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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추적

혐의 시인하고 속죄하는 DJ 가족·측근들의 증언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의 12·12-5·18 사건 再조사 기록에 나타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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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연루자들의 DJ에 관한 인물평, ‘교활’ ‘냉혹’
⊙ 자금 출처 추궁하자 “아버지 관계만은 묻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김홍일
⊙ 이희호, DJ가 ‘反국가단체’ 한민통 의장 선출에 개입한 정황 진술
⊙ ‘DJ 경호실장’의 점잖은 지적 “학생 선동해 정권 잡으려는 사람, 있어선 안 돼”
⊙ ‘DJ 경호원’의 고백 “김옥두, 한화갑, (김)홍일도 선생님 배신하는 증언하지 않았나”
⊙ 수사 당시 고문 있었나? 피고인 중 12명, ‘그런 사실 없다’고 답해
⊙ 잘 알려지지 않은 이해찬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항소이유서 내용은?
1980년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김대중(앞줄 오른쪽 두 번째)씨가 첫 공판을 받기 위해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 나와 있다.
  39년 전 해묵은 사건이 다시금 수면으로 떠 올랐다. 유시민-심재철 논란으로 촉발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김대중(DJ)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와 장남 김홍일씨가 얼마 전 사망하면서 사건은 다시 한 번 대중의 관심 아래 놓이게 됐다.
 
  이 사건은 2013년 ‘이석기 내란음모사건’과 더불어 내란음모 혐의가 적용된 최대의 공안사건 중 하나다. 재판에 넘겨진 이들만 37명에 달한다. 그중 일부는 현재 여권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39년이 흘렀건만, 사건 당사자들이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어 그들의 입장에선 이 사건이 갖는 의미가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종의 ‘반역 혐의’가 덧씌워졌던 DJ와 사건 연루자들이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은 건 지난 1995년이다. 소급 입법인 이른바 ‘5·18 특별법’이 제정돼 DJ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재심청구와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DJ는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재심을 청구해, 2004년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DJ 측은 ‘전두환 신군부’가 10·26사건 이후 DJ를 정치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사건을 처음부터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강압이 행해졌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반면 수사 담당자들은 ‘(DJ 측이) 학원 소요 등을 꾀해 체제를 전복시키려 한 의도가 있었다’며 내란음모에 실체가 있었다는 입장이다.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이 12·12사건과 5·18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남긴 수사기록.
  이 같은 논쟁과 별개로 《월간조선》은 다시 한 번 사건기록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기로 했다. 사건기록이란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이 12·12사건과 5·18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남긴 수사기록을 말한다. 14만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수사기록은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기초자료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관한 기록은 400매 분량 책자로 15권 정도다. 이 두꺼운 책자엔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조서와 공판조서, 자술서, 압수품목 등이 상세히 담겨 있다.
 
  그 결과, 그간 언론이 간과한 흥미로운 대목을 여럿 발견했다. 사건 관련자 중 일부가 DJ에 대해 불리하거나 비판적인 진술을 한 것이 확인됐다. 그러한 진술이 이희호 여사와 김홍일씨의 입을 통해서도 일부 흘러나옴을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39년 전 사건 관련자들이 어떤 말들을 토해냈는지,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 참고로 책자에 엮인 수사서류는 전량 복사본이라 지면(紙面)이 매끄럽게 복사되지 않은 부분이 상당하다. 게다가 수기(手記)와 함께 한자(약자 포함)로 작성하던 시절이라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 따라서 부득이 ‘공란(空欄)’으로 처리한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김홍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고(故) 김홍일씨. 사진=조선DB
  DJ의 장남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고(故) 김홍일씨는 1980년 7월 4일 계엄사 합수부의 조사를 받았다. 김홍일씨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이끌던 ‘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하 연청)’에 대해 상세하게 진술했다.
 
  〈저는 1980년 5월 초순경 국제사면위원회 위원으로 가입한 것이 제가 최초로, 정당이 아닌 사회단체에 가입한 것이고, 사회단체로서 등록을 필(畢)하지 않고 관여하고 있는 단체로는 1980년 3월경 직접 조직·결성한 아버지 김대중(의) 지원 정치단체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의 총책임자로 동(同) 동지회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연청은 김영삼(YS)의 사조직 ‘민주산악회’와 쌍벽을 이루는 DJ의 사조직이었다. 연청은 한때 30만여 명(자체 추산)의 조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그 세(勢)가 컸다. DJ가 대선에 출마할 때마다 그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했다. 김씨는 연청을 결성하게 된 배경에 부친(父親) DJ의 지시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1979년 12월 하순 일자미상 21:00경 아버지 김대중 가(家) 서재에서 김대중으로부터 “12·12사태 이후 앞으로의 정치 일정이 모호하고 민주화가 이룩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사조직인 민주헌정동지회나 국민연합 및 정치○동지회 등으로는 그 능력이 부족하므로 ○○ 비서진도 보강하고 사조직도 강화해야 할 것 같다. 너는 서울의 명문교인 서울대, 연대, 고대 등 출신교(出身校) 중에서 정치에 때 묻지 않고 ○○ 유신체제하에서 투쟁경력을 가진 유능한 청년들을 모아 내 계선에 적극 동조할 수 있는 청년단체를 조직토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 청년을 중심으로 한 사조직을 결성할 것을 결의하고….〉
 
 
  연청 조직에 필요한 돈, DJ가 제공해
 
1999년 6월 20일 서울 올림피아호텔에서 개최된 ‘연청’ 제11회 전국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김홍일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앞줄 맨 왼쪽). 가운데는 김영배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 대행이다. 집권여당의 2인자까지 참석할 정도로 김홍일씨가 이끄는 ‘연청’의 파워는 셌다. 사진=조선DB
  김씨는 연청 조직 결성에 필요한 돈을 DJ에게서 직접 받았다고도 한다.
 
  〈1980년 2월 16일부터 3월 7일까지 ○ 아버지 김대중으로부터 조직원 포섭비 50만원을 제공받아 ○○ 학원생 김○호에게 2만원, 경희대 복교생 김○우에게 11만5000원, 국회의원 김상현의 비서였던 송○달에게 20만원을 제공, 포섭함을 위시하여 통일당원 권○충 등 16명을 각 포섭하여 결성에 착수하고….〉
 
  김씨는 포섭 대상자들의 구체적인 조건에 대해서도 상세히 진술했는데, 그 조건은 다름 아닌 ‘대(對)정부 투쟁 경력이 풍부한 복학생’ ‘학생 데모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김홍일씨의 진술이다.
 
