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5위 거대 금융그룹… 프랑스 농민 “우리의 은행”
⊙ 정부지원 거의 없고, 농민들이 스스로 농업자금 마련
⊙ 농민들 “다른 은행보다 우리 은행 먼저 갚자”, 대출자금 농민 연체율 2%대
⊙ 정부지원 거의 없고, 농민들이 스스로 농업자금 마련
⊙ 농민들 “다른 은행보다 우리 은행 먼저 갚자”, 대출자금 농민 연체율 2%대
- 크레디아그리콜 본사.
농(農)이라는 글자를 접하는 순간 으레 ‘촌스러움’이나 ‘구식’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농업 종사자들은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고, 농산품은 ‘값싼 것’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기 일쑤다. 반면 같은 말이라도 영농후계자는 자랑스러운 일을 하는 장한 일꾼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농민을 위해 설립된 은행인 농협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NH 농협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회사에 들어가니 주위에서 나를 농촌에서 근무하는 촌스런 사람으로 취급하더라”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과 정반대인 국가가 있다. 바로 세계 최고의 농업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다. 프랑스 농민들은 농민은행에 ‘농(農)’ 자가 들어가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프랑스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농업국가로 국토 대비 농지비율이 30%에 이른다. 유럽 최대의 밀 생산지이자 와인과 샴페인 수출국이다. 농업인구는 경제활동 인구의 2%를 차지하며 농업 총생산은 GDP의 2.5%다.
프랑스 농업이 이처럼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농민들 스스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는 정도로 자금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이 역할의 바탕이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농협이라 할 수 있는 크레디아그리콜(Cr?dit Agricole) 은행이다. 프랑스 농민들에게 ‘우리의 은행’ ‘농민을 위한 은행’으로 인식되고 있는 크레디아그리콜은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돈은 거의 없는 반면, 농민들 스스로 예금한 자금 등으로 운영하는 은행이다. 정부의 농업정책자금이 NH 농협 등 은행으로 내려가 집행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구조다. 세계 5위 안에 드는 초대형 금융그룹인 크레디아그리콜이 어떻게 프랑스 농민들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프랑스 제1은행 자리 굳건
산업화 국가 가운데 상당수는 공업이나 농업 등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국책 금융기관들을 설립해 본격적인 자금지원에 나선다. 그 소임을 다한 국책 금융기관들은 조직이 많이 축소되거나 아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프랑스 크레디아그리콜은 달랐다. 민영화를 통해 새로운 시대 요구에 맞춰 변신했다. 농업자금을 넘어서 부동산이나 각종 보험상품도 취급하면서 종합 금융그룹으로 발전했다. 크레디아그리콜이 2009년 은행업무를 통해 거둬들인 순이익은 160억 유로(24조3000여억원)다.
하지만 본래 목적인 농업지원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세계 5위권의 거대 금융그룹인 크레디아그리콜을 여전히 프랑스 대부분의 농민은 자신들의 농업은행으로 생각한다. 정부로부터 내려오는 농업지원금이 거의 사라지고 농업자금을 프랑스 모든 은행에서 취급하게 됐음에도 크레디아그리콜은 프랑스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농민들에게 크레디아그리콜은 여전히 ‘농민들을 위한 은행’으로 강하게 인식돼 있다.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한 와인생산업체의 수출업무를 담당하는 프랑크 데 파에페(Frank De Paepe) 씨는 “크레디아그리콜의 역사가 워낙 오래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부분 농민이 우리의 은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크레디아그리콜은 19세기 후반에 설립됐다. 당시 프랑스 농민들은 스스로 상호금융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곧 자금동원력의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가 크레디아그리콜을 설립하고 농민단체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지역은행을 설치했다. 그리고 크레디아그리콜 중앙은행이 국가자금을 지역은행에 분배하도록 했다. 또 프랑스 전체 농업자금은 크레디아그리콜이 독점적으로 취급하도록 했다. 1960년대 유럽경제공동체 출범과 함께 농업부문 구조조정이 가속화되면서 크레디아그리콜은 농업관련 업무를 줄이고 일반은행 업무를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1980년대 들어와 시중은행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한 규모 경쟁을 벌이면서 크레디아그리콜에 위기감이 고조됐다. 또 농업지원에 대한 과중한 부담이 생기면서 프랑스 정부는 크레디아그리콜을 민영화하고 공공법인에서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한편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이후 1996년 투자은행인 ‘엥도 수에즈은행’, 2003년 프랑스 6위 소매은행인 ‘크레디 리요네’ 등을 인수하면서 덩치를 키워 나가 프랑스 제1 은행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마을 곳곳에 피라미드 조직으로 퍼져 있어
크레디아그리콜은 지역은행(Caisse Locale)과 광역은행(Caisse Regionale), 중앙은행(CASA)이 단계별로 연결되는 피라미드 구조로 구성돼 있다. 지역은행은 우리의 읍(邑)이나 면(面) 단위에 해당하는 캉통(Canton) 또는 지구(District) 단위로 설립돼 있다. 2009년 현재 2510여 개의 지역은행이 프랑스 마을 곳곳에 퍼져 있다. 설립 초기에는 크레디아그리콜 설립법에 따라 농민단체 회원만이 협동조합은행으로 이 지역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조합원 자격이 개방되면서 현재는 지역은행 금융점포들을 이용하는 거의 모든 고객층에 조합원 자격이 개방된 상태다. 지역은행 이사회는 보통 9~12명으로 구성되며 총회에서 이사를 선출하고 이사회에서 회장을 선출한다. 지역은행은 여·수신 등의 금융사업은 직접 수행하지 않는다. 대신 조합원의 대출과 정책자금 배정, 지역단위 여론수집 기능을 담당한다.
광역은행은 단위별 지역 내에 있는 지역은행들이 모여 구성되며 지역은행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법인격을 갖는 협동조합은행이다. 2510여 개의 지역은행 모두가 광역은행의 회원이며 행정구역상 인접 지역에 있는 지역은행들이 모여서 광역은행을 구성한다. 광역은행은 1899년 영세한 협동조합금융을 광역화하기 위해 설립되기 시작했다. 광역은행은 크레디아그리콜 농촌 소매금융과 정책금융을 전담하고 있다. 지역은행이 처리하지 못하는 농민대출 허가 여부를 관리하고 감독한다. 현재 프랑스 전역에 39개가 있다.
CASA(크레디아그리콜 주식회사)는 우리의 농협중앙회에 해당한다. CASA는 프랑스 은행법상 크레디아그리콜의 중앙은행이면서 주식회사다. 광역은행(CR) 금융업무에 대한 지도·감독을 수행하며 크레디아그리콜의 금융상품 개발 및 마케팅 업무 등을 담당한다.
