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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데뷔 35주년 맞은 트로트 여왕 주현미

“무대에서 내려오면 무대 위는 잊어야 해요”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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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 후 변함없이 사랑받는 35년 차 트로트 여왕
⊙ “노래는 내게 지금도 스트레스, 완벽한 무대는 없었다”
⊙ “죽음 후는 믿지 않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천국”
⊙ 10년 계획으로 시작한 유튜브 방송 ‘주현미 TV’, 구독자 10만명 넘어

주현미
1961년생. 한성화교중·고교, 중앙대 약학과 졸업 / 1985년 정식 데뷔,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짝사랑’ ‘잠깐만’ ‘추억으로 가는 당신’ ‘러브레터’ 등 수십 곡 히트 / 1981년 MBC강변가요제 장려상, 1985년부터 수차례 가요대상, 10대 가수상 등 수상 / 에세이집 《추억으로 가는 당신》(2020) 출간
사진=CC엔터테인먼트
  떠올려본다. 설레며 나서는 공항 가는 길, 열대야 속 심야 영화관, 도서관 창가에 내려앉은 오후 햇살, 교정을 뛰어다니며 꺅꺅 대는 아이들, 이제는 아스라이 멀게 느껴지는 온갖 그리운 것들. 그때는 미처 몰랐던 ‘어느 멋진 날’들…. 7월 7일, 가수 주현미(周炫美·59)를 만나러 서울 도곡동의 한 음악 스튜디오로 가는 길이었다.
 
 
  코로나 시대의 공연
 
  지난 5월 어느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그는 후배 가수 정용화의 노래를 불렀다. 눈을 뗄 수 없는 무대였다. 잔잔한 이별 노래인 원곡이 그의 목소리를 타고 깊은 슬픔과 애절한 그리움이 휘몰아치는 절창(絶唱)으로 바뀌었다.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 ‘어느 멋진 날’이다. 안목이란 게 대개 비슷한 건지, 이 무대는 방송 이후 상당히 화제가 됐다. 유튜브 영상 조회수는 70만 회에 달한다.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발라드를 이렇게 잘 소화할 줄 몰랐다’는 경탄의 댓글들이 줄지어 달려 있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자마자 물었다.
 
  ― 그 무대에선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노래는 살아 있는 유기체예요. 똑같은 노래라도 백이면 백 사람이 각각 다르게 부르니까요. ‘어느 멋진 날’은 정용화씨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예요. 분명 그 가수는 연인과의 헤어짐을 주제로 해 만들었겠지요. 연습할 땐 멜로디 익히느라 가사 파악을 못 했어요. 무대 리허설을 하고 내려오는데 프로그램 담당 CP가 그러더군요. ‘관객들 앞에서 눈을 맞추며 공연하는 그런 것들이 이젠 어느 멋진 날이 된 것 같아요’.”
 
  ― 코로나19 얘기군요.
 
  “랜선 공연이었거든요. 무대는 정말 멋져요. 화면 몇백 개가 공중에 콜로세움(Colosseum)처럼 둘러쳐져 있어요. 각 화면 속에 컴퓨터로 접속한 관객들이 있고요. 그런데 아직은 그게 익숙지 않은 거예요. 이게 공연이라고? 아니 이게 아닌데, 관객과 호흡하며 노래했던 그 순간은 이런 차갑고 멋진 게 아닌데. 그러면 그동안 익숙했던 순간들, 관객, 팬들과 함께한 그 순간들은 돌아갈 수 없는 어느 멋진 날이 돼버린 걸까. 그 생각이 가슴에 와 박혔어요.”
 
 
  약국 하다 가수로 데뷔
 
1999년 악극 〈가거라 삼팔선〉에서 주연을 연기한 주현미씨. 남자 주인공은 김갑수씨(오른쪽)였다. 사진=조선DB
  그는 1985년 가수로 데뷔했다. 사실 이미 그 전에 히트 음반을 낸 가수였다. 1984년 참여한 메들리 음반 〈쌍쌍파티〉가 크게 인기를 얻었다. 원래는 조미미씨가 녹음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문제로 펑크가 났다. 작곡가 정종택씨의 권유로 ‘주현미 약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당시 그는 중앙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필동에 약국을 차린 참이었다. 〈쌍쌍파티〉가 대히트를 치자 음반사에서 정식 데뷔를 권했다. 그렇게 정식 1집 앨범을 냈다. 타이틀 곡은 ‘비 내리는 영동교’. 그 후로는 그야말로 부르는 대로 사랑받는 시절이었다. ‘월악산’(1986), ‘눈물의 부르스’(1986), ‘울면서 후회하네’(1986) , ‘신사동 그 사람’(1988), ‘짝사랑’(1989), ‘잠깐만’(1990), ‘추억으로 가는 당신’(1991), ‘또 만났네요’(1992) 등 히트곡을 연신 쏟아냈다.
 
