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한국인의 삶을 규정한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건설-건강보험 시작-새마을운동-중동 건설 시장 진출-4대강 유역(流域) 사업은 세계를 뒤흔든 오일 쇼크 속에서 성공했다.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추구한 유신체제는 월남 패망을 계기로 안정기로 접어든다. 이런 가운데서 기름에 한이 맺힌 박정희의 산유화(産油國) 꿈과 기자의 특종 꿈이 만나는 순간, 나는 실직자가 된다!

- 1975년 겨울 기름이 나왔다는 포항 B 공(孔) 시추탑. 정보부가 위장회사를 세워 뚫었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의 올해 입학시험에서 총점 740점 중 300점을 차지하는 실기문제가 시험 전에 누설돼 최저 30여 명의 수험생들이 실기문제를 1일, 3일, 혹은 7일 앞서 알고 연습한 다음 시험에 응했음이 20일 밝혀졌다.”
10.6대 1(정원 30명에 318명 지원)의 최고경쟁률을 보인 부대(釜大) 미술교육과는 지난 16일에 데생, 17일엔 수채화(정물)의 실기시험을 치렀다. 시험요강에서 데생의 소재는 ①아폴로 ②카라카라 ③미켈란젤로 ④모리엣의 4개 석고상 중 하나를 출제한다고 발표했었는데 모리엣이 출제된다는 정보가 미리 퍼져 적어도 수십 명의 수험생이 모리엣 그리기 연습만 했다는 요지였다.
모리엣을 데생 실기시험의 소재로 선택한 사람은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 이모 과장이었다. 그는 개인 화실을 두고, 부산대학에 응시한 6~7명의 수험생들을 두 달간 일주일에 이틀씩(수, 목요일) 지도해 왔음이 밝혀졌다.
부산대학교는 이틀 뒤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의 시험문제 관리가 허술하여 사전 누설됐음을 시인, 실기시험 중 데생 부문만 재시험을 실시키로 결정했다. 이는 우리나라 대학입시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산대학교는 21~22일에 걸쳐 교수회의를 열고 사후대책을 논의한 끝에 영어 과락자와 학과총점 109점 이하 취득자 및 실기점수 300점의 40%인 119점 이하를 받은 수험생은 재시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120점 이상을 받은 88명의 수험생에 한해서만 24일에 4시간 동안 데생 시험을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
데생 주제가 무엇인지 누설된 것은 필기시험에서 출제 문제가 새나간 것과 달라 입시 부정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미술 전문가들의 평가를 근거로 “채점에 영향을 주는 입시 부정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산대학교의 재시험 결정으로 내 말이 맞게 되었다.
첫 해외 여행에서 만난 일본 택시기사
1975년 4월 나는 첫 해외 여행으로 일본을 22일간 혼자서 여행했다. 전해에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제7회 한국기자상을 받은 데 대한 포상(褒賞)이었다. 도쿄 메구로에 있는 한 오랜 호텔에 투숙한 뒤 저녁을 먹기 위해 라면집에 들렀다. 두 아주머니가 카운터 너머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었는데 찡하더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오면서 바나나를 한 송이 사 가지고 와서 배불리 먹었다. 해외에 가면 가장 먼저 결행하기로 한 일이었다.
도쿄-닛코-아타미-오사카-히로시마-후쿠오카-벳부-시모노세키를 거쳐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일본어가 되니 편했다. 그 뒤 나는 일본의 47개 도도부현(道都府縣) 중 44곳을 더 여행했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해안 휴양지 아타미(熱海)의 역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역 근처의 여관에 들었다. 그러고 저녁을 먹을 겸 도시 구경에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차’ 싶었다. 여관 이름을 기억해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명함이나 성냥갑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우선 택시를 잡아탔다.
“아타미에 여관이 몇 개 있습니까.”
“400개 정도입니다.”
택시로 그 400개를 뒤지다간 날이 샐 것 같았다. 택시기사에게 여관을 잊어버렸다고 하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같이 찾아봅시다. 그런데 역으로 돌아가서 거꾸로 내려옵시다.”
택시기사는 역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오면서 여관마다 들렀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닌데요.”
“혹시 바다가 보였습니까?”
“기억이 안 나요.”
