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HK, 1회당 1억 엔 들여 만든 <언덕 위의 구름> 방영
⊙ 사카모토 료마의 창조적 가치관, 이와사키 야타로(미쓰비시 창업자)의 ‘애니멀 스피리츠’ 再조명
李佑光
⊙ 1952년 경북 고령 출생.
⊙ 1978년 중앙대 통계학과 졸업. 日도쿄대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 삼성경제연구소 일본연구팀장, 해외연구실장 역임.
⊙ 저서: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 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등.
⊙ 사카모토 료마의 창조적 가치관, 이와사키 야타로(미쓰비시 창업자)의 ‘애니멀 스피리츠’ 再조명
李佑光
⊙ 1952년 경북 고령 출생.
⊙ 1978년 중앙대 통계학과 졸업. 日도쿄대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 삼성경제연구소 일본연구팀장, 해외연구실장 역임.
⊙ 저서: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 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등.
- 경제위기를 맞아 다시 부각되는 사카모토 료마.
필자는 도쿄(東京)에 가면 도쿄역 앞 ‘야에스북센터’에 반드시 들른다. 출장지와 가깝고 책 종류가 많으며 또 책 찾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4월 초에 들렀더니 예상했던 대로 과거의 리더들에 대한 책들이 많았다.
불황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파나소닉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나 변혁기마다 곧잘 등장하는 전국(戰國)시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에 관한 책들은 당연히 많았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특징이 있는 것 같았다. 도쿠가와(德川)막부(幕府) 말기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에 활약한 지사(志士)형 리더들에 관한 책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에 관한 책들이 유난히 많았다. 특별 코너를 만들어 사카모토 료마 관련 책들을 전시하는 것이 마치 한국 서점에서 법정(法頂) 스님 관련 책을 전시하는 특별 코너를 연상케 하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土佐藩·지금의 高知縣)의 하급무사 출신이었으나 일찍부터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막부를 타도하고 유신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서 무기상을 경영한 실업가이다. 무역회사와 정치조직을 겸한 가이엔타이(海援隊)를 결성하였으며 막부타도를 위해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이 동맹을 맺는 사초도메이(薩長同盟)와 에도막부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봉환한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이 성사되도록 활약한 지사이다. 그는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욱 유명해졌으며 지금은 일본 최고의 리더로 칭송받고 있다. 최근 일본의 유명 뇌(腦)과학자가 “이렇게 하면 료마처럼 사고할 수 있다”라고 쓴 책 <馬腦のススメ>가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이다.
NHK, 작년 11월부터 <언덕 위의 구름> 방영
그렇다면 왜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막말(幕末), 메이지유신 때의 지사들이 지금 일본에서 뜨는 것일까? 그 해답은 2009년 11월부터 방영하기 시작한 NHK의 스페셜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의 제작 의도에서 읽을 수 있다.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의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은 서구(西歐) 근대국가를 손에 잡힐 듯한 구름에 비유하면서 메이지유신 초기 일본 젊은이들이 근대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청춘군상(靑春群像)에 대해 10년에 걸쳐 쓴 역사소설로 1800만 부나 팔린 대작이다.
NHK는 2009년 11월부터 3년간에 걸쳐 13회 방영할 예정으로 러시아·프랑스 등 8개국 로케에다 1회당 1억 엔 정도를 투입한다고 하며 작년 2회째 방영 시에는 19.6%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당연히 이 드라마가 화제이고 또 논쟁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은 솔직히 청일(淸日)전쟁, 노일(露日)전쟁을 일본방위 전쟁으로 미화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메이지유신 초기의 시대 정신에 매료되어 이 소설을 썼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문제는 하필 경술국치(庚戌國恥) 100주년인 올해에 방영하느냐라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1989년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이 소설을 쓸 당시에는 솔직히 한국의 실상에 대해 잘 몰랐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시바는 “당시의 이조(李朝)는 주자학(朱子學) 일색인 줄만 알았지, 실학(實學)이나 개화사상 같은 훌륭한 사상이 있었는지는 정말 몰랐다”고 했다.
