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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해부

朴志晩 同期 陸士 37期生들

悲運의 황태자 期數인가, 특혜 받은 期數인가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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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생 8명 중장 진급… 현 정부에서 육군총장 등 군 수뇌부 발탁 가능
⊙ 육사 37기, 합참 작전본부장·기무사령관·특전사령관·정보본부장 등 군 핵심 요직 포진
⊙ 박지만 회장, 아버지에게 “훈육관 임형주 소령 가장 존경한다” 말해
⊙ “현 정부 내내 지만씨와 37기에 불편한 시선 쫓아다닐 것”(37기 동기생)
육사 입학식 때 박지만 생도의 모습.
  장경욱(張璟旭) 전 기무사령관 경질 파문이 일면서 ‘육사 37기’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장 전 사령관의 후임인 이재수 중장이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朴志晩) EG 회장과 중앙고·육군사관학교(육사) 동기인 데다 그 동기들이 합참 작전본부장, 정보본부장, 특전사령관 등 군(軍)의 핵심 요직에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군의 친정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 수뇌부 인사를 무리하게 단행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군 안팎에선 장 전 사령관의 경질 배경에 육사 37기들이 직접 관련됐다는 소문도 있다. 장 전 사령관이 육사 37기들의 약진에 제동을 걸려다가 좌절됐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25일 정부가 총 110명에 달하는 중장급 이하 군 인사를 단행하자,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육사 37기에 쏠렸다. 예상대로 육사 37기들의 ‘약진’이었다. 이재수 교육사령관은 논란 속에 기무사령관에 임명됐고, 신원식 수방사령관은 대장 진급 1순위인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인범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소장)은 특전사령관으로 발탁됐고, 지난해 10월 ‘노크 귀순’으로 징계대상에 올랐던 엄기학 당시 합참 작전부장도 군단장으로 진출하면서 부활했다. 조보근 정보사령관도 국방부 정보본부장으로 진급했다.
 
  육사 37기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중장으로 진급하기 시작했다. 신원식 합참 작전본부장과 양종수 군단장이 동기들 중 처음 진급했고, 지난 4월 인사에서 이재수 사령관 등 3명이 더 진급했다. 지난 10월 25일 인사에서 전인범, 엄기학, 조보근 장군 등 3명이 나란히 별 셋을 달아 37기는 지금까지 총 8명의 중장을 배출했다. 통상 한 기수에서는 3~5명이 중장에 진급한다. 이들은 현 정부에서 대장 진급과 함께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로 발탁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기무사령관을 지낸 새누리당 송영근(宋泳勤) 의원(육사 27기)은 지난 11월 1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김관진 국방장관에게 “기무사령관에게 수방사령관(신원식)의 부적절한 처신 내용을 보고받은 적이 있느냐”며 “수방사령관 간 지 1년 만에 (합참) 작전본부장이 됐는데 그렇게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신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 장성 인사에서 중장으로 진급해 수방사령관에 취임한 지 1년 만인 이번 인사에서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김 장관은 “특별히 수방사령관에 대해 보고를 받았거나 한 것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넘어갔다.
 
  정치권도 국방부의 인사를 질타했다. 박지원(朴智元) 전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월 28일 열린 국회 법사위 군사법원 국감에서 “이명박 정부는 형님 인사로 만사형통(萬事兄通), 박근혜 정부는 동생 인사로 만사제통(萬事弟通)”이라고 꼬집었다.
 
 
  “37기 약진은 과장된 측면”
 
지난 10월 28일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법사위 국방부 국정감사에 출석한 백낙종 국방조사본부장(맨왼쪽)과 이재수 국군기무사령관(가운데).
  박지만 회장과 동기인 육사 37기생들은 지난해 대선 때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들이 군 실세로 부상할 것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이 무렵부터 박 회장이 육사 동기 모임에 참석한 일이 뒤늦게 화제가 되고, 동기 중에서 누구와 가깝게 지낸다는 얘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최근의 발표 인사 명단을 살펴보면,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한 육군 장성은 모두 여섯 명이다. 이 중에서 절반인 세 명이 박 회장의 육사 동기들이다. 올해 4월 전반기 인사에서는 네 명 중 세 명, 지난해 10월 후반기 인사에서는 다섯 명 중 두 명이 37기였다.
 