이런 식으로 한 시간 정도 헤맨 끝에 눈에 익은 한 여관 앞에 닿았다. 내 여관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택시기사도 “참 잘되었습니다”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요금도 더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첫 일본 여행에서 만났던 이 택시기사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만큼 일본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 택시기사가 나에게 베푼 호의(好意)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몇 배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루틴 체크, 크로스 체크, 팔로우 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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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부산 한독기계공고를 순시하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이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이다. |
나는 새벽 6시에 출입 경찰서로 나와서 여러 부서를 돌면서 루틴 체크(규칙적 취재), 크로스 체크(확인 취재), 팔로우 체크(추적 취재)를 하는 습성을 익혔다. 특종은 큰 사건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을 일상적으로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걸려든다. 강타자는 홈런을 노려서 치지 않고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스윙을 많이 하다 보면 홈런이 나오는 것이다.
기자는 특종보다 낙종을 하지 않으려고 뛰는 면이 더 강하다. 사건 사고 발생 때 낙종을 하지 않으려면 경찰서 안에 협력자가 있어야 했다. 특히 출동 차량 운전자나 전화 교환원에겐 평소 잘해주었다. 큰 사건에서 낙종하는 기자의 스트레스는 거의 초주검이다. 큰 유괴사건 범인 검거 특종을 라이벌 신문에 허용한 기자가 얼마나 추궁을 당했는지 하루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도 보았다.
나는 루틴 체크의 하나로 아침에 경찰서의 여러 부서를 돈 뒤엔 오전 9시에 꼭 구청 동정계(洞情係)에 전화를 걸어 “간밤에 관내에 별일 없었습니까”라고 묻곤 했다. 살인사건의 경우, 경찰에선 기자들에게 보안을 유지하려 하지만 구청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업무와 관계없어 쉽게 알려주곤 했다.
한국엔 오일 쇼크가 없었다!
세월을 돌아보면 한국을 포함한 1970년대의 세계 역사는 석유에 의하여 쓰였음을 알게 된다. 1960년대의 세계적 호황(好況)은 값싼 석유 덕분에 가능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 전쟁을 계기로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혼내기 위하여 석유를 무기화(武器化)하기에 이르렀다.
석유 파동 시대 황천항해(荒天航海)를 하게 된 한국호의 선장은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1등 항해사는 오원철(吳源哲) 중화학공업 담당 경제수석비서관이었다. 그는 “1973년 크리스마스 전날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보고 국민들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처럼 놀랐을 것이다”고 생전에 회고했다.
석유수출기구(OPEC)가 그해 10월 16일에 배럴당 5.119달러로 약 70%나 올렸던 원유값을 1974년 1월 1일을 기하여 배럴당 11.651달러로 다시 약 100%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1973년 1월 1일 원유값이 배럴당 2.591달러였으니 네 배로 뛴 것이다. 한국의 원유 수입액은 1973년 3억519만 달러에서 이듬해엔 11억78만 달러로 3.5배 늘었다. 석유 파동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 한국은 급사(急死)할 지경이 되었다. 원유값 폭등은 석유 제품을 쓰는 산업뿐 아니라 농산물, 설탕, 조미료, 대중목욕비 등 간접 부문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분야에 원가 상승 압력을 가했다. 1974년 도매물가는 전년도보다 44.6% 올랐다.
그러나 한국엔 제1차 오일 쇼크가 없었다. 통계가 증명한다. 1973년의 경제성장률은 13.2%였다. 쇼크를 전면으로 받은 1974년의 성장률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8.1%였다. 광공업 성장률은 15.3%였다. 수출증가율은 38.3%였다. 수치상으론 오일 쇼크가 없었다.
1974년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2%, 미국은 0.6%, 영국은 -1.8%, 프랑스는 3%였다. 주요 산업국 중 한국이 1등이었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석유 파동을, 그때까지 비슷하던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을 추월하고 선진국 문턱을 향하여 질주하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만들었다. 국력의 조직화에 의한 능률의 극대화로 대역전의 드라마를 쓴 박정희·오원철의 지도력은 영원하고 신비한 연구 대상이다.
지금 미국 트럼프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세계 5대 공업국의 국력으로 버티는 한국의 저력, 조선·전자·자동차·기계·원전·방산(防産)은 박정희가 욕을 먹어가면서 건설한 것들이다. 김종필(金鍾泌) 당시 총리는 생전에 “박 대통령은 ‘석유 자원이 몇십 년 치밖에 남지 않았다’는 식의 비관론을 믿지 않았다. 석유 위기도 일시적일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중화학공업 건설 전략을 수정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고 증언했다.