농민들, 대출은행 좀처럼 바꾸지 않아
크레디아그리콜은 19세기 후반 설립 이후 1980년대까지 농업정책자금을 독점해 왔다. 정부가 출자하는 농업정책자금은 크레디아그리콜을 통해서만 취급됐다. 그러다 프랑스 정부는 1990년 크레디아그리콜의 독점을 폐지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 농업정책자금의 약 90%를 독점하는 등 크레디아그리콜은 농업분야의 독점적 지위에 있다.
크레디아그리콜이 2009년 한 해 농업자금으로 농민에게 빌려준 돈은 약 64억 유로(9조5000억여원)다. 이 가운데 정부 지원금은 5억 유로로 10%도 채 되지 않는다. 크레디아그리콜에 들어오는 예금이나 수익금으로 모두 충당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정부가 제공하는 정책자금 비중이 전체 자금의 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정부가 제공하는 농업정책자금은 차츰 줄어든 반면 조합원들이 맡기는 예금 등으로 자체 조달하는 농업자금이 꾸준히 늘어났다.
캐롤린 핼펀(Caroline Halfen) CASA 농업담당 부국장은 그 이유를 “프랑스에 있는 다른 은행들이 저리(低利)로 농민들에게 농업자금을 공급한다고 해도 크레디아그리콜이 워낙 오랫동안 농업자금을 취급해 왔고, 신뢰를 주고 있기 때문에 농민들이 대출은행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핼펀 부국장의 설명이다.
“1980년에는 정부가 집행하는 자금이 거의 90%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부담이 갈수록 커지면서 점점 비중을 줄이기 시작했죠. 대신 농민 등으로부터 걷는 예금으로 정부정책자금을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프랑스 일반은행의 시장 이자율이 7~8%였고 정부자금의 이자율은 3~4%여서 차이가 컸죠. 그런데 지금은 일반 시장 이자율이 3~4%로 떨어지면서 정책자금의 매력이 줄었고, 그러다 보니 크레디아그리콜에서 조달하는 자금으로도 농민에게 대출할 수 있습니다. 10%도 되지 않는 정부지원자금은 농업을 처음 시작하려는 젊은 사람들, 영농후계자 같은 사람들에게 대부분 배정하고 있습니다.”
300만 유로 이상은 광역은행 이사회 승인받아야
같은 크레디아그리콜 은행이라고 하더라도 대출 기준은 지역은행·광역은행마다 약간의 차이가 난다. 은행마다 지역마다 재정상태나 농민이나 기업이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자기자본금이 많고, 부채가 적은 농민일수록 대출받을 수 있는 액수가 크다. 농업 사업계획서가 부실하고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농민에게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것은 일반은행 대출과는 별 차이가 없다.
농민이나 농기업이 크레디아그리콜에 대출 신청을 하게 되면 차트가 만들어진다. 차트에는 그 사람의 대출 규모와 신용도가 가로와 세로에 표시된다. 그리고 대출심사를 받는 농민의 위치를 표기하게 된다. 대출금이 적을수록, 대출자의 신용도가 높을수록 심사는 지역은행의 아래 선에서 간단하게 처리된다. 반면에 액수가 크고 신용도가 낮을수록 농업전문가가 보다 꼼꼼하게 대출심사를 하게 되고 광역은행처럼 높은 선에서 대출 허가를 결정하게 된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30㎞ 떨어진 랭스(Reims) 지역은 프랑스 최대 농업지역 가운데 하나다. 농경지 면적이 140만ha인 이곳에는 1만8000명의 농민이 샴페인이나 와인 등을 경작한다. 랭스지방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은 우리의 시·군에 해당하는 프랑스 행정구역인 데파르트망(d?partement) 3개가 속해 있다. 그리고 이 광역은행 아래에는 90개의 지역은행이 있으며 전체 조합원 수는 1400여 명에 이른다.
랭스지방 크레디아그리콜 은행 역시 농업자금 대출이 들어오면 대출이 어느 선에서 결정돼야 하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차트를 작성한다. 차트의 가로에는 등급, 세로에는 대출금액이 기재된다. 부채 비율이 낮고 자기자본 비율이 높은 순서대로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등급을 부여한다. 대출신청 금액이 30만 유로(약 4억5000만원)와 100만 유로(약 15억원), 150만 유로(약 22억4000만원), 300만 유로(약 45억원)가 기준이다.
랭스지방 광역은행 기준에 따르면 신용등급이 1등급인 사람은 100만 유로까지는 지역은행 직원 선에서 대출허가 여부가 결정된다. 100만 유로에서 150만 유로 사이는 지역은행 이사회, 150만 유로에서 300만 유로 사이는 지역은행 은행장들이 모인 회의에서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2~3등급을 받은 대출신청자의 경우 30만 유로까지만 지역은행 직원이 심사하며 30만 유로에서 100만 유로까지는 지역은행 이사회의 승인을, 100만 유로에서 300만 유로 사이의 대출신청은 지역은행장들의 회의에서 결정을 하게 된다. 반대로 4~5등급의 신용등급을 받은 사람의 경우 직원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대출은 없으며 30만 유로까지만 지역은행 이사회에서 승인할 수 있고, 30만 유로부터 300만 유로까지는 모두 지역 조합장들의 모임에서 결정한다.
신용등급 1등급인 농민이 90만 유로의 농업자금 대출 신청을 하면 지역은행의 대출 담당 직원 선에서 대출 여부가 결정되는 데 반해 5등급인 농민이 10만 유로를 신청한다고 해도 지역은행 이사회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신용에 따라 차별을 두고 있다. 300만 유로 이상의 대출을 신청하는 경우에는 등급과는 상관없이 모두 광역은행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정 방식도 지역마다 모두 조금씩 차이가 난다. 랭스 지방에는 모두 30여 개의 지역은행이 있는데 조합장 모임 차원에서 결정되는 대출은 1주일에 조합장 5명이 번갈아 가면서 한 번씩 투표를 해 결정하게 된다. 300만 유로 이상의 대출신청을 결정하게 되는 광역은행 이사회에는 총 24명의 이사가 있으며 이 역시 5명의 이사가 회의를 거치고 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만약 광역은행 이사들 가운데 직접 대출을 의뢰하거나 자기가 출자한 혹은 자신의 이익과 직접 연관된 경우에는 투표에서 배제된다.