  〈포섭 대상자는… 투쟁 경력이 풍부한 복학 대학생으로서, 대정부 투쟁 경력이 있는 자들 중 김대중을 추종할 수 있는 자를 우선 포섭하여 결정적 계기에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여 학생 데모를 조종할 수 있는 청년단체로서 소위 민주연합청년동지회를 조직하였는바, 현재 동 단체의 조직원으로는 서울 지방에 약 400명, 타방(他方)이 약 400여 명으로 도합 800여 명의 조직원이 가입 명○하여 왔습니다.〉
 
  김홍일씨는 연청의 조직 구성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는데, 이 설명에서 문희상(현 국회의장)씨를 언급한 게 눈에 띈다. DJ 정권에서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낸 문희상 의장은 연청 중앙회장을 세 차례 하는 등 DJ 부자(父子)와 끈끈한 관계를 맺었다.
 
  〈1980년 3월 10일 09:30경 민주연합청년동지회 회원으로 포섭한 송○달, 문희상, 김○환 등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소재 ‘달’ 다방에서 회합하고 동 문희상이 서울에 출판사 설립을 위하여 기(旣)히 물색한 서울 종로구 적선동 174 소재 건물 3층 303호지를 보증금 150만원, 월세 14만원에 임대 동 연청 사무실로 개소하고 1980년 3월 중순경부터 동년 3월 하순경까지 위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사무실 및 근처 화신여관에서 ○○ 5~6회에 걸쳐 조직원으로 포섭한 송○달, 문희상, 김○환, 권○충, 배○선… 등과 회합하고 위 8인으로 연청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동 연청 취지문 및 정관을 채택하였는바….〉
 
  김홍일씨의 진술에 따르면, 연청의 조직 규모는 상당했다. 20인 이내의 운영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기획처 ▲행정처 ▲조직처 ▲연구처 등을 뒀다. 지방조직도 구성했는데, 전국을 망라한 조직이었다. 여기엔 각 시도책(市道責)을 두도록 했다. 김씨는 “전국 지방 조직을 확대하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한 대정부 투쟁을 강력 추진할 것을 논의하는 등 지하 비밀 청년 단체를 결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청의 주(主)임무 중 하나는 학원가(學園街)에 DJ 관련 선전물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김씨가 밝힌 선전물 배포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80년 3월 22일 동년 3월 25일까지 위 연청 사무처에서 동 송○달이 김대중 가(家)에서 운반한 김대중 선전 책자 ‘민주구국의 길’ 900부를 동인에게 지시하여 연청 사무처 방문객 등에게 배포하게 하고, 1980년 4월 7일 09:00경 김대중 가에서 김대중 선전 책자 ‘민족혼과 더불어’ 및 ‘민주구국의 길’ 책자 각 150부를 위 연청 사무처로 운반하여 ○○○ 및 배○선 등에게 지시하여 동인들로 하여금 서울대, 연대, 인하대 등 학원가에 배포토록 하고…
 
  ▲ 1980년 4월 14일 10:00경 연청 사무처에서 YWCA 강연 내용이 수록된 ‘민족혼’ 제하의 녹음 테이프 10개를 위 권○충, 배○선, 문희상…에게 각 1개씩 배포하고…
 
  ▲ 1980년 4월 15일 09:00경 김대중 가에서 김대중의 4·16 한신대 초청 강연 안내 전단 1만 장을 연청 사무처로 운반 후 위 송○달에게 지시하여 연청 운영위원들로 하여금 서울 시내 요소에 살포케 하여 많은 학생 및 군중을 동원하고 자신도 동 강연장에 참석하고…〉
 
  김홍일씨는 연청 외에 별도로 DJ를 도운 사실도 상세히 진술했다. 이 과정에서도 DJ가 자금을 제공했다고 김씨는 털어놨다.
 
  〈1980년 2월 3일 12:00경 서울 광화문 소재 ‘유림한식’ 집에서 경희대 후배로서 복교생인 김○우(긴급조치 관련자)와 접촉, 동인(同人)에게 활동비 15,000원을 제공하고, 1980년 2월 7일 12:00경 ‘유림한식’ 집에서 역시 김○우와 접촉, 동인에게 아버지 김대중이 제공하는 활동비 10만원을 운반하고 1980년 5월 초순 일자미상 21:00경 김대중 가에서 동인으로부터 관훈클럽 연설문(‘80년대의 좌표’) 인쇄원지(印刷原紙)를 갖고 아는 인쇄소가 있으면 5000부를 인쇄하라는 지시를 받고, 익일 10:00경 김대중 가에서 동 인쇄원지를 갖고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일지인쇄소’를 방문 동 인쇄소 주인 성명미상 40대가량에게 ‘관훈클럽 연설문’ 5000부를 인쇄 부탁하고, 그 대금으로 김대중이 제공한 인쇄 대금 15만원을 지불한 사실이 있음.〉
 
 
  김홍일이 심재철·박계동에 건넨 돈은 어디로?
 
  김홍일씨는 심재철(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씨와 박계동(전 국회의원·국회사무총장)씨에게 돈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심재철 의원은 “DJ의 동교동 집을 방문한 사실도, 금품을 수수한 적도 없었다고 부인). 이 돈은 두 사람에게 직접 줄 목적은 아니었다. 심재철씨에게 건넨 50만원은 숭전대학(현 숭실대) 총학생회장 윤모씨에게, 박계동씨에게 건넨 15만원은 고려대생 박모씨에게 전달해달라는 취지였다. 김씨의 진술이다.
 
  〈1980년 5월 초순 일자미상 12:00경 시내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 가에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접촉하고 동인에게 50만원(1만원권 50장)을 제공하고 “자네 선배인 숭전대학 총학생회장 윤○연도 민주화 투쟁으로 고생이 많은 모양인데 이 돈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하고, 1980년 5월 초순 일자미상 09:30경 김대중 가에서 고려대 복교생(정외과 4년) 박계동과 접촉하고 그에게 “그간 민주화 투쟁에 고생이 많겠다. 앞으로 민주화를 위해 더욱 학생운동을 전개하였으면 한다”고 격려하고 그에게 “고려대에서 학생들에게 영향력 큰 학생은 누구인가”라고 문의하여 그로부터 “고대 연합 서클 회장인 법대생 박○남이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크다”는 말을 듣고 위 박○남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하고 학생운동 활동비 15만원을 제공한 사실이 있습니다.〉
 
  김씨는 자금의 출처 등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조사관에게 “아버지 김대중 관계만은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김홍일씨는 ‘DJ에게서 자금을 제공받았다’는 등 자칫 DJ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진술을 한 셈이다.
 