박정희의 경고
나는 월남전 세대인데 월남엔 가지 않고 공군 관제특기병으로 3년 4개월을 근무했다. 한국군 파병을 기준으로 하면 1965~1975년이 월남전 시대다. 연(延)인원 약 30만 명이 파병되어 약 5000명이 전사(戰死)했다. 박정희 정부는 영악하리만큼 전쟁 특수(特需)를 이용했고 이때 벌어들인 외화는 1960년대의 경제 개발에 소중하게 쓰였다. 특히 월남에서 익힌 해외 건설 실력이 오일 쇼크 이후엔 중동 시장으로 진출하는 길을 연다. 전선(戰線)을 가진 나라는 늘 애국적으로 긴장하게 되는데 이런 분위기는 이 시기 박정희가 단행한 3선 개헌과 유신 선포, 자주국방력 및 중화학공업 건설에 도움이 되었다. 미국 닉슨 행정부는 1973년 월남평화 협상을 맺고는 미군을 철수시켰는데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 선포 직후, 하비브 주한(駐韓) 미국대사로부터 키신저가 마련한 월남 휴전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불길한 경고를 한 적이 있었다.
“침략자인 월맹군의 철수는 규정하지 않고 외국군의 철수만 약속한 것은 불공평하다. 이대로 결정되면 월남은 1년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귀임한 유양수(柳陽洙) 주월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하비브로부터 받은 휴전안을 보여주면서 돌아가서 티우 대통령에게 걱정의 뜻을 전하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국론이 저렇게 분열되어 있으니 결코 안보를 미군에 의존해선 안 된다. 자주국방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능률의 극대화, 국력의 조직화가 유신 선포의 이유다.”
대통령은 수척해 있었고 연신 담배를 피우다가도 이 대목에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집무실을 나올 때 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유신체제의 존폐를 건 국민투표
1975년 월남 패망으로 조성된 안보 위기감은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에게 도움이 되었다. 1974년 가을 김영삼(金泳三)이 신민당 총재가 된 이후 대여(對與) 투쟁 노선을 강화하고 기자들이 언론 자유 운동을 벌이자 박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의 건의를 받아들여 1월 22일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를 선언하고 자신의 거취도 걸었다. 2월 12일 국민 투표율은 79.8%, 유신헌법 찬성률은 73%였다. 관권(官權)의 개입은 있었지만 금품 제공은 없었고 야당과 언론의 비판도 활발했다. 민주화 운동은 썰물기(期)로 바뀌고 정통성을 확보한 박정희는 자신 있게 중화학공업 건설을 핵심으로 하는 국정을 끌고 간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 전까지 조직적 저항이 없었던 4년 반 동안 한국은 박정희의 지도하에 선진 공업국 문턱 앞까지 도달해 나갔다.
위기 때의 무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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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용 전 주월공사. 사진=조선DB |
헬기 탑승은 재개되었으나 다 탈출할 수 있는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9명의 공관원과 140명의 민간인이 헬기를 타지 못했다. 6·25 남침 때 춘천 주둔 제6사단의 중대장으로서 북한군을 3일간 저지, 전세(戰勢)를 바꾸는 데 참여했고 북진 때는 맨 처음 압록강에 도달했던 전쟁영웅 이대용 공사는 5년간 수감되는데 생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사람의 잔류자도 없이 전원이 철수할 수 있는 기회를 한국인 스스로 버렸다. 슬픈 일이었다.”
잘나갈 때는 초인적 힘을 발휘하다가 불리해지면 지휘 계통이 무너지는 한국인의 단점은 위기 때 차분해지는 일본인들과 비교된다. 무사(武士) 지배를 수백 년 받은 일본인들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최선이란 체험적 기억이 있다.
긴급조치 9호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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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5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월남 난민. 한국이 춥다는 얘기를 듣고 구해 입은 누비잠옷이 눈에 띈다. 사진=조선DB |
5월 13일의 가장 큰 기사는 월남 철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제9호 발표였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행위와 이를 보도하는 행위까지 무겁게 처벌하도록 한 긴급조치 9호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인 1979년 12월 8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하여 해제될 때까지 4년 7개월간 존속했다.
原油가 나왔다!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있다. 내가 1970년대에 석유 개발에 집착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점이다. 석유를 중심으로 움직인 세계사의 정신이 나를 조종한 셈이란 것이다. 회고록을 쓰면 그때는 몰랐던 역사적 의미를 흘러간 시간과 더 넓은 공간 속에 놓고 살필 수 있다.
