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10월 2일~46년 8월 17일까지의 급박했던 해방 직후 문화예술계 모습 담아
⊙ 일제가 금지한 영화 대거 해금… 〈해방뉴스〉 통해 李承晩·金九의 귀국 전해
⊙ 일제시대 영화, 이름만 바꿔 개봉… 불법 수입한 외화도 버젓이 상영
⊙ 1945년 12월 말 서울에 문을 연 극장은 19곳, 부산 9곳, 평양 7곳, 대구 5곳
⊙ 일제가 금지한 영화 대거 해금… 〈해방뉴스〉 통해 李承晩·金九의 귀국 전해
⊙ 일제시대 영화, 이름만 바꿔 개봉… 불법 수입한 외화도 버젓이 상영
⊙ 1945년 12월 말 서울에 문을 연 극장은 19곳, 부산 9곳, 평양 7곳, 대구 5곳

- 《일간 예술통신》 1946년 7월 22일자 1면. 프린트 판형으로 손바닥만 하게 제작됐다.
《월간조선》은 《일간 예술통신(日刊 藝術通信)》의 해방 직후 1년간 기사를 발굴, 8월호와 9월호에 걸쳐 소개한다. 1945년 10월 2일 프린트 판형으로 창간한 《예술통신》은 해방공간 영화와 예술계 소식만을 언론사에 제공해 온 매체다. 1947년 3월 2일 412호까지 발행하다 3월 11일부터 제호(題號)를 《문화일보》로 바꾸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예술통신사는 서울시 중구 황금정(黃金町) 2정목(丁目·現 을지로 2가)에 있었고 편집·발행·인쇄인은 주정돈(朱正暾), 사장은 김정혁(金正革)이었다. 김정혁은 광복 직후 조선영화건설본부 서기장을 맡았던 인물로 6·25 당시 실종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까지 확인된 《예술통신》 기사는 1946년 11월 5일에서 1947년 3월 2일까지뿐이어서 해방 직후 미(美) 군정기(軍政期) 동안 문화예술계 전반의 변화와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金鍾旭)씨가 그보다 앞선 1945년 10월 2일자부터 1946년 11월 4일자까지를 새로이 추가로 공개, 본지에 제공하면서 당시의 구체적 실상이 드러나게 됐다.《예술통신》의 1호 기사는 해방 당시의 흥분과 감동을 담은 〈해방뉴스〉에 관한 내용이었다. 〈해방뉴스〉는 1945년 9월 24일 결성한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직속 영화제작 기구 조선영화사가 만든 뉴스 다큐멘터리다. 그해 10월 21일 경성극장, 낭화관, 명치좌에서 최초로 공개했다. 〈해방뉴스〉에 담은 내용 4가지는 8월 16일 서울의 감격, 사상범 석방, 건국준비위원회 발회(發會) 광경,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인의 당황하는 모습 등이었다.
상영금지 영화 解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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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초기 《일간 예술통신》은 인쇄물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쓴 기사를 발행했다. 1945년 11월 6일자 1면. |
당시 극장가는 그야말로 ‘해방구’였다. 해금 영화 6편은 〈7처녀(이태리 작품)〉 〈여자만의 도시(이태리 작품)〉 〈몬테질의 상속자(이태리 작품)〉 〈심청(조선영화)〉 〈대장 부리바 신판(불란서 작품)〉 〈소년 슈바리에 감격(불란서 작품)〉 등이었다. 그해 10월 17일 기사에는 무려 41개의 작품이 풀렸다고 전하는데 오락물에서 호러·액션·멜로까지 장르가 다양했다. 미 군정청(軍政廳)에 의한 ‘영화 사전 검열제도’가 완전 폐지되고 ‘자유상영’(1946년 2월 16일자)이 이뤄진 것도 이즈음이다.
1945년 11월 29일자 기사는 ‘조선 영화의 원적(怨敵)’이라 불리던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郞)가 ‘수인(囚人) 모양으로 13호라는 송환 일본인 패(牌)’를 달고 송환됐음을 전한다. 다나카는 일제시대 조선영화령(1940년 1월)에 입각해 영화를 통제한 장본인이다. 또 12월 7일자는 ‘조선영화사의 전직 일본인 상무 나카타 하루야스(中田晴康) 집에 도둑이 들었다’며 ‘오늘까지 그 같은 돈을 여유있게 갖고 있었다든가, 누가 생활을 유지시켰는가 매우 수상한 일’이라고 비꼰다. 이는 당대 영화를 주도했던 세력의 급속한 전환을 상징한다.
《예술통신》은 12월 12일부터 28일까지 ‘전국 극장표’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전국에 산재한 영화관과 주소를 일목요연하게 조사,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19곳, 부산 9곳, 평양 7곳, 대구 5곳의 영화관이 성업 중이었다. 기사에는 ‘해방 이후 본사 조사실에서 전국의 극장과 동 소재지를 각계로 수집 중이던바, 작금 이 조사가 완료돼 도 단위로 연재 발표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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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 예술통신》 1945년 11월 6일자 3면. 기사 제목은 ‘일본인이 명명했던 대륙극장은 그립던 단성사로 광복 개명’이다. |
적산(敵産) 처리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북한은 일본인 소유 극장을 모두 국가가 귀속시켜 버렸지만 미군정이 들어선 남한은 ‘입찰’로 개인이 소유토록 했다. 1946년 3월 22일자 기사는 당시 일본인 소유의 서울 시내 극장 10곳이 입찰에 들어간다고 전한다. 10개 극장은 명치좌(새 극장명 : 국제극장), 약초극장(수도극장), 조일좌(장안극장), 제일극장, 신부좌(한성극장), 성남극장, 대륙극장(단성사), 도화극장, 우미관(관철정), 영보극장 등이다.
한편 일제가 물러가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작품 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새 영화를 만들 자본이 없었고 마땅한 수입 배급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일제시대 상영됐던 제국주의 영화가 버젓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1946년 2월 23일자 기사를 보면 ‘어두운 창고 속에서 서생원과 벗하던 구작(舊作) 조선영화가 속속 등장되고 있다’고 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46년 3월 5일자는 ‘〈군용열차〉 〈지원병〉 등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영화가 백주에 개제(開題) 혹은 개편 등의 탈을 쓰고 비양심적 상인의 손을 거쳐 상영됐다’고 전한다. 심지어 일본과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불법 수입영화가 버젓이 상영되기도 했다.(46년 3월 19일자)
해방공간 영화계는 그야말로 아노미 상태였다. 한쪽에서는 식민지 청산의 감격을 전하는 〈해방뉴스〉가 제작되고 상영금지 영화가 풀렸으나 미 군정기 문화예술계는 다양한 이슈들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런 혼란을 반기는 것은 좌익계열 영화·예술인이었다.