지역은행은 농민이 대출을 심사
액수가 작거나 신용도가 높은 경우는 대부분 지역은행 선에서 대출심사가 결정된다. 크레디아그리콜 전체로 보면 80~90% 정도가 지역은행 차원에서 심사가 이뤄진다. 지역은행마다 심사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지역은행 자체 이사회에서 조합장이 다른 이사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거나 지역은행 조합장들의 회의에서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 등을 취하고 있다.
파리 북동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프랑스 몰(Maule) 지역은 농가 65곳이 있다. 약 7000ha 규모의 농지에다 농민들은 유채나 밀, 옥수수 등을 경작하고 있다. 인구 8000명인 이곳에도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이 있다. 몰 지역은행은 11명의 이사가 있고, 베르사유(Versailles) 지역 광역은행에 속해 있다.
몰 지역의 대출은 지역은행 이사회에서 주로 이뤄진다. 대부분의 조합장과 이사 1명이 상의해 대출 여부를 결정하고, 까다롭고 복잡하며 금액이 많을 경우에는 이사 전체가 다 모여 투표로 결정한다. 특히 이사들은 대부분 농민이거나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몰 지역은행 조합장인 제럴드 밀레(Gerald Millet) 씨도 농민이다. 1976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한 그는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 조합장 역할과 농사일을 함께하고 있다. 기자를 만나기 직전까지 화원을 운영하는 한 농민이 신청한 8000유로 대출을 심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밀레 씨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은 협동조합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이사회가 거의 100% 농민들입니다. 좁은 농촌 지역에도 은행이 있기 때문에 이사들 가운데 대출 신청자들을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모르더라도 건너서 그 사람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죠. 사실상 농민이 농민을 심사하기 때문에 불만이 거의 없습니다.”
몰 지역은행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중 하나는 대출신청자의 인간관계라고 한다.
밀레 씨의 설명이다.
“크레디아그리콜에서는 인간관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지역은행 이사회는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대출을 신청하면 그 대출 신청하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 2~3명씩 꼭 있습니다. 대출 신청자가 돈을 갚을 여력이 되는지가 우선적 요소이긴 하지만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떨 때는 더 중요합니다.”
재무상태와 평판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다 보니 대출 거절은 거의 없다고 한다. 크레디아그리콜 몰 지역은행에는 한 달에 10여 건의 대출 신청이 들어오는데 1976년 이후 들어온 대출 신청 가운데 대출이 완전히 거절된 적은 2번밖에 없다고 한다. “당연히 대출 신청 서류가 미비하거나 좀 평판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언제 다시 오라고 말합니다. 다시 대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스스로 알고 취소하는 경우가 많고, 아니면 대출금액을 줄이게 되죠.”
농민 대출에 지역사정 잘 아는 특별분석가도 관여
대출을 신청하는 농민들에게 크레디아그리콜은 다른 일반대출 등과는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핼펀 CASA 부국장의 설명이다. “농민을 위한 은행이기 때문에 농민 대출신청은 좀 다르게 심사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생산 자체가 아니라 농산물이 출하된 이후를 세심하게 살펴보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내려보내는 겁니다. 농가가 농산물을 생산하면 출하해 주는 기업들이 있는데 크레디아그리콜에서는 각 광역은행 차원에서 이 출하기업들까지 꼼꼼하게 보도록 합니다. 현재 프랑스에는 생산물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생산한 이후 출하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Bordeaux) 지방에는 포도 생산이 넘쳐나지만 북동부 알자스(Alsace) 지방에는 포도 생산량이 보르도에 비하면 훨씬 적습니다. 알자스 지방에는 와인 출하가 잘되는 데 반해 보르도 지방은 와인 시장이 완전히 포화상태입니다. 당연히 경쟁업체가 많은 보르도 지방 와인업체들의 경영상태가 나빠지는 거죠. 이렇기 때문에 같은 와인업체가 대출하더라도 보르도 지방에서 대출을 신청하는 농민이나 기업이 알자스 지방에 있는 농가보다는 위험한 상태로 봐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같은 업종에 동일한 크기의 대출을 신청하더라도 조건이 다른 것입니다.”
크레디아그리콜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은행과 광역은행마다 고용된 농업전문가가 농민대출을 꼼꼼하게 심사한다는 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과 광역은행에 속한 지역은행에는 평균 총 60여 명의 농업전문 특별분석가가 있다고 한다. 랭스지역 광역은행의 경우 10명의 특별분석가가 있으며 30여 개의 지역은행에도 120여 명의 분석가가 대출심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농업을 전공했다.
랭스지역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에 근무하는 에마뉘엘 푸아시(Emmanuel Foissy) 씨는 농업분야 대출 특별심사팀장을 맡고 있다.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푸아시 씨는 액수가 큰 대출 신청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숨어 있는 부채를 찾아내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푸아시 씨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 이사회나 지역은행 이사회에서 대출심사를 할 때에는 개인이나 기업의 부채나 순이익, 자기자본금 수준 등을 기준으로 대출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희와 같은 농업전문가들의 조언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농업전문가들은 이사회 결정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분석해서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보통 농민대출의 80~90%는 지역은행 차원에서 해결되고, 나머지 액수가 아주 크거나 등급이 좋지 않은 10~20%의 대출 신청 건을 광역은행 이사회에서 심사하게 되는 거죠. 저희는 서류를 꼼꼼하게 하는 것 외에 해당 농민을 분석하고 일반적으로 제출된 서류 외에 대출을 신청한 농민이나 농기업이 걸어왔던 길도 찾아냅니다. 신고에 빠진 숨어 있는 부채를 꼼꼼히 추적해 찾아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농장 3개를 가진 한 와인업체가 대출을 요구한다고 칩시다. 이 업체는 한 농장에 대해서만 대출을 신청하면 그 농장에 대한 각종 부채 상태 등을 신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 분석가들은 이 업체가 보유한 나머지 2개 농장의 대출금과 부채를 찾아내 대출심사에 참고하게 하는 것이죠. 저는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제출된 서류와 함께 최종 분석을 해서 의견을 이사회에 제출합니다.”
인간관계와 評判도 대출의 중요한 기준
크레디아그리콜의 농민 대출심사에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평판과 인간관계가 심사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는 객관적인 지표보다 평판이 더 중요하다는 게 크레디아그리콜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제럴드 밀레 몰 지역 조합장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은 대출을 심사하는 이사들 자체가 농촌 구석구석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 오며 서로 네트워크를 쌓아 온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는지’, ‘돈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 ‘부모 재력이 어떻게 되는지’ 등 각 가정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렇다 보니 대출을 결정하는 이사들이, 실제 제출한 서류보다도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의 됨됨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부모가 돈이 많기 때문에, 부모가 성실했기 때문에 대출이 통과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별로 평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류가 어느 정도 갖춰져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있죠.”