 
  이희호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고 이희호 여사. 사진=조선DB
  1980년 8월 10일 계엄군법회의 검찰부는 DJ의 부인 고 이희호씨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실시했다. 이날 수사관은 이희호씨를 상대로 DJ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지, 한민통의 실체를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등 집중 추궁했다. 이씨는 DJ가 한민통 관련 인사들과 접촉했음을 비교적 순순히 시인했다.
 
  이씨의 진술 내용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한민통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민통은 일본에서 친북(親北) 재일동포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다. DJ는 일본 망명 기간 중인 1973년 한민통 의장으로 추대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민통이 북한과 연계된 조직임을 눈치 채고 DJ를 국내로 강제송환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駐日 한국대사관 보고서에 담긴 한민통의 정체
 
  1978년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했다. 3년 후인 1981년 대법원은 DJ의 한민통 관련 역할을 국가보안법상의 ‘반(反)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首魁)’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한민통을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는 조총련의 하부 조직으로 판단하고, DJ를 그 수괴라고 본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僭稱)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인 북괴 및 반국가단체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 지원을 받아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라 함이 본원(本院)의 견해로 하는바…”라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계엄사와 합수부도 이 사건 조사 당시, DJ와 한민통 연계에 대해 손금 보듯이 알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 주일(駐日) 한국대사관이 1980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보낸 〈조총련·한민통 일본본부·金大中 관계〉라는 보고서가 그것이다. 그해 7월 3일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수사하던 합동수사본부가 주일 한국대사관에 한민통 일본본부, 한민통 기관지 《민족시보(民族時報)》, 한민통의 중요 간부들의 성격과 활동상황에 대해 조회를 했는데, 그 회신으로 온 게 바로 이 보고서다. 보고서에는 ‘영사(領事)증명서’가 붙어 있는데, 재판부에 제출할 때 그 공신력을 뒷받침하기 위함이다.
 
  보고서에는 이희호씨의 진술조서에 나온 한민통 간부 김종충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실려 있다. 보고서는 김종충을 ‘베트콩파(베트남의 공산주의 군사조직)’로 분류해놓고 있다. 이어 김종충이 DJ에게 자금을 지원했다고 기술했다. 보고서의 일부다.
 
  〈(김종충은) 1972년 10월~1973년 8월까지 김대중이 체일(滯日) 중에 동인(同人)의 체제 경비 및 한민통 경비조로 일화(日貨) 1000만 엔을 조총련으로부터 조달하여 제공하였고 나고야 거주 전시(前示·앞서 적시했듯이-기자 주) 베트콩파 박○채 등 친지 4~5명으로 하여금 일화 400만 엔을 제공하도록 주선하여 한민통의 활동자금을 제공하였다.〉
 
  보고서는 “김종충 및 배동호가 김대중에게 제공한 자금은 동인(同人) 등이 특별한 사업이나 수입원이 없는 자들인 것으로 보아 조총련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이라고 덧붙였다. 이상의 대법원 판결문과 주일 대사관발(發) 보고서를 종합하면, DJ는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는 공산주의자로부터 자금을 수수한 게 된다.
 
 
  再審에선 한민통을 어떻게 봤나?
 
  2004년 1월 29일 서울고등법원 제3형사부(재판장 신영철, 판사 김태용·박순관)는 이 사건 재심과 관련해 아래와 같이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의 점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 보건대, 이 부분은 위 판단 범위에서 본 바와 같이 형식적으로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므로 재심법원으로서는 이를 다시 심리하여 유죄인정을 파기할 수 없고 다만 그 부분에 관하여 새로이 양형을 하여야 하나, 각 증거에 의하면 피고인은 1987.7.10.경 이 사건 범죄사실에 대한 형(刑) 선고의 효력을 상실케 하는 동시에 피고인을 복권하는 내용의 특별사면을 받은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한편 형사소송법 제326조 제2호에서 사면이 있는 때에는 면소의 선고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므로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 중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는 새로이 양형을 정하는 데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면소(免訴)의 선고를 하여야 할 것이다.〉
 
  한민통 접촉과 관련해 DJ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반국가단체 수괴) 등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 인정을 파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재판부가 이같이 선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앞서 본 1981년 대법원 판결에 의해서도 한민통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임이 확정돼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DJ의 否認, 이희호의 認定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연루자 이택돈씨는 김대중씨가 한민통이 북한과 관련돼 있다는 걸 알고도 접촉했다고 진술했다. 11차 공판을 보도한 《조선일보》 1980년 8월30일자.
  DJ는 1심 공판(2차 공판조서)에서 ‘김종충으로부터 한민통의 활동 상황 보고받은 것이 없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또한 ‘1973년 8월 13일 22:00경 피고인 자가(自家)에서 김종충으로부터 국제전화로 한민통 발기 선언대회가 예정대로 1973년 8월 13일 개최되어 한민통이 결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있냐’는 검찰 측 질문에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희호씨 진술로 돌아가보자. DJ는 한민통 접촉 사실에 대해 부인했지만, 부인 이씨는 참고인 조사에서 김종충에 대해 알고 있다며 DJ와 김종충의 만남 경위, 접촉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김종충씨는 저의 남편 김대중과 동향인으로서 전남 신안군 하의국민학교 동창이며 8·15 해방 전에 건너가 일본 동경에 거주하면서 제 남편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뒷바라지를 하여 주고 또 1973.경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에 참여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실이 있으며 그 후부터 금년 5월 말까지 매월 2~3회씩 전화 연락이 있었으며 안부 등을 묻곤 하였습니다….〉
 
  이희호씨 기억에 따르면, DJ와 김종충은 전화 연락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씨의 진술조서에서 옮긴다.
 
