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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살만의 새로운 사우디아라비아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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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코장을 여십시오”(이란 팔레비 국왕) vs. “폐하 국민의 90%는 무슬림”(파이살 사우디 국왕)
⊙ 살만 사우디 국왕,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시작되기 전 300년간 우리나라는 테러나 극단주의를 모르고 살아왔다”
⊙ 빈 살만 왕세자, “이란의 하메네이는 ‘중동의 히틀러’… 1979년 이란혁명 체제 무너뜨리기 전에는 중동평화가 없다
⊙ 미국-사우디-이스라엘, 반(反)이란 전선 구축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살만 국왕과 아들 빈 살만 왕세자.
반대파를 숙청한 빈 살만 왕세자는 조만간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뉴시스
  무함마드 빈 살만(Muhammad bin Salman).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라는 이름이다. 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살만(1935년생. 2015년 국왕 즉위)의 아들로 왕세자다. 우리가 성(姓)을 쓰는 것과 달리 아랍인들은 전통적으로 개인 이름 뒤에 빈(이븐)을 붙여 ‘누구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쓴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버지 이름이 ‘압둘라’라서 무함마드 빈 압둘라다. 빈을 계속 붙인 이름도 있는데, 이 경우 조부, 증조부, 고조부의 이름을 쉽게 알 수 있다.
 
  빈 살만은 젊은 왕세자다. 1985년 8월 31일생이니 만으로 32세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國父) 압둘아지즈(1875~1953) 초대(初代) 국왕 이후 왕국은 국부의 아들들이 줄곧 왕위를 수평상속 해왔다. 압둘아지즈가 자신의 아들들이 모두 왕위에 오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5년 살만 국왕은 이복(異腹)동생 무크린(1945년생)을 왕세제에서 해임하여 세대교체의 틀을 닦았다. 그러고는 조카 무함마드 빈 나이프(1959년생)를 왕세자로 삼았다가 다시 2017년 6월 21일 전격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차기 왕세자로 끌어올렸다. 살만 국왕이 왕위를 곧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라는 추측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젊은 왕이 다스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보게 될 전망이다.
 
  신세대 왕세자라서 그런지 빈 살만의 언행이 파격적이고 심상찮다. 무엇보다도 그가 생각하는 이슬람이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강경 보수 와하비(Wahhabi) 이슬람과 다른 모습이다. 빈 살만은 “우리는 단지 과거 우리가 따랐던 세계와 모든 종교에 열린 온건한 이슬람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한다.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에는 음악도 있었고, 여성이 지도자 역할도 했는데, 지금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젊은 왕세자의 생각이다. 그동안 금지하였던 여성 운전을 허용하기로 하고, 남녀부동석(男女不同席)의 전통을 깨고 남녀가 섞여 앉아 보는 콘서트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것도 이러한 변화의 일환이다. 35년 만에 영화관이 다시 등장한다. 말 그대로 변혁이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살만 왕세자가 지극히 보수적인 와하비 종교지도자 제거에 나선 것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유일신론자’ 압둘 와합
 
  와하비란 사우디아라비아 건국 종교이념을 제공한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1703~1792)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와하비는 스스로를 무와히둔(Muwahhidun), 즉 유일신론자(唯一神論者)라고 불렀다. 이들은 믿음과 불신(不信)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종교적 성인(聖人)의 무덤에서 중재를 구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묘(聖墓)를 성스럽게 여기고 성인과 사물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나 행위를 모두 불신앙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대중적 믿음 형태를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묘도 파괴하려고 하였고, 시아파 이맘과 가족의 묘는 이미 없애 버렸다.
 
  이븐 압둘 와합은 스스로가 밝혔듯 네 가지 점 때문에 유명하였다.
 
  첫째, 유일신성(唯一神性)을 엄밀히 주장하였다.
 
  둘째, 다신(多神) 숭배가 무엇인지 어떠한 행위가 다신 숭배인지 규정하고 설명하였다.
 
  셋째, 유일신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불신자로 선언하였다.
 
  넷째, 불신자와 맞서 싸우라는 신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당시 학자들은 이븐 압둘 와합의 이슬람법학 해석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법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그의 친형제인 술레이만이 그가 지닌 신앙관을 비판하고 나섰다.
 
  “하나님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가 그분의 종이고 사도라고 증언하며 예배, 희사, 라마단월 단식, 순례를 행하고, 하나님, 천사, 성서, 사도를 믿는 사람들을 불신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들을 불신자로 만들고 그들이 사는 곳을 전쟁터로 만든다. 우리는 묻는다. 이러한 이슬람법 해석을 어디에서 가져왔는가?”
 
