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효진의 캄차카기행 - 곰과 눈과 화산의 나라 : 월간조선

지난 5월, 캐논社(사)의 초청으로 캄차카에 다녀왔다. 내가 캄차카에 가게 됐다고 하니까 사진을 같이 찍는 친구 하나가 불쑥 “곰이나 한 마리 잡아와”라고 했다. 사실 그렇다. 세계 불곰의 20%인 1만 5000마리가 그곳에 살고 있고, 인간이 그들에게 터전을 양보해서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도 곰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곳이니까. 그런데도 나는 이번 여행길에 곰을 만나지 못했다.

캄차카의 5월은 우리에겐 아직도 겨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1년의 절반이 겨울인 곳이니까. 사전답사를 하고 온 캐논사 직원이 “날씨가 장난이 아니니 꼭 방한복을 챙겨 오라”고 했다. 나는 “에이, 5월인데 설마…” 하고 얇은 옷을 입고 갔다가 정말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눈이 자그마치 2m는 족히 쌓여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캄차카 반도.

차를 타고 산길을 가다가 눈이 수북이 쌓인 밖을 내다보며 안내인 따냐(28)에게 물었다.

“저런 데 곰이 없어요?”

따냐는 우리나라에 와서 2년간 모 여대 한국어학당에서 우리말을 배우고 돌아가 번역을 하면서, 짬이 나면 가이드 일도 한다고 했다. 한국말을 곧잘 했다. 따냐는 내 질문을 듣고 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얼른 나를 건너다봤다.

“안 돼요! 사람 먹으러 나와요.”

러시아인이 눈을 맞으며 샤슬릭을 굽고 있다.

곰을 보려면 헬리콥터를 타고 멀리 나가야 하고, 곰이 달려들 것에 대비해서 가스총으로 무장한 사람이 뒤에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탐사여행에서는 곰을 만나러 가는 일정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密獵(밀렵)이 있는지, 우리 일행이 냇가에 잠시 쉬었을 때 러시아 사람이 나한테 총으로 곰 잡는 시늉을 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가 하면 캄차카는 화산과 눈의 나라였다. 세계 화산의 10%인 300여 개가 이곳에 몰려 있고, 그 가운데 29개가 아직도 불을 뿜고 있다. 그래서 1996년 유네스코는 이곳 화산지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놓았다.

캄차카는 또 연어의 고장이다. 그러나 연어도 7월이 돼야 본격적으로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그때 곰들도 겨울잠을 자느라고 굶주린 배를 연어로 채운다고 한다. 그땐 구태여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도 먹을 게 지천이니까 근처에 다가가도 비교적 안전하다고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같은 운명을 걷고 있는 코랴크인들의 민속무용. 갈매기춤을 추고 있다.

거침없는 젊은이들

이번 탐사여행은 카메라 메이커 캐논사가 창립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선일보와 함께 사진 마니아 70명을 초청해 5박 6일의 일정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스태프까지 합치면 80여 명이나 되는 대부대였다.

80여 명의 탐사단은 A조와 B조로 나누어 서로 다른 일정을 이틀씩 소화했는데, 캄차카에서 보낸 4일 중 처음 이틀은 날씨가 좋았고, 뒤의 이틀은 눈이 아주 많이 왔다. 나는 B조에 속해 있어서 처음 이틀 동안 휴화산 근처를 왔다 갔다 했고, 뒤의 이틀간엔 활화산이 있는 산장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그러다 보니 휴화산은 구경도 잘 하고 좋은 사진도 많이 찍었지만, 막상 활화산은 눈보라 때문에 눈 구경만 하고 그냥 내려와야 했다.

눈 위를 달리는 일본제 雪上車(설상차).

인천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하고 있는데, 어떤 젊은이 하나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아, 제3세계 비행기 오랜만에 타는구나!”

우리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에어를 타고 가게 됐는데, 그는 러시아를 제3세계로 분류해 버린 것이다. 그의 눈엔 냉전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가 개발도상국으로 보였던 것 같다.

캄차카 공항의 출구. 문밖으로 나가 오른쪽 건물에서 짐을 찾는다.

우리 탐사팀은 20~30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밝고 자신에 차 있었으며 언제나 즐겁게 재잘댔다. 그리고 늘 바쁘게,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진을 찍는 데도 꼭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무 것이나, 줄기차게 찍어 댔다. 필름 값이 아까워 발발 떨며 셔터를 누르던 우리들과는 아주 다른 인종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지나가는 말로 “나는 오늘 1000컷 찍었어”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는 “어, 그래? 나는 1500컷 찍었는데” 했다. 내 입에선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와아, 무섭다 무서워!”