  1980년대 중반, 트로트는 침체기를 지나고 있었다. 노년층, 잘 봐줘야 장년층들만 좋아하는 그야말로 흘러간 노래 취급을 받던 참이었다. 이때 주현미가 등장했다. 여태까지의 트로트 가수와는 좀 달랐다. 장조(長調)의 멜로디로 사랑과 이별, 애환을 노래했다. 가사도 달랐다.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아~ 사랑인가 봐’
 
  소녀의 시선으로 부르는 트로트는 마냥 늘어지거나 청승맞지 않았다. 어린아이들도 흥얼거리는 국민노래가 된 비결이다.
 
  1988년 전격적으로 결혼을 했다. 상대는 역시 같은 음악인인 임동신씨. 당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였다. 결혼 후 인기는 더 올라갔다. 1988년 ‘신사동 그 사람’으로 각종 가요대상을 휩쓸었다. 당시 수상 소감으로 ‘여보’라고 해 화제가 됐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둘째를 낳고 6~7년간은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앨범도 내지 않고 거의 활동하지 않은 탓이었는지, ‘에이즈에 걸렸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지만, 또 그런 얘기를 덮어놓고 믿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러브레터’(2000)를 발표하며 트로트 여왕의 자리로 돌아왔다.
 
 
  노래는 지금도 스트레스
 
사진=조준우
  ―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게 뭘까요.
 
  “그러니까요. 그게 뭘까요. 기술적으로 잘 부르는 사람들은 많아요. 음의 고저(高低), 가성(假聲), 진성(眞聲)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식으로요. 결국 듣는 이의 취향 아닐까요. 나의 어떤 감정을 대신해 표현해주는 사람을 보면 잘 부른다고 생각하겠죠.”
 
  ― 노래 한 곡을 완벽하게 불러냈다고 느낀 적은 있나요.
 
  “없었어요. 많은 무대에 섰지만…. 내가 몰입하고 만족해 부르는 3~4분간의 노래인데, 과연 나 혼자 만족해 부르는 게 다인가.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에게 끝없이 던지는 질문이에요. 관객과 주고받아야 하는 건데, 그게 짧은 시간이지만 참 미묘해요. 지금도 제게 노래는 스트레스예요. 혼자 있을 때 불러도 스트레스야.”
 
  ― 노래를 듣는 건 스트레스가 아닌가요.
 
  “음악이 저에겐 휴식이 될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음악 들으면서 쉰다고 하잖아요. 전 쉴 때나 혼자 있을 때 음악 안 들어요. 다 소리로 들리니까요. ‘아, 이 노래는 왜 여기서 베이스를 많이 넣었지’ ‘이 음원은 왜 이 부분을 이렇게 처리한 거야…’ 이런 생각들이 드니까 들으면서 쉬지 못해요. 다른 장르 노래는 가끔 ‘좋네’ 그러면서 듣기도 해요.”
 
  ― 그렇게 공연을 많이 했는데 완벽한 무대인 적이 없다는 게 의아하네요.
 
  “관객과의 소통이 정말 만족스러웠던 공연은 몇 번 있었죠. 데뷔하고 20년 된 해였나, 아주 만족스럽게 공연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었어요. 너무 벅차오르니까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에서 정말 내려오고 싶지 않다….’ 뒤에서 환호성은 들리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갑자기 마음속에서 이런 얘기가 들려왔어요. ‘아 이건 잊어야 되는 거구나. 내가 무대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 거구나. 이 순간을 잊어야 한다’라고.”
 
 
  “가수는 무대 위를 잊어야”
 
  ― 가수에겐 무대 위와 아래의 낙차(落差)가 너무 큰 탓이군요.
 
  “때로는 아주 망한 공연도 있을 수 있어요. 사람의 감정이란 게 항상 준비되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집에 있는 애들이 아프다거나 온갖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어도 노래는 해야 되는데, 빨리 감정 전환이 안 되잖아요. 노력해도 잘 안 되고 그 시간을 때우고 내려오게 될 때는 정말 속상하거든요. 만족한 무대보다 그런 무대가 더 마음에 남거든요. 그래도 잊어야 돼요. 잊지 않으면 조명이 꺼진 후를 견디기 힘들어요.”
 
  ― 어떻게 잊나요.
 
  “훈련이 필요해요. 철저히 혼자 터득해야 해요. 무대 위 환희를 한번 경험해본 사람은 그 맛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서 헤어나지 못해요. 옆에 가족이, 친구들이 아무리 있어도 채워지지 않아요. 어떤 가수는 자기 무대를 모니터링하면서 공부한다던데, 전 절대 다시 보지 않아요.”
 
  ― 공연 모니터링을 안 하세요.
 