  이븐 압둘 와합은 엄격한 유일신론을 자의적(恣意的)인 잣대로 적용하면서 주변의 무슬림을 불신자로 간주하였고, 그런 생각 때문에 메디나에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자신의 이슬람 해석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히자즈 지방 다르이야의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1710~1765)를 만나면서였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이븐 압둘 와합의 종교사상이 바탕이 되는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븐 압둘 와합이 불신자로 규정한 무슬림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성전(聖戰)을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이븐 사우드의 무력과 이븐 압둘 와합의 종교사상이 결합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서막이 올랐다. 이처럼 18세기에 시작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부침을 겪은 끝에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의 주축국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와하비, TV 방송도 반대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파이살 전 사우디 국왕.
  그런데 문제는 건국의 종교이념이 된 와하비 사상이다. 이븐 압둘 와합 이래 순수한 이슬람 신앙을 강조하고 이에 합당한 신앙인의 개념이 지나치게 엄격하기에 새로운 문물이나 생각이 국가 발전을 이끌어 나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과학문물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근대국가에서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이 좋은 예다. 와하비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해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을 반대하였다. 이슬람이 형상을 금한다고 해석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형상을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였다.
 
  1965년 코란 낭송을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 송출이 시작되었다. 이에 격분한 와하비주의자들이 1966년 방송국을 공격하였다. 파이살 국왕(재위 1964~1975)의 조카이자 와하비주의자였던 칼리드 이븐 무사이드 왕자가 이때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리고 칼리드 왕자의 형제인 파이살 이븐 무사이드가 10년 후 파이살 국왕을 암살하였다. 조카의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파이살 국왕은 텔레비전 방송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교육의 기반을 놓은 왕이다. 그가 여성을 위한 교육 시설을 만들 때에도 와하비주의자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적 정체성을 좌지우지하는 와하비주의자들이 강력한 상태에서 국왕이 근대화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 사우디아라비아가 직면해야 했던 종교문화적 난관과 파이살 국왕의 고민은 다음 편지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쌍둥이 기둥’
 
급진적 서구화를 추구하다가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 전 이란 국왕.
  “나의 형제여, 근대화를 하십시오. 국가를 개방하십시오. 남녀공학 학교를 세우십시오. 여자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게 하십시오. 디스코(Disco)장을 여십시오. 근대화를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신께서 왕좌를 지키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폐하, 충고에 감사합니다. 저는 폐하가 프랑스의 샤(Shah·왕)가 아니시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엘리제(Elysee) 궁에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란에 계십니다. 폐하 국민의 90%가 무슬림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1960년대 후반 이란의 국왕 팔레비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살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 중에 나오는 말이다. 팔레비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화를 권하자 파이살 국왕이 이란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하면서 팔레비가 말한 근대화가 이슬람 문화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우고 여성 교육의 기반을 닦는 등 근대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파이살 국왕은 이란과 달리 강력한 국내 와하비 무슬림 세력과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를 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이란은 왕정국가로 팔레비가 이른바 ‘백색혁명’이라는 이름의 근대화를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과는 달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둘 다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친(親)서방 국가였다. 1970년대 냉전 시절 미국은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둔 두 나라를 ‘쌍둥이 기둥(Twin Pillars)’이라고 부르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중동(中東)을 지키는 안보 동반자로 우대하였다. 이란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동에서 가장 근대화된 친미(親美)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오해가 낳은 갈등
 
  그러나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이 모든 것을 단숨에 바꾸어 버렸다. 이란 왕정을 “이스라엘, 더 나아가 미국을 위한 군사기지”라고 비판한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이슬람혁명이 일어나 이슬람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도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타락한 무슬림 정권을 비난하는 이란의 이슬람혁명 정신이 페르시아만 건너 사우디아라비아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메카 대순례에서 이란 무슬림들의 시위와 구호를 보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종교행사가 정치 선동의 장(場)이 되었다고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놀라움에 전전긍긍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 특히 세계 최대 유전지대에는 이란인들과 같은 시아파 자국민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 왕정을 무너뜨린 시아 형제들의 성공에 고무되어 이들도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에 저항의 깃발을 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려는 지금도 유효하다. 2016년 1월 2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自國)의 시아파 지도자 니므르 안니므르를 전격 처형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에 갈등이 심화된 데에는 오해도 한 원인이 됐다. 이란 순례자들이 메카 대순례에서 외치던 구호를 사우디인들이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이란인들은 “신은 가장 위대하시고(아크바르), 호메이니는 지도자(라흐바르)” “신은 한 분(와히드), 호메이니는 지도자(카히드)”라고 외쳤는데, 호메이니를 가리킨 말인 ‘라흐바르’ ‘카히드’를 ‘아크바르’ ‘와히드’로 오해하였다. 즉 “신은 가장 위대하시고, 호메이니는 가장 위대하시다” “신은 한 분, 호메이니는 한 분”으로 들은 것이다. 신성 모독의 다신론자들이라고 시아파를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사우디 국왕, “이란이 전 세계 테러 이끌어”
 