당연히 대출심사에서 객관적인 지표보다 평판이 더 우선시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푸아시 특별분석팀장은 약간 구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크레디아그리콜 나름의 장점도 있다고 했다. “대출 시스템이 약간은 구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대출심사 이사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를 좀 줄여서 객관적인 수치가 더 강조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도 있죠. 내부적으로도 절차를 좀 더 간단하게 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청년 농민이 만약 경험 미숙과 좋은 실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성실하게 일하고 부모에 대한 평판 등이 좋으면 대출을 해 주는 경우도 많죠. 이것은 크레디아그리콜 대출 제도의 장점이죠.”
연체율은 2%대에 불과
크레디아그리콜 농민대출은 연체율이 2%대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농업전문가들도 심사에 참가하는 등 심사가 깐깐하고, 농민들의 신용 의식 때문에 연체율이 낮다는 것이 크레디아그리콜의 분석이다.
몰 지역은행 밀레 조합장의 말이다. “깐깐하게 심사를 합니다. 대출을 신청하는 농민의 부채나 재무상태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평판도 고려합니다. 거기에다 농업전문가까지 가세하기 때문에 입체적인 심사가 이뤄집니다. 신고를 하지 않은 숨어 있는 부채까지 찾아내는 거죠. 그리고 대출 상황이 좋지 않으면 신청하는 농민에게 ‘보증이 확실치 않다. 보증조건을 바꿔라’는 등의 조언까지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합리적으로 대출하는 거죠.”
이와 함께 다른 어떤 은행보다 자신들을 위한 농민은행이기 때문에 빌린 돈을 빨리 갚는다는 점도 연체율을 낮추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캐롤린 핼펀 CASA 부국장의 설명이다. “농민들은 크레디아그리콜을 스스로 만든 은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레디아그리콜로부터 빌린 돈을 잘 갚습니다. 시중 여러 은행에서 같이 돈을 빌렸어도 먼저 크레디아그리콜의 돈부터 갚는 거죠."
은행은 돈을 빌려주고 원금과 이자를 받아 유지된다. 농민이 이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크레디아그리콜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수익이 나야 은행 유지가 가능하다. 여기에 크레디아그리콜의 고민이 있다고 한다. 농민인 이사들은 은행을 정상적으로 경영하면서도 동료이자 형제인 농민들이 섭섭하지 않게 대출을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제럴드 밀레 몰 지역은행 조합장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 이사회 이사들은 은행 경영진으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우리 형제·자매인 농민들의 후원을 해야 하는 역할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은행 문을 닫으면 안 되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 대출을 해 줄 수는 없죠. 그렇기 때문에 더는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이자율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사들의 고민이 많습니다. 이사들이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 대출 신청을 하는데 이자율을 좀 낮춰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은행 경영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프라이버시 침해” 불만도 터져 나와
몰 지역에서 30년 동안 농사를 짓는 라울 드라 파누즈(Raul De la Panouse) 씨. 파누즈 씨는 200ha 면적의 땅에 밀과 옥수수, 유채, 마 등을 재배하고 있다. 매년 20만 유로(약 3억원) 정도 매출을 올리는 그는 해마다 16만5000유로(약 2억5000만원) 정도를 은행으로부터 빌린다. 이 가운데 70% 정도는 크레디아그리콜에서, 나머지는 다른 은행에서 빌린다고 한다. 빌린 돈으로는 트랙터도 사고 비료와 씨를 뿌리는 기계, 수확기 등 농기구를 구입한다. 해마다 밀농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봄에 4만5000유로(약 6700만원) 정도를 빌려 씨와 비료 등을 구입하고 가을에 갚는다. 파누즈 씨는 “지역은행 이사들이 나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크레디아그리콜은 농민은행이면서 다른 시중은행과 비교하면 약간 비싼 편입니다. 그래도 우리 농민들 은행이고 가장 크고 많기 때문에 대출을 받게 됩니다. 제가 빌린 자금의 이자율은 4% 정도인데 다른 기업이나 시장하고 비교하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죠. 그런데 대출심사를 받다 보면 제가 사는 몰 지역 크레디아그리콜 대출심사 방식 때문에 저에 대한 비밀이 다 까발려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파누즈 씨의 설명이다. “제가 대출 신청을 하면 우리 몰 지역은행 이사들이 제가 대출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다 알게 됩니다. 그 단계에서 제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이익이 얼마인지, 얼마나 빚을 졌는지, 지난해 얼마나 수확을 올렸는지를 다 알게 됩니다. 만약 조합장이나 이사들이 괜찮은 사람이면 별로 문제가 안 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농민들이 심사서류로 제출한 사업계획서 등 영업비밀이 될 만한 것을 개인용도로 사용할 우려가 있습니다. 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완전 침해당할 수 있죠. 대출심사가 이사회에 올라오면 다른 이사들이 다 알게 되고 그 이사들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여지가 있는 거죠. 비밀 유지가 안 되는 건데 그렇다 보니 평판이 또 쌓이고 쌓이는 겁니다.”
크레디아그리콜 관계자들도 이 점을 인정한다. 랭스 지역 광역은행의 푸아시 씨는 “대출 신청을 받다 보면 농민이나 기업인들이 비밀이 유지가 안 된다”고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농업자금 독점 폐지 이후에 프랑스 시중에 있는 일반은행들도 이자율을 낮춰 농민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자율을 낮춰 달라는 요구도 끊이지 않는다. 크레디아그리콜 측은 농민들 간의 인간관계와 대화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밀레 조합장의 말이다.
“은행이니까 수익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근에는 다른 은행에서 낮은 대출금리를 내세워 농민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다른 은행의 시도가 알려지면 농민이나 이사들이 은행 경영진에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자율을 낮추자고 건의할 수도 있죠. 이 때문에 인간관계가 정말 중요합니다.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구조라서 결정은 피라미드 맨 위에 있는 경영진이 하지만 농민과 이사, 은행 경영진 사이에는 항상 흥정이 생깁니다. 크레디아그리콜은 대화를 통해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결정을 한 다음 실적 향상을 추구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곪아 터질 때까지 두는 것이 아니고, 작은 곳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즉각 즉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장점입니다. 농민은행인 크레디아그리콜은 농민이 대출금을 못 갚는다고 해서 담보를 처분하거나 하는 그런 극한 상황은 극히 피하고 있습니다. 농민들과의 신뢰가 있는 거죠.”