  〈제 남편이 연금(軟禁)에서 해제된 1973.10.말경 이후부터 매월 2~3회 전화가 왔었는데 처음의 통화내용은 남편 구출위원회가 일본에 만들어져 석방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을 포함하여 안부를 묻고, 1976.3.1 ‘명동성당 사건’ 이후에는 저에게 전화하여 남편에 대한 재판 진행 상황을 묻고 동년 9월 중순경에는 전에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한민통 일본본부 부의장으로 있던 김재화씨를 비롯하여 한민통 간부 10여 명이 남편의 석방을 위하여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는 말을 통화하였으며 1978.12.말경 남편이 가석방으로 교도소에서 나온 그날 저녁에도 김종충씨로부터 전화가 자주 왔으나 통화 내용에 대하여는 알지 못합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판시된 사실에 대해 이희호씨는 “1978년 6월경 알게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1978.6.경 저희 집에서 조간신문인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일본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대법원에서 판시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으며, 간첩사건에 한민통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쯤에 남편이 입원하고 있던 서울대학병원 201호실에서 남편과 이야기를 하던 중, 대법원에서 일본에 있는 한민통이 간첩사건에 관련되어 반국가단체로 판시되었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수사관이 ‘한민통이 주한미군 철수 등 우리나라의 이익에 반대하는 주장을 자주 한 것을 알고 있냐’고 묻자 이희호씨는 이렇게 답했다.
 
  〈오래 되어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외신기자 한 사람이 보여준 일본 신문에서 일본에 있는 한민통이 ‘주한미군은 남북통일에 장애일 뿐이므로 철수하여야 한다’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1978.말경 남편이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에 일본 신문에서 본 그대로 한민통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다는 것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이희호, DJ가 한민통 의장 선출에 개입한 정황 진술
 
  이씨는 DJ가 김종충의 부탁을 받고 온 일본 매체 기자와 접촉한 사실을 비롯해 한민통 의장 선출에 DJ가 개입한 정황을 시인하기도 했다.
 
  〈(일본 시사통신 기자) 나가누마는 일본의 김종충의 부탁으로 왔다고 하면서 한민통 일본본부에서는 지난 1978.6경 대법원에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하였기 때문에 남편이 정치활동을 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다음 한민통 의장단 개편 시에는 김재화를 한민통 의장으로 추대하겠다고 하는 말을 하였고, 이에 남편은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데 불리하니 그렇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듣고 있습니다.〉
 
  위 내용을 종합하면, 이희호씨는 (DJ가 접촉한) 한민통이 반국가단체임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이희호씨는 DJ가 반국가단체로 판시된 한민통과 접촉했음을 인정했고, 이는 DJ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희호씨가 언급한 김재화는 한민통 관련 인사 중 최연장자(1903년생)로 다채로운 전력(前歷)을 가진 이다. 주일 대사관 보고서는 “김재화는 1945년 10월경 조총련의 전신(前身)인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위원 겸 아키다현(秋田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10월경 조선인 거류민단으로 위장침투 하였다”고 적고 있다.
 
  보고서는 또 김재화가 “조총련 중앙부의장 이심철… 등과 수차에 걸친 모의 끝에 북괴 대남전략에 따라 대한민국 국회에 침투하기로 모의, 신민당 전국구 후보에 출마할 것을 결정하고 동인들이 모금한 3500만 엔을 국내에 반입함으로써 국내에서 구속, 입건되었다”고 적시했다. 보고서는 이 돈의 출처가 ‘조총련 자금’이라고 봤다.
 
  이 밖에도 이희호씨는 DJ의 지시로 동일방직 해고 여공(女工)들에게 농성자금을 건넨 사실이 있다고도 했다.
 
  〈1980.5.10경 동교동에 있는 저의 집으로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누이동생 전순옥이가 찾아와서 남편에게 “동일방직 해고 여공들이 여의도에 있는 노총회관에서 복직 요구를 위한 농성을 전개하고 있으니 농성자금을 보조하여 달라”고 부탁하였고, 남편은 저에게 ‘농성자금을 그녀에게 주라’고 하여서 제가 준 사실이 있으며 그때의 금액은 20만원이었습니다.〉
 
  조사관은 이 대목을 문제 삼으며 이씨에게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역에서 포고령으로 모든 시위나 단체행동이 금지되어 있고 이에 대하여 자금을 제공하면 위법하다는 것을 압니까”라고 물었다. 이희호씨는 “예.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잘못하였습니다”라고 인정했다.
 
 
  김상현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의장 시절의 김상현 의원. 사진=조선DB
  ‘후농(後農)’이란 호(號)로 잘 알려진 고 김상현(전 국회의원)씨는 DJ와 정치적 운명을 ‘따로 또 같이’ 했던 이다. 김상현씨도 DJ가 한민통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란 취지의 진술을 했다. 1980년 7월 26일 계엄군법회의 검찰부 조사 시 했던 김씨의 진술 일부를 옮긴다.
 
  〈문: 피의자가 김대중이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그를 만나 곽동의와 배동호를 조심하라고 하였는데 왜 그런 말을 하였나요?
 
  답: 일본에는 조총련이 있기 때문에 교포임을 빙자하여 접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혹시 배동호나 곽동의가 김대중에게 접근하여 그의 정치생활의 앞날에 영향을 미칠까 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문: 그들의 배후에 조총련이 있다는 것은 언제 확실히 판명되었나요.
 
  답: 공식적으로 확실히 판명된 것은 1978.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서입니다.
 
  문: 그 전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었나요.
 
  답: 그들의 배후에 조총련이 있다는 사실은 교포사회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고 본인 역시 교포문제연구소를 운영하며 당시 민단(民團·재일거류민단) 분규에 관하여 국회에 보고서도 제출하였듯이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문: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 자금을 받았나요.
 
  답: 틀림없는 것은 민단 측의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이며 그들은 조총련이나 반한(反韓)단체로부터 돈을 받아 쓰지만 겉으로는 평범한 사업가를 통하여 자금을 제공받는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문: 김대중도 그런 사실을 알았었나요.
 
  답: 당시 일본에서 한민통을 결성할 당시 김대중이 그들이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고 그들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주의를 준 일이 있지만 김대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당시 일본에서 반정부 투쟁을 하려고 하였지만 민단 측이 그를 도와줄 리 만무하고 따라서 같은 목적을 위하여 그들과 주의 깊게 관계를 맺고 손을 잡고 한민통을 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DJ의 오해 산 김상현 “(한민통 관련해) DJ에게 주의 줘”
 
  김상현씨는 1980년 7월 18일 계엄군법회의 검찰부 조사에서 DJ에게 호된 질책을 당한 일에 대해 진술하기도 했다. 김상현씨는 DJ의 정견(定見)이 담긴 《이 땅의 새 역사를 위하여》 《민족혼과 더불어》 등 각종 유인물 배포에 앞장섰는데, 이 과정에서 DJ의 오해를 산 것이다. 김씨의 진술 내용이다.
 
  〈문: 피의자는 그런 책자를 읽어본 일이 있나요.
 
