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소장파 사라진 한국 정치… 쇄신이 없다

“김문수도 정청래도 젊을 때는 소장파였다”

  •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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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의원들의 합리적인 공격은 당내 민주주의 발전 도움”(김용갑 전 의원)
⊙ 2000년대 말부터 각 정당에서 소장파 명맥 사라져
⊙ 원조 소장파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 여당에 젊은 인재들 영입
⊙ 1990년대 등장한 소장파 ‘386’과 신한국당 신진 세력… 김민석·김문수·우상호 등 현재까지 활동 중
⊙ 2000년대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과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세력화와 당 쇄신에 성공
⊙ 국민의힘, 과거 10여 년간 친이-친박 계파 갈등 이어지면서 소장파도 사라져
⊙ 소장파 대신 ‘청년정치’ 등장했지만 아직 성공 사례 없어
⊙ 22대 초선 국회의원 상당수는 친윤 또는 친명, 개혁은커녕 당 주류 대변 역할
한국 정치 소장파의 원조인 김영삼 전 대통령(오른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조선DB
한국 정치에서 쇄신과 개혁을 이끌어왔던 소장파(少壯派)의 맥(脈)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는다. 각 정당 내부에 소장파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젊은 정치인들의 결집력과 영향력은 사라졌고 개혁을 이끌어나갈 세력이 없다.
 
  젊고(少) 기상이 훌륭한(壯) 사람의 세력(派)을 뜻하는 소장파는 한국 정치사에서는 정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 주류(主流)와 다른 입장에서 쇄신에 나섰던 젊은 정치인들의 세력을 뜻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 김영삼·김대중, 1990년대 386(3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과 신한국당 신진 세력, 2000년대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과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으로 대표되는 소장파는 2010년대 이후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소장파와 청년정치
 
  2010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초선(初選) 의원 또는 젊은 정치인들의 모임과 세력화 시도가 이어졌지만 그들이 쇄신에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세력화가 관건인 소장파 활동 대신 청년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청년정치’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결과는 부정적이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2021년),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2022년), 김용태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2025년) 등 30대 정치인이 당을 이끌어나가는 자리에 섰지만 당 체질 개선과 개혁을 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도, 국민의힘도 30~40대 정치인의 숫자와 초선 의원의 숫자는 과거에 비해 늘었지만 개혁을 이끌어나갈 동력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온라인 매체와 소셜미디어(SNS)의 발달, 당원의 당무 영향력 강화 등으로 신인 정치인과 젊은 정치인들의 활동 여건이 개선됐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소장파는 왜 과거만큼 활발하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과거 소장파의 활동과 영향력, 그리고 현재 소장파가 없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정치권 인사들과 학계 전문가들을 만나 들어보았다.
 
  대한민국 소장파의 원조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는 데는 이의가 거의 없다. 1927년생인 김 전 대통령은 만 42세였던 1969년 11월 8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것을 선언하며 세대교체론을 내세웠다. 정당 내 위계질서가 강했던 당시 정치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당 중진들과 계파 수장들은 못마땅해했지만, 초·재선 의원들과 당원들은 열렬히 호응했다. 김 전 대통령이 파격적인 선언을 한 이유는 신민당이 선거에서 공화당에 잇달아 패배했고 이 같은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세대교체 등 완전한 개혁과 변신이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소장파의 원조 김영삼·김대중
 
  1971년 대선을 앞두고 1926년생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선에 뛰어들면서 ‘40대 기수론’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칼럼을 통해 “40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며, 한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30대 후반 또는 40대가 지도층을 점령했는데 야당만은 노장이 지배하고 있고 3선 개헌에 충격을 받은 국민은 새로운 지도력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무작정 젊은 나이를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세대교체와 당 운영을 둘 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총재와 대선 후보를 분리해 후보는 40대, 당수는 60대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대선 후보는 당의 지명이나 추대가 아닌 당원 투표로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진산 당수 등의 강한 반대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신민당은 투표로 대선 후보를 선출했고, 이때부터 정당의 대선 후보는 투표로 선출하게 됐다.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권위주의와 위계질서가 당연시됐던 당시 정당에서 소장파로서 기성정치인이 하지 못한 획기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젊은 시절부터 대한민국 민주화뿐만 아니라 정당 민주주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이후 ‘40대 기수론’은 86세대 정치인들의 단골 멘트로 자리 잡았고, 2025년 대선에서 만 40세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도 ‘신 40대 기수론’을 내세울 정도로 한국 정치의 개혁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1990년대 신한국당의 쇄신
 
