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신민당 안국동·마포 당사

19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본산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신민당 안국동 당사는 출판사 이문당(以文堂) 건물로 출발,
    해방 직후에는 서울시 인민위원회·민전 등 좌익단체들이 사용
⊙ 신민당, 국유건물을 빌려 쓰면서도 임차료 안 내
⊙ 이철승, 1979년 마포에 당사 짓고 전당대회 하루 전날 준공식 했지만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에게 역전패
안국동 신민당 당사가 있던 북인사마당에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이곳은 민주화운동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서울 안국동사거리 풍문여자고등학교 맞은편 ‘북(北)인사마당’은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북쪽 초입이다. 관광안내소와 화단, 나무, 벤치 등이 있는 작은 공간이다. 관광안내소 앞에는 이곳이 조선시대 충훈부(忠勳府·공신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인사동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 터 표지석이 있다.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孫元一) 제독은 여기서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 창설식을 가졌다. 손 제독은 “해군은 모름지기 선비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선비 사(士)’ 자 두 개를 파자(破字)한 11월 11일을 해군의 창설일로 택했다.
 
  이곳이 해방 직후에는 격렬한 좌우대립의 현장이었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의 산실이던 신민당 당사(黨舍)가 있었던 곳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흔히 신민당 ‘안국동 당사’라고 하지만, 행정상 주소지는 관훈동 130번지였다.
 
  안국동 당사 건물은 일제(日帝) 치하이던 1943년, 당시 유명한 출판사였던 이문당(以文堂) 사옥으로 지어졌다. 3층(1967년 건물을 증축해서 4층이 됨)짜리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종로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했던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박길룡이었다.
 
  1945년 해방 후 좌익세력은 재빨리 이 건물을 점거했다. 서울시 인민위원회가 이 건물을 사용했다. 1948년 1월 18일 전국반탁학생총연맹(반탁학련)소속 학생들은 정동교회에서 신탁통치 성토대회를 마치고 나서 을지로입구에 있던 인민보(人民報)사, 옛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인민당 당사 등을 때려 부순 후, 이문당 건물에 있던 서울시 인민위원회도 습격했다. 당시 반탁학련의 지도자 이철승(李哲承)은 후일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다시 이 건물과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1946년 9월 철도총파업 진압에 참여했던 우익청년단체 대한독립청년단(단장 서상천)은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0월 12일 이문당 건물을 습격,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등 좌익단체들을 몰아냈다. 대신 대한독립청년단,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위원장 이철승), 그리고 좌익신문이었다가 대한독립청년단이 접수한 《현대일보》 등이 입주했다. ‘좌익의 소굴’이 우익단체들의 본산이 된 것이다. 자유당 시절에는 프란체스카 여사 소유로 알려졌던 세계통신사가, 4·19 후에는 반공연맹본부가 이 건물을 사용했다.
 
 
  정부 소유 건물을 야당이 임차(賃借)
 
  이 건물이 박정희 정권 시절 야당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은 윤보선(尹潽善) 총재가 이끌던 민정당(民政黨)이 1965년 4월 5일 입주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 건물은 국유재산이었다. 세상의 눈이 고울 리 없었다. 그보다 석 달 전인 1월 9일 자 《경향신문》은 당시 민정당의 대여(對與) 태도가 누그러진 것을 두고 〈일설에는 민정당의 이런 태도 돌변은 안국동 소재 전 반공회관으로 당사를 옮기려는 모종 반대급부를 노린 것이라는 뒷소문도 떠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정당은 안국동 당사로 들어간 후인 그해 5월 3일 박순천 여사가 이끌던 민주당과 통합, 민중당을 창당했다. 통합야당이던 민중당은 오래가지 않았다. 1966년 8월 한일협정 비준, 월남파병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윤보선씨 등이 탈당, 이듬해 3월 30일 신한당을 창당했다.
 
  1966년 6월 신한당은 민중당이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6월 16일 김대중(金大中) 민중당 대변인은 “신한당이 과거의 정치자금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발언한다면, 윤보선씨가 영도하던 민정당이 장 기획원 장관의 알선으로 안국동 당사를 취득한 것은 무엇으로 해명할 것인가”라고 반박했다.
 
  안국동 당사는 형식적으로는 정부로부터 임차한 건물이었지만, 야당은 계약금 외에는 임차료를 내지 않았다. 건물을 관리하는 총무처는 1년에 네 번씩 납부통지서를 보냈다. 1년에 한 번씩은 최고장(催告狀)도 보냈다. 하지만 실제로 임대료를 제대로 받아내려 애를 쓰지는 않았다. 가끔 독촉이 심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신민당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심의회 의장 등 당3역이 총무처를 찾아가 ‘선처’를 부탁했다. 아마 당시 정권은 그런 식으로 야당을 길들이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에 어떤 신민당 국회의원은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총무처 장관에게 “왜 안국동 건물에 대한 임대료를 제대로 받아내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다가 동료 신민당 의원으로부터 “그건 우리 당사 건물”이라는 귀띔을 받고 머쓱해하기도 했다. 1979년 마포로 이전할 때까지 신민당이 내지 않은 임차료는 2400만원이 넘었다.
 