《월간조선》은 1945년 10월 2일부터 이듬해 3월 9일까지 타전된 기사를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창간사-예술통신의 使命
일본의 제국주의적 압박의 질곡(桎梏)하에 있던 조선의 예술문화는 8월 15일의 동안에 이르면서 우리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의 예술문화 위에 찍혔던 제국주의 지배의 흔적은 일조에 소멸(消滅)되는 것이 아니다. 긴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혹은 국수봉건주의(國粹封建主義)로서, 혹은 경박한 취화주의(吹化主義)로서, 혹은 구하기 어려운 분파주의(分派主義)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이 흔적은 재출산된다. 예술문화에 있어서도 보다 더 완전한 해방을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투쟁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는 인민대중 속 깊이 예술의 기초를 수립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술통신》은 이러한 임무의 일단을 지고 탄생하였다. (1945. 10. 2)
해방기록영화 뉴스 제 1~3집의 내용
8월 16일 이래 조선영화건설본부가 편집하여 온 뉴스는 벌써 3집까지 완성되어 공개할 시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 역사적 기록이야말로 각계각층의 기대가 자못 클 것인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집
1) ‘8월 16일 서울의 감격’.
2) ‘재감(在監) 사상범 석방’.
3) ‘건국준비위원회 발회 광경’.
4) ‘일본인의 당황상’. (1945. 10. 2)
미국신문기자단 조선영화 ‘심청’을 감상
조선에 진주한 미 종군기자단 일행은 지난 26일(9월 26일) 오후 1시 조선영화사에 찾아와서 조선영화 ‘심청’의 시사를 감상하였는데 시사가 끝난 다음 동 기자단 대표 ‘리-든’ 대위는 “기술여하는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이야말로 조선의 참다운 미를 발견하였다. 특히 중요한 테마라고 생각되는 가련한 부모에게의 효도는 감격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찬사를 보내고 동석한 주연 배우 김소영(金素英)씨에게 사인을 청하는 등 화창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1945. 10. 2)
美軍 제1차 검열에 과거 상영금지됐던 미공개 작품 등 朝映 제출 6작품 전부 통과
기보(旣報)한 바와 같이 미군 CIC에서는 조선영화가 재고한 필름을 검열 중이었는데 작(昨) 2일(10월 2일)까지 동사가 제1차로 전형 제출한 다음의 6작품은 전부 무사히 검열에 패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는 그전 일본 검열이 통과시키지 않았던 이태리 작품 ‘일곱 처녀’도 있어서 이 미봉절 수난의 작품도 드디어 모든 문화의 해방과 함께 어두운 창고 속에서 광명의 빛을 받게 되었다.
‘7처녀(이태리 작품)’ ‘여자만의 도시(이태리 작품)’ ‘몬테질의 상속자(이태리 작품)’ ‘심청(조선영화)’ ‘대장 부리바 신판(불란서 작품)’ ‘소년 슈바리에 감격(불란서 작품)’. (194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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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성사는 1907년 만든 한국 최초의 영화 극장이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개봉한 극장이기도 하다. 일제 말엽 대륙극장으로 개칭했다가 광복 후 단성사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
이미 신문지상 등으로 보도된 미군 당국이 조선영화건설본부에 허여(許與)한 뉴스급 극영화 제작권에 대한 지령서의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24병단(兵團) 군정청 정보과
1945년 9월 24일
영화 관계인들에게. 군정 당국은 윤백남씨를 위원장으로 한 조선영화회사의 조선 각 도시와 각 지방에서 뉴스 필름과 활동 사진을 촬영할 특권을 허여한다. 이 회사가 제작하고 현상한 필름은 일반에게 공개하기 전에 필히 24병단 군정청 정보과 조선관계 보도부의 시사검열을 받아야 한다. 이 회사가 제작한 필름 중에 검열증이 없는 필름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시에는 이를 압수한다.
데이비드. 비. 듀크 (서명). (1945. 10. 5)
明治座는 미군 위안극장으로
殘存 경영자는 전 관주 일본인
서울 시내 각 극장은 여러 가지로 옥신각신의 트러블을 가지면서도 바야흐로 새로운 서광이 비치는 듯하나 그중 가장 크다고 할 만한 명치좌(明治座)는 그전 경영자 석교양개(石橋良介)의 명의 그대로 방금도 독일 우파 필름 ‘공중극장’을 상영 중인바 이는 미 군단 위안극장의 형식을 취하여 위층 전부를 미군에게, 아래층만을 일반 입장자를 수용한다고 한다. (1945. 10. 13)
若草町劇場, ‘수도극장’이라고 改稱
서울 시내 약초정(若草町)에 있는 약초극장은 전선 각 극장의 일본적인 이름의 개칭 선구를 써서 ‘수도극장’이라고 개칭하였다고. (1945. 10. 15)
1941년 이래 조선에서 상영금지된 외화조사 수난받은 41본
‘여천국(女天國)’(2권), ‘군사(軍使)’(12권), ‘파데의 G맨’(1권), ‘13일의 금요일’(9권), ‘껑충 춤’(1권), ‘간첩 최후의 날’(9권), ‘구원의 맹서’(8권), ‘페디의 학예회’(1권), ‘마돌도(魔突島) 멸망기’(9권), ‘밑창’(8권), ‘은(銀)의 구두’(9권), ‘5백년 후의 세계’(10권), ‘스타의 대향연’(11권), ‘제로니모’(10권), ‘춤추는 아와- 깽’(2권), ‘처녀의 비밀’(9권), ‘엉터리 오페라’(10권), ‘세계대동란’(10권), ‘어떤 날 밤의 이야기’(10권), ‘스윙 밀리온 쇼’(3권), ‘암흑의 복수’(7권), ‘나비 부인의 환상’(3권), ‘칼샤의 전령(傳令)’(10권), ‘승리자’(9권), ‘올림피아 민족의 제전’(7권), ‘황혼의 윈’(10권), ‘자태없는 살인’, ‘빛의 환상’(10권), ‘쟌바’(7권), ‘미소하던 인생’(10권), ‘폴카 쇼’(9권). (1945. 10. 17)
朝映의 해방뉴스, 민족의 거인 李承晩 박사의 제일성을 동시녹음 촬영.
특보로 20일에 공개할 터!
33년 만에 돌아오신 우리들의 선배 이승만 박사는 드디어 지난 16일(10월 16일) 김포 비행장에 도착하시어 이튿날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재경 신문기자단을 인견하시고 다시 그날 저녁 JODK의 마이크를 통하여 그리운 3000만 동포에게 제일성(第一聲)을 보내시었거니와 이 방송이 끝난 뒤 즉시 박사는 조선영화건설본부의 ‘해방뉴스’ 촬영반 카메라 앞에 서시어서 뉴스 영화를 통한 동포들에게의 첫 말씀을 하시었다.
즉, 박사는 방송이 끝나자 별실에서 얘기하고 있던 뉴스반 카메라 앞에 백발이 성성하신 노구를 옮기시었는데 토색 홈즈 팡 양복에 보랏빛 넥타이를 매신 청년혁명가 우리의 박사는 2만 촉광의 하얀 한 카메라 앞에 서시어 시종 얼굴에 미소를 담으신 채 정중하신 제일성을 발(發)하시었다. 이리하여 400여 척 약 5분 동안의 말씀이 촬영과 함께 녹음되었다. (1945. 10. 19)
문화해방 一日一題
제 손으로 못한 해방의 비애는 정치적 혼란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부면에 있어서도 벌써 나타나고 있다.