15대 총선 전 김영삼 대통령은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김문수·이재오 등을 영입해 당 이미지를 쇄신했다. 사진=뉴시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이 당내 소장파 출신으로 성공했던 경력을 활용해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 당명을 바꾸고 소장파를 대거 수혈하는 개혁과 쇄신을 계획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야합’이라 비판받던 3당 합당의 결과물이었던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이어 15대 총선 공천에서 5공·6공 출신 인사들을 밀어내고 새로 영입한 신인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했다.
 
  특히 민중당 출신 ‘좌파’인 김문수·이재오를 영입, 공천했으며,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해진 홍준표 검사도 영입했다. 15대 국회의원이 된 이들의 당시 나이는 김문수 만 45세, 이재오 만 51세, 홍준표 만 42세였다. 또 신한국당은 맹형규·박성범·이윤성 등 대국민 인지도가 높은 지상파 뉴스 앵커들을 대거 영입해 이미지를 쇄신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창당 수준의 여당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총선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차기 대권이 유력한 김대중 총재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당, 나아가 과반을 확보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개표 결과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어 새정치국민회의(79석), 자유민주연합(50석)을 크게 앞섰다. 특히 민주 계열 정당이 우세였던 서울에서 신한국당은 27석으로 새정치국민회의 18석을 압도하는 결과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무소속으로 당선된 16명 중 12명이 신한국당에 입당했는데, 당시 신한국당이 개혁과 쇄신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민의힘의 한 상임고문은 “보수 정당에서 역사상 가장 공천을 잘했던 총선은 15대 총선이라는 데 대부분의 원로가 동의한다”며 “쇄신 공천이 없었으면 그때 제1당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때 소장파로 들어온 김문수와 홍준표, 김무성 등이 오랜 기간 당을 지탱해 왔다”며 15대 총선의 의미를 설명했다.
 
 
  운동권 출신 소장파 386의 등장
 
김대중 전 대통령은 16대 총선 전 임종석·우상호 등 운동권 출신 386 정치인들을 영입했다. 사진=조선DB
  15대 총선 패배의 아픔을 딛고 다음 해 대선에서 승리,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대학 운동권 출신 젊은 정치인들을 대거 영입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우상호,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이인영,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 임종석이다. 모두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의장과 부의장 출신으로 2000년 당시 나이는 임종석 만 34세, 이인영 만 36세, 우상호 만 38세였다. 이들은 1990년대 초반 정치에 입문한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김민석 현 국무총리(당시 만 36세)와 함께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386세대로 불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386은 이때만 해도 정치 신인 그룹 정도로 인식됐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시행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운동권 출신 386들이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출마해 40여 명이 당선되면서 단숨에 한국 정치의 주류로 올라서게 된다. 호남과 동교동계가 득세한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노무현 대통령은 386을 중용하기 시작했고, 이때 국회에 입성한 정청래·윤호중·김현미·김태년·최재성·강기정 등이 먼저 정치에 입문한 우상호·이인영 등과 함께 386 실세 그룹을 형성했다. 노 대통령이 추구하는 가치인 권위주의 타파와 새로운 정치 만들기에 이들 386 소장파는 적절한 정치적 파트너였다.
 
