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이중 在日민단 단장

“‘민단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전해졌으면…”

  •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n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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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말 서툴러도 괜찮아… 중요한 건 한국인이라는 ‘마음’”
⊙ “재일동포 1세들에게 일본은 ‘기회의 땅’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땅’이었다”
⊙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해서, 권리를 만들어 온 사람들”
⊙ “태극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동포들이 대사관 부지를 기부했습니다”
⊙ 조총련과의 관계, “무조건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쉽지 않은 상태”
⊙ 80주년 서울 행사는 기념식 넘어 ‘마음의 통합’을 위한 결단
⊙ “BTS 보러 가겠다고 난리인 아이들… 민단은 이제 조국 연결의 플랫폼”

金利中
1959년생. 관동학원대학 제2경제학부 졸업 / 미쓰야마주식회사 대표, 가나가와 한국청년상공회의소 회장, 재일민단 가나가와현지방본부 단장, 재일민단중앙본부 부단장 역임. 現 한국동경학교 이사, 재일민단 중앙본부 단장
사진=이정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은 조국이 시련을 겪을 때마다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온 재일동포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민족단체다. 민단의 헌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기 시작한 그해 12월 5일, 당시 신용상 민단 중앙단장은 전(全) 재일동포를 향해 절박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IMF 구제금융으로) 조국의 경제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해외 국민인 재일동포 역시 본국 국민과 고통을 분담해 경제 난국 타개에 동참하자”는 비장한 결의가 담겼다. 민단은 즉각 ‘1세대당 1통장(일화 10만 엔) 이상 개설’이라는 긴급 지침을 내렸고, 이 운동을 통해 궁지에 몰린 조국에 15억 달러라는 거금을 송금했다. 이에 더해 300억 엔 상당의 국채를 매입하며 조국의 부도를 막아 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단의 공헌은 그 9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서울 올림픽공원의 핵심 시설인 체조·수영·테니스 경기장 등이 재일동포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81년 서울 개최가 확정되자마자 민단은 ‘올림픽 후원회’를 결성해 총력 지원에 나섰다. 당시 재일동포들이 모은 성금은 100억 엔, 우리 돈으로 약 541억원에 달했다. 서울의 20평 단독주택 한 채가 2000만원 안팎이던 것을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1988년 10월 올림픽공원에 재일동포기념비를 제막했다.
 
 
  “아주 중요한 타이밍에 오셨다”
 
  이처럼 뜨거운 역사를 뒤로하고, 민단은 이제 창립 80주년이라는 새로운 분기점을 앞두고 있다. 지난 4월 2일, 도쿄 미나토구 민단중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김이중 단장은 기자를 맞이하며 “아주 중요한 타이밍에 한국에서 오셨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김 단장은 자리에 앉으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국에서 멀리 오셨으니 시간 구애 받지 말고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반가움 이면에는 창립 80주년을 맞이하는 단체 수장(首長)의 무거운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화려한 기념식보다 더 본질적인 고민, 즉 ‘재일동포의 정체성(正體性)과 조국과의 연결 고리’에 대해 거침없이 속내를 쏟아 냈다.
 
  2024년 2월 취임한 김이중 단장은 조선학교 출신으로, 당선 직후부터 재일동포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민단 가나가와현본부 단장과 중앙본부 부단장을 거치며 다양한 현장을 경험한 그는 실무와 조직 운영에 누구보다 밝은 인물로 평가된다. 취임 당시 소감에서 김 단장은 “내년(202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그리고 내후년은 민단 창립 80주년”이라며 “일본과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 교포 사회에 새로운 역할을 깊이 고민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었다. 그리고 창립 80주년의 해가 됐다.
 
 
  80주년 행사를 서울에서 하기로 한 이유
 
좌경화된 ‘재일조선인연맹’에 반대하는 청년들은 1946년 10월 3일 대동단결하여 ‘재일본조선거류민단’(당시 명칭)을 결성했다. 사진은 1947년 창립 1주년 대회. 사진=민단

  ― 올해는 민단 창립 8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한일관계사에서 민단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지만, 정작 한국 내 인식은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80년 동안 우리는 민간 외교를 해 왔습니다.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 만나면서.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 온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국에서 민단의 존재 자체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세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민단이라는 조직이 지금도 일본 땅에서 대한민국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알리는 게 더 시급합니다. 국회의원을 만나고 언론인을 만나는 이유도 결국 그겁니다. 오늘 이 인터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쓰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한국 국민들에게 ‘민단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전해졌으면 합니다.”
 