  답: 읽어본 일은 없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일부 선동적인 문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유인물의 배포는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가요.
 
  답: 배포 경위는 김대중씨 비서실을 통하여 책자를 받아 동 연구소(김상현씨가 DJ를 위해 설립한 한국정치문화연구소-기자 주)에서 임의 배포하였지만, 1980.3. 중순경 동교동을 방문하고 김대중씨에게 “김 후보 명의로 나오는 일체의 유인물에 대해서 한국정치문화연구소에서 제작 배포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더니 김대중씨가 “자네 멋대로 할 것 아닌가”라며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동인이 직접 관여하고자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왜 그런 제안을 하였나요.
 
  답: 연구소에서 더 좋게 제작하여 김대중씨의 환심을 얻고자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문: 왜 김대중씨가 거절하였던가요.
 
  답: 제가 홍보 부분까지 관여한다면 주변에 불만이 있을 것으로 보고 거절한 것 같습니다.〉
 
  김상현씨와 DJ는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였지만, 때때로 DJ는 김씨를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DJ의 경호비서를 하다가 그와 결별한 함윤식씨는 1987년 《동교동 24시》란 책을 썼다. 함윤식씨는 DJ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한 핵심측근 중 한 명이었다. 이 책에서 함씨는 DJ에 대해 “상황에 따라 몸의 색깔을 달리하는 카멜레온처럼 상황이 변하는 대로 말과 행동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이중인격자이며 성격파탄자”라고 혹평했다. 이 책에는 DJ가 김상현씨를 견제한 사례가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다.
 
  〈어느 날 김상현씨가 동교동으로 찾아왔는데 두 사람이 심각하게 다투는 소리가 났다. 김대중씨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이 사람아 나는 그렇게 생각 않는데 주위에서 말이야, 자네가 나를 앞질러 간다고 그래, 알겠어?”
 
  좀 작은 목소리로 김상현씨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형님을 앞질러 간다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하는 일이 전부 형님을 위한 일이지 지금까지 형님을 위한 일이지 지금까지 형님을 위하지 않고 저 개인을 위해 일한 적이 있습니까.”
 
  …항간에는 김대중씨가 김상현씨를 제거한 데 대해 전국구 헌금을 김대중씨에게 주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는 말이 퍼져 있다. 그것은 사실과 다른 얘기다. 김대중씨는 동교동 내 김상현씨의 부각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상현씨는 DJ가 아닌 YS를 도왔다. 이후 3당 합당에 반대해 DJ의 품으로 되돌아갔으나 그 후부터 DJ와는 다소 소원한 관계를 이어갔다.
 
 
  예춘호, 이호철
 
1994년 5월 17일 국회 후생관에서 예춘호씨(가운데) 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화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예춘호씨의 진술도 흥미롭다. 예춘호씨는 원래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낸 박정희 정권의 핵심 중 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1969년 삼선개헌(三選改憲)을 단행하자 이에 반발해 박 대통령과 결별하고 DJ와 의기투합해, 이후 ‘동교동 캠프’에 합류했다. 그런 예춘호씨는 1980년 7월 19일 김대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 김대중의 사람됨을 어떻게 보았나요.
 
  답: …10·26사태 후 유신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볼 때 김대중의 정치적 비중이 크고 앞으로 대통령 후보까지 예측되므로 정치가로서 접하여 친숙해져 본인의 정치활동에 기반이 되는 것으로 기대하여 접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비서실장 임명 과정, 대(對)신민당, 복권 과정, 결별 선언 등으로 미루어볼 때 지금 생각하면 교활한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이른바 ‘분단작가’로 알려진 소설가 이호철(2016년 사망)씨도 DJ에 대해 혹평을 남겼다. 이호철씨는 1980년 7월 22일 조사에서 “(DJ를 만나기 전에는) 반유신체제 정치인이라는 상식적인 지식밖에 없었으며 만나본 이후에는 냉혹하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머리가 좋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예춘호가 밝힌 DJ가 주장한 ‘민주회복’의 속뜻
 
  예춘호씨는 1980년 4월 10일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국민연합’ 총회를 가진 경위에 대해서도 상세히 진술했다. DJ를 비롯해 문익환(목사), 예춘호, 심재권(당시 서울대생·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서경석(목사), 함세웅(신부), 박형규(목사) 등이 참석해, 향후 정국의 진로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DJ는 ‘신민당 입당보다는 민주회복이 우선’이라며 신민당 입당 포기를 선언했다. 당시 야권의 최대 이슈는 YS가 총재로 이끄는 신민당에 DJ가 입당해 ‘야권 단일화’를 이룰지 여부였다. 10·26사태 직후, 제1야당이던 신민당의 집권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져 있을 때였기에 DJ의 행보는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DJ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권 꿈을 꾸고 있던 YS가 당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상 신민당에 입당하는 건 별다른 실익(實益)이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대신 외곽에서 종교계·학원 등 재야세력을 규합하는 게 오히려 ‘대권고지’ 점령에 유리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수사관은 예춘호씨에게 이날 DJ가 ‘민주회복’을 언급한 것을 두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예씨는 이런 분석을 했다.
 
  〈김대중이 복권 후 신민당 내 입당 문제에 신경을 써본 결과, 입당 후 당권 장악이 불가능한데다가 김영삼씨가 지구당 개편 작업을 추진하고, 당내 지지기반을 구축하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활동을 하자 초조해졌으며 만일 신당을 만든다면 국민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것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다가 명분을 찾는다는 구실하에 민주회복을 주장한 것 같으며 학원 소요 및 대정부 불신감을 갖고 있는 일부 여론에 편승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수사관은 민주회복을 위한 DJ의 구체적인 투쟁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예씨는 DJ가 “신민당이나 신당에 의한 대통령 지명을 받아 대통령 선거에 의하여 당선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국민연합을 통한 민주회복을 내세웠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위 조직(국민연합-기자 주)을 이용, 학생·근로자들에게 강연 등을 통하여 반정부 투쟁 의식을 고취, 반정부 데모로 유도, 민중들과 힘을 합쳐 정부 스스로 물러나게 한 다음 재야세력이 중심이 되는 과도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의미로 생각되었습니다.〉
 
  보기에 따라 일종의 ‘체제 전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씨의 이러한 진술 역시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의심을 받은 DJ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한승헌, 한완상, 고은태
 
한승헌씨. 사진=조선DB
  DJ 정권에서 감사원장을 역임한 한승헌씨도 국민연합 회합 때 참석한 이들 중 한 명이다. 한승헌씨는 DJ가 이 자리에서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며 ‘자신의 표정이 굳어졌다’고 진술했다. 그 내막은 이러했다.
 
