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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보수 재건은 ‘대한민국 서사’의 재발견부터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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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학교 시절 《도덕》 교과서에는 6·25 때 바주카포로 북괴군 전차를 여러 대 격파한 후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스무 살 미군 병사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워싱턴DC의 한국전쟁참전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처럼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미군 병사의 전형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병사의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났어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5년 전 에드워드 L. 로우니 장군의 회고록 《운명의 1도》를 읽다가, 그 미군 병사를 다시 만났습니다. 책 뒤에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군 명예훈장(the Medal of Honor) 수훈자’ 명단이 부록으로 실려 있었는데, 거기서 발견한 것입니다. 간략한 그의 공적조서 내용을 보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어린 시절 교과서 속 이야기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교과서에 이런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월남 파병을 앞두고 부하 병사가 수류탄 투척 훈련을 하다가 수류탄을 놓치자 자신의 몸을 던진 강재구 소령, 월남전에서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에 몸을 던져 동료 해병들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散華)한 이인호 중령,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고 무장공비에게 학살당한 이승복…. 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전투기가 추락하게 되자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다가 애기(愛機)와 함께 산화한 공군 조종사의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네요.
 
  시골 마을에 전기가 들어와서 마을 사람 모두가 기뻐했다는 이야기, 외국에 나가서 셔츠를 사 왔는데 귀국 후에 가족들 앞에서 꺼내놓고 보니 국산이어서 온 가족이 박장대소했다는 이야기도 기억납니다.
 
  모두가 피 흘려 대한민국을 지켜낸 분들에 대한 감사, 발전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르치는 얘기들이었습니다.
 
 
  ‘역사 흔들기’
 
  1980년대 초 이후 이런 교육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전교조를 만들게 되는 한 무리의 ‘진보적’ 교사들이 당시의 교육에 대해 ‘일제 잔재’ ‘군국주의’ ‘국가주의’ ‘냉전교육’이라며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죠. 1987년 민주화와 1993년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이런 흐름은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아니라 ‘역사 흔들기’가 사회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그 이전에 대학가 골방에서 몰래 보던 좌파 운동권 서적의 역사 인식이 행정고시나 사법시험 문제로 버젓이 등장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고시를 비롯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는 이들은 한국사나 문화사(세계사) 공부를 하면서 일제하 노동운동·농민운동, 해방 후의 좌익 폭동, 러시아혁명사, 중국공산당사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언론개혁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이승복 사건 보도는 오보(誤報)”라고 떠들어댔습니다. 저도 이승복 관련 취재를 한 적이 있지만, 당시 이승복 사건을 목격한 이웃 사람들, 공비 토벌에 참가했던 군 장교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그런 소리를 한 겁니다. 대법원이 “이승복 사건 보도는 진실”이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도 많은 국민은 ‘이승복 사건은 가짜였다더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희생한 미군들의 이야기는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노근리 학살 사건’이나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들어갔습니다. 6·25 때 피 흘려 나라를 지켰던 국군 장병들의 이야기, 전우나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국군들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국군은 독재 정치를 하고 민주화 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했던 ‘악당’처럼 각인되게 되었습니다.
 
  TV에서는 〈113수사본부〉나 〈수사반장〉처럼 대한민국의 안보와 법질서를 지키기 위해 활약하는 이들을 그린 드라마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모래시계〉처럼 공권력은 부패하고 야비한 세력으로, 그에 맞서는(?) 조폭이 오히려 멋있게 그려지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지난 한 세대 동안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난 이들이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그것도 철없는 신입의 위치가 아니라 기업, 행정부, 언론사, 법원, 검찰, 경찰, 군대의 상층부급으로 말입니다.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단체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미 우리 사회는 좌파에게 매우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그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벌였으니, 4·10 총선에서 보수 세력이 참패한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총선에서 패배한 것은 보수 세력이 아니라 윤석열-한동훈 같은 가짜 보수”라고 해봐야 ‘아Q식 정신승리’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월간조선》은 20년 전부터 좌편향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해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민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역사교과서의 국정화(國定化)’ 논의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좌편향 역사 인식이 정설(定說) 내지 정설(正說)로 행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권력에 의한 역사왜곡’으로 몰려버렸습니다.
 
 
  ‘거대 서사의 붕괴’와 포스트 모더니즘
 
  영국 언론인 데이비드 머리의 《군중의 광기》 서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의 기원조차도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반세기 넘는 기간 동안 우리의 모든 거대 서사(敍事)가 붕괴한 가운데 살아왔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가 의지했던 서사들은 하나하나 반박되거나 인기가 없어져서 옹호할 필요가 없거나 지탱할 수가 없었다. 19세기부터 종교가 제공해준 우리 존재에 대한 설명이 먼저 무너져서 줄곧 사라지고 있다. 다음으로 지난 세기 내내 온갖 정치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세속적 희망이 종교의 뒤를 따라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에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었다. 모든 거대 서사에 대한 의심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그렇게 정의되는 시대다.〉
 
  데이비드 머리가 ‘거대 서사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미국과 유럽에서 횡행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정체성(正體性) 정치의 광기(狂氣)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의 말은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대한민국의 보수애국 세력이 오늘날 이렇게 궁박한 처지에 몰리게 된 것도 ‘대한민국 서사’의 붕괴 혹은 해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성세대들은 먹고살기에 바빠서, 혹은 참혹했던 전쟁, 궁핍했던 시절에 대해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들의 서사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후세에 전수하는 일을 게을리했습니다. 좌파는 ‘대한민국 서사’가 붕괴 혹은 해체된 자리를 파고들어 ‘민주화투쟁’ ‘노동해방투쟁’의 서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서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주류 서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대한민국 서사’의 재건
 
  지금 대한민국호라는 배는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용케 가라앉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언제 침몰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입니다. 윤석열 정권은 대한민국호가 다시 대양(大洋)을 항해할 수 있도록 배를 수선해야 했습니다. 그게 윤석열 정권에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년을 허송하고, 4·10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이제 대한민국호의 본격적인 수선은 기약할 수 없는 훗날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대한민국호의 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눈에 띄는 구멍, 작은 구멍부터라도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서사’를 재발견하고 복원하는 일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는 대한민국 보수 재건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책을 만들다 보니, 이번 6월호에는 ‘내 아버지의 6·25 전쟁’을 비롯해서 역사 이야기들이 조금 많아졌습니다만, 이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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