러시아에도 과거 적국이었던 미국의 상품들이 판을 치고 있다. 활력이 넘치는 젊은 코카콜라 모델의 표정과 무언가 지쳐 있는 러시아 할머니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1500컷이라면 36장 필름으로 40롤이 넘는다. 다행히 디지털 메모리를 쓰니까 그렇지 필름 값으로 따지면 이건 또 얼만가. 내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할 때였다. 당시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25일간을 함께 생활하면서 月刊朝鮮(월간조선)에 게재할 <인간탐험>을 취재했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정주영 회장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대니까 그가 참다 못해 사진기자에게 한마디 했다.

“이봐, 한두 장 쓰고 말 걸 뭘 그렇게 많이 찍어. 그거 다 외국서 돈 주고 사오는 거 아냐. 그래 얼마나 찍었어?”

사진기자가 좀 계면쩍어하면서 말했다.

“한 300장 찍었습니다.”

정 회장한테선 단박 이런 말이 돌아왔다.

“그것 봐. 그렇게 많이 허비했잖아!”

전망대에서 본 캄차스키 시내의 아파트와 화산.

입국심사에 1시간 20분 걸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블라디보스토크 에어 안에서 우리 일행을 제외하곤 아무도 떠들거나 웃는 사람이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하나같이 한창시절이 지난 스튜어디스들도 웃지 않았다.

슬라브인들은 왜 웃지 않는 것일까. 나는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계속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봤다. 그들은 왜 반가운 표정을 짓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고, 환하게 웃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호텔에서도, 상점에서도, 거리에서도, 식당에서도 활짝 핀 꽃처럼 환하게 웃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오랫동안의 공산 통치에 길들여져서 그런가, 아니면 고달픈 생활에 지쳐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극동의 쪼끄만 놈들이 옛날엔 굽실굽실하더니 요즘 제법 산다고 젠체하고 다니는 게 아니꼬워서 그런가.

9시 25분에 인천공항을 떠나 겨우 한 시간쯤 지났는데 벌써 점심이 나왔다. 시차가 두 시간이니 12시가 넘은 것이다. 엉성한 도시락이 나왔다. 샌드위치, 케이크, 롤빵. 참고 먹을 만했다. 우리나라 비행기에서 먹는 기내식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플라스틱으로 만든 엉성한 나이프와 포크를 보면서는 인천공항에서 젊은이가 제3세계 운운하던 생각이 났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해서 ‘여기가 러시아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작은 기체에 붉은 글씨로 고려항공이라고 써 붙인 비행기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공항청사가 코앞인데도 굳이 타고 가라고 낡은 버스를 들이대서 그놈을 타고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대합실 같은 방에 들어서니 ‘뜨란지트(Transit)’라고 한글로 쓴 북한말이 보였다. ‘맞다, 여기가 러시아지.’

우리는 거기서 또 한 번 러시아를 실감했다. 66㎡(20평)도 안 될 것 같은 입국심사장에 우리를 가둬 놓다시피 몰아넣고 한 사람 한 사람 심사를 하는데,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서로 말을 모르니까 물을 일도 없고 답변할 일도 없는데 세 군데나 거치며 도장을 받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걸렸다. 그 바람에 캄차카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가 한 시간 이상 출발이 늦어졌다.

캄차카의 풍뎅이車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같은 항공사의 국내선 여객기로 갈아타고 캄차카의 州都(주도)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스키의 예리제보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간으로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또 두 시간의 시차가 났다. 우리나라와 따진다면 4시간의 시차가 있는 셈이었다. 인천에서 두 차례에 걸쳐 6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가서, 우리나라에서 동북쪽 끝에 있는 베링해의 코에 도착한 것이다.

