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시대

20대 대통령 윤석열 인수위원회 탄생, 13~17대 대통령직 인수위를 돌아보다

노태우(1987)~이명박(2008)까지, 인수위원들의 이야기

  •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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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 (13대) 인수위 “노태우 당선인이 준비위원회 명단 靑에 들고 갔지만… 전두환 대통령, 위원장 한 명에만 서명”
⊙ 김영삼 (14대) 인수위 “3당 합당으로 정권 잡은 만큼 인수위 멤버가 대부분 정치인… 전문가들이 참여했어야”
⊙ 김대중 (15대) 인수위 “대통령의 권한이 제일 셀 때가 인수위 시절… 이때 중요한 일 해야”
⊙ 노무현 (16대) 인수위 “인수위가 점령군? 인수위 활동을 국정감사 정도로 착각하는 사람들 많아”
⊙ 이명박 (17대) 인수위, 非정치인 인수위원장과 정치인 부위원장의 미묘한 갈등, 그 결과는…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역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사무실로 사용했고, 윤석열 인수위도 이곳을 사용한다. 사진=뉴시스
3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위원장 안철수)가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이번 인수위는 10년 만에 구성된 인수위라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물론, 유례없이 처음으로 대통령 당선인이 인수위원회 인선을 직접 발표한 점이 이례적이다. 1987년 제13대 대선 이후 인수위원회(최초 명칭은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왔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인이 인수위원회 구성 및 인선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윤석열 인수위’의 위상이 드러났다. 대선 단일화 대상이었던 안 대표에게 국정의 공동운영자로 전권을 맡겼다는 의미다.
 
  다른 당 인사에게 공동운영의 권한을 맡겼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협치(協治)의 의미가 가장 크겠지만 다른 뜻도 있다. 이번 인수위 활동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협치 성공 여부 논란과 함께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의 개입 여부 등 각종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이 필요한 만큼 이를 반영했다는 뜻이다.
 

  이번 인수위는 또 다른 특이점도 갖고 있다. 정치권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이번 인수위의 가장 큰 특징이 3월에 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선제 도입 후 대선은 12월에 치러졌고, 탄핵 사태가 벌어진 이후인 19대 대선만 5월(2017년)에 열렸다. 19대 대선 때는 선거 종료와 함께 바로 대통령 임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인수위가 구성되지 않았다. 3월은 정부부처의 예산안 기초안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인수위의 입김이 예산에 반영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이 때문에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점도 인수위는 알아야 한다.
 
  인수위의 역할과 활동은 5년간의 국정을 이끌어나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지만 정권 출범 후에는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인수위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역대 인수위원회는 모두 활동 종료 후 인수위 백서(白書)를 만들었지만 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월간조선》은 지난 18대 대선이 끝난 직후인 12월 말 발행한 2013년 1월호의 별책부록으로 《대통령직 인수위를 말하다》를 발간하고 역대 인수위 고위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해당 내용을 토대로 역대 인수위원회의 성패(成敗) 요인을 분석하고 이번 인수위의 방향에 대해 고찰(考察)했다. 이번 인수위 활동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 인수위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최초의 인수위원회인 ‘노태우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1988년 2월 위원회 해체 전 노태우 당선인이 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1987년 6·29선언으로 개헌이 이뤄지며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후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가 구성돼야 했고, 노 당선인은 12월 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 겸 선대본부장을 임명했다. 당시 여당은 사실상 정권과 한 몸이었고 여당 사무총장은 당과 재정, 인사, 조직 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사였다. 노 당선인과 전두환 대통령의 가교 역할을 맡았던 이춘구 전 의원은 준비위원회 역할을 이행한 후 1988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헌정사상 첫 인수위원회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당선인,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긴장관계의 총집합과도 같은 곳이었다.
 
  당시 노태우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 준비위원이었던 김중위 전 의원(12~15대 국회의원, 전 환경부 장관)은 ‘취임준비위원회’라는 명칭에 대해 “이양이나 인수라는 단어가 (전두환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준비위원회는 그저 자문기구의 성격에 가까웠고, 각 부처로부터 현황을 듣고 당선인에게 보고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고 한다. 그 와중에 개헌의 여파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과잉’의 상태였고, 번듯한 취임식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초대 총리에 대한 논의는 이뤄졌다. 그의 얘기다.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겨받은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걸 알리는 게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5공 청산이라는 걸 준비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춘구 위원장이 준비위원장을 한 사람씩 따로 불러 총리와 각료로 누가 적절한가를 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현재씨가 후보로 올랐죠.”
 
  준비위원회의 강용식 대변인(14~15대 국회의원, 전 문화공보부 차관)은 인수위원 인선 초반부터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노태우 당선인이 인수위원 추천 명단을 청와대로 들고 갔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이춘구 인수위원장에만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강 전 대변인의 얘기다.
 
