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 살겠다는 姜三載에 한없는 연민 느껴… 혼자 다 떠안고 끝내려 했다”
金己燮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삼성전자 관리부 부장, 호텔신라 상무이사, 삼성전관 기획담당 전무이사,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의전·민정특보역,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 실장, 안기부 운영차장 역임.
⊙ ‘안기부 자금 불법전용’ 의혹사건 대법원 무죄 확정(2005.10.28).
취재지원 : 金東衍月刊朝鮮 인턴기자〈yahong0566@hotmail.com〉
金己燮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삼성전자 관리부 부장, 호텔신라 상무이사, 삼성전관 기획담당 전무이사,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의전·민정특보역,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 실장, 안기부 운영차장 역임.
⊙ ‘안기부 자금 불법전용’ 의혹사건 대법원 무죄 확정(2005.10.28).
취재지원 : 金東衍月刊朝鮮 인턴기자〈yahong0566@hotmail.com〉
“지금까지 안 죽고 살아 있는 게 기적이죠.”
金己燮(김기섭ㆍ69) 씨는 이 한마디로 지나온 세월을 요약했다. 1997년 3월 4일 안기부 운영차장 자리를 물러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락이었다. 세 차례 獄苦(옥고)를 치렀고, 4년간 계속된 ‘安風(안풍ㆍ안기부 예산 신한국당 불법 지원)’ 재판 때문에 법정에 70여 회 출두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섰다고 했다. 최근 집으로 배달된 가톨릭신문(7월 6일자)에서 우연히 그의 근황을 접할 수 있었다. 김기섭 씨는 지난 6월 25일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가 출범시킨 ‘기쁨과 희망은행’ 후원회장을 맡았다. ‘기쁨과 희망은행’은 출소자들에게 창업자금 1000만 원을 3년간 2%의 이자로 빌려주는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다른 얘기는 말고 ‘기쁨과 희망은행’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안풍 사건을 한번 정리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까짓 거 그 얘기도 한번 하지 뭐” 하는 답이 돌아왔다.
약속대로 그는 안기부 자금 1194억 원이 신한국당에 지원된 이른바 ‘안풍 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김 전 차장이 안풍 사건과 관련해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신앙간증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안기부 운영차장으로 국가정보기관의 비밀스런 돈을 4년간 만졌고, 金泳三(김영삼) 정권의 핵심실세로 많은 敵(적)을 만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권력의 최정점에서 내려오면 곤욕을 치르겠구나’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까.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어요. 利權(이권) 개입한 일이 없고, 검은돈을 조성한 일이 없었으니까. 안기부 들어가고 나서는 여자 있는 술집에도 간 적이 없어요.”
─정권 교체기에는 늘 정치보복이 있기 마련 아닙니까.
“정치보복을 하더라도 무슨 비리가 있고, 증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안기부 들어가면서 ‘은행대출 받아준다고 돈 먹고, 이권 개입해서 돈 먹으면 죽는다. 절대 그런 짓 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김영삼 정권 끝나고 내가 감옥에 들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세 번이나 감옥을 갔으니 분통 터질 노릇이었죠.”
그는 1997년 5월 19일 첫 구속됐다.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으로부터 케이블 TV 사업권 수주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1억 5000만 원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한보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두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한보 청문회 등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와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을 ‘국정 亂脈(난맥)’의 主犯(주범)으로 지목했다. 다음은 그 사례 중의 하나였다.
“증인(김기섭)은 정치적 후원자인 金賢哲(김현철) 씨에게 각종 안기부 정보를 전달했고, 현철 씨의 측근 또는 대리인을 자처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1992년 대선 때 삼성그룹 등으로부터 2000억 원의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이 같은 의혹은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진출하고, 한솔이 개인휴대용통신(PCS) 사업자로 선정된 것과 무관치 않다.”(李圭正 의원, 민주당)
검찰총장 “당신은 현철이가 돈 받은 것 알 것 아니냐”
이런 발언에 대해 김 전 차장은 이렇게 抗辯(항변)했다.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김현철 씨를 감옥에 보내야겠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렀습니다. 그래서 검찰이 현철 씨와 내 주변 사람들 200여 명의 계좌를 다 뒤졌어요. 그러나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金起秀(김기수) 당시 검찰총장이 내게 ‘당신은 현철 씨와 가까우니 현철 씨가 검은돈 받은 것 한두 건이라도 알 것 아니냐. 얘기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없는데 어떻게 얘기를 합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권 개입 하면 죽는다’ 그건 철저하게 지켰어요.”
─이성호 씨에게서 1억 5000만 원을 받은 부분은 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됐지 않습니까.
“제가 이성호 사장의 부친과 오랜 친구입니다. 제가 1990년 상도동으로 가서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민정 의전 특보를 할 때 용돈을 받아쓰곤 했어요.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이 사장이 찾아왔어요. 식당에서 밥 먹고 나서 ‘아버지가 휴가비로 쓰시랍니다’ 하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어요. 그걸 그냥 써버렸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예요. 이건 공금으로 써야 할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솔PCS에 맡겨둔 대선 잔금 100억 원에 같이 집어 넣었어요. 나는 써보지도 못한 돈 5000만 원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게 된 거예요.”
─현철 씨는 숨겨둔 대선 잔금 100억 원 때문에 구속된 거죠.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됐죠.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대통령의 아들을 대통령 임기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이 구속시키는 게 무슨 뜻인가 곰곰 생각했어요. 하도 여론이 나쁘니까 현철 씨를 집어 넣으려는구나 판단이 돼요. 현철 씨에게 조세포탈로 구속영장이 떨어지는 걸 보고, 나도 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언론이 연일 저를 ‘정권의 핵심실세’라며 나쁜 놈이라고 도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검사와 36시간을 실랑이하다가 ‘나도 감옥에 집어 넣어 주세요’ 했죠.”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입니까.
“한보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제가 저지른 범죄라고 쏟아낸 얘기 가운데 사실로 입증된 게 뭐가 있습니까. 전부 터무니 없는 얘기였잖아요.”
─그런데 이성호 씨에게서 받은 돈이 왜 1억 5000만 원으로 늘었습니까.
“제가 5000만 원을 받았다고 진술했는데, 검찰은 1억 5000만 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성호가 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했대요. 아무래도 5000만 원 가지고 잡아넣기는 어려웠는지,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어요. 이성호 씨는 기업을 하는 입장이니까 검찰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죠. 감옥 가기로 마음 먹었는데 대가성이 있느냐 없느냐, 돈 액수 가지고 싸울 필요 있나요. 내가 쓰지도 않은 돈 아닙니까. 검사가 그래요. ‘차장님 집에도 가보고, 계좌추적을 했지만 아무 것도 안 나와서 우리가 놀랐습니다’라고 해요.”
─안기부 자금 1194억 원 유용을 단죄했던 1심 재판부가 유죄 선고 직전 이례적으로 ‘피고인(김기섭)이 단 한 푼의 돈도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사실은 높이 산다’고 했죠.
“그 얘기 들으면서 나는 집행유예로 풀어주려나 보다 은근히 기대를 했어요. 아 그런데 법정구속이야. 변호인한테 나중에 물었어요. ‘법정구속 시키려면 그런 소리 하지나 말지, 판사가 왜 그런 얘기를 한 거냐’이랬더니 변호사가 그래요. 국고 유용이 최소 5년 징역에서 무기징역까지 가능한데,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점을 감안해서 5년을 선고했다는 거예요.”
─1194억 원이 안기부 예산이든 1992년 대선 잔금이든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게 잘한 일은 아니죠.