  “전혀요. 앞으로 있을 공연에 대한 준비만 해요. 만약 제 무대를 다시 보면서 뭘 잘했고, 뭘 못했는지 분석하라 하면 ‘나 이제 노래 그만할래’ 그럴 거 같아요.”
 
  ― 과거는 다 잊으려는 거네요.
 
  “네, 잊는 게 맞아요. 그 순간 행복하고 최고였으면 된 거예요. 다시 돌려서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 순간에 어쨌거나 내가 있었던 거잖아요. 한 가지 직업을 오래 한다는 건 많은 내공이 필요한 거 같아요. 이미자, 하춘화 선배님 보면 정말 존경스럽죠. 저도 그분들처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정동원은 타고난 트로트 가수”
 
2014년 데뷔 30주년 기념 기자회견을 하는 주현미씨. 사진=조선DB
  ― 데뷔 5년 차던 1990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셨더군요. ‘트로트는 음색(音色)을 타고나야 된다.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서른도 안 된 가수의 단호함이 인상 깊었습니다.
 
  “사실 흉내는 낼 수 있어요. 연습해서 안 되는 게 어딨겠어요. 그런데 타고나는 그 느낌은 연습으론 갖출 수 없어요. 이미자 선생님 같은 음색이지요.”
 
  ― 젊은 트로트 가수들 중에 트로트 음색을 타고난 경우를 보셨나요.
 
  “미스터트롯 정동원. 그 친구는 정말 타고났어요. 엄마 배 속에서 장착을 하고 나온 거 같아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키워주셔서 그런 건지, 자기가 의식하기도 전에 트로트 선율이 너무 귀에 익어서 그런 건지…. 이찬원, 그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타고났어요. 참, 그 느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 정동원군은 아직 어려서 음색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네요.
 
  “변성기를 잘 넘겨야죠. 커가면서 또 뭔가가 보태지잖아요. 그것도 나름의 방식으로 거쳐야 해요. 깔끔하게 잘 지나와야죠. 사실 지금도 정돈이 되어 있어요. 너무 놀랐어요. 아직 순수해서 그런지 오버도 안 하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아요. 저게 어떻게 되지? 싶어요. 기가 막힐 정도예요.”
 
  ― 음색에 맞는 곡(曲)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가수가 곡을 만나는 건 운명이에요. 어떤 곡과는 사랑에 빠지기도 해요. ‘아, 나 이 노래 정말 짝사랑해’ 하고. 근데 그게 꼭 대중과 소통이 되는 건 아니에요. 팬들이 좋아하는 노래와는 또 다르더라고요.”
 
 
  헬기 타고 공연 다니던 시절
 
  ― 어떤 노래를 짝사랑하나요.
 
  “제 앨범 중에 〈달아달아〉라는 앨범이 있어요. 양인자-김희갑 콤비가 작품을 주셨어요. ‘달아달아’와 ‘사랑이 무량하오’라는 노래예요. ‘사랑이 무량하오’는 팝페라 가수 캐빈 육과 함께 불렀어요. 정말 노래가 좋아요. 부를 기회는 자주 없지만, 부를 때마다 노래가 저한테 마음을 다 싣게 하는 느낌이에요.”
 
  무명(無名)시절이라곤 없는데다 부르는 노래마다 사랑받은 가수, 사랑받는 아내, 엄마. 이 사람에게도 슬픔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나 슬픔을 묻기 전에 기쁨을 소환했다.
 
  ― ‘수도꼭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요. TV만 틀면 나온다고요.
 
  “이런 얘기도 들은 적 있어요. 명절이면 꼭 만나는 연예인 3명이 있는데 중국 영화배우 성룡, 한국 영화배우 최진실, 그리고 주현미라고요.”
 
  ― 지방 공연도 많이 다니셨죠.
 
  “예전엔 SK, 현대, 대우 이런 기업에서 가수들을 많이 불렀어요. 노조(勞組)의 힘이 세잖아요. 기업들이 가을 비슷한 시기에 근로자 행사 같은 걸 해요. 초대하려는 가수는 한정이 되어 있으니 거기 끝나면 바로 오라고 기업에서 헬기를 보내줬어요. 헬기 타고 부산, 울산, 거제도를 다녔어요.”
 
  ― 이제는 못 들을 얘기네요.
 
  “정주영 회장, 김우중 회장, 이병철 회장 때 얘기죠.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재계 인사들 모이는 자리에 연예인들이 초대받기도 했어요. 정주영 회장은 엄청 화통하시고, 이병철 회장은 참 젠틀하셨어요. 신청곡도 항상 메모해서 정중히 전달해주시고….”
 
  다시 못 올 날들을 오랜만에 떠올린 걸까.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데뷔 초반이었고, 그때는 그런 연회가 자주 열렸어요. 이병철 회장님은 ‘한오백년’ 노래를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그분들은 한참 어른이셨으니까요.”
 