  ― 80주년 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임 단장들 시절에는 한국에서 사진전도 하고,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민단을 잘 모릅니다. 솔직히 친척들 중에서도 민단이 무엇을 하는 조직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서울로 가기로 한 겁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민단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교포들에게는 조국의 기운을 직접 느끼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저는 이걸 ‘마음의 통합’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민단의 존재감 너무 약해져”
 
  ― 서울에서 80주년 행사를 개최하는 데 반대는 없었나요?
 
  “일본에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솔직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앙단장에 취임하고 한국 방문이 잦아지면서 최근 민단의 존재감이 너무도 약해졌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개최하여 민단을 알려야 합니다. 젊은 세대가 서울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고, ‘우리는 같은 한국인이다’라는 걸 체감(體感)해야 합니다. 그건 말로 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겁니다.”
 

  ― 해외 동포 사회를 언급할 때 보통 ‘한인회’라는 명칭을 씁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민단’이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히 아는 한국인이 많지 않습니다.
 
  “그 지점이 바로 우리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한인회는 더 나은 삶이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민을 떠난 분들이 중심입니다. 하지만 민단은 다릅니다. 우리의 1세들은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징용으로 끌려왔든 굶주림을 피해 건너왔든, 일본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1세분들 보면요… 징용으로 온 분도 있고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살아야겠다고 온 분도 있습니다. 일본 와서 일하고, 먹고살게 되면 한국에 돈 보내고… 가족도 살리고, 나라를 생각하고. 그게 기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버텨 온 사람들’”
 
1965년 한일회담에서 재일동포 3세 이후의 법적 지위 문제가 포함되지 않으면서, 관련 처우의 유예 기한인 1991년을 앞두고 민단은 이를 ‘91년 문제’로 불렀다. 사진은 1990년 9월 민단 시코쿠 지방대회 이후, 재일동포들이 ‘자자손손 일본에 영주할 권리’를 요구하며 3세 이후 세대가 함께 행진하는 모습. 사진=민단

  ― 그 밖에 일본 내 동포들이 다른 나라 동포들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해외에 나가 보면 한국 이름 대신 ‘도널드’ ‘리처드’ 같은 이름을 쓰는 동포들도 많습니다. 그게 각자의 삶의 방식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민단은 다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해서, 권리를 만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이름 하나, 국적 하나를 지키기 위해 일본 사회와 부딪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 차별과 냉대를 견디면서, 황무지 같은 환경에서 하나씩 권리를 만들어 낸 곳이 민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이민자가 아니라, 이곳에서 ‘버텨 온 사람들’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 민단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들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해방, 분단, 전쟁… 그리고 한일 국교 정상화입니다. 원래 하나였던 공동체가 갈라졌고, 일본 안에서도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시기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교포들이 돈을 보냈습니다. 한국이 더 어려웠으니까요.”
 
  ― 재외 공관 부지 기증 이야기는 민단의 전설 같은 역사입니다. 당시 동포들은 왜 그토록 조국에 헌신했습니까?
 
  “그건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나라’를 눈앞에 두고 싶어 했던 겁니다. 그때는 한국 대사관 건물이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다 있는데 한국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겁니다. 태극기를 보고 싶어서요. 당시 한국은 가난했고, 일본 땅에 제대로 된 대사관 하나 지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화려한 대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만 없으니, 동포들이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요코하마 교육원 1호 부지, 도쿄와 오사카의 재외 공관 부지… 모두 동포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과 내놓은 땅 덕분입니다. 1세대는 본인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만큼, 자식들에게라도 한국말과 정체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이 강했습니다. 그들에게 공관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일본 속의 작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 ‘열린 민단’을 강조하시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저는 재일 3세입니다. 아들은 4세고요. 일본 학교를 보내면 민족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열어야 합니다. 뉴커머(新정주자)도 늘어나고 있고… 무조건 통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서로 부담을 안고 지내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우선 서로 자주 만나야 합니다. 민단은 특정 사람만의 조직이 아닙니다. 재류 자격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일본에서 사는 모든 한국 사람을 위한 조직입니다.”
 
 
  “가장 가 보고 싶은 곳은 국립스포츠박물관”
 
  ― 조총련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조총련을) 딱 잘라 무조건 거절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무리하게 합치려 했다가 실패해 대내외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 내의 법적 문제는 물론, 민단 사회에서 제시하는 조건도 맞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쉽지 않은 상태인 것은 명확합니다.”
 