이 질문에 김 차장은 “이건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죠”라며 10분 가까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 직후 ‘앞으로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안 받겠다’고 약속했고, 그걸 지켰어요. 저 역시 안기부 예산을 다루면서 단 한 푼의 통치자금을 만들지 않았고요.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이 집권 기간 중에 통치자금을 조성해서 쓰고 남아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돈이 4000억 원대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大選(대선) 私(사)조직이었던 ‘나사본’(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이 쓰고 남은 돈 100억 원을 현철 씨가 내게 맡겨 제가 안기부 시절 관리를 한 건 사실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로 검은돈이 흘러 다닐 길을 다 끊었습니다. 당시의 정치문화 수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1194억 원을 신한국당에 건넨 것은 벌써 10년 전의 일이잖아요. 많이 투명해진 지금의 잣대로 그 시대의 관행을 단죄하는 건 ‘페어’하지 않은 거죠. 저는 지금도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하다가 생긴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첫 감옥살이는 얼마나 했습니까.
“두 달 했어요. 제가 안면 근육 경련이 심해져서 수술을 해야 할 판이었어요. 검사를 하니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게 드러났어요.”
이 소송과는 별도로 그는 한솔PCS의 趙東晩(조동만) 회장으로부터 7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1998년 11월 불구속 기소됐다. 1심은 무죄, 2심은 유죄, 대법원은 유죄를 확정했다. 판사들이 무죄와 유죄를 왔다 갔다 했으니 실체적 진실이 간단치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 전 차장은 할 말이 많았다. 그의 긴 주장을 간단히 요약한다.
安風 사건에 대한 변론
“그 7000만 원은 제 삼성 퇴직금입니다. 제가 그 돈을 신한여행사에 투자했습니다. 어려워진 회사를 한솔이 인수했고, 한솔의 조동만 회장에게 ‘내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해서 아내의 계좌로 받았어요. 검찰은 그 돈을 돌려받는 대가로 제가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큰 사업의 하나를 따 주었다는 겁니다. 조동만 회장이 검찰에서 ‘PCS 사업권을 따기 위해 7000만 원을 주었다’고 진술했어요. 사업하는 사람이라 검찰에 약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나는 내 삼성 퇴직금 투자했다가 그 돈 그대로, 이자 한푼 안 받고 받아온 게 전부입니다.”
두 건의 형사소송으로 휘청거리는 그에게 진짜 큰 사건이 닥쳐왔다. ‘안풍’ 사건의 시작이었다.
김 전 차장은 “검찰 직원이 집에 찾아와 동행을 요구한 순간 안기부 자금을 여당에 지원한 것 때문인 걸 직감했다”고 했다.
“검찰 직원들이 2001년 1월 3일 우리 집으로 왔어요. 그리고 1월 5일에 구속됐죠. 검찰 직원에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집사람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내가 지금 가면 3년이 될지, 5년이 될지 모르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내복이나 두꺼운 걸로 챙겨달라’고 했죠.”
金己燮과 姜三載의 충돌
─어떻게 검찰이 안기부 자금 유용을 추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습니까.
“안기부 운영차장 하면서 내가 죄 지은 건 그것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이른바 ‘안풍’이란 안기부 예산 가운데 옛 재정경제원(기획재정부의 전신) 예비비와 안기부 일반회계, 옛 안기부 남산청사 매각보상금 9억 원 등 1197억 원을 조성해 1995년 지방선거 때 257억 원을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에 지원하고, 1996년에는 4ㆍ11 총선 자금으로 940억 원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지원했다는 ‘안기부 예산 불법전용 사건’이다. 이 사건이 불거지자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간첩 잡는 예산을 빼돌려 정치자금으로 썼다”며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검찰은 2001년 1월 안기부 예산 1197억 원(지방선거 257억 원, 총선 940억 원)을 불법 전용한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국고 손실)로 金己燮(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과 姜三載(강삼재) 전 한나라당 의원을 기소했다. 2003년 9월 1심 재판에서 재판부는 지방선거 때 125억 원, 총선 때 731억 원 모두 856억 원이 안기부 예산에서 나왔다며 ‘국고 손실’ 혐의를 인정하여 김 전 차장은 징역 5년, 강 전 의원은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재판부는 2004년 7월 5일 “이 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 사실상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이라고 인정하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005년 10월 28일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을 확정했다. 결국 이 사건은 ‘安風’(안풍)이 아니라 대통령이 여당 선거자금을 지원한 사건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1심 판결 이후 김기섭 씨와 강삼재 씨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다.
(김기섭) “안기부 불용예산과 이자수입 등으로 1197억 원을 조성했다. 서울시내 호텔에서 강삼재 사무총장을 세 번 만나 직접 돈을 전달했다.”
(강삼재)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았다. 1197억 원은 김영삼 대통령이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쓰고 남은 대선 잔금이다.”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강삼재 전 사무총장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고등법원은 안기부 위장회사 명의인 2092개 계좌의 거래 내역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선 이듬해인 1993년 1293억 원의 예금 잔고가 증가하고, 지방선거가 있었던 1995년과 총선이 있었던 1996년 각각 647억 원과 380억 원이 줄어든 사실을 확인했다. 대법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관련된 자금일 것이라는 강 전 의원 측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김기섭 전 차장은 왜 國庫(국고) 유용의 죄를 혼자 다 뒤집어 쓰려고 했을까? 그는 왜 끝까지 ‘내가 국가예산을 불법으로 횡령했다’며 유죄를 자처했을까?
“처음에는 설마 정보 공작기관인 안기부 자금을 다 뒤지겠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라의 틀을 갖춘 곳에서 국가정보기관 예산을 뒤져서 처벌하는 예가 없어요. 영국 국민들은 지금도 자기들 국가정보기관이 어디에 있는지, 首長(수장)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안풍 사건 터지고 나서 주요국 정보기관들이 안기부하고 정보 교환을 안 했어요.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매일 새벽 5시까지 검사 5명이 돌아가면서 심문을 해요. ‘얼마를 지원했냐’, ‘누가 지시했냐’ 이러다가 사건이 끝없이 가겠더라고.”
─그래서 혼자 덤터기 쓰기로 결심한 겁니까.
“옛날에 충신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요.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 실수를 했다. 그렇다고 목숨 내놓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한 5년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조용한 게 아니냐, 그런 생각을 했죠. ‘누구한테 지시 받은 것이 아니다. 내가 했다.’ 그렇게 정리하니까 검찰이 어떻게 하겠어요.”
2심 재판이 시작된 이후 강삼재 전 총장의 변호인들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받았다. 그 돈은 대선 잔금이다”고 적극 변호에 나섰다. 강 전 총장은 月刊朝鮮 2005년 10월호 인터뷰에서 “어른(김영삼 대통령) 이름을 밝히는 게 고통스러워 고향의 자살바위에 네 번이나 올라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항소심이 진행될 때 강삼재 전 총장과 만난 적이 있나요.
“변호인들이 찾아왔어요. ‘내가 어른(김영삼 대통령)에게 받은 혜택이 20이면 강 총장은 100이다. 그런 내가 세 번째 감옥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강 총장이 이럴 수가 있나. 고위 공직자는 무한책임을 지는 거다. 강 총장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했죠.”
김기섭 차장은 강삼재 전 총장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집권당 사무총장까지 올랐으면 자기 선에서 책임 질 줄도 알아야지, 자기만 살겠다고 그 난리를 치니 참 기가 막혔어요. 내가 ‘다 안고 가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삼재 사무총장이 마음에 걸려요. 그래서 ‘죽어도 누구한테 줬는지는 말 못한다. 강삼재한테 안 줬다’고 했는데, 그만 1심에서 강 총장에게 유죄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마음이 변한 거지.”