농업관련 분야 매출액이 전체의 15%인 크레디아그리콜이 농민과의 거래를 통해 얻는 수익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일부 적자를 보는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크레디아그리콜에서 농민은 최고의 고객이다. 핼펀 부국장의 설명이다. “농민에게 대출하고 얻는 이자수익 그 자체로는 순이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농민이 우리와 거래하고 세계 최대 농업국가인 프랑스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납니다. 농민들이 크레디아그리콜을 ‘우리 은행’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저희에게는 이익입니다. 또 농민들이 크레디아그리콜을 대출뿐만 아니라 보험 등 다른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큰 수익이 있는 겁니다. 한국 농협도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농협 “아직은 시기상조”
우리 농업자금 실정은 프랑스와 다소 차이가 있다. 프랑스가 크레디아그리콜과 같은 은행자금으로 농업자금을 거의 충당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정부가 직접 주관하는 정책자금이 농업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 NH농협 측은 프랑스와 우리나라를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프랑스는 정부가 농가소득 보전을 위해 직접 지원금을 지급하고, 정책자금은 필요한 부분에 한정적으로 운용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대출이자를 깎아 주는 방식으로 농가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대출에 관해서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농협 측의 입장이다. 그러나 100년이 넘은 크레디아그리콜의 경영방식과 대출 노하우는 참고할 만한 것이 많다고 인정했다.
NH농협 농업금융부 정남교 팀장의 말이다.
“프랑스의 경우 자생적으로 농업상호금융 조직이 만들어졌고, 1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자본이 축적됐습니다. 농민들이 스스로 번 돈을 은행에 다시 출자하는 구조가 굳어졌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농민들이 아직 영세하고 출자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크레디아그리콜처럼 정부자금 없이 농업자금을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하지만 크레디아그리콜로부터 배울 점은 많습니다. 오랜 역사에 따라 축적된 농가지원의 노하우나 합리적인 경영방식, 농업전문가들이 꼼꼼하게 대출심사를 하는 점 등은 앞으로 우리나라 은행들이 농가에 대출할 때 참고할 만한 사항입니다. 현재 우리 농협도 농업금융 선진화를 위해 농업전문가들을 더 많이 양성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인식과 정반대인 국가가 있다. 바로 세계 최고의 농업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다. 프랑스 농민들은 농민은행에 ‘농(農)’ 자가 들어가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프랑스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농업국가로 국토 대비 농지비율이 30%에 이른다. 유럽 최대의 밀 생산지이자 와인과 샴페인 수출국이다. 농업인구는 경제활동 인구의 2%를 차지하며 농업 총생산은 GDP의 2.5%다.
프랑스 농업이 이처럼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농민들 스스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는 정도로 자금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이 역할의 바탕이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농협이라 할 수 있는 크레디아그리콜(Cr?dit Agricole) 은행이다. 프랑스 농민들에게 ‘우리의 은행’ ‘농민을 위한 은행’으로 인식되고 있는 크레디아그리콜은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돈은 거의 없는 반면, 농민들 스스로 예금한 자금 등으로 운영하는 은행이다. 정부의 농업정책자금이 NH 농협 등 은행으로 내려가 집행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구조다. 세계 5위 안에 드는 초대형 금융그룹인 크레디아그리콜이 어떻게 프랑스 농민들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프랑스 제1은행 자리 굳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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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 |
하지만 본래 목적인 농업지원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세계 5위권의 거대 금융그룹인 크레디아그리콜을 여전히 프랑스 대부분의 농민은 자신들의 농업은행으로 생각한다. 정부로부터 내려오는 농업지원금이 거의 사라지고 농업자금을 프랑스 모든 은행에서 취급하게 됐음에도 크레디아그리콜은 프랑스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농민들에게 크레디아그리콜은 여전히 ‘농민들을 위한 은행’으로 강하게 인식돼 있다.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한 와인생산업체의 수출업무를 담당하는 프랑크 데 파에페(Frank De Paepe) 씨는 “크레디아그리콜의 역사가 워낙 오래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부분 농민이 우리의 은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크레디아그리콜은 19세기 후반에 설립됐다. 당시 프랑스 농민들은 스스로 상호금융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곧 자금동원력의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가 크레디아그리콜을 설립하고 농민단체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지역은행을 설치했다. 그리고 크레디아그리콜 중앙은행이 국가자금을 지역은행에 분배하도록 했다. 또 프랑스 전체 농업자금은 크레디아그리콜이 독점적으로 취급하도록 했다. 1960년대 유럽경제공동체 출범과 함께 농업부문 구조조정이 가속화되면서 크레디아그리콜은 농업관련 업무를 줄이고 일반은행 업무를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1980년대 들어와 시중은행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한 규모 경쟁을 벌이면서 크레디아그리콜에 위기감이 고조됐다. 또 농업지원에 대한 과중한 부담이 생기면서 프랑스 정부는 크레디아그리콜을 민영화하고 공공법인에서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한편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이후 1996년 투자은행인 ‘엥도 수에즈은행’, 2003년 프랑스 6위 소매은행인 ‘크레디 리요네’ 등을 인수하면서 덩치를 키워 나가 프랑스 제1 은행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마을 곳곳에 피라미드 조직으로 퍼져 있어
크레디아그리콜은 지역은행(Caisse Locale)과 광역은행(Caisse Regionale), 중앙은행(CASA)이 단계별로 연결되는 피라미드 구조로 구성돼 있다. 지역은행은 우리의 읍(邑)이나 면(面) 단위에 해당하는 캉통(Canton) 또는 지구(District) 단위로 설립돼 있다. 2009년 현재 2510여 개의 지역은행이 프랑스 마을 곳곳에 퍼져 있다. 설립 초기에는 크레디아그리콜 설립법에 따라 농민단체 회원만이 협동조합은행으로 이 지역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조합원 자격이 개방되면서 현재는 지역은행 금융점포들을 이용하는 거의 모든 고객층에 조합원 자격이 개방된 상태다. 지역은행 이사회는 보통 9~12명으로 구성되며 총회에서 이사를 선출하고 이사회에서 회장을 선출한다. 지역은행은 여·수신 등의 금융사업은 직접 수행하지 않는다. 대신 조합원의 대출과 정책자금 배정, 지역단위 여론수집 기능을 담당한다.
광역은행은 단위별 지역 내에 있는 지역은행들이 모여 구성되며 지역은행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법인격을 갖는 협동조합은행이다. 2510여 개의 지역은행 모두가 광역은행의 회원이며 행정구역상 인접 지역에 있는 지역은행들이 모여서 광역은행을 구성한다. 광역은행은 1899년 영세한 협동조합금융을 광역화하기 위해 설립되기 시작했다. 광역은행은 크레디아그리콜 농촌 소매금융과 정책금융을 전담하고 있다. 지역은행이 처리하지 못하는 농민대출 허가 여부를 관리하고 감독한다. 현재 프랑스 전역에 39개가 있다.