공항에 내리면서 나는 또 몇 가지 상식을 깨는 일을 겪어야 했다. 우선 출구가 놀라웠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려서 버스 같은 것을 타지 않고 그냥 걸어서 문 밖으로 우우 걸어 나갔다. 공항의 문은 시골학교 교문 정도의 크기에 높이만 좀 높았고, 그 위엔 무슨 아치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 문을 걸어서 나가니 그대로 공항의 앞마당이었다. 또 한참 뒤에 그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오두막에 가니 비행기에서 꺼내온 짐을 내주고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아온 아날로그 같은 세상에서 경험한 일 같아 친숙하게도 느껴졌다. 우리는 공항 하면 큰 청사가 있고, 엑스레이 검색대가 있고,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야 될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막상 이런 시골역 같은 소박한 공항을 만나고 보니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아, 공항이 이럴 수도 있는데 괜히 우리는 큰 것만 생각했잖아’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항 앞마당에서도 놀라운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밤 10시가 훨씬 넘었는데도 하늘이 훤했다. 마당 한 옆에는 아주 이상한 차 세 대가 서 있었다. 우리들이 계속 타고 다닐 차라고 했다. 바퀴의 높이가 우리 가슴까지 올라오는 덜름한 차였는데, 그 위에 버스 같은 좌석이 놓여 있고 탑이 씌워져 있었다. 이걸 보자 젊은이들은 참 좋은 사진거리를 만났다는 듯이 사정없이 셔터를 눌러 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차는 러시아의 까마즈 트럭에 탑을 씌우고 좌석을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했다. 영어로는 오프로드(Off Road)라고 했다. 캄차카의 험한 길을 다닐 수 있도록 특별히 개조한 차였다. 우리는 이 특별한 차를 타고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됐다고 내심으로 좋아했지만, 다음에 올 정말 특별한 경험을 생각하면 좋아하기엔 너무 성급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그 이상한 버스를 금방 ‘풍뎅이차’라고 명명했다.

우리 일행이‘풍뎅이차’라고 불렀던 트럭을 개조한 버스. 그러나 쿠션이 부실해 멀미가 났다.

1㎢당 1명 살아

밤 11시쯤에 풍뎅이를 타고 이름이 아주 길어서 기억하기 힘든 도시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스키로 향했다. 이 도시가 이런 이름을 가진 데는 유래가 있다. 1741년 러시아의 전설적인 탐험가 베링이 당시 女帝(여제) 안나의 명을 받아 聖(성) 바오로라고 하는 배와 성 베드로라고 하는 배 두 척을 이끌고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해서 여기 이름을 페트로파블로프스크라고 했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도시가 모스크바 근처에도 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이 고장의 이름 하나를 더 붙여서 이렇게 긴 이름이 됐다고 한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넓은 땅과 적은 사람들이다. 통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캄차카 반도의 면적은 우리 한반도의 두 배가 넘는 47만 2300㎢나 되는데도, 인구는 고작 47만여 명밖에 안 돼 인구밀도가 1㎢에 1명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인구의 절반 이상이 州都(주도)인 캄차스키 근처에 모여 살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농토도 이 근처밖에 없다. 그러니 아직도 드넓은 빈 땅에 천혜의 관광자원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셈이다.

우리가 저녁을 밤 12시에 먹었다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다. 한적한 시골의 식당 같은 곳에서 연해주 지방의 전통 요리 샤슬릭을 먹었다.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큼직큼직하게 토막 내 썰어서 소금에 하루 동안 절였다가 쇠꼬챙이에 꿰어 구운 것이다. 벌건 장작불에 구우면서 타지 않도록 보드카를 물에 타서 뿌리면서 굽는다. 짭짤한 것이 먹을 만했다. 처음엔 그랬지만 그 후에도 전통 요리라고 자꾸 내오니까 떠날 때쯤엔 물려서 고추장 생각이 간절했다.

둘째 날 아침에 우리는 처음으로 웃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빌리첸스크 화산으로 가는 길에 들 가운데서 市場(시장)을 만났다. 농사용 비닐도 팔고 간단한 생필품도 파는 곳이었다. 현지 여성 가이드에게 물으니 시장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나무를 파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목재를 파는 곳이 많았다. 가이드는 시장 이름을 확실하게 대답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여기는 이름이 없는 곳이 많아요. 사람 사는 곳이 별로 없으니까요. 다차(주말농장)도 12㎞ 다차, 15㎞ 다차, 이렇게 도로 이정표의 숫자를 붙여서 말해요. 우리가 약속을 할 때도, 21㎞에서 만나자, 그래요. 그 이정표 앞에서 만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시장을 끼고 오른편으로 돌아서 넓은 밭으로 차를 타고 들어갔다. 아무 것도 심어져 있지 않은 빈 밭이었다. 말라붙은 풀만이 누렇게 빈 밭을 덮고 있었다.

잠시 후 코랴크 민속무용단 8명이 도착했다. 여성 5명, 남성 3명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그 중 나이 많고 키가 작은 여성이 단장 격으로 해설을 해 주었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아, 몽골리언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대뼈가 나왔고, 눈이 갸름했다. 몇 사람은 혼혈의 흔적이 눈가에 보였다. 그들은 이 캄차카의 원주민들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앵글로색슨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에게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빼앗기고, 사막에 가까운 보호구역에 살면서 주정뱅이들이 돼 버린 것처럼, 그들도 북쪽 추운 곳에 몰려 살면서 이런 일로 입에 풀칠을 하는 것 같았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코랴크인들이 관광객들 앞에서 민속공연을 하고 있다.