시바 료타로는 생전(生前)에 자신의 작품을 드라마나 영화화하자는 수많은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이 군국주의(軍國主義)를 고무하는 재료로 쓰이거나, 자신의 소설이 왜곡되는 것, 또 자신의 인식이 미흡했던 점 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NHK,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데 힌트 줄 것”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NHK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화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 “언덕 위의 구름에는 지금의 일본과 같이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하기 위해 고뇌하고 분투했던 메이지시대의 정신이 살아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앞으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데에 큰 힌트를 줄 것이다”라고 했다. NHK는 지금의 일본적 시대상황에서는 이 드라마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시바료타로 기념재단’이 영상화를 허가했다고 한다.
그렇다! 지금 일본인들이 갈구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라고 생각된다. 그것도 메이지유신기와 버금가는 메가톤급(級)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지금 일본이 바꾸려 하는 것은 1980년대까지 일본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가치관과 시스템이기에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 같다. 패전(敗戰)의 잿더미 속에서 경제대국을 건설해 낸 자신들이 너무나도 대견했던 것이다. 1980년대 말 버블경제 때 “일본을 팔면 미국을 2개 사고도 남는다”, “일본적 시스템을 세계에 수출하여 인류복지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라는 말들이 난무했다.
그랬던 가치관과 시스템을 바꾸기가 어디 쉽겠는가. 버블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보내고도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논쟁만 무성하다. 이런 때야말로 메이지유신기의 도전적 시대정신이 필요하다고 많은 사람이 느끼는 모양이다. 200년 이상 지속된 평화로웠던 에도(江戶)시대가 서구열강 앞에서 가차 없이 무너질 것 같은 절박함을 읽어내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맹진(猛進)하는 지사들의 시대정신이야말로 지금의 일본에 가장 필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갈라파고스化 현상
그렇다면 일본국민들은 스스로를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마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키워드가 ‘내향적(內向き)’이라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일본국민들이 성공 신화에 젖어 내부 지향적인 성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최근 화두(話頭)가 되고 있는 ‘갈라파고스화(化) 현상’이라는 말이 이를 잘 나타내어 준다. ‘갈라파고스화’란 ‘갈라파고스 제도(諸島)에서 독자적으로 진화(進化)하는 생물처럼 기술이나 제품이 세계표준과는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진화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지금 일본인들은 단지 일본 제품이나 서비스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사고방식이나 국가를 지탱하는 시스템조차도 내향적으로 갈라파고스화되어 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해외의 장점을 배우고 이를 자신들 발전의 동기로 삼는 발전패턴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개국(開國)’이 필요하단다.
이러한 현상을 일본경제신문은 2010년 4월 7일자 신문에서 한국가수 보아의 예(例)를 들어 비교한다. 좁은 한국시장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양(仕樣)’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보아에게 처음부터 영어·일어·중국어 훈련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가수들은 일본이라는 큰 시장이 있기 때문에 ‘일본사양’에 만족하여 외국어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것이다.
다시 주목받는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야에스북센터에서 사카모토 료마 관련 책과 함께 눈에 띄는 책이 미쓰비시(三菱)에 관한 책이었다. 특히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1835~1885)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사카모토 료마와 동(同)시대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1840~1931)와도 동시대 사람이다. 시부사와는 막말의 막부의 신하이면서 메이지 시대에는 재무관료를 지냈고 제일국립은행, 왕자제지, 일본우선, 도쿄증권거래소 등을 설립한 대실업가이다.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에 걸맞은 업적이다. 그는 <논어와 산반(算盤)>이라는 저서에서 ‘도덕경제합일설’을 내세워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반면 이와사키 야타로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과는 좀 거리가 먼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사카모토와 같은 도사번 출신인 이와사키는 나가사키(長崎)에서 번의 무역에 종사하다가 사카모토 료마가 세운 가이엔타이의 경리를 담당하기도 한다. 이후에 미쓰비시상회를 설립하고 정상(政商)으로서 해운업에 종사하여 큰 부(富)를 거머쥔다.
주로 정부 일을 맡아 온 미쓰비시는 이때부터 “국가가 있고 미쓰비시가 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써 왔다. 이러한 미쓰비시의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미쓰비시 그룹 산하의 기업들이 대부분 그 업계에서 정상(頂上)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은행 등의 계열기업들은 불황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아마 지금도 미쓰비시 그룹 회사의 사원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의 사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미쓰비시 그룹은 미쓰이(三井)나 스미토모(住友) 그룹보다 역사가 일천(日淺)하고 정상이라는 이미지도 강해 ‘자본의 윤리’라는 측면에서는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미쓰비시로부터 ‘주식회사 일본’의 원점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왜 나타나는 것일까?