CASA(크레디아그리콜 주식회사)는 우리의 농협중앙회에 해당한다. CASA는 프랑스 은행법상 크레디아그리콜의 중앙은행이면서 주식회사다. 광역은행(CR) 금융업무에 대한 지도·감독을 수행하며 크레디아그리콜의 금융상품 개발 및 마케팅 업무 등을 담당한다.
농민들, 대출은행 좀처럼 바꾸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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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롤린 핼펀 CASA 농업담당 부국장. |
크레디아그리콜이 2009년 한 해 농업자금으로 농민에게 빌려준 돈은 약 64억 유로(9조5000억여원)다. 이 가운데 정부 지원금은 5억 유로로 10%도 채 되지 않는다. 크레디아그리콜에 들어오는 예금이나 수익금으로 모두 충당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정부가 제공하는 정책자금 비중이 전체 자금의 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정부가 제공하는 농업정책자금은 차츰 줄어든 반면 조합원들이 맡기는 예금 등으로 자체 조달하는 농업자금이 꾸준히 늘어났다.
캐롤린 핼펀(Caroline Halfen) CASA 농업담당 부국장은 그 이유를 “프랑스에 있는 다른 은행들이 저리(低利)로 농민들에게 농업자금을 공급한다고 해도 크레디아그리콜이 워낙 오랫동안 농업자금을 취급해 왔고, 신뢰를 주고 있기 때문에 농민들이 대출은행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핼펀 부국장의 설명이다.
“1980년에는 정부가 집행하는 자금이 거의 90%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부담이 갈수록 커지면서 점점 비중을 줄이기 시작했죠. 대신 농민 등으로부터 걷는 예금으로 정부정책자금을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프랑스 일반은행의 시장 이자율이 7~8%였고 정부자금의 이자율은 3~4%여서 차이가 컸죠. 그런데 지금은 일반 시장 이자율이 3~4%로 떨어지면서 정책자금의 매력이 줄었고, 그러다 보니 크레디아그리콜에서 조달하는 자금으로도 농민에게 대출할 수 있습니다. 10%도 되지 않는 정부지원자금은 농업을 처음 시작하려는 젊은 사람들, 영농후계자 같은 사람들에게 대부분 배정하고 있습니다.”
300만 유로 이상은 광역은행 이사회 승인받아야
같은 크레디아그리콜 은행이라고 하더라도 대출 기준은 지역은행·광역은행마다 약간의 차이가 난다. 은행마다 지역마다 재정상태나 농민이나 기업이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자기자본금이 많고, 부채가 적은 농민일수록 대출받을 수 있는 액수가 크다. 농업 사업계획서가 부실하고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농민에게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것은 일반은행 대출과는 별 차이가 없다.
농민이나 농기업이 크레디아그리콜에 대출 신청을 하게 되면 차트가 만들어진다. 차트에는 그 사람의 대출 규모와 신용도가 가로와 세로에 표시된다. 그리고 대출심사를 받는 농민의 위치를 표기하게 된다. 대출금이 적을수록, 대출자의 신용도가 높을수록 심사는 지역은행의 아래 선에서 간단하게 처리된다. 반면에 액수가 크고 신용도가 낮을수록 농업전문가가 보다 꼼꼼하게 대출심사를 하게 되고 광역은행처럼 높은 선에서 대출 허가를 결정하게 된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30㎞ 떨어진 랭스(Reims) 지역은 프랑스 최대 농업지역 가운데 하나다. 농경지 면적이 140만ha인 이곳에는 1만8000명의 농민이 샴페인이나 와인 등을 경작한다. 랭스지방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은 우리의 시·군에 해당하는 프랑스 행정구역인 데파르트망(d?partement) 3개가 속해 있다. 그리고 이 광역은행 아래에는 90개의 지역은행이 있으며 전체 조합원 수는 1400여 명에 이른다.
랭스지방 크레디아그리콜 은행 역시 농업자금 대출이 들어오면 대출이 어느 선에서 결정돼야 하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차트를 작성한다. 차트의 가로에는 등급, 세로에는 대출금액이 기재된다. 부채 비율이 낮고 자기자본 비율이 높은 순서대로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등급을 부여한다. 대출신청 금액이 30만 유로(약 4억5000만원)와 100만 유로(약 15억원), 150만 유로(약 22억4000만원), 300만 유로(약 45억원)가 기준이다.
랭스지방 광역은행 기준에 따르면 신용등급이 1등급인 사람은 100만 유로까지는 지역은행 직원 선에서 대출허가 여부가 결정된다. 100만 유로에서 150만 유로 사이는 지역은행 이사회, 150만 유로에서 300만 유로 사이는 지역은행 은행장들이 모인 회의에서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2~3등급을 받은 대출신청자의 경우 30만 유로까지만 지역은행 직원이 심사하며 30만 유로에서 100만 유로까지는 지역은행 이사회의 승인을, 100만 유로에서 300만 유로 사이의 대출신청은 지역은행장들의 회의에서 결정을 하게 된다. 반대로 4~5등급의 신용등급을 받은 사람의 경우 직원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대출은 없으며 30만 유로까지만 지역은행 이사회에서 승인할 수 있고, 30만 유로부터 300만 유로까지는 모두 지역 조합장들의 모임에서 결정한다.
신용등급 1등급인 농민이 90만 유로의 농업자금 대출 신청을 하면 지역은행의 대출 담당 직원 선에서 대출 여부가 결정되는 데 반해 5등급인 농민이 10만 유로를 신청한다고 해도 지역은행 이사회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신용에 따라 차별을 두고 있다. 300만 유로 이상의 대출을 신청하는 경우에는 등급과는 상관없이 모두 광역은행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정 방식도 지역마다 모두 조금씩 차이가 난다. 랭스 지방에는 모두 30여 개의 지역은행이 있는데 조합장 모임 차원에서 결정되는 대출은 1주일에 조합장 5명이 번갈아 가면서 한 번씩 투표를 해 결정하게 된다. 300만 유로 이상의 대출신청을 결정하게 되는 광역은행 이사회에는 총 24명의 이사가 있으며 이 역시 5명의 이사가 회의를 거치고 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만약 광역은행 이사들 가운데 직접 대출을 의뢰하거나 자기가 출자한 혹은 자신의 이익과 직접 연관된 경우에는 투표에서 배제된다.