 
  생각과 달랐던 옥류관 냉면
 
  ― 노래하러 평양에도 갔지요. 2004년에 〈전국노래자랑〉 ‘평양’편을 촬영하러요.
 
  “그 전에 사회주의 중국도 가봤고, 사할린도 가봤어요. 그래서 분위기가 어떨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평양에 딱 내리니 긴장했어요. 막상 공연 준비를 시작하니, 거기도 무대 뒤 분위기와 준비하는 과정은 똑같더라고요,”
 
  ― 옥류관 냉면도 드셨나요.
 
  “일부러 가서 먹어봤어요. 우리 입맛엔 좀 안 맞을 수 있어요. 냉면인데 시원하지가 않아요. 보통 냉면이라고 하면 시원하잖아요. 송해 선배님은 예전에 먹던 그 맛이라며 너무 감격해하면서 드셨어요.”
 
  ― 송해 선생님의 고향이 북한이지요.
 
  “평양 갈 때 친동생 찾겠다고 하셨거든요. 여기서 여동생 한복까지 챙겨 갔는데 못 만나고 오셨어요. 나중에 듣기론 소식도 못 들었다고 해요.”
 
  ― 중국권에서 러브콜이 많았지요.
 
  “그럴 거 같잖아요? 생각 외로 한두 번 정도였어요. 뭐가 안 맞았는지 그것도 잘 이뤄지지 않았어요. 중국 본토에서는 가수 주현미에 대해 그리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일본에서 데뷔도 하고 앨범도 냈어요. 그게 이어지진 않았죠. 그때만 해도 한국 활동을 다 포기하고 일본으로 가야 했거든요.”
 
  ― 작년부터 계속 트로트 붐이잖아요.
 
  “그렇지요. TV조선에서 큰 역할을 했지요. 트로트 부흥을 이끌었잖아요. 조금 걱정스러운 점은 있어요. 이렇게 한꺼번에 달아올랐다가 한꺼번에 외면당하진 않을지 그게 조금은 우려가 돼요.”
 
  ― 송가인, 임영웅은 순식간에 스타가 됐지요. 선배 가수로서 조언을 한다면.
 
  “어쨌든 연예인은 상품으로 다뤄져요. 상품 가치를 높이려면 본인 스스로 많이 공부하고 개발해야 해요. 그래야 일회용으로 전락하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선 일단 자기 노래가 있어야 해요.”
 
 
  약사면허증 간직해온 어머니
 
  주현미는 데뷔 당시 ‘약사 가수’로 주목받았다. 대학 재학 시절에도 가수 기질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중앙대 약학대 밴드 ‘진생라딕스’ 보컬로 강변가요제에 나가 장려상을 받았다. 진생라딕스는 ‘인삼뿌리’라는 뜻이다.
 
  ― 약사 가수라는 게 당시 화제였나 봐요.
 
  “그랬죠. 이런 적도 있어요. 당시는 아직 여행자유화가 안 됐을 때였어요. 《한국일보》에서 미주 순회공연을 매년 나갔거든요. 조용필 선배나 쟁쟁한 가수들이 다 같이 해외공연을 다녔어요. 그런데 조용필 선배가 공항에서 이러는 거예요. ‘약사면허증 가져왔니? 공항에서 출국심사 받을 때 약사면허증 보여줘야 되는데….’”
 
  ― 약사면허증을 들고 다니셨어요.
 
  “아니죠. 안 가져왔다고 하니까 이러시는 거예요. ‘너 이제 못 나가는데 어떡하니….’ 많이 놀리셨죠. 조금만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때는 진짜인 줄 알았어요. 아무나 외국을 못 갔으니까요. 외국 나가는 건 정말 특별한 거였어요. 지금 그런 얘기 들으면 내가 한술 더 뜰 텐데. ‘가수협회 회원증도 가져와야 된대요. 가져오셨어요?’”
 
  ― 약국 할 때 깐깐한 약사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약 달라고 해도 잘 안 줬다고.
 
  “그러니까 약국이 돈을 못 벌었지. 약국이 망해서 가수가 된 거예요. 돈을 벌려면 약 파는 기술을 먼저 배워야 되는데 졸업하자마자 약국을 차렸어요. 엄마가 급하니까, 약국 하면 돈번다니까 바로 차렸어요. 지금은 처방전이 있어야 약을 살 수 있잖아요. 그때는 사람들이 대뜸 ‘마이신 주세요’ 이러면서 들어왔어요.”
 
  ― 약을 안 주셨어요.
 
  “학교에서 그리 배웠으니까요. 항생제는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인간이 발견한 항생제 종류가 몇 개 안 돼요. 내성이 생기면 다음엔 더 센 항생제를 투여해야 돼요. 균도 더 센 균으로 진화한단 말이에요. 마이신 달라는 손님한테 ‘지금은 마이신 먹을 때가 아니에요’ 하면서 강의를 했으니 그 약국이 되겠어요?”
 