  “이춘구 외의 다른 사람들은 위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였죠. 다만 신문에 위원 명단이 다 나왔기 때문에 일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취임식이었죠. 퇴임자와 취임자 중 누가 중심이 돼야 하느냐는 건데, 우리 생각엔 당연히 취임자가 중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내용이 대통령(전두환)에게 보고되는 바람에 난리가 났어요. 결국 김윤환씨의 중재로 무난하게 해결이 되긴 했습니다. 근데 헌법상 ‘인수위’는 정권 교체가 됐을 때는 괜찮은데 같은 당에서 당선인이 나와 엄밀히 정권 교체가 아닐 땐 사실상 ‘인수’ 역할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노태우 인수위’는 헌정 사상 첫 인수위였던 것은 물론 현역 대통령과 당선인의 특수관계 등의 이유로 시행착오가 불가피했다.
 
 
  김영삼 인수위
 
1992년 대통령 선거 개표 후 당선인사를 하는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 오른쪽의 정원식 민자당 선거대책위원장이 인수위원장을 맡았다. 사진=조선DB
  1992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로 문민정부, 곧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 민주자유당 김영삼 당선인은 약 2주 후인 12월 30일 정원식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를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노태우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인수위라는 이름도 쓰지 못한 채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에 미루어 사실상 최초의 인수위원회였다. 그래서였을까. 인수위는 ‘점령군’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대통령인 만큼 인수위는 정원식 위원장을 비롯해 인수위원 대부분이 김영삼 직계가 아닌 민정계여서 여당 내에서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영삼 직계로 인수위에서 제1분과위(외교, 국방, 통일 담당) 위원을 맡았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사실상 최초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였고,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권인 만큼 전문가보다는 실무 중심으로 운영됐다”고 회고했다. 규모도 크지 않았고, 인수위 선례가 없었던 만큼 미국의 인수위원회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문민정부’라는 단어도 인수위 운영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정종식이라는 의미의 정권 정신을 각 부처에 불어넣는 데 집중했습니다. 요즘 인수위는 국정과제를 선점하고 정책공약을 제시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이는데요, 그것보다는 국정과제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걸림돌을 어떻게 제거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지난 정부가 공약을 왜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지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인수위 대변인 겸 제2경제분과위원이었던 신경식 전 의원(전 헌정회장)은 “당시 인수위는 공무원 수를 줄이겠다는 등 정부의 힘을 과시했다”고 회고하며 “그 후에 인수위 관련 법이 많이 생겼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영삼 당선인이 인수위보다는 당 정책위에 힘을 실어주면서 인수위는 위상이 축소됐다. 민자당의 김종필 대표와 김영구 사무총장도 “인수위는 실무조직에 불과하다”고 못 박을 정도였다. 합당으로 정권을 잡은 당선인의 한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사회문화분과위원이었던 김한규 전 총무처 장관(13·14대 국회의원)은 “당선인의 ‘작고 깨끗하고 강력한 정부’ 구상을 인수위가 구체화했다”고 평가했지만, 인수위가 대부분 정치인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시했다. “인수위에 대선공약 담당자들이 참여하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3당의 관계자들이 모두 들어와야 하니 정치인이 많이 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수위는 대통령이 5년간 추진할 국정과제를 정하는 역할을 해야 하고, 전문가들이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니 14대 대통령 인수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죠.”
 
 
  김대중 인수위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된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가 인수위 운영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선DB
  1997년 대선에서는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대선 전 김대중-김종필 후보의 야권 단일화 결과 단일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인수위원장은 공화-민정계 출신인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이 맡았다. 김대중-김종필의 갈등 조정자가 필요했던 시점인 만큼 여야 각 정당을 아우르는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첫 정권 교체이다 보니 인수위원들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DJ 직계인 추미애 인수위 정무분과위 인수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를 이룬 정부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권 교체 후 일부 공무원의 비협조로 인수위가 고생을 했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외환위기로 사실상 정부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인수를 하려니 말이죠. 특히 인수위 초기엔 일부 공무원이 관련 문서를 폐기하는 바람에 업무 파악에 어려움이 많았고요. 외환위기 관련 자료를 요구하면 그저 ‘자료가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습니다.”
 

  인수위 행정실장이었던 라종일 경희대 교수는 선거운동 시작 시점부터 인수위를 준비했다. 다들 선거 승리에만 집중했지만, 정작 최초의 정권 교체가 되고 난 후에는 인수위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힘을 모으기도 빠듯한데 이긴 이후를 생각하느냐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우연히 미국에서 인수위 참여 경험이 있고 인수위를 연구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인수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어요. 임기 중에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대부분 인수위에서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제일 셀 때가 인수위 시절입니다. 사람들의 기대가 크고 이때 중요한 일을 해야 하고 그걸 못 하면 갈수록 저항이 세집니다.”
 