지역은행은 농민이 대출을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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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 지역은행 조합장인 제럴드 밀레 씨. |
파리 북동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프랑스 몰(Maule) 지역은 농가 65곳이 있다. 약 7000ha 규모의 농지에다 농민들은 유채나 밀, 옥수수 등을 경작하고 있다. 인구 8000명인 이곳에도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이 있다. 몰 지역은행은 11명의 이사가 있고, 베르사유(Versailles) 지역 광역은행에 속해 있다.
몰 지역의 대출은 지역은행 이사회에서 주로 이뤄진다. 대부분의 조합장과 이사 1명이 상의해 대출 여부를 결정하고, 까다롭고 복잡하며 금액이 많을 경우에는 이사 전체가 다 모여 투표로 결정한다. 특히 이사들은 대부분 농민이거나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몰 지역은행 조합장인 제럴드 밀레(Gerald Millet) 씨도 농민이다. 1976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한 그는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 조합장 역할과 농사일을 함께하고 있다. 기자를 만나기 직전까지 화원을 운영하는 한 농민이 신청한 8000유로 대출을 심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밀레 씨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은 협동조합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이사회가 거의 100% 농민들입니다. 좁은 농촌 지역에도 은행이 있기 때문에 이사들 가운데 대출 신청자들을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모르더라도 건너서 그 사람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죠. 사실상 농민이 농민을 심사하기 때문에 불만이 거의 없습니다.”
몰 지역은행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중 하나는 대출신청자의 인간관계라고 한다.
밀레 씨의 설명이다.
“크레디아그리콜에서는 인간관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지역은행 이사회는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대출을 신청하면 그 대출 신청하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 2~3명씩 꼭 있습니다. 대출 신청자가 돈을 갚을 여력이 되는지가 우선적 요소이긴 하지만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떨 때는 더 중요합니다.”
재무상태와 평판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다 보니 대출 거절은 거의 없다고 한다. 크레디아그리콜 몰 지역은행에는 한 달에 10여 건의 대출 신청이 들어오는데 1976년 이후 들어온 대출 신청 가운데 대출이 완전히 거절된 적은 2번밖에 없다고 한다. “당연히 대출 신청 서류가 미비하거나 좀 평판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언제 다시 오라고 말합니다. 다시 대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스스로 알고 취소하는 경우가 많고, 아니면 대출금액을 줄이게 되죠.”
농민 대출에 지역사정 잘 아는 특별분석가도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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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남서부의 베르주라크에 있는 쿨뢰르 다키텐은 AOC 베르주라크와 AOC 보르도 와인 유통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
크레디아그리콜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은행과 광역은행마다 고용된 농업전문가가 농민대출을 꼼꼼하게 심사한다는 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과 광역은행에 속한 지역은행에는 평균 총 60여 명의 농업전문 특별분석가가 있다고 한다. 랭스지역 광역은행의 경우 10명의 특별분석가가 있으며 30여 개의 지역은행에도 120여 명의 분석가가 대출심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농업을 전공했다.
랭스지역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에 근무하는 에마뉘엘 푸아시(Emmanuel Foissy) 씨는 농업분야 대출 특별심사팀장을 맡고 있다.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푸아시 씨는 액수가 큰 대출 신청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숨어 있는 부채를 찾아내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푸아시 씨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광역은행 이사회나 지역은행 이사회에서 대출심사를 할 때에는 개인이나 기업의 부채나 순이익, 자기자본금 수준 등을 기준으로 대출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희와 같은 농업전문가들의 조언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농업전문가들은 이사회 결정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분석해서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보통 농민대출의 80~90%는 지역은행 차원에서 해결되고, 나머지 액수가 아주 크거나 등급이 좋지 않은 10~20%의 대출 신청 건을 광역은행 이사회에서 심사하게 되는 거죠. 저희는 서류를 꼼꼼하게 하는 것 외에 해당 농민을 분석하고 일반적으로 제출된 서류 외에 대출을 신청한 농민이나 농기업이 걸어왔던 길도 찾아냅니다. 신고에 빠진 숨어 있는 부채를 꼼꼼히 추적해 찾아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농장 3개를 가진 한 와인업체가 대출을 요구한다고 칩시다. 이 업체는 한 농장에 대해서만 대출을 신청하면 그 농장에 대한 각종 부채 상태 등을 신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 분석가들은 이 업체가 보유한 나머지 2개 농장의 대출금과 부채를 찾아내 대출심사에 참고하게 하는 것이죠. 저는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제출된 서류와 함께 최종 분석을 해서 의견을 이사회에 제출합니다.”
인간관계와 評判도 대출의 중요한 기준
크레디아그리콜의 농민 대출심사에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평판과 인간관계가 심사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는 객관적인 지표보다 평판이 더 중요하다는 게 크레디아그리콜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제럴드 밀레 몰 지역 조합장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은 대출을 심사하는 이사들 자체가 농촌 구석구석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 오며 서로 네트워크를 쌓아 온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는지’, ‘돈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 ‘부모 재력이 어떻게 되는지’ 등 각 가정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렇다 보니 대출을 결정하는 이사들이, 실제 제출한 서류보다도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의 됨됨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부모가 돈이 많기 때문에, 부모가 성실했기 때문에 대출이 통과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별로 평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류가 어느 정도 갖춰져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있죠.”
당연히 대출심사에서 객관적인 지표보다 평판이 더 우선시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푸아시 특별분석팀장은 약간 구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크레디아그리콜 나름의 장점도 있다고 했다. “대출 시스템이 약간은 구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대출심사 이사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를 좀 줄여서 객관적인 수치가 더 강조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도 있죠. 내부적으로도 절차를 좀 더 간단하게 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청년 농민이 만약 경험 미숙과 좋은 실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성실하게 일하고 부모에 대한 평판 등이 좋으면 대출을 해 주는 경우도 많죠. 이것은 크레디아그리콜 대출 제도의 장점이죠.”
연체율은 2%대에 불과
크레디아그리콜 농민대출은 연체율이 2%대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농업전문가들도 심사에 참가하는 등 심사가 깐깐하고, 농민들의 신용 의식 때문에 연체율이 낮다는 것이 크레디아그리콜의 분석이다.
몰 지역은행 밀레 조합장의 말이다. “깐깐하게 심사를 합니다. 대출을 신청하는 농민의 부채나 재무상태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평판도 고려합니다. 거기에다 농업전문가까지 가세하기 때문에 입체적인 심사가 이뤄집니다. 신고를 하지 않은 숨어 있는 부채까지 찾아내는 거죠. 그리고 대출 상황이 좋지 않으면 신청하는 농민에게 ‘보증이 확실치 않다. 보증조건을 바꿔라’는 등의 조언까지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합리적으로 대출하는 거죠.”