─김영삼 대통령의 家臣(가신)으로 불리는 강 총장이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받았다. 대선 잔금이다”고 밝히는 상황에서 가신도 아닌 김 차장이 김영삼 대통령을 그렇게 보호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내가 사람이 그 모양으로 생긴 걸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게 인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해요.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내가 그렇다고 강삼재 총장을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간첩 잡는 예산을 유용했다’는 멍에를 지고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제가 아침에 강삼재 씨를 위해 항상 기도를 해요.”
─안기부가 신한국당에 지원한 1197억 원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김 차장에게 관리하라고 건네 준 대선 잔금이 분명한 거죠.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상황입니다. 재판에 관련된 판사, 검사, 변호사들 사회단체가 얽혀 있는 사안입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지금 다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내 종전 주장에, 내 스탠스에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 스탠스에 지금도 변함없다”
─대법원 판결이 났는데 ‘종전 스탠스에 변함이 없다’는 건 또 무슨 얘기입니까. ‘1197억 원은 안기부 예산이다’라는 주장을 계속 고집하는 겁니까.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 종전 주장이 맞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강삼재 전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기섭 씨가 아직까지 종전의 자기 주장이 맞다는 얘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전하자 강 전 총장은 이런 ‘유권 해석’을 내놓았다.
“실체적 진실이 법원 판결을 통해 다 확인됐지 않습니까. 정부가 저와 김기섭 차장을 상대로 걸었던 민사소송 1심에서 정부가 패소했고,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차장이 月刊朝鮮에 ‘그 돈은 사실은 김영삼 대통령이 준 대선 잔금이었다’고 얘기해서 또 분란을 만들려고 하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대구의 영남고등학교를 나온 김기섭 씨는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다. 입시학원 영어강사, 외판원으로 돈을 벌면서 대학입시를 조금씩 준비했다. 한국외국어대학을 그만두고 다시 대학입시를 거쳐, 고등학교 때부터 뜻을 두었던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정상적으로 입학한 동급생들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 34살이었다. 1973년 3월 반도체 전문업체인 아남산업에 입사한 그는 입사 6개월 만에 차장, 2년 만에 부장, 3년 만에 직원 5000명을 거느리는 공장장이 됐다. 아무리 개발 연대라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초고속 승진이다. 입사할 때 자신을 심사했던 부장들을 데리고 일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목숨 걸고 일했다”
“아남산업 제2공장이 부평에 있었습니다. 미국 전자업체 RCA에 보내는 공급물량을 제때에 못 맞춰서 대만으로 철수를 하겠다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비서실에 근무하다가 제2공장에 파견된 RCA 기술자들 통역을 해주고, 텔렉스를 보내고 했어요. 철수를 얘기하기에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죠. 회사에 얘기해서 제가 ‘RCA 조립라인’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때 총각이었으니까 공장에 야전침대 갖다 놓고 살았죠. 밤에 여공들에게 라면하고 빵을 사주면서 기분을 맞춰주고.”
─성과가 났습니까.
“두 달 만에 생산량이 두 배로 늘었어요. 철수하는 RCA 기술자가 아남산업 본사에 나를 RCA 라인 책임자로 임명해 달라고 공식 요청을 했어요. 그래서 단박에 과장 3명을 거느리는 차장이 된 겁니다. 부평 공장장 시절에 아남산업에서 큰 노사분규가 났는데 부평공장만 조용했어요. 노조는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공장장 김기섭이가 쫓겨나면 더 좋은 사람 올 리가 만무하다’며 분규를 자제했다고 해요. 아남산업 오너가 임원회의에서 ‘너희들은 김기섭이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놈들이다’고 막 퍼부었답니다.”
아남산업이 한국에서 철수하자 그는 삼성반도체로 옮겨 관리부장을 지냈고, 이후 신라호텔 상무, 삼성 SDI 전무를 거쳐 김영삼 캠프에 합류했다. 李秉喆(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신임을 얻어 매주 한 차례 독대하면서, 이 회장이 주는 ‘미션’을 비밀리에 수행했다. 그 중에는 정치인들을 관리하는 일이 포함됐다고 한다. 그가 털어놓은 승승장구의 비결이다.
“‘빽’ 없는 촌놈이 잘 사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쎄(혀)’빠지게 일하는 거고, 하나는 주머니에 들어온 돈 꽉 붙들고 쓰지 않는 겁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20년 했는데 1년에 2박 3일 휴가 갔다 온 게 딱 세 번이에요. 목숨 걸고 일하지 않으면 어떤 오너가 신임을 하겠습니까.”
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판에서도 그는 쾌속 질주했다. 민자당 대표 김영삼 씨의 마음을 샀고, 김영삼 씨는 그에게 안기부 기조실장이라는 요직을 맡겼다. 그는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의 기분을 ‘낭떠러지에 떨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1.2평 남짓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그가 가졌던 유일한 소망은 “내 발로 북한산을 한 번 올라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통해 위안과 구원을 얻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신앙으로 바뀌자 그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자신의 신앙체험을 절절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세 번 수감생활 중에 성경을 세 번 완독했고,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의 명상록, 프란치스코 聖人(성인)의 생애 같은 信心(신심) 서적을 40권 이상 읽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에 하느님이 저를 만나주셨고, 기적과 같은 체험을 주신 거예요. 세속의 가치만을 좇아온 김기섭이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김기섭이로 만들기 위해 하느님께서 혹독한 시련을 주셨나 봐요.”
처음 찾은 성당에서 절규
─원래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까.
“신앙은 무슨, 성당에도 가본 적이 없었어요. 성당에 처음 간 날이 1997년 4월 22일이야.”
─어떻게 날짜까지 기억을 하십니까.
“바로 다음날이 내가 한보 청문회에 증인으로 끌려간 날이니까. 언론이 아침 6시 뉴스부터 밤 12시까지 나를 ‘나라 망친 놈’이라고 융단폭격을 해대니까 화병이 났어요. 무력증이 오는데 그게 정말 무서워요. 만사가 귀찮아서 시체처럼 한 달 이상 방안에 누워서 지냈어요. 도저히 청문회에 못 나가겠더라고.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저녁에 집사람이 다니던 서교 성당으로 갔어요. 가서 무릎 꿇고 기도를 했어요.”
─성당에 처음 간 분이 어떻게 기도까지.
“하도 답답하니까 저절로 기도가 되더라고.”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
“하느님 감사합니다. 서울대학교에 넣어주시고, 아남산업 공장장을 시켜주시고, 삼성의 전무도 시켜주시고, 안기부 살림을 맡겨주시고. 은총을 주셨는데, 내가 잘 나서 그리 된 줄 알고 오만했습니다. 앞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살 테니 제발 내일 청문회에 나가서 말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한 30분간 그렇게 빌었어요.”
─속으로 그런 기원을 한 겁니까.
“아니지, 절규를 하는 거지. 소리를 내서 중얼중얼하다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좀 나은 것도 같더라고요. 속이 좀 후련한 거지. 밤 10시에 수면제를 먹고 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 와요. 새벽 1시에 다시 수면제를 먹고 4시간쯤 잠을 잤어요. 그리고 청문회에 나가서 기적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겁니까.
“집사람 따라서 성당 두 번 가고 바로 구속이 됐죠. 면회 오신 김종국 신부님이 예비자 교리서를 갖다 주시면서, ‘다 읽고 나오면 세례를 주겠다’고 하세요. 감옥에 두 달 있으면서 교리서하고 구약 성경을 다 읽었어요. 김 신부님이 ‘세례 받고도 남겠다’면서 그해 9월 20일에 세례를 주셨죠. 신앙을 가진 지 만 11년이 됐네요.”
