을 회복하고 1학년까지 마쳤다. 그 뒤로 휴학계를 내고 내리 4년 동안 프로게이머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공군 게임단에서 복무하던 시절, ‘4대 천왕’이라 불리던 이윤열을 격파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합숙 훈련을 받던 때도 ‘군기 반장’ 선배들이 있어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씨는 “그때만 해도 프로게이머들이 합숙 생활을 하면 술·담배·여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뜨면 하루종일 게임하고, 쉴 때는 다른 팀 경기 방송 보면서 전술 공부를 했다”며 “정규시간을 소화하고도 마땅히 할 게 별로 없어서 각자 개인 연습을 더 했다. 자고, 먹고, 운동 조금 하는 시간 빼면 온종일 ‘스타’였다”고 했다.
게이머라는 직업 특성상 장시간 정자세로 게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목·허리 디스크가 오거나 안구건조증에 걸리는 동료들도 있었다. 조씨도 손목이 자주 저렸다. 그래도 자기계발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자는 시간을 쪼개 영어·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전역 후 은퇴를 선언한 그는 다시 부산대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5세 되던 때였다.
‘포스코 장학생’ ‘현대차 연구원’이 되기까지
“그때 고민 많이 했어요. 사실 다른 팀 코치 제의가 왔거든요. 코치나 감독을 하려면 리더십이나 대인관계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제게는 차분하게 안정적으로 일하는 직업이 더 맞았어요. 물론 게임계에서 더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말주변이 좋아서 해설가를 할 것도 아니고 영업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4년 정도 대학을 더 다니면서 취업 준비를 했죠. 졸업 직전에 포스코 인턴장학생으로 선발됐지만 업무가 현장에 많이 나가는 설비 쪽이라 방향을 돌렸어요. 저는 컴퓨터 쓰는 데도 익숙하고, (장비나 부품) 설계를 하고 싶어서 현대차에 R&D(연구개발)로 취직을 했죠. 입사 소식을 전하니까 ‘대단하다’ ‘언제 그렇게 공부했냐’며 놀라는 동료들이 꽤 있었어요.”
그렇다고 현역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간혹 고향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관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승전의 트로피를 들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곤 했다. 조씨는 “‘그때 참 좋았는데’ 하는 감상에 젖을 때도 있지만, 비교하자면 지금이 더 나은 것 같다”며 “내 전공을 살릴 수 있고, (인생을) 길게 보면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고, 자기계발도 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그는 은퇴 후 ‘E-Sports’와 관련된 책도 3권이나 펴냈다. 자료를 모으고 취재를 해서, 주말마다 조금씩 쓴 초고를 묶어놓고 서점에 갔다. 책의 맨 뒷장, 판권에 적힌 이메일로 일일이 투고했다. 자신의 경험을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저는 프로게이머들도 (합숙이 아닌) 출퇴근해야 한다고 봐요. 회사원이 출퇴근하듯이, 게이머들도 게임할 때는 게임하고 퇴근 후에는 어떤 생활을 할지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일과 시간 이후에는) 운동이나 연애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때론 술도 마시면서 다시 회사에 오면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처럼. 또 본인에게 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야근하면 되고요. 그래야 (게이머도) 능률이 더 늘지 않을까요?”
“게이머 지망생, 學業의 끈 놓지 마라”
조씨는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학업의 끈’을 놓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물론 정식 프로게이머가 된 이후부터는 게임에만 집중해 성과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문제는 공부를 아예 등한시하게 될 경우, 나중에 20~30대가 됐을 때 (진로 설정이) 힘들 수 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게임하러 올라온 연습생 중에, 기량이 안 늘어서 다시 짐 싸 들고 내려가는 친구들을 보면 (학업을 포기한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조씨는 프로게이머가 10~20대에게 ‘추천할 만한’ 직업이라고 했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체격 조건이 좋지 않아도 게임 실력만 뛰어나면, 젊은 나이에 큰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자녀가 그 길을 걷는다 해도 소질만 있다면 적극 지원해줄 거라고 했다. 그만큼 그는 프로게이머로 살았던 시절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직장인이 돼서도 제가 프로게이머였다는 사실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함께 ‘게임 한번해보자’고 하신 분들도 있었고요. 상대방이 저를 쉽게 기억해준다는 건 사회생활에서 큰 장점이죠…. 뭐든지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계획한 ‘인생 2막’이 있다면, 저처럼 일단 한번 부닥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게임을 하고 공부를 하고 책을 썼듯이, 지금 도전하는 것들이 다른 미래에 어떻게 연결될지는 누구도 모르니까요.”⊙
“저요? 저는 프로게이머가 될 겁니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영민은 잠이 덜 깬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귀를 잡고 일으켜 세우던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키득거리는 친구들 덕분에 교실은 금세 웃음바다가 됐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아직은 생소했던 199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영민은 고교 시절부터 당돌했다. 눈뜨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까지 게임을 했다. 학교 가서는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넣고 키보드와 마우스 잡는 시늉을 하며 경쟁자와 ‘가상(假想) 전투’를 벌였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매를 들고 컴퓨터를 두 대씩이나 박살 냈지만, 매번 PC방으로 줄행랑친 그는 대학생이 돼서도 게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오히려 성장을 거듭해 군소 대회의 우승 트로피를 휩쓸고 방송 경기에 나가 상금도 탔다. 그 길로 대학을 중퇴하고 20대의 대부분을 프로게이머로 활약했다. 전성기 때는 ‘억대 연봉’을 거머쥐기도 했다. 공군 게임단이 설치돼 군 복무 중에도 현역 선수로 뛰었다. 술자리에 나가면 고향 친구들은 그의 ‘통 큰 씀씀이’에 혀를 내둘렀고, 또래 팬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플레이를 찬탄했다…. 그랬던 그가 2011년 전격 은퇴를 선언하고 ‘노량진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영민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다.