 
  민주화운동의 산실, 당권투쟁의 현장
 
1968년 6월 8일 제7대 총선 후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는 등 안국동 신민당사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갈라졌던 민중당과 신한당은 1967년 2월 7일 신민당으로 다시 합쳤다. 2월 13일 통합야당은 안국동 민중당 당사에 ‘신민당’ 간판을 내걸었다. 이후 ‘안국동 신민당사’는 파란의 현장이 됐다. 1969년 3선개헌 반대투쟁의 본부 역할을 한 것도 안국동 신민당사였다. 기자와 함께 현장을 둘러본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은 “재야 운동권이나 시민단체가 없던 1960년대 후반 안국동 신민당사는 민주화운동의 유일한 진지였고,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했다. 박 전 의장은 “해방병단 결단식 표지석 옆에 이곳이 옛날 신민당 당사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국동 당사는 부끄러운 당권 투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1971년 5월 6일에는 유진산 당시 총재가 제8대 총선을 앞두고 영등포갑(甲)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한 데 항의하는 청년당원들이 난입, 유 총재의 사진을 불태우고 집기를 때려 부수는 소동을 벌였다(진산파동). 1976년 5월 25일 전당대회 후에는 신도환(辛道煥) 의원이 보낸 ‘각목부대’가 당사로 들이닥치기도 했다. 김수한(金守漢) 전 국회의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김영삼(YS) 총재, 이충환 의원과 함께 3층 총재실에 있다가 회의실 옆의 작은 문을 박차고 나왔더니 음식점 지붕 위였다. YS가 지붕 위를 달리는데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 나도 정신없이 달렸는데, 하마터면 슬레이트 지붕이 무너져 내릴 뻔했다. 아래에는 국밥집의 펄펄 끓는 솥단지가 있었다.”
 
 
  마포당사 부지, 서울시가 제공
 
  그렇게 해서 이철승 의원 등 비주류(非主流) 연합세력이 당권을 장악했다. 이듬해인 1977년 봄 안국동 신민당 당사가 도시계획에 따라 헐리게 되었다. 신민당은 당사 이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아마 마포당사 이전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좀 도와주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포당사 이전 과정을 보면, 곳곳에 박정희 정권이 도와준 정황들이 보인다. 정부로부터 빌린 건물에서 지내면서 임차료도 못 내던 야당이 자기 돈으로 땅을 사서 건물을 올린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민당은 서울시에 공문을 보내 도심지 가로(街路)변에 800평의 땅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국동 당사의 대지는 82평, 연건평은 309평이었다. 당시 신문에 난 서울시 간부의 말처럼 “이 같은 일은 서울시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논의 끝에 서울시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가까운 마포구 도화동 대로변(도화동 175-1)에 619평의 땅을 제공하고, 신민당은 매달 100만원의 대지 사용료를 내기로 했다. 야당 당사를 짓겠다고 나서는 건설사가 없자, 건설부가 주선해서 신동양건설이라는 회사를 찾아 주었다. 1978년 6월 21일 당사 기공식에는 구자춘(具滋春) 당시 서울시장도 참석했다.
 
  1979년 당사 완공이 가까워지면서 신민당은 건설사에 지불할 공사대금 문제로 다시 골머리를 앓았다.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이 ‘관계 요로’와 접촉, 당사 건물을 담보로 1억7000만원을 제일은행으로부터 융자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보면 박정희 정권과 이철승 체제의 밀월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마포당사의 준공식은 1979년 5월 29일에 열렸다. 신민당 전당대회 하루 전이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 (건평 649평 대지 908평)의 새 당사 준공식에서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은 “남의 집 살림을 살다가 내 집을 마련하게 되니 감개무량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당대회 하루 전에 준공식을 한 것은 아마 ‘내집 마련’의 업적을 전당대회에서 한껏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보통 시민회관 등 외부에서 하던 전당대회를 당사 강당에서 열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5·30 전당대회의 드라마
 
1979년 5·30 전당대회 당시 김영삼 의원은 이기택 의원에게 마포 당사 밖에 모인 시민, 당원들을 바라보면서 “저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전당대회 결과는 그의 뜻과는 다르게 나왔다. 1차 투표서는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이 292표를 얻어 267표를 얻은 김영삼 전 총재를 앞섰다. 하지만 2차 투표에서는 김 전 총재가 378표를 획득, 367표를 얻은 이 대표최고위원을 눌렀다. 1차 투표에서 92표를 얻어 3위를 차지했던 이기택 의원이 2차 투표에서 김영삼 전 총재의 손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결선투표를 앞두고 YS와 이철승씨 모두 이기택 의원에게 구애를 해 왔다. 그런데 이기택 의원은 이철승씨 측이 보낸 송원영 의원은 만나 주면서도, YS가 보낸 사람은 만나 주지도 않았다. 나는 ‘아, 이기택이 정권의 압력에 굴해서 이철승씨에게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당시 국세청에서는 이기택 의원의 자형이 운영하는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하고 있었다. 이 의원의 부친은 ‘사위도 자식’이라면서 이 의원에게 이철승 지지를 설득했다.
 