  〈김대중 선생께서 지난 5.7. 국민연합의 성명서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어떠냐고 묻자 참석자들이 ‘그 내용이 보도되지 아니하여 그 반응을 알 수가 없다’고 하자, 그는 말을 이어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 국민적으로 추진하여야 하는데 국민연합의 협조가 미흡하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자… 김대중은 ‘과도정부가 정권 계속 유지 음모를 하고 있다’면서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반민주 유신세력의 음모를 분해하고 유신체제와 싸워온 민주인사가 참여하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우리도 학원 등의 움직임에 맞춰 민주화국민운동본부를 빠른 시일 내에 발족시켜 전 국민적인 민주화촉진운동을 전개해야겠다’고 말하자… 저와 이해동, 김종완은 표정이 굳어져 멍하니 있다가 산회(散會)하였던 것입니다.〉
 
  한승헌씨는 자신의 표정이 굳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단순히 국민연합의 운영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그 모임에 참석하였으나, 회의의 진행이 제가 바라지 아니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안정 위에서 민주화 발전을 원하는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한승헌씨는 DJ가 주장하는 이른바 ‘민주화촉진운동’이 다소 과격하다고 여긴 듯하다.
 
 
  한완상씨의 후회 “정부 당국에 미안”
 
한완상씨. 사진=조선DB
  YS 정권에서 통일부총리, DJ 정권에서 교육부총리를 역임한 한완상(당시 서울대 교수)씨 역시 한승헌씨와 마찬가지로 국민연합 회합 자리에서 ‘DJ가 불쾌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한완상씨는 1980년 4월 25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DJ의 관훈클럽 연설문(‘80년대의 좌표’) 원고를 감수했을 정도로, DJ가 믿고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한완상씨는 DJ를 도운 이유를 언급하며 자신의 혐의에 대해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DJ-기자 주)를 도운 것은 그가 유신체제하에 인권 및 민주회복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그를 도울 생각이었을 뿐으로 그가 신당(新黨)을 만드는 등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면 더 이상 그를 돕지 아니하고 학교 일에 충실할 생각이었습니다… 인권과 민주발전의 차원에서 김대중을 도우려 한 것이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특정인의 정치활동이나 정략에 일방적으로 이용되어 왔다면 정부 당국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하고, 만일 앞으로 학원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본인의 연구실에서 학술적인 연구에 전념하고 정치적이거나 정치적 활동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정부 당국에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한완상씨의 말은 DJ 노선을 따른 데 대한 후회로 들린다. ‘만인보(萬人譜)’로 유명한 시인 고은태(고은)씨도 국민연합에 대해 “사실상 김대중 추종세력 주도로 변해버린 것 같다”며 조직이 변질됐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김옥두, 한화갑, 박성철
 
   DJ의 ‘가신(家臣)’ 출신으로 40년 넘게 그를 보필한 김옥두(전 국회의원)씨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1980년 7월 6일 계엄사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김옥두씨는 DJ와 관련해 재미있는 진술을 했다.
 
  〈1979. 12. 하순 일자미상경 마포구 동교동 소재 김대중 가(家) 응접실에서 동인(同人·DJ)으로부터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으니 곧 복권(復權)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복권이 이루어지면 정치활동을 해야 하겠으니 전 비서진을 재정비하여 자신을 적극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앞으로 대권을 잡을 사람은 오직 김대중뿐이라고 확신하고 신명을 다하여 충성할 것을 맹세한 후 기경(其傾·그 무렵) 김대중 가 응접실에서 당국의 허가 없이 김대중 경호실장 박성철 및 섭외비서 권노갑, 정당비서 김○국 등이 같이 동석하여 김대중이, “앞으로 내가 집권을 할 경우 나로 인해 고생을 하였어도 실력과 능력이 부족하면 좋은 자리를 줄 수 없으니 각각 실력 배양에 노력하라”….〉
 
  DJ가 집권에 대비해 측근들을 상대로 일종의 ‘자리 보장’을 시사하는 듯한 얘기를 한 셈이다. 김옥두씨는 DJ가 학생들을 상대로 선동했다는 진술도 했다. DJ는 1980년 4월 15일, 상경(上京)한 조선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옥두씨의 진술조서에서 옮긴다.
 
  〈“우리나라 학원은 족벌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라고 학원 시위를 선동한 후 대통령 출마 여부에 대하여는 “현 시점에서 밝힐 수 없으나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기 바란다… 학생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그때 적극적으로 지원해달라”는 등, 동(同) 학생들을 선동한 후….〉
 
 
  “학생 선동해 정권 잡으려는 사람 없어야”
 
  김옥두씨와 마찬가지로 동교동 가신그룹의 일원인 한화갑(전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대표)씨도 참고인 조사(1980년 8월 9일)에서 DJ 강연이 ‘선동적이었다’고 평가했다.
 
  〈80. 4. 18 14:00 동국대학에서 있은 ‘4·19혁명과 민족통일’ 제목의 강연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강연의 내용은 모두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유신 잔재들이 고개를 들고서 민주화에 역행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판적이고 선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DJ의 경호실장’ 박성철씨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점잖게 비판한 이 중 한 사람이다. 박씨는 DJ와 ‘특수한 인연’이 있었다. DJ는 1949년 남로당민족전선부위원장 및 섭외부장인 유모씨에게 북한을 왕래할 수 있는 활동자금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된 적이 있다. 이때 목포경비부 해군헌병파견대장 박성철의 보증으로 DJ는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박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DJ는 자칫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박성철씨는 이 사건에 연루된 데에 반성의 뜻을 보이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 사건에 관하여 특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정치는 어른들이, 즉 정치인들이 하여야지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그런 사람이 우리 역사상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저는 데모 선동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설훈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조선DB
  설훈(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씨는1980년 7월 28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조사를 받았다. 당시 고려대 복학생이던 설훈씨는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에 몸담고, 학생시위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설훈씨는 1980년 3월 30일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민청학련 사건과 관계된 신계륜을 총학생회장에 당선되게 하였다”고 진술했다. 신계륜은 훗날 DJ가 이끄는 민주당과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설훈씨는 같은 해 5월 2일 복학생들과 만나 “축제를 거부하고 오늘 21:00경에 시국성토 시위를 갖자”고 결의하고, 이를 박○남 등에게 지시해 복학생들을 규합해 시위에 나섰다.
 