2년 뒤 영민은 공시생(公試生·공무원 시험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9급 일반행정직 3관왕(국가직·지방직·서울시)’을 차지하고, 고향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 고교 행정실 직원이 됐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원조(元祖)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 프로게이머이자, 일명 ‘공명토스’(스타의 세 종족 중 하나인 ‘프로토스’를 운용하면서, 마치 제갈공명 같은 신묘한 전략을 쓴다는 칭찬의 뜻)라는 별칭을 얻었던 박영민(35)씨의 이야기다.
‘국민 게임’ ‘10만 관중’ 스타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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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전개, 쉬운 조작법, 깔끔한 그래픽, 종족 간 밸런스 등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은 스타크래프트는 프로게이머들의 본격적인 업계 진출을 가능케 했다. 사진=조선DB |
매년 새로운 형태의 게임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서 스타의 열기는 십수 년간 지속됐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결승전을 보러 관중 10만명이 모여들 정도였고, 유명 선수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부와 명성을 얻었다. 2008년 당시 ‘천재 테란’으로 불리던 이윤열씨는 3년 계약 조건으로 연봉 2억5000만원을 받아 ‘현역 프로게이머 연봉왕’으로 꼽히기도 했다. 외신도 한국의 ‘스타 열풍’을 조명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인터넷 게임 산업은 TV·영화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며 “세계에서 가장 인터넷이 활성화된 한국에서 스타 프로게이머들은 고액 연봉과 함께 수많은 팬을 확보한 유명인사로 각광받고 있다”고 했다. CNN은 “다른 나라에서였다면 ‘컴퓨터 괴짜’였을 이들을 한국에서 최고 소득자로 만든 것이 바로 스타크래프트”라고 했다. 2010년 일부 선수의 승부조작 사태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후속 게임들에 왕좌를 넘겨줬지만, 스타는 아직도 10대부터 50대까지 즐기는 ‘국민 게임’으로 남아 있다. 스타는 우리 문화 산업에서 게임이 ‘E(Electronic)-Sports’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원천이었다.
개인 방송 BJ부터 배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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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스타 프로게이머 박영민(왼쪽)씨는 교육 공무원으로, 조형근씨는 현대차 연구원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사진=조선DB 및 본인 제공 |
특히 개인 방송은 전직 프로게이머들이 많이 종사하고 있는 업종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현역 프로게이머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은퇴 후 갖고 싶은 직업으로 게임단 코치·감독(34.8%)에 이어 BJ(30.4%)가 두 번째로 꼽혔다. 개인 방송 업체인 ‘아프리카TV’에만 은퇴한 게이머 234명(작년 12월 19일 기준)이 소속돼 있다. 작년 기준, 아프리카TV에서 동시 접속자 수가 높은 상위 20개 방송 중 전직 게이머 방송만 13개(65%)에 달할 정도였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실제 수입도 짭짤하다고 한다. 개인 방송 게이머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 그들은 기존 명경기를 분석하거나 시청자들이 원하는 구도의 경기에 도전하고, 그 대가로 ‘별풍선’이라는 현금성 사이버 머니를 실시간·무한정으로 받는다. 인기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광고·협찬도 따라붙는다. 게이머는 인기 영상을 편집해서 재송출하고 조회 수에 따라 다시 부수입을 얻는다. 일부 게이머는 “(개인 방송을 하니까) 선수 때보다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할 수 있고, 오히려 수입이 더 나아진 편도 있다”고 했다. 최대 연 5억~6억원까지 버는 전직 게이머들도 있다고 한다.