  ― 언어 문제는 어떻게 보나요?
 
  “지금 세대는 언어를 필요에 따라서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의 피가 흐른다고 무리하게 언어 습득을 강요해 부담을 주는 것보다는, 우선 한국인의 정신과 마음을 먼저 가르치고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언어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민단 창립 80주년에 한국을 방문하면 꼭 가 보고 싶은 곳은?
 
  “곧 문을 열 국립스포츠박물관입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하형주 이사장님께 직접 부탁드렸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재일동포들이 기부한 금액은 100억 엔이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였습니다. 박물관 벽에 그 기부자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방문단을 구성해서 가면 본인이나 부친, 조부의 이름을 확인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구나’ 하는 자부심을 심어 주는 것, 그것이 이번 80주년의 가장 큰 수확이 되기를 바랍니다.”
 
  ―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민단의 역할도 과거와는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이 앞서 있고 한국이 배우러 오던 시절이 있었죠. 기술을 빌리고 돈을 빌리고, 심지어 신혼여행도 일본으로 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본에 있는 우리 3세, 4세들은 한국에 가서 사업을 해보고 싶어 하고, 한국의 IT 기술과 문화 콘텐츠를 배우고 싶어 합니다. 위상이 완전히 역전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민단의 역할을 과거의 ‘가교(架橋)’에서 오늘날의 ‘플랫폼’으로 바꾸려 합니다. 젊은 세대를 보내야 합니다.”
 
  ― 요즘 한류(韓流)가 인기입니다. 일본에서도 체감하십니까?
 
  “이제는 억지로 고국방문단을 꾸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한류가 유행이라 중·고등학생들은 BTS를 보러 가고 싶다고 먼저 난리입니다. 우리는 그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문을 열어 주는 역할만 하면 됩니다. 재외동포청 행사에 우리 아이들을 많이 보내려 노력 중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젊은이들과 소통하게 하려고요. 거기서 아이들이 ‘아, 내가 한국인이라서 이런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민단 덕분에 한국에 갈 수 있었다는 마음 한 조각만 남아도, 저는 그걸 성공이라고 봅니다.”
 
 
  “일본, 정년까지 일할 수 있어”
 
지난 4월 2일 도쿄 미나토구 민단중앙본부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는 재일민단 김이중 단장.

  ―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일 간의 온도 차가 느껴집니다. 특히 청년 취업 문제가 화두(話頭)입니다.
 
  “과거에는 일본에 취업하러 오는 한국 학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인건비는 한국이 더 높아졌고, 엔저까지 겹치니 일본 취업의 매력이 크게 줄었습니다. 일본 젊은이들도 이제는 돈 벌러 호주로 나가는 시대죠. 다만 일본은 정규직으로 들어가면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여전합니다. 한국은 50대만 되어도 ‘잘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지만, 일본은 비교적 길게 일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안정성을 찾는 수요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 미래 산업 협력 분야로 ‘수소 에너지’가 자주 언급되는데, 현지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주호영 의원 등 한국 정치인들이 가와사키시(市)의 수소 개발 현장을 자주 방문합니다. 저도 가와사키 시장과 친분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실 수소는 아직 일반인이 쓰기엔 너무 비쌉니다. 기술적으로도 호주에서 원료를 가져와 수소를 추출하는 방식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다만 한국은 전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전기로 수소를 만드는 방식 등에서 한국과 일본이 협력한다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산업계 협력은 정치적 갈등과 별개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조국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시길”
 
한국을 대표하는 시중은행으로 발전한 신한은행은 1982년 7월 7일 재일동포 1세의 기술과 자본을 도입해 출발했다. 사진=민단

  ― 초고령사회 대응에서도 일본의 경험이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습니다.
 
  “한국은 부모를 자식이 모시는 것이 당연한 문화라서 시스템 준비가 늦었습니다. 이제 맞벌이가 필수인 시대가 되니 한국도 일본의 요양 시스템을 배우려 합니다.
 