  나는 이기택 의원을 머리로 들이받으면서 ‘저 창밖에 국민의 함성이 들리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의원은 나를 꽉 끌어안더니 귀에 대고 ‘가만히 좀 있어 봐! 가만히 좀 있어 봐!’라고 말했다. 순간 ‘내가 뭔가 잘못 판단했나’ 싶었다. 멍해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환성이 들렸다. 이기택 의원이 YS의 손을 잡고 단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김영삼 전 총재는 1차 투표를 마친 후 이기택 의원을 창가로 데리고 가서 “저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자”고 설득했다. 이기택 전 의원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때 당사 마당과 거리에는 시민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그들이 ‘김영삼! 김영삼!’을 외치는 소리가 당사 안에까지 들려왔다. 그 함성 소리가 대의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시민회관 같은 곳에서 전당대회를 했으면, 그 열기가 안으로 전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은 자기가 세운 당사에서 전당대회를 열자고 고집했다가 자기가 당한 셈이다.”
 
  이철승 의원은 전당대회가 끝난 후 “내가 당선됐으면 새 당사가 성치 못했을 것”이라면서 “‘밥하는 놈 따로, 밥 먹는 놈 따로’가 됐다”며 씁쓸해했다(《동아일보》 1979년 5월 31일).
 
  그렇다고 김영삼 총재가 편하게 ‘밥 먹는 놈’이 된 것은 아니었다. 신민당은 은행에서 빌린 돈의 이자 410만원, 서울시에 내야 하는 대지사용료 100만원을 조달하지 못해 허덕였다. 건설사인 신동양건설도 건설비용 잔금을 빨리 갚으라고 재촉하다가 소송을 냈다. 김영삼 총재는 “나와 신민당을 골탕먹이려는 장난”이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YH사건
 
1979년 8월 9일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는 YH무역 여공들은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신민당 당사가 마포로 이전하게 되자, 안국동 당사를 관할하던 종로경찰서 경찰관들은 “마포경찰서가 이제 좀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는 가십기사가 났다. 이 말은 김영삼 총재의 당선으로 현실이 됐다.
 
  1979년 8월 9일 직장폐쇄에 항의하는 YH무역 여공 170여 명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신민당사로 들어가라고 권한 사람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 얼마 전까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삼 총재는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 주겠으니 걱정 말라”며 여공들을 다독였다. 김영삼 총재 등 신민당 의원과 당직자들이 여공들의 농성장을 지켰다.
 
  하지만 경찰은 8월 11일 새벽 병력을 투입, 여공들의 농성을 해산시켰다. 김영삼 총재는 작전을 지휘하던 마포경찰서장에게 “너거들이 저 여공들을 다 죽이려 카나?”라며 뺨을 갈겼다. 김 총재는 황용하 마포경찰서 정보1과장도 멱살을 잡고 발로 걷어찼다. 황용하씨는 후일 김영삼 정권하에서 경찰청장이 되었다. 경찰 진입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씨가 건물에서 떨어졌다. 그는 인근 한마음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결국 사망했다.
 
  YH사건 이후 정국은 파국을 향해 질주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국회에서 제명당했고, 이어 부마사태와 10·26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서울의 봄’이 왔다. 마포 신민당사도 모처럼 북적였다. 김영삼 총재는 집권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봄은 짧았다. 5·17조치로 국회는 문을 닫았고, 김영삼 총재는 상도동 자택에 연금됐다. 신민당도 해산됐다.
 
 
  적십자혈액원 거쳐 오피스텔 빌딩으로
 
SK허브빌딩 앞 보도에는 이곳이 YH사건의 현장임을 알리는 동판이 박혀 있다.
  1981년 6월 신민당 청산위원회(위원장 이민우)는 4억9000만원을 받고 마포당사 건물을 서울시에 팔았다. 매각대금은 그동안 밀린 마포당사의 부지사용료, 공사 잔금, 안국동 구 신민당사 임차료 등으로 사용되었다. 서울시는 이 건물을 대한적십자사 중앙혈액원에 임대했다. 2005년 이 자리에는 오피스텔 빌딩인 SK허브그린이 들어섰다. YH여공 김경숙씨가 실려 갔던 인근 한마음병원 자리에는 2015년 신라스테이마포가 들어섰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SK허브그린 빌딩 앞에 서서 “주위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며 그곳이 옛 신민당사 자리가 맞는지 선뜻 자신하지 못했다. 건물 경비원이 박 전 의장을 알아보고 나와서 인사를 했다. 박 전 의장이 “여기가 옛날 신민당사 자리가 맞느냐”고 물었다. 서울 토박이라는 경비원은 건물 정문 앞 인도 바닥을 가리켰다. 서울시에서 만든 삼각형 동판이 있었다.
 
  〈신민당사 터. 1979.8.11. 야당 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 진압 과정에서 사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동판 오른쪽 위에는 ‘인권서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옛 신민당사 자리라는 것보다는 YH여공 김경숙씨가 사망한 곳이라는 데 방점을 둔 표지판이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