“지인들, 公試 만류하고 ‘방송하자’고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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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민씨는 “지금까지 공부를 해서 1등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공무원 합격 소식이) 더 기뻤던 것 같다”며 “공무원도 게이머도 엉덩이를 오래 붙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본인 제공 |
“프로게이머들이 20대 중반 넘어가면 생각이 많아져요. 군대 갔다 오면 다시 선수 생활하기도 힘들고, 해봤자 1~2년밖에 못 할 텐데 그때가 인생에서는 중요한 시기잖아요. 게임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지만, 코치·감독은 ‘티오’(TO·정원)도 잘 안 나던 때였어요. 마침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고, 저도 생각해보니까 경력이나 베이스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공시(公試)더라고요. 시험 성적만 보니까요…. 물론 제가 처음 공부한다고 하니까 합격할 거라고 믿는 지인들이 10명 중 1명도 안 됐어요. 다들 저보고 ‘1인 인터넷 방송하자’고, 자기가 ‘매니저를 해줄 테니까 너는 게임만 하면 된다’고 많이 제안해왔는데 모두 거절했어요. 말을 잘하는 편도 아니고, (방송으로 성공하기까지) 준비하는 시간이 아까웠어요.”
그렇게 상경한 박씨는 스마트폰을 구식 폴더폰으로 바꾸고 지인들과 연락을 끊었다. 공시의 당락을 좌우하는 영어의 경우, 기초 지식이 부족해 문답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다. 손과 팔에 문신(文身)처럼 단어와 문장을 적고 아침밥 먹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달달 외웠다. 1년 반 동안 노력해 첫 번째 시험을 봤지만 고배를 마셨고, 이후 6개월은 군산으로 다시 내려가 집중했다. 의자에 오래 앉아 연습하던 프로게이머 때 습관이 공부에도 도움이 됐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3관왕은 물론, 성적도 높게 받아 합격했다.
박씨는 “지금까지 공부를 해서 1등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합격 소식이) 더 기뻤던 것 같다”며 “공무원도 게이머도 엉덩이를 오래 붙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인 것 같다”고 했다. 일선 학교에서 교육 공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3년 전 같은 공무원 출신의 배우자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올해부터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를 다니며 못다 한 학업도 이어가고 있다. 일확천금을 벌 수 있었던 게이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후회는 안 해봤을까.
“전혀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일에 20대를 불태웠고, 또래보다 금전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린 건 맞지만 그때만큼은 못 벌어도 정신적 여유가 있는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사실 노량진 가서 보면 허수(虛數)가 되게 많아요. 공부보다는 술 먹기 좋아하고 PC방·당구장 다니는 사람들 보면 안타까워요. 저는 이 안정된 생활을 위해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공부했거든요. 나이는 서른이 넘어가고 이게 아니면 길은 없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보면 또 게임 산업이 이쯤에서 ‘크게 도약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프로게이머가 10~20대 때만 잠깐 걸치는 직업이 아니라 꾸준히 가는 직업이 되고, (게이머 출신들이) 다른 쪽으로도 많이 진출할 수 있게 길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선수들 유입도 더 잘될 거고, ‘선수 생활 길지 않은데 뭐 먹고살 거냐’는 부모들의 걱정도 덜어질 겁니다.”
최근 한 전직 프로게이머의 과거 사생활 문제가 불거져 파문이 일었다. 도박 등 게이머들의 일탈 문제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게임을 마약처럼 죄악시하거나, 게이머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애’로 취급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실제 한 게이머는 “몇몇 프로게이머는 은행에 가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한다”고 했고, 또 다른 게이머는 “게임은 잘하는데 컴퓨터 연결이나 윈도 설치는 못 하는 프로게이머도 있다”고 했다.
스타가 전성기를 누릴 때만 해도, 프로게이머들은 사생활이 통제되는 엄격한 합숙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루 12시간씩 새벽 늦게까지 선수들끼리 맹연습을 했다. 주말이면 비밀연애를 하는 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또래들과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일부는 경제관념이 없어 큰돈을 벌어도 낭비가 심했다.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겠지만, 현재도 게이머들의 교육과 건강 및 사회화 문제는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인 것이다.
“영양실조 걸릴 정도로 ‘스타에 미쳤던’ 날들”
그런 점에서 “프로게이머 출퇴근제를 도입하자”는 전직 프로게이머 출신 조형근(35)씨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린다. 현재 현대자동차연구원 설계팀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조씨는 과거 스타 종족 중 ‘저그’ 선수로 활약, ‘디파일러(저그의 마법 유닛으로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붉은 안개가 주특기)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중학생 때부터 오락실을 들락거렸던 그는 부산 지역의 여러 PC방 대회를 섭렵, 고교 2학년 때 ‘Sky Life배 Game TV 신인왕전’ 본선 진출에 성공해 4위로 데뷔했다.