캄차카의 몽골리언 코랴크人

그들은 사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춤을 추었다. 갈매기의 날갯짓과 우는 소리를 영락없이 흉내 내며 추는 갈매기춤, 사슴 가죽으로 옷을 만드는 시늉을 하는 길쌈춤, 총알을 잊어버리고 사냥터에 간 사냥꾼이 당황하는 모습을 그린 사냥춤…. 무용수들은 소리와 모습을 익살스럽게 흉내 내며 춤을 추었고,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간단한 악기로 박자를 맞춰 주었다.

그들이 가지고 나온 악기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생긴 모습이 징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북과 장구와 징을 합쳐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소리는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약했다. 그런데도 그 리듬과 박자가 우리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리 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의 사물놀이 팀과 코랴크인들이 흥에 겨워 함께 춤을 추며 연주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가락에는 우리 민족의 음악에서 새어 나오는 恨(한)이 없다. 공연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밝다. 모두 흥에 겨워 신이 나서 춤추고 노래했다. 레퍼토리도 일부러 즐거운 것들만 골라서, 또 관광객들을 위해서 즐겁게 공연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캄차카에서 가장 슬퍼야 할, 아니 틀림없이 슬프기 한량이 없을 사람들인데도, 캄차카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들인 것처럼 활짝 웃으며 춤을 추었다.

나에겐 그런 그들이 괜히 측은하게 보였다. 그들은 적어도 1만 5000년 전쯤 아득한 옛날에 몽골리언의 고향 바이칼 湖(호) 주변을 떠나 우리와 함께 동으로 동으로 옮겨온 형제들임에 틀림없다. 몽골리언들은 동북아시아까지 함께 와서 일부는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고, 일부는 남쪽 한반도를 향해 내려왔던 것이다.

최근의 연구들은 몽골인, 티베트인, 한국인, 일본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다 같은 그룹의 인종으로 보고 있다. 이런 것으로 보면 그들은 우리 민족과 동북아시아에서 헤어져 아메리카 대륙 쪽으로 가다가 캄차카에 남아 살게 된 몽골리언인 것으로 보인다.

코랴크인들은 캄차카 반도의 북쪽 추운 지방에 8000여 명이 모여 살고 있다. 이 숫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 이전인 17세기 후반 인구의 절반에 불과하다. 지배자들의 착취와 학대를 견디는 일도 힘들었을 테지만, 舊(구)소련의 핵실험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엄청난 방사능이 그들의 생활터전과 먹을거리를 오염시켜, 그들에겐 다른 러시아인들보다 백혈병, 각종 암, 기관지염 같은 질병의 발병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러시아인 가이드는 내 옆에 와서 조그맣게 영어로 이런다.

“코랴크인들은 사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데, 옆에 오면 이상한 냄새가 나요.”

이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코랴크의 언어도 점점 사라져 간다고 하니 걱정이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슬라브인을 비롯한 다른 종족과의 결혼도 한몫 한다고 한다.

천하무적 풍뎅이車

오후엔 천하무적 까마즈 개조버스를 타고 눈밭을 달려 빌리첸스크 화산을 찾아갔다. 눈이 녹은 비포장도로를 조금 달리니까 엄청난 눈밭이 나왔다. 산도 아니고 길도 아닌 눈밭을 풍뎅이는 덜컹덜컹하면서, 비틀대다 못해 바다에서처럼 롤링과 피칭을 해 가면서 엉금엉금 기어가는데, 가는 것도 천하무적이었지만 사람을 휘두르는 것도 천하무적이었다. 그렇더라도 빨리 달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누가 계산한 건지 모르지만 시속 7㎞로 달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이 빨리 걷는 정도의 빠르기밖에 안 됐다.

이 풍뎅이의 惡名(악명)을 미리 안 친구들은 재빨리 키미테(멀미약)를 붙이고 있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한 모양이었다. 나는 멀미에 강한 편이어서 참을 만했지만, 그것도 오래 계속되니까 속이 메스껍다 못해 점심으로 차 안에서 먹은 김밥이 올라올 것 같았다. 내 옆엔 캐논에서 나온 것 가운데 제일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썩 좋은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여주곤 하던 엄영수 목사가 타고 있었는데, 멀미를 어찌나 하던지 비닐 봉투를 입에 대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풍뎅이는 날지 못하고 기어만 갔는데, 그것도 덜컹덜컹하다가 푸드득 엔진이 꺼지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또 간이 콩알만 해져서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그러면서 안 사실인데, 제기랄 풍뎅이엔 쿠션장치가 없었다. 에어 서스펜션은 그만두고 스프링이라도 있어서 충격을 줄여 줘야 할 텐데, 그런 게 숫제 없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럭에 좌석 20여 개를 얹어 놓은 것이니까.