  세 차례 진행된 인사에서 중장으로 진급한 15명 중 8명이 박 회장의 육사 동기인 셈이다. 이 기수가 중장 진급 시기이기는 하지만, 다른 기수에 비해 많다는 지적이 제기됐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해 후배인 38기에서 김용현 수방사령관 한 명만 중장으로 진급한 것을 두고 37기가 다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중·대장급 인사를 국방장관이 혼자 단행했다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진급자들을 뜯어보면 국방장관 계열, 청와대 안보실장 계열, 경호실장 계열, 국정원장 계열로 분류되는 인사들로 고루 섞여 있다고 보는 게 맞아 보인다. 심지어 군 내에서는 해군출신 합참의장이 최초로 탄생한 것에 대해 김기춘(金淇春) 청와대 비서실장이 해군 법무관 출신이어서 가능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들 인사가 진급할 만한 자격이 있느냐 여부가 핵심이라고 한다. 기무사가 비판한 인사들 상당수는 이명박(MB)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 정권 수혜자 명부’라는 기무사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려져 ‘변방’으로 내쫓겼다가 김관진 장관의 취임과 함께 복권됐다. 인사라는 게 통상 결과를 놓고 인맥을 연결시키면 모두 그럴듯한 해석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청와대와 국방부는 적어도 군 인사를 하는 데 한배를 탔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장경욱 전 기무사령관이 군 인사를 비판한 것은 청와대를 싸잡아 비판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 육사 출신인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생도 때 독일유학 경험이 있는 소위 ‘독일 육사’ 출신들을 챙긴다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예비역 장성은 “유제승 중장(수도군단장), 김현집 중장(합참차장) 등 독일 유학파 장성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라며 “이상희(李相憙) 전 국방부장관이나 김병관(金秉寬) 합참의장은 전략기획 분야에서 튀었던 독일 유학파를 선호했다”고 했다.
 
  28사단장과 육군대학 총장을 지낸 류대우(柳大雨) 육군협회 사무총장(육사 30기·예비역 육군소장)은 “2001년 36기·37기 대령 진급심사 때 심사위원으로 들어갔었다”며 “당시 느낌으론 36기생들 못지않게 37기생들에도 ‘인재’들이 많았다”고 했다. 류 장군은 “당시 대령 진급 심사를 1차로 통과한 인물들이 이번에 모두 군단장급으로 진급했다”며 “우리 30기 동기들도 당시 이영계(李永桂) 수방사령관, 김진훈(金鎭勳) 특전사령관, 허평환(許坪桓) 기무사령관 등 이른바 핵심 보직을 차지하면서 37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 언론들이 37기가 대약진했다고 하는 것은 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했다.
 
 
  37기 4인방, 신원식-이재수-전인범-조보근
 
신원식 합참 작전본부장.
  동기 중에서 선두주자로 평가받아 온 신원식 중장은 합참 내에서 핵심 보직으로 꼽히는 작전본부장을 맡았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부산 동성고를 나온 그는 지난해 10월 후반기 인사에서 일찌감치 중장으로 진급해 군단장 보직인 수방사령관에 취임했다.
 
  중장 진급 후 1차 보직으로 군단장을 맡게 되면 보통 18개월 이상 근무한 후 2차 보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런데 신 본부장의 경우, 그 기간이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례적인 인사라고 한다. 합참 작전본부장은 한 달 전에 있은 수뇌부 인사에서 연합사 부사령관(대장)으로 진급한 박선우(朴宣宇) 장군(육사 35기)이 맡았던 자리다.
 
  신 본부장은 박근혜 정부의 초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박 대통령 당선 후 경호 책임자로 군 출신이 중용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박 회장의 육사 동기들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경호 책임자가 장관급으로 격상되면서 한참 선배인 박흥렬(朴興烈) 전 육군참모총장(육사 28기)이 최종 낙점됐지만, 이때부터 육사 37기의 전성시대가 올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이재수 기무사령관의 경우는 또 다른 측면에서 주목받았다. 박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이 사령관에 대해선 중장으로 진급한 올해 4월 전반기 인사 때부터 주요 보직에 기용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주특기가 인사 분야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맡고 있던 그가 인사사령관에 임명된 것을 두고 ‘의외’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지난 4월 인사에서 이미 기무사령관 하마평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기무사령관으로 한 기수 선배인 장경욱 소장(당시 한미연합사 부참모장)이 기용된 것도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장 소장은 합참 정보생산처장, 합참 군사정보부장 등을 거친 대표적 ‘정보통’이었다.
 
  그런데 10월 후반기 인사에서 장 전 사령관이 6개월 만에 물러나고 그 자리를 이 사령관이 차지했다. 국방부는 “직무대리로 운영해 왔던 기무사령관에 기무사 개혁과 발전에 좀 더 적합한 이재수 중장을 임명하게 됐다”고 설명했지만, 4월 전반기 인사 때를 떠올리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장 전 사령관이야말로 대북 정보통으로 기무사 개혁의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 전 사령관은 정보분석 능력은 탁월했지만, 정치적 감각은 떨어진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이재수 중장을 기무사령관으로 세운 것은 여러모로 상징성이 크다. 보안사의 탄압을 받았던 박 대통령이 그 후신인 기무사 수장(首長)에 자신의 측근을 앉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에서는 이재수 기무사령관 인사가 되레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게 될지 모른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런데 그런 논리라면 4월 전반기 인사에서 이 사령관을 임명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된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발표하는 군 인사에서부터 대통령의 동생과 가까운 친구를 군 정보기관의 수장인 기무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덜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국제통’ 전인범 특전사령관
 