내가 ‘동해에서 대유전 발견’이란 대특종의 상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몰아붙였듯이 기름에 한이 맺힌 박정희 대통령 또한 ‘산유국의 꿈’에 취해 있었다. 두 사람의 비슷한 생각이 만나는 순간, 조갑제 기자는 실직자가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1975년 6월 16일 밤 부산 감만동 바닷가 언덕에 있는 코리아 셀 통신실에서 제6광구 제주도 동쪽 100km 해저 도미 A 공(孔)을 뚫고 있는 시추선 탑승자 B씨를 불렀다. 나는 그의 상관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배 타고 고생이 많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곳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석유는 나오고 있는데 경제성은 의문시됩니다. 내일 정확한 지층조사를 할 예정입니다.”
“몇 미터 지층에서 석유가 나오고 있나요?”
“2400m 부근입니다.”
“얼마나 두꺼운가요?”
“1m 남짓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수고하세요.”
나는 흥분했다. 드디어 원유가 검출된 것이었다. 포항 육지에서, 동해와 서해에서 여러 구멍을 뚫어 천연가스는 나왔지만 원유는 처음이었다. 가스 검출 뉴스가 사회면 머리기사였으니 이건 1면 머리다! 다음 날 《국제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원유가 나왔다’였다.
그런데 가판소년들이 시내버스 승객들에게 내가 쓴 기사의 제목을 들이대며 불티나게 팔고 있는 것을 보니 이내 불안해졌다. 너무 크게 다뤄 원유가 나온 것을 유전이 발견된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고, 내가 전언(傳言)에 근거해서 쓴 것일 뿐 물증이 없다는 점도 있었다. 그날 나에게 원유가 나온 사실을 전해준 B씨가 헬리콥터 편으로 수영 공항에 도착했다. 여러 기자에게 둘러싸인 그를 빼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油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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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6월 제6광구 도미 A 공(孔)에서 기름이 나왔음을 보여주는 검층 보고서. 지하 2480m 부근 검게 표시된 부분이 유징(油徵)의 세기를 나타낸다. 이 원유는 경제성이 없었다. |
개발권을 가진 로열 더치 셀은 다음 날 검층 결과를 토대로 “도미 A는 경제성 없음”이란 결론을 내렸다. 3212m까지 판 결과였다. “몇 개의 사암층(沙巖層)이 최고 30%의 기름을 품고 있으나 생산성이 있는 원유나 가스층은 아니다”는 평가였다. 이렇게 되니 동료 기자들 사이에선 내가 오보를 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부와 경쟁지에서 그런 식으로 몰아가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한국(대륙붕)에서 최초로 원유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할 의무가 있었다. 셀의 검층 보고서를 확보하는 길밖에 없었다. 50년이 지났지만 내부 협력자와 쓰레기통의 도움을 받았다는 정도로만 밝힌다.
검층 보고서는 해저 유전이 형성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여 유층을 덮는 배사(背斜) 구조의 결함, 저유암(貯油巖)의 투수율(透水率)과 공극률(空隙率)이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셀은 도미 A 실패 이후 장소를 옮겨 소라 A 공을 3150m까지 뚫었으나 여기서도 유징(油徵)은 나왔으나 유전 발견엔 실패했다. 동해는 대규모 유전의 절대적인 조건인 거대한 석유 생성 지층이 결여되어 있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4년 6월 초 동해에 140억 배럴 규모의 세기적 유전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표한 당일 내가 자신 있게 “제2의 포항 석유 대소동이 될 것이다”고 단언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퇴적층을 뚫으면 천연가스나 석유가 나오는 것은 구름이 끼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문제는 그 양(量)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대”
1975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담당 수석비서관 오원철을 서재로 불리는 집무실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회의용 탁자에 앉아 오 수석을 맞았다.
“부르셨습니까?”
“어, 이봐,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대.”
박 대통령은 시커먼 액체가 들어 있는 링거병을 보여주더니 마개를 뽑고 액체를 큼직한 재떨이에 조금 부었다. 성냥불을 갖다 대니 옮아 붙었다. 시커먼 연기도 났다.
오원철은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원유에는 가스 성분, 휘발유 성분, 경유·중유 성분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가스 성분이 펑 하고 소리를 내면서 불이 붙는다. 그런데 이 기름은 정제되어 나온 석유처럼 얌전하게 불탔다.
그는 직감적으로 원유가 아니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석유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만 했다.
“각하, 그 기름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제게 주십시오.”
그는 병을 가져와서 김광모 비서관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또 누가 엉터리 보고를 한 것 같아.”