아바찬스키의 산장. 너무 추워 잠을 못 잤다.

광야의 화장실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관광(?)을 하고 있는데, 차창 밖으론 러시아인들 몇 가족이 피크닉을 나와 샤슬릭인지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남자들은 눈밭에서 웃통을 벗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또 육체가 풍만한 어떤 여성은 끝없는 눈밭에서 스키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에겐 눈밭에서 멀미를 하며 불꽃도 타오르지 않는 화산을 찾아가는 우리가 좋은 관광거리였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세 차례나 쉬며 쉬엄쉬엄 가야 했다. 생리현상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도무지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법하다. 인구밀도가 1㎢에 한 명도 안 돼 사람 그림자를 보기 힘든 땅에 어떤 미친 사람이 공중화장실을 지어 놓는단 말인가.

공항에 처음 도착해서 시내로 들어올 때 가이드 따냐가 좀 마음에 걸렸던지 넌지시 말했다.

“여기는 화장실이 많이 없어요. 또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요. 나는 한국 가서 놀랐어요. 화장실이 깨끗하고 휴지가 다 있었어요. 여기는 그런 화장실 없어요.”

나는 벽지 여행을 좀 한 편이라서 따냐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러나 地形地物(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없는 허허벌판 눈밭에서 남녀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급한 일이 생겼을 때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경험한 바가 없었다. 그때 따냐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남자부터 차 뒤로 가세요!”

우리가 훈련병 때처럼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따냐는 손짓을 하며 또 말했다.

“여자들 가세요!”

어려운 일은 너무 간단하게 해결됐다. 그러나 어떤 여학생 하나는 이때 곰이 나타나면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 사진을 찍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빌리첸스크 화산

빌리첸스크 화산.

마침내 우리는 천하무적 풍뎅이차를 타고 惡戰苦鬪(악전고투) 끝에 빌리첸스크 화산 근처에 도착했다. 와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눈앞에 일대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온 산과 들이 푸근한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인 가운데 우뚝 솟은 빌리첸스크 화산이 점잖게 앉아서 우리들의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휴화산이라고 했는데도 웬일인지 꼭대기에선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뿜어져 나와 그림을 더욱 멋지게 만들었다. 꼭대기의 눈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거나 흰 구름이 지나가다 걸린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화산 주변도 풍경화를 더욱 돋보이게 꾸며 주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눈 가운데 시내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 <뽀로로>처럼 환상적이었다. 냇가와 산록의 자작나무들도 잔 붓으로 칠해 놓은 것처럼 제자리에 적당히 배치돼 있어서 사람 눈을 홀리고 있었다.

이런 멋진 풍경을 보자 풍뎅이에 시달린 한나절의 고역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멀미하느라고 정신이 없던 엄 목사도 어느새 튀어나가 반팔 티만 입고 펄펄 뛰어다니며 이젠 사진을 찍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젠 나도 젊은이들을 따라, 寫眞三昧(사진삼매)에 빠져 꼭 미친놈처럼, 사진 못 찍어 한이 된 사람처럼, 사흘 굶은 뒤에 맛있는 잔칫상을 만나 걸신 들린 사람처럼 탐욕스럽게 셔터를 눌러 댔다. 그렇게 한참을 찍다가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맞아. 내 사진을 찍어야지.’

나는 서서히 심호흡을 하고 내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雪中山川(설중산천)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골라 찍는 것도 재미 중의 재미였다.

우리는 또다시 털털거리고 미끄러지며 간 길을 되돌아와 좁은 호텔 방에 몸을 맡겼다. 우리가 묵었던 아바차 호텔은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했다. 그런데 옹색하기가 일본 호텔 저리 가라였다. 그런데도 숙박비가 하룻밤에 우리 돈으로 26만 원이나 했다. 누가 “서울의 신라호텔 숙박비보다 비싸다”고 했다.

그런데도 여름이면 관광객으로 꽉꽉 차서 방을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혼자 생각에, 머리 좋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여기 와서 호텔을 짓지 않을까 했더니, 벌써 우리 기업의 리조트 건설 사업이 착수됐다고 한다. 내년쯤이면 말도 잘 통하고 서비스도 좋은 방에서 자면서 곰도 보고 연어도 실컷 먹을 수 있겠다.

캄차스키의 한국 시내버스

이곳 사람들의 아파트는 밖에서 보기에는 많이 낡아서 혹시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보면 다들 깨끗하게 잘들 차려 놓고 산다고 한다. 벽도 40㎝나 돼서 겨울에도 춥지 않다는 것이다.