─李在五(이재오) 전 의원처럼 수감생활을 여러 번 한 분들 얘기를 들으면 첫 번째는 멋 모르고 들어가는데 두 번째 들어가는 건 정말 겁나고 힘들다고 하더군요.
“나는 정반대예요. 처음에 들어갔을 땐 정말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구치소에서 오후 5시에 철창 문을 철거덕 잠그는데, 그때 가슴이 무너져 내려요. 1.2평 방에 갇혀서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거지.”
─두 번째 감옥살이(2001년 1월 15일 구속 수감) 때는 어땠습니까.
“6개월을 살았는데 마음이 편한 거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그게 확실하게 느껴지니까, 그러면 여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에 4시간씩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4시간 동안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루에 4시간씩이나 했습니까.
“천주교에는 묵주가 있습니다. 이걸 열다섯 바퀴쯤 돌리면 세 시간이 금방 가요.”
두 번째 수감생활을 하면서, 김기섭 씨는 ‘감옥에서 나가면 감옥살이를 끝내고 출소한 이들을 돕겠다’는 誓願(서원)을 세웠다. 이런 체험이 계기가 됐다.
출소자 돕기를 결심한 사연
“신앙의 힘으로 근근이 버텼지만 내 몸은 사망 일보 직전이었어요. 출혈성 위궤양과 위경련으로 매일 혈변을 봤어요. 그렇지만 안기부 예산을 1000억 원이나 축낸 사람을 병보석으로 내보내 주겠어요? 그해 1월이 무지무지 추웠어요. 영하 17도의 냉골에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버텼지. 어느 날 면회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교도관이 ‘불 좀 쬐고 들어가라’며 자기 방으로 불러요. 거기 연탄불이 있었거든요.
곁불을 쬐는데 교도관이 ‘오늘 70대 노인이 출소하는데 갈 곳이 없다. 참 딱하다’고 해요. 감옥에 두 번째 온 처지에다 내 몸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교도관의 말이 번갯불처럼 내 머리를 때려요. ‘하느님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그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성령이 절 찾아오신 거예요. 그때부터 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를 했죠.”
김 전 차장은 안풍 2차 공판(2004년 7월 5일) 사흘 전에 신비한 신앙체험을 했다고 한다. 명동성당의 성모상 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환하게 빛나는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마음 가득히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너무 기뻐서 가슴이 터질 듯해요. 내 인생에서 체험한 어떤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었습니다. 명동성당 근처의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는데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거예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집사람에게 얘기했더니 ‘성모님이 나타난 건 당신이 법정구속 안 될 징조’라며 좋아해요. 내가 그날 밤부터 사흘 동안 계속 찬송가를 불렀어요. 다른 사람 눈에는 완전히 돈 사람이지.”
2차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그는 곧바로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에서 실시하는 봉사자 교육에 등록했고, 4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3년간 서울구치소에서 재소자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했다.
넓은 인맥을 활용해 출소자에게 직업교육과 취직을 알선해줬고, 자신이 직접 자본금 1억 원짜리 미용재료 회사를 설립해 출소자들을 채용했다. 회사 이름은 ‘신의 가호를’(God blessed)로 지었다. 직원은 현재 17명이다.
한국판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
1년간 쏟아지는 무연고 출소자는 6800여 명. 1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주교 출소자 쉼터인 ‘평화의 집’으론 한계가 있었다. 갈 곳 없어서 再犯(재범)을 저지르는 이들을 위해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제가 교정 사목인 이영우 신부를 도와드렸어요. 신부님도 고민이지, 범죄 안 저지르겠다고 맹세하고 나간 사람들이 금방 또 들어오니까. 제게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 박사가 벌이고 있는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을 우리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세요. 출소자를 위한 무담보 신용은행을 만들자는 얘기였어요. 붕어빵 장사, 바나나 장사 같은 걸 할 밑천을 대주자는 거죠. 제가 기꺼이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2006년 12월 신부님하고 모금을 시작해서 5억 원의 ‘시드 머니’를 모았습니다.”
‘기쁨과 희망은행’은 지난 6월 25일 재단법인으로 출범했다. 후원회의 고문으로는 朴智元(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金學俊(김학준) 동아일보 회장, 吳世勳(오세훈) 서울시장, 金慶漢(김경한) 법무장관, 權寧世(권영세)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위촉됐다.
─고문들 면면이 화려합니다. 박지원 전 실장은 어떻게 고문을 맡게 됐습니까.
“박 실장은 감방 동기예요. 2003년 세 번째 감옥에 갔을 때 제가 서울구치소 16동 1층, 權魯甲(권노갑) 씨가 2층, 박지원 씨가 3층에 있었어요.”
─박지원 씨는 김대중 정부가 끝나고 나서 감옥살이를 계속했는데 동병상련을 느꼈겠습니다.
“저는 박지원 씨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 당시 다들 ‘박지원이는 김대중 정권 끝나면 미국으로 도망갈 거다’고 했는데, 감옥 들락거리면서 끝까지 보스를 보호했잖아요. 나는 의리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남자는 의리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가까워졌죠. 그래서 우리가 ‘부인들을 오전 11시에 면회 오도록 하자’고 약속을 해서 면회 전에 만나 20분 정도 얘기를 했죠.”
─박지원 전 실장이 ‘안풍’ 사건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박지원 씨가 ‘우리 정부에서 그런 일을 당해서 미안하다’ 그러더라고요. 내가 처음에는 물론 화가 나고 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일꾼으로 쓰려고 감옥에 세 번이나 보낸 건데,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할 수가 없는 일이죠. 용서한다는 것은 더구나 말이 안 되는 소리고.”
─강삼재 전 총장도 용서했습니까.
“내가 매일 아침 그분하고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니까.”
─사업을 하려는 출소자 1인당 1000만 원을 3년간 2%의 이자로 빌려주겠다는 계획인데, 사업이 시작됐습니까.
“사전 준비작업이 많이 필요합니다. 人性(인성)교육, 창업교육을 시키고 돈을 줘야죠. 사업계획서를 내면, 그 분야의 사업장에 6개월에서 1년 정도 일을 시킬 겁니다. 이 분들을 채용하는 사업장에서 이들에게 지급하는 월급의 반 정도는 우리가 대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경험을 쌓은 사람에게 자금을 지원할 겁니다.”
─무담보 신용대출인데 회수율이 얼마나 될 걸로 예상합니까.
“회수율이 70% 내외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영우 신부님은 80% 이상 된다고 자신하시는데 내가 볼 때는 70% 정도입니다. 방글라데시의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회수율은 96%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지원을 받을 사람들은 전과자고 대부분 신용불량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용대출해 주는 건 전 세계에서 우리가 처음일 거예요. 이 일은 누가해도 해야 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입니다.”
─김 차장의 지난 11년을 정리하면 ‘권력의 최정점에서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돕게 됐다’가 되겠군요.
“저로서는 영광이죠. 수용자 신세에서 수용자를 위한 봉사자가 됐고, 다시 출소자를 위한 기쁨과 희망은행 사장이 됐습니다. 하느님 기준으로 보면 계급이 엄청 높아진 겁니다. 천국에서 하느님이 ‘너는 인생을 살면서 무얼 했느냐’고 물으시면, 출소자 돕기 운동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작정입니다.”
수감 청소년 돕고 싶어
─다른 활동을 구상하고 있는 게 있습니까.