  제가 부모님을 시설에 모셔 본 경험으로 조언하자면, 시설을 고를 때 ‘새로 지은 깨끗한 곳’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운영 경험이 부족한 신설 시설은 시행착오가 많습니다. 조금 낡았더라도 숙련된 간호사와 간병인이 있는 ‘경험 많은 곳’이 가장 안전합니다. 또한 무조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가능하면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려 합니다. 이런 문화적·제도적 차이를 한국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 해외 동포로서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우리 3세, 4세 아이들이 한국말을 못한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언어는 생활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배울 수 있는 도구입니다. 중요한 건 ‘나는 한국인’이라는 마음과, 그 뿌리를 잊지 않는 자부심입니다. 80년을 버텨 온 민단은 앞으로도 그 마음을 지키는 한 줄기 기둥이 될 것입니다. 조국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일, 지금은 서로 협력해야 할 때”
 
  ― 현재 한일관계는 어떻게 보나요?
 
  “지금은 좋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국제정세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든 유동적으로 변화할 텐데, 적어도 지금은 서로 협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 최근 한국에서 일본인 사고(교통사고, 화재 등)가 있었는데 일본 분위기는 어떤가요?
 
  “사고는 사고로 봅니다. 감정으로 확대하지는 않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일 관계의 미래와 한국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금 한일 관계는 양국 정상의 신뢰 덕분에 매우 좋은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엔저로 한국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일본 내 피로도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적으로는 한국 관광객이 일본에도 가장 고마운 손님입니다. 우리도 이 분위기를 살려, 후쿠시마 수산물 문제 같은 예민한 현안들을 하나씩 풀어 가야 합니다.”
 
  50분간의 인터뷰를 마친 김이중 단장은 집무실 문 앞까지 나와 기자를 배웅했다. 그의 뒷모습에서 80년 전 일본의 황무지에 씨를 뿌리던 1세들의 거친 손마디와, 새로운 80년을 준비하는 3세 단장의 고뇌가 겹쳐 보였다. 민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그들의 진심은 바다를 건너 조국을 향해 묵직하고도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재일 민단 Q&A


Q. 민단은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가요?
  A.
민단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약칭입니다. 재일동포의 일본 내 권익 보호와 지위 향상, 생활 상담, 민족교육 지원, 그리고 모국 한국과 주재국 일본 사이의 민간 교류 가교 역할을 수행합니다. 일본에서 한국인을 대표하는 주요 민족단체이자,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재일동포 집단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조직이 민단입니다.
 
  Q. 설립 배경은?
  A.
이름부터 재일동포의 역사적 특수성과 밀접하게 맞물린 이름입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직후에는 ‘~단’이라는 이름의 민족운동 단체들이 속속 생겨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흥사단’도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민단’은 ‘민(民)’과 ‘단(團)’을 합친 말로, ‘국민이 단결하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민단’이라는 이름에는 한민족의 독립 의지와 일본 땅에서 살아남겠다는 결연한 의지, 그리고 조국 통일을 위해 단결하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Q. 한국 정부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A.
민단 창단 시기는 정부 수립보다 2년 앞선 1946년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찬동하는 재일동포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입니다. 민단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 달 뒤인 그해 9월, 정부로부터 공식 해외국민단체로 인정받았습니다. 건국 이래 ‘최초이자 유일한’ 해외국민단체로 공인받은 조직입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일관되게 지지해 오면서, 한국 경제개발 초창기 재일동포의 모국 투자를 알선하는 핵심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공헌 사례로는 6·25동란 당시 민단 알선으로 642명의 재일 학도의용군이 조국 전선에 파병된 일,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일화 100억 엔의 성금을 올림픽 시설 건설비로 기탁한 일,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미화 15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모국에 송금해 외환위기 극복을 뒷받침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민단은 ‘대한민국과 일심동체’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민단에는 재일동포만 가입할 수 있나요?
  A.
일본에 거주하는 한민족이면 누구나 민단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예전 ‘올드커머’로 불리는 특별영주권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계 일본 국적자, ‘뉴커머’로 불리는 일시 체류 국적자도 환영합니다. 민단의 주요 행사에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정치·사회·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면서, 일본 내 한국인과 민단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 민단과 조총련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민단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해 온 재일동포 단체라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은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재일동포들의 단체입니다. 두 단체는 애초에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분기합니다. 1946년 10월 3일, 한국을 지지하는 쪽이 독립해 민단을 창립하고, 조련은 이후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개칭하면서 조총련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조총련 전성기에는 민단보다 조직 규모와 영향력이 큰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 북한 정권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면서 다수의 구성원이 탈퇴해 현재 3만 명 안팎의 조직으로 축소된 상황입니다. (자료=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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