만약 이 해방을 우리 손으로 우리가 총칼을 잡고 일어나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했다면 우리는 그 영웅적 용기와 정열을 우리 문화부면에 그대로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기도 정열도 준비하지 못하고 움에 받은 떡이라 그저 말하지 못하고 쓰지 못하던 조선 말, 조선 글을 쓰게 된 것만으로도 해방인 줄 안다면 우리 정신은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지 못한 노예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우리 손으로 일본을 타도하지 못한 그 수치를 우리 건설의 면에서나 씻어버리고 우리 민족의 영예를 회복하자! 용기와 정열 이것은 정치 아닌 우리 문화에서도 절대 필요한 혁명적 요소인 것이다. 이원조(李源朝). (1945. 11. 7)
미국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安島山씨 令息 ‘필립 安’의 소식
작보(昨報)에 미국 영화와의 무역 문제를 얘기하여 주신 재미(在美) 한국인 국민회집행위원장 김호(金乎)씨가 전하는 말씀에 의하면 기보한 도산 안창호씨의 영식 ‘필립 안’은 역시 헐리웃에서 영화배우로서 상당한 지위를 갖고 활동하고 있는데 언간엔 대동아 전쟁에 출정하여 미국 모 요새지에서 근무하다가 최근에 다시 제대되어 헐리웃에 돌아와 있어 시방 차회(次回) 작품에 착수하고 있더라고 한다. (1945.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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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 예술통신》 1945년 11월 27일자는 임시정부 주석 金九의 還國을 〈해방뉴스〉가 촬영했음을 전하고 있다. |
일작일(一昨日) 3000만 동포의 열광 속에 환국하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삼천만 동포에게 고한다’라는 역사적인 메시지를 조선영화본부 ‘해방뉴스’ 시보반이 작 26일 오후 2시부터 숙소 서울 죽첨정 최창학씨 댁 정원에서 동시녹음 촬영하였다. 이 시보는 즉시 프린트 작성에 옮겨 일양일(一兩日) 내로 일반 공개하리라고 하여 기대가 크다. (194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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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 예술통신》 1945년 11월 20일자. 당시 서울시내 극장에서 공연 혹은 상영 중인 창극과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
그 가슴에 채워진 업보의 牌-송환 日人 제13호
사단법인 조선영화사의 사장으로(상공회의소 副會頭이기도 했고) 일찍이 10개 단체의 조선영화제작사를 강압으로 깨뜨려 먹고 일본인이란 특권(?) 이외에 아무런 양심 없는 조선영화인 공동의 적(敵) 전중삼랑(田中三郞)은 작일 오후 용산역 두(頭)에서 퇴국(退國)의 일본인 열차에 올라탔는데 그는 전기(前記) 조선영화사 창립 당시부터 8월 말에 벌써 창황히 도망친 강전순일(岡田順一)과 함께 156명의 우리 조선영화인에게 결의행사의 멸시(滅視)! 급료차별 등 갖은 착취를 다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그의 꼴은 전일(前日)의 세도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던가. 검은 소프트를 눈시울까지 내리 쓰고 가슴엔 유배당하는 수인(囚人) 모양으로 제13호라는 송환 일본인 번호 패(牌)도 오히려 측은스러운 정상이었다고. (1945. 11. 29)
前 朝映(製作) 상무 中田晴康의 집에 3인조 강도단이 침입
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상무 취체역 중전청강(中田晴康)의 집(岡崎町)에 일작(一昨) 4일 야(夜) 3인조 강도가 침입하여 그 아애와 하녀를 결박 짓고 현금 6000원과 의류 등을 강탈 도주하였다고-. 그런데 중전은 전기(前記) 회사의 창립 초에 일본에서 부임한 자인데 그 회사가 사단법인 조선영화사에 매수(買收)되자 해임당하고도 “이제 조선총독부가 다시 머리 숙이고 내게 부탁해 올 때가 온다!”라고 호언하며 2~3일간을 그냥 무직으로 버틴 자인데 8·15 이후에도 무슨 영문인지 떠나지 않고 있다가 그 같은 봉변을 받았다. 특히 조영(朝映) 재직 당시 몇 사람의 소위 요시찰 사원에게 “너희는 특히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요샌 전시 총동원법에 걸릴 테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위협하기 일쑤였던 일은 아는 사람 치고 기억에 새로운 일인데 그가 또한 무직으로 3년간 있으면서 오늘까지 그 같은 돈을 여유있게 갖고 있었다든가, 누가 생활을 유지시켰는가 매우 수상된 일이라고. (1945. 12. 7)
해방 전 1940년대 한국영화는 친일(親日) 일색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병력 동원을 강요하는 작품이 한국인과 일본인 감독 손에 만들어졌다. 일제가 징병제를 도입한 것은 1942년 5월부터다. 징병제 이후 제작된 영화 가운데 필름이 현존하는 작품은 〈조선해협〉(1943), 〈망루의 결사대〉(1943), 〈젊은 자태〉(1944), 〈병정님〉(1944), 〈사랑과 맹세〉(1945) 등이다.(《친일영화의 해부학》 참조) 이 가운데 감독 최인규(崔寅奎)가 연출한 〈사랑의 맹세〉는 어린이를 등장시켜 만든 친일영화다. 조선총독부가 감수한 이 영화는 해군 지원병을 모으기 위해 일본 해군보도부가 기획했다고 한다. 작곡가 황문평(黃文平·1920~2004)의 회고록에 따르면 해방 직전 청계천 북쪽에는 한국인, 청계천 남쪽에는 일본인이 대체적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45만~6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20곳 남짓한 극장 대부분이 일본인 거주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종로4가에 제일극장, 종로3가에 단성사, 관철동에 우미관, 서대문에 동양극장(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은 한국인이 자주 찾던 극장이었다. 대개의 상영관이 친일극으로 흐르고 외화마저 금지되자 극장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그러자 영화 대신 연극과 악극 같은 무대극을 공연하는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극장 전속 연극·악극단이 생겼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해방이 되자 서울 시내에도 영화인, 연극인들의 좌익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황문평씨는 “1945년 말경 일본인들의 소유이던 서울 시내 각 극장의 관리인들 1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한성극장협회’를 결성했다. 회장에 홍찬(수도극장, 스카라극장 주인), 부회장에 김상진(중앙극장 주인), 김동렬(성보극장 주인), 그리고 이사 4명이 선출되어 미군정 당국의 행정적인 협조를 얻어 공산분자들의 극장 장악을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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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건립된 명치좌(明治座)는 해방 이후 국제극장으로 간판을 바꿨다. 지난 2009년 연극 전문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
전국 劇場表 - 1945년 12월 현재. 예술통신 조사실 集成 - 其1
해방 이후 본사 조사실에서는 전국의 극장과 동 소재지를 각계로 수집 중이던바, 작금 이 조사가 완료되었으므로 예술관계를 각위의 편리를 돕고자 도 단위로 아래와 같이 연재 발표합니다.