“대학은 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설득에 고3 시절 1년 동안은 공부에 집중, 부산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수능시험이 끝나니 머릿속은 스타뿐이었다. 대학 입학식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가 과거 몸담았던 팀에 합류했다. 조씨는 “그때 자기 관리는커녕 멋모르고 밤늦게까지 게임만 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렸다”며 “부산에 내려가 입원해서 건강을 회복하고 1학년까지 마쳤다. 그 뒤로 휴학계를 내고 내리 4년 동안 프로게이머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공군 게임단에서 복무하던 시절, ‘4대 천왕’이라 불리던 이윤열을 격파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합숙 훈련을 받던 때도 ‘군기 반장’ 선배들이 있어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씨는 “그때만 해도 프로게이머들이 합숙 생활을 하면 술·담배·여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뜨면 하루종일 게임하고, 쉴 때는 다른 팀 경기 방송 보면서 전술 공부를 했다”며 “정규시간을 소화하고도 마땅히 할 게 별로 없어서 각자 개인 연습을 더 했다. 자고, 먹고, 운동 조금 하는 시간 빼면 온종일 ‘스타’였다”고 했다.
게이머라는 직업 특성상 장시간 정자세로 게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목·허리 디스크가 오거나 안구건조증에 걸리는 동료들도 있었다. 조씨도 손목이 자주 저렸다. 그래도 자기계발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자는 시간을 쪼개 영어·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전역 후 은퇴를 선언한 그는 다시 부산대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5세 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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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씨는 “(게이머 출신답게) 컴퓨터 쓰는 데도 익숙하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차분하게 설계 작업을 하고 싶어서 현대차에 R&D(연구개발)로 취직을 했다”며 “입사 소식을 전하니까 ‘대단하다’ ‘언제 그렇게 공부했냐’고 놀라는 동료들이 꽤 있었다”고 했다. 사진=신승민 |
그렇다고 현역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간혹 고향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서 관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승전의 트로피를 들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곤 했다. 조씨는 “‘그때 참 좋았는데’ 하는 감상에 젖을 때도 있지만, 비교하자면 지금이 더 나은 것 같다”며 “내 전공을 살릴 수 있고, (인생을) 길게 보면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고, 자기계발도 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그는 은퇴 후 ‘E-Sports’와 관련된 책도 3권이나 펴냈다. 자료를 모으고 취재를 해서, 주말마다 조금씩 쓴 초고를 묶어놓고 서점에 갔다. 책의 맨 뒷장, 판권에 적힌 이메일로 일일이 투고했다. 자신의 경험을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저는 프로게이머들도 (합숙이 아닌) 출퇴근해야 한다고 봐요. 회사원이 출퇴근하듯이, 게이머들도 게임할 때는 게임하고 퇴근 후에는 어떤 생활을 할지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일과 시간 이후에는) 운동이나 연애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때론 술도 마시면서 다시 회사에 오면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처럼. 또 본인에게 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야근하면 되고요. 그래야 (게이머도) 능률이 더 늘지 않을까요?”
“게이머 지망생, 學業의 끈 놓지 마라”
조씨는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학업의 끈’을 놓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물론 정식 프로게이머가 된 이후부터는 게임에만 집중해 성과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문제는 공부를 아예 등한시하게 될 경우, 나중에 20~30대가 됐을 때 (진로 설정이) 힘들 수 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게임하러 올라온 연습생 중에, 기량이 안 늘어서 다시 짐 싸 들고 내려가는 친구들을 보면 (학업을 포기한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조씨는 프로게이머가 10~20대에게 ‘추천할 만한’ 직업이라고 했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체격 조건이 좋지 않아도 게임 실력만 뛰어나면, 젊은 나이에 큰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자녀가 그 길을 걷는다 해도 소질만 있다면 적극 지원해줄 거라고 했다. 그만큼 그는 프로게이머로 살았던 시절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직장인이 돼서도 제가 프로게이머였다는 사실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함께 ‘게임 한번해보자’고 하신 분들도 있었고요. 상대방이 저를 쉽게 기억해준다는 건 사회생활에서 큰 장점이죠…. 뭐든지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계획한 ‘인생 2막’이 있다면, 저처럼 일단 한번 부닥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게임을 하고 공부를 하고 책을 썼듯이, 지금 도전하는 것들이 다른 미래에 어떻게 연결될지는 누구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