이곳은 위도상으로 보면 엄청 추울 것 같은데도 사실은 훨씬 남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따뜻하다고 한다. 눈이 많이 와서 한겨울에도 그렇게 혹독하지는 않고, 대체로 블라디보스토크보다 섭씨 5도 정도는 높다고 한다.

시내엔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었다. 야트막한 전망대 위에 올라가 보니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붉은 지붕을 이고 있는 번듯번듯한 집들도 보였다. 가이드가 “그곳엔 이 지역의 관리들이 살고 있다. 바로 옆 다닥다닥 붙은 게딱지 같은 집들엔 가난한 시민들이 산다”고 빈정거렸다. 정치인들이 불신을 받기는 여기나 우리나 마찬가지 같았다.

주택들 가운데엔 러시아 전통주택이 간혹 보이기도 했지만, 빈 집이 많았다. 전통주택이 많이 모여 있는 마을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우리 식으로 치면 달동네 같은 곳이었다. 우리 일행 40여 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시커먼 카메라를 메고 골목골목 쏘다니며 철컥대니까, 할 일이 없어 졸던 동네 개들이 일시에 짖어 댔다. 그 소리를 듣고 또 할 일이 없어 빈둥대던 동네 사람들이 집집마다 쏟아져 나와서 이게 웬일인가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리를 살펴봤다. 우리는 이러다 몰매 맞겠다 싶어 얼른 자리를 떴다.

거리엔 우리나라에서 온 중고차들이 활보하고 다녔다. 특히 버스들은 우리나라 시내버스의 노선번호와 행선지를 그대로 달고 다니기도 했다. 한글이 씌어 있어야 좋은 차로 알기 때문에 일부러 그러고들 다닌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들어온 것인지 모르지만 코카콜라를 비롯한 미국 상품의 선전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깊은 산속의 대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빌리첸스크).

雪上車를 타고

우리는 이튿날 아바찬스키(2741m) 화산을 찾아 또 고난의 역정을 시작했다. 호텔을 떠날 때는 풍뎅이를 타고 불꽃과 용암이 펑펑 솟아오르는 화산을 그려 봤다. 그래도 길 같은 길을 30여 분 달리더니 이놈의 풍뎅이가 또 길도 아니고 내도 아닌 곳을, 힘자랑을 하며 덜컹덜컹 달렸다. 엄 목사는 이번엔 키미테를 붙이고 나서도 못 미더웠는지 한 손에 비닐 봉투를 쥐고 있었다.

이번엔 영어로 안내하는 또 다른 가이드 나타샤가 동승했다. 알고 보니 이 아가씨는 우리 일행의 여행을 패키지로 맡은 현지 여행사의 공동사장이었다. 나타샤는 풍뎅이가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 밖을 가리키며, 여기가 ‘마른 강’(乾川)이라고 알려 줬다. 6월엔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강처럼 되지만 여름엔 말라 버려 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갔을 때도 눈이 녹아 내리기 시작해서 아래쪽엔 물이 제법 줄기 져서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한 시간 가까이 달렸는데 마른 강은 그야말로 눈이 수북이 쌓인 눈의 강으로 바뀌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또 다른 경험을 했다. 눈밭에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차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탱크 같기도 했고 불도저 같기도 했다. 바퀴 대신 폭이 아주 넓은 철제 캐터필러가 달려 있었고, 그 위에 소형 버스 같은 객실이 얹혀 있었다.

또 누군가가 雪上車(설상차)라고 부르는 바람에 제꺽 이름이 돼 버렸다. 문짝에 한자가 씌어 있어 운전기사에게 “중국제냐”고 물으니, 무뚝뚝하게 “재팬” 한다. 그러고 보니 그냥 한자가 아니라 일본의 도시 이름(新井市)이 씌어 있었다. 이것도 우리나라에서 온 중고 버스처럼 일본에서 쓰던 중고차가 수입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설상차는 우리를 싣고 활화산 근처 산장을 향해 달렸다. 차의 양 옆으론 캐터필러에서 튕겨져 나온 눈덩이가 솟아올라 흡사 물보라 같았다. 펀펀한 눈밭을 달리는 것이라서 풍뎅이처럼 흔들리진 않았으나 이번엔 역시 속도가 문제였다. 정말 사람이 걷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저녁때가 넘어서야 겨우 산장에 닿았다.