이와 함께 다른 어떤 은행보다 자신들을 위한 농민은행이기 때문에 빌린 돈을 빨리 갚는다는 점도 연체율을 낮추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캐롤린 핼펀 CASA 부국장의 설명이다. “농민들은 크레디아그리콜을 스스로 만든 은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레디아그리콜로부터 빌린 돈을 잘 갚습니다. 시중 여러 은행에서 같이 돈을 빌렸어도 먼저 크레디아그리콜의 돈부터 갚는 거죠."
은행은 돈을 빌려주고 원금과 이자를 받아 유지된다. 농민이 이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크레디아그리콜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수익이 나야 은행 유지가 가능하다. 여기에 크레디아그리콜의 고민이 있다고 한다. 농민인 이사들은 은행을 정상적으로 경영하면서도 동료이자 형제인 농민들이 섭섭하지 않게 대출을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제럴드 밀레 몰 지역은행 조합장의 말이다. “크레디아그리콜 지역은행 이사회 이사들은 은행 경영진으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우리 형제·자매인 농민들의 후원을 해야 하는 역할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은행 문을 닫으면 안 되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 대출을 해 줄 수는 없죠. 그렇기 때문에 더는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이자율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사들의 고민이 많습니다. 이사들이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 대출 신청을 하는데 이자율을 좀 낮춰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은행 경영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프라이버시 침해” 불만도 터져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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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지을 땅을 들여다보고 있는 라울 드라 파누즈 씨. |
“크레디아그리콜은 농민은행이면서 다른 시중은행과 비교하면 약간 비싼 편입니다. 그래도 우리 농민들 은행이고 가장 크고 많기 때문에 대출을 받게 됩니다. 제가 빌린 자금의 이자율은 4% 정도인데 다른 기업이나 시장하고 비교하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죠. 그런데 대출심사를 받다 보면 제가 사는 몰 지역 크레디아그리콜 대출심사 방식 때문에 저에 대한 비밀이 다 까발려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파누즈 씨의 설명이다. “제가 대출 신청을 하면 우리 몰 지역은행 이사들이 제가 대출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다 알게 됩니다. 그 단계에서 제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이익이 얼마인지, 얼마나 빚을 졌는지, 지난해 얼마나 수확을 올렸는지를 다 알게 됩니다. 만약 조합장이나 이사들이 괜찮은 사람이면 별로 문제가 안 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농민들이 심사서류로 제출한 사업계획서 등 영업비밀이 될 만한 것을 개인용도로 사용할 우려가 있습니다. 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완전 침해당할 수 있죠. 대출심사가 이사회에 올라오면 다른 이사들이 다 알게 되고 그 이사들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여지가 있는 거죠. 비밀 유지가 안 되는 건데 그렇다 보니 평판이 또 쌓이고 쌓이는 겁니다.”
크레디아그리콜 관계자들도 이 점을 인정한다. 랭스 지역 광역은행의 푸아시 씨는 “대출 신청을 받다 보면 농민이나 기업인들이 비밀이 유지가 안 된다”고 항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농업자금 독점 폐지 이후에 프랑스 시중에 있는 일반은행들도 이자율을 낮춰 농민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자율을 낮춰 달라는 요구도 끊이지 않는다. 크레디아그리콜 측은 농민들 간의 인간관계와 대화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밀레 조합장의 말이다.
“은행이니까 수익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근에는 다른 은행에서 낮은 대출금리를 내세워 농민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다른 은행의 시도가 알려지면 농민이나 이사들이 은행 경영진에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자율을 낮추자고 건의할 수도 있죠. 이 때문에 인간관계가 정말 중요합니다.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구조라서 결정은 피라미드 맨 위에 있는 경영진이 하지만 농민과 이사, 은행 경영진 사이에는 항상 흥정이 생깁니다. 크레디아그리콜은 대화를 통해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결정을 한 다음 실적 향상을 추구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곪아 터질 때까지 두는 것이 아니고, 작은 곳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즉각 즉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장점입니다. 농민은행인 크레디아그리콜은 농민이 대출금을 못 갚는다고 해서 담보를 처분하거나 하는 그런 극한 상황은 극히 피하고 있습니다. 농민들과의 신뢰가 있는 거죠.”
농업관련 분야 매출액이 전체의 15%인 크레디아그리콜이 농민과의 거래를 통해 얻는 수익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일부 적자를 보는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크레디아그리콜에서 농민은 최고의 고객이다. 핼펀 부국장의 설명이다. “농민에게 대출하고 얻는 이자수익 그 자체로는 순이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농민이 우리와 거래하고 세계 최대 농업국가인 프랑스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납니다. 농민들이 크레디아그리콜을 ‘우리 은행’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저희에게는 이익입니다. 또 농민들이 크레디아그리콜을 대출뿐만 아니라 보험 등 다른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큰 수익이 있는 겁니다. 한국 농협도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농협 “아직은 시기상조”
우리 농업자금 실정은 프랑스와 다소 차이가 있다. 프랑스가 크레디아그리콜과 같은 은행자금으로 농업자금을 거의 충당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정부가 직접 주관하는 정책자금이 농업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 NH농협 측은 프랑스와 우리나라를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프랑스는 정부가 농가소득 보전을 위해 직접 지원금을 지급하고, 정책자금은 필요한 부분에 한정적으로 운용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대출이자를 깎아 주는 방식으로 농가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대출에 관해서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농협 측의 입장이다. 그러나 100년이 넘은 크레디아그리콜의 경영방식과 대출 노하우는 참고할 만한 것이 많다고 인정했다.
NH농협 농업금융부 정남교 팀장의 말이다.
“프랑스의 경우 자생적으로 농업상호금융 조직이 만들어졌고, 1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자본이 축적됐습니다. 농민들이 스스로 번 돈을 은행에 다시 출자하는 구조가 굳어졌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농민들이 아직 영세하고 출자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크레디아그리콜처럼 정부자금 없이 농업자금을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하지만 크레디아그리콜로부터 배울 점은 많습니다. 오랜 역사에 따라 축적된 농가지원의 노하우나 합리적인 경영방식, 농업전문가들이 꼼꼼하게 대출심사를 하는 점 등은 앞으로 우리나라 은행들이 농가에 대출할 때 참고할 만한 사항입니다. 현재 우리 농협도 농업금융 선진화를 위해 농업전문가들을 더 많이 양성해 나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