이슬람혁명 후 귀국하는 호메이니.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사우디에 큰 충격이었다.
  이란혁명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혁명 수출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진정한 무슬림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만 하였다. 이란의 이슬람은 잘못된 것이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이 참된 이슬람임을 이웃 무슬림 형제들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전과 달리 자체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와하비주의자들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다.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누가 진짜 무슬림인지 치열한 경쟁이 가열하게 진행되었다.
 
  2017년 5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였을 때 살만 국왕은 1979년 이후 중동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호메이니 혁명 이후 현재까지 이란 정권은 전 세계 테러를 이끌어왔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시작되기 전 300년간 우리나라는 테러나 극단주의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란은 선량한 이웃들을 모두 거부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보기에 오늘날 중동과 세계를 혼미하게 만드는 무슬림 테러의 근본 원인은 1979년 이란혁명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지난 30여 년간 일어난 일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모습이 아니다. 지난 30여 년간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중동의 모습이 아니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란의 모델을 베끼려고 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문제가 전 세계로 퍼졌다. 이제 이를 없앨 때다.”
 
  그러니까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선도한 경기에서 수동적으로 적응하면서 공세를 막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경기를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란이 만든 게임의 틀을 부수어 버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란은 극단주의 종교사상을 지닌 국가라서 사우디아라비아와 공통의 대화를 나눌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빈 살만 왕세자의 평가다. 더군다나 그가 보기에 이란은 혁명 수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나라다.
 
 
  ‘시아초승달’
 
빈 살만 왕세자가 ‘중동의 히틀러’라고 부르는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또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은 전 세계가 화를 내면 슬쩍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어 비난의 화살을 피하는 강온 전략을 써왔고, 사람들은 이에 속아 왔다고 빈 살만은 분석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란의 술수에 속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더 나아가 빈 살만은 이란 정권이 사우디아라비아가 관장하고 있는 이슬람 성소(聖所)이자 예배 방향인 메카 정복을 꿈꾸고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전투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이란에서 일어나도록 힘쓸 것이라고 전의(戰意)를 다진다.
 
  현재 중동에는 본격적인 반(反)이란 전선이 조성되고 있다.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같은 시아파에 속하는 이란에 유리한 역내 환경이 조성되었다. 2004년 압둘라2세 요르단 국왕이 걱정하면서 내뱉은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초승달’이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2011년 아랍의 봄 혼란기에 발생한 시리아 내전에서 친이란적인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이란의 혁명수비대가 중심이 된 시아파 민병대가 지켜내면서 이란의 영향력이 아랍세계에서 더욱 강건해졌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중심이 되어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란 세력을 축출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젊은 왕세자는 굴하지 않고 다시 공세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중동의 히틀러’라고 부르면서 이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1979년 이란혁명 체제를 무너뜨리기 전에는 중동에 평화가 없다고 단단히 각오를 다지는 중이다.
 
 
  미국-사우디-이스라엘 공동전선
 
  이제 이러한 반이란 전선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은밀히 손을 잡는 중이다. 공개적으로 발표만 하지 않았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권력 핵심부가 상호 협조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러한 사실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머리로 국가전략을 생각하는 지도층과 가슴으로 이스라엘을 대하는 왕정국민 여론 사이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친이스라엘, 친유대교 언행이 사회적 금기인 중동 무슬림 사회의 여론을 함부로 거스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스라엘은 이란만 빼고 역내 모든 국가와 우호관계를 넓히겠다고 선언하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미 “이란은 불량정권, 광신도 정권, 세계 최대 테러지원 국가”라면서 “죽음, 파괴, 혼란”밖에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란핵 협상 폐기를 거론하며 이란을 전면적으로 압박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러한 전개상황을 감안하면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미국의 반이란 전선이 더욱 강고해질 중동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내다볼 수 있다. 이란은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맺어 대응전선을 구축하려는 분위기다. 터키도 이러한 대립전선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빠르면 2017년 12월 혹은 2018년 1월이면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을 옥죄어 온 1979년 이란혁명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빈 살만의 꿈이 이루어질까? 아니면 이란의 경고처럼 빈 살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운명을 걱정해야 할까? 중동의 새해는 실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갯속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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