  ― 그래서 제약광고에 안 나가시는군요.
 
  “못 하는 거예요. 법령 때문에요. 약사는 전문 의약품 광고에 출연하면 안 돼요. 두통약 광고 출연 요청 엄청 들어왔어요.”
 
  찾아보니 이렇다. 방송광고심의에 관한 규정 제27조 2항 5호는 ‘의사·치과의사·한의사·약사 또는 그 밖의 자가 특정 의약품을 지정·공인·추천·지도 또는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 등의 표현’을 금지한다고 규정했다.
 
  ― 어머니께서 약국 그만두고 가수 된 걸 그렇게 안타까워하셨다면서요.
 
  “제 약사면허는 엄마가 딴 거나 마찬가지예요. 엄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 감내하면서 저를 약대에 보냈는데 결국 가수가 된 거죠. 얼마 전까지도 엄마가 제 약사면허증을 간직하고 계셨어요. 이젠 엄마도 나이 들었다며 가져가라고 해서 얼마 전에 받아왔어요.”
 
  ― 약사면허증이 가수 하면서 좀 힘이 되지 않았어요.
 
  “맞아요. 노래하면서도 크게 의지가 됐어요. 굳이 안 서고 싶은 무대도 있을 거 아니에요? 배짱을 좀 부릴 수 있는 보루 같은,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고 할까요. 어차피 할 거면서 마음으로 위로가 된 거겠죠. 어쩌면 허영(虛榮)일 수도 있어요. ‘난 달라’ 그런 생각…. 내가 마음속으로만 부릴 수 있는 허영.”
 
 
  소녀 같은 표정
 
‘주현미 TV’의 반주를 맡은 기타리스트 이반석씨(오른쪽)와 주현미씨. 사진=조선DB
  묘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그는 기자 가 어릴 때 브라운관에서 봐온 ‘가수왕 주현미’보다 더 젊고, 더 새로워 보였다. 단순히 피부가 좋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다. 가만히 지켜보니 표정 때문인 듯했다. 눈빛엔 생기가 있고, 표정엔 풍부한 감정이 오갔다. 과거를 흘려보내려 한다는 마음의 습관 탓일까. 잠깐잠깐의 어떤 순간들 외에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소녀 같은 얼굴이었다.
 
  ― 자기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소식(小食)을 한다거나 지키는 습관이 있나요.
 
  “제가 생각할 때 별로 없어요. 먹을 땐 또 엄청 먹어요. 다만 건강식품들, 홍삼 같은 거 생각날 때마다 먹어요. 꾸준히 먹는 건 커피? 사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커피 잘 안 마셔요. 성대가 건조해지거든요. 저는 그런 것도 별로 안 가렸어요.”
 
  ― 수면 습관이라던지요.
 
  “잠은 충분히 자요. 못 자면 힘들어요. 어렸을 때부터 8시간 이상은 자야 했어요. 요즘엔 6시간 정도만 자도 괜찮긴 해요.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다가 요즘엔 마스크 쓰고 해야 한대서 쉬고 있어요.”
 
  ― 여자 연예인들은 몸매 관리도 중요하겠네요.
 
  “다이어트해요. 괴로워요. 우리는 보이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살 안 찌려고 보조제도 먹어요. 이게 나잇살이라 아무리 조금 먹어도 관리가 힘들어요. 대사량이 줄어드니까요. 운동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어요.”
 
 
  ‘화교한테 왜 가수상을 주나?’
 
  ― 무대에서 45도 위쪽으로 바라보며 활짝 짓는 미소,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분은 슬픔이 없을 것 같다’고.
 
  “그럼 우리 인터뷰를 지금 바로 접고, 60년을 산 여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만난 슬픔에 대해 얘기해보면 어때요?”
 
  어떤 슬픔일까. 인터뷰를 마칠 순 없었다. 이젠 ‘화교(華僑) 가수 주현미’를 만날 차례였다. 그는 결혼 전까진 대만 국적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하프(half) 화교’다.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집에선 한국어로, 학교에선 중국어로 말했다. 윗대로 올라가도 같다. 친할아버지는 중국인, 친할머니는 한국인이었다. 그의 핏줄이 슬픔이었던 걸까.
 
  “중국이 혼란스러워진 그 시절, 할아버지가 조선으로 건너왔어요. 조선에서 국제결혼을 한 거예요. 그때는 ‘비단장수 왕서방’이라고 했잖아요. 우리 할머니가 때국놈한테 시집을 간 거예요.”
 
  ― 두 분이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아니요, 할머니가 돈에 팔려 가신 거죠! 친정이 너무 가난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돈 주고 산 거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두 분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셨어요. 제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어릴 때 다시 한국에 들어왔어요. 중매로 엄마를 만난 거예요.”
 