△경기도 부
명치좌- 서울시 명치정(明治町) 1정목(丁目) 54, 보총극장(寶塚劇場)- 서울시 황금정(黃金町) 4정목 31, 서울소극장- 본정(本町) 3정목 94, 낭화관(浪花館)- 명치정 1정목 65, 조일좌(朝日座)- 본정 5정목 36, 경일(京日)문화극장- 본정 2정목 25, 단성사(團成社)- 수은정 56, 성남(城南)극장- 연병정 83, 우미관(優美館)- 관철정 89, 도화(桃花)극장- 도화정 1정목 5, □□□- □□정(町) 3-2(판독불가-편집자 주), 화신(和信)영화관- 종로 2정목 3, 광무(光武)극장- 상왕십리 78, 영보(永寶)극장- 영등포정 37, 중앙(中央)극장- 영락정 1정목 48, 수도(首都)극장- 약초정 41, 제일(第一)극장- 종로 4정목 1, 동양(東洋)극장- 죽첨정 1정목 62, 국경좌(國慶座)- 봉정(蓬町) 25. (1945. 12. 12)
전국 劇場表 - 其2
표관(瓢館)- 인천부 신정 18, 동방극장(東邦劇場)- 인천부 신정 19, 인천 영화극장- 인천부 용강정 22, 애관(愛館)- 인천부 경정 238, 부평극장- 인천부 소화정 229, 개성좌- 개성부 서본정 247, 수원극장- 수원읍 궁정 128, 애원(愛園)극장- 안성읍 석정리 3-2, 진흥관(振興館)- 소사읍 심곡리 675.
△황해도 부
해주극장- 해주부 북본정 58, 공락관(共樂館)- 사리원 북리 5, 연안(延安)극장- 연안읍 횡정리 92, 수좌(壽座)- 신천읍 교화리 195-1. (1945. 12. 13)
전국 劇場表 - 其3
태평관(太平館)- 안악읍 훈련리 178, 겸이포좌(兼二浦座)- 겸이포읍 본정 15, 해룡(海龍)극장- 해주부 중정 124, 옹진(甕津)극장- 옹진군 옹진읍.
△강원도 부
춘천극장- 춘천읍 본정 2정목 65, 고저(庫底)극장- 고저읍 하고저리(下庫底里) 79, 철원극장- 철원읍 관전리(官田里) 79, 강릉극장- 강릉읍 본정 12, 장전(長箭)극장- 장전읍 202, 북평(北坪)극장- 삼척군 북삼면 송정리, 삼척극장- 삼척읍 남양리 94, 환전(丸田)극장- 강릉군 묵읍(墨邑) 19, 원주극장- 원주읍 욱정 37, 주문진회관- 강릉군 주문진읍 367. (1945. 12. 14)
전국 劇場表 - 其4
△경상남도 부
부산영화극장- 부산부 소화통 1정목 18, 소화관(昭和館)- 부산부 소화통 2정목 17, 보래관(寶來館)- 부산부 본정 1정목 15, 상생관(相生館)- 부산부 본정 1정목 16, 수좌(壽座)- 부산부 염심정(鹽伈町) 1954, 동래(東萊)영화극장- 부산부 수정(壽町) 200, 구생관(九生館)- 부산부 초량정 207, 대화(大和)극장- 부산부 수정정(水晶町) 1, 조일(朝日)극장- 부산부 범일정(凡一町) 117, 마산극장- 마산부 도정(都町) 1-8, 공락관(共樂館)- 마산부 석정(石町) 64, 앵관(櫻館)- 마산부 경정(京町) 5정목 3, 진주극장- 진주부 영정(榮町) 222, 삼포관- 진주부 금정(錦町) 329, 진해극장- 진해읍 경화동(慶和洞) 123. (1945. 12. 15)
전국 劇場表 - 其5
묘악좌(妙樂座)- 진해읍 국천정(菊川町) 34, 통영좌- 통영읍 길야정(吉野町) 190, 봉래좌(蓬萊座)- 통영읍 대화정(大和町) 159, 밀양극장- 밀양읍 1동 63, 김해극장- 김해읍 대화정(大和町), 구포극장- 동래정 구포정 27, 삼천포극장- 삼천포읍 동리(東里) 308-2, 울산극장- 울산읍 성남동 250-2, 거창좌- 거창읍 하동 157-2, 태아관(太亞館)- 부산부 행정(幸町) 1정목 9.
△경상북도 부
대구 보총극장(寶塚劇場)- 대구부 동성정 2정목 88, 대구 동보극장(東寶劇場)- 대구부 전정(田町) 14, 대구 송전극장(松田劇場)- 대구부 전정 11, 대구 영화관- 대구부 경정 2정목 29. (194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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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 예술통신》은 1945년 12월 12일부터 28일까지 14차례 걸쳐 전국 영화관을 모두 소개했다. 서울 지역 영화관을 전하는 12월 12일자 기사. |
포항극장- 포항읍 대정정(大正町) 797, 상주극장- 상주읍 서정(西町) 151, 경주극장- 경주읍 동부리(東部里), 예천극장- 예천읍 남목동(南木洞) 223-86, 안동극장- 안동읍 남문정(南門町) 2정목 147, 김천극장- 김천읍 성내정(城內町) 61, 대인좌(大仁座)- 구룡포 459-7, 경산극장- 경산군 경산면 중방동(中方洞) 378, 의성회관(義城會館)- 의성읍 후죽동(喉竹洞), 왜관회관- 칠곡군 왜관면 왜관동, 영주극장- 영주읍 영주리, 강구회관- 영덕군 강구면 조포동(烏浦洞) 81, 영천극장- 영천읍 창구동(倉邱洞) 116, 감포회관- 감포읍 감포리 50-2. (1945. 12. 18)
전국 劇場表 - 其7
대구극장- 대구부 전정(田町) 4-1.
△충청남도 부
대전극장- 대전부 춘일정(春日町) 1정목 92, 경심관(警心館)- 대전부 대흥정(大興町) 3, 논산극장- 논산읍 욱정(旭町) 68, 장항극장- 장항읍 본정 2정목 426, 천안극장- 천안읍 본정 119, 온양극장- 온양읍 온종리(溫宗里) 47, 예산극장- 예산읍 157-2, 공주극장- 공주읍 욱정 5, 강경극장- 강경읍 서정(西町) 3, 연좌(燕座)- 조치원읍 길야정(吉野町) 121, 부여극장- 부여군 부여면 구위리(舊衛里).
△충청북도 부
청주극장- 청주읍 본정 2-b48, 대화(大和)극장- 충주읍 대수정(大手町) 95. (1945. 12. 19)
금지되었던 영화의 재현 明治座의 ‘처녀 7인’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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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해금 영화인 〈처녀 7인〉이 개봉되자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1948년 한 신문에 실린 ‘마리오사(社) 초대작 폭소극(爆笑劇)’ 〈처녀 7인〉 광고. |
전국 劇場表 - 其8
△전라남도 부
광주극장- 광주부 본정 5정목 62, 제국관(帝國館)- 광주부 본정 1정목 26, 목포극장- 목포부 내동(內洞) 23, 평화관(平和館)- 목포부 무안통(務安通) 6, 송정(松汀)구락부- 송정리, 순천극장- 순천읍 대호정(大乎町), 여수극장- 여수읍 영정(榮町) 1306, 조일(朝日)구락부- 제주도 제주읍 삼정리(三征里), 천하(千賀)구락부- 나주읍 금성정(錦城町) 14.