  ‘김종필계’로 인수위 사회문화분과위원회 간사를 지낸 최재욱 전 환경부 장관의 얘기다. “그동안 인수위의 큰 역할은 대통령 취임식 준비 정도였는데 김대중 인수위는 정권 교체 케이스이니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다 보니 고압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 것 같습니다.”
 
 
  노무현 인수위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직 인수위 분과위별 간사 발표에 앞서 임채정 인수위원장과 얘기하고 있다. 사진=조선DB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된 노무현 당선인은 임채정 전 국회의장을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노 당선인은 인수위에서 정치성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고, 현역의원 배제 방침을 세웠다. 인수위에 들어간 의원은 임채정 인수위원장이 유일했다. 노 당선인은 정치인이 아닌 교수, 학자들을 인수위에 배치했다. 옳은 방향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당을 도외시한 ‘점령군’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인수위 정무분과위 간사였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정책실장,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통령 정책특보 등 요직을 두루 지낸 인물이다. 그는 정치인들이 학자 인수위원, 특히 지방대 출신인 본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학계에서도 비주류이고 지방대 출신인 제가 인수위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게 모양이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수위 회의가 있던 날 당선인이 위원들 앞을 지나가면서 제 앞을 지나간 후 다시 돌아와 악수를 청하고 손을 맞잡은 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어요. 저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보도가 여기저기서 나왔고 그 후 일하는 데 부담이 덜해졌습니다.”
 
  노 당선인이 일부 학자에게 힘을 실어주자 일각에서는 ‘점령군’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무현 인수위는 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김병준 교수의 얘기다.
 
  “인수위원들이 자신이 정권의 요직에 임명될 것이라는 우월감 때문에 인수위 활동을 국정감사 같은 걸로 이해하는 분이 꽤 있었습니다. 교수인 인수위원들보다 정치인인 전문위원들이 더 큰소리를 많이 칠 정도였어요. 정부 부처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데, 외부에서 온 전문가나 당에서 온 분 중 일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는 인수위 일부 위원의 고압적인 자세는 언론의 과잉보도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인수위 일부 관계자들이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하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를 내는 등 빌미를 제공한 건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언론이 설익은 정책과 계획을 확정된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인수위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인수위 현판식에서 현판을 달고 있다. 사진=뉴시스
  2007년 12월 19일, 10년 만에 보수정권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12월 26일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됐다. ‘실용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다만 외부에서 영입한 인수위원장과 오랜 기간 정치권에서 활동한 정치인 부위원장(김형오)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정치학자인 이경숙 위원장은 “총선이 4개월여 남은 상황이어서 정치권 인사들은 공천과 총선에 관심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인수위 활동 기간인 두 달여 동안 향후 5년의 비전을 제시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인수위 안팎의 혼란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인은 최대한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토론을 하라는 입장이었고, 역대 그렇게 많은 간담회와 공청회를 열었던 인수위는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현장을 중시하는 당선인이 인수위를 몰고 가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토론회와 제안서 등이 너무 많다 보니 설익은 문서들이 인수위에 너무 많았고 10년 만에 정권을 잡은 정치인은 자료들을 기자들에게 흘리기도 했고요. 자료들이 기자들의 손에 너무 쉽게 들어갔습니다. 정책은 사라지고 엉뚱한 단어들만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죠. 국정홍보처도 폐지하니 정부의 목소리가 일원화되지 못했고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인수위 부위원장이었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그는 “처음엔 국정 경험이 많은 내 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쳤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위원장 중심의 진용이 형성됐고 나는 업무에서 철저히 배제됐다”고 주장했다. 정두언, 박영준 등 당선인의 측근들이 인사를 주도해 위원장에게 결재를 받았고, 인수위 내 권력투쟁이 심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현재 윤석열 당선인이 약속한 청와대 폐지 또는 축소를 일찌감치 주장했고, ‘인사수석 폐지’도 주장했다. “인수위를 마치고 나오면서 청와대 이전을 강력하게 얘기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세계 주요 국가의 대통령이나 내각제 총리의 집무실이 산속에 있는 경우는 없고 전부 도심에 있습니다. 공관은 산속에 있어도 되지만 집무실은 국민과 소통하기 쉬운 곳에 있어야 합니다. 또 인수위 시절 제가 막판에 얘기한 것이 있는데, 인사비서관을 청와대에 두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 요인 중 하나가 인사수석을 청와대에 두었다는 데 있습니다. 공무원 인사는 장관이 책임지고 하도록 하고, 청와대는 민정에서 인사 검증만 하면 됩니다.”
 
  탄핵으로 마무리된 박근혜 정부, 그리고 대선 후 당선인이 즉시 취임해 인수위원회를 구성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경우 인수위 또는 초기 청와대를 분석하고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10년 만에 본격적인 활동을 보이게 될 윤석열 인수위가 이전 사례를 충분히 참고해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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