전인범 특전사령관.
  37기 중에서 전인범 특전사령관은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을 지낸 ‘국제통’이다. 모친은 초창기 외교관을 지내고 1987년 사회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홍숙자(洪淑子) 여사, 부인은 심화진(沈和珍) 성신여대 총장이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 당시 중상을 입은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을 둘러업고 현장을 빠져나와 인근 병원으로 달려가 유창한 영어로 현지 의료진에게 “이분은 꼭 살려야 할 한국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이라고 매달렸다는 일화도 있다. 전 사령관은 전작권 전환 시기, 미국 미사일방어(MD) 편입 여부 등 한미 간 군사적 논의 사항이 많아질 것을 대비한 인사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인사에서 조보근 전 정보사령관은 국방부 소속 국방정보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육사 37기들은 기무사령부와 국방정보본부 등 정보라인을 장악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박지만 EG 회장의 육사 동기로 최근 중장으로 진급한 엄기학 1군단장은 지난해 10월 북한군의 이른바 ‘노크 귀순’ 때 지휘 라인인 합참 작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엄 군단장에겐 올해 1월 징계위원회를 통해 견책 처분이 내려졌다. 하지만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지휘관 확인 조치권을 발동해 징계 수위를 ‘징계 유예’로 감경했다. 6개월간 진급 심사에서 배제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이 있었지만 합참 작전기획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번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 회장의 동기 중에는 준장으로 진급한 늦깎이 장군도 있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남재준(南在俊) 국정원장의 군사보좌관으로 갔던 고명현 준장이다. 진급 대상에 오른 지 8년 만에 별을 달았다. 4년 후배인 41기가 소장으로 진급한 것과 비교하면 진급이 한참 늦었다. 고 준장은 국정원으로 갈 때부터 화제가 됐다. 준장이나 소장이 임명되던 자리에 처음으로 대령이 임명됐기 때문이다. 남 원장이 그를 각별히 챙겨 별을 달게 해 줬다는 뒷말이 나오는 이유다.
 
  군에서는 보통 진급 대상에 오른 후 3차 시기를 놓치면 진급이 어렵다고 한다. 고 준장의 경우 임기제라는 점에서 여기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기는 했다. 임기제는 진급 적기가 지난 인사에게도 진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줌으로써 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는 취지에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후배 자리를 뺏는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고 있다. 갈수록 자기 사람 챙기기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군 내의 불만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고 한다.
 
  한편, 지난해 10월 인사에서 양종수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이 37기로는 처음으로 2군단장으로 나갔고, 새 정부 출범 직후인 올 4월 인사에서 김영식 5군단장, 박찬주 7군단장이 중장으로 진급하며 군단장으로 진출했다. 지난달 엄기학 1군단장이 가세하면서 37기는 4명의 야전 군단장을 배출했다.
 
 
 
박지만의 스승, 임형주 소령

 
1978년 부사관 과정 교육을 받고 있는 아들 지만 육사생도(맨 오른쪽)를 찾아온 박정희 대통령과 근혜, 근영 양.
  박지만 회장을 비롯한 육사 37기생들은 대학으로 치면 ‘77학번’이다. 어찌된 일인지 육사 37기에는 다른 기수보다 현역 장성을 비롯해 군 자녀가 상당수 입학했다고 한다. 한 예비역 장성(육사 37기)은 “통상 기수당 1, 2명에 그쳤던 고위 장성의 아들이 37기엔 10명이 넘었다”며 “우리 중대에도 김영선(金永先·육사7기·중장) 중앙정보부 2차장의 아들인 김현수(국군체육부대장 역임) 등 장성 아들이 두 명이나 있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7년 입교한 육사 37기는 350여명 입교해 박지만씨를 포함해 총 293명이 임관했다. 현재 130여명이 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계급으로 보면 중장부터 대령까지 분포돼 있고, 37기 대령들은 내년에 만기 전역할 예정이다. 그만큼 박지만 회장의 육사 입교는 장안의 화제였다.
 
  1977년 1월, 육사 37기 예비 생도 350명은 6주간의 기초군사훈련에 들어갔다. 웨스트포인트에서 소위 ‘Beast Training’이라고 부르는 혹독한 가입교 훈련과정이었다. 신입생들의 가입학일 야간에 화랑관 광장에 예복을 입은 선배들이 사자굴을 만들어 가입학 생도들이 그곳을 통과하게 한다. 연대장 생도는 새끼 사자의 시련을 비유하며 기초군사훈련을 독려한다.
 
  “고요하던 이곳 태릉골에 포효하는 새끼 사자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백수의 왕자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먼저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떨어뜨린 다음 살아나는 새끼만을 취해 기른다고 한다/이제 기훈 근무 생도들은 스스로 어미 사자가 되어 귀관들을 하나씩 하나씩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뜨리는 시련과 고통을 가할 것이다/여기서 살아남는 자는 화랑의 후예로서 국가와 민족의 수호신이 될 것이요, 여기서 쓰러지는 자는 영원한 인생의 패배자가 될 것이다….”
 