△전라북도 부
제국관(帝國館)- 전주부 대정정(大正町) 2정목 27, 희소관(喜笑館)- 군산부 개복정(開福町) 1정목 44, 군산극장- 군산부 개복정 1정목 67, 정읍극장- 정읍 수성리(水城里) 373, 김제좌(金堤座)- 김제읍 요촌리(堯村里) 205. (1945. 12. 20)
活辯時代의 溫床. 大正館 復興說
조선영화 초창시대 소위 활동사진 변사 전성과 인기를 좇아 구리개 거리에 축음기 보급의 한 스퍼 웃음을 자아내던 기억도 새로운 대정관이 근일 다시 극장으로 재개된다는 소식. 그런데 이 대정관은 그 소유자 전 성보(城寶)건물 주 전촌(田村)이란 일본 여성이 갖고 있다가 성보를 새로 짓고 영업을 그리로 옮기자 폐문(閉門) 채 콜럼비아레코드 지사 사옥으로 쓰이고 있었던바 현재는 서울 예술극장 사무소 겸 총연습장이 되었는데 금반 이것을 모측에서 50만원으로 매수하여 소극장운동을 일으킨다고. 그 진상은 근일 상보(詳報)되리라고. (1945. 12. 21)
전국 劇場表 - 其9
보국관(報國館)- 남원읍 하정리(下井里) 12-2, 이리좌(裡里座)- 이리읍 대정정(大正町) 9, 소화극장(昭和劇場)- 부안군군 부안읍 동중리 86.
△평안북도 부
신선좌(新鮮座)- 신의주부 매기정(梅技町) 12, 신영관(新映館)- 신의주부 매기정 9, 세계관- 신의주부 상반정 6정목 35, 신극장(新劇場)- 신의주부 본정 9, 의주극장- 의주읍 남문동(南門洞), 청수(靑水)극장- 청수읍 700, 양시(楊市)극장- 용천군 양시면 중남동(中南洞) 175, 중음관(中音館)- 철산군 잠면 동랑동(東郞洞) 36, 철산극장- 철산군 철산면 중부동(中部洞) 157, 선천(宣川)극장- 선천읍 본정(本町) 157. (1945. 12. 21)
전국 劇場表 - 其10
북진(北鎭)극장- 북진군 북진읍 진동(鎭洞), 희천(熙川)극장- 희천군 희천읍 상동(上洞) 73, 강계(江界)극장- 강계군 강계읍 금정(錦町) 529, 만포(滿浦)극장- 강계군 만포읍 문흥동(文興洞) 588.
△평안남도 부
사구라극장- 평양부 앵정(櫻町) 53, 계락관(階樂館)- 평양부 앵정 8, 대중극장(大衆劇場)- 평양부 앵정 7, 평양극장- 평양부 수정(壽町) 82, 명성(明星)극장- 평양부 수오정(水五町) 25, 흥아관(興亞館)- 평양부 신리정(新里町) 214, 평안극장- 평양부 신리정 209, 항(港)극장- 진남포부 용정리(龍井里), 중락관(衆樂館)- 진남포부 후포정(後浦町) 27, 안주(安州)극장- 안주읍 건인리(建仁里) 288. (1945. 12. 22)
전국 劇場表 - 其11
순천(順川)극장- 순천읍 관토리(館土里) 55, 승호회관(勝湖會館)- 승호읍 승호리 379, 청명극단(淸明劇團)- 평양부내 수정(手町) 34, 금천대좌(金千代座)- 평양부내 수정(壽町) 94.
△함경남도 부
함흥(咸興)극장- 함흥부 대화정(大和町) 2정목 25, 대보(大寶)극장- 함흥부 황금정(黃金町) 1정목 243, 본정(本町)극장- 함흥부 본정 2정목 95, 소화(昭和)극장- 함흥부 소화정 1정목 18,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 원산(元山)극장- 원산부 북촌동(北村洞) 75, 신영관(新映館)- 원산부 천정(泉町) 4정목 2, 용흥(龍興)극장- 흥남읍 용흥리 134,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대용리(大龍里) 202, 흥남극장- 흥남읍 천존리(天樽里) 3. (1945. 12. 24)
전국 劇場表 - 其12
흥남(興南) 문화극장(文化劇場), 혜산(惠山)극장- 혜산읍 혜산리 393, 차호(遮湖)극장- 차호읍 하(下)차호, 퇴조(退潮)극장- 퇴조면 송대리(松岱里) 1, 단천좌(端川座)- 단천읍 서상리(西上里) 24, 삼우회관(三友會館)- 문천군 천내리(川內里) 84, 홍원좌(洪原座)- 홍원읍, 고사관(高沙館)- 북청읍(北靑邑) 38, 고원(高原)극장- 고원읍 관덕리(觀德里) 28, 영흥(永興)극장- 영흥읍 도정리(都井里) 76, 신포(新浦)극장- 신포읍 신포리, 삼호(三湖)극장- 홍원군(洪原郡) 삼호면 신흥리(新興里), 안변(安邊)극장- 안변군 안변면 수춘리(水春里), 군선(群仙)극장- 홍원군 동면(東面) 상선리(上仙里) 128. (1945. 12. 26)
전국 劇場表 - 其13
△함경북도 부
제국관(帝國館·舊名)- 청진부(淸津府) 북성정(北星町) 10, 일본극장(舊名)- 청진부 신암정(新岩町) 1정목 103, 소화(昭和)극장(舊名)- 청진부 송지정(松枝町) 상(上)2정목 73, 청진(淸津)극장- 청진부 서송향정(西松鄕町) 458-1, 대화(大和)극장(舊名)- 청진부 송지정(松枝町) 1-20, 히비키(舊名)- 청진부 금정(錦町) 2정목 2, 교뢰좌(郊瀨座)- 청진부 교뢰정 128, 중앙(中央)극장- 청진부 동수뢰정(東水瀨町) 87, 용취좌(勇聚座)- 청진부 동수뢰정 120, 고전미회관(高田美會館)- 청진부 쌍통정(雙通町) 46, 동아(東亞)극장- 나진부(羅津府) 부사견정(富士見町) 1정목, 나진극장- 나진부 욱정 1정목, 길주(吉州)극장- 길주읍 길북동(吉北洞) 526. (1945. 12. 27)
전국 劇場表 - 其14·完了
길주극장- 길주읍 길주동 526, 회령(會寧)극장- 회령읍 1동 175, 아오지(阿吾地)극장- 아오지읍 급암동(及岩洞) 50, 급암(及岩)극장- 아오지읍 급암동 71, 주을(朱乙)극장- 주을읍 온천리(溫川里) 179, 무산(茂山)극장- 무산읍 성천동(城川洞) 16-17, 영안(永安)극장- 영안읍, 웅기(雄基)극장- 웅기읍 신정(新町) 244, 남양(南陽)극장- 남양읍 남양동 428, 상치동(上峙洞)극장- 남일면(南日面) 상치동, 연예관(演藝館)- 청진부(淸津府) 생부정(生駙町) 11-8. (1945. 12. 28)
해방 직후 임화·김남천·이원조·이태준 등을 중심으로 문인들은 발 빠르게 ‘조선문학건설본부’(1945년 8월 17일·이하 문건)를 세웠다. 문건은 범(汎)좌익계 문인들이 중심이었으나 유물론적 정치이념을 꺼리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러자 일제 강점기 당시 해산된 카프(KAPF)를 추종하는 윤기정·홍효민·박아지 등 좌익 계열 문인들이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하 프맹)’을 설립(9월 17일)하게 되고, 나중 문건과 프맹이 합쳐져 ‘조선문학가동맹’을 그해 12월 13일 결성했다. 그러나 이 3개 단체에 가담한 문인들은 거의 진보적 성향의 좌익 문인에 가까웠다. 해방 직후 영화계도 문학계와 유사하게 조선영화건설본부(이하 영건),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조선영화동맹이 차례로 결성됐다. 이들 단체는 과거 카프 출신의 좌익 계열의 영화인들이 중심이었다. 다만 초창기 영건은 비교적 온건하고 친일 경력이 있는 영화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에 맞서 우파 영화인들도 대한영화협회를 결성했다. 우익 영화감독 친목 모임인 ‘영화감독구락부’의 윤봉춘·이규환·안종화·이구영·안석주 등이 모체가 되었다. 영건은 1945년 9월 24일 결성됐는데 미군정으로부터 영화 촬영과 제작 허가를 얻고 본격적으로 편집과 녹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방뉴스〉는 1945년 10월 21일 서울 시내 극장에서 최초 공개됐다. 영건의 중앙위원 중 한 명이 김정혁(金正革)이었다. 그가 바로 《일간 예술통신》의 사장이 되었다. 당연히 《예술통신》에 영화 관련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건의 직속 영화제작기구가 ‘조선영화사(이하 조영)’인데, 조영 산하에 ‘뉴스대’와 ‘상영대’라는 두 개의 조직이 있었다. 이 뉴스대에서 〈해방뉴스〉가 제작됐는데 뉴스대를 이끈 이가 바로 김정혁이다. 그는 해방 전 조영의 계획계장으로 근무한 전문 영화인이었다. |
신탁통치 배격 대강연회 금일 각 문화단체 주최로 明治座에서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조선신탁통치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각 학술, 문화단체 대표들이 협의한바 우선 금 31일 오후 2시 시내 명치정 명치좌에서 신탁통치반대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주최 단체와 투사는 다음과 같다.