“수감생활을 하는 청소년들을 도왔으면 해요. 지금 천안교도소에 전과 2범 이상의 18세 소년들이 470명 수용돼 있어요. 그 중 270명이 무연고입니다. 면회 오는 사람도 없고, 영치금 넣어주는 사람도 없고. 가정이 다 깨진 거예요. 이 아이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식탁 위에 음식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우리는 주섬주섬 늦은 점심을 시작했다. 김 차장은 “‘기쁨과 희망은행’의 후원 계좌를 꼭 실어달라”면서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체험한 정치인 경제인들이 출소자들을 돕는 일에 많이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그는 빠른 시간 안에 ‘기쁨과 희망 은행’의 기금 규모를 50억 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나는 조선일보 정치부의 상도동 출입기자로 일하면서 김기섭 전 차장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대학 선후배 사이라 안기부 차장 시절 가끔 만나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신라호텔 상무로 일할 때도 私的(사적)인 모임에서 여러 차례 조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시절 그는 패기만만하고 정력적이었다. 거칠 게 없었다. 지난 11년 ‘피고인 김기섭’은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지병인 안면 근육마비로 인해 얼굴이 비틀린 모습으로 감옥과 법정을 들락거렸다. 이번에 만난 ‘신앙인 김기섭’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고, 활기가 넘쳤다. 기업과 정치에서뿐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그가 고속 승진을 계속 이어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 : 이태훈
「기쁨과 희망은행」후원회 계좌
우리은행 1005-301-263350
천주교사회교정 사목위원회
金己燮(김기섭ㆍ69) 씨는 이 한마디로 지나온 세월을 요약했다. 1997년 3월 4일 안기부 운영차장 자리를 물러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락이었다. 세 차례 獄苦(옥고)를 치렀고, 4년간 계속된 ‘安風(안풍ㆍ안기부 예산 신한국당 불법 지원)’ 재판 때문에 법정에 70여 회 출두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섰다고 했다. 최근 집으로 배달된 가톨릭신문(7월 6일자)에서 우연히 그의 근황을 접할 수 있었다. 김기섭 씨는 지난 6월 25일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가 출범시킨 ‘기쁨과 희망은행’ 후원회장을 맡았다. ‘기쁨과 희망은행’은 출소자들에게 창업자금 1000만 원을 3년간 2%의 이자로 빌려주는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다른 얘기는 말고 ‘기쁨과 희망은행’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안풍 사건을 한번 정리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까짓 거 그 얘기도 한번 하지 뭐” 하는 답이 돌아왔다.
약속대로 그는 안기부 자금 1194억 원이 신한국당에 지원된 이른바 ‘안풍 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김 전 차장이 안풍 사건과 관련해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신앙간증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안기부 운영차장으로 국가정보기관의 비밀스런 돈을 4년간 만졌고, 金泳三(김영삼) 정권의 핵심실세로 많은 敵(적)을 만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권력의 최정점에서 내려오면 곤욕을 치르겠구나’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까.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어요. 利權(이권) 개입한 일이 없고, 검은돈을 조성한 일이 없었으니까. 안기부 들어가고 나서는 여자 있는 술집에도 간 적이 없어요.”
─정권 교체기에는 늘 정치보복이 있기 마련 아닙니까.
“정치보복을 하더라도 무슨 비리가 있고, 증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안기부 들어가면서 ‘은행대출 받아준다고 돈 먹고, 이권 개입해서 돈 먹으면 죽는다. 절대 그런 짓 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김영삼 정권 끝나고 내가 감옥에 들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세 번이나 감옥을 갔으니 분통 터질 노릇이었죠.”
그는 1997년 5월 19일 첫 구속됐다.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으로부터 케이블 TV 사업권 수주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1억 5000만 원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한보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두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한보 청문회 등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와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을 ‘국정 亂脈(난맥)’의 主犯(주범)으로 지목했다. 다음은 그 사례 중의 하나였다.
“증인(김기섭)은 정치적 후원자인 金賢哲(김현철) 씨에게 각종 안기부 정보를 전달했고, 현철 씨의 측근 또는 대리인을 자처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1992년 대선 때 삼성그룹 등으로부터 2000억 원의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이 같은 의혹은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진출하고, 한솔이 개인휴대용통신(PCS) 사업자로 선정된 것과 무관치 않다.”(李圭正 의원, 민주당)
검찰총장 “당신은 현철이가 돈 받은 것 알 것 아니냐”
이런 발언에 대해 김 전 차장은 이렇게 抗辯(항변)했다.“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김현철 씨를 감옥에 보내야겠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렀습니다. 그래서 검찰이 현철 씨와 내 주변 사람들 200여 명의 계좌를 다 뒤졌어요. 그러나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金起秀(김기수) 당시 검찰총장이 내게 ‘당신은 현철 씨와 가까우니 현철 씨가 검은돈 받은 것 한두 건이라도 알 것 아니냐. 얘기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없는데 어떻게 얘기를 합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권 개입 하면 죽는다’ 그건 철저하게 지켰어요.”
─이성호 씨에게서 1억 5000만 원을 받은 부분은 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됐지 않습니까.
“제가 이성호 사장의 부친과 오랜 친구입니다. 제가 1990년 상도동으로 가서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민정 의전 특보를 할 때 용돈을 받아쓰곤 했어요.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이 사장이 찾아왔어요. 식당에서 밥 먹고 나서 ‘아버지가 휴가비로 쓰시랍니다’ 하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어요. 그걸 그냥 써버렸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예요. 이건 공금으로 써야 할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솔PCS에 맡겨둔 대선 잔금 100억 원에 같이 집어 넣었어요. 나는 써보지도 못한 돈 5000만 원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게 된 거예요.”
─현철 씨는 숨겨둔 대선 잔금 100억 원 때문에 구속된 거죠.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됐죠.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대통령의 아들을 대통령 임기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이 구속시키는 게 무슨 뜻인가 곰곰 생각했어요. 하도 여론이 나쁘니까 현철 씨를 집어 넣으려는구나 판단이 돼요. 현철 씨에게 조세포탈로 구속영장이 떨어지는 걸 보고, 나도 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언론이 연일 저를 ‘정권의 핵심실세’라며 나쁜 놈이라고 도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검사와 36시간을 실랑이하다가 ‘나도 감옥에 집어 넣어 주세요’ 했죠.”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입니까.
“한보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제가 저지른 범죄라고 쏟아낸 얘기 가운데 사실로 입증된 게 뭐가 있습니까. 전부 터무니 없는 얘기였잖아요.”
─그런데 이성호 씨에게서 받은 돈이 왜 1억 5000만 원으로 늘었습니까.
“제가 5000만 원을 받았다고 진술했는데, 검찰은 1억 5000만 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성호가 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했대요. 아무래도 5000만 원 가지고 잡아넣기는 어려웠는지,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어요. 이성호 씨는 기업을 하는 입장이니까 검찰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죠. 감옥 가기로 마음 먹었는데 대가성이 있느냐 없느냐, 돈 액수 가지고 싸울 필요 있나요. 내가 쓰지도 않은 돈 아닙니까. 검사가 그래요. ‘차장님 집에도 가보고, 계좌추적을 했지만 아무 것도 안 나와서 우리가 놀랐습니다’라고 해요.”
─안기부 자금 1194억 원 유용을 단죄했던 1심 재판부가 유죄 선고 직전 이례적으로 ‘피고인(김기섭)이 단 한 푼의 돈도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사실은 높이 산다’고 했죠.
“그 얘기 들으면서 나는 집행유예로 풀어주려나 보다 은근히 기대를 했어요. 아 그런데 법정구속이야. 변호인한테 나중에 물었어요. ‘법정구속 시키려면 그런 소리 하지나 말지, 판사가 왜 그런 얘기를 한 거냐’이랬더니 변호사가 그래요. 국고 유용이 최소 5년 징역에서 무기징역까지 가능한데,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점을 감안해서 5년을 선고했다는 거예요.”