  기초군사훈련 교육은 곧 4학년이 될 34기 선배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과정을 마치는 날, ‘기훈 근무’ 선배가 육사 37기 전 교육생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육사에 온 사람이나 군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손을 들어라!” 이때, 한 예비생도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를 본 기훈 선배들은 황당해하며 술렁였다. 그 생도는 바로 박지만이었다. 육사 37기의 생도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을 지낸 김국헌(金國憲) 장군(예비역 육군소장)은 박지만의 1학년 생도 시절을 회고했다. 김 장군은 훈육관 임형주(任炯周) 소령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1학년 생도 시절 박지만은 유난히도 불안해 보였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훈육관 임형주 소령(작고)이었다. 교장 정승화 장군이 ‘태자(太子) 사부(師傅)’를 고르고 골라서 선택한 것이다. 임 소령은 육사 생도 생활을 감동적인 필치로 소개한 《서울의 동북》의 저자로서 따뜻한 성품과 높은 기개를 지닌 청년장교였다고 한다.
 
  경북 금릉 출신의 정승화 장군이 호남 출신의 훈육관을 선발해 사부로 임명한 것도 지역성을 따지지 않은 선택이었다. 박 대통령이 박지만 생도에게 “가장 존경하는 군인을 말해 보라”고 하였더니 임형주 소령을 꼽았다고 한다. 직속상관과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 군인으로서, 사관생도로서 바른 자세임을 알고 있는 사범학교와 사관학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은 빙긋이 미소지었다고 한다.
 
  김국헌 장군이 임형주 소령에게 들은 에피소드 또 하나. 박지만이 처음 입교하던 날, 박 대통령은 경호원 한 명만을 대동하고 태릉의 육사로 아들을 데려가 박지만에게는 “잘해라”, 훈육관에게는 “부탁한다”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 들여보냈다. 박 대통령은 아들이 훈육관과 함께 육사 연병장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모습은 아들을 군에 보내는 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한다. 사관생도 생활이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박 대통령으로서 귀공자로 자란 아들을 사자 굴에 들여보내는 것에 마음이 쓰였을 것이다. 임형주 소령은 생전에 박 대통령의 부정(父情) 어린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박지만 생도는 1학년 때 임형주 훈육관에 이어 2학년 때는 김창호 훈육관, 3~4학년 때는 한민상 훈육관이 지도했다.
 
 
  이승만의 양아들 이강석의 경우
 
아버지 영정 앞에서 하직을 고하는 대통령의 세 자녀. 1979년 11월 3일 중앙청 앞 영결식장에서, 가운데 선 박지만 생도는 육사 내무반 잠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새벽같이 집으로 불려왔다가 비보를 들었다.
  육사는 절차탁마(切磋琢磨·《시경》에 나오는 말로 부지런히 학문과 덕행을 닦음) 제도에 따라 동기생들의 개인주의와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육사 37기를 전후한 생도들은 박지만 생도의 사관학교 생활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박지만씨와 인접 중대에서 생활했던 한 예비역 장성(육사 36기)은 “대통령 아들의 티를 내지 않고 사관학교 생활에 적응하려고 부단하게 노력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과묵한 편이었지만 유머 감각은 뛰어나 동기와 선배들을 많이 웃겼다”고 했다. 다른 예비역 장성(육사 37기)은 “3, 4학년 때는 중대장 생도로 활동하며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며 “동기생들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었고, 게으르거나 이기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동기생들은 박지만 생도가 체력이 강인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동기생인 한 예비역 대령은 “박지만 생도는 호리호리하고 날렵해 100m를 평균 11초대에 주파했다”며 “입학 직후 열린 춘계체육대회에서 선배들에게 발탁돼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육사 대표선수로 출전했고, 이용문장군배 승마대회에도 출전했다”고 했다.
 
  박지만씨에 대해 특별대우는 없었을까. 동기생들은 입을 모아 “특혜는커녕 대통령 아들과 동기생이라는 이유로 곤욕을 치른 경우가 더 많았다”고 했다. 육사 38기의 한 대령은 “당시 37기의 선배 기수들은 박지만 선배가 포함된 37기에 편견을 갖고, 다른 기수라면 그냥 넘어갈 일도 더 엄격하게 얼차려를 줬다”며 “특히 시골에서 올라온 선배들은 정의감에 불타 유명인사 자제들의 잘못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영웅심리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육사에 들어간 것은 박지만씨가 처음이 아니다. 당시 이기붕(李起鵬) 국회의장과 박마리아의 장남으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李康石)은 육사 16기로 입학했다. 1956년 입교한 그의 동기생들은 강재구(姜在求) 소령을 비롯해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 이필섭(李弼燮) 전 합참의장, 장세동(張世東) 전 안기부장, 천용택(千容宅) 전 국방부 장관 등이다.
 
  동기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이강석은 상급생에게 복종을 잘하고 잘생긴 용모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으나, 체력이 약한 편이어서 완전군장을 하고 M1소총을 들고 행군할 때 무척이나 힘에 부쳐 보였다”며 “당시 교장은 장창국(張昌國) 장군이었는데, 이강석은 결국 1학년 전반기를 마치고 퇴교하고 말았다”고 했다.
 
  이후 이강석은 서울대 법대로 편입했으나, 당시 서울법대생인 남재희(南載熙·노동부장관 역임)를 중심으로 ‘부정편입’에 따른 동맹휴학에 돌입하자, 이강석은 서울법대를 중퇴하고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18개월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이 전 원장은 “우리가 육사 3학년 때 이강석이 소위 계급장을 달고 우리를 면회 온 적이 있다”며 “이강석이 육사에 들어오는 바람에 보급품과 부식의 질이 확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강석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지 이틀 뒤인 4월 28일, 경무대에서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쏜 뒤, 자신도 자살했다.
 