두 사람은 정보부가 포항에서 위장회사를 만들어 시추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석유가 나왔다는 흥분된 보고가 허위로 밝혀지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다. 우물을 파다가 기름이 떠오른다고 해서 현장 조사를 해보면 근처에 미군이 6·25 전쟁 때 기름 탱크를 두고 있었고, 그 기름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우물을 팔 때 물에 섞여 나온 것으로 밝혀지는 식이었다.
김광모 비서관은 가까이 지내는 호남정유의 기획담당 임원 한성갑씨를 불렀다. 오원철 수석은 기름이 든 유리병을 그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가장 빠른 편으로 미국 칼텍스에 보내서 시험을 하되 신중을 기하시오. 원유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보내주시오.”
“어디서 나온 겁니까.”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이건 원유가 아니고 경유입니다”
한 4일이 지났을까, 한씨가 분석 보고서를 들고 들어와 오원철 수석에게 설명을 했다.
“이것은 원유가 아니고 경유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포항에서 나온 기름을 갖고 가서 증류 시험한 그래프를 펴 보였다. 원유에 열을 가하면 어떤 성분은 낮은 온도에서 증발하고 무거운 성분은 높은 온도에서 증발한다. 이걸 온도곡선으로 그리면 야산(野山)의 능선 모양이 된다. 그런데 한성갑이 보여준 그래프는 담뱃갑을 측면으로 세워놓은 형상이었다. 제로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경유가 증발하는 온도에서 갑자기 선이 수직으로 올라가서 한동안 평평해졌다가 경유 성분이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떨어져 다시 제로가 되는 것이었다.
이 그래프를 보고 오원철은 이 기름은 경유 성분만 있고 다른 성분은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휘발유·등유·경유·중유 성분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 원유인데, 경유 성분만 검출되니 이 기름은 정유회사에서 나온 경유일 수밖에 없었다.
한씨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이 그래프를 보니 호남정유에서 경유를 만드는 온도곡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대한석유공사 제품일 것입니다.”
“경유는 거의 투명한데 무엇이 섞여 있다는 거요?”
“중질유가 극소량 있습니다.”
오원철 수석은 지질연구소 소장을 전화로 불렀다.
“포항에서 기름을 파고 있다면서요?”
소장은 마지못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시추할 때 경유를 윤활(潤滑)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오원철은 포항 B 공에서 경유가 나왔고 정보부에서 이를 원유라고 오해한 까닭을 이렇게 추리해 보았다. 다른 구멍을 팔 때 쓴 윤활 목적의 경유가 바위틈에 스며 있는 것을 B 공 시추 때 건드려 이게 땅속에서 올라오니 “기름이 나왔다”고 오해한 것이다.
産油國의 꿈
1975년 12월 6일,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오원철 수석에게 기름병을 보여준 다음 날 오전 9시30분부터 청와대 회의실에서 경제 각료들과 중동문제연구소 연구원들 간의 회의가 열렸다. 낮 12시30분경 회의가 끝나자 박 대통령은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에게 “김 실장, 내 집무실에 있는 그것 좀 가져와보시오”라고 했다. 잠시 후 대통령의 책상 위에 검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놓였다.
박 대통령은 “내가 오늘 여러분께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주겠소. 우리나라 포항에서 기름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그 원유니까 한 번씩 돌려가면서 보시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했다.
12월 9일 박 대통령은 대구에서 열리는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열차를 탔다. 열차가 경기도 안양에 이르렀을 때 옆 칸에 타고 있던 임방현(林芳鉉), 장동운(張東雲), 박진환(朴振煥) 특별보좌관들을 불렀다.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원유를 개발하게 된 경위와 실용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문제점 등을 자상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은 석유가 나오는 꿈을 꾸다가 깨는 바람에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측근들에게 한 적이 있었다. 석유에 한이 맺힌 대통령은 원유(경유)가 담긴 병을 자신의 집무실에 둔 이후부터 틈만 있으면 누군가에게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날 저녁 숙소인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열린 만찬장에서도 박 대통령은 기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다음 날 새마을지도자대회가 끝난 뒤 전국 지방장관들과 가진 오찬 석상에서도 박 대통령은 이 소식을 알렸다. 유신체제의 당부를 물은 국민투표, 월남 패망 등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1975년 세모(歲暮)의 한국 사회는 대통령으로부터 번지기 시작한 석유의 꿈을 타고 저물어 갔다.
나는 정부가 포항에서 석유를 발견하고도 비밀에 부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상하다는 느낌부터 왔다. 퇴적층이 큰 해저에서도 유전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빈약한 육지에서? 혹시 유징을 유전으로 착각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