일본의 위기는 ‘기업의 위기’
논픽션 작가인 나카노 아키라(中野明)씨는 최근 저서 <이와사키야타로 미쓰비시의 기업론 - 일본주식회사의 원점:岩崎彌太郞 「三菱」の企業論會ニッポン株式一社の原点>에서 “자본주의는 항상 이와사키 야타로와 같이 강력한 ‘애니멀 스피리츠’(혈기)를 가진 자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시부사와 에이치와 같은 ‘자본의 윤리’로 자본주의의 균형을 잡는 것은 필요하지만 말이다. 이와사키는 이런 ‘애니멀 스피리츠’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시부사와와는 달리 영속하는 기업을 창조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이와사키가 가졌던 기업가 정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나친 ‘관리경제(管理經濟·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받는 경제)’로 인해 기업가 정신이 억압을 받아 질식하고 있다는 것이 이와사키가 재조명받는 이유라는 것이다.
사실 일본은 150만 개가 넘는 기업이 있는 기업 사회이다. 이것이 ‘일본주식회사’라고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기업들이 활기를 잃으니 일본 사회 전체가 위기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금 일본의 위기는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경제의 위기’, 나아가서는 ‘기업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일본경제는 석유위기 이전의 고도성장기(1956~1973년)에는 평균 9.1% 성장하였다. 석유위기와 엔고(高)를 경험한 고원(高原)성장기(1974~1990년)에도 4.2%나 성장한 경제였다. 그러나 ‘잃어버린 20년’(1991~2008)에는 1.0% 성장에 그쳤다. ‘일본 제조업의 부활’이니 ‘전후(戰後) 최장(最長)의 호경기’라고 떠들어도 고작 1.0% 성장에 그친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도 결코 밝지 않다. 선진국 경제 중에서 유일하게 디플레이션이 지속되는 경제이다. 올해는 총 GDP에서 중국에 2위 자리를 물려줄 것이니 상대적 위상도 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1인당 GDP가 1993년에 세계 3위였으나 2008년에는 23위, IMD(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국제경쟁력 순위도 1990년에 1위였으나 2008년에는 22위로 추락했다. 그 결과 전(全)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도 1990년에 14.3%에서 2008년에는 8.9%가 됐다.
“일본 제조업은 소련기업처럼 생산성 낮다”
이렇게 된 것은 당연히 일본 기업들의 실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포천>지(誌)가 ‘세계 500대 기업’ 발표를 시작한 1995년, 일본은 미국보다 2개 적은 149개사(社)의 이름을 올려 2위를 차지했다. 작년의 경우 일본은 여전히 2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68개사로 줄었다. 참고로 한국은 1995년에는 1개사도 없었으나 2009년에는 14개사가 있다.
와세다(早稻田)대학의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교수는 “지금 일본의 제조업체들은 마치 소련 붕괴 전후(前後)의 소련기업들처럼 생산성이 낮으며, 기업의 이익률은 장기국채(長期國債) 수익률과 비슷한 1%대”라면서 “굳이 리스크를 지며 기업 활동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꼬집는다.
기업의 실적이 나쁘다 보니 1997년부터 샐러리맨들의 소득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내수(內需)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수출로 경제를 이끌고 가야하는데 일본기업들의 장기인 선진국 시장은 비중이 자꾸 줄고 신흥국 시장에서는 일본제품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기업의 고민이다. 고령화(高齡化) 사회로 인해 재정 씀씀이는 커지는데 세수(稅收)가 줄어드니 더욱 큰일이다. 소비세를 획기적으로 올리지 않으면 재정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는 것 같다. 일본의 국가신인도(信認度)까지 문제가 되고, 일본의 국채가 리스크 투자의 대상이 될 줄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지금 일본에서 이와사키 야타로가 각광받는 이유인 듯싶다.