  이 전 원장은 “서울고 출신인 이강석이 입학하면서 강재구 동기를 비롯해 서울고생 30여 명이 대거 입학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권력 2인자인 이기붕 의장도 여느 학부모처럼 1학년 전반기에 면회를 올 때면 시외버스를 타고 태릉으로 와 줄을 서서 면회신청을 하곤 했다”며 “아들 이강석과 친구 대여섯 명을 태릉 숲속으로 데리고 가 고기를 구워 먹이며 ‘많이들 먹으라’고 하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
 
 
 
미스유니버스들과 ‘즉석 댄스’

 
육사시절 제10회 이용문장군배 馬術대회에 참가한 박지만 생도.
  37기 육사 생도들은 하계훈련 기간 당시 영내 군사훈련(1학년), 제2하사관학교 교육(2학년), 유격훈련(3학년), 공수낙하훈련(4학년)을 받았다. 김충배 전 육사교장은 “37기가 2학년 때 간현유격장이 있는 원주 하사관학교(현 36사단 자리)로 인솔했었다”며 “첫 하계훈련이라 훈육관들이 박지만 생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원주 하사관학교를 방문해 정승화 1군사령관의 영접을 받고 지만씨를 격려했다.
 
  37기의 한 예비역 대령은 “오후 훈련 도중 회관으로 모이라고 해서 전투복을 챙겨 입고 가 보니 박 대통령과 둘째 근영 양이 지만이와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며 “박 대통령이 훈련생도들이 통닭 한 마리씩을 먹을 수 있도록 금일봉을 넉넉하게 전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지만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정승화 총장이 박 대통령의 코트에 털이 묻어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며 “37기가 입학할 때 육사교장이었던 정승화 총장은 이후 1군사령관을 거쳐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는 육군참모총장까지 진급했다”고 했다.
 
  37기 동기회의 한 간부는 “1979년 여름, 포천 8사단 신병교육대 훈련장에 갔는데 대통령 아들 기수가 왔다며 쓸고 닦고 했다고 들었다”며 “우리는 처음 가는 야전부대라 부대가 원래 이런가 보다 했고, 삼계탕을 주면 부식이 원래 이런가 보다 했다. 훈련을 마치고 육사에 복귀하면서 선배들이 37기 동기 전체를 집합시켰다”고 했다.
 
  그는 “해당 부대의 갓 졸업한 육사 선배들이 육사 선배들이나 훈육관들에게 전화를 걸어 ‘박지만이 때문에 하사관학교 학생들이 교육도 못하고 쓸고 닦는다’고 해서 얼굴을 못 든다고 했다”며 “우리들은 대통령 아들이 지원한 줄도 모르고 육사에 들어왔는데, 선배들은 ‘유사 이래 너희가 훈련소에서 삼계탕을 처음 먹었다’고 말해서 속상했다”고 했다. 그는 “하도 36기 선배들에게 들볶이다 보니 38기 후배들을 교육시킬 여력이 없어 동기들 사이에선 38기들이 기어오른다는 이야기도 했었다”며 “동기생 중 전인범 특전사령관이 ‘잔인범’ 소리를 들어 가며 후배들 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면 선배 노릇도 못할 뻔했다”고 했다.
 
  지휘관들이 37기생들을 알아서 ‘모신’ 케이스도 있다. 1979년 3학년 때 상무대유격장(동복 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받던 37기생들은 유격훈련의 대미를 장식하는 고난도 훈련인 레펠을 탑승하고 있었다. 레펠은 산꼭대기에서 와이어를 잡고 활강해 저수지에 낙하하는 훈련이었다. 그때 갑자기 김모 보병학교장이 “여러분들 수고한다”며 나타났다.
 
  한 예비역 장성(37기)은 “50세의 김 장군이 훈련생들과 똑같이 ‘유격, 유격’ 구호를 외치고 활강을 해 저수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며 “이전 기수들은 전투병과학교장이 활강을 한 적이 없는데 37기생들이 레펠을 탈 때 ‘특별 시범’을 보여줘 힘은 났지만 의아했다”고 했다.
 
  37기생들은 지금도 동기들 모임이면 어김없이 1980년 세계미스유니버스대회 이야기를 꺼낸다고 한다. 1980년 7월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미스 유니버스 본선대회가 열렸다. 본선은 이날 하루였지만, 사전 행사와 예선은 6월 말부터 시작돼 3주에 걸쳐 열렸다. 본선은 미 CBS방송을 통해 위성중계됐다.
 
  69개국에서 온 ‘미(美)의 사절’은 신군부 세력의 ‘문화정치’ ‘스펙터클 정치’에 소도구로 동원됐다. 미녀들은 말 그대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경복궁·불국사 같은 관광지를 찾고, 육군사관학교도 찾았다. 한 예비역 장성(37기)은 “37기 생도들은 제식훈련과 분열 시범을 보였다”며 “당시 언론은 ‘미녀들이 원더풀을 연호했다’고 보도했다”고 했다.
 