  386은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여당의 주류 정치인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과거 운동권 경력을 살려 대여 투사(鬪士)로 활동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50대가 된 이들은 전성기를 맞아 당은 물론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 이재명 정부에서도 김민석 국무총리,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 우상호 정무수석, 정청래 당대표 등 정부·여당 요직을 꿰차고 앉았다. 일각에서는 ‘본인들의 개혁 노력보다 노무현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성공한 케이스’라며 소장파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한나라당 남원정과 미래연대
 
한나라당의 대표적 소장파인 ‘남원정(사진 오른쪽부터 남경필ㆍ원희룡ㆍ정병국)’. 사진=조선DB
  386과 동시대에 활동한 보수 진영의 소장파는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다. 현재 남원정은 보수 정당 소장파를 상징하는 용어다. 다른 의미로는 남원정 이후 진정한 의미의 개혁 소장파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 사람은 1990년대 말 한나라당이 영입한 인사들이다. 1997년 대선에서 보수 정당 사상 첫 대선 패배를 경험한 한나라당은 혁신 차원에서 새로운 인재 수혈에 나섰고, 이회창 총재가 젊은 정치인들을 영입한 것이다. 1998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만 33세 남경필이, 2000년 16대 총선에서 만 36세 원희룡과 만 42세 정병국이 국회에 입성했고 이들은 16대 국회에서 활동하며 개혁적이고 소신 있는 활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16대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미래연대)’를 만들어 목소리를 높였다. 남원정과 오세훈·심재철·정두언·김부겸·김영춘·박종희·임태희 등이 참여한 미래연대는 당 쇄신과 정치권 개혁 운동에 나섰다. 의원들 외에도 각계 전문가 300여 명이 모여 당 쇄신을 위해 의견을 모았고, 한나라당 이미지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초반 한나라당은 수구(守舊)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남원정은 당 주류와 당차게 대립하며 주목받았다. 특히 2003년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이 검찰 조사로 드러나면서 한나라당은 부패정당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이때 남원정이 앞장선 미래연대는 당 쇄신을 위해 최병렬 당대표 사퇴를 요구해 성공했다. 이 밖에도 미래연대는 개혁입법에 앞장서고 당내 정풍(整風)운동을 주도하는 등 개혁 소장파로서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이들은 대립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의견 조율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합리적인 소장파’로 평가받았다. 당시 국가보안법 철폐 여부를 두고 한나라당 내부에서 남원정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던 ‘보수의 아이콘’ 김용갑 전 의원은 “젊은 의원들의 합리적인 공격은 당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그때 남원정이 나이 든 사람들은 물러나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해 서로 얼굴을 붉힌 적도 있지만 그 후 만나서 안보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양해한 적이 있다”며 “지금 국민의힘에도 이런 젊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연대는 김부겸·김영춘 등이 탈당하면서 사라졌고 17대 국회에서 초선 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수요모임)’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당시 수요모임에는 권영세·김기현·박형준·이주호·주호영 등 이후 중진이 되는 의원들이 속해 있었다. 18대에서는 민본21이라는 소장파 모임이 출범했지만 한나라당이 2008년 다시 정권을 잡은 후로는 이마저 맥이 끊겼다.
 
 
  40대 천신정의 정풍운동
 
새천년민주당의 개혁을 추진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천신정(사진 오른쪽부터 천정배ㆍ정동영ㆍ신기남). 사진=조선DB
  민주당 소장파의 상징인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새천년민주당의 소장파로 당 쇄신을 주장했고,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열린우리당 창당 주축이 됐다. 3인은 모두 1990년대 중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입한 인물이다. 모두 호남 출신이며 서울대를 졸업했고 천정배와 신기남은 법조인, 정동영은 방송기자로 본업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1996년 15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했을 때 천정배 만 42세, 신기남 만 44세, 정동영 만 43세였다. ‘DJ키즈’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나이가 비교적 젊은데다 개혁 성향으로 분류됐고, 당내에선 비주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은 ‘바른정치모임’을 만들어 당내 주류였던 동교동계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당의 쇄신을 시도했다. 세 사람이 재선 고지에 오른 이후인 2001년, 김대중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개혁과 쇄신 없이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당정 요직에 능력과 자세에 문제가 있는 인사들이 견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고, 비공식 라인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권노갑 최고위원 등을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다. 당 쇄신을 요구하며 당내 ‘호남 기득권’을 타파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른바 ‘민주당 정풍운동’이다.
 