─1194억 원이 안기부 예산이든 1992년 대선 잔금이든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게 잘한 일은 아니죠.
이 질문에 김 차장은 “이건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죠”라며 10분 가까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 직후 ‘앞으로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안 받겠다’고 약속했고, 그걸 지켰어요. 저 역시 안기부 예산을 다루면서 단 한 푼의 통치자금을 만들지 않았고요.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이 집권 기간 중에 통치자금을 조성해서 쓰고 남아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돈이 4000억 원대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大選(대선) 私(사)조직이었던 ‘나사본’(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이 쓰고 남은 돈 100억 원을 현철 씨가 내게 맡겨 제가 안기부 시절 관리를 한 건 사실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로 검은돈이 흘러 다닐 길을 다 끊었습니다. 당시의 정치문화 수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1194억 원을 신한국당에 건넨 것은 벌써 10년 전의 일이잖아요. 많이 투명해진 지금의 잣대로 그 시대의 관행을 단죄하는 건 ‘페어’하지 않은 거죠. 저는 지금도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하다가 생긴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첫 감옥살이는 얼마나 했습니까.
“두 달 했어요. 제가 안면 근육 경련이 심해져서 수술을 해야 할 판이었어요. 검사를 하니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게 드러났어요.”
이 소송과는 별도로 그는 한솔PCS의 趙東晩(조동만) 회장으로부터 7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1998년 11월 불구속 기소됐다. 1심은 무죄, 2심은 유죄, 대법원은 유죄를 확정했다. 판사들이 무죄와 유죄를 왔다 갔다 했으니 실체적 진실이 간단치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 전 차장은 할 말이 많았다. 그의 긴 주장을 간단히 요약한다.
安風 사건에 대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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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월 5일 오후 김기섭 前 안기부 운영차장이 구속돼 서울 구치소로 이송되고 있다. |
두 건의 형사소송으로 휘청거리는 그에게 진짜 큰 사건이 닥쳐왔다. ‘안풍’ 사건의 시작이었다.
김 전 차장은 “검찰 직원이 집에 찾아와 동행을 요구한 순간 안기부 자금을 여당에 지원한 것 때문인 걸 직감했다”고 했다.
“검찰 직원들이 2001년 1월 3일 우리 집으로 왔어요. 그리고 1월 5일에 구속됐죠. 검찰 직원에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집사람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내가 지금 가면 3년이 될지, 5년이 될지 모르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내복이나 두꺼운 걸로 챙겨달라’고 했죠.”
金己燮과 姜三載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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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부 예산전용 의혹사건인 ‘安風’ 사건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2004년 2월 6일 서울 고등법원에 나온 김기섭 前 안기부 차장. 지병인 안면근육 경화증으로 얼굴이 뒤틀린 모습이다. |
“안기부 운영차장 하면서 내가 죄 지은 건 그것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이른바 ‘안풍’이란 안기부 예산 가운데 옛 재정경제원(기획재정부의 전신) 예비비와 안기부 일반회계, 옛 안기부 남산청사 매각보상금 9억 원 등 1197억 원을 조성해 1995년 지방선거 때 257억 원을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에 지원하고, 1996년에는 4ㆍ11 총선 자금으로 940억 원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지원했다는 ‘안기부 예산 불법전용 사건’이다. 이 사건이 불거지자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간첩 잡는 예산을 빼돌려 정치자금으로 썼다”며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검찰은 2001년 1월 안기부 예산 1197억 원(지방선거 257억 원, 총선 940억 원)을 불법 전용한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국고 손실)로 金己燮(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과 姜三載(강삼재) 전 한나라당 의원을 기소했다. 2003년 9월 1심 재판에서 재판부는 지방선거 때 125억 원, 총선 때 731억 원 모두 856억 원이 안기부 예산에서 나왔다며 ‘국고 손실’ 혐의를 인정하여 김 전 차장은 징역 5년, 강 전 의원은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재판부는 2004년 7월 5일 “이 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 사실상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이라고 인정하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005년 10월 28일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을 확정했다. 결국 이 사건은 ‘安風’(안풍)이 아니라 대통령이 여당 선거자금을 지원한 사건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1심 판결 이후 김기섭 씨와 강삼재 씨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다.
(김기섭) “안기부 불용예산과 이자수입 등으로 1197억 원을 조성했다. 서울시내 호텔에서 강삼재 사무총장을 세 번 만나 직접 돈을 전달했다.”
(강삼재)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았다. 1197억 원은 김영삼 대통령이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쓰고 남은 대선 잔금이다.”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강삼재 전 사무총장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고등법원은 안기부 위장회사 명의인 2092개 계좌의 거래 내역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선 이듬해인 1993년 1293억 원의 예금 잔고가 증가하고, 지방선거가 있었던 1995년과 총선이 있었던 1996년 각각 647억 원과 380억 원이 줄어든 사실을 확인했다. 대법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관련된 자금일 것이라는 강 전 의원 측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김기섭 전 차장은 왜 國庫(국고) 유용의 죄를 혼자 다 뒤집어 쓰려고 했을까? 그는 왜 끝까지 ‘내가 국가예산을 불법으로 횡령했다’며 유죄를 자처했을까?
“처음에는 설마 정보 공작기관인 안기부 자금을 다 뒤지겠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라의 틀을 갖춘 곳에서 국가정보기관 예산을 뒤져서 처벌하는 예가 없어요. 영국 국민들은 지금도 자기들 국가정보기관이 어디에 있는지, 首長(수장)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안풍 사건 터지고 나서 주요국 정보기관들이 안기부하고 정보 교환을 안 했어요.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매일 새벽 5시까지 검사 5명이 돌아가면서 심문을 해요. ‘얼마를 지원했냐’, ‘누가 지시했냐’ 이러다가 사건이 끝없이 가겠더라고.”
─그래서 혼자 덤터기 쓰기로 결심한 겁니까.
“옛날에 충신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요.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 실수를 했다. 그렇다고 목숨 내놓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한 5년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조용한 게 아니냐, 그런 생각을 했죠. ‘누구한테 지시 받은 것이 아니다. 내가 했다.’ 그렇게 정리하니까 검찰이 어떻게 하겠어요.”
2심 재판이 시작된 이후 강삼재 전 총장의 변호인들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받았다. 그 돈은 대선 잔금이다”고 적극 변호에 나섰다. 강 전 총장은 月刊朝鮮 2005년 10월호 인터뷰에서 “어른(김영삼 대통령) 이름을 밝히는 게 고통스러워 고향의 자살바위에 네 번이나 올라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항소심이 진행될 때 강삼재 전 총장과 만난 적이 있나요.
“변호인들이 찾아왔어요. ‘내가 어른(김영삼 대통령)에게 받은 혜택이 20이면 강 총장은 100이다. 그런 내가 세 번째 감옥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강 총장이 이럴 수가 있나. 고위 공직자는 무한책임을 지는 거다. 강 총장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했죠.”
김기섭 차장은 강삼재 전 총장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집권당 사무총장까지 올랐으면 자기 선에서 책임 질 줄도 알아야지, 자기만 살겠다고 그 난리를 치니 참 기가 막혔어요. 내가 ‘다 안고 가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삼재 사무총장이 마음에 걸려요. 그래서 ‘죽어도 누구한테 줬는지는 말 못한다. 강삼재한테 안 줬다’고 했는데, 그만 1심에서 강 총장에게 유죄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마음이 변한 거지.”
─김영삼 대통령의 家臣(가신)으로 불리는 강 총장이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받았다. 대선 잔금이다”고 밝히는 상황에서 가신도 아닌 김 차장이 김영삼 대통령을 그렇게 보호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내가 사람이 그 모양으로 생긴 걸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게 인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해요.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내가 그렇다고 강삼재 총장을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간첩 잡는 예산을 유용했다’는 멍에를 지고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제가 아침에 강삼재 씨를 위해 항상 기도를 해요.”