  그는 “37기생들은 거여동 공수훈련장에서 점프훈련을 받다가 ‘신장 173cm 이상 생도 열외하라’는 지시를 받고 80명의 생도들이 화랑복을 입고 7월 8일 열린 본선(세종문화회관)에 직접 나가 참가자들을 에스코트했다”고 했다. 그는 “화랑복을 입고 롯데호텔 파티장까지 가서 미녀들과 즉석 댄스도 추었다”며 “행사가 끝나자마자 점프훈련장인 거여동으로 복귀해 철모를 쓰고 다시 공수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軍 통수권자에 야단맞는 피라미 육사생도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오른쪽)과 아들 지만씨(맨 왼쪽).
  박지만이 생도 3학년일 때 10·26 사태가 일어났다. 그의 동기들은 최고 권력자로 군림해 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하나뿐인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정권의 감시 대상으로 전락한 인간 박지만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1981년 2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지만, 그의 군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년 대위로 전역한 후 군과의 인연은 사실상 끊어졌다.
 
  박지만 회장은 1997년 4월 《월간조선》과 인터뷰를 했다. 당시 박 회장은 네 번째 마약 복용으로 집행유예 3년에 200시간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석방된 상태에서 하루 9시간의 사회봉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고독, 그리고 자신의 39년 방황을 이야기하며 육사 생도 생활을 회고했다. 인터뷰 내용 중 육사 생도 시절을 회고하는 부분만 발췌해 소개한다.
 
  <—아버님에게 매를 직접 맞았나요.
 
  “고교 시절에는 때리지 않으셨어요. 제가 육사 다닐 때 처음 맞았지요. 그때 제 심경이 어땠는지 아세요? 피라미 육사생도가 국군 최고통수권자 앞에 서서 야단맞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봐요.”
 
  —육사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데 그랬습니까.
 
  “저는 사춘기가 참 길었어요. 자유스럽고 싶었죠. 내 맘대로 행동해 보고, 내 맘대로 친구들을 만나고, 내 맘대로 어디든지 가고 싶었죠. 그런데 그게 해결이 안 됐어요.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까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니까 경호가 더욱 엄해졌어요.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런 불만을 얘기하면 친구들이랑 놀러가게 해 주셨는데, 어머님이 안 계시고 경호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높아져 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됐죠. 그런 사춘기가 육사 갈 때(1977년)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육사에 가자 고등학교 때 못하던 반항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요. 아버님이 그래서 많이 화가 나셨죠.”
 
  —육사에서는 매주 외출을 했습니까.
 
  “그건 학년마다 달랐어요. 1학년은 한 달에 한 번 외박, 2학년 때는 두 번, 3학년 때는 세 번, 4학년 때는 매주 외박이 됐죠.”
 
  —어머님이 1974년에 돌아가시면서 그 후 아버님의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제 기억에는 아버님의 패기 같은 것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많이 약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남자가 훌륭하게 되려면 여자가 그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
 
  —1979년 10·26 사건이 나기 직전의 아버님은 어땠습니까.
 
  “저는 그때 육사에 있었기 때문에 잘 몰라요. 그런데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게 있어요. 10·26 나기 바로 전 주말, 제가 외출외박을 했었어요. 청와대 2층에서 귀영하기 위해 생도 옷을 입고 내려가는데, 그날 따라 아버님이 청와대 뒤편 주방 쪽까지 따라 나와, 인사하는 저에게 ‘그래 잘 가, 잘 가’ 그러시더라고요. 평상시엔 안 그러셨던 분이죠. ‘응, 그래 가서 고생해’ 뭐 이 정도였죠. 그래서 제가 ‘아버님,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자꾸만 해도 ‘그래 가, 가’라며 계속 안 들어가셨어요.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계단을 내려왔는데 돌아보니 아버님이 계단 위에 서 계셨어요. 몇 번 ‘그럼 가겠습니다, 가겠습니다’고 인사를 하고 육사로 귀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져 갔고 기자의 시선을 피해 사무실 창쪽으로 몇 번씩 고개를 돌렸다.
 
  —10·26 사건 당일에는 어디 있었습니까.
 
  “돌아가시던 날은 금요일 저녁 7시로 알고 있어요. 그 다음 날 제가 외출외박이 되는 날인데, 토요일 새벽에 갑자기 생도대장(장준익 장군)이 불러 ‘자네, 지금 집에 좀 가 봐라’고 하시데요. ‘내일이면 외출외박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빨리 들어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생도복을 갈아입고 집으로 가는데, 시내 곳곳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어요. 저는 처음엔 ‘아버님이 무슨 또 혼낼 일이 있으신가’라고 생각도 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많은 경호원들이 군복 대신 예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느꼈습니다. 아버님 시신은 신사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편안하게 누워 계신 것 같았습니다. 내 방으로 올라가 음악을 틀어 놓고 울었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어떠셨나요.
 
  “저 때문에도 많이 상심하셨을 겁니다.”
 