일본의 길
앞으로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기존의 가치관과 시스템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 나가는 길이다.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창조적 가치관과 이와사키 야타로와 같은 ‘애니멀 스피리츠’를 추진력으로 삼아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로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일본처럼 위기의식과 헝그리(hungry) 정신을 대체할 수 있는 추진력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섬에서 탈출한 생물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 예상되듯이 말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기업들은 선진국 시장에서 고(高)부가가치 제품을 파는 데 주력하던 전략을 수정, 신흥국 시장의 중산층을 겨냥해 대량물량 공세를 펴는 ‘볼륨 존’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우리 기업들로서는 우려되는 대목이다. 앞으로 신흥국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력이 앞서는 일본기업들이 한국기업들처럼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 정도의 발전에 만족하고 ‘성숙(成熟)국가’로서 살아가는 길이다. 영국과 같은 길을 말이다. 그러나 이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우리는 수백 년, 아니 1000년 이상 일본을 곁에서 보아 오지 않았는가?
아마도 일본은 어렵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새로운 가치관과 시스템을 창조하는 길로 들어설 것이다. 최근 일본 미디어들이 한국에 대한 특집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 변화의 새로운 모멘텀을 한국으로부터 찾으려는 것은 아닌지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다.⊙
불황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파나소닉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나 변혁기마다 곧잘 등장하는 전국(戰國)시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에 관한 책들은 당연히 많았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특징이 있는 것 같았다. 도쿠가와(德川)막부(幕府) 말기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에 활약한 지사(志士)형 리더들에 관한 책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에 관한 책들이 유난히 많았다. 특별 코너를 만들어 사카모토 료마 관련 책들을 전시하는 것이 마치 한국 서점에서 법정(法頂) 스님 관련 책을 전시하는 특별 코너를 연상케 하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土佐藩·지금의 高知縣)의 하급무사 출신이었으나 일찍부터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막부를 타도하고 유신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서 무기상을 경영한 실업가이다. 무역회사와 정치조직을 겸한 가이엔타이(海援隊)를 결성하였으며 막부타도를 위해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이 동맹을 맺는 사초도메이(薩長同盟)와 에도막부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봉환한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이 성사되도록 활약한 지사이다. 그는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욱 유명해졌으며 지금은 일본 최고의 리더로 칭송받고 있다. 최근 일본의 유명 뇌(腦)과학자가 “이렇게 하면 료마처럼 사고할 수 있다”라고 쓴 책 <馬腦のススメ>가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이다.
NHK, 작년 11월부터 <언덕 위의 구름>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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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2월 <문예춘추>는 시바 료타로와 그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과 ‘료마는 간다’를 집중 조명했다. |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의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은 서구(西歐) 근대국가를 손에 잡힐 듯한 구름에 비유하면서 메이지유신 초기 일본 젊은이들이 근대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청춘군상(靑春群像)에 대해 10년에 걸쳐 쓴 역사소설로 1800만 부나 팔린 대작이다.
NHK는 2009년 11월부터 3년간에 걸쳐 13회 방영할 예정으로 러시아·프랑스 등 8개국 로케에다 1회당 1억 엔 정도를 투입한다고 하며 작년 2회째 방영 시에는 19.6%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당연히 이 드라마가 화제이고 또 논쟁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은 솔직히 청일(淸日)전쟁, 노일(露日)전쟁을 일본방위 전쟁으로 미화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메이지유신 초기의 시대 정신에 매료되어 이 소설을 썼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문제는 하필 경술국치(庚戌國恥) 100주년인 올해에 방영하느냐라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1989년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이 소설을 쓸 당시에는 솔직히 한국의 실상에 대해 잘 몰랐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시바는 “당시의 이조(李朝)는 주자학(朱子學) 일색인 줄만 알았지, 실학(實學)이나 개화사상 같은 훌륭한 사상이 있었는지는 정말 몰랐다”고 했다.
시바 료타로는 생전(生前)에 자신의 작품을 드라마나 영화화하자는 수많은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이 군국주의(軍國主義)를 고무하는 재료로 쓰이거나, 자신의 소설이 왜곡되는 것, 또 자신의 인식이 미흡했던 점 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NHK,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 데 힌트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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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HK의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
그렇다! 지금 일본인들이 갈구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라고 생각된다. 그것도 메이지유신기와 버금가는 메가톤급(級)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지금 일본이 바꾸려 하는 것은 1980년대까지 일본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가치관과 시스템이기에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 같다. 패전(敗戰)의 잿더미 속에서 경제대국을 건설해 낸 자신들이 너무나도 대견했던 것이다. 1980년대 말 버블경제 때 “일본을 팔면 미국을 2개 사고도 남는다”, “일본적 시스템을 세계에 수출하여 인류복지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라는 말들이 난무했다.