─안기부가 신한국당에 지원한 1197억 원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김 차장에게 관리하라고 건네 준 대선 잔금이 분명한 거죠.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상황입니다. 재판에 관련된 판사, 검사, 변호사들 사회단체가 얽혀 있는 사안입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지금 다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내 종전 주장에, 내 스탠스에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 스탠스에 지금도 변함없다”
─대법원 판결이 났는데 ‘종전 스탠스에 변함이 없다’는 건 또 무슨 얘기입니까. ‘1197억 원은 안기부 예산이다’라는 주장을 계속 고집하는 겁니까.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 종전 주장이 맞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강삼재 전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기섭 씨가 아직까지 종전의 자기 주장이 맞다는 얘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전하자 강 전 총장은 이런 ‘유권 해석’을 내놓았다.
“실체적 진실이 법원 판결을 통해 다 확인됐지 않습니까. 정부가 저와 김기섭 차장을 상대로 걸었던 민사소송 1심에서 정부가 패소했고,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차장이 月刊朝鮮에 ‘그 돈은 사실은 김영삼 대통령이 준 대선 잔금이었다’고 얘기해서 또 분란을 만들려고 하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대구의 영남고등학교를 나온 김기섭 씨는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다. 입시학원 영어강사, 외판원으로 돈을 벌면서 대학입시를 조금씩 준비했다. 한국외국어대학을 그만두고 다시 대학입시를 거쳐, 고등학교 때부터 뜻을 두었던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정상적으로 입학한 동급생들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 34살이었다. 1973년 3월 반도체 전문업체인 아남산업에 입사한 그는 입사 6개월 만에 차장, 2년 만에 부장, 3년 만에 직원 5000명을 거느리는 공장장이 됐다. 아무리 개발 연대라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초고속 승진이다. 입사할 때 자신을 심사했던 부장들을 데리고 일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목숨 걸고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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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경찰청 앞의 거리공원에서 포즈를 취한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 |
─성과가 났습니까.
“두 달 만에 생산량이 두 배로 늘었어요. 철수하는 RCA 기술자가 아남산업 본사에 나를 RCA 라인 책임자로 임명해 달라고 공식 요청을 했어요. 그래서 단박에 과장 3명을 거느리는 차장이 된 겁니다. 부평 공장장 시절에 아남산업에서 큰 노사분규가 났는데 부평공장만 조용했어요. 노조는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공장장 김기섭이가 쫓겨나면 더 좋은 사람 올 리가 만무하다’며 분규를 자제했다고 해요. 아남산업 오너가 임원회의에서 ‘너희들은 김기섭이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놈들이다’고 막 퍼부었답니다.”
아남산업이 한국에서 철수하자 그는 삼성반도체로 옮겨 관리부장을 지냈고, 이후 신라호텔 상무, 삼성 SDI 전무를 거쳐 김영삼 캠프에 합류했다. 李秉喆(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신임을 얻어 매주 한 차례 독대하면서, 이 회장이 주는 ‘미션’을 비밀리에 수행했다. 그 중에는 정치인들을 관리하는 일이 포함됐다고 한다. 그가 털어놓은 승승장구의 비결이다.
“‘빽’ 없는 촌놈이 잘 사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쎄(혀)’빠지게 일하는 거고, 하나는 주머니에 들어온 돈 꽉 붙들고 쓰지 않는 겁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20년 했는데 1년에 2박 3일 휴가 갔다 온 게 딱 세 번이에요. 목숨 걸고 일하지 않으면 어떤 오너가 신임을 하겠습니까.”
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판에서도 그는 쾌속 질주했다. 민자당 대표 김영삼 씨의 마음을 샀고, 김영삼 씨는 그에게 안기부 기조실장이라는 요직을 맡겼다. 그는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의 기분을 ‘낭떠러지에 떨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1.2평 남짓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그가 가졌던 유일한 소망은 “내 발로 북한산을 한 번 올라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통해 위안과 구원을 얻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신앙으로 바뀌자 그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자신의 신앙체험을 절절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세 번 수감생활 중에 성경을 세 번 완독했고,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의 명상록, 프란치스코 聖人(성인)의 생애 같은 信心(신심) 서적을 40권 이상 읽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에 하느님이 저를 만나주셨고, 기적과 같은 체험을 주신 거예요. 세속의 가치만을 좇아온 김기섭이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김기섭이로 만들기 위해 하느님께서 혹독한 시련을 주셨나 봐요.”
처음 찾은 성당에서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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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섭 차장이 처음 성당에서 기도하던 때의 일을 설명하고 있다. |
“신앙은 무슨, 성당에도 가본 적이 없었어요. 성당에 처음 간 날이 1997년 4월 22일이야.”
─어떻게 날짜까지 기억을 하십니까.
“바로 다음날이 내가 한보 청문회에 증인으로 끌려간 날이니까. 언론이 아침 6시 뉴스부터 밤 12시까지 나를 ‘나라 망친 놈’이라고 융단폭격을 해대니까 화병이 났어요. 무력증이 오는데 그게 정말 무서워요. 만사가 귀찮아서 시체처럼 한 달 이상 방안에 누워서 지냈어요. 도저히 청문회에 못 나가겠더라고.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저녁에 집사람이 다니던 서교 성당으로 갔어요. 가서 무릎 꿇고 기도를 했어요.”
─성당에 처음 간 분이 어떻게 기도까지.
“하도 답답하니까 저절로 기도가 되더라고.”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
“하느님 감사합니다. 서울대학교에 넣어주시고, 아남산업 공장장을 시켜주시고, 삼성의 전무도 시켜주시고, 안기부 살림을 맡겨주시고. 은총을 주셨는데, 내가 잘 나서 그리 된 줄 알고 오만했습니다. 앞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살 테니 제발 내일 청문회에 나가서 말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한 30분간 그렇게 빌었어요.”
─속으로 그런 기원을 한 겁니까.
“아니지, 절규를 하는 거지. 소리를 내서 중얼중얼하다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좀 나은 것도 같더라고요. 속이 좀 후련한 거지. 밤 10시에 수면제를 먹고 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 와요. 새벽 1시에 다시 수면제를 먹고 4시간쯤 잠을 잤어요. 그리고 청문회에 나가서 기적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겁니까.
“집사람 따라서 성당 두 번 가고 바로 구속이 됐죠. 면회 오신 김종국 신부님이 예비자 교리서를 갖다 주시면서, ‘다 읽고 나오면 세례를 주겠다’고 하세요. 감옥에 두 달 있으면서 교리서하고 구약 성경을 다 읽었어요. 김 신부님이 ‘세례 받고도 남겠다’면서 그해 9월 20일에 세례를 주셨죠. 신앙을 가진 지 만 11년이 됐네요.”
─李在五(이재오) 전 의원처럼 수감생활을 여러 번 한 분들 얘기를 들으면 첫 번째는 멋 모르고 들어가는데 두 번째 들어가는 건 정말 겁나고 힘들다고 하더군요.
“나는 정반대예요. 처음에 들어갔을 땐 정말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구치소에서 오후 5시에 철창 문을 철거덕 잠그는데, 그때 가슴이 무너져 내려요. 1.2평 방에 갇혀서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거지.”
─두 번째 감옥살이(2001년 1월 15일 구속 수감) 때는 어땠습니까.
“6개월을 살았는데 마음이 편한 거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그게 확실하게 느껴지니까, 그러면 여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에 4시간씩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4시간 동안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루에 4시간씩이나 했습니까.