  ― 그렇게 결혼하신 거군요.
 
  “엄마는 아버지가 중국 사람인 줄 몰랐대요. 속아서 결혼한 거죠. 그 시절엔 파혼은 생각도 못 했잖아요.”
 
  ― 가수 활동 하는 데 화교라는 게 영향이 있었나요.
 
  “데뷔 때는 그게 타이틀이 돼서 시선을 끌었어요. 가수 활동 하면서는 특별히 없었어요. 이런 적은 있었어요. 가수상을 받게 됐는데 어느 기자가 신문에 이렇게 썼어요. ‘화교한테 왜 상을 주냐’고. 그때는 차별이 심했으니까요.”
 
 
  소녀가장 주현미
 
  화교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20년 동안 한국의 화교 역사를 연구하며 《한반도 화교사》를 쓴 이정희 인천대 교수에게 물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화교에 대한 차별은 일제 강점기부터 형성돼서 내려왔다. 차별 의식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한국전쟁에 중공이 참전한 게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화교들은 주로 포목·주단·채소 생산에 종사했는데, 일제 강점 말기에 들어 주단·포목 상점이 거의 망했다.
 
  해방 후 한국 정부는 화교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 농사도 못 짓고, 공무원도 못 되고, 기업도 못 들어가고 화교들에겐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미국이나 대만으로 재이주했다. 한때 10만명이던 한국의 화교는 현재 1만5000명쯤이다. 주현미씨 가족의 예처럼, 한국인과 중국인의 국제결혼 가정인데다, 대만이나 미국으로 가지 않은 경우는 화교 중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우리가 중국을 폐쇄적인 후진국 취급하던 게 오래전 얘기가 아니다.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지 불과 20년도 안 됐으니 말이다.
 
  주현미씨 아버지도 한국을 벗어나 사업하겠다며 외국을 떠돌았다. 대만, 일본 등으로. 같이 산 기간보다 떨어져 산 시간이 더 길었다. 언젠가부턴 만나지 않았다.
 
  ― 아버지 없이 자란 거나 마찬가지네요.
 
  “엄마도 아버지한테 가버렸어요. 사남매는 할머니한테 맡기고요.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소녀가장이 됐어요. 그땐 외국에 돈 보내고 받는 것도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어요. 동생들이랑 있는데 생활비가 없는 거예요. 괴상망측하게 된 거야. 이런 얘기 눈물 없인 못 해요.”
 
  웃고 있는, 그의 눈가가 물기로 반짝거렸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인생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면서요. 어릴 때 말 그대로 ‘개고생’을 한 거예요. 어떨 때 보면 그 시간들이, 그때의 아픔들이 노래할 때 묻어나지 않나 싶어요. 어릴 때부터 청승맞다 그랬어요. 타고난 성정이 그럴까요. 제 노래에 그 모든 것이 녹아 나오니까 그런 아픔이 있는 분들과 소통이 되는 거겠죠.”
 
  1988년 결혼을 했다. 새로운 가정 속으로 들어갔다. 첫아이를 낳고 얼마 후, 아버지의 지인이 연락해왔다. 아버지가 직접 손자를 보고 싶어 한다고, 한 번만 보여달라 했다. 거절했다. 그러자 상대는 아버지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믿지 않았다.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셨나요.
 
  “한창 부모님한테 떼도 쓰고 공부에 집중해야 할 사춘기 시절에 저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어요. 생활비 걱정을 해야 했다고요. 이런 원망이 아버지한테 다 쏟아진 거겠지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원망을 해결하지 못한 거예요. 서른 살 초반이었으니, 철이 덜 든 거지요.”
 
  ― 후회하세요.
 
  “지금 내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요즘도 가끔 혼잣말을 해요. ‘빠바(아버지), 그땐 내가 참, 그랬네.’”
 
  ― 지금도 원망하세요.
 
  “여기에서 차별이 너무 심하니까 우리 친척들도 다 미국으로 갔어요. 가족이 다 같이 갔어요. 우리 빠바만 왜 우리를 안 데려갔나요.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면서 왜 자식들은 남겨두고 간 거냐고요. 어렸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난 이해하지 못해요. 만약 저세상이 있다면, 난 빠바 만나서 따질 거예요. 왜 당신은 힘들어서 떠났으면서 그 힘든 곳에 우리는 남겨놨냐고. 작은아버지는 다 자식들 데려가지 않았냐고. 우리가 개도 아니고 어떻게 살라고 버려두고 갔냐고 따질 거예요.”
 