그랬던 가치관과 시스템을 바꾸기가 어디 쉽겠는가. 버블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보내고도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논쟁만 무성하다. 이런 때야말로 메이지유신기의 도전적 시대정신이 필요하다고 많은 사람이 느끼는 모양이다. 200년 이상 지속된 평화로웠던 에도(江戶)시대가 서구열강 앞에서 가차 없이 무너질 것 같은 절박함을 읽어내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맹진(猛進)하는 지사들의 시대정신이야말로 지금의 일본에 가장 필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갈라파고스化 현상
그렇다면 일본국민들은 스스로를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마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키워드가 ‘내향적(內向き)’이라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일본국민들이 성공 신화에 젖어 내부 지향적인 성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최근 화두(話頭)가 되고 있는 ‘갈라파고스화(化) 현상’이라는 말이 이를 잘 나타내어 준다. ‘갈라파고스화’란 ‘갈라파고스 제도(諸島)에서 독자적으로 진화(進化)하는 생물처럼 기술이나 제품이 세계표준과는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진화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지금 일본인들은 단지 일본 제품이나 서비스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사고방식이나 국가를 지탱하는 시스템조차도 내향적으로 갈라파고스화되어 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해외의 장점을 배우고 이를 자신들 발전의 동기로 삼는 발전패턴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개국(開國)’이 필요하단다.
이러한 현상을 일본경제신문은 2010년 4월 7일자 신문에서 한국가수 보아의 예(例)를 들어 비교한다. 좁은 한국시장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양(仕樣)’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보아에게 처음부터 영어·일어·중국어 훈련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가수들은 일본이라는 큰 시장이 있기 때문에 ‘일본사양’에 만족하여 외국어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것이다.
다시 주목받는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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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쓰비시그룹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
이와사키 야타로는 사카모토 료마와 동(同)시대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1840~1931)와도 동시대 사람이다. 시부사와는 막말의 막부의 신하이면서 메이지 시대에는 재무관료를 지냈고 제일국립은행, 왕자제지, 일본우선, 도쿄증권거래소 등을 설립한 대실업가이다.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에 걸맞은 업적이다. 그는 <논어와 산반(算盤)>이라는 저서에서 ‘도덕경제합일설’을 내세워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반면 이와사키 야타로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과는 좀 거리가 먼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사카모토와 같은 도사번 출신인 이와사키는 나가사키(長崎)에서 번의 무역에 종사하다가 사카모토 료마가 세운 가이엔타이의 경리를 담당하기도 한다. 이후에 미쓰비시상회를 설립하고 정상(政商)으로서 해운업에 종사하여 큰 부(富)를 거머쥔다.
주로 정부 일을 맡아 온 미쓰비시는 이때부터 “국가가 있고 미쓰비시가 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써 왔다. 이러한 미쓰비시의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미쓰비시 그룹 산하의 기업들이 대부분 그 업계에서 정상(頂上)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은행 등의 계열기업들은 불황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아마 지금도 미쓰비시 그룹 회사의 사원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의 사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미쓰비시 그룹은 미쓰이(三井)나 스미토모(住友) 그룹보다 역사가 일천(日淺)하고 정상이라는 이미지도 강해 ‘자본의 윤리’라는 측면에서는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미쓰비시로부터 ‘주식회사 일본’의 원점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왜 나타나는 것일까?
일본의 위기는 ‘기업의 위기’
논픽션 작가인 나카노 아키라(中野明)씨는 최근 저서 <이와사키야타로 미쓰비시의 기업론 - 일본주식회사의 원점:岩崎彌太郞 「三菱」の企業論會ニッポン株式一社の原点>에서 “자본주의는 항상 이와사키 야타로와 같이 강력한 ‘애니멀 스피리츠’(혈기)를 가진 자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시부사와 에이치와 같은 ‘자본의 윤리’로 자본주의의 균형을 잡는 것은 필요하지만 말이다. 이와사키는 이런 ‘애니멀 스피리츠’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시부사와와는 달리 영속하는 기업을 창조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이와사키가 가졌던 기업가 정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나친 ‘관리경제(管理經濟·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받는 경제)’로 인해 기업가 정신이 억압을 받아 질식하고 있다는 것이 이와사키가 재조명받는 이유라는 것이다.