“천주교에는 묵주가 있습니다. 이걸 열다섯 바퀴쯤 돌리면 세 시간이 금방 가요.”
두 번째 수감생활을 하면서, 김기섭 씨는 ‘감옥에서 나가면 감옥살이를 끝내고 출소한 이들을 돕겠다’는 誓願(서원)을 세웠다. 이런 체험이 계기가 됐다.
출소자 돕기를 결심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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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섭 차장과 거리를 걷고 있는 金演光 기자. |
곁불을 쬐는데 교도관이 ‘오늘 70대 노인이 출소하는데 갈 곳이 없다. 참 딱하다’고 해요. 감옥에 두 번째 온 처지에다 내 몸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교도관의 말이 번갯불처럼 내 머리를 때려요. ‘하느님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그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성령이 절 찾아오신 거예요. 그때부터 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를 했죠.”
김 전 차장은 안풍 2차 공판(2004년 7월 5일) 사흘 전에 신비한 신앙체험을 했다고 한다. 명동성당의 성모상 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환하게 빛나는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마음 가득히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너무 기뻐서 가슴이 터질 듯해요. 내 인생에서 체험한 어떤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었습니다. 명동성당 근처의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는데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거예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집사람에게 얘기했더니 ‘성모님이 나타난 건 당신이 법정구속 안 될 징조’라며 좋아해요. 내가 그날 밤부터 사흘 동안 계속 찬송가를 불렀어요. 다른 사람 눈에는 완전히 돈 사람이지.”
2차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그는 곧바로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에서 실시하는 봉사자 교육에 등록했고, 4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3년간 서울구치소에서 재소자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했다.
넓은 인맥을 활용해 출소자에게 직업교육과 취직을 알선해줬고, 자신이 직접 자본금 1억 원짜리 미용재료 회사를 설립해 출소자들을 채용했다. 회사 이름은 ‘신의 가호를’(God blessed)로 지었다. 직원은 현재 17명이다.
한국판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
1년간 쏟아지는 무연고 출소자는 6800여 명. 1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주교 출소자 쉼터인 ‘평화의 집’으론 한계가 있었다. 갈 곳 없어서 再犯(재범)을 저지르는 이들을 위해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제가 교정 사목인 이영우 신부를 도와드렸어요. 신부님도 고민이지, 범죄 안 저지르겠다고 맹세하고 나간 사람들이 금방 또 들어오니까. 제게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 박사가 벌이고 있는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을 우리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세요. 출소자를 위한 무담보 신용은행을 만들자는 얘기였어요. 붕어빵 장사, 바나나 장사 같은 걸 할 밑천을 대주자는 거죠. 제가 기꺼이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2006년 12월 신부님하고 모금을 시작해서 5억 원의 ‘시드 머니’를 모았습니다.”
‘기쁨과 희망은행’은 지난 6월 25일 재단법인으로 출범했다. 후원회의 고문으로는 朴智元(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金學俊(김학준) 동아일보 회장, 吳世勳(오세훈) 서울시장, 金慶漢(김경한) 법무장관, 權寧世(권영세)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위촉됐다.
─고문들 면면이 화려합니다. 박지원 전 실장은 어떻게 고문을 맡게 됐습니까.
“박 실장은 감방 동기예요. 2003년 세 번째 감옥에 갔을 때 제가 서울구치소 16동 1층, 權魯甲(권노갑) 씨가 2층, 박지원 씨가 3층에 있었어요.”
─박지원 씨는 김대중 정부가 끝나고 나서 감옥살이를 계속했는데 동병상련을 느꼈겠습니다.
“저는 박지원 씨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 당시 다들 ‘박지원이는 김대중 정권 끝나면 미국으로 도망갈 거다’고 했는데, 감옥 들락거리면서 끝까지 보스를 보호했잖아요. 나는 의리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남자는 의리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가까워졌죠. 그래서 우리가 ‘부인들을 오전 11시에 면회 오도록 하자’고 약속을 해서 면회 전에 만나 20분 정도 얘기를 했죠.”
─박지원 전 실장이 ‘안풍’ 사건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박지원 씨가 ‘우리 정부에서 그런 일을 당해서 미안하다’ 그러더라고요. 내가 처음에는 물론 화가 나고 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일꾼으로 쓰려고 감옥에 세 번이나 보낸 건데,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할 수가 없는 일이죠. 용서한다는 것은 더구나 말이 안 되는 소리고.”
─강삼재 전 총장도 용서했습니까.
“내가 매일 아침 그분하고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니까.”
─사업을 하려는 출소자 1인당 1000만 원을 3년간 2%의 이자로 빌려주겠다는 계획인데, 사업이 시작됐습니까.
“사전 준비작업이 많이 필요합니다. 人性(인성)교육, 창업교육을 시키고 돈을 줘야죠. 사업계획서를 내면, 그 분야의 사업장에 6개월에서 1년 정도 일을 시킬 겁니다. 이 분들을 채용하는 사업장에서 이들에게 지급하는 월급의 반 정도는 우리가 대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경험을 쌓은 사람에게 자금을 지원할 겁니다.”
─무담보 신용대출인데 회수율이 얼마나 될 걸로 예상합니까.
“회수율이 70% 내외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영우 신부님은 80% 이상 된다고 자신하시는데 내가 볼 때는 70% 정도입니다. 방글라데시의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회수율은 96%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지원을 받을 사람들은 전과자고 대부분 신용불량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용대출해 주는 건 전 세계에서 우리가 처음일 거예요. 이 일은 누가해도 해야 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입니다.”
─김 차장의 지난 11년을 정리하면 ‘권력의 최정점에서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돕게 됐다’가 되겠군요.
“저로서는 영광이죠. 수용자 신세에서 수용자를 위한 봉사자가 됐고, 다시 출소자를 위한 기쁨과 희망은행 사장이 됐습니다. 하느님 기준으로 보면 계급이 엄청 높아진 겁니다. 천국에서 하느님이 ‘너는 인생을 살면서 무얼 했느냐’고 물으시면, 출소자 돕기 운동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작정입니다.”
수감 청소년 돕고 싶어
─다른 활동을 구상하고 있는 게 있습니까.
“수감생활을 하는 청소년들을 도왔으면 해요. 지금 천안교도소에 전과 2범 이상의 18세 소년들이 470명 수용돼 있어요. 그 중 270명이 무연고입니다. 면회 오는 사람도 없고, 영치금 넣어주는 사람도 없고. 가정이 다 깨진 거예요. 이 아이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식탁 위에 음식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우리는 주섬주섬 늦은 점심을 시작했다. 김 차장은 “‘기쁨과 희망은행’의 후원 계좌를 꼭 실어달라”면서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체험한 정치인 경제인들이 출소자들을 돕는 일에 많이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그는 빠른 시간 안에 ‘기쁨과 희망 은행’의 기금 규모를 50억 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나는 조선일보 정치부의 상도동 출입기자로 일하면서 김기섭 전 차장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대학 선후배 사이라 안기부 차장 시절 가끔 만나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신라호텔 상무로 일할 때도 私的(사적)인 모임에서 여러 차례 조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시절 그는 패기만만하고 정력적이었다. 거칠 게 없었다. 지난 11년 ‘피고인 김기섭’은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지병인 안면 근육마비로 인해 얼굴이 비틀린 모습으로 감옥과 법정을 들락거렸다. 이번에 만난 ‘신앙인 김기섭’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고, 활기가 넘쳤다. 기업과 정치에서뿐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그가 고속 승진을 계속 이어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 : 이태훈
「기쁨과 희망은행」후원회 계좌
우리은행 1005-301-263350
천주교사회교정 사목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