 
  미소 짓는 표정 연습
 

  난감했다. 무어라 질문할 수도 없었다. ‘당신에게도 슬픔이 있냐’고 물은 게 머쓱해서였다. 정적 끝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했던 부분은… 그분이 손자를 보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내가 거절했다는 것. 인륜(人倫)이라고 하나요. 참 잘못한 것 같아요. 근데 자식 키워보면 안다고 하는데 난 자식 키워보니까 그래요. 힘들어서 가려면 데려갔어야지. 나 어렸을 때 말도 못하게 힘들었어요.”
 
  ― 대단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런 표정으로 노래를 해오셨다는 게.
 
  “다 지난 일이니까요. 다 지나서 다행이죠.”
 
  특유의 그 표정은 사실 부단한 노력으로 만든 거라고 한다.
 
  “지금도 기억나요. 길 가다 머리핀인지 액세서리 파는 노점상이 보이기에 다가갔어요. 주인이 남자분이었어요. 고르고 있으니 말을 걸어요. ‘주현미 많이 닮았네요.’ 제가 물었죠. ‘주현미 좋아하세요?’ 그러니까 이래요. ‘좋아는 하는데 TV 나오면 너무 울상이라 싫어요.’ 너무 놀랐어요. 그 얘길 듣고 나선 일부러 웃었어요. 사실 ‘비 내리는 영동교’가 웃을 노래는 아닌데 일부러 웃었어요. 데뷔 초창기 화면 보면 다 울상이에요. 울면서 불렀으니까요.”
 
  ― ‘무슨 그런 소리를 하나’ 하고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요.
 
  “진짜 행운인 거죠. 그런 말을 누가 해줬다는 게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일이 정말 있었을까 싶어. 허름한 액세서리 가게 아저씨가 하필이면 그런 조언을 해줬을까. 누가 보낸 건 아닌가. 그 장면은 지금도 너무 생생해요.”
 
 
  ‘가수에게 팬은 천륜’
 
지난 5월 출간한 에세이집 《추억으로 가는 당신》. 옛노래에 얽힌 주현미의 추억을 담은 책이다.
  지금 그의 곁에는 서로를 응원하는 가족과 팬들이 있다.
 
  ― 남편 임동신씨는 이제 아내가 가수 활동을 접고 쉬기를 바라지 않나요.
 
  “그랬어요. 애들도 다 크고 나이도 들었고, 둘이 여행 다니면서 재밌게 살면 어떠냐 했는데. 30주년 기념공연에 온 거예요. 사실 이전 10여 년간은 매니저한테 맡기고, 남편은 제 스케줄에 세세히 관여하지 않았거든요. 공연을 보더니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계속 노래해야겠네’라고요.”
 
  ― 팬들 때문이군요.
 
  “가수한테 팬은 가족과는 또 다른 천륜(天倫)이에요. 참 신기한 거죠. 오랫동안 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 마음은 뭘까. 참 감사해요.”
 
  ― 아들 임준혁, 딸 임수연씨도 음악을 하지요.
 
  “자식이 나와 같은 길을 간다는 건, 좀 그래요. 내가 지나온 길을 자식이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 안타깝거든요. 성취감, 희열보다 지루한 부분이 더 긴 길인데 그걸 내 자식이 걷겠다고 하니까. 뻔히 알면서 지켜본다는 게 너무 괴롭잖아요. 내가 다시 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아이들에게 그랬어요. ‘너희는 다른 걸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결국 음악을 하게 됐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 그런데 요즘 음악계가 예전과는 좀 달라진 거 같습니다.
 
  “그래요. 예전엔 가수왕이니 하며 몇 명만 주목받았는데 지금은 개개인이 자기가 원하는 걸 즐기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꼭 누구와 비교한다거나 누구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보다 자기 걸 건강하게 표현하는 세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죽음 다음은 없어’
 
  ― 독서를 즐기시나요.
 
  “고전을 좀 공부해보고 싶어서 3년 전부터 강의를 듣고 있어요.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인문학 강의예요. 근대 철학, 현대 철학, 중세 예술, 도스토옙스키 등.”
 
  ― 그런 강의를 왜 들으세요.
 
  “그런 의문이 있어요. 나는 왜 태어났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뭘까? 도대체 우리는 왜 생각을 할까? 어릴 때 품었던 의문들이에요. 답을 찾기도 전에 사회로, 생활로 떠밀렸다가 이 나이에 그런 물음들이 되살아난 거죠.”
 
  ― 아끼는 책이 있나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기초과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기술했잖아요. 이런 작업을 어느 한 개인이 했다는 데 많이 놀랐어요. 두고두고 읽어야지 했는데… 한 번 읽고 두 번째는 읽다 말았어요. 읽어야지, 숙제처럼 간직하고 있는 책이에요. 이젠 인문학 책을 많이 보려 해요. 왜 태어났을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왜 태어났을까요.
 
  “답이 있겠어요? 답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겠지요.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예요. 각자 주어진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거죠.”
 