  당 주류와 소장파 간 대립이 이어지고 한동안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 권노갑 최고위원이 2선으로 물러나고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겸임하던 관행을 바꿨다. 또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해 국민참여경선을 실시하기로 했고 당내 비주류였던 노무현 당시 상임고문이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천신정은 당의 후보 결정 방식을 바꾼 것은 물론 경선과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 지지하며 노 대통령 탄생에 기여했다. 이후 ‘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새천년민주당과 한국 정치 개혁을 주장했고, 호남 등 기존의 주류가 주도하는 민주당의 행태에 반발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이후 천정배의 탈당 등으로 더 이상 천신정이 활동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이들은 한국 정당의 1인 지배 체제를 종식시키고 대선 후보를 투표로 뽑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혁혁한 성과를 남겼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당내 개혁을 논할 때 ‘남원정과 미래연대’를 언급하듯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천신정 정풍운동’을 언급한다.
 
 
  보수 정당에서 소장파가 사라진 이유
 
  보수 정당에서 소장파의 영향력이 사라진 시기는 2000년대 말 무렵이다. 한나라당은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해 10년의 야당 생활을 마무리했지만 대선 전 후보 경선에서 거세게 대립했던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 세력 간 갈등의 골은 깊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친박계가,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는 친이계가 공천 배제 등 정치적 탄압을 받았으며 정치적 생존에 급급했던 정치인들은 누구도 통합이나 개혁, 쇄신을 부르짖을 형편이 안 됐다. 이 기간 18대·19대 총선에서는 극심한 계파 편중 공천이 이뤄졌고, 17대 국회에서 활발했던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은 18·19대 국회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2000년대 한때 소장파로 분류됐고 친이계로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서 최고위직을 지낸 한 전직 의원은 보수 정당에서 소장파가 사라진 이유를 ‘친이-친박 간 계파 갈등의 결과물’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경제나 외교 등은 실용주의적으로 잘 했는데 아쉬운 게 있다면 친박계에 대한 감정을 털어내지 못했고 그것이 정부·여당 인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친이계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정치권에 발붙이기 힘들 정도로 핍박받았다. 윤석열 정부에서 과거 친이계가 많이 기용된 것도 박근혜 정부의 색깔이 묻지 않은 인사들을 고르다 보니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정권을 잡은 9년 동안 계파 간 제로섬 게임이 계속됐으니 소장파나 개혁파가 나타날 수가 없었다.”
 

  친이계였던 고(故) 정두언 의원은 생전에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모두 당내 소장파 출신으로 크게 성장했는데, 친박계가 득세하면서 보수 정당 소장파 명맥이 완전히 끊겼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친박계 한 전직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준석·손수조라는 청년 정치인을 발굴하고 진영이 달랐던 김종인·이상돈을 영입하는 등 우리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며 “먼저 정권을 잡은 친이계가 ‘친박 학살’을 주도했고 이후 당내 계파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당이 쇄신과 멀어져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국민의힘 내 젊은 정치인들의 모임으로는 ‘첫목회’와 ‘언더73’ 정도가 있다. 첫목회는 22대 총선에서 낙선한 30~40대 당협위원장들의 모임이며, ‘언더73’은 한동훈 전 대표(1973년생)를 지지하면서 1973년 이후 출생한 당내 인사들의 모임이다. 첫목회는 김재섭 의원을 비롯해 김소희·우재준 의원, 이재영·이승환 당협위원장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언더73은 박상수 국민의힘 인천서구갑 당협위원장과 류제화 세종시갑 당협위원장 등이 주축이다. 두 모임 모두 현역 의원 위주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소장파도 청년정치도 없는 현실
 