조선학술원, 조선문학동맹, 조선과학자동맹, 조선어학회, 공업기술자협회, 교육혁신동맹, 조선생물학회, 진단학회, 산업노동조사소, 사회과학연구소, 조소(朝蘇)문화협회.
연사 : 백남운(白南雲), 신남철(申南澈), 최성규(崔成圭), 박극채(朴克采), 이건중(李健中), 서계원(徐啓源), 송석하(宋錫夏), 김보원(金寶源), 도상봉(都相鳳), 김양아(金良珴), 박치우(朴致祐), 이태준(李泰俊), 이원조(李源朝). (1945. 12. 31)
코주부는 둥근 코에 대머리로 해방 직후 인기를 끈 캐릭터. 동경제대 미술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김용환은 1945년 말 4칸 만화 〈박 첨지〉를 《중앙신문》에, 〈코주부〉를 《서울타임즈》에 연재하며 만화가로 입문했다. 같은 시기 어린이 신문에 〈복만이의 모험〉 연작을 내며 어린이 만화가로도 인기를 모았다. 김용환은 1959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활동을 중단했었다. |
수난의 올림픽 기록영화 ‘民族의 祭典’ 광복 공개
지난 백림(白林·베를린-편집자 주) 올림픽 장편기록영화 제1부 ‘민족의 제전’은 과거 일제시대 그 화면 중에 나오는 우리 마라톤 왕 손기정씨의 우승 장면이 일반 조선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공개 중에 금지된 채 이래에 이르렀던바 금번 이 수난의 명화도 해방과 함께 다시 희망의 햇빛을 찾아오는 7일(2월 7일)부터 대륙극장에서 대망의 공개가 된다. (1946. 2. 1)
우리 체육계의 자료 올림픽 영화 ‘民族의 祭典’ 문제 육상연맹의 보존으로 대단원
지난 10년 전 1936년 백림(白林) 올림픽대회에서 체육조선을 위하여 만장(万丈)의 기염을 토한 손·남 양(兩) 선수의 활약상이 기록된 ‘리벤 슈탈’ 여사의 역작 ‘민족의 제전’이 작 7일부터 서울 대륙극장에서 재공개된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이 프린트의 소유권을 에워싸고 근래에 드문 진소동(珍騷動)이 야기되었다. 즉 전기(前記) 영화는 과거 일제 치하에 있을 때에 조선에서도 서울을 위시한 일부 도시에 공개되었으나 경남 동래(東萊)에서 상영 중 화면에 손 선수가 등장되자 흥분된 중학생들이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여 극장 대시위를 일으킨 이래 이 영화의 상영은 금지당하고 프린트까지 일본으로 회송하여 버린 것은 업자의 기억도 새롭거니와 이 같은 금단의 작품이 어떤 경로선가 다시 나타나자 장안의 기대는 공전에 없는 성황을 예기시키게 하였다. 그런데 한편 조선육상경기연맹에서도 그동안 이 작품, 이 국보적 기록이라는 견지에서 이제 조선에 이입되었다는 정보에 의하여 그 행방을 찾고 있었던바 지난달 하순 때 마침 인천시에서 공개되는 것을 탐지하고 급거 수씨(數氏)의 위원을 파견시켜 동 작품이 할 일 없는 영리흥행에만 빠지고 있는 것을 직접 스크린 앞에서 제지하는 동시에 그 프린트의 소유자 열광영화와의 사이에 국가적인 의미로 그 소유권의 이양을 권청(勸請)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래 배급사 측과 원만한 타협을 보지 못한 채 연맹 측에서도 이사회 소집 등으로 문제의 귀추는 가장 명확하면서도 곡선을 그리어 업계에 수소문되던바 여기에 사실은 열광에 필름을 의탁한 신재식(申在植)씨라는 이가 등장하여 씨의 체육계를 위한 자발적 희사로 동 필름은 드디어 연맹 측에 무사 양도됨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금차의 대륙극장 상영이 끝나는 대로 이 필름은 민족 영원의 영광된 자료로 보존될 것으로 일반은 신씨의 쾌거와 아울러 그 해결의 원만을 칭송하고 있다. (1946. 2. 8)
상영자 자신이 검열관 되라!
다시 영화 사전 검열제도 폐지!