  ―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죽는 거죠. 그다음은 없어요. 천국과 지옥? 나는 천주교 신자지만 믿지 않아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요. 죽은 후의 천국보단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해야 할 게 있으면 집중하고 완성하고, 남에게 해를 안 끼치고 상식적인 테두리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천국을 영위(營爲)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10년 계획으로 ‘주현미 TV’ 시작
 
주현미 TV에서 ‘나그네 설움’(1940)을 부르는 주현미. 사진=유튜브 캡처
  그는 2018년 11월 ‘주현미 TV’를 시작했다. 이제는 잊힌 전통가요를 영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시작했다. 지난 6월엔 구독자 10만명을 돌파했다.
 
  ― 왜 시작하셨어요.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음악하는 후배들도 이런 옛 노래들을 잘 모르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되는 노랜데 지금 현역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이 모르면 다음 세대는 ‘그런 노래가 있었어?’ 할 거잖아요. 그건 안 돼요. 심지어 저도 모르는 노래들이 있어요. 그 시절에 분명히 공전의 히트를 치고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이제는 안 불리고 누가 거론을 안 하니까 잊히는 노래들…. 기록해놔야겠다 싶었어요.”
 
  ― 그런 노래가 많나요.
 
  “목록을 뽑아보니 1000곡이 넘어요. 생각했어요. ‘10년 정도는 해야겠다’고. 남들은 업로드할 콘텐츠를 찾는다는데, 전 창고에 이미 그 재료들이 가득 있는 거예요. 선배님들이 남겨놓은 노래들이 보물처럼 있어요. 행복해요.”
 
  ― 잊히는 대로 그냥 두는 건 어떨까요. 그런 노래들을 왜 알아야 해요.
 
  “몰라도 돼요. 그런데 한국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이 장르는 다시 돌고 돌며 사랑을 받을 거예요. 이건 없어지지 않을 장르예요. 그런데 단편적인 조각만 가지고는 절대 길게 이어질 수 없어요. 지금의 트로트 붐이 사라지고 이후의 어떤 세대가 우리 전통가요를 다시 부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할 거예요. ‘우리가 부르는 이 트로트라는 게 뭘까’ 좀더 세련된, 완숙한 트로트를 만들려다 보면 그런 마음이 들 거예요. 그때 너희가 부르는 트로트에 이런 역사가 있다,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거죠.”
 
 
  ‘기억되고 싶지 않아’
 
  ― 영상에 달리는 댓글도 다 읽으시나요.
 
  “다 읽어요. 댓글 중에 이런 사연이 있었어요. 일흔이 넘은 분인데, 트럭에 과일을 싣고 동해안을 다니며 장사를 하신대요. 젊은 시절 차를 세우고 주현미 노래를 크게 틀어놓으면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장사가 잘됐다고.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시절 생각이 난다고요. 제 노래가 고단한 삶에 위로가 됐다는 게, 나도 모르는 사이 실질적인 위로가 됐다는 게 정말 감사했어요.”
 
  ― 감동이네요.
 
  “어떤 분은 이민을 갔는데 13년째 한국에 못 왔대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나그네 설움’을 불러달라고 댓글로 신청하셨어요. 그러곤 제가 부른 ‘나그네 설움’을 듣고, 직접 어머니에게 불러드리려고 한국에 오셨다는 거예요. ‘내가 부르는 노래로 이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구나’ 감동이었어요.”
 
  ―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아이들에게 그래요. ‘엄마 죽으면 엄마 나온 영상 싹 다 지워’라고. 흔적도 없이 지워주면 좋겠어요. 기억되고 싶지 않아요. 솔직한 마음은 그래요.”
 
  ― 주현미 TV만 남겨놓고요?
 
  “그것만 딱 남겨놓고요. 흔적이란 게 지저분한 거 같아요. 너무 과격한가요?”
 
  ― 팬들은 기억하고 싶을 텐데요.
 
  “그분들의 몫이겠죠. 난 오히려 궁금해요. ‘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묻고 싶어요. 난 그저 난데. 혹시 날 너무 왜곡해 그리고 있을까, 바라보고 있을까. 그건 더 위험한 거 같아요. 어차피 가수 주현미는 대중에게 던져진 상품이에요.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충실했던 가수 쯤이면 어떨까.”
 
  코로나19 이후의 예술, ‘언택트(Untact)’ 시대에 노래는 어떻게 불려야 할까. 그는 아직도 이 현실이 SF소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다. 주현미 TV 같은 비대면 만남이 어쨌든 이 시대를 버텨나갈 한 방편(方便)일지도 모른다.
 
  스튜디오를 나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진 마스크의 감촉이 왠지 기막히다. 그러나 봄날은 돌아오는 법. 멀어진 ‘어느 멋진 날’을 그리기보단, 지금 이 순간을 멋진 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나갈 수밖에 없다. 트로트 여왕 주현미가 아닌, 인간 주현미에게 전해받은 삶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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