김용태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왼쪽)과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보수 정당 내부에서 청년정치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사진=조선DB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소장파의 존재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당대표를 지내면서 당이 친명 일색(一色)으로 구성됐고, 8월 초 취임한 정청래 대표가 이재명 대통령보다 더 극단적인 강성 행보를 예고하면서 당분간 당내 개혁 세력이 발붙일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한 민주당 의원 보좌관은 “이재명 체제가 시작된 후 소장파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은 금태섭·김해영·박용진 전 의원 정도로, 이들은 합리적이고 명석한 인물이고 주변의 평판도 좋았지만 이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결국 당내에 설 자리가 없었다”며 “(이재명에게) 쓴소리하던 중진과 원로들도 다 떠났는데 소장파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했다. 그는 “청년정치도 기대할 여지가 없다”며 민주당은 젊은 의원이 나설 분위기가 아니라고 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대항마로 박지현 비대위원장을 내세워봤지만 얼마나 만신창이가 돼서 떠났나. 젊은 의원은 많지만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의원은 없다.”
 
  국민의힘 역시 30대인 김용태 의원과 김재섭 의원 등이 청년정치에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집권여당의 30대 대표로 당선되면서 청년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이 국민의힘에서 사실상 쫓겨났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한 자릿수 득표율에 그친 점도 보수 정당 청년정치의 한계를 보여줬다. 이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사태 후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태 의원은 강력한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당내 중진들의 반발과 비난에 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청년정치플랫폼을 만들어 청년정치를 기치로 정치를 시작했던 김재섭 의원도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초선 오적(五賊)’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당 주류와 대립할 경우 강성 당원 및 지지자들로부터 극심한 비판과 공격을 받는다는 점도 정치 신인들의 행동 반경을 좁게 만든다. 지난 2021년 4·7 보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참패하자 초선 의원 5명은 ‘조국 사태’를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가 당원들로부터 ‘초선 오적(五賊)’으로 불리며 문자폭탄과 사무실 전화폭탄에 시달렸다. 21대 의원을 지내고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오영환 전 민주당 의원은 “오로지 진영 논리에 기대 상대를 악마화하기에 바빴고 국민은 정치 현실을 외면했다”고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국민의힘 대표 시절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대립했던 한동훈 전 대표와 친한계 정치인들도 강성 당원들로부터 ‘배신자’ 공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2025년 기준 22대 국회의원 연령대는 30대 12명, 40대 26명으로 3040세대가 36명인데, 이들 중 국민이 주목하는 청년정치인을 찾기는 힘들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국민의힘 친윤계이거나 더불어민주당 친명계로, 계파 정치의 혜택을 입고 국회에 입성한 만큼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기는 힘든 형편이다.
 
 
  초선 의원들이 기득권 주류 대변하기도
 
  22대 초선 의원은 144명으로 전체의 44%다. 과거 개혁의 상징이었던 초선 모임은 22대 들어서는 오히려 당 주류를 도와 비주류를 ‘핍박’하는 역할에 앞장설 정도다. 윤석열 정부에서 국민의힘 초선 의원들은 윤 전 대통령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던 이준석·나경원을 향해 자중하라는 뜻의 연판장을 돌렸다. 더불어민주당도 초선 의원들이 신당 창당에 나선 이낙연 전 총리를 비판하는 연판장을 돌린 바 있다. 소장파 역할을 해야 할 초선 의원들이 기득권과 대립은커녕 기득권의 행태에 가담한 것이다.
 
  이종찬 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재 소장파의 부재 이유로 중앙집권적 공천 제도와 소장파 개인 역량의 문제를 들었다.
 
  “지금처럼 정당이 중앙집권적 공천 제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소장파는 당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또 공천권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고, 사람이 안 모이면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정치인 개인 역량의 문제도 있다. 개혁을 주장하는 동시에 국민의 확고한 신뢰를 얻는 정치인이어야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60대 한 현역 의원의 얘기다.
 
  “김문수도 정청래도 젊을 때는 소장파였다. 젊은 나이라면 지금 같은 현실에서 민심과 멀어진 당내 기득권에 저항하고 개혁과 쇄신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 이런 과정을 거쳐 온 이들이 결국 영향력 있는 유력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현재 거대 양당 젊은 정치인들의 소극적인 행보는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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