미군 당국은 해방 이후 38도 이남 조선에 있어서의 영화 상영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검열제도라는 것은 잔존(殘存)되어 있지 않으나 조선 내엔 일본 제국주의가 남겨놓고 간바 민주주의적 필름이 많이 있는 때문에 CIC에서 이전보다 잠정적 묘사로 상호 연락 정도의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던바, 금번 이를 전혀 폐지하고 자유상영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16일(2월 16일) 영화과 ‘리어든’ 중위는 관계자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자유상영은 어디까지든지 상영자 자신이 진정한 민주주의적 입장에서 양심 있는 자치적 정신으로 즉 자신이 검열관이 되는 관대한 처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유는 아낄 것이며 존귀할 것이지 남용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렇더라도 조금이라도 불미타고 생각되는 것에 의하여는 사전검열이라는 구속의 세문(貰門)을 떠나서 상호 연락함이 좋겠다 하였고, 그 같은 작품이 만약 상영 중이라도 발견되는 경우엔 중지시킬 것이라고 덧붙여 말하였다. (1946. 2. 16)
38도 이북 ‘영화동맹’ 결성 등 문화 각계의 새로운 소식
해방 이래 문화계는 38도선 장벽으로 인하여 이북과에 문화적 교류가 중지되었으며 따라 이로 하여금 문화계의 발전도 지대한 지장이 없지 않다 하겠다. 이번 38도 이북에서 귀경(歸京)한 조영뉴스 촬영대원 모씨가 전하는 정보에 의하면 38도 이북의 문화 각계는 활발한 기세를 띄우고 각기 전문영역에 몰두하여 정치적 노선에 비추어 질서 있는 문화행로에 착착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 구체안을 들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 각본가 오영진씨를 중심으로 영화동맹이 결성되었다는데 금후 영화계의 기구 기타 발전적 모든 개혁에 매진하리라고 한다.
* 다년간 영화배급계에 종사하던 박운삼(朴云三)씨를 중심으로 창립된 인민영화사는 일종 영리적 성질의 단체라는데 전선 소련영화 배급권을 가지고 소련영화를 배급운영 중이라고 한다. 동사에서는 이 이윤을 전기 영화동맹에 발전과 기구확장을 위하여 일체 보조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 예술계를 총망라한 평남지구 예술연맹이 탄생되었다는데 전 연맹에 소속된 가맹단체는 아래와 같다.
문학단체, 미술동맹, 음악동맹, 연극동맹, 사진가동맹, 영화동맹. (1946. 2. 20)
대륙극장 명칭 舊 團成社로 光復!
대륙극장 명칭이 구(舊) 단성사(團成社)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과반 각지를 통하여 보도된 바 있었는데 이것은 전연 오보(誤報)? 대륙극장에서는 오는 삼일운동 기념일을 계기로 하여 당국의 정식인가를 교부하는 동시 대륙극장 현 명칭을 구 단성사로 광복 재출발한다고. (1946. 2. 23)
속속 등장하는 舊作 조선영화들 작품의 양심적 선택의 필요!
해방과 더불어 문화계는 하루같이 잊어버렸던 자주문화에의 복구로 분망한데 영화계에서도 이즈음 그 같은 이념에서의 추구인가 그렇지 않으면 프린트 난의 임시 응변책에선가. 하여간 오랫동안 어두운 창고 속에서 서생원(鼠生員)과 벗하던 구작(舊作) 조선영화가 속속 등장되고 있다. 즉 명 24일(2월 24일)부터는 서울극장의 ‘돌쇄’ ‘금붕어’, 장안극장의 ‘철인도’ ‘춘풍’ 등을 갖고 각각 5일간 공개하는 것이 그것인데 업계의 유지는 말하되 “프린트의 기근책으로만 그 본의가 있다면 어떠한 강구가 있어야 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1946. 2. 23)
해외문화와의 교류를 위하여 ‘코리아영화무역회사’ 발족, 불일 미화를 다량 입하!
다사다난한 건국대업 노정에 영화문화가 금일처럼 큰 역할을 하며 또한 시급을 요하는 때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이에 영화를 통한 대외선전과 외국문화와의 교류를 주목적으로 군정 당국의 양해 밑에 일작 23일(2월 23일) 실업, 문화, 영화계 중진들로 자본금 500만원 전액 불입의 ‘코리아영화무역회사’가 서울시 남대문 1정목 5번지에 창립되었다.
동사에서는 우선 미국 저명 8사 작품과 국내에서 소비될 기재 약품의 일수(一手) 수입을 비롯하여 앞으로는 국내에서 제작될 우수작품의 수출까지 하리라는바 벌써 미화 다량 수입에 대한 확실한 성안이 서서 불일 본격적 공개에 착수한다 하며 이에 따라 38도 이남 각 주요도시에 출장소와 그 책임자도 모집 중이라고 함에 회사의 창립은 건국문화 수립의 혼돈된 이때 매우 기대되며 그 중요간부는 아래와 같다.
* 사장 이한상(李漢相), 중역 이관구(李寬求), 송덕삼(宋德三), 홍찬 외 수씨(數氏). (1946. 2. 24)
영국으로부터 영화 자재가 온다.
永豊洋行 閔사장 언명
우리 자주독립 대업(大業)의 실제 긴급을 요하는 문화공작 가운데에서 영화가 사명이 가장 크다는 것은 세인이 공인하는 바이다. 오직 자재 결핍의 애로(隘路)에 타개의 빛을 찾지 못하여 여러 영화인의 기능은 완전 정체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이때 기보한 바와 같이 이 방면의 전문 수입상을 목적하고 설립된 서울 시내 영풍양행(永豊洋行)에서는 늦어도 4월중으로는 네가 사운드 필름 각 50만 척과 포시 필름 500만 척이 미국으로부터 수입될 길이 동 양행의 손으로 열렸다고 하여 일반의 기대를 사고 있는바 이에 대하여 민충식(閔忠植) 사장은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미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와도 아직 통상협정을 보지 못한 이때 우리 사(社)가 어떻게 필름을 수입하느냐에 대하여는 업계가 모두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은 가형이 현재까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계신데 벌써 형과 연락하여 필름을 사두고 있다는 연락이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위채환산(爲替換算)의 시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해결을 지을 터인데 다만 문제는 선편(船便)뿐이다. 그리고 여기 CIC에 와 있는 ‘데어’ 중위가 제대되어 귀국했는데 우리 양행에선 고문 겸 미국출장소장으로 부탁하였다. 선편은 내 추측으로는 늦어도 4월중엔 제1편이 입항되지 않을까 믿는다.” (1946.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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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1진의 귀국 모습. 김구, 김규식 등 임정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
영화 ‘해방뉴스’ 전편대회
오늘부터 화신영화관서 개최
해방 즉후부터 조선의 모든 행사와 사건을 기록 채집한 존귀한 역사의 기록으로 만대에 기념될 조선영화사 제작의 ‘해방뉴스’는 그 기간 벌써 6집까지 완성되었는데 아직 전편을 보지 못한 이들의 열성된 요망에 보답기 위하여 동사에서는 그 전편을 오늘부터 1주간 화신영화관에서 일거 공개하기로 되었다. 일반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감상하기를 바라고 있다. (1946. 3. 2)
조영에서 동맹과 합작 기획회의 개최
일반 문화계 인사도 참석
조선영화사 제작부에서는 앞으로의 조선영화의 작품행동에 있어서의 방향과 자사 신작품의 기획을 위하여 영화동맹과 공동주최로 작 3일(3월 3일) 오후 2시부터 동사 회의실에서 확대기획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 회의엔 일반 문화계로서 김태준, 이태준, 임화, 박종화, 신정언 외 수씨가 초청 참석하였다 하는데 이같이 한 작품의 기획을 위하여 거의 공개적인 회의를 가졌었다는 것은 조선영화 유사(有史) 희유(稀有)의 쾌거로서 일반의 기대는 자못 큰 바 있어서 그 성과에 대한 기대될 바 크다. (1946. 3. 2)
경기도 경찰부의 흥행취체 10개조
작(昨) 4일(3월 4일) 경기도 경찰부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최근 각 극장에서 공개되고 있는 연극 상연 각본에 대하여는 벌써 지난 2월 7일 부로 관내 각서에 10개조로 된 취체(取締)통첩을 보내어 그에 대한 비양심적인 흥행을 엄중 단속하도록 지시하여 현재 실시 중에 있다는바 그 취체의 요령을 보면 아래와 같다.