  —육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육사를 간 이유가 있었습니다. 육사에 가면 이젠 경호를 안 받겠지. 육사 생도는 전쟁 나면 전쟁터에 나갈 텐데 거기서도 경호원이 따라다니겠느냐, 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7개월 동안의 훈련이 끝나고 첫 외박을 나가는데,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경호원 보고 ‘나는 육사생도인데 왜 따라다니느냐. 나는 이제 군인이다’ 그랬죠. 그래서 다시 스트레스가 시작됐어요.
 
  그때 만일 안 따라다녔으면 육사 잘 왔다는 생각도 많이 했을 텐데, 훈련을 마치니까 또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때 제가 경호실장에게 이런 말도 했어요. ‘이제 나는 군인인데, 전쟁 나면 전쟁터까지 따라붙을 거냐. 나도 이제 군인으로서 제대로 생활할 수 있게 해 줘야 하지 않느냐’ 그랬더니 경호실장은 그냥 ‘허허’ 하고 웃고 말아요.
 
  그분들이야 자신들의 임무 때문에 그랬겠지만, 저는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려 한 게 아니라 어떡하든 빠져나가려고만 한 거죠. 거기서부터 행동이 삐뚤어지게 된 거죠.”
 
 
  생도대장 발언 듣고 군대에 환멸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0대 들어서면서 20대 특유의 패기 같은 것은 가져 보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 해인 육사 4학년 때 그런 군대 생활이 아주 싫어졌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새로 생도대장으로 오신 분이 생도들을 교육시키는데, 참 낯 뜨거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가 불과 얼마라고 아버님에 대해 저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라는 데 대해 갑자기 환멸이 느껴지더라고요. 제대해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제대를 하고 나니까 아버님께서 벌어 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막막했죠.
 
  그렇다고 느닷없이 사업자본도 없이 사업을 할 수도 없고 했는데, 김우중(金宇中) 박태준(朴泰俊) 회장님 같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이만큼 온 거죠. 그러니까 20대의 패기라는 것보다는 저에겐 어떻게 의무복무 5년을 무사히 마치느냐 하는 생각이었죠.”
 
  박 회장은 1981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방공포병 장교로 5년간 의무복무 기간을 마치고 1986년 3월 31일 예편했다. 그는 예편하기 1년 전인 1985년 3월 23일, 제3한강교 입구 강변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10여 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금의 얼굴 상처가 그때 얻은 것입니다. 당시 제가 부대를 옮기게 되었는데, 부대 옮긴다고 선임하사와 인사과장 등과 회식을 했죠. 회식이라는 게 사실 술 먹는 거 아닙니까. 저녁 먹으면서부터 시작해 소주 양주 맥주…. 하여튼 그날 무지하게 먹었어요. 음주운전이었죠. 그래서 사고가 났고, 굉장히 큰 사고였는데, 저는 운이 좋았어요. 혼자 벽을 받았고 생명도 무사했죠.”
 
  —그 이후 상처를 치료했습니까.
 
  “두번 성형수술을 했죠. 상처 없애는 성형수술이에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도 말을 잘 안 들었어요. 이번엔 의사 선생님 말씀이죠. 햇볕 보지 말라, 딱정이 빨리 떼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죠. 지금은 이 정도 얼굴이지만 크게 다쳤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왼쪽 얼굴은 사진발이 잘 안 받아요. 웃으면 얼굴 근육이 땅기기도 하고….” 그는 왼쪽 얼굴을 실룩실룩해 보였다.>
 
 
  ‘유신중대’ 동기들
 
2004년 12월 결혼한 박지만씨와 서향희 변호사.
  박지만 회장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대위로 전역했고, 심신이 망가진 상태로 방황을 거듭하며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다. 박 회장은 전역 후 군과 거의 인연을 맺지 않았다. 동기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동기들 사이에서 ‘잊힌 인물’이 됐다. 동기회의 한 간부는 “사업적 관계로 만났던 동기들 몇 명을 빼 놓고는 한동안 교류가 없었다”며 “솔직히 구설수에 오를까 봐 그를 만나길 꺼리는 동기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박지만 회장에게 육사 37기 내 6중대는 각별하다. 박지만 회장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중대 모임만은 꼭 참석한다고 한다. 6중대 모임은 전후반기 2차례 정도 모인다. 2년 전 모임에는 박 회장의 부인 서향희(徐香姬) 변호사가 나와, “제가 나이가 가장 어리니 부인 모임의 총무를 맡겠다”고도 했다고 한다.
 
  37기 생도들은 6중대를 ‘유신중대’라고 부른다. 육사에서는 ‘광개토 1중대’ ‘재구 2중대’ ‘을지 3중대’ ‘무열 5중대’처럼 ‘유신 6중대’라는 말이 쓰이는데, 유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월 유신’이 아니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유신’을 뜻한다. 학년별로 20명씩 총 80명으로 한 개 중대를 편성한다.
 
  박 회장의 중앙고 동기인 이재수 중장은 11중대로 좀 떨어져 있다. 그러나 37기 동기들은 “중대는 떨어져 있지만, 학과시간은 물론이고 휴가나 외박 때도 꼭 붙어 다녔다”며 “누나(박근혜 대통령)도 어머니(육영수 여사)를 잃고 방황하던 동생을 보살펴준 이 중장을 친근하게 대했다”고 증언했다.
 