사실 일본은 150만 개가 넘는 기업이 있는 기업 사회이다. 이것이 ‘일본주식회사’라고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기업들이 활기를 잃으니 일본 사회 전체가 위기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금 일본의 위기는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경제의 위기’, 나아가서는 ‘기업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일본경제는 석유위기 이전의 고도성장기(1956~1973년)에는 평균 9.1% 성장하였다. 석유위기와 엔고(高)를 경험한 고원(高原)성장기(1974~1990년)에도 4.2%나 성장한 경제였다. 그러나 ‘잃어버린 20년’(1991~2008)에는 1.0% 성장에 그쳤다. ‘일본 제조업의 부활’이니 ‘전후(戰後) 최장(最長)의 호경기’라고 떠들어도 고작 1.0% 성장에 그친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도 결코 밝지 않다. 선진국 경제 중에서 유일하게 디플레이션이 지속되는 경제이다. 올해는 총 GDP에서 중국에 2위 자리를 물려줄 것이니 상대적 위상도 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1인당 GDP가 1993년에 세계 3위였으나 2008년에는 23위, IMD(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국제경쟁력 순위도 1990년에 1위였으나 2008년에는 22위로 추락했다. 그 결과 전(全)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도 1990년에 14.3%에서 2008년에는 8.9%가 됐다.
“일본 제조업은 소련기업처럼 생산성 낮다”
이렇게 된 것은 당연히 일본 기업들의 실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포천>지(誌)가 ‘세계 500대 기업’ 발표를 시작한 1995년, 일본은 미국보다 2개 적은 149개사(社)의 이름을 올려 2위를 차지했다. 작년의 경우 일본은 여전히 2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68개사로 줄었다. 참고로 한국은 1995년에는 1개사도 없었으나 2009년에는 14개사가 있다.
와세다(早稻田)대학의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교수는 “지금 일본의 제조업체들은 마치 소련 붕괴 전후(前後)의 소련기업들처럼 생산성이 낮으며, 기업의 이익률은 장기국채(長期國債) 수익률과 비슷한 1%대”라면서 “굳이 리스크를 지며 기업 활동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꼬집는다.
기업의 실적이 나쁘다 보니 1997년부터 샐러리맨들의 소득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내수(內需)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수출로 경제를 이끌고 가야하는데 일본기업들의 장기인 선진국 시장은 비중이 자꾸 줄고 신흥국 시장에서는 일본제품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기업의 고민이다. 고령화(高齡化) 사회로 인해 재정 씀씀이는 커지는데 세수(稅收)가 줄어드니 더욱 큰일이다. 소비세를 획기적으로 올리지 않으면 재정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는 것 같다. 일본의 국가신인도(信認度)까지 문제가 되고, 일본의 국채가 리스크 투자의 대상이 될 줄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지금 일본에서 이와사키 야타로가 각광받는 이유인 듯싶다.
일본의 길
앞으로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기존의 가치관과 시스템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 나가는 길이다.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창조적 가치관과 이와사키 야타로와 같은 ‘애니멀 스피리츠’를 추진력으로 삼아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로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일본처럼 위기의식과 헝그리(hungry) 정신을 대체할 수 있는 추진력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섬에서 탈출한 생물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 예상되듯이 말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기업들은 선진국 시장에서 고(高)부가가치 제품을 파는 데 주력하던 전략을 수정, 신흥국 시장의 중산층을 겨냥해 대량물량 공세를 펴는 ‘볼륨 존’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우리 기업들로서는 우려되는 대목이다. 앞으로 신흥국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력이 앞서는 일본기업들이 한국기업들처럼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 정도의 발전에 만족하고 ‘성숙(成熟)국가’로서 살아가는 길이다. 영국과 같은 길을 말이다. 그러나 이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우리는 수백 년, 아니 1000년 이상 일본을 곁에서 보아 오지 않았는가?
아마도 일본은 어렵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새로운 가치관과 시스템을 창조하는 길로 들어설 것이다. 최근 일본 미디어들이 한국에 대한 특집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 변화의 새로운 모멘텀을 한국으로부터 찾으려는 것은 아닌지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