1. 국교친선을 해하는 것.
2. 시사를 풍자하여 공안을 방해하는 것.
3. 국가 내지 관공리의 위신을 손상하는 것.
4. 교육가, 종교가 등 사회지도자의 인신공격을 골자로 하는 것.
5. 도의에 배반되며 권선징악의 주지에 반하는 것.
6. 위인, 선현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것.
7. 간통, 음란 등 에로를 조발시키는 것.
8. 군정반대 또는 관민이간을 골자로 하는 것.
9. 구상이 저열하여 선악의 관념을 혼란시키는 것.
10. 계급, 파벌, 투쟁의 의식을 유발 고취하는 것. (1946. 3. 4)
영화동맹에서 일제 잔재영화에 경고적 숙청성명 발표
‘군용열차’ ‘지원병’ 등의 일본 제국주의 시대 및 영화가 백주에 개제 혹은 개편 등의 ‘탈’을 쓰고 일부 비양심적인 상인의 손을 거쳐서 상영되었다고는 할망정 영화문화 재건 공작에 치욕적인 결과를 나타내고 있어 작금의 업계에 비상한 물의를 야기시킨 바 있거니와 이 사실들을 계기로 영화동맹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적 숙청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과거 일제의 단발마적 발악은 우리 문화의 완전말살과 군국주의 영화로의 강제적 혹사로 인한 치명적인 중상은 8·15를 계기로 하여 전면적인 청산과 더불어 민주주의 민족영화 수립을 목표로 전 영화인은 새로운 각성과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이때 만약 이러한 역사적 과업과 민족적 양심을 떠난 반동적 폐단이 우리 영화계에 있다면 얼마나 민족 자신의 모욕과 통탄사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단순히 모리적 행동으로 일제의 잔재영화를 혹은 제명을 갈고 혹은 약간의 편집을 가하여 기만적으로 일반대중에게 배급 상영하는 등의 사실이 사회여론에까지 비등되고 보니 그것이 경영상 착각이라든가 무의식적 행위라고 어찌 변명할 수 있으며 동정할 수 있으랴.
이러한 악질적인 모리행위는 문화를 사랑하고 발전시킬 책임을 가진 인사의 입장보다도 조선민족으로서의 증오할 만한 일대 반역행위라 할 수 있으니 배급 흥행계에 종사하시는 제현께서는 이러한 사태가 다시는 발생되지 않도록 주도(周到)한 용의와 경계로써 자발적 처단이 있어 주심을 간곡히 바라고 조선영화동맹 이름으로서 권고를 드리며 또한 협력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1946. 3. 5)
영화 ‘수업료’ 원작을 연극화
과거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제작된 영화가 수로는 여러 가지 작품을 손꼽아 셀 수 있지만 그중에도 지금껏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은 최인규·방한준 양씨 연출의 아동영화 ‘수업료’라 하겠다.
그런데 이 작품의 원작자인 전남 광주군 북정(北町)소학교(근무 중) 강씨는 해방 후 첫 번 맞이한 지난 광주학생사건기념일을 계기로 ‘수업료’를 극화하여 아동극으로 ‘광주학생사건’이라고 개칭, 남선 중요도시를 순차 공연하였다는데 일반에 새로운 감명과 그 당시 희생당한 학생 유가족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고 한다. (1946. 3. 7)
미국 명작영화 ‘바람과 함께 가다’ 돌연 입하!
그러나 공개는 과연 될 수 있는가?
태평양전쟁 발발 전 전 영화인의 기대 속에 그 공개가 주목되었으나 일제의 야만적 보이콧에 의해 부득이 입하되지 못하고 말았던 명화 ‘바람과 함께 가다’가 금번 상해에서 귀래한 모 상인의 손으로 조선에 입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총천연색 전후편 25권으로 그 원작소설로도 미국 독서계의 베스트셀러를 획득하였더니만치 문제의 기대작품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입하한 모씨는 벌써 서울 시내 모처에서 시사회까지 가져 50만원이라는 거금으로 제3자인 모씨에게 전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 작품은 전혀 영어판 그대로 이것과 또한 이입경로(移入經路)가 합법성을 띤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 국내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순로(順路)로 공개될 것인가 자못 의문시되고 있는바 이에 대하여 배급계의 모씨는 다음과 같은 견해로 말하고 있다.
“나는 우선 그것의 이입수속의 법적 근거가 과연 확실성을 띤 것인지 그리고 둘째로는 미국 제작 본사가 시초에 상해에 제공할 때 전 극동에 긍한 상영권이 붙어 있었던 것이라면 불연이나 상해 혹은 중국에 한정된 것이라면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전 양자가 모두 오케이라고 치더라도 그 귀중한 장편작품을 조선어 스퍼 없이 공개가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는가, 이런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1946. 3. 9)
코리아영화무역 정식 進發 미화 ‘태평양의 분격’ 외 2편 불일 공개
기보한 바와 같이 미국영화의 국내수입 공개를 주목적으로 창설된 코리아영화무역회사에서는 금번 군정청 공보국의 알선으로 드디어 미국영화의 국내 공개권을 작 11일 정식으로 취득하였다. 그런데 그 제1차 제공작품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 육군성 정보부에서 제작 완성한 우리말 해설판 기록영화 ‘태평양의 분격’을 위시하여 ‘방풍림(防風林)’ ‘날개 돋친 재화(災禍)’ 등 3편이라는데 이것들은 전부 동사의 배포망(網) 지사 혹은 출장소를 통하여 전국 일제히 제공되리라 하는데 목하 미설지구(未設地區)에 그 조직을 확립고자 널리 희망자를 모집 중이다. (1946. 3. 10)
밀수입 영화 단속 군정청 영화과에서 주의
최근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유입되는 불법 수입영화가 상당히 시장에 퍼뜨려져서 모리 간상배 간에 공공연히 암취인(闇取引)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더욱이 개중엔 우리 문화 재건에 백해무익된 세기 전 케케묵은 것과 출생 족보조차 불분명한 기괴스런 프린트들이 활보하고 있어 식자들의 탄식을 사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한심한 사태에 대하여서는 아무리 무검열, 자유공개의 현금이라 할지라도 관계자 간에서는 벌써부터 그 단속책에 대하여 직접 당국에 건의한 바도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는바 19일 군정청 영화과에서는 특히 그 수입경로가 비법(非法)이며 불분명한 것에 대하여는 발견 즉시 세 부처에 압수는 물론 엄단을 내릴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언명한 바 있었다.
“그런 소문은 벌써부터 듣고 있다. 방금 내사 중이므로 확실한 증거가 수집되는 대로 적발처리될 것이다. 한편 그 같은 것을 발견할 때에는 일반으로도 조선영화계를 위하여 지체 말고 연락 협력하여 주면 좋겠다.” (1946. 3. 19) (《월간조선》 9월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