  이를 통해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연합의 각종 성명, 연설, 유인물 등을 통해 투쟁의식을 고취하고 ▲민청협을 중심으로 하는 복학생 조직이 각 대학의 학생회장단을 조종해 학생들에게 반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등 사회 정세를 혼란에 빠뜨려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게 설훈씨 진술의 요지다.
 
 
  설훈 “폭력은 필요악”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설훈씨는 4·19와 같은 유혈(流血)시위를 불사한 채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취지의 말을 하며 자신의 혐의를 사실상 시인했다. 설씨의 1심 공판 9차 공판조서에 기재된 재판장과 설훈씨가 나눈 문답을 보자.
 
  〈재판장: 피고인은 폭력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 하고, 상여(喪輿)를 만들어 메고 시위를 하고 여의도 광장 및 서울역 등지로 뛰쳐나왔는데 6·3사태 및 부마사태 때도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으나 결과는 치안(治安) 마비와 유혈사태가 뒤따랐습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시위를 막는 경찰이 나쁘다고 각목을 휘두르고 돌멩이를 던져 다치게 하였습니다. 피고인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평화적인 시위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폭력이냐 하는 것은 피고인들이 편리한 대로 정한 것이 아닌가요. 상여를 만들어 메고 다니다가 불태워 국민을 자극시키고 또 현 정부를 부정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설훈: 폭력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도 저항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잘못하니까 시위를 하는 것이고 폭력화하는 것은 정부가 총과 칼로써 막기 때문입니다.
 
  재판장: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경찰이 저지를 하면 그에 수반하여 학생시위가 극렬해지고 질서가 문란해지면 결국 군이 출동하게 되고 그에 따른 충돌로 인해 희생자가 생기게 되면 4·19와 같은 사태가 벌어져 무정부 상태가 되어 현 정부는 붕괴되는 것으로 체계화되는데 피고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설훈: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면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계엄령을 해제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군(軍)이 투입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DJ 측이나 학생운동을 주도한 세력 입장에서는 설훈씨의 입장에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정부와 사법당국은 이를 ‘폭력혁명을 통한 정부 전복(顚覆)’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해찬
 
  현재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집권여당의 간판인 이해찬씨는 사건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이자 민청협 위원장 대리였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가 발표한 ‘수사결과 전문(全文)’에 기재된 이해찬씨 관련 대목을 인용한다.
 
  〈김대중의 지령에 따라 5월 22일 전국 일제 민중봉기를 획책하다가 5·17조치로 무산되자 지하로 잠입한 각 대학 김대중 추종 복학생들은 조성우(민청협회장·국민연합 중앙위원회 기획국장)와 이신범(서울대 법학 4·복학생)의 조종하에 이해찬(서울대) 등 10여 명이 주동되어,
 
  ▲ 5월 19일〜6월 12일간 전후 16회에 걸쳐 은밀히 회합하면서 서울에서 ‘제2의 광주사태’를 유발할 목적으로 각종 선동 유인물을 제작·살포하는 동시에,
 
  ▲화염병과 ‘대침’(일종의 독침)을 제작 소지하고 다니면서 복학생을 규합, 특공대를 조직하여 6월 12일 구로공단에서 1차 폭력시위를 일으켜 근로자를 선동, 동원함으로써
 
  ▲그 여세를 몰아 6월 13일 18시 화염병 투척을 신호로 ‘화신’ 앞 등 시내 중심가에서 일제 폭력시위를 감행하여 계엄군과의 충돌을 일으키고 사태를 악화시켜 정부 기능을 마비, 전복해보려고 기도(企圖)하다 거사(擧事) 직전 일망타진되었다.〉
 
  이해찬씨는 1980년 7월 27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씨는 “1980년 5월 8일, 성대·서강대 학생들과 민청협 확대간부 회의를 개최하고, 학생데모 방향을 논의했다”고 진술했다. 이해찬씨는 그에 따른 행동지침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했는데 ▲“조속한 시일 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감행하여 현 정부를 타도한다” ▲“중앙청을 비롯한 정부 중요시설을 점거하되 각 대학별로 시위행진 진로 및 점거대상 시설의 분담은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에서 결정 시행한다” ▲“경찰의 저지선 돌파를 위하여 각 대학별로 각목·돌멩이·화염병 등을 준비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해찬씨는 1980년 5월 20일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각 대학의 시위 방법 및 일정을 조정할 복학생과 재학생이 공동 참여하는 기구를 만들자”고 제의하였으나 고대의 설훈과 성대의 김○대가 반대하여 토의하던 중 조성우가 “이제부터의 시위는 국민연합과 전 대학이 연합하여 각목, 투석, 화염병 등으로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고 학생데모가 가열되어 시민들이 호응하면 4·19 사태와 같이 정부가 전복되고 결국 국민연합이 정권을 이어받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다”고 말하길래 저는 갈망하던 신문사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혼자 생각하였으며….〉
 
  이해찬씨는 이러한 소요 기도에 대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어리석은 생각이었고 반성하며 몇 명의 주모자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점에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참회했다.
 
 
  이해찬씨의 ‘항소이유서’를 보니…
 
이해찬씨 항소이유서 첫 페이지. ‘원본(原本)’이라는 한자가 뚜렷하게 찍혀 있다. 사진=조선DB
  1980년 7월 29일 가진 피의자 신문에서는 ‘정부 전복 기도’를 꾀한 이유에 대해 상세히 진술했다. ‘왜 정부 전복까지 생각했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처음에는 과도정부 민주화를 하는 것 같아 기대를 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히려 신 총리(신현확 국무총리-기자 주)의 유신 비호 발언에, 최 대통령의 이원집정부제 제의 시사, 개헌 작업 정부 주도, 유가 인상 후 끈질기게 나돌던 여권의 제3당 창당설 등으로 보아 이는 단순한 과도정부가 아니라 유신체제의 연장이며 그렇게 되면 저로서는 제가 생각했던 새로운 민주 정부의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학생의 폭력시위를 이용, 위로는 국민연합과 연결하고 밑으로는 총학생회장단을 조종하여 전국적 대대적 학생 폭력시위로 정부를 전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수사관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난 뒤 어떻게 하려 했나’고 묻자 이해찬씨는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 수사자료에는 이해찬씨가 자필로 쓴 1980년 10월 16일 ‘항소이유서’도 첨부돼 있다.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유시민씨가 쓴 항소이유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해찬 항소이유서는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59페이지에 달하는 이씨의 항소이유서는 문장이 정확하고 논리가 정연하다. 이 글은 유신체제의 폭압성을 고발하는 한편, 이씨의 역사관·언론관·시국관 등이 자세하게 표현돼 있다. 그의 항소이유서 중 의미 있는 대목 몇 군데를 소개한다.
 