산장에 도착했을 땐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녁식사로 러시아인들이 눈보라를 맞으며 구운 샤슬릭이 나왔다. 식사 후에 방 배정을 했는데 이때 나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산장은 두 동이었다. 아래쪽에 있는 산장엔 식당이 딸려 있어 본부로 쓰였다. 거기서 20여m 위쪽에 또 한 동의 산장이 있었다. 두 동 다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이었다.

밤새 추위에 떨다

행사를 진행하는 스태프들이 방 배정을 했다. 다들 6명 이상이 한 방을 쓰도록 배정받았다. 그러나 나와 내 룸메이트 김영준 씨만은 위쪽 별장의 2층에서 2명이 자도록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나는 이런 데까지 와서 연장자에 대해 각별하게 배려해 주는 주최 측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고마움을 보냈다. 그리고 나의 룸메이트에겐, “나 때문에 덕 본 줄 알라”고 넌지시 말해 뒀다. 그랬더니 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씩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인간은 참 한없이 어리석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나는 캐논사가 서울에서부터 준비해 간 침낭을 타 가지고 위쪽 산장 2층으로 가서 배정받은 방을 둘러봤다. 썩 훌륭했다. 방도 널찍했고 침상도 넓어서 네 사람이 자도 좁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보단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눈이 와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갈수록 방안이 더 추워져서 몸이 잔뜩 오그라들었다. 새우처럼 꼬부리고 잠을 청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침낭에서 빠져나와 옷을 더 껴입었다. 엄 목사가, 내가 추위를 많이 타는 걸 알고 자기 교회 권사가 챙겨 준 거라면서 나한테 방한복 내피를 빌려주었는데, 그것도 껴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캐논사가 단체복으로 지급해 준 25만 원짜리 점퍼도 입었다. 이러고 다시 침낭 속에 들어가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웬걸, 발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지고 가슴이 덜덜 떨려 와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시 기어나와 연통 근처로 가봤다. 우리 방엔 아래층에서 올라와 지붕으로 가는 연통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방을 통과하는 연통의 길이가 70㎝ 정도는 됐다. 그게 이 방을 덥히는 난방기구의 전부였다.

연통 덕을 좀 볼까 하고 손을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니, 싸늘했다. 초저녁엔 미지근하더니, 아래층에서 자는 러시아인들이 잠이 들면서 난로를 껐는지 연통이 사람 덕을 보려고 했다. 내가 이러면서 보니까 룸메이트 영준 씨도 뒤척뒤척하며 잠을 못 이뤘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나는 이렇게 침낭 속을 들락날락하며 추위에 시달렸다. 창 밖에서는 눈보라가 수평으로 몰려와 사정없이 유리창을 때렸다. 이런 판에 또 소변이 보고 싶어 문을 여니 문 앞에 눈이 쌓여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도 눈이 쌓여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화장실로 가는 길에 눈이 수북이 쌓여 길이 끊어져 버렸다. 이런 델 왔다 갔다 하며 떨다 보니 날이 밝아 왔다. 나는 속으로 ‘다시는 이런 데 따라다니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캐논사 초청 캄차카 탐사팀의 멤버들이 눈이 오는 속에 트레킹을 하고 있다(아바찬스키).

라면 한 그릇에 분노 사라져

새벽에 젊은 영준 씨도 추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면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다른 방에선 어떻게 잤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다 마찬가지겠지’ 하고 바보처럼 다른 사람들 걱정을 했다. 그런데 영준 씨가 잠시 후 돌아오더니 뜻밖의 소리를 했다.

“어어, 다른 데선 더워서 잠을 못 잤다는데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아래층에 있는 넓은 방에 가 봤다. 사실이었다. 다들 얇은 티만 입고 있었다. 난로에선 방금 전까지 불이 활활 타올랐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본부로 쓰이는 산장으로 내려가서 다른 동료들의 방에도 가 봤다. 다들 윗옷을 벗고 있었다. 그걸 보자 금세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저희들은 더워서 옷을 벗고 자면서 우리 둘만 이런 고생을 시키다니! 이거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인 거 아닌가!

나는 말 그대로 분기탱천해서 어제 방 배정한 사람과 한판 붙을 심산으로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내 이젠 캐논 아니라 캐논 할아버지가 가자고 해도 안 따라다닌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다들 컵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먹는 일이 급해선지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나도 화를 내는 일보다 라면 냄새에 구미가 동해 컵라면 하나를 받아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라면발을 입에 넣는 순간 그만 분한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며칠 동안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다가 칼칼하고 짭짤하고 매콤한 라면이 입으로 들어가니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아, 대한민국!”

라면을 몇 젓가락 더 떠넣으면서 순간적으로 미움이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아니, 캐논 사람들이 이걸 서울에서부터 싸 들고 온 거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시 화를 못 참았던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꽁꽁 얼었던 속도 금세 풀려 훈훈해졌다.