  이 중장은 박지만씨가 10·26 이후 청와대를 나올 때도 가까이서 위로한 유일한 친구였다고 한다. 이후 박지만씨가 마약 사건으로 6차례 구속과 재활 과정을 겪을 때도 이 중장은 그의 곁에 있었다. 동기인 모 예비역 대령은 “이 중장은 지만씨가 공주치료감호소를 드나들 때 한두 차례 면회를 갔던 것으로 안다”며 “이 중장과 지만씨는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라고 했다.
 
  이 중장은 최근 국회 정보위 기무사 국정감사에서 “지만씨는 친한 친구라 예전엔 가족들과 식사도 했고, 한 달 전에도 통화했다”며 친분 관계를 인정했다.
 
  《월간조선》이 파악한 유신 6중대 멤버는 총 18명이다. 육사 37기 수석 입교생인 원영주(元永柱)씨를 비롯해 한국국방연구원, 육군정보학교, 방위사업청, 감사원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상욱 국방부 군수관리관(소장)과 정태희 육군 군수참모부장(소장)은 육군 군수사령관 물망에 올랐으나 고배를 마셨다.
 
  유신 6중대의 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36기는 전체 16개 중대 가운데 6중대에서 가장 많은 7~8명의 장군들을 배출했다”고 말했다. 6중대 37기 동기 둘(이상욱·정태희)도 이번에 군수사령관을 바라봤는데, 박지만 회장 중대에서 또 하나의 중장이 배출되면 부담스러웠던지 35기 군수사령관을 유임시킨 것 같다”고 했다.
 
 
  ‘군번 2등’이 대통령상 받은 사연
 
  6중대 동기들이 기억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육사 수석 입교생 원영주는 박지만 생도와 3~4학년 때 같은 중대에서 2인 1실의 ‘한방’을 쓴 사이다. 원영주 생도는 성적 1등에게 주어지는 대통령상을 받는 것이 사실상 결정돼 있었다. 원영주 생도의 아버지는 당시 원익환(元翊煥) 육사 교수였다.
 
  1980년 가을 어느 토요일, 4학년 졸업을 얼마 앞두고 외출외박을 나가기 위해 두 사람은 훈육관에게 내무 검사를 받게 됐다. 훈육관은 내부 정돈 불량에 대한 벌칙으로 단독군장으로 육사 연병장을 1시간 동안 돌게 했다. 소총을 든 채 헐떡이며 연병장을 돌고 있던 두 사람은 정복을 입고 폼나게 외출외박을 나가는 후배들을 대하기가 민망했던지 육사 회관으로 들어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태릉골프장에 왔다가 박지만 생도를 보고 간다며 육사에 들렀다. 당직 계통으로 확인해 보니 연병장을 돌고 있어야 할 박지만-원영주 생도는 보이지 않았고, 기숙사에는 총기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훈육관들은 혼비백산해 두 생도를 찾아나섰고 마침내 육사회관에서 잠시 쉬고 있던 이들을 발견했다. 결국 이 일로 육사 징계위원회가 열려 벌점을 받게 됐고, 이 때문에 원영주 생도는 졸지에 2등 졸업을 하게 됐다.
 
  6중대의 한 동기는 “육사 역사상 군번 1등(22776)은 대통령상을 못 받고, 군번 2등(22777)이 대통령상을 받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며 “박지만 회장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군번 2등으로 대통령상을 받는 사람도 같은 6중대원인 김권희(전 육사 교수) 생도였다”며 “전통적으로 6중대는 ‘여군 중대’라고 부를 만큼 조용하고 학구적인 분위기였고, 김권희·원영주·김정익·최정민 등 4명을 육사 교수로 배출했다”고 했다.
 
  대통령이 다녀간 후 훈육관 한민상 소령(육사 26기)은 6중대를 ‘선착순 집합’시켰다고 한다. 개인의 잘못이라도 연대책임으로 벌 주는 육사의 전통적 교육방법에 따른 것이다. 흥분했던 한 소령은 보고를 위해 서둘러 달려와 엉거주춤 선 이상욱 생도의 중요 부위(?)를 구둣발로 건드리고 말았다.
 
  6중대의 한 동기는 “당시 이상욱 생도는 포경수술을 받은 상태여서 땅바닥에 뒹굴었고, 중심을 잃은 훈육관도 벌러덩 넘어져 기합을 받던 중대원들이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며 “동기 모임에서 한민상 훈육관을 모셔 놓고 ‘명기’를 만들어 준 훈육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동기들은 배꼽을 잡는다”고 했다.
 
  박지만 회장의 한 측근은 “37기생들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정치적인 동기들이 없다”면서 “지난해 대선 이틀 후 열린 중대 모임에 박지만 회장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박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는 행동은 극도로 삼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37기 동기생들도 사적인 모임에서 무심코 한 말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조심하고 있다”며 “현 정부 내내 지만씨와 37기에 불편한 시선이 쫓아다닐 것이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불필요한 루머들이 확산되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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