  〈▲유신체제는 허수아비 통대(統代) 의원으로 대통령 종신체제를 구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언론기관을 교묘히 통제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제약하며…
 
  ▲관권(官權)과 유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극소수의 부유층은 건전한 국민경제 건설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투기, 호화 사치품 수입, 토지 투기, 사채시장 형성 등 지극히 불건전한 방법으로 부(富)를 증식시켜나가…
 
  ▲자유언론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아·조선 양대 신문 기자들의 뜨거운 항쟁은 급기야 광고 탄압사태를 가져와… 빈 광고 지면을 성금으로 채우는 자유언론 투쟁사를 언급한 것입니다.
 
  ▲(1980년) 5월을 맞아 본인을 포함한 서울대학생들은 유신 잔당들의 명백한 악의(惡意)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으며…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선거를 할 경우 집권이 가장 유력시되던 김대중씨를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으로 엮어 공산주의자인 양 왜곡·선전하고…
 
  ▲학생 민주세력을 물리적 폭압으로 탄압하고 반민주·반민중·반역사적 소수 군벌 중심의 반역사적인 집단이 합법을 위장한 재판을 통하여 유력한 정치인을 제거하고…〉
 
  이해찬씨는 7월 27일 조사에서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했지만, 약 3개월 후 작성한 항소이유서를 보면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설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사 당시 拷問 있었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재평가를 받게 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수사 과정에서 협박이나 고문을 행했다는 주장 때문이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여부는 당시 수사관과 사건 연루자 외에는 알 도리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서류상으로는 강압이나 폭력이 가해졌다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억압을 하거나 폭행을 한 일이 있냐’는 질문에 12명의 피고인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피고인 중 세 명은 ‘조사받을 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술하고 서명·무인(拇印·지장)했느냐’는 질문에 “네”라고 답하기도 했다.
 
  ▲‘검찰관이 억압을 하거나 폭행을 하거나 강요한 일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답변한 피고인(12명)
 
  김대중(1심 3차 공판조서 860쪽, 1심 3차 공판조서 980쪽)
  이해찬(1심 5차 공판조서 1456~ 1457쪽)
  문익환(1심 3차 공판조서 962쪽)
  김종완(1심 10차 공판조서 1992쪽)
  이문영(1심 4차 공판조서 1151쪽, 1심 8차 공판조서 1734쪽)
  김상현(1심 5차 공판조서 1302쪽)
  예춘호(1심 8차 공판조서 1754쪽)
  고은태(1심 4차 공판조서 1256쪽)
  이신범(1심 5차 공판조서 1353~ 1354쪽)
  송기원(1심 6차 공판조서 1514쪽)
  이석표(1심 9차 공판조서 1889쪽)
  서해동(1심 10차 공판조서 1964쪽)
 
  ▲‘피고인은 검찰관 앞에서 조사받을 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술하고 서명·무인(拇印·지장)하였는가요’란 질문에 “네”라고 답한 피고인(3명)
 
  조성우(1심 5차 공판조서 1387쪽)
  이해찬(1심 5차 공판조서 1456~ 1457쪽)
  설 훈(1심 6차 공판조서 1595쪽)
 
  ▲‘조사받을 때 폭행이나 협박을 받아 허위진술한 사실이 있냐’는 질문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답변한 피고인(2명)
 
  이석표(1심 6차 공판조서 1491쪽)
  송기원(1심 6차 공판조서 1544~ 1545쪽)
 
 
  결론: 함윤식의 고백
 
  지금까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13명의 진술을 살펴봤다. 그들의 진술이 DJ에게 얼마만큼 불리하게, 또는 유리하게 작용했는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일부 진술은 DJ에게 뼈 아프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게 수사기록을 읽어본 기자의 판단이다.
 
  《동교동 24시》에는 DJ와 함윤식씨가 벌인 대화가 수록돼 있다. ‘DJ 신봉자’였던 함씨는 정국 현안 문제로 DJ와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DJ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책에서 옮긴다.
 
  〈함윤식: “선생님, 사람의 잘못을 따지려면 한이 없는 겁니다. 5·17 사태 때 선생님은 따로 재판을 받아서 잘 모르시겠지만 김옥두씨나 한화갑 비서, 김대현(DJ의 동생)씨 심지어 선생님의 자제인 홍일이까지도 선생님을 배신하는 증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DJ: “아니 함 동지! 그게 무슨 소리여. 배신을 했다니!”
 
  나는 법정에서 그들이 증언했던 내용을 하나도 빼지 않고 자세히 김대중씨에게 들려줬다. 가끔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음!’ 하고 신음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함윤식: “그러나 선생님, 저는 그때도 끝까지 버티었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란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가 김대중을 학원 소요사태 및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발표한 사건을 말한다.
 
  계엄 당국은 김대중과 추종자들이 ‘국민연합’이란 조직을 전위(前衛)세력으로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대학교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대중선동에 의한 학원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해 전국에 일제히 민중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유혈(流血) 혁명사태를 유발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해, 집권하려는 내란음모 행위를 꾀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김대중은 반(反)국가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發起), 조직, 구성해 그 수뇌(의장)로 있으면서 북한 공산노선을 지지·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국으로부터 불법 반입한 외화(外貨)를 불법 소지·사용하는 등 계엄포고령을 공공연히 의도적으로 위반한 사실도 있다고 전했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반공법·계엄법·외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문익환·이문영·예춘호·고은태(고은)·김상현·이신범·이해찬 등도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모두 사면·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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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정래    (2019-07-05) 찬성 : 6   반대 : 0
인간은 공수래 공수거 길어48419자 100년도 못살것 무엇이 그리 욕심이 많아서 정권을 잡을려고 죽기를 각오하고 야단이고 - 하늘이 주는 태양 물 공기 땅 고마운줄 알고 감사하면서 한세상 상부상조 하면서 조용히 살다가 제명에 가면 가장 행복한것 아니가 - 세상이 어지러운것은 인간들이 너무 욕심을 부리니까 생기는 부작용이다 - 다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잊지말자
  홍성만    (2019-06-25) 찬성 : 30   반대 : 0
좌익좌파 공산주의자들의 특징은 죽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는 사실이다. 특징적으로 사기꾼들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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