눈은 줄기차게 계속 내렸다. 현지 여행사 직원들과 스태프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길이 끊겨 헬기로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설상차와 풍뎅이를 갈아타고 시내로 귀환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주 멋진 촬영거리를 놓친 것이다. 눈 쌓인 산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놓쳐 버린 것이다. 눈이 얼마나 억세게 오는지 화산을 코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A조가 이곳에 왔을 때는 날씨가 좋아서 이 화산뿐만 아니라 야생여우도 찍고, 일출도 찍었단다. 우리 팀은 저녁에 눈보라 속에서 트레킹을 했을 뿐이었다.

풍뎅이車 한 대에 1억 원

돌아오는 길엔 현지에 살면서 우리 일정을 주선한 이규열 사장과 동승했다. 그는 풍뎅이의 관리인이기도 했다. 이 사장한테서 풍뎅이 얘기를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저게 보통 차가 아닙니다. 정말 천하무적입니다. 겨울엔 눈밭도 잘 기어 올라가고, 여름엔 비가 오는 속에서도 험한 산길을 잘도 갑니다. 저거 없으면 여기서 장사 못합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저거 빌려 타고 산속도 가고 바닷가도 가고 해요. 하루 임대료가 우리 돈으로 60만 원에서 80만 원까지 합니다. 캄차카에 저런 차가 13대 있는데 우리가 최신식 3대를 가지고 있어요. 저거 만들어 놓고 이번에 처음 영업하는 겁니다. 우리는 배도 한 척 가지고 있고 스노모빌도 10대나 가지고 있어요.”

―이걸 개조하는 데 힘 좀 들었겠네요.

“말도 마세요. 모스크바 까마즈 공장에까지 가서 특별히 주문해서 가져온 겁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기차로 한 달, 거기서 캄차카까지 배로 1주일이나 걸려서 싣고 온 겁니다. 한 대에 1억 원씩 들었어요. 냉난방 시설, 위성전화 이런 거 모두 특별히 주문해서 만들어 붙인 겁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면 위성전화가 꼭 있어야 되거든요.

그뿐입니까. 여기 와서 재조립을 했어요. 멀쩡한 새 차를 죄 뜯었다가 다시 맞추는 겁니다. 러시아 차들은 트럭이든 버스든 재조립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기엔 이해가 안 가죠. 나도 처음엔 안 믿었어요. 그런데 새 차를 뜯어 놓고 그걸 보고 놀랐어요. 세상에, 바퀴에 그리스가 없는 겁니다. 그리스가 기름통에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한 숟갈밖에 안 붙어 있어요. 바닥을 뜯어 놓고 보니까 구멍이 숭숭 뚫려서 먼지가 다 들어오게 돼 있어요. 볼트 너트 이런 거 다 다시 조이고 기름 치고 하는 데 또 한 달이 걸렸어요.”

―러시아 젊은 여자들이 다 예쁘고 옷도 잘 입고 다니는데 봉급은 많이 받습니까?

“러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정말 잘 모르겠어요. 영어 좀 하고 괜찮게 일하는 여자들이 우리 돈으로 80만 원쯤 받거든요. 그런 여자들이 1000만 원짜리 모피 코트를 입고 다녀요. 남자들은 그보다 조금 더 받는데 그러면서도 4000만 원짜리 日製(일제) 중고 지프를 몰고 다니거든요. 말로는 공산주의 시대에 장판 속에 감춰 둔 달러가 많아서 그걸 지금 쓴다는데, 글쎄 잘 모르겠어요. 조그만 오이 한 개도 2000원 합니다. 그런데도 여기 사람들 그럭저럭 삽니다.”

“연어잡이 석 달 하면 1000만 원 벌어”

―여기 주민들은 주로 무얼 하고 삽니까?

“연어잡이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여름 석 달 일하면 1000만 원 정도 버니까요. 선원들이 많이 삽니다.”

캄차카 공항에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에어를 타고 갈 때의 역순으로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비행기가 공중에 솟아오르자, 蛇行川(사행천)의 모습이 교과서의 그림처럼 드러난 연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캄차카를 떠나며 또 다른 의욕이 샘솟았다. 여름에 다시 오자. 곰하고 악수도 하고, 연어 알도 나누어 먹자. 낮에는 수두룩한 간헐온천을 보며 노닐다가 밤에는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고 쏟아지는 별을 손으로 받자. 또 있다. 화산지대에 가서 서서히 흘러내리는 용암 위에 커피를 끓여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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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효진의 캄차카기행 - 곰과 눈과 화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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